대전강의

십자가9강-성령의 물방울

아빠와 함께 2022. 6. 29. 09:50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9강) 사도행전5:3(성령의 물방울) 20220627b
(강의:이근호 목사)


35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사도행전 5장 이야기 언급돼 있지요. 사도행전 5장에 성령님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다 성령의 주도 하에 이뤄집니다. 성령이 계신다는 말을 이해 쉽게 하려면 그냥 주님이 여전하다, 이래 이해하면 돼요. 주님 가시고 성령 오신다는 게 아니라 그 주님이 함께 있네. 그때는 시공간의 제한이 있지만 시공간 제한 없이 주님은 제자들과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하늘에 구름이 있고 땅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아요. 바짝 말랐잖아요. 지금처럼 구름이 갑자기 시커멓게 먹구름이 되면서 비가 떨어져요. 그러면 빗방울이 있잖아요. 빗방울은 원래 어디 있던 겁니까? 구름 안에 있던 거죠. 사도행전은 이게 사도행전이에요. 주님이 구름이라면 주님의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서 빗방울 되어서 쏟아지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이 사람들은 위에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이걸 성령세례라 합니다. 위에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돼 있어요.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와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에티오피아 내시도 마찬가지고. 성령세례 받을 때 뭐냐 하면 소나기에요. 위에서 하늘에서 오는 소나기, 영의 소나기. 영의 소나기 장마 한 번 맞아보실래요. 시원하게 영의 소나기에 속하는 겁니다.

속하게 되면 원래 땅에 된 사람은 영의 소나기가 되게 했던 예수님이 구름이고 거기서 쏟아진 방울들이 성도잖아요. 성령 받은 이방인이든 사도든 성령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구름은 인간세계에서 추방을 시킨 분이잖아요. 추방시킨 이유가 이 땅의 생리와 안 맞는다고 죽여서 무덤에 묻히게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구름의 속성이 인간들은 이미 생각이 하나가 되었어요. 저분은 이 땅에서 살려두면 안 된다고 일치된 생각에 의해서 배척받은 그분에 속한 빗방울들이 성령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누구 이야기합니까? 우리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해요, 안 그러면 예수님 이야기합니까? 그들이 추방한 미워한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였어요. 너희들이 판정이 잘못됐다. 죽이지 말아야 될 분을 죽였고 건들지 말아야 될 분을 건드렸다. 잘못됐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령 받아서 외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잘못되었다고 지적질하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일이다, 기능이다. 이게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인간과 먹구름 사이의 연결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서러움을 당하고 어떻게 퇴출당했느냐 그 절차를 반복해서 오는 시대마다 매해 매달 그 시대에 새로 등장되는 주님의 빗방울로서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 바울 죽을 때까지. 사도가 군데군데 성령세례 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등장한다는 것, 이걸 사도 바울이 세상에 알리면서 참으로 신기하지, 그지. 너희들 보기에도 신기하지. 어떻게 죽은 예수 이야기하는 사람이 다 등장할까? 자기 자랑질하면 될 텐데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죽은 그 사람 이야기를 이렇게 아주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증거하고 실제로 그 활동을 본인의 결정이 아니고 자꾸 주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 그 내용이 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의 활동 중에서 오늘 뭘 하느냐 하면 거짓말, 거짓말인데 누굴 속이느냐? 성령을 속이는 거짓말이 인간에게서 나온다. 지금 이걸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속인다는 것은 무엇이냐? 속인다는 것은 본인이 남을 속인다는 사실을 본인이 미리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본인이 속인다는 것을 남은 몰라도 본인이 압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인간은 이중성을 발휘하는 재주가 근원적으로 있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내가 나 보기에 이거는 진짜 진심이고 속이지 않았다는 그것이 과연 거짓이 아니냐는 그런 문제에 도달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은 본인이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런 속성과 근성이 나한테 자리 잡고 있지요.

어떤 때는 나는 속일 마음 없어. 진심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이 나왔다 할지라도 그 말하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래도 있잖아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누구냐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나라고 해서 내 의지대로 내가 다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해서 사도가 이야기하기를 너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 해요. 그럼 뭐냐 하면 성령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에게 밉상 받아 떠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는 끝까지 주님께서 책임추궁을 하고자 성령을 보냈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성령께서 활동한 이유가 너희들이 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본성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십자가 그 당시 사건현장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라는 말이 이게 소용없는 말이 되고, 선악과 난 구경도 못했습니다. 선악과 내가 안 따먹었다는 말도 소용없게 만들어요. 성령께서 일을 크게 만들어버려요.

