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강-눅11장33-36(등불)-luk1103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1장 33절에서 3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3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1:33-3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갑자기 예수님께서 등불 이야기를 하시지요. 등불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은 여기가 밤이고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어둡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왜 어둡다고 여기지를 않느냐하면 어둡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지금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이 세상에 달려 있는데 이 세상의 질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을 따질 겨를이 없어요.
우리 몸은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에게 불편을 주는 세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이 나라에 살기 힘들면 이민 가고 교육 여건이 나쁘면 미국이나 호주나 뉴질랜드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이유가 세상에 내 몸에 기준해서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만 따지는 것이지 세상전체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런 눈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예수님께서 세상이 어둡다고 할 때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는 안목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게 된 거예요.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이 틀리는 다른 노선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와서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천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천국에 관련된 이야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고 그 말씀을 수용을 해줘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만날 수 있고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천국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의가 없지요? 간단한 문제지요. 예수님, 천국에서 사시던 분이 오셨고 그 분이 하는 일에 대해서 동의해 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단짝이 되고 하나가 되지요. 문제는 예수님이 하는 말이 도저히 수용이 안 되는 것이 문제에요. 예수님이 세상 보는 관점이 우리가 세상 보는 관점과 다르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등불 이야기를 끄집어 낸 거예요. ‘세상은 어둡다.’ 우리는 말합니다. ‘저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어둡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니까요. 어둡다고 하는 주님의 뜻을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왜 어둡습니까? 어떻게 어둡습니까? 어두운 이유가 뭡니까? 어둡다면 그 끝은 어떻게 됩니까?’ 질문들이 그런식으로 나가야 되거든요.
세상은 어둡다 하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단칼에 잘라버려요. 이것은 바로 천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지금 저는 천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천국에 관심사를 둘 여력이 없다는 뜻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 할 일 하시면 나는 내 할 일 충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조로 나오는데 각자의 길을 그렇게 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 예수님이 예수님의 일 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속속들이 구석구석 다 예수님의 일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예수님과 단짝이 되고 예수님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 영적인 사람들 혹은 성령 받은 사람이라 하는데 그 성령 받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나의 모든 것에 속속들이 주님이 다 개입해 계심을 저는 기쁘게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버리면 주님 따로, 우리 따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완전히 따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 시간되고 여건 될 때 주님 생각하겠는 식으로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님께서 내 하는 일에 속속 개입하고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쪽에서 인정하지 않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리되면 서로 대립관계, 서로 싸우는 입장에 있습니다. 32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죄한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정죄하리라.’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상 사람을 정죄한다 할 때 ‘저는 아니지요.’라고 우리는 한 발 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세상은 더럽고 악하다고 할 때에 우리는 ‘나 하나만 잘하고 나 하나만 바르게 살면 저로서는 상관없습니다.’라고 나올 때 그 세상가운데 이미 우리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수용해 줘야 우리가 예수님과 단짝이 되고 한통속이 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에 ‘세상이 악하고 세상을 정죄한다.’고 한다면 ‘저는 아닙니다. 저는 거기에서 빠지겠습니다.’ 하고 자기를 떼어낼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이 현실화 되어야 돼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수용하고 감사하려면 예수님이 말하는 그 세상 속에 우리도 같이 들어있어야 돼요. ‘저는 깨끗합니다. 세상은 더럽지만 저는 깨끗합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예수님의 뜻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은 세상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개인 이야기로 돌아서는 겁니다. 세상이 더러운 이유는 그 더러운 세상 속에 너의 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들은 더럽고 나 혼자 깨끗한 것이 아니고 너도 다른 사람도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그 더러움이 꽃다발을 이루는 거예요. 그 더러움이 모아지는 겁니다.
그 더러운 것이 모아지고 꽃다발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온천지가 다 정죄 받은 더러운 세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 세상이 더럽다고 이야기할 때 ‘저도 동의합니다. 사기 당해보니 세상이 이렇게 더러운 줄 이제 알았습니다.’라고 자기 빼놓고 세상 더러운 것이 아니고 그 세상 속에 우리를 포함시킨다 그 말이지요.
