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414a슥11장13절(사라지는 매개자)-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스가랴11장. 스가랴 11장 전체 내용은 진짜 목자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가. 거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짜 목자가 오게 되면 세상은 끝나는 거예요. 그럼 진짜 목자 이전에 누가 있겠어요? 제대로 된 목자가 아닌 어설픈 목자, 가짜 목자, 그런 자들이 있겠지요. 그럼 가짜 목자들이 실효성 있게 양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들이 양들을 돌본다는 요게 ‘목자 시스템’이에요. 목자 시스템. 요걸 흔히 목양이라고 하지요. 큰 교회 가면 전부다 당회장실을 목양실이라 해요. 목양실. 그러고 보니 구역질이 나네. 뭔가 구역질이 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비위가 좀 약한 모양이에요.
목자 시스템의 특징은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요청됩니다. 우선 ⓐ양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양이라는 게 없어요. ⓑ목자도 역시 없습니다. ⓒ목자가 나타나야 그 때 양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건 목자 우선입니까, 양이 우선입니까, 가 아니라 시스템 우선이에요. 시스템. 목자, 양 시스템이 우선이지요. 닭이 먼저 나왔습니까, 달걀이 먼저 나왔습니까, 정답은 말씀이 먼저지요. 말씀이 먼저에요. 닭이나 달걀은 말씀에 종속되는 거예요. 말씀의 시스템에 종속되는 거예요. 그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누구냐 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닭이 있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란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계란후라이 먹었습니까, 닭소리 들었습니까? 어느 쪽이지요. 베드로가 들은 게 뭐냐 하면 닭소리였습니까? 주의 말씀이었습니까? 주의 말씀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과 베드로하고 한 이야기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 흔하디 흔한 닭소리 듣고 왜 우느냐, 이렇게 멋도 모르는 그러한 경솔한 견해를 내놓을 거예요. 우리집 바로 밑에도 닭장이 있어가지고 뭐 새벽마다 닭 우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울어야 됩니까. 닭을 잡아야 됩니까? 시끄러우면 닭을 잡아야되겠지요.
길에 가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에요? 아니면 착하게 살으라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 니만 살고 있는 게 아니고 제대로 사는 분은 니가 아니고 너는 일시적으로만 짧게 살고, 영원히 사시는 분이 따로 너와 함께 살고 있다를 어떻게든 우리에게 그 낌새를 알려 주려고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낌새를. 다 한시적이고 일시적이거든요.
올림픽 열어봐야 조금 있으면 한 달 되면 끝나는 거죠. 한시적, 일시적이에요. 선거되어봐야 한달 동안 바짝 하고 그다음 아무 소리 없잖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냥 롤러코스트 타기에요. 그냥 전체를 모르는 거예요. 전체를. 전체를 모르고 부분도 치는 파도, 밀물 썰물 오면 허겁지겁, 밀려가면 나는 또 행복하다, 또 오면 나는 불행하다. 맨날 이런 식이에요. 도대체 그 작동되는 원리, 원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인간은.
누구한테 묻습니까. 물을 사람도 없고요. 그래서 지금 목자가 나타나야 양이 나타나는데 이게 목자 시스템인데 그동안 인간이 목자 노릇을 했다 말이지요. 인간이 양 노릇을 한 거예요. 그러니 서로가 인간이 되다 보니까 인간이 아주 수상한 요소가 되어가지고 딱 인간이 끼어들어 목자가 되고, 인간이 양이 되는 순간 양은 자기의 잘못은 모르고 괜찮은 목자 나타나가지고 모든 서비스를 다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목자가 똑바로 목자 값을 해야지.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 교인들이 자기 잘못은 모르고 목사보고 제대로 목회하라고 하는 거예요. 목회하라고 요청하는 거와 똑같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휴, 우리 교회 목사님은요,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인지 월급을 줬는데 세상에 월급을 반을 도로 내어놓으면서 이렇게 어려운 여건에서 다 받을 수 없다. 나는 이 반을 내놓겠습니다. 나는 주님이 가신 그 아슬 아슬한 희생의 길을 내가 먼저 시범조로 보여주는 것이 저는 목자로서 목사로서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반 내놓은 사람 있어요. 그거 100% 이단입니다. 딱 볼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목자는 주님으로 충분해요. 다른 사람은 목자하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은 주님이 하신 목자를 하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은 목자하는 어설픈 죄인의 모습이지요. 목자 코스프레. 목자 비슷하게 닮아가려고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수요일에 했어요. 알파요, 오메가. 나는 목사다. 나의 목적은 뭐냐, 주님 같은 목자가 나의 희망이다. 이게 자기 나름대로의 알파와 오메가잖아요.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뭘 요구하느냐, 내가 이렇게 하면 양들이 따라 와 줘야 된다. 니 시다바리도 아니고 왜 니 하는 거 다 따라가야 돼요? 왜 그런 거예요? 이런 잘못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기철목사에요. 복음을 알 리가 없지요.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자기 이상화에 이상자아라고 하는데 자기가 홀려버렸어요. 본인이 본인을 홀리는 괴물이 되어버렸어요. 아주 이상적이고 겸손하기 짝이 없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목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그 목자상을 본인의 이상향으로 설치한 순간 그 사람은 괴물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양이라고 하면서 양값을 할 수 없는, 양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죄악된 양임을 그걸 시범조로 보여주는 게 목사의 할 일이에요. “나도 양이 아닐뿐더러 여러분들도 양이 아닙니다.” 라고 죄인 됨을 알려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양은 진짜 목자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손수 만들어내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이 거들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목사가 목회랍시고 해가지고 특히 돈 좀 되는 교인들에게 유달리 이렇게 신경 쓰면서 수시로 심방하고 수시로 갔는데 그 사람이 십일조 많이 내고 헌금 많이 낸 사람이 “목사님 참 안됐지만 제가 다음달부터는 서울에 전근가게 되어가지고 서울에 있는 전에 교향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할 때 그 목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지요. 그만큼 공들였는데 후딱 대구에서 서울로 가버렸다. 내 돈! 내 돈! 내 돈! 내 돈! 그걸 가지고 점점 더 멀어져가네. 그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목숨! 내 목숨! 내 목숨이에요.
나는 더 살 이유 없음을 진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목사한테 이걸 매일같이 이걸 주지시키는 관계를 가질 때 그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는, 주님을 드러내는, 조건하에 한시적으로 목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될 때 양은 없어요. 원래 주님을 목자로 알아보는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어요. 따라서 이런 목사가 있다면 이 사람은 목사의 교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목자시스템을 가동시키게 되면 이 목사와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면 양이 주와 함께 있는 양이 이 목사를 진짜 목사로 알아볼 때에 그 때 목자 시스템이 살아나는 거예요. 목자 시스템이. 그러니까 양은 껍데기고 목사도 껍데기고 안에 누가 들어있다? 주님이 들어있는 그 시스템. 그게 목자, 양 시스템이에요.
