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강) 신1:38(비워있는 바닥) 20220530a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지도에 보시면 경로가 나와 있습니다. 경로가 수평적이란 것, 지평적이란 것을 감안해 주세요. 왜냐?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은 하나님께서 신약의 입체적인 것을 구약에 수평적으로 판을 놓고 수평적 경로를 통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극히 모형적이에요. 모형적인데 구약에 있던 그 당사자들은 모형이 아니고 그들은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모형이 아니고 목숨 걸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에게는 현실적 문제 되지요. 이 공식에 대해서 그들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내 목숨은 그냥 모형이다. 이 공식을 사람들 누가 이해하겠어요. 내 목숨 그냥 모형이다. 내 목숨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내 목숨은 최종적인 것을 위하여 잠시 하나님께서 활용하기 위해서 그냥 부여하는 것이다. 이걸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보통 세상 남자들 이야기,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한 방 대박나면 나는 졸지에 부자 된다.] 이런 속마음들을 갖고 있을 수 있지요. “지금 내가 구질구질하지만 암호화폐나 하여튼 주식 대박나면 나도 정말 회사 때려치우고 요트 사고 해외여행 다니면서 해줄게. 나만 믿어.” 한 방 대박나면 나는 부자 된다. 이건 남자의 호기도 아니고 이런 걸 노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뭐냐 하면 한 방에 자기 목숨에 날아간다는 이건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아무리 부자 되도 한 방에 자기 목숨 날아가 버려요. 상대방이 음주운전해서 박아버리면 그걸로 죽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은 뭔가 구약사람들과 동일하게 구약의 모형적 노선이 신약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방민족인 우리에게 그대로 연속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는 내 몸도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은 영광의 몸에 비하면 그냥 마네킹이죠. 그냥 모형이에요. 어릴 때 엄마가 옷가게하면서 봄여름가을겨울 될 때마다 쇼윈도에 동대문시장에서 떼어온 옷을 갈아입히는 거예요. 근데 그 마네킹을 무슨 옷을 입든지 그냥 아무 표정이 없어요. 피에로는 웃고 있지만 그냥 묵묵하게 있어요. 그 마네킹은 모형이니까.
인간이 아무리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예민하게 울고불고 뭐 좋으면 좋다고 해도 멀리서 주님 보게 되면 그딴 감정의 변화도 마네킹 같아. 그걸 죽은 존재라 하는 겁니다. 죽은 존재란 뜻은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죽은 존재란 너의 그 몸부림이 우주의 질서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걸 죽은 존재라 해요.
이 세상 우주 자연법칙에 영향 줄 수 있는 그 몸짓이나 그러한 행동과 태도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지요. 왜?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진행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김정은이 저래 까불어도 모형이에요. 모형치곤 좀 뚱뚱하지요. 뚱뚱한 모형도 필요는 해요. 푸틴이 저렇게 살인마로 변해서 우크라이나 공격해도 당하는 자나 공격하는 자나 전부 다 모형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고요.
주님의 뜻은 이 모형 어디 쓸까나, 이것만 생각해요. 이 모형을 어디에다 쓸 거냐? 다 썼으면 이제 한 방에 훅 가지요. 이사야 2장 22절(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네가 아무리 날고기어도 지금 네 호흡을 내가 빼앗아 가면 너는 그냥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춤추고 까불다가 한 방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죠. 그게 바로 풍선 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까불 때는 기가 세서 온 천하 한 것 같지만 다 써먹었다 하면 코의 바람만 마개 빼버리면 그만 주저앉고 가족들은 치우고 부조금 받아내고. 보람상조해서 긴 차에 실어서 보내버려요. 장례식 끝내고 부조금 놓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이번 손님은 내 손님인데 형이 왜 가져갑니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지도에 나오는 행로를 다른 걸로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여기에 모형적인 시간과 공간이 작용한다고 보면 됩니다. 공간이잖아요. 지금도 이 지역에 성지순례 가잖아요. 시간은 처음 출발할 때가 3월 10일인가 하여튼 2년 20일 만에 여기 도착해요. 경계선상에 도착하는데 그중에 1년 동안 호렙 산에 머물렀어요. 거기서 모세한테 세미나 받은 거예요. 내가 직접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니까 이게 수평적으로 가면서 여기에 수직적으로 하늘에서 제공된 게 있습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십계명 율법, 제사법. 수평적으로 가는데 호렙 산 갈 때까지는 그게 없어요. 기껏 아는 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율례 밖에 없어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함축해서 주의 뜻을 받은 것은, 집중적으로 받은 것은 이게 모세를 통해서 받은 거예요.
