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강요된 운명

아빠와 함께 2022. 7. 27. 10:00

대전-신명기(4강) 신3:6(강요된 운명) 20220725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3장에 보면 바산 옥을 이스라엘이 정벌합니다. 우선 여러분들 지도 갖고 있지만 제가 다시 그리면, 여기 갈릴리 바다, 열 배나 더 큰 사해, 이 사이를 요단강, 요단강 건너편 이 지역이 길르앗 지역이고, 갈릴리 호수 이쪽이 바산이에요. 이만큼 내려와 있지요. 밑에는 모압, 암몬. 여기 바산 왕 옥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해서 치게 됩니다. 치고 사해 쪽으로 내려와서 요단강 건너가게 돼 있어요. 길르앗, 바산이니까 지금의 시리아 쯤 되겠지요. 아래는 요르단. 그리고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아래쪽은 이집트, 여기는 지중해.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 치게 했는데 이스라엘은 뭐냐? 도대체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이스라엘은 강제로 출생부터가 신자 취급받는 나라,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보통 이방민족에서는 신자가 되는 것은 본인이, 나 하나님 믿겠습니다, 선택을 하면 신자 되잖아요. 그리고 하나님 안 믿겠다고 하면 자기는 불신자로 자부하는 거고.

그런데 출생 자체가 강제로 신자 취급받는 게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강제로 신자로 다뤄지게 되고 이스라엘이 누구와 마주쳐야 되느냐 하면, 그것도 강제로 불신자와 마주쳐야 돼요. 이스라엘의 모든 진행이. 여기서 본인의 선택 문제는 다 소용없어요. 강제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지요.

망한 이유가 뭐냐? 자기들이 쳐야 될 불신자 나라를 치는 가운데 본인들이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와 같이 동질화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도 이방나라 같으면 이방나라는 처음부터 불신자잖아요. 불신자가 불신자 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너 신자였는데 왜 불신자야, 이렇게 해서 얻어맞는 겁니다. 상당히 억울한 면이 있지요.

내가 신자 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출생부터가 이스라엘로 만들어놓고 너 왜 율법 위반했어? 언제 법을 달라고 했어요, 이 나라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 없다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되라고 요청한 적도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신자로 간주해서, 율법의 백성으로 간주해서 백성이 아닌 자와 마주치게 해서 그걸 동질화 해버릴 때에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말은 신자의 역할이, 하나님께서 강제로 백성 된 역할이 불신자의 본질을 유일하게 아는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왜? 불신자들은 본인이 불신자가 어떤 처지인지 전혀 모르게 때문에. 전부 다 눈 뜬 사람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스스로 소경됐다고 우리 다 소경이야, 라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아무도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소경된 자를 보내니까 “어, 저 사람 소경이다.”했잖아요. 눈 떴잖아요.

“어, 저 사람 소경 아니네. 저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인데 예수님께서 고쳐줘서 소경 아니네.” 주님께서, “그게 끝이야?” “끝이지 뭐요?” “너희들이 소경이란 생각해본 적 없나?” “우리가 왜 소경입니까?” “너는 소경이었다가 눈 뜬 적이 없잖아. 처음부터 눈 떴다고 우기는 그 자체가 소경인 줄 몰랐어?”

단순히 소경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걸 죄라고 하는 거예요. 네 자신을 모르는 걸 죄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보는 거예요. 이거는 소경인 자에게, 이미 날 때부터 죄인인 자에게 왜 죄라는 걸 몰라, 그게 죄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이게 무리수에요, 사실은. 얼마나 무리수입니까.

드라마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요새 상당히 호평을 받잖아요. 그 우영우 자폐증 환자의 대사에 보면 사랑이 뭔지, 사랑의 감정의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기계적인 이성적인 법률지식은 아주 높은 지능으로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 줄 몰라 당황해해요.

왜 그러냐 하면 자폐증은 자기 내부를 남에게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법정에서나 뭔가 왔을 때 손을 가슴 앞에 모아요. 눈동자는 항상 고정되지 못하고 살펴요. 꼭 로봇 같아. 자기를 소개해도 눈을 보며 소개해야 되는데,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역삼역?” 그렇게 한다고요.

