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7강

아빠와 함께 2022. 4. 27. 09:52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7강) 마태복음1장23절(함께하심)20220425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28페이지 보겠습니다.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이 말씀은 인간이 진리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속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내가 진리를 알아서 나를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나를 사로잡아 율법 체계에서 빼내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진리를 알게 되면 나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고 그 진리로 하여금 내가 이제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나의 완전한 신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아니고 진리 속으로 내가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그전엔 진리가 뭔지 몰랐는데 나는 나만의 세계가 진리인 줄 오해했는데 이제는 나만의 세계가 아니고 진리 속에 함몰돼버린 겁니다.

그 함몰된 진리세계는 진리 되시는 분이 뭔가 하셨어요. 뭘 하셨느냐 하면 예수님 그분이 율법을 완성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적어볼게요. 율법의 완성이 진리다. 진리 속에 빠졌다. 그러면 진리 속에 빠진 성도는 뭐가 되느냐 하면 졸지에 율법의 완성 속에 빠진 게 돼요. 율법이 완성되면 이게 의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의가 된 거예요. 이게 아까 첫 번째 강의한 것처럼 우리가 해답이 되는 거예요. 정말 이게 터무니없는 이야기죠. 우리가 뭘 봐서 의입니까? 우릴 보면 의가 안 되는데 우릴 안 보죠. 네가 하나님이 만든 의에 포획돼 있다. 의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 안에 새로운 환경 안에 속해져버린 거예요.

나를 보지 말고 나를 둘러싼 나에게 영향을 주는 환경을 나도 봐야 되고 주님도 보고 있고 다른 사람은 봐도 모르고 우리 자신은 그걸 아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뤄요.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수박을 먹든 방울토마토를 먹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전부 다 하나님께 오케이가 되고 패스가 되고 아멘이 되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 찬송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모든 것이 ‘아니요’가 아니고 ‘예’가 된다. 필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은 어려운 건 아닌데 표현하니까 어렵게 된 거예요. 그중에 예가, 모든 것이 그래야만 했다. 이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 이야기하는데 주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이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수님의 의, 십자가의 의가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이걸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다 일어나야만 했다. 이거는 모든 종교에서 다 이래하는 거예요. 심지어 철학도 이걸 주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무한이고 인간은 유한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은 무한 속의 하나의 요소가 된다. 이거는 철학에서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 거거든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모든 일은 그래야만 했다, 이게 라이프니치 철학에 나와요. 독일에 지명도 있지만 그런 사람 있어요.

라이프니치가 했다지만 불교에도 나와요. 모든 것은 적절하게 일어났어야 했다. 이게 화엄경도 나온다고. 세상의 모든 것은 인드라망, 모든 관계망, 연계라 하지요. 다 연결되어서 그런 일은 필히 일어나야만 했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너의 소소한 개인의 운명에 좌절하지 말라. 이거는 힌두교, 불교, (신의 주권을 이야기하는)이슬람교, 종교치고 다 해요. 허경영이도 이야기할 걸요. 그 사람 교주니까.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의가 빠졌잖아요. 인도에 가면 도사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 도사들의 주장은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의 길을 가라 이 말이죠. 제가 어떤 노래가사를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뒤쳐졌다고 이야기하지 말라. 그냥 나의 길을 간다고 외쳐라. 외치고 싶어, 하는 노래 있어요.

인간의 본성이 곧 종교고 종교의 모든 내용은 인간의 본성을 정리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변화가 있다, 없다? 전혀 변화 없는 거예요. 정리 잘했다고 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은 딴 분이에요. 이런 종교에 대해서 충분히 아신다면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분이고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미움 받아서 살해당할 만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돼요. 우리의 본성을 동의를 안 하잖아요. 오히려 그걸 죄라고 그게 죄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성령을 주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면 눈에 확 들어와요. 자유? freedom, 자유, 해방 좋은 소리네. 나 이제 예수 믿을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예수님은 우리를 해방케 하신 분이다. 그것은 오류거든요. 그런데 주의 뜻은 하나님의 의는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함께 하면 그것 자체가 예배가 돼요. 지금 [십자가와 예배] 그 대목을 하고 있잖아요. 예배부분이죠.