성령께서 주님께서 왜 인류가 마감돼야 되는가, 종말로 처참한 멸망으로 불 심판으로 마감돼야 되는가, 그 이유를 성령께서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겁니다. 이 성령의 일을 누가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지요. 이렇게 안 보고 그냥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너무 구원 받을 걸 기뻐해서 감격해서 그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순교까지 각오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언제? 그때. 지금은 아니지. 그때 그랬다는 거예요.

여기서 시간을 인류의 역사 끝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원동력을 뽑아내야 돼요, 사도행전에서. 그때뿐만 아니고 지금도 사도행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엔진요소를 여기서 정립이 돼야 돼요. 그건 제가 하는 게 아니고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너는 사람이 속이는 게 아니고 누굴 속인다? 성령을 속인다는 거예요.

이 말을 같은 말로 하면 성령은 인간들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기 위해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해서 성령께서는 활동하신다, 이런 뜻이에요. 속임을 당하기 위해서.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취지와 같은 취지에요. 똑같은 취지에요.

그렇게 되니까 우리의 일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지요. 우리의 일상의 일은 누굴 속이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이고 주님을 속이는 일의 반복이다. 이게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속 시원하지요. 괜히 내가 진심을 다하고 열심을 다 안 했고 거짓말했습니다. 거짓말 자체가 내가 규정한 것 이상으로 범위가 넓어져버린 거예요.

내가 거짓말했다는 말은 마치 평소에는 거짓말 안 하고 산 사람처럼 그렇게 행세한 자체가 거짓말이죠. 모든 것이 거짓이에요. 그 한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누가복음 저자와 사도행전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에요. 누가복음 2장 4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님께서 어릴 때 열두 살 쯤 되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월절에 일가친척 다 모여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사해까지 125킬로미터 쯤 돼요. 크기는 갈릴리 바다보다 열배정도 크고요. 이 지역이 갈릴리 지역이에요. 이 지역에 있다고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내려왔어요.

팔레스타인 땅 말고 이집트, 터키 저쪽에 있는 유대인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성전 있는 곳에 옴으로서 자기 정체성, 아는 여전히 택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많이 와요. 그래서 요세푸스란 사람의 역사책에 보면 얼마나 많으냐? 예루살렘 성에 백만 명 모였답니다. 와, 백만 명 같으면 진짜 비좁아요. 그 시절에. 엄청나게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 아이들 잃어버리게 딱 알맞은 거예요. 예루살렘과 사해 위쪽 같은 지점에 산지의 높은 지역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급작스럽게 내려가고요. 예루살렘 성전에 중심으로 이만큼 모였어요. 그런데 여기 며칠 찾았습니까? 3일 동안 찾아다녔는데 못 찾았어요. 그거는 아버지가 예수님을 관리를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독자적인 행동을 해서 그래요. 내가 뭐 할 것인가, 열두 살 먹었는데 아버지의 지시를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어디를 찾아가야 된다는 자기의 정황, 방향성을 이미 열두 살 때에 알게 된 겁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기운이 있어서 하나는 지옥으로 당기는 기운이 있고, 하나는 천국으로 당기는 기운이 있는데 그 기운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결국 둘로 분리되게 돼 있어요. 일단 모든 사람을 잠자는 사람으로 봅시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이질적인 두 종류의 기가 에너지가 산다고 봅시다. 그럼 침대에 일어나서 전부 다 서서히 각자 제 자리로 가는데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 두 종류에요. 이게 인생살이에요.

결국은 가야 될 곳으로 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가는 거예요. 갔다가 나오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누가 그걸 최초로 했는가? 예수님이 최초로 하신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사흘 동안 찾아다녔으니 얼마나 걱정을 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뭐라고 역성을 내느냐 하면,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엄마가 그런 이야기했겠지요.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자기 남편을 뭐라고 보느냐? 너의 아버지로 봐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이렇게 꾸중을 할 때 그다음에 네모, 다음에 나올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 중 몇 번이겠습니까, 이런 문제 낼 수 있지요. 첫째, 죄송합니다. 제가 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두 번째, 아버지가 제 손을 놨기 때문에 아버지 찾는다고 사흘 동안 했습니다. 1번 아니면 2번이에요.