스가랴11장은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어떤 일을 먼저 실시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이라는 목자 시스템을 먼저 안겨주고 그게 어떻게 붕괴하는가를 붕괴해줘야 돼요. 붕괴하면서 장차 진짜 목자와 진짜 양의 등장하는 목자 시스템과 대조되게 만듭니다. 마지막에 완성되는 목자시스템과 지금 이스라엘을 통한 목자시스템이 왜 이것이 같아서는 안 되는가, 같을 수가 없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조로 그걸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양 입장에서는 목자가 희생적이기를 바라지요. 마찬가지로 목자가 인간이 끼어든 목자입장에서는 양들이 목자한테 고분, 고분 했으면 참 좋겠다. 자, 어느 정도로 고분, 고분한지를 전에도 잠시 한 거 같은데요. 에스겔34장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리 되어있지요. 예언이지요. 그러니까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이렇게 엉터리 목자가 꼭 필히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만이 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영 아님을 나타내서 ‘아, 나는 영~ 아니구나!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라는 것이 예언의 실현이에요. 이게.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기가 죄인 될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주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가 죄인 맞다라는 그러한 능력은 주님의 예언의 능력이 와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눈이 활짝 열리는 거예요. ‘아이구~ 내가 양이라는 값도 할 것도 없고, 목자라 할 것도 없고, 나는 화가 적당해야 되고 하나님의 분노가 저주가 적절하구나’ 라는 사실을 말씀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 때, 타일 이야기했잖아요.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이 짧게 했는데 나전칠기 이야기했어요. 자개농. 자개농 할 때 일단은 바닥에 홈 해놓고요, 조개 같은 걸 붙이잖아요. 붙이고 그 바로 옆에 인접해가지고 또 다른 조개 문양에 맞춰 바닥 긁어내고 붙이고, 그래서 자개농은 전체가 전부 다 완전히 자개로 딱 덮여있듯이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예언의 말씀으로 완전히 빡빡하게 완전히 덮이게 하시는 거예요. 어디를 쑤셔도 말씀 아닌 게 없도록 그게 남은 자의 특징입니다.
콩기름가지고 광낸다는 것은 실제로 자개농 광낼 때 콩기름으로 해요. 반짝 반짝 빛이 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빛이 아니고 빛을 담는 등경이 되는 겁니다. “저 봐! 내 솜씨를 봐!” 주님께서 우리를 들고 하시는 것은 니가 잘났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솜씨를 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빛이 아니고 빛됨이에요. 빛됨.
빛이 아니고 빛됨. 이게 맞아요. 빛은 우리가 그 존재성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가 소지하거나 파악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주님으로 빛이 들어있는 등경들, 빛됨을 발견하지요. 성도들마다 다 빛이 들어있고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이라고 되어있으니까. 디모데전서에 나와요. 그 분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이 있어요. 디모데전서6장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다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그 빛이 들어있는 등경,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지요. 내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이 말씀의 완성이 있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자부심을 우리한테 안겨줍니다. 나한테는 목숨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생명이 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 그런 뜻이지요.
다시 에스겔34장4절을 보게 되면, 목자들에게 화가 있는데, 그 이유가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학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4절에 나오는 이것을 지금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이걸 백번 천번 들었다고 해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포학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는 본심을 어떤 인간이 목사가 돼도 똑같이 그런 짓을 해요.
사람이 여유가 있을 때는 남을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요. 그러나 다급할 때는 자기 다급한 것부터 먼저 챙기고 내가 나를 지켜왔던 원칙을 이걸 우선적으로 그걸 작동시켜 버려요. 맨날 언니한테 동생이 언니는 사는 게 편한데 이 여동생이 시집가서는 말썽꾸러기에요. 너무나 말썽꾸러기에요. 꼭 이은* 같아. 가평계곡에 있는. 말썽꾸러기에요. 맨날 언니한테 줘. 줘. 그럼 언니가 “아이구, 저 불쌍한 내 혈육인데 내가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주나. 아직까지는 내가 밥 정도는 먹을 여력이 있기 때문에 도와줄 때 도와줘야지.” 도와 주면서 또 다시는 이러지 말라. 니 힘으로 살아라. 잘 살아야 돼. 하지만 애가 얻어먹는 게 버릇이 되어가지고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언니가 사기를 당해가지고 낭패를 당했을 때 도와줄까요? 안 도와줄까요? 안 도와주지요. 그동안 도와준 건 뭡니까. 일단은 내 명예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하에 나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조건하에 도와준 거예요. 그러나 나의 가치가 뭔가 훼손될지 싶으면 동생이고 자식이고 부모고 그건 싸그리 나부터 살아야겠다. 니 도와줄 힘없어. 그게 뭐냐 그게 인간의 비로소 자기의 본심을 직시한 거예요. 진짜 객관적인 나를 망할 때 붕괴 될 때 발견하는 거예요.
다시 스가랴11장 봅시다. 스가랴11장1,2절을 보게 되면,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이게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북쪽입니다. 이 레바논 지역이. 지금도 레바논 수도가 뭡니까? 베이루트지요. 지중해에 있다면 이쪽에 갈릴리 사해바다 있고, 이쪽이 레바논이에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있고. 요새 요르단 죽을 지경이에요. 왜냐하면 이 요르단이 이스라엘에 오는 관광객 덕으로 많이 먹고 사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지를 못해가지고 나라꼴이 엉망이에요. 그렇잖아도 나라가 가난한데 아주 살기 힘들어요. 레바논도 세계적으로 못사는 나라로 유명하고요. 맨날 싸우는데. 이 레바논 지역. 이스라엘 지역에 바산이 있어요. 이 바산의 암소들아,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인데. 시리아. 시리아 위에는 터키, 이라크. 아브라함이 저 하란까지 갔다 하는 것은 저 터키 북쪽까지 갔다가 내려온 걸 말하고요.
어쨌던 레바논에 뭐가 많으냐 하면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통치에 있었으니까. 레바논에 울창한 전나무가 많았던 거예요. 백향목이라 해서 전나무에 속하는데. 굉장히 값어치 많이 나가는 나무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불을 내버려요. 불을 낸다는 말은 이 레바논이 갖고 있는 막대한 버틸 수 있는 그 모든 기본을 주님께서 싸그리 없애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풀들도 불타버리면 양들이 그 풀을 먹어야 되는데 목자가 있으면 뭐합니까. 양들을 먹일 풀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3절에 보면, “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 이 요단강 이 요단에 불이 전부 다 풀을 다 살라버리면 양들이 풀을 먹을 꼴이 없기 때문에 목자 입장에서는 양 축산업이 되지를 않지요. 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진짜 목자는 폭력적이다, 라는 사실이에요. 진짜 목자는 폭력적이에요.