예배가 뭐냐? 함께 하는 거예요. 단독이 아니고 함께 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예배를 어떻게 드립니까?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주와 함께 한다면 주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환경, 시공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십니다. 그럼 하나님과 함께 한다, 그게 하나님의 주권이 되고 다른 종교에서도 주장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심지어 조상제사 지내면서 조상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잡수세요, 하고 수박 쪼가리 하고 명태전 내놓잖아요. 귀신한테 조그만 주고 그것도 고양이가 와서 다 먹어버리고. 저거들이 정종 들고 와서 안주 삼아 다 먹고. 하나님이 함께 한다 이거는 조상제사 할 때도 그런 마음인데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게 예배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게 함께 할 수 없는 부정적 요소를 들춰내는 함께 하심이다.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을 들춰내는 그걸 폭로시키는 거예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집사님,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날 때 누가 임신시켰습니까? (성경에는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성경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지요.

성령으로 잉태, 이게 인간들이 예상한 함께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마리아는 홀로지요. 홀로 임신한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있음이 뭐냐 하면 홀로 있음으로도 충분함을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홀로 임신한 거예요. 처녀가. 그러니 이게 함께 있다고 안다고 생각한 모든 인간은 누굴 이해 못합니까? 마리아를 이해 못하고 놀라운 사실은 마리아 본인도 본인을 이해 못해요.

본인을 이해한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밖에 없어요. 본인은~ 그 전두환 대통령이 이해한 본인을 이렇게 합니다. 그걸 의식이다. 의식에는 네 가지의 성격을 갖고 있어요. 첫 번째는 투명성. 의식은 내가 여기 수박이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 공리 같아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죽지 않는 한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의식은 결합돼 있는 양상이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한데 하나의 의식이 있을 때는 과거의 살아온 모든 기억과 체험과 경험들이 거기에 새끼줄처럼 다 꼬여있어요. 하나의 의식에서 다 꼬여있거든요. 예를 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미워지는 사람이 있어요. 이웃집의 그 사람 아무것도 나한테 해코지 한 적 없는데 그냥 생각만 해도 보기만 해도 미워. 그리고 이런 사람 있어요. 그냥 가만있어도 못 생겼어. 미치겠어. 귀신 뭐하노. 저거 죽었으면 좋겠다. 까불어도 귀여운 까붊이 있는데 까불면 까불수록 더욱더 죽이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끼는 사람 있어요.

인간은 어떤 대상을 볼 때 자기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갖고 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라 하는 것은 미해결된 상태, 미해결되어 제대로 정돈이 안 됐기 때문에 그런 것과 유사하게 등장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내 쪽에서 거부반응이 발생돼요. 이게 몸으로 나타나거든요.

선 볼 때 마음에 이상하게 보기만 해도 이쁜 사람 같으면 짜장면을 먹든 뭘 먹든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순간이 함께 있을 때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음식이 잘 됐는지 맛없다 그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서로의 눈을 본다고 바빠서 뭐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만약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있으면 스테이크를 썰어도 성질을 내서 소스 막 튀고 이게 왜 이리 안 썰려. 상대방 눈치 채고 칼질이 보통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고 누군가 죽이고 싶거든요. 당신을 만난 것 일생일대의 실수다. 오늘 결혼정보회사에 전화할 거야. 이런 사람 소개해주고. 그러니까 결혼정보회사에 제출한 이력서 보면 화려해요. 성균관대학 나왔고 키는 얼마고 몸도 건강하고 그 조건보고 상상하거든요. 조건 다 맞아요. 그런데 첫 인상부터 꼴도 보기 싫어요.