그걸 모세언약이라. 그전까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받은 거예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제사 드리고 예배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걸 받은 거예요. 그러나 그건 아주 모호한 거고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수직적으로 모세를 통해서 받은 겁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수평에 수직적 요소가 담겨 있는 게 되는 겁니다. 빈 스포츠카가 있는데 거기에 카레이서가 올라 탄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 카레이서가 누구냐? 주의 이름이에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엄청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스라엘의 특징인데요. 모형적인 그들의 경로, 뭔가 미래를 향하여 희망을 품고 그들은 모세가 인도한 대로 나아갑니다. 나아가면서 그들은 무슨 변화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본인들이 결정지을 상황이 오는 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결정 불가능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본인들이 결정하기 불가능한 상황, 대처 불가능한 상황.
이게 뭐냐 하면 특수 환경이에요. 지금 광야라는 환경이 특수 환경입니다. 그러면 본인들이 결정 불가능하게 되면 왜 이런 결정 불가능한 상황이 돼야 되느냐? 그럼 본인들이 결정 가능했던 것은 어느 시절이냐 하면 그들이 하나의 모형이고 모델이란 것에 대한 인식이, 그러한 자격을 부여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애굽에 살 때는 그들은 모든 결정은 누가 했습니까? 본인들이 결정했지요.
애굽 사람들 살아가는 거나 그 안의 히브리인들 살아가는 거나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냥 대전에 사는 거나 부산에 사는 거나 대구에 사는 거나 특수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남들처럼 베껴가면서 모방하면서 커닝하면서 하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잖아요. 매스컴의 특징이 그거잖아요. 새로운 아이유의 옷이 얼마냐, 김건희 가방은 얼마냐? 이것 전부 다 모방이잖아요. 칸 영화제 아이유의 주얼리가 1억짜리다. 그걸 또 찾아보고 궁금해 하고. 우리는 그런 것 찾아볼 필요 없겠지만.
결정지을 상황에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거기서 끄집어냈어요. “가자!” 가면서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살던 삶의 방식대로 이게 버틸 수 있는 동네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광야를 통과하면서 특수 환경 속에 지나게 하면서 매사가 결정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애굽에 살 때는 자신의 목숨 줄이 모형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 되지요. 실제 상황이란 말은 내 목숨 끊어지게 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가 진리로 작동하는 환경, 끝까지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 목숨은 유지해야 된다, 라는 이것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것, 이게 바로 애굽에서 살던 일반인들, 대전, 부산, 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란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게 더 나가요. 목숨 자체도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하나의 모형으로 마네킹의 그냥 목숨처럼 활용되는 새로운 환경 속에 그들을 집어넣었어요. 그럴 때 인간들은 자기의 모형 됨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거는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다? 내 목숨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여기서 강력한 반발이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일부러 일으키니까.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다음에 준비된 멘트가 있어요. “네가 내 율법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했다.” 이 말은 뭐냐? 율법과 율례는 무슨 선을 넘었습니까? 내 목숨이 최종적인 가치다, 라는 이 선을 율법과 율례가 그걸 넘어서게 만들어요.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유일하게 알게 돼야 될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야, 라고 거기다가 데려가지요. 사람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말은, 자기는 지금 일본말로 말해서 자기 목숨은 시다바리.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할 때 그 시다바리지요. 그냥 모형으로 일방적으로 주님한테 다뤄지는 거예요. 자기한테 중요하다고 여기는 내 목숨이 더 중요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모형으로 모델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본인들이 각자 자기 목숨을 갖고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집중을 해주셔야 돼요. 어려워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묻는 식으로 할게요. 목숨은 누구 목숨이에요? 남의 목숨입니까, 내 목숨입니까? 내 목숨이죠. 내 목숨이 한계에요. 내 죽어버리면 하나님이고 아무 의미 없어요. 내 목숨이 모형이 아니고 이게 유일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 목숨이 유일한 현실이란 것과 같은 뜻이에요.