지난 주일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 할 때에, 구원이라는 작업을 할 때 우리는 가만있는데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 작업 속에 우리가 하나의 재료로서, 고추나 양파같이 요리의 재료처럼 들어갈 때, 그렇게 들어가는 우리를 다룰 때 그것을 총괄적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속에 우리가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마치 분쇄기처럼, 분쇄기속에 우리자신이 섞여 들어가서 거기서 무더기로 뭔가 나오는데 그게 구원이라는 무더기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작업을 위해서 우리가 소모되어야 되고 재료로 동원되고 참여되는 겁니다. 내 구원 따로 챙겨서 나 고상하다고 고수할 입장이 못돼요.
그럴 형편이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욥기 3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자기 생애를 저주합니다. ‘나를 엄마가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태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습니까?’라고 자기생애를 저주합니다.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나를 힘들게 만드십니까?’라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이지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얘는 임신자체가 되면 안 돼. 이것은 태중에서부터 낙태를 시켜야 돼, 라는 조치를 왜 저에게는 취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 작업이에요.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여기 있고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안 부서지고 나는 안 깨어지고. 그런데 실제로 구원과정 속에 개입된 욥은 말하기를 ‘주여,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말게 하지 왜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게 하십니까?’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공짜 챙기는 식으로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왜 하나님이 하시는 작업에 꼭 들어가 있어야 됩니까?’ 그런 외침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한다면 정답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를 사용해서 했어야 했다.’는 거지요.
“세상은 정죄 받아야 되고 세상은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에게 먼저 찾아와서 너로 하여금 이토록 힘든 세상을 살도록 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힘들게 살 때, 평소에 네가 부자였고 건강했고 자식이 열 명이었을 때, ‘아이고, 욥 장로님, 훌륭한 신앙입니다.’ 하고 인사치레하고 악수하고 존경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네 눈에는 신앙 있어 보였고 훌륭해 보였고 괜찮아 보였지만 막상 세상적인 이용가치가 다 없어질 때 친구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더냐?” 하는 말입니다.
싸늘하게 변하지요. 바로 그 모습이 진짜 천국을 알고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욥 이상으로 매 시간마다 순간마다 당했던 십자가의 길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길!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에 보면 나오지요. 계모가 자기를 천대하고 구박해서 의도적으로 산속에 버리려고 했을 때 두 남매가 돌멩이나 빵부스러기를 던져서 그걸 보고 집으로 도로 오듯이 그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깔아놓으신 천국 가는 그 길, 좁은 길, 영생으로 통하는 유일한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이 그런 길이에요.
욥이 하나님께 ‘주님이여 저를 태어나지 말게 했으면.’ 하고 탄식할 때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네가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나? 참 엉뚱하네. 사람보고 이야기해라. 사람도 아닌 허공에 대고 왜 이야기를 하는데?’ 아마 그런 핀잔을 받을 겁니다. 욥이 그런 시련을 당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이거거든요.
미래에 만날 그분이 미리 와서 구원할 사람을 방문해서 데려가는 방식으로 구원하기에 그렇습니다. 미래에서 미리 찾아와요. 미래에 천국에 들어갈 때 그 천국에 입장하는 기준이 뭐냐, 예수님 자신의 피입니다. 그 피를 가지고 미리 찾아오는데 이 피 사건이 발생될 때 섞여 있는 것이 뭐냐, 인간이란 이름 때문에,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남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같은 아담에 속해서 아담이 물려준 육, 몸을 지녔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학대하고 미워하고 싫어했던 그 죄가 섞여서 생겨버린 그 피,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에 보쌈당해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이 피 흘려 죽게 된 그 자리, 그 현장에 나의 육적인 요소가 거기 가미되었음을 알지요. 그것 때문에 죄 없는 분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아야 할 나 때문에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피의 사건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미래에서 미래로 오는 거예요.
왜 우리 몸이 어두우냐하면, 과거에서 습득한 것, 경험한 것, 익숙한 것, 그런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즐거움과 행복과 존재의미를 형성해요. 동그랑땡처럼 뭉쳐서 곱게 생산해 낸다 그 말입니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은 과거에 여러 가지 해봤던 것들 중에 괜찮은 것, 또는 해보았던 것들 그 이상의 새로운 것들을 뭉쳐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나의 즐거움과 사는 재미를 얻기 위해서 과거와 연계를 시키는 겁니다.