이게 타인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의 과거의 억지로 눌러놨던 구멍 난 공백을 그동안 분주하다는 핑계로 마치 없는 것처럼 행세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3반에 있던 어떤 아이한테 욕 얻어먹은 게 생각나는 비슷한 사람이 오게 되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해서 상대방은 이유도 모르고 왜 나를 싫어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제가 언제 싫다했습니까? 별로 기분이 안 좋다 이 말이죠. 저를 언제 봤다고 기분이 안 좋아요? 당신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내가 과거에 당신과 똑 닮은 사람한테 당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의식이란 것은 이렇게 보면 너무나 그중에서 하나를 따로 “그래 참아야 돼. 이 사람은 딴 사람이야. 그때 날 괴롭힌 그 사람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 새끼줄에서 하나의 줄기를 따로 뽑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한다는 게 이건 참 진짜 이거는 뭔가 본인이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게 아니고 정황이 몰아갔어요. 정신없이 완전히 빠져버리지 않고서는 결혼이 안 됩니다. 연애 오래해선 결혼 잘 안 돼요. 아무것도 모를 때 곧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해치워버려야지.

세 번째, 의식이 바꿔져요. 고정적이 아니고 흘러가는 거예요. 의식이 비겁하게 자꾸 변신을 잘해요. 의식의 특징은 항상 결합성을 가졌다는 이것이 철저하게 이기주의인 것처럼 의식은 철저하게 자기 의 중심이에요. 의식은 분명하게 있는데 그 의식의 내용에 들어가 보니까 너무나 이기주의, 자기의 과거의 아픔을 그동안 숨겨왔는데 니가 뭔데 내 과거의 이런 허점과 불안정성을 그걸 노출시켜? 말은 그렇게 못하지만, 좀 그러네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그래놓고 또 시장 통에서 만나요. 혹시 만나더라도 아는 척하지 맙시다. 또 꼭 집 거래할 때 어쩔 수 없이 둘 다 도장 찍고 해야 되고.

의식이란 뭐냐 하면 자기가 보다 의로운 존재로 스스로 자기에게 재인, 스스로 그걸 확인시켜주는 쪽으로 무리한 변화를 계속 시도해나갑니다. 의식은 비겁해요. 변명으로 일관하는 식으로 의식이 작동합니다.

네 번째가 의식은 어떤 대상을 향하게 돼 있어요. 빛이 있는데 빛이 허공을 향하여 비춘다. 빛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허공을 향하여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비추면 빛이 안 보이죠. 근데 빛이 사과를 비춰버리면 빛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무슨 색깔로 보입니까? 빨강색으로. 이 말은 인간의 의식이란 것은 뭔가 내가 잘났다, 난 이기주의다, 난 내 중심이다, 나는 무조건 상처는 들키면 안 돼, 나의 약점은 노출되면 안 돼, 라는 그 의식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적절한 대상을 만나서 본인이 확인하는 거예요.

그럼 이 대상은 무슨 죕니까? 내가 만난 사람들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만나는 사람 모조리 다 나의 의로움과 나의 이기주의의 정당함, 내가 나만을 챙겨도 이거는 옳은 일이 되고 나는 하자가 없고 이건 당연한 것이라고 증명해 줄 그런 대상들을 찾는 식으로 의식이 작동하지요. 빨간 사과가 사과 색깔입니까, 빛 색깔입니까? 참 어려운 문제지요. 빛이 없으면 사과가 빨갛게 드러나지 않지요. 사과가 없으면 빛의 색깔이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아까 제 말이 뭐냐 하면 의식이란 자기의 노리갯감으로 취득당하는 선택당하는 그 대상만 인간들이 찾아다니기 때문에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사물과 많은 사건이 있더라도 인간은 선별합니다. 관심 없어, 관심 없어, 관심 없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해서 자기 완벽과 자기 온전함을 증명하는 식으로 작동하는 게 뭐라고요? 그게 의식이라 했지요. 이 의식으로 인하여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인간에게 죽어야했던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이기주의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지요. 할 수 없는데 여기에 같은 욕망을 가진 자들이 한시적으로 일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요. 그 공동체의 최정점이 뭐냐? 국가고 우크라이나고 러시아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성경에서는 짐승이라 하지요.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이 뭐냐? 일단 내가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보호기반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것. 결혼이든 뭐든 무조건 내 자리는 안정적이어야 돼요. 누가 날 지켜주든지 괴로울 때 나를 위로해주든지 무조건 내 쪽이 안정적이어야 돼요. 그게 첫 번째가 사람은 떡이 있어야 된다. 악마가 그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굶고 있었어요. 악마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는 네가 몸이 안정적이지 못하다. 악마 입장에선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요.