내 목숨이니까 이거는 다양성이 되는 겁니다. 각자, 각자 다양하다 이 말이에요. 또 다양성 용어 나오니까 골치 아프지요. 성경은 이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바꿔버려요. 이게 뭐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드는 거예요. 다양성을 어떻게 단일성으로 바꾸느냐? 바꾸는 방법이 뭐냐? 그것은 다양한 각자의 모습의 바닥을 조사를 해요. 조사를 해서 그 바닥이 비워있는 자리가 되도록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이게 붕 떠있는 거죠. <톰과 제리> 그 만화영화에 보면 너무 빨리 달리면 신발이 아스팔트와 어떻게 됩니까? 붕 뜨지요. 발걸음 빨리 하게 되면 발걸음 하나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발걸음이 겹쳐져서 분주하게 흐릿하게 점선으로 표현되는 게 있지요. 바닥이 여기 있는데 붕 떠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목숨을 모형이 아니고 실제로 내 목숨이 중요해요, 이렇게 되면 바닥까지 이르지 못하고 지면에서 10센티, 20센티 떠있고 이 밑에는 뭐냐? 나의 인식이 나의 지식의 한계가 떠있는 데까지만 오니까 이쪽(바닥)은 없는 곳이 돼요. 없는 곳, 공백 비어있는 자리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남자만 육십 만이거든요. 남자만 육십 만 모두가 그 바닥에는 뭐냐 하면 디딜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그들이 지금 인도받고 있는 거예요.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자리 공통점은 뭐냐? 새로운 세계와 본인이 애굽에서 살던 그 방식과 이게 같이 마주치지 만나지 않고 있는 거예요. 붕 떠있으니까 비실제적이죠.
그래서 공백이란 점에서 동일하죠. 동일하니까 다양성에서 단일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걸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광야의 40년을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시간이 그런 데 봉사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란 인간의 바닥은 헛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바닥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가 아는 그 한계만큼은 그게 자기 자신의 전부고 거기에 준해서 현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모든 시작은 비워있지요. 이걸 숫자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0이 되겠지요. 0으로 시작하면서 다수로 퍼졌으니까 이걸 순수 다수. 아까 어려운 용어 하나 나왔지요. 다양성. 이번에 나온 단어는 뭡니까? 순수 다수. 그리고 이 바닥에 있는 걸 공백, 빈자리. 그렇게 순수 다수가 되면서 전체 모든 인간들이 아무리 각자 개성이 있다, 성질이 다르다고 우겨도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의 이스라엘로 전부 다 하나로 셈하여지는 겁니다. 하나로 셈되는 집합체, 이게 뭐냐? 이스라엘, 이게 내 아들.
그러면 이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빈자리 남아있지요. 빈자리는 무엇으로 생기며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전에 여러 번 언급했지만 여기에 유명한 노래,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채워야하나~(<젊음의 노트>)하는 노래있지요. 빈자리는 무엇으로 생기는지가 더 중요하죠. 무엇으로 생기고 무엇으로 채우느냐?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무슨 사건? 언약 사건이죠.