왜냐하면 자기 것만 지키면 되지 굳이 남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걸 보통 장애자라 하잖아요. 주님 보시기에 여호와를 모르는 게 장애자에요. 그들은 저주받아야 되고 멸망 받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장애자가 이방나라가 자기가 멸망의 대상인 것을 몰라요. 모르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된 민족과 만나게 해요. 만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들을 치는 게 아니고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 동화가 돼버려요. 불신자로.

동화가 되는데 이방민족은 손을 안 댔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립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하는 전도에요. 이게 선교입니다. 나 까불다가 망했다, 이걸 전도하는 거예요, 선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이스라엘이 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구원에 눈을 뜨게 돼요. 자기의 진짜 나는 도저히 백성이 될 자격이 없고 백성 될 어떤 의로움도 없는데 주께서 백성 되게 했다는 사실을 망하면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죠.

같은 신명기니까 신명기 9장을 봅시다. 신명기 9장 5절 누가 읽어볼까요?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철저하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너희가 의로움도 아니고 정직함도 아니고 주님께서 한 것은 하나님의 맹세에요. 그 맹세가 뭐냐 하면 바로 언약 안에 들어있는 사죄함과 은혜에요. 그들은 은혜로 우리가 남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훌륭해서가 아니라 언약 안에 들어있는 그 은혜 그 사죄함이 우리에게 먼저 왔기 때문에 그 언약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사죄함과 은혜가 되어지고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용서가 되고 저쪽은 멸망이 된다.

그걸 그들이 애초부터 알았으면 좋겠는데 애초부터 그걸 몰랐어요. 제가 광주강의하면서 비닐봉지 터져버린 이야길 했어요. 우리 안에 괴물 들어있는데 복음 들을 때는 잘 통제가 되고 커버를 잘하는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성깔이 확 일어나면서 안에 있는 비닐봉지가 팍 터지고 그동안 통제 잘되던 우리의 성질이 분노로 폭발해버리죠.

그게 언약의 봉지가 있는데 언약의 봉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가치를 우습게보고 세상 사람들처럼 내가 성공하고 출세하면 된다는 여기에 유혹돼버리면 언약 자체는 이스라엘마저도 공격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선택과 관련 없이 출생부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권역, 영역 안에 율법이라는 구조 안에 들어왔다는 것,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이 구조 안에 들어온 것을 감사해야 되지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네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에요. 주님 보시기에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당연한 거죠. 그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에게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하여, 란 이런 뜻이에요. 너 우리끼리 있는 이야기인데 네가 지금 움직이고 밥 먹고 하는 모든 것이 내가 준 거잖아요. 네 것이 없잖아. 네 것이 없으니까 이게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 한 마디만 해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생명을 다하여 사랑한 걸로 돼버려요.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둘 다 하나님이 거저주신 거잖아요, 이게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처럼 주님께서 내 영, 부활의 영, 부활하신 뒤에 성령을 받게 되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너나나나 마찬가지야. 이게 보여주는 이웃사랑이고 우리가 주님에게 한 이웃사랑이 됩니다. “같은 처지였군요.”

그래서 어떤 상담을 한다든지 고민거리, 걱정거리 이러한 모든 이야기의 바탕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내 것이다, 이걸 고집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고민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이렇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율법완성이 안 돼요. 몸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내 몸을 사랑하라, 이 사랑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랑이 나는 내 것이 막혀버린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막혀버린다고.

그래서 잔뜩 이스라엘 진영에, 만약에 요즘 전쟁처럼 군사용 트럭에다가 주님이 율법을 가득 싣고, 율법이 폭탄이거든요. 안 지키면 저주, 지키면 복. 폭탄을 싣고 적진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무작정으로 돌격시켜버려요. 그러니 트럭 운전사는 자기의 실력, 태권도 3단 그것 믿지 말고 뒤에 있는 폭탄을 믿어야 돼요. 그냥 돌진해서 받아버리면 폭탄이 제 때 터져버리면 하나님을 대든 이방민족은 파괴되고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여기 3장 6절에 보면,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 그렇게 돼 있지요. 여기에 보면 성읍들을 진멸하고 남녀와 유아, 어린애까지 진멸하도록 돼 있어요.

그리고 진멸하는 이유가 뭐냐? 11절에 보면,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지금 오히려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 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장이 아홉 규빗요 광이 네 규빗이니라” 침대 길이가 아홉 규빗으로 4.48미터, 그리고 폭이죠. 광이 네 규빗이니까 넓이가 1.8미터.

