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8강) 로마서3:21(하나님의 사냥감)20220530b
(강의: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30페이지 중간에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성취를 원하셨다. 모세 율법에 기초한 예배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기초한 원 노선에서 나온 원 예배를 이루고자 하셨다. 즉 ‘율법 외에 한 의를 구현하는 예배이다.]
율법 외에, 라는 말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율법이 주변 환경에 수립돼야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적용이 될 때 비로소 율법 외에 한 의도 의미가 얻게 되죠. 율법이 없으면 율법 외에, 란 말도 의미가 없잖아요. 미장원 옆에 경찰서 있다. 그러면 반드시 미장원이 있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경찰서를 규정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다? 율법이 같이 있어줘야 율법 외에 의도 같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이라 하는 것이 있으려면 반드시 죄인이 있어줘야 돼요. 죄인이 없는데 율법이 있을 리가 없지요. 율법은 죄를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해야 되니까.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는 이유가 죄인 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율법의 의미를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죄인 만들어서 율법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인간이 죄인 역할 해야 되는 겁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은 완벽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절대로 완벽할 수도 없고 인간의 역할은 율법 앞에 철저하게 율법이 죄라고 지적당할 그 역할 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만든 겁니다. 어떻게 편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녹아들었지요. 그렇게 해서 율법으로 발생되는 게 죄인이다. 그러면 율법과 죄인은 같이 있는 거예요. 율법 있는 곳에 죄인 있고, 죄인 있는 곳에 율법 있는 거예요. 율법이 완성을 해버린다.
율법이 완성이 돼버리면 죄인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은 의인이 돼버려요. 율법이 자체적인 완성의 가치를 위해서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일이 벌어져야 돼요. 근데 죄인은 죄를 갖고 있고 의인은 의를 갖고 있어요. 죄인이 의인 될 수가 없습니다. 죄는 끝까지 죄고 의는 처음부터 의인이기 때문에 의가 의에서 나와야지 죄에서 의가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인이 의인 될 수 있는가? 궁금해요? 오백 원 안 받겠습니다. 죄인에게 죄인을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죄인을 제거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죄인 되시는 분이 죄인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만약에 의인 되시는 분이 죄인을 제거해버리면 죄인은 지옥 가고 의인만 구원받아요. 그러면 천국은 예수님 혼자 있어요. 백성이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의인 되시는 분이 죄인이 되셔서 죄인과 함께 사라진다는 말은 저주를 받아요. 저주를 받으면 드디어 의인은 물 건너갔어요. 의인은 없습니다. 왜? 모든 죄인은 저주받기 때문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게 뭐냐? 이렇게 되면 무엇이 승리합니까? 율법이 승리하지요. 그렇지요. 율법은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그 기능이 완성이기 때문에 율법이 승리하게 돼요. 그런데 여기에 로마서 3장의 말씀, 율법 외에 한 의가 출현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제 기능을 다 한 거예요.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해서 심판하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하여금 죄인으로 하여금 적절한 조치, 지옥 가는 심판 받는 저주받는 조치를 함으로써 율법의 선함은 완전히 자체적인 완성은 그 가치는 다 완료가 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봅시다.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과 인간의 만남에서 의인은 있다, 없다? 일체 인간에게는 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죄만 나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러니까 율법 외에 나타났으니까 이미 인간은 율법 외에 의를 손 타면 안 돼요. 그걸 가지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럼 아직도 자기는 제대로 율법의 이단옆차기를 안 맞은 거예요. 제대로 안 죽었고 실눈 떠서 죽을 척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찾아다니면서 그것까지 확인사살 다 해버립니다, 율법으로. 완전히 다 밟아버려요. 완전히 모든 인간을 밟아버리면 인간이 율법 외에 의를 탐할 수 있는 그러한 주체가 이 세상에 없게 돼요.
방금 어려운 말, ‘주체’란 말했는데요. 주체란 진리를 얻기 위해 한시적으로 나타난 개념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주체란 내가 진리를 얻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임시적으로 나타난 개념입니다. 만약에 우리 집사님 집에 개 있다고 치고요. 개집을 만들 때 주체를 생각합니까? 주체를 생각 안 해요. 그냥 만들면 돼요.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주체 생각합니까? 안 해요.