주님이 수평으로 가는 역사 속에 수직적으로 하늘에서 사건을 유발시켜요. 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요단강 사건 인간으로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결정하기 곤란하지요. 그 사건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들어가야 될 가나안 땅에 아주 많은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강력한 무기가 있었고 덩치도 크고 그들의 소산물은 참 유혹거리고 매력적이지만 빈자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던 자기가 결정 가능한 모습으로 볼 때는 공백이 접수가 불가능한 그 동네에 이르렀다. 2년 20일 만에 알았어요.
아까 했지요. 2년 20일 속에는 1년 동안 기간이 포함돼 있는데 1년 기간에 뭐했습니까? 호렙 산, 율법 받는 시내 산 밑에서 1년 동안 체류하는 그 기간까지 포함해서 2년 20일이에요. 지금 보고 있는 이 노선이에요, 노선. 이런 노선 자체가 주님이 주신 사건을 모형이 되는 히브리인들에게 결합을 시켜서 실제로 모형 판, 역사를 타박타박 그들로 하여금 이끄시고 걷게 만든 거예요.
그러면 사건이 빈자리를 채우는데 사건이 빈자리를 채울 때 무엇으로 채우는가? 율법 정신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시내 산에서 율법 준 거예요. 지금 따라오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자, 사건이란 뭐냐? 사건으로 말미암아 공백이 빈자리가 생긴다 했잖아요. 수학적으로 사건은 0을 만들어요. 제로를 만드는 거예요. 간단한 산수니까 여러분 맞춰보세요. 3-3=0, 5-5=0, 7563-7563=0 아시겠어요? 목숨-목숨=0
그러니까 실제 내 목숨이라 여겼던 것을 모형의 모습으로 바꾸어서 우리 존재의 바닥을 제로로 만들기 위해서 내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뭐가? 사건이. 우리는 평소에 사건 위주가 아니고 내 목숨이 한계에요. 내가 없으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요.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중요한데 이게 사건이 와버리면 나를 어디로? 내가 중요한 다른 세계, 나보다 더 선행되는 세계, 먼저 있는 선재한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나를 공백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 목숨을 그다음부터는 뺏는 쪽으로 사건이 찾아오지요.
그 사건이 유명한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이 사건이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살면서도 그 사는 방향이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 쪽으로 인도하느냐?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질문이 돼야 궁금이고 뭐 있지요. 구십 세 되거든 내가 알아서 간다고 일러라. <백세인생>
60세, 70세, 80세 몇 년을 살아도 송해처럼 96세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제로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나타나죠. 우리는 사건보다 내 존재가 더 중요한 거죠. 기존의 나보다 선행되는 세계로 넘어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율법을 줘서 너는 율법을 위반했으니까 그다음에 나오는 건 죽어 마땅해, 라는 고발조치를 하면서 율례와 법도와 십계명에 의해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도달해서 애굽처럼 살지 못하도록 만들지요.
왜냐하면 다양성은 각자 자기 목숨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나 위주의 단일성을 생각하지 나 없이 전부가 단일성 되는 것은 생각도 못하지요. “어떻게 네가 나와 똑같아. 하와이 니가 가라.” 이런 식이란 말이죠.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 이 말 아닙니까. “고만 해라. 많이 묵었다.” <친구> 영화에 보면 장동건이 칼 찔리면서 그런 이야기했다는 거잖아요.
찌르는 자와 찔림 받는 자가 똑같은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니가 살아온 환경 다르고 내가 살아온 환경 다른데 똑같을 리가 있어요? 안 되지요. 같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단일성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의 사건이 무의미하게 돼버리는 겁니다. 사건이 있어줘야 내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던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생겨지는 그 천국에 그런 식으론 이런 마음 가지곤 못 들어갑니다. 사건이 와서 우리 사적인 개인적인 내 목숨의 최종성을 주님이 깨뜨려버려야 돼요.
