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7/24주일설교보충

아빠와 함께 2022. 7. 27. 09:59

대전-주일설교 보충 20220725


어제 낮 설교에 설명이 필요한 것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어떻게 공간화 되는가? 그 문제를 후딱 넘어가버렸어요.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직선으로 생각하게 되면 어떤 점이, 어떤 오류가 있느냐 하면 지나간 것은 그냥 날아간다고 생각하고 그냥 앞에 있는 것만 계속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이럴 경우에는 인간 자신이 자기 생각이 자길 압도하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대단한 건 없다. 그런데 제가 태양을 예로 들어봤습니다. 태양이 아침에 뜰 때 엄청난 크기로 다가오고, 또 해질 때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다면 비록 그 태양이 낮에 중천에 작게 보이더라도 그건 실상이 아니고 진짜는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그러한 대상으로서의 삼킬 듯이 지구를 돌고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경우는 뭐냐? 시작과 끝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상대적으로 무엇이 우월하냐 하면 내 생각이 우월한 것처럼 돼버려요. 과거는 희미하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는 중요하다,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시간과 끝을 우리가 미리 안다면 우리는 그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이 시간과 끝의 제대로 된 모습, 태양의 진짜 모습으로 됐다면 시작과 끝을 들어서 오므려보는 거예요. 오므리면 이게 하나로 만나겠지요. 그럼 직선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둥글게 되는 겁니다. 둥글게 되면 그 둥근 장소에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지요. 시간으로 만든 공간, 제가 이것까지 이야기하고 여기서 논리를 확 뛰었습니다. 어떻게 뛰었느냐? 신약에는 이걸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기서 비약을 해버렸지요. 이걸 다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할 수가 없어요.

왜 후다닥 비약을 했는가? 인간은 가룟 유다가 자율성을 발휘해서 스스로 죽었다고 했는데, 스가랴 11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자살하는 그것을 아주 상세하게 예수님 오기 전 오백 년이란 시간의 텀을 벗어나서 가룟 유다가 어떻게 죽는지 알 수 있어요. 어떻게 지정된 장소에, 그걸 피밭이라 합니다. 피밭에 딱 죽는다는 것이 예언돼 있단 말이죠.

그러면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냐? 지나간 것이 아니고 오므라들면 똑같은 동일한 같은 공간에서 가룟 유다는 벗어난 적이 없어요. 가룟 유다가 보통 자살했다 하잖아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게 아니고 애초부터 가룟 유다는 죽은 자였지요. 그러면 그동안 자기가 자살하기 전에 스스로 살려고 애를 썼을 거예요. 스스로 살려고 애를 쓴 것이 스스로 죽는 것과 단절되지 않고 똑같은 취지 상 행위가 되는 겁니다.

결국은 자살할 걸, 결국은 스스로 죽을 걸 그동안 스스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쓴 겁니다. 특히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졌고 자신의 희망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걸 다 얻겠다고 나섰던 가룟 유다의 행동 속에서 그 본인의 자율성이 본인으로 하여금 자살로 이끈다는 사실을 꿈에서 생각 못했어요.

인간이 자기 죽을 때 어떻게 죽을지 미리 알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동그랗게 오므라든 그 말씀의 공간에서는 이미 그게 다 정해져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가룟 유다에게 너무 잔인했어요. 스가랴 11장 보겠습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스가랴 11장을 인용한 느낌도 들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기억이 안 나십니까? 토기장이 이야기에요.

11장 12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토기장이의 밭이 무슨 밭이냐? 피밭이에요. 그런데 설교의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제가 다 언급을 못했습니다만 원래 피밭의 원조가 또 따로 있어요. 나봇의 포도원이란 게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의 소유주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에요. 여호와인데 아합 왕이 그걸 탐해서 아합 왕은 소유주가 나봇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적절하게 나한테 팔라고 나왔을 때 나봇은 소유주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 판다. 그러니까 아합이 부인 이세벨과 합세해서 죽이라 이렇게 된 거예요.