그런데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반대인 타인 또는 타자가 나에게 진리 여부를 물어요. 진리 여부를 물을 때 한시적으로 나타나는 게 주체입니다. 여기 수박 누가 먹었어, 라고 묻지요. 타인이 와서 진리 여부를 묻습니다. 있어야 될 수박이 세 조각인데 한 조각 밖에 없어. 수박 누가 먹었어, 할 때 내가 먹었어가 되는 거예요. 나는 누구한테 나타나기 위한 나한테 질문을 한 타인에게 너 말고 나야, 라고 등장할 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주체는 홀로 있을 때 수박 먹을 때 나는 지금 수박을 먹는다, 이럴 필요까지 없어요. 그냥 먹으면 돼요. 아무도 옆에서 왜 먹느냐고 이야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먹으면 되는데 내 것까지 누가 먹었어, 할 때는 갑자기 한시적으로 미안해. 내가 먼저 먹었어, 라고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하기 전까지 아담은 자기 주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인간은 진리라는 것이 필요치 않는데 남들이 진리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고 진리 여부를 물을 때 나는 진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티내면서 진리와 더불어서 주체가 자기 정당성으로 나타나는 게 주체에요.
“제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누가 네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고하라 하더냐?” 이렇게 되지요. 그 대화 자체가. 이미 여기서 아담은 주체를 가졌고 주체를 가진 이상 주체는 주체 밖으로 못 나가요. 나는 나 밖으로 못 나갑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것은 나로부터 나로 헤어지는 게 구원이에요. 이것은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나가 필요 없어요.
아담이 혼자 있을 때 나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여자가 생기니까 내 뼈 중에, 갑자기 내가 등장하지요. 자기중심으로 여자가 보조역할로 한 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주체가 없는 거예요. 내 주체 담당은 누가 하느냐? 남자가 내 주체를 대신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배필자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남자를 먼저 만들었고 남자를 보조하는 역할, 남성의 본질을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여성을 붙여서 남성, 여성의 대표자가 여성이 아니고 남성이 되면서 그 이후에는 무슨 세계? 남성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 남성의 세계가 뭐로 변했는가? 뱀의 세계로 변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뱀의 세계를 치기 위해서 주께서 따로 만든 세계가 있으니 그게 바로 여성의 세계입니다. 그 여성의 세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전부 다 누구 후손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지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거예요. 여자가 낳는 게 아니고. 여자는 보조적인 거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만인의 아버지가 누구지요? 아브라함이지요. 믿음 자체도 아브라함이에요. 만인의 아버지. 그 만인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 후손들로 주체로 행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가 주체로 사는 이상은 목숨 붙을 때까지 주체로 사는 이유는 영원히 계속해서 예수님을 남으로 그냥 돌려세운 거예요. 이 주체를 예수님 앞에 던져서 없앨 생각이 추호도 없는 거예요, 인간은.
믿어도 내가 믿고 소망을 가져도 내가 소망하고 주님을 사랑해도 내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우리의 주체 본질에 맞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진리가 되니까, 내가 정당화되니까.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포기하지 않고 율법을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진리를 확보하는 순간 나는 당당한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따라서 그 열매로 얻어진 선함이 내게 있는 한 나는 주님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냐 하면 나라는 주체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다 예수님을 나의 주체를 세우는 바꿔치기 하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요. 내가 있으니까 나의 뭐가 있습니까? 내 이름이 있지요. 주체가 있으면, 있다는 것 존재지요. 있음의 이름이 있고,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의 모든 곳에서 관계를 맺게 되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나에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냥 외면해버리면 의미가 없지만 내가 꽃이라고 부를 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이 세상에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걸 말을 붙이는 것, 또는 단어, 글을 갖다 붙이는 것, 이렇게 보는 겁니다. 내가 그에게 말을 붙일 때 그는 나에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된다. 아담에게 동물들에게 이름 붙이라 했지요. 그래서 동물과 아담은 이름으로 인하여 서로 엮여진 사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을 받을 때 또는 그 후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한 이야기,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한 거예요. 내 이름 부를 때는 누구 이름을 포기해야 돼요? 더 이상 내가 주인공임을 포기 돼야 돼요. 이 말은 그동안 공들였고 정들었던 나를 떠나는 겁니다.