예수님이 악마한테 시험 받을 때 며칠이었습니까? 사십 일이죠. 사십은 광야의 사십 년처럼 한도 있는 인간의 삶의 한도 경계선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면 사십 일이 돼요. 모든 인간은 이 한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 안에서 통하는 통합된 원리원칙은 사람은 떡으로 산다. 떡이 있어야 그다음에 하나님이다. 광야에서는 물이 없다고 원망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은 떡으로 산다, 이게 기본조건이에요. 기본조건인데 떡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서는 자기의 안정적 기반이 와해되기 때문에 와해되면 여기서 뭐냐? 반발 나오고 반항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을 여기다 사십 일 가둬놓고 인간들과 합세해서 누구한데 대들자? 하나님께 대드는 것을 조직적으로 인류역사를 이끌어온 거예요. 어디에서? 이 땅에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땅은 악마가 쫓겨난 곳이에요.

요한계시록 12장 봅시다. 9절,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어디로 내어 쫓겼습니까? 땅으로 내어 쫓겼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추적자가 되어 땅으로 내어 쫓긴 악마를 끝까지 무저갱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하늘에서 추적자로 오신 거예요. 야아 이거는 완전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강력부 형사도 이런 형사가, <끝까지 간다>하는 영화가 있거든요. 끝까지, 그게 진리거든요. 끝까지 간다.

인간은 모르지요.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나는 잘났고 나는 분명히 남한테 도움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기본 생각이냐? 누가 그런 마음 줬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 모르는 것을 주님께선, “인간 비켜, 비켜, 비켜! 네 배후에 악마 있어.” 그래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사십 일이라는 금식을 하는 가운데서 악마와 누구의 리턴매치, 결승전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거기서 서로가 그동안 악마가 인간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그 방식을 그대로 예수님한테 쏘아댄 겁니다.

받아랏, 하고 장풍을 날리죠. 그 장풍에 모든 인간은 으악, 하고 전부 다 쓸어졌습니다. 다 체포됐어요. 사람은 돈 없으면 못 산다. 친구보다 돈이 더 좋다. 남자들이 친구 찾는 이유는 친구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술맛이 나요. 술 먹는 핑계, 돈도 못 버는 게 술값 어디 있는지 따지기 때문에 친구 만난다하고 그동안 못 먹은 달달한 술 먹고 싶어서 핑계대고 만나지요. 술 안 마시면 나이 육십 넘어서 사람들 만날 이유 하나도 없습니다. 술 먹으려고 만나는 거예요. 당구 치고 이겨서 술 먹으려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였습니까? 사람은 배부르다. 배부르면 그걸로 만족한다면 개지요. 인간은 그냥 하루 세끼 밥 먹고 산다고 인간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은 밥에서 자기가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인기가 있어야 돼요. 남들이 나를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줘야 돼요. 뭐하라고? 정당하라고. 아까 의식이 뭐냐? 정당하고 나의 이기심에 대해서 찬동을 해줘야 돼요.

인간의 인기라 하는 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한 초월적인 능력을 행함으로써 인간들로 우러름을 받는 것, 그게 가장 점점 더 악마다운 기질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악마가 예수님한테 요구한 건 그거에요. 너도 나처럼 악마가 되라는 거예요. 그게 세 번째 나오지요. 우린 같은 동질이다.

복음을 아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 가장 위험하고 악마 쪽에서 쏘아대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뭐냐 하면 너나 나나 똑같잖아. 왜 자꾸 별종으로 네가 스스로 의식하면 안 돼. 인간은 다 똑같아.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자칫하면 영에서 육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데 잘 답변해야 돼요. 이제는 말을 아끼네요. 벌써 대변인 다 됐어요, 정치적입니까? 간단해요. 그렇다 하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그래.