이 기독교 교회간에 성경 좀 본 사람은 전부 다 목자를 뭐로 보느냐 하면 어질고 어진 선한 목자로 봐요. 기독교 가정에 액자를 해가지고 시편23편에 목가적인 풍경에다가 앞에 목자. 베드윈 복장에다가 지팡이 하나 들고 양들이 몇 있고, 밑에는 시편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액자 봤지요? 양을 품에 안고 있는 그런 모습. 목자가 양을 품고 있는 모습은 마치 김일성이가 유치원 아이 안고 있는 거 같은. 아주 아찔한, 살벌한 느낌이 들어요. 진짜 목자는 폭력적이에요. 너희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가치도 없다. 진짜 목자는 어떤 목자냐, 심판하시는 목자. 깽판 놓는 목자. 이것은 바로 인간이 개입된 목자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이 개입된. 인간은 그러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포기를 못하는데.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적어볼게요. 어려운 문장이지만 적어볼게요. 인간의 나라는 모습은 뭐냐, ‘내적인 궁핍함을 자신의 숭고한 구조로 떠받들고 있는 것’ 내가 나를 나의 구조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이게 자아에요. 자아. 인간의 자아는 이렇게 구성되어있습니다. 안쪽에 뭐가 있다고요? 내적인 궁핍함. 뭔가 충족되지 않는. 욕심은 하늘까지인데, 영~ 성에 안 차. 욕심은 거대한 댐인데, 비가 안 왔는지 물은 바닥이라. 그런데 그걸 애써 타인에게는 감춰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감추는데 그냥 감추면 안 되고 어떤 구조입니까? 아주 거룩하고 숭고한 구조. 숭고한 구조로서 그러한 자신을 본인이 본인을 떠받들지 않으면 누가 떠받들겠어요. 스스로 자기를 위대한 존재로 떠받들고 있는 양상으로 인간의 자아는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너지는 계기는 바로 역사적 재앙이에요. 역사적 재앙.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거. 러시아 전쟁 같은 거. 전쟁 속에서 이 숭고한 구조는 군복 입는 순간 달아나 버리고 이게 달아나니까 껍질이 벗겨지니까 안에 뭐가 남습니까? 맹목적인 궁핍함 그야말로 지독한 짐승성이에요. 짐승성. 지독한 짐승의 성질. 이것이 바로 전쟁을 치르는 전쟁 중에 군대 내에 이것이 만연해 있습니다. 남자가 되어서 군에 가야 될 이유가 괴물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평소에 괴물이었음을 군에 가서 비로소 자기의 정체가 노출되지요. 왜? 다 같이 괴물이기 때문에 그 때는 마음 놓고 정체를 드러냅니다. 나중에 제대해서 예비군 군복 입을 때 짐승 속성이 드러나지요.
역사적 재앙을 통해서 이 숭고한 구조를 주께서는 깨뜨려 버리지요. 이 재앙이 뭐냐 하면 AD70년경에 티투스라는 나중에 로마 황제된 사람입니다. 티투스라는 황제가 이 사람이 전쟁을 이르는데 이 사람은 좀 난처한 입장에 있어요. 대충 죽이고 항복 받으려 했는데, 이상하게 유대민족이 자꾸 무모하게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 군대 입장에서는 달려드는데 멈출 수는 없고 명령이기 때문에 황제 명령 때문에 치기는 치는데 그들을 그야말로 무기도 변변치 않는 그들이 뭐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전쟁에 오는데 그걸 하나 쳐내다 보니까 얼마 죽였느냐, 150만명 죽였어요. 거의 몰살했어요. 그러니 티투스 왕도 난처한 입장이었어요. 본인이 나서서 죽여버릴까 해서 죽이면 나쁜 놈이 되는데 가만히 있는데 마치 바위에 와서 부딪히는 거 같아.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스가랴11장 말씀의 성취에요. 날파리들이 알아서 바위에 부딪혀서 집단 자살을 반복하는데 그 절벽 역할 한 게 티투스 장군이에요.
그 맛사가 전쟁할 때는요, 사정을 했어요. 아, 제발 죽이기 싫다. 좀 알아서 기어주면 당신들 다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결사 항쟁하는 사람들이 너죽고 나죽자 해가지고 결국 애들 300명 빼놓고 다 죽었어요. 자기 신념과 자기 명분에 도취되어가지고 지가 뭐 천사라도 된 양 다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관여하는 것은 Please입니다. 제발! 니 괴물인 것을 인정하라. 제발 천사되지 말고. 훌륭하게 살 생각하지 말고. 이 괴물아! 최 괴물, 박 괴물, 김 괴물아! 괴물아! 괴물처럼 괴물로서 제발 행세해둬. 구원은 내 십자가 피로 해줄테니까. 제발! 괴물이 되어다오. 이걸 부탁하는데 인간들이 괴물이 되기 싫어가지고 지가 숭고하다고 지가 바치니까 전부 다 지옥 가는 겁니다.
뭐 과거에 개척교회 몇 군데 했고, 되지도 않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뭐 교회 장로고, 집사고, 아이고, 됐고. 그건 됐고. 제발 가미가제, 여러분 가미가제(神風)돌격대 알지요. 지 명분에 지가 도취되어가지고 가는 기름만 넣고 오는 기름은 넣지를 않았어요. 일부러 주지를 않았어요. 자살특공대에요. 자살특공대. 뭐 조국을..., 덴노 헤이카 반자이 일본 천황 만세를 부르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니 인간 내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이 의미가 있지 나는 아예 의미가 없는데, 의미 없는 것에 왜 그렇게 그걸 신앙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믿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은요, 믿음 없다 하지 마세요. 이미 인간은 믿을 대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현실. 현실을 이미 신봉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신이 갖춰져 있어요. 신은 이 세상 자체가 신이에요. 특히 과학자한테는. 거기에 대한 믿음은 철석같아요.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배웁니다. 믿을 것은 이 세상뿐이라고. 유치원 때부터 반복해서 그걸 가르치지요. 그러니까 요령부린다고 유치원부터 학교가서는 세상의 과학과 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을 배우고 그것가지고 좀 모자른다 싶으니까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그게 한 파레트에 같이 나란히. 파레트 보면 홈이 파여있고 빨강색, 파란색 짜가지고 있잖아요. 빈칸에 교회다니기 만들어서 거기다 짜넣는 거예요. 옛날에 보면 통지표에 국어, 수학, 영어 있다면 그 뒤에 칸에다가 종교 신앙 칸이 있어가지고 수우미양가 매기는 거와 똑같이 이게 같이 겸하여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 조정에 나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자신만의 숭고한 구조를 자기가 계속 떠받들고 살아보겠다. 내 가치 있다는 그 보람에 계속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참 답답해 가지고 Please. 제발! 이런 짓한다는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아요.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니라 주께서는 아예 받지를 않아요. 나름대로 훌륭했는데 안 받는다? 그럼 제품 하자 있는 거죠. 하청업체가 물건 만들었는데 안 받으면 그건 끝난 거예요. 성분이 100% 주님의 예수님의 피와 살, 주님이 하신 성분이 되어야 돼요.