공들인 나, 참 얼마나 공들입니까, 우리 자신에게. 정들었던 나. 이 나가 상장이나 좀 받고 돈이나 하고 남한테 칭찬께나 받아버리면 이 나는 못 버립니다. 공들인 나, 정들었던 나가 여기서 무엇을 주장하느냐 하면 영유권을 주장해요. 독도는 누구 땅? 우리 땅. 영유권 속에 제1번 좌석으로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내 자식, 금덩어리 같은 내 자식. 그것보다 약간 빠지는 게 뭐냐? 내 손자, 손녀. 그것도 멀리 있어요. 이게 나의 영유권이에요.
그래서 내 자식, 내 손자, 손녀 건드리면 수박으로 수박 싸대기 날립니다. 이거는 용서가 안 됩니다. 이 영유권으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자랑질하지요. 나는 벤츠 탄다. 지 자랑하는 거예요. 나는 팬티 입었다, 이런 것 자랑하면 안 돼. 나는 벤츠 탄다. “너, 뭐 타노?” “나, 차 없다.” 이게 게임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얼마나 공들입니까. 내 영유권을 문어발을 더욱더 확장하기 위해서.
미국에 12조 투자하고 왜 현대, 삼성이 투자를 합니까? 자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내 영향력을 자랑하는 거예요. 목사가 교회 오고 난 뒤에 장로 중에 자기 파, 자기 라인 아니면 다 내쫓는 이유가 그거에요, 영향력. 모든 인간들은 다 그래요.
심지어 부잣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자녀들은 손자, 손녀들 부추겨서 할아버지한테 잘 보이라 해서 할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뭐라고 선언하는지 유산을 땅은 누구한테, 집은 누구한테, 서울에 강남의 빌딩은 누구한테 넘어가는지 손자, 손녀들 동원해서 공작을 시키지요. 그 영유권의 주인공이 없어질 때는 자녀들이 전부 다 먹잖아요. 왕자들의 난. 심지어 헬라가 알렉산더 이후에 장교 네 명이 그 땅을 갈라 먹었어요.
그러니까 공들인 나, 정들은 나 그 영향력 행사, 바로 이걸 주님께서 주체로서 키우십니다. 왜 키워야 되느냐? 그래야 이 공들인 모든 인간의 주체가 죄가 되기 위해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 버린다 할지라도 할 말 없게 만드는 죄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주체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예수님도 하나의 주체로서 여기에 가담이 되어서 살해되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시면 돼요. 쉬운 말로 주체들 속에 예수님의 주체가 끼어듭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의 주체를 죽였잖아요. 이렇게 해서 그 죽음의 자리를 그들 속에 새로 발생시키는 거예요. 어떤 관계? 너희들에 죽은 나란 죽음의 자리를 그들의 모든 의미를 한 곳에 모으는 구조로 사용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주께서 삽질해서 모든 인간들 바닥에 구멍이 나게 만드는 거예요.
이런 주체들이 예수님을 죽게 했단 말이죠. 그럼 남아있는 것은 인간들 밖에 없지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대책을 보자는 거예요. 살아 있는 주체들이냐,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 하나님 쪽이냐?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걸림돌이 없으면 율법 외에, 란 생겨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었던 그 죽음을 이 세상을 통째로 제거하는 부정해버리는 걸림돌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율법 외에 한 의는 율법 지키지 말고 십자가 믿어야지,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이게 십자가가 모든 인간의 주체들의 성격을 다 파악하고 난 뒤에 그들의 성격은 결국 일정한 집중된 방향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모든 주체들이 작동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든 거예요. 알기 쉽게 이야기할게요. 그냥 간단하게.
[모든 인간은 주님의 사냥감이다.] 이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냥하게 된 거예요. 너 나 죽였잖아. 사냥하러 다니는 거예요. 저 안 죽였는데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구조가 확정됐어요, 체제가. 아까 진리 결정에 대해서 뭐가 발생된다 했습니까? 자아가 발생된다 했지요. 주체가 발생되잖아요. 내 이름의 의미를 갖잖아요.
그러면 진리에 관한 문제로서 우리는 이미 진리가 있다. 그 진리가 뭐냐? 내가 진리를 알잖아요. 그러면 나는 내가 버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진리를 알고 나는 선하고 거룩한데 왜 나를 버립니까, 말이 안 되지요. 아까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이게 오늘 참 어려운데요. 국민학교 4학년 얘가 나 오늘 부잣집 친구한테 소시지 얻어먹을 거야. 걔한테는 그게 관심사지요. 점심때에.
