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은 이렇습니다. 선택은 주님이 하시고 결정은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전선택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고, 그 운명은 네 책임이라고 인간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도대체 어떤 원리, 도대체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그러한 논리를 전개하는가? 그 비슷한 논리가 양자물리학에서 나옵니다. ‘양자중첩’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자중첩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중성자 하나를, 중성자 알갱이 하나를 쏘아서 벽면에 도달하게 하는데요, 그 사이에 중성자 알갱이가 지나갈 틈을 한 개 놔두고 쏘는 게 아니고 틈을 두 개를 놓아요. 틈을 두 개를 놓고 벽면을 향하여 쏘고 난 뒤에 결과를 보니까 알갱이가 단 한 개, 두 개가 아니고 단 한 개의 알갱이가 양쪽의 틈 두 곳을 다 같이 통과해 버렸어요. ‘이중슬릿실험’이라는 겁니다.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해명할 수 없었습니다. 알갱이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데 그것도 순서로 통과한 것이 아니고 동시에 통과했어요. 하나인데 어떻게 두 개 틈을 동시에 뚫고 갔느냐? 두 개의 틈을 하나의 알갱이가 동시에 뚫고 가니까 ‘간섭 효과’가 되어서 여러 개가 들어왔다는 표시가 흔적으로 벽면에 남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알갱이가 왼쪽으로 갔는지 오른쪽으로 갔는지, 요걸 한번 과학자들이 보려고 통과하는 그 지점에다가 관찰 기계를 두고 쏜 다음에 살펴보니까 두 곳을 동시에 통과했던 흔적은 없고 한곳을 통과했다는 흔적만 남아 있어요. 그 뜻은 뭐냐? “네가 뭔데 내 일을 관찰하느냐?” 관찰하는 게 문제에요, 관찰.양자물리학에서 이중슬릿 실험에서 나온 결과를 양자중첩이라고 이야기해요. 중첩되어 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중첩은 뭔데? 몰라요. 그냥 용어만, 이것은 기존의 용어로는 안 되니까 용어를 그냥 이렇게 쓰는 겁니다. 양자중첩이다. 양자중첩이 뭔데? 우리는 모르는데 두 곳을 동시에 통과한 그것을 양자 에너지가 중첩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용어 자체가 아무 내용이 없어요.
인간은 내 운명을 내가 관찰해서 나중에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내가 구원된 사람 맞는지 아니면 지옥 가는지를, 내가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게 관찰인 거예요. 그 관찰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7장 37절에 나옵니다. 양자물리학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창세기 27장에 에서하고 야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축복하고 에서를 저주합니다. 야곱이 거짓말해서 축복을 받아낸 게 아니에요. 그것은 인간들이 보편적 믿음도 아닌데 누구나 갖고 있는 믿음 가지고 관찰해보니까 ‘아,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거짓말했지만 그 거짓말 무릎 쓰고 축복 줬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38절에 보니까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동생한테 준 축복처럼) 그리 하소서 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저주받을, 지옥 갈 인간들이 할 소리가 아니라 이 말이지요.저주받을 인간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왜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왜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말을 할 자격이 너한테 애초에 없다는 것을 왜 네가 사전에 몰랐느냐?” 하는 거예요. “버려도 내가 버리고 안 버려도 내가 안 버린다는 사실을 네가 왜 모르고, ‘딴 사람은 버려도 저는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그 말입니다. 그걸 묻는 거예요.에서의 이런 사고방식은요,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그런 인간이 실수한 거예요? 실수는 없다고 했지요. 세상 자체가 그래요. 세상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자기 위주에요.이스라엘 입장에서 회개가 되려면 우상을 안 섬겨야 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최후에 믿는 것은 자기 자신만 믿고 있어요. 하나님 믿는 것은 그것은 그냥 해본 소리예요.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나를 믿는 내 믿음에서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뭐 다른 신을 섬겼다고요? 아이고,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네. 부처를 믿었네. 이제는 예수 믿지.” 이렇게 회개가 되는데 부처 믿는 자가 부처 믿은 적이 없고 예수 믿은 자가 예수 믿은 적이 없어요. 아무리 예수 믿고, 부처 믿고, 알라를 믿어도 나는 나를 믿는 믿음을 포기까지 하면서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 믿을 위인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냥 몸부림쳐 보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열성적으로 믿으면 믿음이라고 해주겠지.’ 그냥 몸부림쳐 보는 거예요, 그냥! 누가 아느냐? 본인이 알아요, 그걸. 남들은 속아 넘어가도 본인은 못 속이거든요. 내가 나를 버려? 미쳤어요? 내가 나를 버리게. 나한테는 내가 전부인데 나를 버려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어디를 구라를 쳐요, 구라를!
