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주일설교요약

아빠와 함께 2022. 6. 29. 09:46

대전-주일 낮 설교요약 20220627


어제 낮 설교한 것, 핵심 되는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체적인 연결을 그림으로 시간될 때까지 제가 이야기해볼게요.

제일 먼저 언급한 게 뭐냐 하면 누가복음 15장 탕자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을 얻은 거예요. 얻었지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얻었다, 그것만 좋아하는 데 중요한 것은 아들은 뭘 잃어버렸느냐 하면 집 나가기 전의 자기를 잃어버렸어요. 이게 어려운 건데 자기를 잃어버린 거예요. 아버지는 얻었잖아요. 아들은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목숨 다할 때까지 자기를 잃어버릴 방법도 없고요 잃어버릴 줄도 모르고요, 그리고 잃어버린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어요. 요즘 사는 이유는 나는 나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리는 그 경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돈 떨어질 때 자아가 같아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돈이 있음으로서 계속 자아가 있는 겁니다. 돈이 자기 욕망을 목적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돈 떨어지게 되면 자기 야망이 욕망이 없어지잖아요. 야망이 없어지면 야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곧 이미 선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은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걸 언급하면서 성경의 대원칙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느냐 하면 없다는 것에 대해선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내가 왜 없느냐? 광주강의 때 인간에게 불가능한 게 뭐라 했습니까?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없는 데서 시작한다고요.

그렇다면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아니어야 해요. 내가 아는 나, 그건 맞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하는 대상으로 나는 어쨌든 나는 delete 삭제하든지 제거하든지 수를 써야 돼요.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에서 이게 지금 이해할 수 없어요. 부지런히 교회 다니는데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는 거죠. 천국 갈 만한 자로 개선되기 위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은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다음에 같은 뜻입니다만 뭐라 했습니까? 죽은 데서 살리는 게 주의 일이에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걸 한꺼번에 나와 있는 대목이 바로 로마서 4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 원칙을 딱 제공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구원이란 것은 안 되지요.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좋은 걸 제시해도 본인 자체가 구원이 왜 안 되느냐? 멀쩡하게 있는 살아 있는 내가 없앨 수가 없고 살아 있는 내가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살아 있다고 하는 그게 오해야, 잘못 생각한 거야, 그건 네 입장이야, 네가 땅에서 네 레벨에 네 수준에서 살아 있는 거야. 내 레벨은 죽어 있는 거야,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면 되겠지요. 그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었어요.

유월절 사건에서 살아서 펄펄 뛰는 쪽은 하나님이 보내준 죽음의 천사만 사무라이 뒤에 칼 들고 덤벼들 듯이 활동 주체자가 죽음의 사자에요. 그리고 그날 밤이거든요. 지진도 밤에 일어나면 피해가 심해요. 밤은 무엇이 없다? 의식이 잠시 중지되는 겁니다. 꿈꾸는 건 있지만 그건 무의식에 속하니까. 밤에는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는 것을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교통사고 나잖아요. 온 장기는 작동하는 데 두뇌 쪽을 다쳐서 내가 여기 병원 침대에 왜 누워있지, 이러면 그걸 깨닫는 기간은 뭐냐?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죽어 있는 겁니다. 어떠냐? 자아가 사라진 순간이지요. 몸은 있어도 자아가 없으면 없는 순간, 몸은 살아 있어도 내 자아가 죽어버리면 죽는 순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작 원칙을 스타팅 포인트를 없는 데에, 죽은 데에 이걸로 시작합니다. 불가능이죠. 교회 목회가 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세운다고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있는 자들만 와서 뭐가 되겠어요. 펄펄 살아 있는 자들로 교회해서 뭐 할 겁니까? 아무 소용없지요. 주의 일도 아닙니다. 주의 일은 애초부터 인간이 종교로도 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게 하는 이게 유월절이죠. 여러분들은 유월절은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담방 연결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러면 신약에서 어린양을 보라, 예수님을 보라 했다면 첫 번째 유월절은 그들은 무엇을 보라고 했을까요?

첫 번째 모세를 통해서 히브리인들에게 보아라, 하는 것은 무엇을 보라 했겠어요? 자기가 집에서 잡은 어린양의 피가 볼 수 있는 자리까지 안에서 잡았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바깥으로 전면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어요. 바깥에 페인트 칠 뭐로 합니까? 노루표 페인트로 칠합니까? 그게 어린양의 피로 했지요.