죄송합니다, 걱정 끼쳐드려서 미안합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아는 예수님의 영특함,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를 걱정시켜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역시 예수님을 달라도 달라.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워. 장차 훌륭한 사람 될 거야, 이런 기대하고. 만일 예수님께서 그건 아버지 책임이잖아요. 손목 붙들고 있어야지 그걸 놔버리면 키 작은 것이 어떻게 찾겠습니까? 이것은 싹이 노래. 이건 안 돼. 그래서 사람들은 1번을 원합니다.

그러나 3번을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 아버지 따로 있는 데요. 지금 요셉은 본의 아니게 속이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속인다는 생각이 없어요. 자기는 평범하게 일반사람들의 생각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열두 살이니까 스스로 일 못하잖아요. 입혀줘, 밥 먹여줘. 뭐가 부족해요. 부모로서. 같이 놀아줘.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보낼 때 간단하게 보냈어요. “잘 자지? 잘 먹지? 아프지 말고.” 끝.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제발 내 사랑하는 이여 잘 자고 잘 먹고 아프지 말고, 끝. 이래야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아버지도 평소에 예수님을 잘 키워왔어요. 보통 종교가, 신앙관이 아니니까 욕 얻어먹기 싫으니까 자식 하나 잘 키웠을 거예요.

그런데 그의 답변이 누구세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결국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속인 게 된 거예요. 자, 속인다는 것과 예배와 무슨 관계있느냐? 그거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방향성 때문이에요. 방향성이 여기서부터 출발할 때 지금은 뚜렷해요. 분명히 천국으로 골인할 거야.

그런데 점점 점선이 되면서 희미해지면서 천국은 이쪽에 있는데 방향성이 이상하게 기가 에너지가 방향이 엉뚱한 데로 이걸 고상한 말로 빠꾸라 하는데 back 뒤로 빠꾸, 빠꾸 자꾸 주님께 가지 못하고 같이 동거인이고 같이 자식으로 먹이고 입히고 살리고 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점점 벌어져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균열이죠. 차이점이 확 나버렸어요.

49절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양친이 마리아와 그 남편이 하신 말씀을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깨닫지 못하더라” 내가 누구 자식 키우고 있는 거야, 지금? 내 자식 아니었었어? 그래도 태어난 정보다 기른 정이 세다는 데 전혀 기른 정이통하질 않네요. 아기 예수님의 말씀, 발언 하나 때문에 지금 예수님 가정이 신앙인 가정이 성립이 안 된다는 걸 완전히 보여줍니다.

이것을 아나니아와 삽비라한테 그대로 하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부입니다. 상당히 둘이 짝이 맞은 거예요. 사도행전 보겠습니다. 둘이 마음이 맞았어요. 반발하지 않았고.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에겐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땅 판 것 다 아니까 다 바치지요, 이렇게 강요했습니까? 강요하지 않았어요. 누가 누굴 속인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속인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속였는데 왜 하나님이 관여합니까? 자기 문제 아닙니까? 자기 내부 문제잖아요. 인간이 뭘 놓치느냐 하면 주님의 성령은 주님의 영은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돼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우니까 빨리 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 대할 때 개인으로 상대하질 않아요. 상대 안 합니다. 십자가 죽은 것이 특정 나쁜 사람들이 기획해서 죽인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기획해서 죽인 인간이나 창으로 찌른 인간이나 모든 인간이 전부 다 한통속이란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의 영이 우리에게 올 때 사적으로 시비 걸면 안 돼요.

인간에 공통적으로 통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해서 십자가가 고발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인간보다 욕망이 더 오래 살아요. 왜냐하면 로마서 7장에 나오지요. 인간의 욕망은 본인이 내 욕망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냥 욕망이에요. 너도 갖고 있고 나도 갖고 있는데 너한테 발현되는 욕망이나 나한테 발현되는 욕망이나 똑같은 욕망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욕망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통제도 안 될뿐더러 욕망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도 본인이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작정 기도해요. 하나님이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게 죄 용서해달라고 무작정 기도하는데 죄 용서해달라는 그 기도조차도 욕망 밖에 벗어나지 못한 욕망의 일종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욕망을 언약적으로 욕망을 잘 몰라서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여러분이 이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세요. 에브라임 매슬로우라는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인간의 욕망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어요. 그런데 이걸 5F라 합니다. Fucking 성욕, Feeding 식욕, Flocking 집단의식, 그다음에 Fighting 싸울까, 마지막으로 Fleeing 어려울 때 위험할 때 도피하는 것, 도망치는 것. 앞의 F 다 들어 있잖아요.