제가 어릴 때 봤던 연극이 있어요. 어릴 때는 티비 없어서 연극 같은 걸 자주 했는데요. 연극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주인공이 참 착해요. 참 이게 인간이 자기 목숨 위주니까. 나는 착한데 왜 고생해야 됩니까, 하고 반발, 96세까지 갑니다.
아무리 신앙이고 복음 들어도 그거는 휘발성이 있어서 다 날아가 버리고 마지막 남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착한데 전라도 말로 하면, “나는 착한디 왜 나는 고생을 하는디?” 충청도 말로 하면 뭐가 돼요? 충청도 이야기해보세요. “나는 착하당깨. 내가 왜 고생해야 돼유?” 마지막에 바닥에 남는 것은 자기 목숨 줄, 이것 깨지면 내가 평생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목숨 줄이 전분데. 예상 못한 복병을 만났네, 복병을.
사건에 대해서 인간들은 물 없는 사건, 양식 없는 사건, 피곤한데 아말렉이 공격하는 사건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양식을 주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낯선 생전 보도 못한 만나를 주는 사건 하나, 그 모든 사건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 전에 이미 환경 자체에 약속에 의해서 새로 생겨나야 될 단일체에 관한 그러한 나라입니다. 지옥 가기 전에 지옥 맛을 봐야 돼요.
지옥이란 게 우리 존재 이후의 사건이거든요. 지옥 가기 전에 지옥 맛을 봐야 되고, 반대로 하면 뭡니까? 천국 가기 전에 천국 맛을 보면 되는 겁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제대로 대처하거나 거기에서 그걸 부응할 수 없는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전부 다 발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2년 만에 올라갔는데 결국 못하고 여기 가데스 바네야라는 곳 있지요. 오늘 신명기 1장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여기서 그들은 올라가지 말라 했거든요. 너희 가면 죽는다. 그런데 말 안 듣고 올라갔다가 그들이 대패해서 통곡하고 난리 났습니다. 이 가데스 바네야 광야의 일로 인하여 그들은 40년 동안 이 광야가 뭐냐? 스무 살 이상으로 넘어왔던 사람을 사그리 다 죽여 버리는 그런 기간이 40년 기간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개인이 죽지요. 개인은 죽는데 그로 인하여 드러나는 것은 단일체, 이스라엘이란 단일체가 그로 인하여 구성이 돼버려요. 선배들은 죽고 그 위에 태어난 사람들로 재조립 화된 이스라엘. 그러면 그들은 뭐냐 말이에요. 그들은 그러면 말 잘 듣는 사람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냐? 참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선배들처럼 말 잘 들을게요, 라는 말 하지마세요. 그거는 빈말이고 말도 되지 않고요.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나 똑같아요.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인데 뭐가 믿음이 있겠어요. 주께서 보여주는 건 이것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차이입니다, 차이. 철저하게 모형으로 활용하는 거예요.
차이는 어떤 차이냐 하면 전에 선배들은 우리가 죽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런 사람이고 20세 이후에 홍해 건너고 난 뒤에 태어난 사람들의 특징은 그 출발점이 공백, 빈자리로부터 출생을 하게 된 거예요.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새로 시작하자. 이미 죽었다 치고 새로 시작하자. 아버지, 어머니 다 죽었으니까. 40년 동안.
이걸 십자가 사건부터 새로 시작하자. 다양성이 단일성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단일화가 폭발해버리는 것, 마그마가 터지듯이 단일화가 확장되는 식으로 살아가자. 그러면 뭐가 생기는가? 차이가 생겨요. 전에 왔던 그 이스라엘과 후에 약속의 땅의 이스라엘과 차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차이가 생기면 사건의 질, 성질이 더 깊어졌다. 사건의 성질이 더 깊어진 거예요.