한의원에서 보약 만들 때, 공진당 보면 오만원부터 오십만원짜리까지 있어요. 열 배 차이 난다고요.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가격 차이가 많이 날까요? 오만원짜리는 중국산일 가능성이 높고, 오십만원짜리도 역시 중국산인데 이게 오십만원하면 진짜로 착각을 해서 만들 가능성도 아주 농후하지요. 비싸면 진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풍조에 역으로 노리는 사업 발상 일 수도 있다 말이죠. 어쨌든 간에 그 성분이 제대로된 성분이 혼합도가 유지하면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오직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주님의 것만 담긴다는 것은 제발 너의 것은 행함은 좀 빠져줄래. 좀 빠져라 이 말이지요. 빠져라. 그럼 그 빠지는 기간이 뭐냐, 우리의 일평생이지요. 우리의 한평생. 나이 96,97살 하면서 전국노래자랑 보는 송해가 만약에 복음을 안다면 한평생 내가 활동한 것은 전부 다 꺼져줄래! 에 해당되는 일들이에요. 전부 다 꺼져줄래. 아무것도 거기다가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의미를 안 붙이면 되는데 십자가를 안 믿기 때문에 심심하니까 의미 붙일 것이 나의 행함밖에 없으니까 나의 전력이나 나이 화려한 역사에 숭고한 구조로 이 궁핍함을 대충 얼기설기 조작해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떠받들기 위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주께서는 모를 리가 없지요. 그래서 티투스를 해가지고 역사적 재앙을 발효시켰습니다. 150만 죽으면서 예수님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은 끝! 끝났어요.
그래서 여기서 주님께서 당부한 게 있어요. 마태복음24장16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게 AD70년경에 티투스가 와가지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다 소거한다.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마치 산불나서 다 모든 나무를 다 태우듯이. 스가랴 예언대로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미리 팁을 이야기해요. 그렇게 해라. 그게 16절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뭐하라?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은 살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여호와의 전사다! 군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리라. 여리고성을 이겼잖아. 아이성도 이겼잖아. 다윗이 여호와의 깃발로 이기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성이요, 우리의 피난처시오.” 시편에 많이 나오지요. 그거 믿고 한 사람 다 죽었어요. 여기 산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배신자요, 비겁자지요. 그리 살아라 이 말이지요. 그리 살아라는 말이지요. 그게 니 하는 행세에 딱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19장에 보면 롯이 나옵니다. 롯이 일과가 있을 때 천사가 롯에게 니가 이 사회를 개조하라. 이 사회의 정의를 회복하라. 촛불들고 집회하라. 이리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도망치라 했지요. 도망치되 어떻게 도망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엑셀 밟고 그냥 달려! 다시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못 볼 걸 봤다는 것, 과거에 내가 못 볼 걸 봤다는 그 마음으로 그냥 달려버려. 더러워서 안 본다는 식으로 그냥 달려버려라. 그런데 미련이 있던 롯의 처는 그래도 나는 내가 살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인데 하고 톡 돌아보다가 소금기둥 됐잖아요. 그래서 사해 근처에 가면 롯의 형상들이 소금기둥이 한 두 개가 아니고 여러개 돼요. 키가 보통 10m쯤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도망 쳐라. 그게 니한테 딱 맞다. 살려줄 때 아이고~ 왠 떡이고, 하고 도망쳐버려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하루 하루 살면 그냥 내빼는 삶으로서 더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건전한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내빼면 됩니다. 도망치면 돼요. 비겁하다 뭐 배신자여! 뭐 배신자여, 아니 배신자 노래하라 해. 하라 해. 이게 바로 재앙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세상 현실이 결코 신도 아니고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재앙이지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이가 밥상 위에 올라가는 것. 밥상은 밥하고 반찬만 올라가야 돼요. 물만 올라가야 돼요. 아이한테는 밥상이 자기 놀이터가 됩니다. 기어올라갑니다. 많이 경험하고 있지요. 지금. 손자가 밥상 위에 마구 올라가고 하는데. 떼찌, 떼찌, 올라가면 안 돼! 하지요. 아침 식사가 재앙이지요. 거기에 있는 찬거리의 인간의 모든 행함과 수고는 애 하나 올라가면 전부 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다 날아가요.
두 번째는 비슷한 예인데 이겁니다.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내부 벽지가 칙칙하다 해가지고 내부 인테리어까지 깨끗이 하고 그 다음 청소 깨끗이 하고 손님 맞이한다고 화환들 이렇게 몇 개 놓고 바람 부는 풍선있잖아요. 나래이션 모델 동원해가지고 개업식 해가지고 “제 다리만 보지 마시고요.” 이렇게 춤추고 있을 때 깨끗하게 신장개업 했을 때 지붕 무너지는 것. 안에 내부 깨끗이 해서 벽지까지 했는데 지붕 무너지면 뭐가 됩니까. 재앙이지요. 요게 뭐냐, 진짜 목자가 하시는 일이에요. 완전히 깽판 내버려요. 심판하시는 목자.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시는 그 주인물이 최후에 허락하신 분이 누구냐 이 말이에요. 그건 바로 스가랴에게 예언하신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쳐라. 사정없이 싸그리 쳐버리라고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 이방나라를 통해서 명령해버린 겁니다. 무슨 선한 목자가 어디 있어요. 무슨 선한 목자가. 폭력적인 목자지 무슨 선한 목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왜 우리는 그렇게 안 치십니까? 지금 많이 봐주고 있는 거예요. 기다려 봐! 니 순서가 아직 안 됐어. 이렇게 폭력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현실을 인간은 자꾸 뭐로 만드느냐 하면 현실을 자기화시켜요. 현실을 자기화할 때 여기서 뭐가 없느냐 하면 진리가 빠져버리지요.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니고 있는 보이는 그것을 내 것 만드는데 열중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협소한 인식’이라 해요. 협소한 인식. 좁디 좁은 현실이에요. 협소한 인식과 광범위한 진리니까, 광범위한 정보니까 이것과의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대결에 나서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 당시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목자시스템이었습니다. 목자시스템이었는데 목자시스템이 이런 협소한 인식을 가지고 현실을 자기화 자기 목숨 건질 것을 급급하면서 이렇게 양과 목자들이 이스라엘을 근근히 이어가려고 할 때 결국은 근근히 이어가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왜? 말씀이 더 세니까요.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의 말씀이 더 세니까. 그 말씀을 누가 당해냅니까? 당해낼 수가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셔도 마찬가지에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그러니까 목자를 쳐서 목자는 없어지고 양들이 그 현장을 떠나버리니까 양이 없고. 그러니 이 땅에서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었었으며 양은 결코 양이 아니었었습니다. 그저 이방나라처럼 내 목숨하나 부지하려고 그래서 그걸 힘을 모아서 국가를 견지하기 위해서 그냥 하나님 이름으로 나라 하나 유지시켜 온 것에 불과한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예를 하나 들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매듭을 잘 매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매듭을 꽁꽁해놓고 친구들에게 이거 30분내에 풀면 내가 니한테 돈 줄게. 풀어 봐라. 이렇게 툭 던져줬을 때 정답은 뭐겠어요? 꽁꽁 묶인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려고 하겠지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칼로 매듭 자체를 잘라버리면 돼요. 인간이 꼬아놓은 모든 매듭있잖아요. 어떻게든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남한테 인간 말종 소리 안 들으려고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살려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그냥 나랑 죽자. 잘라버리는 거예요. 선한 목자는 칼 들고 오셨습니다.