그러면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일과 맞닥뜨리는 유일한 하나님이 가르친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보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와 상대 안 한다. 그리스도를 네 앞에 앞장세워서 너는 뒤로 빠져버리라 이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거예요.

제가 어제 오후기도 기억나십니까? 내용이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건데 인간들은 누구를 헛되지 않으려 교회 오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헛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자기 인생을 헛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믿어버려요. 그게 십자가를 욕하는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경에서 좋은 구절해도 내가 펄펄 살아 있는 한 이거는 모독하는 코드가 돼버려요. 참 이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어요. 성령 자체가. 그거는 대충 성경 읽어서 흉내 내면 주의 영광 되는 줄 아는데 그건 아니죠.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 있잖아요. 그 피 남기고 다 죽여요. 이 죽음의 사자가. 그래서 어린양의 피 남기도 다 죽여 버리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그 안에 뭐가 살아 있는가? 매일의 제사를 통해서 어린양의 피만 매일같이 살아 있는 걸로 간주되고 나머지는 그 살아 있는 어린양의 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거기에 졸졸 뒤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숨어있어야 돼요.

마치 닭이 가면 뒤에 병아리가 닭보다 앞장서면 안 되고 닭 뒤에 졸졸 따라가서 낮 12시 그늘도 없는데 병아리들은 엄마 덩치가 만들어내는 그 그림자 안에만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엄마가 자기 대행체기 때문에. 내 운명은 어디 걸렸다? 병아리한테 엄마의 운명이 내 운명이죠. 예수님의 운명이 내 운명이다. 유월절 피만 살아 있고 우리는 그 피가 살아 있으면 그 조건 하에 살아 있고 만약에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피 없는 이방나라처럼 되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장소가 시내 산이에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돌 판과 짝을 이루는 것이 피 있는 제사법이 율법과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란 것이 오늘날 우리 성경책 전체를 말하는 거예요. 성경을 봐선 안 되지요. 무엇과 짝을 이뤄야 돼요? 성경책 자체의 완성은 이걸 지키는 나로 완성이 되는 게 아니고, 지금 이게 두꺼워서 못 짜지만 이걸 짜보면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지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이 말씀은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다 이루었다. 그게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에요. 그래서 제가 오후 기도할 때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은 주님의 관점, 중점은 바로 이 성경말씀을 다 이루는 데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됩니까, 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게 어린양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란 말을 붙일 수 없어요. 우리는 뭐냐? 없는 존재고, 그다음에 뭡니까?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주일 낮 설교보다 더 길게 하겠다.

유월절을 통해서 모든 이스라엘은 이미 죽었지요. 이게 뭐냐?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주의 일입니다. 그 설교에서 초반에 제가 이렇게 강조한 것은 무엇을 구분시키느냐 하면 자기 일과 주의 일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제가 유월절을 먼저 언급했어요. 그러면 주의 일을 언급했기 때문에 원칙을 언급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건 뭡니까? 내 일이 뭔지가 남아있겠지요.

주의 일을 하는 그 현장에서 주의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뭐를 끌어당기느냐 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일하는 데 너희들은 이렇게 일한다고 짝을 맞추어야 돼요. 양말 하나 빵구 나면 어떻게 합니까? 옛날 같으면 깁는다 하지만 요새는 나머지 멀쩡한 것도 갖다버리지요. 언젠가 이야기했지요.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자 하면 뭐가 날아간다 했어요? 우리 죄가 같이 날아가요.

죄와 의가 같이 있어줘야 이게 주의 일이 되는데 사람들은 자기 챙기는 데 너무나 급해서 빨리 착한 사람 되고 싶어서 이제 죄 용서됐으니까 남아있는 사도 바울의 명령과 교훈들 있잖아요. 이걸 빨리 습득해서 내가 의롭고, 의롭고 점점 더 의로운 존재로 발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은 기본이고 상급도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아이디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 주의 말씀을 짜면 뭐 나온다 했어요? 피 나오지요. 이 말은 주의 말씀 안에 주님이 피가 나올 수밖에 없게 했다는 말은, 이 성경말씀은 그다음에 주의 일에 입각해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는 죄만 나와. 주님에게는 피가 나오는 이유가 너는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 피 없이는 너를 속죄할 수 없었단다. 그 내용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성경말씀 읽을 때 그렇게 평소에 여러분 마음이 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지요. 아하, 이게 죄 지으라고 성경말씀 줬구나. 죄 아닌 게 없다는 느긋한 입장에서.