그러면 그 얘 그날 삶의 의미가 뭐예요? 세상 평화입니까, 뭐예요? 소시지지요. 소시지를 얻어먹겠다는 그때 그게 본인한테는 진리고, 진리가 발생되면 진리는 무엇을 생산한다? 주체가 발생되면서 내가 소시지 먹고 싶어서 소시지 얻어먹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이 발생된단 말이죠.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포기 못한다고요.
율법이 있어줘야 자기 주체가 의롭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데 그들이 뭐냐? 모든 인류를 대표해요.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인 거예요. 내가 정당하다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너나 죽어라. 그 뒤에 태어난 아니 모든 인간들이 바로 그 점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다는 겁니다.
율법 외에? 안 찾아요. 인간은 율법을 원해요. 그래야 내가 정당하니까. 법을 원한다고요. 그래야 내가 옮은 착하고 선한 사람인 것을 내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면 주님은 뭐냐? 너 너에게 분리시켜줄게, 이렇게 되거든요. 걸림돌, 아까 첫째 시간에 차이. 걸림돌, 차이 합치면 이거는 벌어짐, 갈라섬 이렇게 되지요. 갈라섬, 벌어짐을 구약적으로 하게 되면 이건 뭐냐? 우상이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자기 딴에 누구한테 제사하느냐 하면 여호와께 제사 드렸어요.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중요시한 겁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제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성전 제사에 의미를 줌으로서 제사 드리는 주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 받은 민족이란 이것이 구약성경의 옳은 해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부했던 거예요.
그들은 성전을 포기 못했고 율법을 포기 못했습니다. 이게 그들에게 사단되고 그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서 하나님을 죽이게 된 동기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러면 편하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이 교회 나가면서(교회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모르겠다만) 그냥 나갑니까, 뭘 지키려고 나가는 겁니까?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지키겠나이다. 뭐 지키려고 나가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내 주체를 포기하려고 간 게 아니고 내 주체를 괜찮고 근사하게 보존하고 잘 간수하기 위해 나간 거예요. 주체를 망가뜨리려 나간 게 아니고 내가 남한테 어느 누구한테 나서도 내가 기죽지 않는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교회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있다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 아니고 참 교양 있고 훌륭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그러한 증거로 작용하는 겁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직장에서 높은 사람 되어 직원 뽑을 때, “혹시 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 “하나님 믿는구나.” “예. 하나님 믿어요.” 그게 뭔 뜻이에요? 최소한 나는 양심은 안 더럽히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뒷배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나빠도 법을 어기겠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자, 걸림돌과 차이를 결합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우상, 갈라져야 될 것. 구약에서 우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무라고 지적을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그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자기는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고집한 거예요. 오직 여호와에게만 제사하고 다른 우상에게는 제사 않겠다고 자부한 겁니다. 과연 그것이 우상이 아니었더랬어요?
골로새서 3장 봅시다. 슬슬 여름 되면 말씀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리니.... 3장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을 뭐라고 돼 있어요? 우상 숭배. 탐심이 우상 숭배에요. 그러면 구약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우상 숭배하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 나는, 주체지요. 나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아니어야 한다고 우기게 되지요.
벌써 그 주체 자체가 탐심이에요. 구원 받겠다는 게 탐심이고, 예수 믿겠다는 게 탐심이고, 죄 안 짓겠다는 게 탐심이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겠다는 게 탐심입니다. 이거는 자연적으로 본심이 주체에서 나온 겁니다. 주님은 이런 걸 지적한 거예요. 그게 바로 탐심이라고요. 네가 하나님을 알고, 네가 예배를 알고, 네가 진리를 알아, 율법을 알긴 알아? 개코도 모르면서 자꾸 좋은 것은 얻고 나쁜 것은 버리려고 한 거예요.
이걸 서울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이건 구원이 아니고 지양한다. 지향이 아니고 지양한다. 헤겔 철학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전에도 나온 이야기지만 지양한다는 것은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은 떼어내고 좋은 것만 골라서, 진리 되는 것만 골라 모아야 된다는 거예요. 누가 고릅니까, 그걸? 그건 주체가 하는 거예요. 그게 탐심이에요.