이게 바산의 족속들이 거인 족에 속해요. 그래서 전쟁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 꼬마가 어딜? 우린 거인 족인데. 의도적으로 11절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과 마주치면서 인간이 율법을 거부할만한 조건을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자율적으로 어떤 전쟁에서 덩치만 보고 이길 자신이 있는 쪽에서는 이스라엘에 율법이 있고 말씀이 있다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말씀 해봐야, 우린 덩치 있잖아.”

그리고 그 족속이 군사들이 어른들 싸우지요. 그러나 어른들이 하루아침에 어른 되지 않지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그 본질은 동일하게 성장하니까 이걸 뿌리 채 없애버려야 되는 거예요. 이건 참 중요한데요. 뿌리 채 혈육을 살육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기 결심으로 팔자를 바꿀 수 없다. 예수 믿는다고 팔자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 예수 믿는 것이 성령으로 했느냐, 아니면 자기 오기고 자기 결심이었느냐? 결심이라면 그거는 그냥 놀이동산, 교회가 뭐하는 덴지 둘러보다가 옛날로 돌아옵니다. 요즘 교회는 옛날로 안 돌아오지요. 기존에 있는 성령 받은 사람을 쫓아내면서 자기들 놀이동산으로 계속 운영해버리죠. 그들이 나가는 게 아니고 그들의 차지가 돼버리죠.

인간이 자기 결심으로 팔자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이 되지 않는 사람은 인간들이 뭘 만드느냐 하면 종교라는 걸 만들어요. 이 종교가 뭐냐 하면 온갖 지식을 제공하고 그 지식이 당신의 보기에 당신에게 이익 되었다 싶으면 이래서 팔자 바꾸려는 그러한 장치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들은 진리가 권력화 되는 거예요. 우생학적으로. 나한테 이익이 된다 싶으면 그걸 내 중심으로 권력화 시켜서 이 세상을 일부나마 나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동안 이방나라가 건재해왔던 이유입니다. 우리한테 이익이 되고 나의 결심과 나의 선택의 의미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그 방식을 아까 덩치 큰 르바임 족속, 바산 왕 이런 사람들이 행했던 거예요.

아까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본인의 의지나 결심과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출생부터가 이스라엘 백성 화되었습니다. 되고 나니까 거기에 율법이 기다렸죠. 율법을 트럭에 싣습니다. 전쟁에 나갑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해야 되는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싸우는 민족이기 때문에.

마치 야곱이 만났던 마하나임이 하나님의 군대잖아요.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군대에요. 영적인 천사의 기능을 그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구체화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이 언약대로 밀어붙이면 그 뒤에 천사가 와서 도와줍니다. 게하시가 아람나라가 왔을 놀랬잖아요. 자기를 포위했기 때문에.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해서 눈을 떠주니까 저쪽 숫자보다 이쪽에 있는 천사의 숫자가 더 많았던 거예요. 여러분도 뒤에 돌아보세요. 여러분 천사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내 뒤돌아보니까 강아지만…, 소경된 강아지만.

뒤돌아본다는 것은 쓸데없이 불안이나 염려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뒤돌아보게 되면 뒤쪽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지 앞서 있는 것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사 손 못 대기 때문에 불안과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의 일, 주님의 일에 아바타니까.

기계가 돌아가게 되면 상표가 붙지요. 상표가 왜 걱정합니까? 그냥 붙어있는 건데. 몸은 그리스도 몸인데 걱정은 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상표인데 몸의 기능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데 껍데기인 내가 왜 걱정하느냐 말이죠. 그럴 필요 없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았어요. 이런 게 어려워요. 요구받고 난 뒤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의당 우리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던 거예요. 율법이 지시하는 지시체는 성경 전체를 다 보면 누구냐 하면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지시체가, 이스라엘아 내 말 들으라. 너는 내 몸을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 하니까 이스라엘 자기에게 한 줄 알았던 거예요. 이스라엘 안에 복숭아 씨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럼 진짜 이스라엘 나오려면 이게 마지막 때가 돼야 됩니다. 모든 언약이 모든 율법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때 마지막이 나오거든요. 그 마지막 때까지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둘러쳐놓고 이스라엘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내는 거예요. 외부로. 한 층, 두 층을 벗겨냅니다.