그 칼로 우리만 자르는 것이 아니고 선한 목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냥 자기 자신을 죽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는 목자, 양이 없었던 시절로 완전히 돌아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요. 그래야 창조하시는 주님의 창조의 위세가 고스란히 100% 고스란히 주님의 창조의 능력만 은혜만 제공되는 새로운 나라로 이게 전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스가랴 11장에 나오는 초반에 나오는 이 말씀은 주님의 제대로 된 목자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8절에 보게 되면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여기 세 목자 나오지요. 이것만 하고 첫째시간 10분 쉽시다. 목자가 세 목자, 목자가 세 사람이지요. 1,2,3. 이게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정말 어려운 게 뭐냐, 이 어려움 때문에 제가 주일날 설교에 한 때, 두 때, 반 때도 그렇게 어려웠던 거예요. 이걸 쉽게 하려고 하니까 또 어려운 게 나왔어요.
이게 세 목자지요. 목자가 몇 명입니까? 목자가 3명이잖아요. 인간 세계에서의 숫자는요, 양을 표현하는 거예요. 양.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걸 숫자로 표현하는 양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질로 표현해요. 질로. 본질로 성질로 표현 되어야 돼요. 3명의 목자가 하나의 목자에 있는 세가지의 기능으로 묘사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 세 목자가 나오는데 7절에 보면,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제거한다.
그 불쌍한, 가련한 양, 가련한 양을 통해서 목자 세 명이 나온다는 말은 이 가련한 양을 살리는데 세 가지의 기능이 총동원되어야 양을 살릴 수 있는 그 방식으로 주께서는 하나님이 진짜 목자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414b슥11장13절(사라지는 매개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사라지는 매개자로 형성된다. 사라지는 매개자.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라지는 매개자 이 말은 분명히 나타나서 깽판 쳤는데 없어져버렸어요. 없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팥죽이 있는데 팥죽을 뒤엎어버리면 팥죽이 쏟아지겠지요. 그런데 젓가락가지고 막이 형성되어있는 팥죽이 있지요. 그걸 가지고 젓가락으로 구멍하나 딱 냈는데 떼고 난 뒤에 보니까 그 팥죽은 구멍이 다 메워지면 무슨 일이 있었어? 하고 아무 일이 없지요. 그게 바로 사라지는 매개자에요. 탁! 치고 빠지면 그 순간은 뭐냐 하면 공백, 빈자리가 마련되는데 이 빈자리가 인간의 권력과 욕망이 그냥 두지 않고 속히 그걸 메워버려요.
권력은 국가적으로 빈자리는 없어요. 메워져요. 인수위원회가 있어가지고 다시 메워지고. 개인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빈자리를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아, 심심한데 뭘 할까? 대번 심심하면 다른 걸로 안 심심하도록 새로운 심심풀이 일을 또 하게 되어있어요. 촌에 있는 사람이 농사짓는 이유는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있는 게 없어요.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제일 답답한 것은 바로 이 빈 것을 달리 채울 게 없어서 그래요. 채울 게 없어서. 그래서 환자복 입고 거리에 나와서 담배 피우고 하잖아요. 아니면 화투 치고. 자기들끼리 화투 치고. 병원에서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러나 인간은 이 빈 공백을 괴로워하니까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다가 젓가락가지고 탁치고 들어가지요. 또는 칼가지고 잘라버리지요. 여기 7절에 보면,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막대기 둘을 취해서 은총과 연합인데. 그 은총과 연합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어버리지요. 10절에 보면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취하여 꺾어버리지요. 그걸 아예 칼가지고 쪼개버린다 말이지요.
은총이라는 말은 그동안 참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일종의 우리말로 쉽게 하면 ‘귀염+둥이’ 귀염둥이인데. 귀염둥이라고 했던 분이 그 분이 귀염둥이를 두 조각 내어버리는 겁니다. 연락이라는 것은 연합이라는 뜻이 되는데 요건 다른 말로 하면 ‘단짝’이다. 단짝. 남쪽과 북쪽이 죽이 잘 맞았다. 단짝이다. 그 단짝을 하나님께서는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10절에서는 모든 언약을 백성들과 세운 모든 언약을 폐기해버린다. 모든 언약을 없애버린다. 계약서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계약 무효에요. 그러면 계약이 무효 되게 되면 계약 당사자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전에 우리 도와줬는데. 어? 그 분 어디 있지? 그 분 떠났어. 떠났어. 가버렸다는 거예요.
젓가락가지고 톡! 탄탄해 보이는 그 현실에 공백과 균열이 생기게 만들고 찢는 일이 벌어지지요. 그게 9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 죽는 자는 죽는 대로(자연사지요),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기근과 여러 가지 자연 재앙),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살을 먹는다는 것은 전쟁)대로 두리라 하고” 전쟁하는 것과 기근과 그리고 전염병 도는 것. 그리고 역병, 자연사. 이 모든 것이 일반나라가 아니고 이게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9절에 보면 내가 그동안 그것을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 왔던 분이 바로 나다, 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은총이고 연합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계약서에 의해서 내가 너희에게 많이 봐줬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 계약서를 어떻게 한다? 찢어버리는 거예요. 이걸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계약 없는 상태로 되돌아 가버린 겁니다.
그 전에 8절에 보면 세 목자를 없애버렸지요. 자,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했던 이러한 그 폭력과 자른 폐기,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말소되어버려요.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을 나의 택한 백성이라 그들을 반드시 건지겠다고 계약했던 그 계약 당사자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게 된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내리치시는 계약 폐기와 그 재앙을 친히 담당하시는 분으로 하나님 자신이 속에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그게 불교하고 다른 점입니다. 불교는 지가 도 닦아야 돼요.
그러나 기독교는 복음은 기독교가 아니고 복음은 말을 조심히 해야 돼요. 기독교가 아니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분을 의도적으로 죄 삼으신 거예요. 인간이 미처 모르는 그 죄. 그 죄로 뭉쳐서 어떤 인물을 내세우는데 그 인물이 그 담당자가 누구냐, 하나님 본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본인을 계약 폐기하고 내리치시는 그 작업에 친히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피해자로 가담하는 방법으로 언약의 영원성을 보증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망해야 될 이스라엘 속에 망하면서 거기서 안 망하는 이스라엘을 완성을 시키고 생산해 내는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난 부산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문제를 일으키는 그 쪽에서 문제해결책이 있는데, 그 문제해결책은 딴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 이게 유일한 문제해결책이에요. 내가 죽는 게 문제해결책이 아니고. 내가 고생해서 해결책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그 죽으심에 참여함을 받는 게 하나님의 도우심이에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은 “같이 죽자.” 이게 도우심입니다. “니 나와 함께 죽음에 참여하게 되면 나랑 같이 사는 거야.” 이게 도우심이에요. 이게 은혜에요. 여러분이 죽기 전에 포도주 마시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신나게 노는 일만 남았지만. 크루즈여행 다니고. 그것도 일종의 죽는 방법이니까. 유럽여행 다니고 그것도 죽는 방법이에요.