아주 율법을 우습게 안 거예요. 율법을 본인들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왜? 율법은 선하고 자기는 선하니까 선한 것이 선할 걸 해서 결실물을 내겠다, 이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그게 나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율법이 들어간 목적이 너는 나쁘다, 나쁘다, 나쁘다, 그 나쁘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너는 네 주체로 그걸 강력하게 지금 반발하고 있고 반항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30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사도행전 2장 37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다음에 네 자로 나와 있지요, 뭡니까? “우리가 어찌 할꼬”지요. 결정 불가능성이에요. 첫째 시간에 결정 불가능성입니다. 이거는 주체가 이때까지 예정 못한 감당 못함이고 이걸 사건이라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게 있는데 이 주체가 감당 못할 범위 밖에서 일이 터져버린 거예요.
나라는 인간은 착함을 포기 못해요. 착하기 위해선 증거가 있어야 되고 증거로서 율법, 하나님의 법, 교회법, 하여튼 괜찮아 보이는 선한 법은 내가 끌어당깁니다. 끌어당겨야 돼요. 날씨가 덥다. 에어컨 사서 켜야 될 것 아닙니까. 율법을 내가 지켜야 율법 지킨 사람이 되고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지킨 나도 덩달아 선하다는 존재로 괜찮은 결과를 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발상은. 그게 인간 주체의 한계거든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주체는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면서 이 주체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럼 배고플 때 밥 먹고 수박 먹을 때는 주체가 필요 없지요. 그런데 외부에서 타인이 와서 너 잘했나, 못했나, 묻는 순간 나는 당연히 최선을 다했지요. 최선을 다하고 나는 내 안에 진리의 찌꺼기라도 남아 있으면 나를 온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선한 것도 같이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모순되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선한 게 약간이라도 남아 있으면 선하신 하나님은 나를 치지 못한다는 그런 계산이 서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율법을 한 10퍼센트만 지키면 선하다고 봅니까? 아니죠. 야고보서 2장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율법은 하나의 단편적인 지시와 명령이 아니고 법이 아니고 하나의 광장, 또는 공장, 창고,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A라는 율법, B라는 율법, C라는 율법 있지만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더라도 탐심을 가져버리면 거짓말하는 것이 같이 안 지킨 게 돼요.
왜냐하면 율법이란 창고에 거대한 체육관에 중심부가 있어서 율법은 그중심부에서 어떤 미지의 인물이 율법을 줬어요. 율법 출제자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 확인하려면 그 율법으로 예수님은 어떻게 지켰는지 확인하고 난 뒤에 지킨 게 돼요.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마라를 내가 내 주체가 진리의 담지자, 진리를 품고 있다는 내가 결정한 게 아니고 그 거짓말하지 말라는 율법의 출제자가 있잖아요. 출제자가 한 것처럼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거짓말한 셈이 돼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뭡니가? 답변했습니다, 입 다물었습니까? 입 다문 이게 거짓말 아닌 거예요. 그런데 진리는 예수님이 진리고, 입만 떼면 그거는 거짓말이 돼버려요. 출제자가 입 다물고 있는데 네가 왜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주님 언제 오십니까, 하니까 주님의 정답은 뭡니까? 그때는 나는 모르고, 이게 정답인 거예요. 안다고 서비스해주려 하면 거짓말 되는 거예요.
율법은 예수님이란 주체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율법은 반드시 예수님의 검사받아 튀어나오게 돼 있고 완성 여부, 합당한 여부는 예수님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걸 다 이룬 거예요. 어디서 다 이뤘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질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 유월절의 피, 유월절 양의 피뿐이에요. 사람 피 바르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제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아무것도 안 받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 보고 유월절 넘어가듯이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그냥 넘어가버려요. 그전에 조건이 있어요. 넘어가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무슨 주체를 부정해버립니까? 기존의 나 중심의 진리관과 나 중심의 주체를 주께선 부정해버리고 넘어가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굴 따라가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돼요. 제자들 중 아무도 안 따라갔습니다.