나봇을 죽였을 때 피가 나올 게 아닙니까. 그것이 나봇의 피밭이 돼요. 세상이 하나님의 것에 달려들 때 달려드는 기표, 또는 사인, 기호, 인간이 하나님에 달려듦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기표가 등장해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세상에 증거를 남기게 돼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나님은 원래 안 보여요. 숨어있고.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모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노골적으로 대들 때 하나님의 증거, 기표가 등장하는 데 그게 피에요. 그 피밭에서 그 당시 인간들은 아합 왕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봇을 우리 일에 방해해서 죽였다. 그런데 그 피밭이 누구 피밭이냐? 나중에 이세벨의 피가 거기에 합류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피를 낼 정도로 대들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한테 대들었다는 것을 그걸 규격화해서 그걸 그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잖아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모든 말씀이 역량을 다 부어넣는 거예요. 그 부어넣는 공간이 말씀의 공간이고, 말씀의 시작과 끝을 돌돌 말아버리면 생기는 공간이죠. 그게 십자가 안이고. 그걸 제가 이런 논리 다 생략하고 말한 그게 뭐냐?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낸 증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은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인간이 진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증명하는 기표, 영어로 하면 그냥 sign, signature, 싸인이 피에요, 피.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말은 네가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진짜 용서하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 현장에 오란 말이죠. 그 현장에 오면 용서해줄게. 아아, 우리가 구원 받으려는 이것 때문에 연속성으로 내가 더 잘되려고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군요. 그걸 동의하게 되면 그 동의한 자체가 사인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이게 죄 사함이 되는 겁니다. 구원 받고자 하는 게 죄라는 걸 인식하면 그게 바로 죄 사함에 우리가 기표가 되는 거예요.

허무를 알고 그걸 즐기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된다. 전도서에 나오죠. 헛되고, 헛되고. 허무를 알고 그걸 즐기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이미 다 꿰뚫어본 사람이 돼요. 문제는 불교신자가 이걸 즐기지 못한다는 것. 이게 고민거리가 되는 거예요. 허무한 데 허무 안 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 자신이, 제가 주일학교 설교 때 했는가, 우리가 예수님과 쌍둥이라고 했지요. 왜? 동일한 아버지니까. 예수님을 참 아들이고 우리는 양자인데 쌍둥이가 되는 거예요. 쌍둥이가 되면 우리 육신은 우리의 그림자가 돼요. 그림자는 허무에 속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로 이미 빼돌렸어요. 선발대가 아니고 우리의 본대가 벌써 하늘나라에 가서 골로새서 3장 4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어요.

있는데 우리 그림자가 너무 길어서 꼬리가 아직 대전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허무를 만끽하고 즐길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대가 없는, 예수님의 나라에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불교신자, 중들 이런 사람들은, 여기 천주교신자, 목사들도 해당되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기 머리 부분이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구원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 되는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전력을 다하여.

돈을 잃으면 일부를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돈보다 중요한 게 친구라는 이런 노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여러분 돈 떨어지면 친구 다 떨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허무에 안 빠뜨리기 위해서 온갖 것으로 자기를 포장을 해요. 골프도 쳤다고 동양화도 했다고 탁구도 쳐봤다고 요가도 해보고.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그래봤자 마귀에 속아 넘어갈 일 없잖아요.

그림자는 밟아도 안 아파요. 그림자라고 생각 안 하고 내 모습 전부가 여기 다 들어있다고 여기는 이상은 그 사람에게는 불안하고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생기고 알 수 없는 공포가 찾아오지요. 이런 현상이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바깥에서 자기의 자율성을 그래도 꽉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자녀문제 언급했잖아요. 자식들의 정신적인 발달은 곧 자율성의 발달입니다. 자율성의 특징은 남한테 간섭받지 않으려 하고 훈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거에요. 그런데 자율성의 한계는 항상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세상을 살 때 둘러보다가 자아라는 제자리로 도달되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가 되겠어요.