자, 그러면 나의 일은 뭐냐? 나의 일은 어제 선악체계 잠간 언급했어요. 이게 나의 일인지 주의 일인지 아는 방법은 어떤 일을 해놓고 내가 잘했다, 못했다고 나오면 백 퍼센트 이건 선악체제에 의한 나의 일입니다. 주의 일을 모독하는 나의 일이에요. “내가 잘했지, 잘했지. 내가 실수했구나. 다음엔 그런 실수 안 해야지.” 이거는 나의 일이에요. 선악체제에 의해서 계속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악체제에서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제 논리에 의하면 인간에게 일단 자기 일이 안 되면 난처한 일이 벌어져요. 난처한 일이 벌어지면 수습에 들어갑니다. 집안에 사업이, 이게 아니고 자기의 가치가 손상 나는 난처한 일, 우사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빨리 화들짝 수습에 나서서 실수는 했지만 그 뒤에 반성하더라, 더 착하게 살려고 마음 야무지게 잡더라 하는 그 선행이 또는 이제부터 더욱더 주님을 잘 섬길게요, 하는 그 선행이 나의 과오를 이렇게 덮게 되면 수습이 잘된 거예요.

그러면 그 수습이 잘된 결과가 나라는 자아의 작품이잖아요. 그 작품에 대해서 자기가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인간의 일이에요. 인간의 일은 뭘 느낀다? 자신의 가치와 자부심을 계속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백 퍼센트 자기 일입니다. 모조리. 자기 일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뭐냐? 원룸에 혼자 살래. 다 귀찮아. 혼자 제대로 바르게 살면 되잖아, 주님이여.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 9절에 뭐가 나오느냐? 사도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옛날 찬송가 336장에 보면 주와 함께 동행 한다.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옛날 찬송가 좋네요.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왜? 자기는 죽은 존재니까. 동거할 경우에만 동거자가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자리 제공만 했을 뿐이에요. 껍데기만 제공했는데 안의 주인공은 동거인이 지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유월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어제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다. 왜냐? 생명의 운반체가 되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가 내 속에서 작동하게 되면 왜 나는 나의 선악체제에서 나오는 의로움과 양심이 왜 안 되는가?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게 죄만 나온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칠순을 하고 넘겨보면서 더욱더 그걸 많이 느끼게 되지요. 살아온 것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래서 자기 일을 길게 이야기했어요. 자기 일의 특징은 홀로 사는 건데 이것이 어떻게 하느냐? 자기 노동력을 일이니까 노동력을 기존의 자연환경에 적용하게 되면, ‘노동력+자연환경=문화’가 나와요.

문화가 조직적으로 힘을 모으게 되면 이게 문명이 돼요. 문명 중에서 가장 끝 모습이 국가문명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와요. 점점 더 문화가 문명으로 조직화 돼 가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폭력이에요. 가정의 폭력, 직장의 폭력, 교회의 폭력, 국가와 사회의 폭력. 이게 대표적인 것이 바벨탑, 바벨탑 특징이 모두가 생각이 하나같았다는 거예요. 한 패에요, 한 통속이에요.

한 통속이 되면 여기서 등질성, 질이 균등하다. 개나 소나 맞추어야 돼요. 왜 맞추느냐? 그것은 바로 오늘날 경영학에서 제일 최우선의 가치로 치는 것이 뭐냐? 능률주의입니다. 교회 경영에서 제일 우선 되는 게 능률이에요. 능률은 뭐냐?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능률입니다. 비용은 최소화하고 결과는 최대로. 이게 경영합리화에요.

문명이 힘을 모으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힘이 될 수 없는 쪽은 구박을 받아야 되고 거기에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다른 힘을 내 힘으로 강제로 빼앗아야 되거든요. 뺏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내 쪽에는 이익이지만 상대에게는 강력한 피해를 입히는 아이디어를 각 부서별로 모집해야 돼요. 이게 회사에요.