지금 제 하는 논리가 어디로 자꾸 이끌려하느냐 하면 주님의 사냥감이라는 쪽으로 이끌고 가는 거예요. 사냥감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그런 대상이 사냥감이에요. 총 쏘고 활 쏘는 것은 사냥을 따로 있고 우리는 도망간다고 온 산을 돌아다니죠. 그러나 주님께선 기어이 자기의 백성을 잡았다고 잡아버리잖아요. 찾았다, 포획되잖아요. 그게 바로 구원인 거예요.
유월절 피, 나 그것 믿을래. 이러면 주체는 멀쩡하니 있고 추가해서 지식 하나 얻은 것밖에 안 돼요. 주님께서는 그게 얼마나 큰 오해인지 상황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 모든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알았던 모든 십자가 지식, 부활 지식이 아무짝도 나를 근사하게 만드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전부 다 드러내는데 주께서 이끄실 거예요. 왜? 우리는 사냥감이니까. 주님이 잡아야지 내가 나를 잡는 것은 용서가 안 돼요. 우리가 또 주님을 잡는 것도 잡히지도 않고요.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몇 번 나타났습니까? 달랑 몇 번 나타났어요? 세 번 나타났어요. 40일 동안 여러 번 나타나서 격려하고 힘내. 이번에 누가 출전하나? “손흥민, 니가 뛰어.” 이렇게 감독해서 같이 좋아하고 23골 넣었다고 해주면 좋은데 부재의 존재에요. 존재하지 않아요. 제자들만 멀쩡하니 있지 존재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사냥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대에요.
누가 누굴 잡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연락이 되고 주님의 일에 합류되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모든 성도의 삶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지시대로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라 했지요.
그냥 사냥감이니까 지시대로 계속 움직이면 돼요. 내가 책임질 것도 없지만 그 이전에 내가 걱정할 것도 없어요. 주님의 위로는 어떤 새로운 놀라운 일도 더 이상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무책임하게도 내 인생이 내 문제가 아니고 주의 문제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의 창고가 있고 율법에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율법을 지킨 자에게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자기 부정의 소리가 나오겠지요. 어찌 할꼬,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 편지 전체의 내용을 짜버리면 거기 뭐냐 하면 주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이거에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때가 있잖아요. 내가 성경도 못 쓰고 돈 번다고 밥 먹는다고 얘 키운다고 이래서 되겠냐. 이러다 내가 지옥 가지 싶다. 자꾸 의심이 들고 내가 이 말씀도 못 지키고 이거는 성경말씀 설교 듣기도 겁난다. 못 지키는데 들어봤자 못 지키는 것만 나오는데 안 들을래. 무서워서 못 들어. 이런 생각이 안 들지요?
뭐 지킬 마음은 있지만 바빠서 못 지키고 여러 가지 일들 밭도 갈아야 되고 바쁜데 못 지키는 것 아는데 말씀 들어봤자 자책감을 들 건데 뭐 하러 꼭 말씀 들어야 돼. 이제는 띄엄띄엄 듣든지 말든지 하면 되지. 이런 생각 들지요.
사도 바울 편지를 다시 한 번 압축해서 보세요. 내가 열심히 했음을 자랑하지 말고 뭐만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 본인이 그걸 시범 보였다고요.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나머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온 이야기에요. 나는 오직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나는 나 자랑 안 하기로 작심했다 그런 뜻이에요. 자랑할 게 없는데 못 지켰다는 그게 허물이 아니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뭔가 자랑할 게 있으면 나 이것 지켰다고 싶은데 애초부터 지킨 것을 자랑하지 말라 했으니까 부담 없이 말씀 듣지요. 십자가는 또 어떻게 나타나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는지 뭐 그렇게 어렵고 힘들겠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할 이유가 거기서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의는 무슨 의냐? 율법을 다 지킨 분이, 우리의 자아가 안 떨어지거든요. 우리의 자아를 뭐로 바꾸느냐? 예수님의 자아로 집어넣어서 이 자아를 뭉개버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
그 작업은 우리에게 뭘 묻지 않습니까? 율법이 있어야 돼요. 율법을 주면서도 율법 외에, 그다음에 한 의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확장으로 살게 하실 때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진짜 예배, 예배의 진수다 이 말입니다. 그게 30페이지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렇게 길어요.