지금의 나라는 것은 과거를 잊을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직장생활이 반복되는 생활의 연속이니까 취미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재미있을까? 등산갈까, 사진 찍을까, 노래를 부를까, 온갖 생각을 다 하다가 ‘그래 골프로 하자.’ 했다면 그 사람의 선택이 뭐냐, 과거에 했던 경험들 중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경험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남들 등산가면 ‘나도 해봤어.’ 또 수영하러 가면 ‘다 해봤다고. 역시 골프가 최고야.’라고 나온다면 그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이고 내 즐거움과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자리에요. 내가 괜찮다는 것, 나는 슬퍼해서도 안 되고, 나는 성공한 사람이고, 좌절할 필요도 없고 나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잘 살아야 될 권리가 있는 사람이고 그걸 유지할 수 있는 정당성이 보장된 자리가 바로 과거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그 과거라 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어릴 때부터 골프 쳤습니까?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듣고 배운 거잖아요. 그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 세상에 대해서 음란하고 악한 세상이라고 정죄한 거예요. 악하고 음란하다고 정죄하건 말건 간에 우리가 기껏 지금까지 교육받으면서 배운 것은 바로 사람들의 알았던 과거를 수집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미래의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피가 거기에 왜 담겨 있습니까? 안 담겨 있지요. 담길 자리가 없다니까요. 삼투막이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막입니다. 막이라는 것은 외부와 내부가 서로 잘 통해서 막힘없이 흘러가요. 외부에서 뭔가 밀려들면 단번에 내 몸까지 스며듭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할 때 북한 주민이라면 미니스커트는 못 입지요. 큰 일 나지요. 핫 팬티 입고 다니면 일 납니다.
여기가 한국이기에 한국 땅에서 적당히 입을 수 있는 것, 카라가 뭘 입었는지, TV에 나오는 아이돌이 뭘 입었는지, 드라마에서 탤런트가 어떤 머리모양을 했고 단추 크기가 얼마고 귀를 어떻게 뚫었는지, 그런 것을 다 보지요. 그게 전부 다 정죄함을 당한 세상에서 흘러 들어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막인데 그걸 거부하는 막이 아니고 삼투압처럼 압력이 오게 되면 그것들이 들어와서 내 몸 안의 전부가 되어 버려요.
투과성이 있는 얇은 막, 자기 맘대로 투과되는 막이니까. 그래서 교회가 위험하다는 거지요. 교회가 위험하면 기도원에 가서 혼자 신앙생활 할까요? 이미 나는 교회도 가봤고 기도원도 가봤다, 하는 그것은 뭡니까? 그것은 미래가 아니에요. 역시 과거에 경험했던 것 중에서 다시 한 번 정립한 것뿐입니다. 도무지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정서와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도 없을뿐더러 이 세상과 결별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못 닮아서 환장했어요. 따라잡지 못해서 환장을 했지 무슨 결별 선언을 해요. 주님께서 미래에서 찾아오는 것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분류작업 때문입니다. 미래에는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지퍼 열리듯이 예리하게 쫙 둘로 갈라지는데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갈라지기는커녕 그들과 더 못 사귈까봐서 환장하잖아요. 그들이 나와 안 놀아줄까봐서.
뭐가 갈라집니까? 그들과 한통속이 못되어서 환장을 하는데! 주께서 찾아오는 그 작업과 우리가 들이대는 우리의 작업이 완전히 그 생각이 다르다는 말이지요. 어딜 가요? 천국이요? 무슨 천국을 가요? 천국에서 온 작업과 다른데,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생각하고 우리하고 다른데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제자리 뛰기 하다가 지옥갈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시는 이유가 기적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욥 입장에서는 굉장히 괴로운 일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기적 받은 거예요. 기적이라는 말을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데요, 주님께서 제시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나서는 큰일 나는, 일어나기를 바라고 싶지도 않은 일을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기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것이 기초가 되어 있어야 돼요. 진정한 기적은 내 쪽에서 그런 것을 믿을 것이라고 내 자신조차 감히 생각도 못했다는 겁니다. 줄기차게 밀려오는 과거의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미래였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기대감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내가 예상한 미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오히려 나의 과거를 소급해서 통째로 정죄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날 때, 어느 누가 자신이 망가지고 붕괴되는 그것을 수용 하겠습니까?