이게 뭐냐 하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거예요. 아까 스스로를 파괴해야 뭐가 된다고, 내가 그래. “너는 믿음이 없어.” “아이고, 내가 믿음이 없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러면 되잖아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걸 보여 달라.” “내가 죽을 게.” 이게 예수님 방식이에요. 내가 그냥 죽을 게. 그냥 죽을 순 없잖아요. 그들의 고소한 대로 다 받아야지요. “네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 그래. 자칭 하나님이다.” 그냥 죽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나의 의식은 나의 방어는 주의 일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게 자유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판단하든지 구원은 주님의 일이지 누구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악마는 인간의 인기를 준다는 말은 자기가 인기 있음을 어떻게 돼요? 의도적으로 본인이 정립이 돼 있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세 번째 뭐냐? 나한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권세를 다 주겠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마 손에 있는 걸 다 주겠다고 할 때 누구에게 절한다든지 한다는 것은 내가 절하면 다음에 무엇을 얻을 것인지 나의 미래상을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자기가 의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식에서 이기주의적 의식에서 못 벗어난다는 사실을 악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낮 설교에서 예수님은 이중적 자아를 갖고 있어요. 하나는 죄, 선악체제에 오셔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이 당하는 모든 수모를 겪고요. 또 하나는 의, 이거는 뭐냐 하면 생명체제. 생명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버지가 지시한 율법을 이루는 그 관계가 의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식 가운데서는 아버지가 우선이거든요. 하나님 말씀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만 섬기라 했다, 절할 수 없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 라고 했을 때 이 사각의 링, 사십 일 금식기도, 리턴매치 이거는 아주 대단한 결투를 할 때 여기에 관람객들이 있었어요. 몰랐지요. 그 옆에 관람객들, 만화 보면 몰래 보는 사람 있잖아요. 이게 누구냐 하면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이 그제야 수건 들고 링 밑에서 수건 들고 물통 들어와서 막 주물러주고 발 마사지하고 어깨 하고 어디 쥐 낫나 하고 그다음부터 수고 많았습니다, 하고 천사들이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 사십 일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빠져라, 이 말이에요. 누구와의 싸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천사들과 악마와의 싸움. 이게 세상 돌아가는 원리원칙입니다.

성경에 그 이야기가 나와 있지요. 그런데 이 성경을 우리가 지킨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우리가 뭘 지켜요. 우리 싸움이 아닌데요. 싸움에 대한 전리품에 관한 거겠지요. 싸움의 전리품. 주의 이름으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이 기생 라합이에요. 왜냐하면 여리고 성에 바쳐진 물건을 누구한테 드린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처럼 그 바쳐진 물건 가운데 사람도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기생 라합이었어요.

기생 라합은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서 없었는데 전쟁을 하기 전까진 도저히 포함이 안 됐는데 등장한 그 기생 라합이 뭘 대표하느냐? 모든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속성과 본질은 이러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리품으로만 존재해야 참된 이스라엘 된다는 것을 여리고 성을 알려주는 거예요. 전쟁에 내 몫을 챙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뒤에 여리고 성 끝나고 난 뒤에 자기 몫 챙기다가 어떻게 됐습니까? 저주의 표시로 돌무더기 속에 죽어 될 사람으로 아간이 있었지요.

어제 오후 설교 때 제가 제목을 [싫소이다] 했지요. “싫어, 싫어. 나 포도원에 안 가.”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 절차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돼요.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 주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게 주의 일이 아니고 잃어버린 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을 분명히 하고 만약에 찾아졌다는 오롯이 주님의 공로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 일이에요.

자, 그렇다면 아까 질문을 제가 했는데요. 마리아가 임신할 때 누구로부터 했느냐? 성령으로 임신했다. 그러면 일단 누구는 빠져요? 아까 영적인 전쟁에서 누구는 빠져요? 모든 인간은 빠지지요. 심지어 정혼한 요셉도 빠집니다. 예수님 임신에 정혼한 요셉이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을 임신하고 출산한 취지가 담겨있는 그것을 뭐냐? 임마누엘.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란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사야에 예언되었던 우리.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면 마리아 배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 들어있지요. 그러면 마리아 예배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이미 시작이 됐지요.