그러면 아까 그 말씀 기억나지요. 탐심이 뭐라고요? 우상 숭배지요. 그러니까 율법 외에는 반드시 율법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죄인이 있어줘야 율법이 되지요. 그러면 내가 있어야 되고 나는 평생 해야 되는 게 뭐다? 탐심을 내는 일을 하지 마세요. 가만있어도 돼요. 이게 고마운 것이 탐심이 백화점 앞에 지나가면 자연적으로 신상 탐심 내게 돼 있어요. 옆집에 아파트 넓은데 이사 가고 차 바꾸면 탐심이 나게 돼 있고요. 누구 아빠 대표기도 너무 잘하게 되면 탐심이 나게 돼 있어요.
보는 모든 것이 다 탐심으로 작동하도록 이미 율법 외에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일부러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주님의 사냥감이니까. 즐거운 사냥감이니까. “날 잡아보세~요.” “잡히면 죽인다.” 그 놀이를 주께서 하게 하셔요. 마음껏 잡아 족치도록 허락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주는 죄 짓는 것 외에는 탐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구원 받는 것도 탐심이고 신앙생활 좋은 것도 탐심이고.
그럴 때마다 주께선 너 잡히면 죽인다. 그 잡아주시는 그 은혜요. 어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처음에는 아가서 2장에 함께 가자. 두 번째는 들로 가자. 세 번째는 뛰어, 뛰어라. 뛰자. 뛸만한 넓은 운동장이 있으니까 거침없이 너 하고 싶은 대로 인생 살아. 어떻게 되든 인생 살아. 이 동산은.
그래서 31페이지 넘어가봅시다. 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전에 했던 거니까 생략하고 31페이지 밑에서 일곱째 줄,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게 하겠다, 그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거죠.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는 이게 개인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아까 첫째 시간에 한 단일체로 하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간단하게 하려해도 간단하게 할 수 없네요. 더 깊이 있게 우리가 생각해야 되거든요. 여러분 실력이면 깊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찾지 마세요. 이건 여러분 잘 아니까요. 25장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단독적으로 기도원에 산속에서 혼자 예배드리고 이게 영적 예배가 아니라 했어요.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주님 언제 주렸습니까?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그러면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된다 말이죠? 내가 물을 대접해야 되고 내가 옥에 갇혀 돌아봐야 될 타인이 존재하는 거죠. 그러면 타인이 있다는 말은 지금껏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한 내 정당성, 내 주체가 성립되잖아요.
내 자아가 주님의 자아로 바뀌려면 떼어내려면 내 자아가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구십이고 백이고 이게 살아 있어야 돼요. 떼어놓는 차이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온다? 십자가가 나오는 겁니다. 그럼 새로 구원 받은 내 자랑하는 게 아니고 뭐만 자랑한다? 떼어놓게 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평생 가도 안 고쳐지는 나의 육신 탐심과 못지않게 탐심을 갖고 있는 뭐가 필요하다? 똑같은 인간,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둘 다 상처를 안고 둘 다 자기 욕심 챙기고 서로 이용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잠깐 언급했는지 기억 안 납니다만 결혼이 뭐예요? 날 위로해 달라고 결혼한 거예요.
신부는 신랑에게 신랑은 신부에게 결혼해줄 테니까 그 대신 평생 나에게 내 상처를 보듬어주는 위로가 되어줄래? 남자들은 말은 못해. “평생 너한테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그렇게 요구하는 여자의 요구가 본인이 그게 탐심인 줄 몰라요. 여자는 생각한 게 뭐냐 하면 거래를 생각한 거예요. 내가 너한테 살림 잘해주고 아침에 밥해주고 국물 있는 반찬 제공할 테니까 너는 내가 생활에 아쉽지 않도록 현찰 가져오고. 그것도 칠십 너머까지 돈 벌어오라는. 이런 탐심 짓을 해야 주님의 사냥감이 돼요.
나는 주님만 믿지 니 안 믿는다 했는데 내게 다가온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이 나와 닮은 나의 모습이 타인의 모습이에요. 나도 만만치 않은 탐심이 있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아요. 그런데 십자가 생각하는 순간 내가 그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죄인 된 기념으로 당신한테 물 대접한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십자가 지신 주님만 개입해서 나는 잘났다는 게 아니라 대접 받은 너는 더 잘났다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똑같은 죄인들 만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경배고 그게 예배고 그게 우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현실의 장이 주에게 꼭 필요한 현실의 장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십자가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찾아보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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