다시 말씀드려서 사라지는 매개자, 하나님께서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합니다. 이게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따라 붙일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가라, 가버려. 가면 뭐 겁나나? 우리끼리 살면 되지.” 이게 속히 그 구멍을 기존에 했던 살아왔던 습관과 방식으로 속히 그걸 메워버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각오를 하셔야 돼요.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 이야기인지. 어렵기 때문에 미리 정답을 말씀드리겠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맞고 죽는 내용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목자입니다. 목자가 하나님에게 참된 목자가 주님 앞에 이런 수모를 하나님한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 폐기 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 자신의 온 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던 하나님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과 계약을 폐기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당신은 어떻게 아느냐, 내가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이잖아. 아들이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 쪽에서 너희 쪽으로 너희들 인간 쪽으로 그냥 던져 내어줘 버렸어요. 이게 로마서8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자기 아들을 내어줄 때 아끼지 않았어요.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느냐, 아끼지 않고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를 성취하신 분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성의가 어떻게 또 다시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 이것도 스가랴 예언입니다. 반드시 예언대로 되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스가랴를 다시 보게 되면 스가랴가 해석이 돼요. ‘아,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구나!’
11, 12절 보게 되면, “당일에 곧 폐하매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인간들이지요. 예수님을 팔아먹은 인간들,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들의 대표자 중에 대표자. 그걸 산헤드린 공회, 71명이 이 사람들이 의견일치 이스라엘 대표자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들은 그것이 예언인 줄은 모르고 그들은 올바른 자기들의 이성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죽이는 것. 하나님을 죽이는 것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죄를 우리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보면 돼요. 우리는 거기에 은연중에 수동적으로나 이미 합세하고 있고 그들의 결정에 우리는 그냥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뭐 내가 선악과 따먹었나?” 이런 식으로. “나는 주님의 십자가에 나는 가담 안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데 그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성경 좀 찾아봐야 돼요. 요한복음 19장 15절이요. 인간들의 본심이 나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맞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게 오늘날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가이사외에는 우리 왕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외에는 우리가 믿을 만 한 게 없습니다. 같은 뜻이에요. 이 현실은 정치적 모습을 띄고 있고 그 정치적 모습에 대표자는 그 당시는 왕이고 지금은 대통령이에요. 이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우리가 그냥 희미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가장 확실한 것 중에 가장 확실한 것.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냥 대통령이 있는 게 아니지요. 대통령이 있음은 저것이 우리의 필요한 진리입니다. 라는 것을 그 내용이 포함되어있는 그러한 이 세상의 구성된 모습이에요. 그 구성의 일원이 우리고. 그래서 이 성경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 이건 뒷전으로 나가는 거예요. 만약에 여기 우리 모임에 윤석열 당선자가 방문했다. 하면 이 성경이야기가 머리에 들어오겠어요? 당선자님 사진 한 번 찍어요. 이럴 거다 말이죠. 수업 중에 사진은 왜 찍습니까. 유일한 현실이. ‘현실을 내가 지금 대통령이 있다는 게 얼마나 나는 자부심과 영광스러운데.’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덜 영광스럽고 대통령과 함께 사진 찍어서 영광스럽고 가문의 영광이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평생의 우리의 삶 자체가 그래요. 삶 자체가.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환영을 받지를 못한 겁니다.
요한복음19장15절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이미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는 말은 단단히 구성되어있어요. 권력으로. 권력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들이 하나님, 하나님하지만 사실은 실제적으로 단단히 더욱 더 확고히 구성되어 있는 것은 정치적인 힘입니다. 실제적인 힘. 최종적인 힘. 인간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정치적인 힘 외에는 다른 힘은 없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출세는 환영을 받고, 성공이라고 대우를 받는 거예요. 그거 말고 우리가 믿을 게 뭐가 있나. 다른 것은 비현실로 간주되는 돼요. 그게 단짝이었고 그것이 그들이 서로 좋다고 귀염둥이처럼 서로 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서 이 귀염둥이를 잘라버리고 단짝을 잘라버려요. 귀염둥이는 귀염/둥이로 잘라버리고, 단짝은 단과 짝으로 잘라버리고. 이걸 두 조각 내어서 서로가 서로가 아무 무의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힘이 필요한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이 정치적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믿는 그들이 아버지의 일에 하나님의 일에 꼭 필요했던 겁니다. 나를 돈 주고 사라. 돈 주고 사는데 돈값이 나와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요. 얼마입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나를 카운트, 나를 해가지고 얼마면 되겠어? 얼마면 되겠어? 하다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은 삼십 개. 이 은 삼심개가 이게 어떤 값이냐를 우리가 봐야 돼요. 출애굽기21장32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21장32절에 은 삼십세겔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그걸 집어넣었는지 출애굽기21장32절에 나오는데. 은 시세가 어제부로 은 시세가 한 돈에 한 세겔에 3,500원이에요. 그걸 30냥하니까 105,000원이에요. 반면에 금은 어제부로 시세가 311,000원이고, 여기 30냥 같으면 9,330,000원이고 그래요. 시세3,500원밖에 안돼요. 30냥이니까 합하면 105,000원. 그 값이 어떤 값이냐, 물론 시세가 물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32절에 보면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소가 사람을 쳐 죽인 게 아닙니다. 사람을 쳐 죽인 게 아니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게 아니고, 남종이나 여종을 다치게 했어요.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다치게 한 거예요. 소가. 그러면 이 노예는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이건 하나의 사물체에요. 사물체. 물건이고 주인집의 가재도구에요. 그래서 노예를 다치게 되면 물건 파손 죄에 해당되지, 상해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물건을 다친 거예요. 물건을. 따라서 노예는 있어도 이미 없는 존재에요. 다만 물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노예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노동하는 기계. 일하는 기계만 되지 사람으로는 아닙니다. 사람일 수는 없어요. 그냥 농민이 아니에요. 그냥 노예라니까요.
소가 물건과 사람이라는 형태를 가진 노예 물건과 충돌했을 때, 나오는 배상요금이 은 삼십세겔이에요. 그러면 이 노예와 보통 인간과 일반적인 인간과 노예를 이렇게 차이나는 것이 출애굽 당시 그 시대의 사회상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느 지점에다가 자기 몸을 거기다가 담느냐 하면 남자 노예 자리에다가 하나님을 자기 자리로 삼고 거기에 투입해요. 개입해버려요.