우리 조직만 남고, 그러니까 치킨 집 열군데 있으면 그냥 닭 튀겨서 파는 게 아니고 우리 집만 살아남고 1년 내에 아홉 집 다 문 닫는 아이디어를 끌어내지 않으면 아르바이트 학생 잘려야 돼요. 이 동네가 교회가 열군데 있다. 내 교회만 잘되고 아홉 군데 문을 닫는 아이디어를 당회장 목사는 부목사한테 그걸 강요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유치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이처럼 패거리가 한 패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홀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 보게 되면 원래 능력 없는 장들이 말이 많아요. 말이 많은 이유가 뭐냐? 말이 많다는 것은 내가 남과 싸워야 나라는 게 정립이 되는데 싸우려하니까 지가 봐도 신뢰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싸울 무기 없으면 뭘 해야 되는가? 속여야 돼요.

속이는 방법이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속이는 방법이에요. 그러려고 그랬어, 뭐 어떻게 했네. 헤어지는 마당에 나는 너한테 잘해주려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혼했으면 끝나는 거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어쨌든 우리 잘해보려고 했잖아, 과거 이야기 끄집어내고 이렇게 하는 것.

그래서 자기 일을 이런 식으로 해서 전부 다 무엇이 선이냐 하면 내가 잘되는 게 선이에요. 내가 못 되는 건 무조건 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죽을 등 살 등 악착같이 가치 있으니까 죽으면 돼요, 안 돼요? 살아야 되잖아요.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일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악마로부터 교신이 가능한 장치를, 수신기를 이미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었어요.

뭐라고 자꾸 세뇌하느냐 하면 네가 없으면 모든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일단 네가 있고 난 뒤에 네가 천국 가야 하나님도 의미 있다. 네 자신부터 챙기라는 그러한 암시를 악마로부터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그런 욕망이 있으니까 그걸 빼려고 한다면 공포가 찾아와요. 빼지를 못해요. 수신 장치를 무서워서. 그게 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소실되면 이딴 게 소용없지. 내가 있어야 나중에 잘했다, 못했다가 있는데 내가 없으면 이딴 게 무슨 소용 있나.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그런 쪽으로 악마가 그동안 꾸준히 인간들을 농락해온 겁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해서 교회 한다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고 내가 세운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가 일해야 된다. 그러면 결국 답은 나왔지요. 주님의 뜻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건데 악마는 기어이 이걸 피하게 만들어요. 무조건 있어야 되고 무조건 네가 안 죽어야 되고.

이런 관점에서 세상이 이미 거기에 한 통속이 돼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로부터 복음이란 걸 듣게 되었거든요. 복음을 들으니까 자기가 살고자하는 요령꾼들이, “야, 이것 괜찮네. 일 안 해도 내가 살겠네. 일 안 해도 천국 가겠네.” 이런 요령꾼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이스라엘이 말하는 유월절 체험 없이 지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한다니까 팡팡 놀면서 재림 기다리면 믿음 좋은 사람으로 주위의 평을 듣지 않겠는가. “너 믿음 좋으니까 일도 안 하는구나.” “그래 난 일 안 하고 이렇게 살다가 예수님 만날 거야.” 이래 나온다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제가 함축해서 한 말, “그럼 네 싼 똥은 누가 치우는데?” 좀 속된 말이지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는 누구의 희생 때문에 나오는데 지 혼자 천당 간다는 것 해서 자기한테 에너지를 준 희생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밥값은 해야 돼요. 밥값은 해야 되는데 밥값을 왜 안 하느냐? 이게 뭐냐 하면 어제 참 충격적인 용어 나왔지요. 가난한, 그다음에 뭡니까? ‘척’ 가난한 척.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프리카 중산층이 추리닝 입어요. 지금 아프리카 1억 명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입니다. 인간의 품위, 그딴 것 없어요, 그 동네는. 빵도 못 먹는데 무슨 품위가 있어요.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일으킨 세상이거든요. 세상에 나가서 나의 가치, 품위, 명예 다 무슨 소리냐? 배부른 소리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 복음 안다고? 나도 복음 아는데 나 어떻게 사는 줄 알아? 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다 말입니까? 아니지요. 생명은 귀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사도는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가난한 사람이 됐어요. 가뭄이라든지 지진,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라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남의 희생을 빨아먹고 사는 인생, 기생충 같은 모기, 파리. 모기, 파리도 나름대로 애쓴다. 얍삽하기 짝이 없는 것, 정치에 관심 있는 백수 이런 것들, 지 밥벌이도 안 하는…….