전의 사건은 말씀대로 살면 된다, 안 된다 이게 주가 되는 거예요. 너 율법대로 안 하면 죽어, 저주받아. 살면 복 줘서 약속의 땅에 가게 할게. 우릴 하나의 개인으로 간주해서 우리에게 추궁하는 식으로 했다면 두 번째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완성자가 우리가 아니고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주의 이름이 율법을 완성시킨 덕분에 우리는 덤으로 가나안 땅에 쑥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 이름이 있는 곳이 뭐냐 하면 언약궤였고, 그 언약궤는 사람들이 우르르 해서 단결, 결심 이래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언약궤가 앞장서니까 하필 그때는 요단강이 분위기를 띄우네요. 갑자기 요단강이 홍수가 돼버려요. 홍수가 되어 더욱더 옛날 사람 같으면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끝났다, 우린 못 들어간다, 이렇게 될 텐데 홍수란 못 들어간다는 결정 불가능한 상황을 유발시켜놓고 언약궤의 단일성, 야아 이거 중요하다.
언약궤의 단일성이에요. 믿는 사람들의 성격, 개성의 단일성이 아니고 도대체 당신은 누굴 믿습니까? 주님. 나도 주님, 나도 주님. 어떤 사건 믿습니까? 십자가 사건. 피 흘린 사건, 피 흘린 사건. 이게 단일성 아니고 뭐예요? 이게 단일성이죠. 후기 이스라엘이 내놓을 게 오직 사건의 단일성이에요.
그러면 그 단일성의 부산물로 이스라엘이라는 다양성이 드디어 생겨난 겁니다. 나라는 인간은 그 기존의 언약궤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는가, 그런 관계가 하나님이 바로 전에 이스라엘에게 원했던 그 믿음이었던 거예요. 진즉이 믿음이 있었다면 40년 죽을 필요 없어요. 그들은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니고 자기 개인적인 애굽에서 살던 그 삶의 방식으로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광야에 그냥 이끌려 들어온 겁니다. 그것조차 주께서 활용하신 거죠.
그래서 죽고 난 뒤의 두 번째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 한 마디로 다 돼버려요. 합류. 앞에 붙이면 주의 일에 합류. 이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 이렇게 되지요. 이 결론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지요. 합류하는 거예요. 내 주위에 일어난 그 일이 주님의 일, 예수님이 일으킨 것에 나는 합류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특징은 뭐냐? 나 개인의 시작은 공백이 되고 빈자리가 되고 그 빈자리는 율법 완성자의 성과가 하나님의 의로 공백을 채워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합류할 뿐인데 내 바닥에 보니까 누가 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거예요. 뭐했다고, 뭐했어요? 수박 먹은 것 밖에 없는데.
그럼 주의 뜻은 뭐냐? 니는 내가 주는 수박에 네가 합류했으니까 너는 의롭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수박 먹었는데, 참. 그러니까 이거는 보통 인간들의 생각에서는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무슨 평가를 그런 평가가 다 있습니까. 여러분들 학창시절에 시험 치면 분명히 60점인데 백점 나오고 80점 나올 때 있었지요. 그때 교무실에 가서 따집니까? 가만있지요. 이상해. 왜 점수가 이렇게 되는 거야?
이 차이가 우리 속에 합류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차이를 나타내는 자로 합류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육신 속에 뭐가 남아있습니까? 옛날 광야에서 죽어야 마땅한 이스라엘 요소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같이 연동해서 같이 발생시킵니다. 이게 인간의 삶의 한계인데요.