이 사람이 연구하고 연구해서 인간의 욕망을 다섯 가지로 드러낸다. 그럼 이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욕망이 뭐냐? 몰라요. 이게 왜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감성이 있잖아요. 이성이란 모든 것을 하나에 통합해 담는 것을 이성이라 해요. 이성 또는 이성의 원천 오성인데 모든 걸 질서화 시켜서 통 안에 담아야 돼요. 그래서 자기 정서가 안정해지니까.

그런데 이런 다섯 가지는 통 안에 담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다 담을 수가 있어요. 서로 자제하면 되는 거예요.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욕망이라 하는 것은 이게 바로 욕망에 속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런 이성적인 태도가. 그 예를 그렇게 보는 이유가 아까 사도행전 할 때 제가 먼저 설명을 해줬어요.

사도행전은 모든 인간이 십자가 사건에 참여한 그 사람 말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전부 다 십자가 사건과 연관성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먹구름에 오는 빗방울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뭘 줬다? 성령을 주셔서 십자가 사건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 같으면 뭡니까?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시간들을 미래 앞에서 심판 받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현재지만 내일 되면 과거잖아요. 어차피 과거가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인간은 과거의 갇혀있는 존재,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 과거가 얼마나 심판거리인지 모르는 미래에 심판 받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문제를 확대시키는 거예요. 쉬쉬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우리끼리만 이게 아니라 전체를 확대시키는 겁니다.

확대시키면 인간은 욕망을 통제를 못한다. 달리 말해서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런데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 말은 맞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한다, 이게 주의 의도한 일이에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미 계산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무엇을 원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욕망의 사주를 받아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이렇게 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의 것은 아예 안 받는다. 철통같이 철저하게 이 원리를 십자가 이후에 계속 밀어붙여요. 인간의 일은 아예 안 받는다.

그래서 만약에 회개하고 예수 믿습니다, 하면 그 회개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안 받습니다. 왜? 그 회개는 인간의 욕망을 이기질 못해. 인간의 욕망은 인간 배후의 욕망이에요. 인간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지요. 여기 한 번 보세요. 5장 3절 누가 읽어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오케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나니아 보고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인간이 악령을 사단을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 못해요. 인간의 욕망은 사탄으로부터 온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이런 5F 그 정도 욕망 같으면 개인 사생활과 관련돼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일은 개인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그렇고 그런 인간 전체를 상대해요. 유난히 너보다 악하고 너보다 선하고 그런 것은 주님 십자가 앞에선 의미 없습니다.

우선 이것 하나 설명 드리고 사도행전 넘어옵시다. 고린도전서 2장에 몇 절을 보셔야 되느냐 하면 8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들이라 했지요. 공직자들이라 하지만 이거는 바로 이 세상의 일을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2장 초반에 보면 그게 지혜의 집결된 것, 왕 밑에 그 시대 그 당대 그 나라의 최고의 학덕과 지식이 지혜 있는 자를 다 끌어 모아야 일이 되잖아요. 왕이 전문가가 아니니까 자문계약 두듯이. 모든 지혜가, 왕이 최종적으로 결정은 하지만 최종 결정하기 전에 뭐를 모아야 돼요, 집결해야 돼요? 그 백성들의 지혜란 지혜는 몽땅 다 끌어 모아서 대변해서 왕이 그냥 외칠 뿐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뭐를 유도했다? 인간들의 어떤 지혜도 어떤 특정한 방향성을 갖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 죽여 없애라. 왜? 인간의 지혜를 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리석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우리들의 영특함을 아주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저 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지혜를 계속 지혜롭게 유지하는 대처하는 방식이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2장 8절에서 이 지혜가 이 세대의 관원들이 예수님의 지혜를 몰랐으니까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 못 박지 않았지요.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전 세계에서 비 오고 바람 불고 모든 이야기가 전부 다 십자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왜 모르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유명한 보컬그룹 이름을 보면서 뭔가 생각이 들었어요. 보컬 이름이 뭐냐 하면 세상의 바람과 불(Earth, Wind & Fire), 이 보컬그룹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뭐냐 하면 에요. 광고에 많이 나와요. 그런데 보컬그룹이 지구의 바람과 불이에요. 지구의 모든 지혜 이걸 자기가 한꺼번에 끌어안고 있다는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단 말이죠.