그게 은 삼십냥이에요. 105,000원이에요. 죽인들 팔아먹은들 105,000원짜리도 안 되는 거예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라지는 매개자가 참된 목자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폭력있잖아요. 그 폭력 상태에 하나님이 일으킨 그 폭력 상태의 피해자로서 스스로 한 자리, 그것도 하찮은 자리에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스가랴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그렇게 한 그 삯을 그 다음에 어디한테 주라? 토기장이한테 주라 이리 되어있지요. 요건 한 번 찾아봐야 돼요. 요건 중요해요. 예레미야18장2절,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토기장이가 토기 만들겠지요. 19장1,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이렇게 되어있지요.
18장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19장2절에 보면 토기장이가 토기를 어떻게 합니까? 옹기를 사지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시고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마음대로 재앙의 날에 그걸 깨뜨릴 수 있는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토기장이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게 깨는 게 어디 있느냐, 19장11절에 나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을 토기장이로 삼는 거예요. 역시 사라지는 매개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남자 노예가 되시지요. 또 하나님 스스로 토기장이가 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 스스로 피해자도 되고,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노예로 팔렸다. 또는 토기가 깨어졌다. 그러한 무대의 장소가 토기장이의 밭이 되는 거예요. 토기장이의 밭은 원래 자기 마음에 상품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사정없이 깨고. 그 깨진 토기들이 많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토기장이가 돈에 노예로 팔렸던 그 상해죄로 됐던 그 벌금이 어디를 구입하느냐 하면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하게 돼요. 그 다음에 스가랴에 봅시다. 스가랴11장13절.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거죠.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복음27장6~10절 봅시다.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얼마를 받았습니까? 30냥 받았지요. 유다는 소속이 어디에요? 예수님 제자 소속이지요. 예수님 쪽에 속한 인물이지요.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인물이지요. 그 예수님 쪽의 은 삼십냥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왔는데 유다가 은을 성소에 넣었지요. 성소에 던졌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 성소에 던져 넣은 그 성전에 있는 그 삼십냥이 제사장들이 그 은 돈을 이것은 핏값이라 해서 성전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 해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 묘지로 삼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돈의 이동경로를 조사를 해보자 말이지요. 이동경로를 조사를 하면서 거기서 몇 가지의 의미 있는 개념들이 거기에 달라붙습니다. 가룟유다, 가룟유다는 사탄이지요. 그 다음에 성전으로 갔다가 그 다음에 뭡니까? 토기장이. 토기장이는 토기를 깨는 것. 토기를 깨는 그것이 뭐냐 하면 나그네의 묘지가 되지요. 묘지는 뭐냐 하면 인간의 최후의 귀착점이에요. 귀착점은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열왕기하23장10절,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 장소가 뭐냐 하면 이게 그 예루살렘의 성의 옆에 골짜기가 있어요.
가봤습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성이 있는데 옆에 골짜기가 있어요. 기드론 골짜기고 흰놈의 골짜기에요. 흰놈의 골짜기인데 여기가 뭐냐 하면 사람들 공동묘지 되면서 여기서 우상을 섬기는데, 우상이 어떤 종류의 우상이냐 하면 사람을 인신공양하는 사람의 몸을 하늘의 신에게 바치는 그런 앗수르나 몰록 그 당시 주변의 이방나라들이 섬겼던 그 제단이 있었던 곳이 이 흰놈의 골짜기에요.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립니다. 이 우상 섬김으로. 다른 신이지요. 다른 신.
그러니까 여기서 나그네의 묘지. 죽은 자의 최초로 귀착점 이건 결국은 뭐냐, 다른 신을 섬김. 이 가룟유다 성전에서 다시 토기장이로 토기가 옮겨지고 나그네의 묘지, 다른 신의 섬김.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면서 그 여파로 이 땅에 발생된 여러 가지 새로운 현장들이에요. 주님은 이 땅에 왔다가 사라졌는데 남겨진 것은 은 삼십 개가 이동하면서 인간 세계의 본질과 속성을 콕콕 찔러주는 거예요. 은 삼십 냥이.
사탄이 배후에 관여했고, 이 성전 삼십 냥이나 토기장이의 우상 섬기는 자리, 이 자리 토기장이의 자리거든요. 이것이나 그게 성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곳이에요. 성전이 완전히 저주받은 장소다 이 말입니다. 성전이. 가룟유다가 돈을 던진 곳이 성소에다가 던졌거든요. 이것은 안 받습니다. 하고 던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전의 율법자들이 피값으로 한 것은 살인하고 받은 이 현상금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안 된다 해가지고 툭 던지니까, 톡 도로 토해놓은 거예요.
애들한테 뭐 먹일 때 맛있다고 먹이면 애들이 그냥 안 먹어요. 보고 톡 뱉어버리지요. 뱉건 어떻든 간에 이미 경유하고 지나갔으니까 전부 다 동질의 같은 성질의 것들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피로 인하여 이 세상이 사탄이 작렬하는 사탄의 힘의 권력이 작렬하는 이런 저주받을 우상에 그 죽음에 집단 공동묘지라는 것이 완전히 밝혀지는 거예요.
그 열왕기하 22장17절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흰놈의 골짜기가 되는 겁니다. 아까 방금 22장17절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23장10절에 보면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이 흰놈이 바로 게헨나, 이걸 지옥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옥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함축하면 지옥이 돼요.
사람들이 지옥 가는 그 증거가 예수님께서 사라지는 매개자로 오시면서 사라지면서 이 세상은 지옥으로 정향돼 있다. 방향이 그쪽이다. 라는 것이 들통 나고만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람에게 희생되면서도 사실은 폭력적이에요. 인간 전체를 완전히 포괄적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다시 스가랴로 돌아가 봅시다. 스가랴11장14절,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내가 또 연합, 연합 연락이라는 거예요. 단짝. 단짝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꺾는다는 것은 파쇠, 폭력 이런 요소들이 담겨있어요. 꺾는다. 꺾어버린다. 부셔버린다. 끊었으니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라. 이리 했어요. 이런 일들도 AD70년경에 왔던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점령군에 비참하게 이스라엘이 오히려 저들이 먼저 설쳐대가지고 그들이 그만큼 죽일 의사도 없었는데 자진해서 자결하듯이 다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씀대로. 그래서 다 죽는 마당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의리가 남아있을 수가 없어요. 다 죽어버렸으니까요. 이게 바로 11장10절에 하는 모든 언약을 폐기하는 겁니다. 모든 언약을 폐기하는 거예요.
다시 마태복음 27장8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잖아요. 묘지라 하는 것은 인간의 최후의 귀착점입니다. 최후의 귀착점이 뭐냐 하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그 돈으로 인간들의 묘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왔다가 다녀감으로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죽였다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적으로 시도한 거죠.
9절에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그러니까 이게 선지자의 말씀을 아까 우리가 번거롭게 자꾸 찾은 이유가 있지요. 우리가 일부러 억지로 맞춘 게 아니라 지금 성령께서 예레미야의 그 말씀은 어쨌든 간에 필히 역사적 현장을 남겨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도 어마어마하게 어질 어질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에요.