똥은 왜 싸느냐? 에너지 들어가니까 싼 똥이거든요. 그 에너지는 남이 고생한 에너지잖아요. 지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일하기 싫어든 먹지도 말라.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하느냐? 아니에요. 이게 육의 일이거든요. 주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주님 도와주세요.” “왜 도와주는데?” “양식이 필요합니다.”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목적이고 자기 인생의 끝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양식이 있어야 돼요. 그 양식은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만나의 떡이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애굽에 살던 양식을 달라 했을 때에 주님은 뭘 뭤습니까? 네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애굽의 양식이 죽은 너희를 살릴 수 없다. 돈이 있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생판 모르는 뭐지, 뭐야? 이게 이름 자체가 내용이 됐어요. 이게 만나에요. 이게 뭐냐. 그래서 성도는 뭐냐? 만나의 기능성 존재다. 생판 모르는 내가 생각도 못한 다 이루었다는 양식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기능은 문화가 아니고 문명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기능이니까.

그래서 여러분 듣지도 못한 리정, 로제, 에이미, 리아킴 이들이 스트리트 댄서들이에요. 그들은 댄스를 어떻게 하느냐? 싸움을 해요. 음악 틀어놓고, 에이 한 번 붙어볼까, 나와서 춤 한 번 추고. 그게 춤이라고 그건 춤도 아니지, 하고 지가 나와서 춤추고. 이 사람들이 현재 한국의 여자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어요. 거리의 춤꾼들이. 뉴욕에 가서 찍고 했어요. 아이들이 학원 다니고 그것 해요. 어릴 때부터 춤, 힙합 춤 이런 것. 뉴욕에 가서 흑인들과 한바탕 붙고. 맨날 배틀 붙어요. 리아킴 같은 사람은 세계 춤 대회에서 일 등한 사람이에요. 광고도 많이 나오고 해요. 그 기능성, 양식을 보여주는 기능성.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 있어서 제가 어제 준비는 했지만 시간 관계 상 못한 게 고린도전서 9장 16, 17절에 내가 하는 것은 부득불한 것이고 이건 내게 주신 사명이고 내가 이걸 해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이것 자체가 상이다. 왜? 나는 이미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양식의 기능이 사도 바울 자기를 장악하죠. 그래서 뭘 했느냐 하면 내가 복음에 빚진 자라 했잖아요.

그리고 어제 설교에 끝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천국은 포도원 비유에서 이 세상의 인간의 자기 일은 노동의 대가를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 노동했으니까. 노동의 대가 하려면 본인이 있고 본인이 안 죽어야 노동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노동의 대가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없다고 여길 때에 우리의 노동의 삯을 받는 게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죽고 없는 나에게 천국을 일방적으로 줘서 이제부터 너는 준 천국의 양식의 기능이 되라고 거리의 춤꾼 되라고 한 거예요.

그 삯은 우리 노동의 삯이 아니라 주님의 수고의 삯이 우리 안에 잠복돼 있는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내가 늘 봐도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서 내 가치 유지한다는 세상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천국을 소개하면서 반발하는 사람을 의식해서 주께서는 내 것으로 내 마음대로 사용했는데 네가 왜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느냐?

그럴 때는 그냥 하지 말고 손가락을 들고 이마나 가슴팍에 대고 내 것인데 네가 왜? 내가 의롭다 하는데 네가 뭐라고 네 몸이 네 것도 아닌데 네가 왜 스스로 죄인이라 하느냐? 내가 의롭게 했는데. 계속해서 쑤셔서 멍들었다 했잖아요. 다들 멍들 있지요. 왜 자꾸 선악체계를 작동시켜서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인생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에 기도가 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주님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했는데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내 인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관심사가 여전히 예수 믿고 얼마나 잘될까 그런 것만 신경 쓰고 있다고요.

주님께서 십자가는 양보가 없습니다. 나를 죽은 자로, 없는 자로 만들어서라도 십자가 네 안에 작열하거든 너는 천국 갔다고 고마운 줄 알아라. 두 번 다시 이스라엘처럼 되는 유월절 양을 전면에 내세우고 항상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런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지 맙시다. 여기서는 요약한 거니까 강의 아니니까 먼저 선행 강의니까 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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