찰리 채플린 영화에 벌써 몇 번째 예를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찰리 채플린이 호루라기를 삼켰는데 소프라노 독주회에 참석했습니다. 소프라노가 갈고닦고 힘들게 연습해서 유학 가서 많은 공부했던 하이 톤으로 노래하는데 관객석에서 딸꾹질하면서 호루라기 소리를 내버린 겁니다. 완전히 망치는 거죠.

마리아의 인생, 찬란한 자기 계획이 있겠지요. 요셉과 결혼했는데 그러나 그게 주도적인 것이 아니고 주도적인 것은 누굽니까? 딸꾹. 예수님이 함께 있어서 여기에서 엘리사벳 세례요한의 엄마가 마리아 몸을 보고 찬미를 해요. 이미 이게 예배가 된 거예요. 심지어 아기 예수님 낳을 때 그 근처 들판에 목자들에게 천사의 찬양이 들려옵니다. 그러니까 구심적이 있어요, 중심부가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나님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과 더불어서 함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예배입니다. 천국에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에서 할 일 없거든 천국 가지 말라 했어요. 천국 가서 골프 칠 일 있습니까, 뜨개질 할 일 있습니까, 천국 가서 레이스 할 일 있어요, 천국 가서 바둑 둘 일 있어요? 천국 가서 지상에서 딸꾹질처럼 성령께서 우리한테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범사에 감사하는 일. 감사 나오거든 딸꾹질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또 수박 너무 많이 먹어서 차오르는 그것 말고 감사가 나와요.

우째,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면서 굳이 감사가 나와야 되는 일인지. 감사할 만해서 감사가 나오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예상한 거거든요. 자기가 파괴되지 아니하면 파괴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나오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고 더 이상 자기를 생각할 게 여지가 없고 이거는 내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가 싫어, 하는 가운데 나오는 감사, “망했어, 망했어, 다 망했어. 그런데 왜 감사하지? 미쳤나봐.”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더불어 있는 것, 이걸 임마누엘, 함께 있음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 나오는데 그 목적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를 애굽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그들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 과정이 어때야 돼요? 이 과정 자체가 인간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건 모조리 솎아내고 수시로 그걸 주께서는 거부하는 식으로 진행돼야 되겠지요. 인간의 의식은 자기 의니까요. 자기 이기주의 그것을 철저하게 박살내는 방식으로 하지요. 그러니까 모세 자체가 위기의 인물이에요. 어릴 때부터 출생의 비밀이 있잖아요.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누나를 누나라 부르지 못하고 그냥 어머니를 유모로 불러야 되고 누나를 유모의 딸로 불러야 되고, 자기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도 아닌데 공주의 아들로 행세해야 되고. 그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합니다. 자기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야아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재벌3세가 수 조원의 재산을 거절하고 거절만 하고 자연인 됐습니까? 거기서 태권도나 하고 이랬습니까? 아니에요. 누구와 함께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그것도 즐거워했다는 거예요. 모세가 들었으면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할 정도로 왜 남의 이야기를 나한테 덮어 씌웠지? 위로인 듯 위로 아닌 위로 같은 위로, 이상한 위로가 돼버렸어요. 내가 과연 그렇게 살았어요, 할 정도로 즐거워하나니 이거는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람이라.

그거는 모세가 훌륭하다는 게 아니고 주님이 미리 모세 안에 들어가서 모세도 자기 인생을 지 마음대로 운전을 못해요. 왜? 함께 있으니까. 마리아의 임신이, 이쯤 임신 돼야 돼, 임신 돼야 돼, 상상 임신합니까? 부른다, 배가 부른다, 배가 불러와야 돼, 이랬습니까? 오히려 임신 될까봐 걱정됐지요. 자기는 한 의롭다고 우기는 요셉의 격이 맞는 정결한 신부로서 아내가 돼야 된다는 조건 때문에 자기도 처녀성을 유지해야 된단 말이죠.