우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수용 불가능한 내용이 쳐들어올 때 주님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너에게 안겨줄 기적이다.’라는 거예요. 믿을 만해서 믿어버리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짜 내가 원했던 거야.’ 이런 것은 믿음 축에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욥이 자식 다 죽고 재산 다 날릴 때, 자기 아내도 떠나버렸을 때 자기가 그런 상태가 되고 싶어서 철야하고 금식기도 했습니까?
‘내 자식 열 명을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다 죽일 수 있습니까?’ 하고 평소에 간절히 금식해 가면서 기도한 거예요? 커피 마시면서 금요 철야기도 했습니까? 이것은 어디까지 들어가느냐 하면, 이 정죄함이 욥의 근원, 출생날짜, 거기까지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의 계시가, 주님의 기적이, 근원 그 바탕까지 파고 들어가는 기적.
파고들어 갈 때 욥은 대충 하려 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깊이 파고들어 오니까 욥도 견딜 수 없었어요. ‘주여, 이토록 날 괴롭히실 것 같으면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왜 그때 그 임신을 중지시키지 않았습니까?’ 라고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계시고 그게 복음이에요. 나 여기 있고 ‘신이시여 내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이것은 기적도 아니고 은혜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몸에다 드릴로 ‘드드드득!’ 구멍을 뚫는 겁니다. 이빨 충치 다 갈릴 정도로 구멍을 뚫어요. 계시가 우리 내부에 구멍을 뚫는다니까요.
기호학적으로 볼 때 사람이 세상을 보는 최소단위가 있어요. 다른 것은 다 끊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마지막 단위가 있습니다. 옛날 철학자들이 세상을 볼 때 마지막 부서지지 않는 단위를 원자로 했어요. 이처럼 꼬리, 날개, 사지 다 날라 가도 마지막까지 ‘이것만은 내거야. 이것만은 잊어버리기 싫어. 이것만은 내거야.’라고 꼭 쥐고 있는,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볼 거야.’라고 꼭 쥐고 도망치는 세상을 해석하는 최소의 해석단위가 있어요. 세상을 보는 관점이죠.
그 안에는 나만 담겨 있어요.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그 안에 나만 딱 담겨 있어요. 주님께서는 거기에 쏴 버립니다. 세상 악하다고 하면 우리는 동의해요. ‘예, 세상 참 악합니다. 세상 꼬라지 정말 더럽지요. 나이 좀 들어보니 세상 더럽다는 것 이제 알았습니다.’ 그렇게 동의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네가 더 더럽다.’ 하고 따라오면 우리는 혼비백산해서 마구 도망치기 바빠요. 마치 카다피가 관저 벙커 속에 숨듯이.
이것은 나만의 마지막 소박한 꿈이요, 희미하나마 나라는 것이 끝까지 남을 수 있는 나의 최후의 보루요 자리다, 라는 그곳에 주께서는 따라 오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불 이야기를 한 거예요. 여기는 등불로 되어 있지만 요새말로 하면 후레쉬 들고서 찾아온 거예요. ‘너의 세상을 보는 최소 단위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등불 이야기를 하시는데 좀 어렵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은근히 기적을 원하거든요. ‘교회 안다니다가 이제는 교회 다닙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 기적처럼 와 주옵소서.’ 하면서 자기 최소단위 거기에 복 받을 준비를 하지요. 어렵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정죄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인간의 개인적인 몸을 거론하시는 이유는 구원의 자리라는 것이 인간세계에는 없는데 그 없는 자리를 새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없는 자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약속이 있었는데 창세전에 이런 약속이 있었어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를 선택했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워요.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는 말은 ‘너의 구원의 자리는 하나님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낼 때 버림받는 자리를 만들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버림받는 자리만 만들어진다면 죄 없는 분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자리를 통째로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켜버리면 버림받은 자리에 합류한 사람은 같이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아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방식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약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좀 미안한데요, 그 버림받은 자리……, 그러니까 제일 낮은 자리, 빌립보서 2장 8절이에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이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악한 자리, 더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라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그것보다 더 버림받는 자리,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는 자리를 예수님께서 장만해 주시고 그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담아서 그 자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되어 버리면 그래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 버림받은 자리에 합류가 되려면……,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나 잘났다.’ 하는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을 뭘 로 바꾸느냐 하면, ‘백날 잘난 체 해도 하나님 앞에 서면 너는 버림받아야 돼.’라는 그것을 그로 하여금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은 자리에 오지를 않으니까.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방금 제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제가 묻지요. ‘여러분 잘 이해하셨습니까?’ ‘잘 이해했습니다.’ ‘이해했다고요?’ ‘예, 이제 이해했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옵니다. 전화가 왔는데 하는 소리가 ‘빌라 301호 주인 맞으시죠?’ ‘예, 맞는데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여기 교회인데요.’ ‘지금 교회 갈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전세 들어 있지요?’ ‘예, 그런데요.’ ‘확정일자 미루는 통에 은행이 먼저 차압해서 전세 돈 다 날라 가게 생겼어요.’