똑같아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예수님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현재 나를 이렇게 한다고요. 나라고 하니까 예를 들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을 든다 말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계신다?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니까 모든 복음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사실을 겨냥해서 복음적인 활동을 하도록 성령께서 나에게 부추기고 나를 이끄신 거예요. 주님 가신 길에 상표도 붙여서 가듯이 기계 옮길 때 내가 같이 옮겨지는 거예요.

사도 복음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고백하는 것이 그겁니다. 나는 죽고, 죽었다는 말은 활동성이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활동할 것도 없고 죽은 자가 무슨 활동을 해요. 내가 활동한다는 이야기, 제발 좀 그런 소린 하지 마라. 나는 죽었기 때문에 이미 활동 끝났어요. 그런데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나로 하여금 죽은 내 안에 살아 있는 주님의 활동력이 작동하니까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나는 산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뿐이다 이 말이죠.

방금 한 이야기 잘 들었지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면 우린 또 다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처럼. “그래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까 나도 귀한 거야.” 안 귀해요. 우리는 안 귀하다고요. 이런 고백을 한다고 해서 내가 덩달아 귀하다 그렇게 자꾸 우기지 마세요.

우리는 돼지껍질처럼 하루하루 벗겨져나가는 데 이 일을 뭐로 하느냐 하면 시간 속에서 해나갑니다. 이걸 간단한 말로 늙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점점 정신도 없고 늙어가고 한 소리 또 하고 뭐 했는지 다 잊어버리고. 안경 쓰고 안경 찾고, 그런 거예요. 점점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정상이십니다. 주께서 육신을 육신 되게 작용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불신자요. 불신자가 교회 와서 이 복음을 들어버리면 그다음부터 그 사람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버립니다. 안에 예수님은 없지요, 복음은 딱 정답으로 나와 있지요. 그 간에 빈 공백 또는 결핍이 있잖아요. 차이 나잖아요. 그 차이점을 뭐로 메워야 됩니까? 그냥 열심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메워야지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이유가 거기 있던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 때 이야기했지만 예레미야에게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말했던 게 그겁니다. 너희 나랑 같이 망하자. 즐겁지 아니하냐. 망하는 데 즐겁지 아니하냐. 왜? 망하는 데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일관된 스케줄 따라 망하는 거니까. 내가 망한다는 그걸 겁내지 말고 망하는 것도 스케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게 즐거운 일이 된다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그 이야기했을 때 예레미야 너나 해라, 그런 식으로 나갔어요. 그게 선지자 핍박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다 아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여기 헛되다는 말이 나오지요.

헛되다는 이 말씀은 결국 이스라엘의 운명이 이 말씀을 지켜서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못 지키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주께서 멸망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 말씀이 비로소 제대로 된 본모습이 성취가 된다는 거예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 헛됨이 즐거운 경우는 어떤 경울까요? 만약에 내가 나를 쥐고 나를 안 놓치려한다면 헛되다는 소리는 이거는 욕하는 소리로 들릴 거예요. 붕괴할 겁니다. 난 헛되지 않고 싶은데 내 인생이 왜 허무해. 왜 허무해야 되는데?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내가 뭐가 무식해서 내가 뭐가 악해서 헛되게 되는데? 아주 발광을 할 거예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한테 네 인생은 헛되다 하면 콜, 오케이. 각오하고 있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짐작했어요.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흔쾌히 받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만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 승리하게 돼 있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알 때, 아까 우리가 신명기 9장 봤잖아요. 그 말씀이 다 같은 말씀이에요.

“네가 착하지 않다. 너는 헛된 것이 당연한 거야. 너의 가치를 이번 전쟁에서 뽑아내려고 노력하지 마. 당연한 거야.” 그런 전쟁을 해야 돼요. 그래서 아이 성 칠 때 아간이란 작자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못 칩니다. 걸림돌이 있었어요. 아간은 자기를 헛되게 생각 안 해요. 내가 이번 전쟁에서 사적인 이익 좀 보는 게 뭐가 나쁜데. 많은 것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내 것으로 차지하면 되잖아, 이랬던 것이 아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취할 태도, 하나님의 지시는 뭐냐? 아간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 성을 함락한 근거는 뭐냐? 바로 아간의 죽음에 모든 사람이 같이 동의했다는 데 전쟁의 승리 비결이죠.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다 가르치는 거예요. 그냥 일부러 아간 같은 어떤 지방간을 해놓고 일부러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춤하게 만들지요. 다시 자기를 돌아보게 만들죠.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어요. 지방간이든 대장암이든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대장암 걸리고, <교회오빠> 그런 영화도 나오지만 피부암 걸리든지 뭐 걸리든 이게 다 나는 아간이란 것을 수긍하고 동의하는 그 자가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헛됩니다, 라는 고백을 아주 가볍고 당연한 것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 내 노동력과 수고는 전혀 내 인생이 보탠 적이 없다고 흔쾌히 인정하는 그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10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 안에 뭐가 들어갔습니까? 악마가 들어왔지요. 악마도 주님 시킨 대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아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우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껏 뭘 해도 아무것도 아니야. 주의 명령으로 사도가 됐지 내가 사도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도된 게 아니라는 것을 계속 그걸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신앙심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악마가 들어와야 돼요.