처녀성을 유지하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예상으로 결코 연결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인간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처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뭐라 하라? 임마누엘로 하라.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일은 영의 일이거든요. 그래서 예배라 하는 것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야기할 때 예배는 영과 진리에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빠져라. 인간의 의식은 빠져라. 인간이 예상하는 예배는 다 빠져라. 함께 있음 자체가 예배 되도록 내가 주의 말씀대로 되도록 내가 너희를 임마누엘 유지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의 주인공은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의해서 형성될 때 그게 바로 영적 예배가 돼요. 자기 자신을 늘 부인해야 되겠지요.

그다음에 28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봅시다. [혼인한 여자가 성령의 세계에 들어오면, 전 남편이 죽은 것이 되어서 더 이상 전 남편인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도 바울의 비유와 같다(롬7:6).] 여기에 이상한 게 여자가 혼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이상해요.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지만 여러 번 했지만 이게 어렵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게 되면, 여자는 없습니다. 이 땅에 여자란 게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여자는 뭐로 표시되느냐? 마이너스(-)남자에요.

-남자라 하는 것은, 여자의 역할은 뭐냐? 나 있음이 아니고요 남자 있음을 위해서 여자가 있는 거예요. 여자는 내가 여기 있음, 그 존재함에 탈락입니다. 남편이 없으면 여자는 죽은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남편이 나를 대체하는 거예요.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창세기 2장의 원리입니다. 저를 나무라지 마세요. 꼴에 남자라고…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남자의 내부 본질을 위해서 -남자를 해놓고 +해서 온전한 한 몸이 되게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때 다 이룬 것 맞아요. 여자도 없으면서 뭘 다 이루었다? 아니에요. 아담이 있는 그걸로 다 이룬 거예요. 아담의 갈빗대 하나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아담 자체로 인간창조는 그게 완료된 겁니다. 완료됐는데 독수리 오형제처럼 분리되듯이 남자에서 빠져나온 갈빗대 하나가 여자가 되어서, 갈빗대 하나로 여자 만들었으면 다시 갈빗대 역할로 남자 속에 집어넣으면 그게 온전한 아담으로서 갖춰지는 겁니다.

그런데 갈빗대가 일탈해서 누구와 결탁했지요? 악마의 유혹을 넘어서서 여자도 먹고 또 누구한테 주었더라? 남편도 주어서 둘 다 죽어버렸어요. 둘 다 죽어버려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 범죄 현장의 시발점부터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그래야 범죄가 악마와 결탁됐다는 사실이 노출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인간들이 잘못한 게 아니고 누가 꽨 자가 있다. 그 꽨 자부터 그 원인을 밝혀나가는 수사 방향을 그렇게 잡은 거예요.

그러면 누가 범죄 했어요? 남자가 아니고 여자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뭐냐, 누구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이 여자라는 것은 뭐가 없습니까? 남편이 없는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 들어가니까 여자가 누굴 낳고? 여자를 낳고, 여자가 여자를 낳고. 여자 계열이죠. 그러면 이 여자 계열이 온전하려면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겁니까, 불가능한 거예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지요.

여자의 후손인데 이게 여자가 아니에요. 여자, 여자, 여자 해놓고 후손이 누구냐 하면 여자가 아니고 아들이에요. 아들이란 게 어디 나오느냐? 요한계시록 12장에 여자가 한 아들을 낳는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남자부터 있고 여자 만드는데 범죄로 인하여 모든 남자가 뱀과 결탁된 상태에서 이 자체를 찢어낼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그냥 찢어내되 범죄의 현장에서 범죄의 시발점 된 원인을 제거해야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범죄의 현장, 악마, 인간은 악마를 못 벗어나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여자, 여자의 모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이 아들이 됐다. 그러면 앞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뭐가 돼요? 누구의 아내가 돼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한 몸이 된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게 하나의 소설이 아니에요. 소설이 아닌 증거가 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이 외쳤던 그 십자가 부활이 이것만이 진짜 실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와 함께 있다는 것, 우리가 일구어낸 일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일구어냄 속에 함께 있으니 이 모든 일이 오직 주께만 하셨음을 증거하는 일로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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