어릴 때 우리 국민학교 3~4학년 때 관심사가 뭐냐 하면 그거였어요. 쟤는 오늘 점심에 무슨 반찬을 가져왔느냐는 그게 심각한 문제였어요. 그때 우리 집은 오징어포, 그리고 김치 이걸 50:50으로 섞었어요. 학교 다닐 때 200일 이상 이거에요. 그러니까 기분 좀 좋다, 수입 좋다하면 단무지 10퍼센트 하면서 오징어포가 좀 줄기도 하고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좀 사는 얘들이 왔었어요. 밥 위에 계란후라이가 덮이고요. 그냥 우리와 똑같은지 보니까 뚜껑 여니까 계란후라이가 붙어있어요. 밥 한 칸에 동그랑땡, 소시지에 계란 붙인 것 겹쳐져 있어. 벌써 노는 얘들 젓가락 들고 전부 다 빨간 소시지 하나 먹어보겠다고, 한 개 주면 좋다고 갈라먹고 싸우고 이러죠.
분명히 합니다. 인간의 관심사는 본인의 나이만큼 그때 관심사가 주 관심사에요. 이런 시절 지났지요. 또 국민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때는 누가 키가 큰가? 키 큰 얘들 다 부러워했고 키 작으면 음매 기죽어, 이렇게 살았어요. 관심사가. 키 크기 위해서 운동하고 수술해 달라 하고. 수술이 그때는 귀하지만. 지금 사람들 서장훈이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지금 나이가 되면 키 크고 소시지 못 먹는 그거 한 때에요. 어떤 아이는 이것 이기지 못해서 자살하는 아이도 있어요. 내가 인생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이래서 죽어 버려요. 인생 다 살아보지도 않았어. 다 살아보고 좀.... 그때는 그게 자기의 최고 진지한 거예요. 회사 부도났다 나 그만 살래, 이런 거요. 더 살아보지도 않았어. 회사 끝나면 끝난 줄 알았어요. 나이가 오십 대 관심사 다르고 육십 대 관심사 다르고요.
결국 한 결 같이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가는 일관된 동질성은 이겁니다. 돈이었어요, 역시. 나이가 구십 되고 돈 좋아하고 팔십 되도 돈 좋아하고. 어릴 때도 소시지 사먹을 수 있는 돈 좋아하고. 야아 돈은 하나님과 재물은 끝까지 라이벌이에요. 주님께서는 중간에, 그런 인간이에요, 우리가.
그게 뭐냐? 광야에서 망해버려야 될 자기 생명은 가진 돈으로, 나에게 내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돈 있으니까 니 생명 이 돈으로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 이게 우리가 하는 우리가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돈이 없으면 나는 착한데 왜 가난합니까, 이러한 반발이나 할 준비돼 있고. 생각하는 게 단지 그것 밖에 없는 거예요. 키 작아도 괜찮고 뭘 해도 괜찮지만 끝까지 사람들 기죽이는 것은 돈 없으면 기죽어요.
그래서 기회를 엿보고 한 방만 엿보는 것은, 그 한 방이 무슨 한 방이겠어요? 떼돈 벌 수 있는 한 방 그때만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제로가 아니에요. 자꾸 우리의 바닥은 주님의 십자가의 하나님의 의와 영생으로 채워져야 되는데 평소에 애굽에서 내가 나를 살리는 돈이 있어야 산다는 그 사고방식으로 내 바닥을 채우니까 이게 바로 율법이 없으니까 붕 떠있는 상태에요.
그런 상태는 죽기 전에 이미 지옥 맛보는 거예요. 지옥을 맛본다는 것은 천국을 맛보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천국에는 주님의 의와 영생으로 채워져야 되는데 우리가 사는 평소에 태어나서 배운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이것만 채우니까 그것은 광야 지난 약속의 땅에 전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갈렙과 여호수아 이 사람들은 뭐냐? 이 사람들은 홍해에서 이미 알았어요. 우리의 바닥은 어떤 주님이 주신 사건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건의 장치 중에 하나가 가나안 땅의 토착민들이 잘 먹고 잘 살지만 그들이 강력한 방어체제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건을 사건답게 하기 위해서 만든 하나의 무대장치인 것을 알았어요.