악마가 들어와서 내 신앙심마저 제쳐버리고 악마로 조절함으로써 끊임없이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까, 주님이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이, 네가 몸이 아프지만 그 은혜가 족하다, 라고 이것도 주님의 명령이거든요. 사도는 이 명령을 명령대로 고백을 함으로서 그 명령에 반응을 나타내고 호응해주는 것뿐이에요. 시작을 주님부터 먼저 시작하고 자기는 거기에 호응을 할 뿐이에요.

그다음에 그 은혜가 뭐냐?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런 걸 좀 가훈으로 액자 해서 걸어놓고. 하면 된다, 그런 것 좀 하지 마시고요. 약한 것이 온전함이다. 그러면 그게 마음에 안 들면 10절로 바꾸세요.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건 또 오해할 소지가 있네. 강하기 위해서 일부러 약한 척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어쨌든 일관된 흐르는 취지는 뭐냐 하면 나의 구원은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심각한 자기 업무였다는 겁니다. 이 인간을 천국에 들어갈 거냐, 말거냐는 것은 내가 고민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이 나보다 고민을 더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인간을 얼마나 쥐어박아야 하는지, 이 인간을 얼마나 처박아야 이게 주께서 너를 용서했다는 취지에 부합할 것인가? 그 고민은 주님 혼자 하시도록 그냥 놔두세요. 우리가 거들지 마시고. 우리가 거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민족 봅시다. 이방민족의 일상은 그저 에피소드의 연속입니다. 에피소드를 우리말로 하면 일화, 하나의 이야깃거리 이런 뜻이거든요. 불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냥 에피소드만 기억하면서 또는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요.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머리가 나쁜지 그들이 죽을 때 되면, 내가 죽는구나,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지금껏 그들이 96세까지나 평생토록 살아온 모든 것을 다 결제해서 마트에서 물건 살 때 팔만 오천 원 나왔습니다, 계산하듯이 천사가 두드려보니까 마지막에 뭐냐? 얼마 나왔어요? 사망입니다. 마지막 값은 사망이에요. 실컷 살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는데 계산서 길잖아요. 계산서 보니까 지옥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살았는데,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나온 계산서는 심판이 지옥행이에요. 벌건 도장 팍 찍어버려요. 안녕, 친구야. 친구도 아니지. 끝내고 보내버리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 있을 때는 자기의 계산서 끝자락에 죽음의 심판이란 그런 게 나올 줄 몰랐지요. 그저 하루하루 에피소드끼리의 연속입니다. 이건 뭐 노인정에 가면 다 알 수 있지요. 노인정에 가면 전부 다 일상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왜 사는지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심지어 윤석열 회의해도 이런 이야기밖에 없어요. 대우조선 하청에서 파업을 했어? 에피소드지요. 경찰서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에피소드지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했다고? 그냥 일화에요, 에피소드.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랬던 우리였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모여서 수박 한 쪽 먹고 놀고 웃고 자고 아침드라마 보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바쁘고, 또 살림살고. 나중에 딸의 아이, 손자 봐준다고 용돈 삼아 이십만 원 받고. 조선족 하면 이백오십만 원인데 엄마라고 이십만 원 차비도 안 되는 걸 주고. 그래도 내가 엄마니까 참는다고 그렇게 하지요. 너무 돈 밝히면, 엄마 그럴 줄 몰랐어. 엄마가 그렇게 나쁜 엄마인 줄 몰랐어, 라는 뒤 담화 나올까봐 겁나서 그냥 오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이렇게 일상 살아가는 것 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명기 3장에서 거인과 마주치고 그 당시 토박이하고 마주치고 불신자와 마주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로 경험케 하신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봐야 돼요.

