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불러 모음

아빠와 함께 2022. 3. 30. 22:52

안양20220317a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0장8절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 구속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묶는다는 뜻이 아니고요, 반대말이에요. 어디에 묶였던 것을 풀어주는 겁니다. 007영화에 보면 자기의 본드 걸이 묶여있을 때 용감하게 들어가 가지고 그 묶여있던 자기 본드 걸을 구출해내잖아요. 그걸 구속이라 하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출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구출한다. 같은 말입니다만 다른 말로 하면 탈출한다. 구출한다, 탈출한다, 뜻은 그 전에 묶여있었다는 것. 묶여있었다.

그래서 탈출과 구출에 성공한 사람 이게 구원이지요. 이 구원에 성공한 사람의 한결같은 일관된 고백이 뭐냐, 전에 내가 묶여있었다. 내가 전에 묶여 있었다. 그러니 묶여있었다는 식으로 자기의 과거의 형편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뭐가 지금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까. 탈출했다는 그러한 감이 전혀 안 보이고 있지요. 구원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탈출하는 거지. 내가 천국, 지옥, 천국, 지옥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 문제가 아니고 탈출한 거예요.

만약에 묶여있다는 인식이 없어버리면 분명히 구원은 묶여있는 건데, 묶여 있는 인식이 없다는 말은 묶여있으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건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하겠다. 라는 의식이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은 결국 이건 뭡니까. 여전히 묶여있는 사람이에요.

죽어서 지옥가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좋은데 가려고 하지요. 나는 부처 안 믿고 예수 믿기로 결정했다. 이 사람은 아직도 마귀한테 묶여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거기서 나는 탈출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거기에서. 내가 믿는다는 말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이에요. 내가 잘 물건 하나를 보고도 그냥 안사잖아요. 요리 보고 따져서 그래! 결심했어. 오늘 이거 카드 긁는다. 긁어버린다 하고 사잖아요.

그것처럼 뭐 하나 나한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 싶으면 사람은 그걸 구매하기로 결심하잖아요. 그 구매하는 행위, 구입하는 행위, 그거나 교회 가서 예수 믿기로 손들고 나오는 행위, 동일한 행위에요. 전부다 이게 뭐냐, 자기 자율성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자율성이. 그러면 거기서 뭐가 유발되느냐 하면 나의 선택의 가치, 또는 가치성, 역시 나는 뭐든지 선택을 잘해. 이런 거요. 나의 선택의 가치성입니다.

그래서 스가랴10장8절에는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너의 선택의 가치성이냐, 주님의 강제성의 가치성이냐, 이걸 놓고 경쟁하는 거예요. 경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고 구원한다는 것은 구출해 달라, 구원해 달라 요청에 부응하는 게 아니에요. 부응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요 강제성이 작용해야 돼요. 강제성.

제가 몇 주 전에 연거푸 이야기한 게 있어요. “아버지여, 내가 불타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미 고인이 된 아들이 시신을 뒀는데 그 시신에 촛불이 넘어져 가지고 그 화장장 전체가 장례식 전체가 불타고 있을 때에 분명히 죽어있는 아들이 꿈속에서 말을 하면서 “아버지여, 지금 내가 내 시신이 불타고 있는 거 보이지 않습니까? 왜 빨리 나를 깨워서 시신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야지요. 왜? 이렇게 그냥 계십니까?” 하는 그런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그 말은 시신이 스스로 앗! 뜨거워라. 해가지고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 우스갯말로 오징어를 연탄불에 구울 때 자꾸 신경을 써야 될 이유가 오징어가 뜨겁다고 지가 알아서 돌아 눕고 이런 거 없잖아요. 그렇지요? 구웠다 싶으면 뒤집어 줘야 오징어가 맛있게 굽힌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전부다 강제성이에요. 강제성. 그러면 주님은 휘파람 불었다 이 말입니다. 강제성이거든요. 주님의 구원은 강제성인데 우리의 구원은 나의 선택의 자율적 선택성이라면 나의 선택성 가치라는 것은 나의 가치가 그냥 살아있지요.