따라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정탐꾼이었잖아요. 열두 명 중에. “봤다. 그들은 강한 것 맞아. 그들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맞아. 그러니까 우리는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바닥은 내 식대로 내가 내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그 공백을 주님의 사건으로 채운다면 그 사건을 실어 나르면 되지 않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이미 수직적 사건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채운 거죠.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모세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신앙이 후 이스라엘을 이끄는 하나의 단일적 가치로 작용하는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 되어라. 그러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의 모델로 제시된 겁니다.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이 문제. 안 지켰지요. 그러니까 율법은 지킬 필요가 있다, 없다? 지킬 필요가 없는 거예요. 율법은 바로 여호와 이름, 여호와 이름이 율법을 지킬 거예요. 여호와 이름에서 준 율법이기 때문에 지킬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그 여호와께서 지키면서 남긴 사건 있잖아요. 그 사건은 자기에다 발바닥 밑에 깔아 넣으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 십자가의 의, 십자가 피를 자기 존재의 바닥에 깔아 넣으면 그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시는 분이 가시는 코스대로 우리를 실어 나르는 거예요. 이번에 새로 개발한 장갑차 안에 군인이 열 명 들어간 데요. 그 열 명의 군인은 장갑차 밖에선 안 보여요. 왜? 장갑차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게 예수 안이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장갑차 안. 바퀴가 장갑차로 가는 거예요. 우리의 바탕이고 기본입니다.
가게 되면 실려 가는 방식이 뭐냐? 그게 바로 20세 후에 태어난 이스라엘의 특징이 되는 거예요. 그 장갑차는 뭐로 만드는가? 율법으로 만들었지요. 율법으로 만들면서 거기서 실린 군사들은 율법의 혜택을 입는 모형이 되는 겁니다.
신명기 1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자, 아까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단일성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다양성 나오지요. 그 다양성은 어디로 모아집니까? 항상 단일성으로 모아집니다. 모세로 모아진다는 말은 율법을 받았던 매개체가 모세기 때문에 모세에게 모아지는 거예요. 모세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율법 나오지 뭐가 나올까요. 그런데 그걸 모세가 혼자 하기 힘드니까 모세의 확장 개념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13절에,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해놓고 15에 보면, “내가 너희 지파의 두령으로 지혜가 있는 유명한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어른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패장을 삼고” 패장이란 서기 보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하다가 17절에, 재판은 어디에 속했다? 하나님께 속했다. 그다음에 단일성입니다. 단일성 잊지 마세요.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단일성, 모세에게 돌려버려라.
현재 그 당시 모든 인간은 동일한 환경 속에 있다. 이게 모세 율법 안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의 예수 안, 십자가 안. 모든 인간은 동일한 환경이에요. 환경이 동일하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단일체란 말이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지요. 다양한데 다양한 그것들이 개인의 역량에 대해서 끝까지 묻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물을 때 유월절 피가 있는지 그걸 묻지 네가 그동안 뭘 했는지 묻지 않아요. 그런 것은 다양성 좋아하는 행함 책에 있는 자들에게 묻고 생명책에 있는 사람에겐 그런 걸 묻지 않아요. 어제 낮 설교할 때 주께서 모든 것을 심판에 맡기지만 중간에 뭘 빼돌린다 했습니까? 자기 백성만은 일찍 사망에서 생명으로 빼돌리지요.
뭐했다고 생명책 받습니까? 바로 자기 빈자리 공백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 율법이 다 이루면 의가 돼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의가 내 존재의 바탕을 뿌리를 이루면 이게 바로 주님의 일에 합류한 이스라엘 체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냐? 세상 나라와 그리스도 안에 사람과 뭐가 되죠? 차이가 되겠지요.
자, 광야의 의미는 뭡니까?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주께서 일으킨 차이, 그 차이를 통해서 다양성이 아니고 하나로 다수를 이스라엘 내 아들로 보는 주께서 사건을 통해서 그걸 일으켰다는 것을 바로 말해주기 위해서 광야라는 그런 절차가 필요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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