세상 자체가 지금 주님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사도행전 5장 3절에 누가 그렇게 배후에 작용한다? 사탄이 그렇게 작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개인적으로 누굴 질타하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이것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확정된 진리가 이교회에 성령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속이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이 개인 보고 너는 못났다, 잘났다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너 네 욕망을 잘 못 다스려? 이게 말이 안 된다니까. 욕망을 우리가 다스릴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겁니다. 모두 한통속이에요. 똑같아요. 십자가의 원수라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욕망이고 십자가를 기피하고 십자가 빼고 나머지 인간의 지혜로 지구를 살려보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공통된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욕망의 세계에요.

이것이 어디서 마주친다? 교회라는 것, 더 구체적으로 사도의 발 앞에서 이 두 세계가 충돌한 거예요. 그럼 예배가 뭐냐? 그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겁니다. 그게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에요. 저 왔습니다가 아니라 세상 전부를 대표해서 제가 왔습니다. 주님 새로운 세계를 대표해서 주님 앞에 섰습니다. 예배가.

그게 날마다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성령의 활동이죠. 모이면 기도하고 사도신경 이게 예배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삶 자체가 성령의 물방울이니까. 제목으로 탐이 난다, 성령의 물방울. 성령의 물방울이니까 항상 그 자체에서 뭘 만드느냐? 진정한 예배를 유발시켜요. 예배란 무엇인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 이게 예배에요.

그러면 사도행전 다시 돌아와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봅시다. 4절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할 수 없지요)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누구한테 했다? 하나님한테 거짓말했다.

그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지금 누구 보기 위해서 헌금 바친 겁니까? 베드로라는 사람을 보기 위해서 한 거예요. 아까 첫 번째 했잖아요. 사람의 모든 행동의 한계는 누구한테 한다? 그냥 사람하고 한 거예요. 건방지게 하나님을 상대로 하질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 받은 베드로를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나한테 속였다 하지만 나한테 속인 게 아니고 하나님을 속인 거야, 라고 문제를 확대시켜버려요.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5절) 이것 아나니아 죽인 것이 베드로에게 책임 있습니까, 없습니까? 베드로가 사람 죽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베드로는 그 십자가 사건의 목격자에요. 십자가 사건은 원래 이래요. 목격자만 있을 뿐이지 십자가를 행사하는 주인공은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 현장을 주도하고 있는 거예요. 다만 눈에 보이는 목격자만 있을 뿐이죠. 이게 십자가 사건이야, 있을 뿐이지 주님 보고 십자가 사건 일으켜 봐요,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교회에서 일어나요. 사람들이 안 두려워할 수 없지요.

6절에 봅시다. 아나니아가 죽고 난 뒤에,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교회 교인들이 조폭 같아. 묻어. 그냥 묻어버렸어요. 뭐 애도기간도 없어. 그냥 묻어버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기어이 범인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끝까지 추궁해서 색출해서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교회에서 앞으로 인간세계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압축해서 선제, 먼저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교회=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교회=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교회는 성도니까 ‘성도=말씀’이 되는 겁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죽으면 한줌의 재가 되지만 거기서 말씀이, 내가 죽일 자를 죽였다. 그 죽음에 두 종류가 있지요. 잡아당기는 방향이 두 종류니까. 성도 같으면 이제는 편히 쉬라. 불신자 같으면 고생 좀 해라. 결국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 그걸 십자가 사건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확정된 운명을 지닌 것이 십자가 이후의 인간세상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서 교회가 방향성이 정해졌지요. 성령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 그래야 이 세상을 정죄함으로서 구원을 하잖아요. 이 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걸 힘으로 생각해서 교회 힘세다, 교회 권력 있다. 그렇다면 교회 오기만 하면 세상 어떤 권력도 이기지 못하니까 노동운동하다 피할 데는 명동성당 안으로 기어 들어가면 주께서 지켜주시겠지. 공산당이 쳐들어와도 교회 가면 살아남겠지.

일제시대에 공산당 싫어요, 에 예배당 홀라당 불탔습니다. 살려고 온 사람들 한꺼번에 다 불타 죽었어요. 초대 천주교 신자들 정약용부터 해서 그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안 지켜줍니다. 왜 안 지켜줍니까? 안 지켜줘야지. 인간은 죽어 마땅한 데 뭘 지켜줘요. 먹구름 오지도 않았는데 지가 먹구름 되어서 예수님 대행자로 설쳐대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성령으로 일할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은 반복이 되게 되면 교회라 하는 것은 과거의 교회가 아니라 그 현장에 비로소 새롭게 등장하는 교회, 매일 새로운 교회, 성도 이게 진정한 예배잖아요.