그럴 때 예배드릴 마음이 나겠습니까? 방금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버림받은 자리에서 부활하셔서 그곳이 유일하게 구원받은 자리라고 할 때 동의하면서 ‘야, 오늘 참 귀한 것을 들었다.’라고 금방 했는데 이 정죄 받은 세상에서 전화가 온다니까요. 전화 내용이 ‘확정 날짜 밀려서 전세 돈 다 날리게 생겼습니다. 지금 교회 가서 예배드릴 때가 아닙니다. 세입자들 다 모여서 은행 앞에서 데모중인데 빨리 갑시다.’ 그렇게 된다 말이죠.
어떤 70대 할머니께서 남편이 막노동해서 번 돈 일억을 부산의 모 은행에 후채권 이자 8.5퍼센트 주는 금융상품에 넣었답니다. 그런데 5천만 원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다 날리게 생겼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가……, 이 귀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 할머니 이야기가 ‘그 담당자가, 채권은 은행의 운명과 같이 가기에 은행에 문제 생기면 같이 날라 갑니다, 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그 할머니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으이그, 바보 같은 할머니 세상 그렇게 오래 살면서 그것도 모르고, 그런 것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그 할머니는 그것을 몰랐지만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태가 일어나서 우리의 재산이 다 날라 갔을 때 십자가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게 믿음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지식이에요? 요즘 지식 때문에 미치겠어! 그게 믿음이에요, 지식이에요? 복음이 어쩌고저쩌고, 그게 지식이잖아요. 마지막 자신의 최소단위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분이 없어요. 하늘나라에서 찾아온 사람이 없어요. 과거에 신학도 하고 여러 가지 성경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과거, 과거에서 괜찮은 것 뽑아서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미래에서 찾아오신 분이 없어요. 나의 마지막 쥐고 있는 최소단위, 그것까지 뚫는 분이 없어요. ‘이만하면 구원 받았겠지.’라고 헤헤거리는 그 자리, 그 콘크리트를 완전히 뚫어야 돼요. 내일 되면 또 굳어져 있어요. 또 뚫어야 돼요. 들은 이야기인데 아파트 계약을 하러 가니까 건설회사에서 돈을 일시불로 다 달라고 한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일시불로 안 해주면 등기를 안 해주겠다는 거예요. ‘우리 회사가 신탁회사에 넘어가 있어서 회사로서는 등기할 권리가 없어서 일시불로 주시면 2년 뒤에 등기해 드리겠습니다.’ 해서 그렇게 했더니 신탁회사가 날라 가버렸네요. 그 할머니 하는 말이 ‘세상 참 돈 많이 주고 배웠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일을 당하고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말이 쉽게 나오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우리는 막입니다. 우리가 강력한 세상,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고 뭐고 일체 없어요. 그냥 우리는 얇은 막(셀룰로이드)입니다. 막이라는 것은 그냥 외부에 대해서 개방된 상태입니다. ‘내가 지금 뭘 하면 재미있나.’ 하는 것은 저쪽에서 여기 재미있다, 하면 무조건 그쪽에 합류해야 재미있는 거예요.