주의 말씀은 실현되지 않고 그냥 취소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이 반드시 꼭 꼭 이렇게 역사라는 바탕을 만들어서라도 말씀을 거기다가 실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주님께서. 9절에 보면 선지자의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은 그 가격이 매겨진 자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은 삼십을 가졌고, 토기장이의 피값을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심같이 하였느니라. 그 토기장이의 밭은 토기를 깨는 밭. 토기장이가 토기를 깨어버리거든요. 그 토기장이의 역할은 하나님이 하시고 내 백성은 깨는 것. 언약이 폐기된 것. 그 폐기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여 버린 그 죄를 그대로 떠안고 그 전체가 사탄의 세계, 저주의 지평이 되는 저주의 세계가 되는 그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목자로서 해 오신 겁니다. 결국은 주님은 빈손으로 계획 없이 일하지 않아요. 다 주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14절 보겠습니다.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연합이라 하는 것은 뭉쳐있다는 게 아니라 서로 친하게 찐하게 지냈다.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가 의리를 끊어버리지요. 자, 그러면 은총도 막대기도 끊어졌고, 연합이라는 막대기도 끊어져버리면 이스라엘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더는 없습니다. 17절 봅시다.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
자, 그럼 오늘 강의를 정리해 봅시다. 그 목자시스템했지요. 목양시스템. 목자와 양을 같이 일으키는 그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가동될 때, 이스라엘에게 이 목자, 양 시스템을 여기다가 주었습니다. 주었을 때 이스라엘이 이걸 떠안게 되지요. 떠안게 되면서 여기서 결국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17절의 말씀처럼 ‘화 있을진저 그 다음에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라는 개념이 여기서 만들어져요.
15절에 봐도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어리석은 목자의 기구들을 빼앗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목자시스템 안목으로 이것을 평가할 때 이스라엘 전체 지도자를 뭐로 보느냐, ‘못된 목자여’ 라고 이렇게 한 번에 생활기록부에다가 전체를 못된 목자여, 라고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잘 들었으니까 목자가 없으면 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양이 없어요. 목자, 양은 같이 등장해요. 둘 다 없어요. 목자도 없고, 양도 없어요. 그럼 처음부터 목자가 없으면 이스라엘은 왜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하게 마련이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있어 줘야 사라지는 매개자가 다녀갔음이 그 취지가 살아나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에게 주님이 오시는 이유가 우리가 주님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어제 수요설교 때 생명은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생명은 걸치는 것이라고 했지요. 생명은 걸치는 것이지 내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그 주도권이 생명에 있고 나는 보조로 부. 주가 아니고 부. 부가 되는 겁니다. 보조가. 보조가 될 때 자세. 자세의 마음가짐이 뭐냐 하면 나는 바로 이스라엘처럼 진작에 망해도 상관없다는 그것이 보조자의 마음 자세고, 태도이어야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10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조금만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이걸 빼놓으면 오늘 강의가 다 헛방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셔야 될 말씀인데. 마태복음10장 제가 읽어보고 여러분에게 설명을 한 번 질문형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10장 5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방으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강의에 의하면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없음을 확인해요.
심지어 여기에 동원되는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마땅히 나를 구원해주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생각 자체가 이런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양은 목자 마음 안에 들어있어요. 내가 양이니까 손들고 나온다고. 손 내려! 손 내려! 우리는 구원받을 그런 권한도 자격도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다녀가야 비로소 내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요.
“저, 잃어버린 양입니다. 나쁜 짓 많이 했어요.” 이거 잃어버린 양 아니에요. 주님이 다녀가야 돼요. 주님이 잃어버림에 같이 참여된 자만이 진짜 잃어버림을 아는 자에요. 주님이 다녀감으로서 다녀가야 ‘내가 바로 잃어버린 자였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제가 주일낮설교에서 했는데 이게 바로 ‘탕자’에요. 탕자. 큰 아들은 탕자가 아닙니다. 큰 아들은 늘 아버지하고 붙어있었어요. 얼마나 착실하고 얼마나 효자인지. 효자이면 뭐합니까. 지옥가는데. 왜? 잃어버린 경험이 없어요.
그리고 처녀가 잔치를 베푸는 이유는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아서 그래요. 그리고 그 목자가 아흔아홉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들고, 한 마리 양은 아예 어깨에 들고 춤을 추며 오는 이유가 그 양은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잃어버린 경험을 본인이 해낼 수가 없습니다. 죄는 죄대로 짓는데 잃어버렸다는 경험이 없어요. 그것은 주님이 오셔야 돼요. 주님이 오시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내가 잃어버린 게 이런 걸 잃어버렸구나! 언약의 폐기되는 이것을 가지고 잃어버렸다고 하는구나! 야~ 언약 폐기가 우리 집에 돈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나의 실제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적이 있기 때문에, “잃어버렸느냐?” “예, 잃어버렸습니다.” “언약 폐기되었느냐?” “폐기 되었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제는 이미 주의 말씀대로 성취대로 찾아내었다는 뜻이에요. 스가랴 말씀대로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그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실시해주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가랴11장으로 이게 또 자개농처럼 자개농에 11장이 떡하니 갖다 붙는 거예요. 우리 안에. 11장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나는 잃어버린 양이었어. 어떤 친구가 있다가 “나는 잃어버린 적이 없어.” “그러니까 너는 저주받는 거야.”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왜? 주님은 누구한테 왔어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어요. 가지 마! 가지 마! 잃어버린 것. 따라서 복음을 친구한테 전할 때, “너, 잃어버렸어,” 그 쪽에서 화내면 개, 돼지지요. 그건 들을 가치도 없는데. “니, 잃어버린 거야.” “왜? 왜? 왜 그래?” “내가 왜 잃어버렸어.”
그 다음부터는 솔솔 설명을 해주시는 거예요. 탕자가 아니면 되찾는 기쁨, 주님께서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가 예수님을 되찾는 그 기쁨의 동일한 기쁨이 우리에게 없으면 그건 구원이 아니야. 폭력적인 목자가 오셔서 이 땅에 양도 없고 목자도 없고 본인만 홀로 사라지는 매개자로 사라져버리지요. 이게 바로 구약이지요.
그럼 신약이 되면 이 스가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30냥에 팔려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스가랴 말씀대로 온 인간세계 자체가 바로 언약이 찢어진 깨져버린 저주 받은 땅인 것을 다 보여주시고 그냥 자기는 홀로 하늘로 승천해버리지요. 그 다음에 누가 오지요? 승천했기 때문에 누가 옵니까? 성령이 오셔서 말씀대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빼내주시는 그 작업. 이것이 바로 말씀대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자리 잡은 그 자리가 은 삼십 냥이라는 노예 값으로 자리를 잡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상처 받은 채 돌아가시고 목숨 잃어버린 그걸로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다녀가심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이 이제는 도리어 우리의 제대로 아는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잃어버림을 잃어버림 되게 알려주신 그것이 구원의 신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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