제가 손녀한테 카톡을 보냈어요. “매일 새롭게 생일을 맞이하자.” “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카톡 온 걸 답 글을 해야 되니까 여기 하나 더하면, “다 같이 매일 새롭게 생일을 맞이하자.” 모든 인간이 매일이 자기 생일이에요. 그것도 새롭게. 이 말은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어요.

36페이지 봅시다. 인간의 욕망은 이기지 못합니다. 욕망이 인간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인간보다 악마의 욕망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 사탄을 현장에다 집어넣어요. 네 일을 시킨 것은 누구였다? 악마가 나한테 그렇게 시켰다. 악마는 왜 시킵니까? 악마는 인간을 속이는 목적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을 유야무야, 십자가 사건은 이제는 이 세상은 과거로 소멸되니까 이미 다 과거지사에요. 이거는 중들이 하는 이야기가 전부 이런 이야기에요. “다 과거지사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간은 과거의 일 그걸 근거로 해서 계속 나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십자가 사건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일, 시간 자체를 뛰어넘고 시간 바깥에 작동하는 이 세상을 한꺼번에 완전히 모든 속성을 묶어놔 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인생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성령의 삶이에요.

성령의 삶에는 여러분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외우고 있지요. 성령의 여덟 가지 열매가 뭡니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형제우애와 죽죽 나오지요. 그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있어요? 미래의 확정됐다는 내용물이 안에 다 들어있어야 돼요. 그것도 알알이. 알알이 하면 제가 좀 알아요. 알알이 메주라고 우리 사촌이 경영하는 메주공장 이름이 알알이에요.

알알이 그 방울 안에 뭐냐? 미래에 확정된 운명이 우리가 알알이 하나라면 포도송이 하나라면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걸 주께서는 이걸 통해서 이 세상에 십자가 사건을 물방울처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흩어버리죠. 흩어버리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바람 부니까 그 불이 온 천지 사방에 미친 듯이 다 뛰어다니는 것처럼 모이는 것을 못 모이게 하니까 그들이 다 흩어져서 흩어진 전체에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데 그게 성령세례에요.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터키 쪽으로 또는 현재 그리스 쪽으로 전도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불을 지르러 가는 거예요. 니 과거를 심판 받기 위해서 완전히 미래에 확정된 사실, 복음이죠. 사실을 가지고 불 질러서 그 가운데 미래에 구원 받은 사람, 영생 주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 믿더라. 그러니까 여러분 같은 경우는 이거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고 느긋한 일이죠. 또 장난이나 쳐볼까, 세상에 대해서. 또 명절 되면 입이 근질근질 해서 복음 이야기 한 번 해봐? 고스톱 치는 판에 가서 분위기 다 깨봐?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재밌잖아.

가진 자의 영유, 이미 된 자의 여유, 이미 모든 걸 알게 된 자의 여유, 악마가 세상을 어떻게 속인다는 그 속임수를 다 아는 여유,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한계는 사람을 대할 때 그냥 대하지 않고 마귀가 와서 사람을 대한다는 이 사실을 눈치 챈 여유, 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그걸 아는 뻔뻔함, 나중에 제목 다 잊어버리겠다, 중요한 게 너무 많이 나와서. 그 여유에요.

여기 36페이지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예수님께서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사람 죽인 적 있습니까? 살린 적은 있는데 저주 받으라 해서 죽인 적 있습니까? 없지요. 아까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어떻게 됐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주님이 죽였지요. 그게 미래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산 게 산 게 아니고 먼저 죽은 자만이 구원 받은 자에요. “주님, 저 먼저 죽여주옵소서.” 먼저 주님한테 십자가로 죽임 받은 사람, 여러 번 하지만 십자가 끝 뾰족해요. 정통으로 맞으면 죽어요. 십자가로 정통으로 맞아서 십자가로 얻어맞는 복, 이 영광스러움 생명 얻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죄가 함께 있는 악마가 십자가로 인하여 그 정체가 탄로될 때 우리는 구원 받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짓이 이게 마귀 짓이란 것을 얼마나 알게 된 게 감사합니까. 그때 여러분이 남길 마지막 문장은 이거에요. “ㅎㅎㅎ” 흐흐흐, 너무 음산스럽지요. 그럼 지우고, 호호호는 여자 티내고 그냥 중성적 의미에서 ㅎㅎㅎ, 그냥 감사한 거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나니아와 삽비라만 죽을 것이 아니고 진즉에 우리도 죽어야 될 자가 우리인 것을 우리가 이제는 그걸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만 활동하는 세상인 것을 같이 동조하고 즐거워할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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