도무지 ‘나’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복음을 터뜨리는 공간으로 항상 제공되어야 돼요. ‘주님, 맘대로 오셔서 주의 원 대로 사용하소서. 나는 그냥 막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막인데 주님께서 미리 찾아오셔서 십자가 피,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의 피가 마음껏 영광스러운 신분으로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증거 하는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몰라요. 많은 목사님들을 보게 되면 복음전하는 그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본인이 부인해요. ‘복음 전해도 돈도 안생기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겁니까?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제가 객관식으로 문제를 낼 테니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주여, 누구십니까?’에 대해서 다음 중 어느것이 정답인지를 맞춰보세요. 1번, 나는 메시아다. 2번, (같은 이야기인데) 나는 구세주다. 3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4번,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5번, 나는 이 땅에 십자가 지러 왔다. 정답은 항상 마지막에 있는데 마지막을 말씀드릴게요.
6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몇 번입니까? 마지막이 정답이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러니까 예수라 할 때는 ‘나는 메시아니까 네가 지식으로 수용하라.’ 그런 게 아니에요. 손들고 회개하면서 앞으로 나오라는 식의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너와 내가 별개가 아니고 너에게서 핍박을 받아야 내가 예수가 된다, 그 말이에요.
우리가 왜 주님을 핍박합니까? 그것은 마지막 내 것은 포기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드릴로 뚫어 가면 ‘누구 허락 맡고 여기서 공사를 합니까? 이것은 내가 꽁꽁 감추어놓고 싶은 것인데 왜 공사합니까?’ 주께서 등불 들고 후레쉬 비추면서 ‘문제는 네 몸이야. 그런 몸들이 모여서 꽃다발을 이루어서 세상이 이렇게 더러운 거야.’
세상이 더럽다는 것은 공기가 더럽다거나 방사능 같은 오염물질이 퍼졌다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을 보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인간 하나하나의 몸이 더럽기 때문에 세상이 더러운 거예요. 주님께서 그 몸을 거론하는 이유는 주께서 구원하는 것도 자기 몸을 바쳐야 구원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홍해가 갈라졌으면 좋겠다, 물위를 걸었으면 좋겠다,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외부적인 기적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몸, 주님을 핍박하는 그 몸이 구원의 현장, 구원이 시작되고 구원이 마감되는 현장이에요. ‘이 더러운 인간아, 네가 더러우니까 세상이 더럽게 보이지. 내가 보는 더러움과 네가 보는 세상 더러움이 달라.’ 그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네가 더 더러워.’ ‘복음 알았으니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놀고 있네! 뭐 괜찮은……? 너는 나를 핍박하고 또 핍박해!.’ 이 핍박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 까지 핍박할 거예요. 우리는 이 몸을 건전하고 깨끗하게 챙길 수 있는 몸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주변을 통해서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자식이 애를 먹이고 남편이 애를 먹이고, 가만 두지를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나오지요. ‘이럴 것 같으면 내가 태어나지를 말아야지. 내가 자살할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바로 네가 버림받은 자, 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라.’ 그 말이죠.
‘버림 받은 자이니 내가 너를 어떻게 다루든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이왕 버림받은 것인데 그 버림받은 쓰레기를 가지고 어떻게 활용을 하든지 쓰레기가 말이 많으냐, 그 말이지요. 쓰레기라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구멍 뚫고, 예수님이 스스로 장만한 십자가 버림받은 자리,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그 죄인의 요소를, 이빨 임플란트 할 때 심지 박아서 심는 것처럼, 썩은 이 도려내고 그 빈자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우리의 그 썩은 중심자리를 도려내고 거기에 예수님의 피를 쏙 집어넣지요.
집어넣으면 그것이 몇 분 안 가요. 또 까불지요. ‘나는 복음 알았다.’ 하고 자기 것으로 땜질해요. 그러면 또 뚫어요. ‘이것은 내 것인데 또 네 것이라고 해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고 또 뚫어버려요. 매일같이 우리는 회개하게 되는 것, 그 회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의 기준은 오직 피 밖에 없다는 것을, 허접스러운 우리를 통해서 증거 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 더럽습니다. 교회 나오는 육, 기도하는 육, 전도하는 육, 심지어 회개하는 육까지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육적인 것밖에 할 재주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주님을 핍박하는 버림받은 자식인 것을 가면 갈수록 더 똑똑히 느껴집니다. 이 버림받은 자리가 주께서 구원해내는 불가능의 자리요 기적의 자리요 믿음의 자리인 것을 우리는 왜 진작 몰랐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될 인간이 아직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주께서 쓰시고자 함인지를 아오니 이 쓰심을 영광스럽게 자랑하고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