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내 세계도 아닌데 망해야 할 세계를 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당당함이 오늘날 성도인 우리에게 있어야 하잖아요. 즐겁지 않습니까? 굉장히 가볍거든요. 모세 선지자의 소명과 달라요. 모세는 뭔가 아직까지 멸망할 예루살렘이 되기 전의 선지자기 때문에 뭔가 이루어야 해요. 이스라엘 만들고 건져야 하고 화나서 반석도 지팡이로 두 번씩 치면서 주님 좀 믿으라고 애를 써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망하자, 자~망하자, 대충 주변정리 하시고, 하늘나라 가는데 필요 없는 그런 것 좀 놔두세요’라는 식이죠. 이게 신약시대 마태복음 10장에 가면 9~10절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열두 제자 불러서 ‘어디 가서 얻어먹다가 그냥 떠나자. 나 있는 나라로 가자’라고 하시는 거죠. 제자들 아무도 안 따라갔습니다.
사도행전으로 가볼까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그들의 주변 정리는 뭐냐. 혹시 뭐 먹을 거 없으면 제가 가지고 있는 참외, 수박 좀 나눠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같이 함께 죽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그렇다고 그들이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역할이 있기 때문에. 살 때까지 악착같이 그들이 살아야 해요. 돈 한 푼 아끼고 시장에서 물건값 깎고 해야 해요. 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면서도 ‘아, 이것이 주님 시키신 역할이다’라고 생각하면서 100원만 깎아달라고 하고, 급행 타면 1500원인데 보통 타면 1300원이니까 주님 한 번 바라보면 ‘싼 거 타고 가. 돈 아껴야지’라고 하시면 그것도 주님 지시인데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이 자유, 여러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