오늘날 이것이 우리에게 성도의 일상에 그대로 적용해야 돼요. 성도의 일상, 성도의 삶도 남들 보기에 불신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뭘 발견하고 찾아내야 합니까?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이 어떤 것들의 있는지 찾아봐야 돼요. 그리고 성도끼리 대화할 때는 그걸 섞어 넣어야 되지요. 아주 사소하고 세밀한 것이라도 좋아요.

성도는 어떤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덜 깨져서 이거는 내가 한 거고, 설거지는 오늘 내가 했어요. 설거지는 내가 한 거고, 기적적으로 잃어버린 지갑을 찾았다든지 그건 하나님이 하신 거고.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분류를 하지요. 그런데 그 범주를 점점 확대시켜야 돼요.

확대시키면 손목 나가서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까 심지어 설거지하는 것조차 내 힘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소급해서 그걸 계속해서 감사하고 그걸 발굴하고 발견해야지요. 그럼 그러한 삶이 뭐냐 하면 성도의 삶이에요. 신명기 3장이에요. 곧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이유가, 성도는 마귀가 들어오기 때문에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마귀를 누가 조종합니까? 성도가 조종 못해요.

사도 바울이 기도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어디서 나를 아프게 해.” 이러지 못합니다. 주께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사탄이 들어와 설친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거든요. 긍정적으로 봐야 돼요, 긍정적으로. 사탄을 없애버리면 우리는 자고하고 교만해서 이게 주님의 구원에 합당한 존재가 되질 못합니다. 일부러 지방간처럼 끼워 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산다는 그 신선함, 새로움이라는 게 어떤 맛인지를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말씀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명기 말씀은 현재 네 인생으로 재현되는 거예요. 또는 말씀이 우리 인생을 통해서 반복돼요. 마태복음 7장에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이건 주의 말씀이잖아요. 네가 지금 반복되고 있잖아요.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공간이 없어요. 마치 공중 부양하는 것처럼 붕 떴어요. 의도적으로 발 디딜 곳이 필요치 않아요. 어차피 이 세상은 불 심판이고 떠나야 할 곳이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불질러버려요. 그렇다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면 인자 안에 누가 함께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있지요. 그럼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아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3장에 보면 지금 무슨 싸움하고 있습니까? 땅 싸움하고 있거든요. 땅 싸움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네 땅이 될 것과 네 땅이 되지 않을 것을 의도적으로 구분하십니다. 그게 3장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그와 그 모든 백성과 그 땅을 네 손에”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네 손에 붙였다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찜해서 너한테 주기로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땅을 나중에 갓과 르우벤 지파가 차지하거든요.

그러니 이 신명기 이야기가 하나님이 점찍은 땅은 하나님이 점찍지 않은 땅과 전혀 다른 땅이 되는 거예요. 한쪽은 약속의 땅이 되고 한쪽은 약속 되지 않은 땅이 돼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의 하나님의 소유로 등기된 땅이에요. 그 땅에서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추방돼야 될 운명을 가진 땅이에요.

이 말을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낙원이 생명나무가 땅으로 이동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늘에 있다가 땅으로 이동한 거예요. 이동해서 거기는 조건이 있는데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추방되고 율법대로 살면 남아있는 백성이 되는 그 조건을 갖춘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불신자, 출생부터 선택되지 않은 이방민족과의 마주침과 대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아닌 불신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스라엘로 하여금 체험토록 그걸 경험토록 해주시는 그 과정이 바로 신명기의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가 산다고 내 소유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발견하기 위해서 허용된 환경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 17절에 보면, “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가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록에 이르기까지의 동편 지경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 땅을 받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너희에게 육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육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라” 이게 뭐냐 하면 요단강 서쪽을 내가 줄게.

주는데 여기서 3장 25절에 보게 되면,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보게 해달라고 요청하지요. 자, 그다음에 26절부터 29절까지 그 요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케이 해줄게 했습니까, 거절했습니까? 거절했지요. 26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그만하면 족하니 됐네, 이 사람아. 이 일을 다시 내게 말하지 마.” 참 고생했잖아요. 모세가 애굽부터. 그런데 너는 들어가지 말라, 에요. 너는 들어가지 말고 27절에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동서남북 바라보면서 구경이나 하라. 왜 못 보게 하십니까? 모세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모세는 영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고 하인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따라서 모세는 단 한 명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아야 되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누굴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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