주님의 말씀은……,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직 주님의 주도권만 나타날 뿐이에요. “이것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 믿어라.” 그런 것 아닙니다. “너희들은 못 믿어.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내가 결정하는 거야.” 한결같이 그래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나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자체가 죄에요. 세상 자체가. 그러면 나를 통해서 세상 관찰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시선이 필요하지요. 세상은 주님이 갖고 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어어? 어디를 갖고 가요, 나를 위한 세상인데. 나를 지켜줄 세상인데 왜 갖고 갑니까?” 이런 식이에요.
“내가 바람피운다고 너도 맞바람 피워?” 이 말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나를 보듬어줘야지.” 이게 바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에요. 내가 실수하고 모자라고 하더라도 안아 주고, 안아 주고 격려해주는, 마치 내가 나를 격려하듯이 세상도 좀, 쫌! please, 좀 그랬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거예요.얼마나 우리가 쓰레기입니까? 쓰레기에 달린 눈도 같이 쓰레기에요. 그 쓰레기 눈으로 관찰하니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지요. 세례요한은 알아요. 성령을 통해서. “보라, 세상을 몽땅 가져가시는 분. 세상 죄를 위해서 가시는 분. 그 가셨던 그 마지막 모습이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모습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그래서 유대인들은 회개를 통해서 성령이 오지만 이방인에게는 그냥 성령이 먼저 와버려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회고하듯이 다시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다 보게 하십니다. ‘아, 내가 믿는 믿음이 그게 믿음이 아니었구나.’라는 사실, 회개도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는 사실, 그걸 알게 됩니다. 그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십자가에서 오는 거예요. 십자가 피 흘림에서 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똑같은 안목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는 것,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은 아니니까, 일단은 일단 쓰레기 같은 내 믿음은 아니니까요. 나를 쓰레기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믿음이거든요. 그게 관계다, 그 말이지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고 그 관계, 그 관계가 믿음이에요.
다윗은 주와 함께 있고, 나는 그 다윗을 섬기는 종이고, 그걸로 됐지 뭐요. 그러면 됐지요. 그게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늘 말씀에 호출당하는 삶, “이리 와서 이거 해라.” “예” “저기 가서 저거 해라.” “예”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에요. 믿음 관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행전 마지막에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런 단서가 붙어 있어요. 26절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도바울이 이사야의 말씀대로 현재진행중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사도행전 13장 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선택은 주님이 하고 결정은 본인책임으로 돌리는 방식, 이것은 양자중첩이 아니고 말씀중첩입니다. 말씀 안에서 너는 아니고, 예수님은 다 된다.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한 말씀 안에. ‘네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으려 하는 너는 버림을 당하고, 말씀이 말씀 자체의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너희들은 구원받는다.’ 이게 말씀 안에 같이 함께 들어 있는 거예요.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이것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버리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그 뒤의 말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만 믿었다는 것이 그 새로운 의미가, 믿음이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누구한테? 영생주기로 예정된 사람. 예정을 누가 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영생주기로 예정한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는 그 믿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을 일방적으로 통제한다는 뜻이에요. 왜? 주님 자신의 게임이니까, 나쁜 고기 좋은 고기 게임이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다시 보게 하옵소서. 나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어떤 취지에서, 어떤 관점에서, 어떤 시선에서,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의미가 밝혀진다는 것을 거기서만 감사한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