둘러보는 인생, 특히 젊은 사람들이 잘하지요. 직장 때려치우고 돈 한 이천만 원 끌어 모아서 삼 년 동안 해외여행 다닌다. 둘러보는 거잖아요. 세상이 어디 놀이동산입니까? 이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인생 경험이다. 인생 경험하면 뭐합니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요. 놀이동산이라고 제가 언급한 이유가 놀이동산이 아무리 면적이 넓고 볼 게 많더라도 해질 때 되면 입구로 나와서 자기 집 아파트로 다 도로 돌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놀이동산은 벽으로 둘러쳐서 막히게 돼 있어요. 막혀있는 곳 둘러봤다 희망이 없잖아요. 그래서 놀이동산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가 어제 설교에서 언급한 세상이 있지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여기는 막힘이 없고 늘 새로워요. 놀이동산은 막혀있어요. 실컷 비싼 돈 내고 구경하고는 집에 가 저녁에 라면이나 끓여먹어야 되지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내가 예측 못한 일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내가 돌아갈 나의 자리를 용납 받지 못한다.

이게 무슨 세계다? 족보가 아니고 사랑의 나라에요. 사랑의 나라에서는 나의 결정권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무중력 상태라 했지요. 우주선 안에 무중력 상태에서 그냥 맡기면 편한데 거기서 정신 차리고 자세 잡으려하면 그게 되레 힘들어요. 내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가치 있기 위해서 애쓴 만큼 점점 사랑의 나라에서는 더 괴롭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찾아와서 네가 하는 일이 너만 괴로운 일을 하고 있다. 네가 가시 채를 맨발로 차는 것처럼 아프기는 너 혼자 아프다. 왜 쓸데없이 그런 행동하느냐고 나무라면서 찾아왔습니다. “네가 그렇게 몸부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는데 그게 다 네 고통으로 돌아갈 거야. 다 헛짓이야.” “누구십니까?‘ ”누구긴 네가 핍박하는 예수지, 누구겠어.“

그때부터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가 자신의 한계에 부딪칠 때에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했느냐? 나의 하나님이라 했어요. 이게 단절이잖아요. 하나님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나를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나를 잊어도 괜찮은 다른 영토, 다른 영역에 들어섰을 때에 거기서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 것 챙기면서 하나님 믿는 것?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그건 헛수고에요. 나로 하여금 내 뒷모습이 보이게 만드는 것, 세상 사람들처럼 헛되고 헛된 것들을 부지런히 찾으면서 그게 자아라고 우기고 거기에 승부 거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볼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봤던 그 안목이 이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강아지야, 네가 눈이 어둡구나.” 이렇게 측은하게 보는 것. 소경이 더욱더 소경되는 이런 것. 우리는 소경이 되어 어두운 밤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해도 내 집으로 되돌아오는 세상구경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하고 미국 가서 박사학위 따고 백날해도 그건 다 놀이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나의 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의 세계에 우리가 갇혀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존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시작과 끝, 시간을 가지고 오므려버리느냐?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직선으로 해서 미래의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미래는 잘 될 거야, 라고 희망을 갖기 때문에 희망 같은 건 없는 거예요. 미래로 앞으로, 앞으로 하면 나중에 동그라미 되니까. 동그라미, 수레바퀴처럼 되니까 앞으로, 앞으로 해봐야 갇힌 공간 안에, 말씀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모든 것, 악마에 목숨을 볼모잡혔지요.

우리가 마지막 남아있는 판돈은 뭐냐 하면 우리의 제일 귀한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바로 이 목숨을 내놓으라 하지요. 우리는 확실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목숨을 누가 가져가느냐? 주님께서 이 목숨을 기표라 했지요. 네 목숨은 내 피를 낳게 한 것뿐이다. 이게 피라는 기표에 같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희생하신 분이 되어서 이게 목숨의 용도인데, 우리의 목숨은 우리가 버리지도 못할 목숨을 주께서 가져가셔서 훌륭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증거로서 용도로서 잘 쓰시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을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잘 쓰시고 계신 겁니다. 허무한 것을 허무하다고 일러주면서. 그럼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지금까지 어제 설교시간에 미진한 것 보충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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