내 가치가 살아있어 버리면 누구 가치가 죽어버리느냐 모독 받느냐, 주님의 강제성의 선택의 가치가 이게 말살됩니다.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지요. 주님의 자기 강제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의 가치를 밟아버리겠습니까. 내가 이모저모 생각해서 예수 믿는 것이 나한테 좋다고 생각해서 나는 믿기로 했습니다. 하는 그것에 모든 의미를 묵사발을 만들어버리지요. 어디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여기에 휘파람을 불어 그 다음에 그들을 그 다음에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을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모은다. 되어있지요. 모은다. 자,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 모아요. 끌어 모으게 되면 개인 개인의 개별적인 감각은 날아가 버리고 한 곳으로 끌어 모았으니까 그들을 모았다는 말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이 말아닙니까. 한 곳으로 모은 거예요. 모았을 때 그렇게 주님 앞에 온 사람들은 각자 물어보는 거예요. “너, 어떻게 왔어?” “나는 잠자고 있는데 주님께서 휘파람 불어서 왔어.” “그럼 너는?” “나도 휘파람 듣고 왔어.” “너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여기에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휘파람 소리 듣고 이곳에 온 거죠. 그게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있든 나이가 적든 직업이 있든 없든 한 달 수입이 오만원이냐, 십만원이냐, 상관없이 집이 빌라에 사느냐, 아파트에 사느냐, 상관없이 몸이 암에 걸렸느냐, 멀쩡하냐, 그런 것에 관계없이 뭐만 이야기해요? 휘파람만 이야기하겠지요. 휘파람.

휘파람이 북한 가요입니까. 휘파람이. 그 휘파람에 대해서 출애굽기 19장 4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휘파람이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벌을 부를 때 그 양봉을 하면서 휘파람을 불어서 랩으로 빨리 집으로 와야지. 할 때 휘파람을 분 답니다. 그러니까 휘파람 분다는 것은 남의 벌이 아니라 내가 부는 양봉 주인은 자기 벌떼를 어느 정도 되어야 벌떼 숫자가 맞다고 사전에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출애굽기19장 4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너희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그 다음에 짐승 하나 나오지요. 뭡니까? 어떻게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독수리의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내게로 인도했다.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남성의 숫자만 60만명이에요. 60만명을 날개로 실으려 하면 도대체 독수리 날개가 몇 평정도 되어야 돼요? 어마 어마해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나올 때 각자의 이성이나 판단력이 없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과거를 기억을 못하는 자들이 아니지요. 평소에 자기가 할 행동은 본인이 결정하고 판단해서 움직였던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나 이제부터 애굽에 나올 때 독수리 타고 나와야지. 이렇게 생각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지요. 단 한 사람도 생각 못한 방식으로 주께서는 구원하시는 거예요. 단 한 사람도. 그러니까 독수리 날개로 구원했다는 말은 그렇게 업혀서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는 사전에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말을 할 사람은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천국 가는 사람이 일괄되게 이야기한다면 그 중에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피로 나 구원될 줄 알았지.” 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한 사람도. 그래야 이 자율성이 빠지는 거예요. 그래야 나의 판단의 가치가 날아가거든요. 요 19장 4절에 내용은 구원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중요한 요소들로 요렇게 연결시켜 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게 지금 출애굽기19장4절에 함축적으로 다 나와 있어요. 그걸 제가 한 번 써볼게요.

이것과 오늘 스가랴10장8절 말씀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19장4절에 중요한 단어 나열해볼게요. 애굽 나오지요. 뭐냐 하면 집단입니다. 애굽 집단이지요. 집단은 어려운 말로 이데올로기죠. 이데올로기. 이걸 집단 이성이라 해요. 집단적인 사고방식.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라 하는 것은 집단이성이거든요. 집단적인 이성. 그 애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이성에 대해서 전부 다 동의가 되어있는 이념을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어떤 나라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가정이든 어떤 교회든 그 사람들이 한결같이 “오케이! 그래! 이게 우리의 사상이야!”라고 수긍했던 수긍한 거예요.

그럼 이데올로기는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여럿 생각을 하나로 합친 것. 이게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우리말로 하면 이념이라 하는 거예요. 이념. 집단 이념. 집단 이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애굽나라에서 그들이 나왔다는 것은 애굽나라의 뜻이었다? 아니었다? 지금 제가 그걸 묻는 겁니다. 애굽나라에서 나올 때 애굽나라의 이념이었습니까? 이념이 아니었습니까? ‘애굽나라를 버리고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자.’ 하는 생각이 애굽나라에 살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요구조건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아니었어요. 특수한 거죠.

그럼 애굽나라는 뭐냐 하면 삶의 거처 아닙니까. 그들의 거처거든요. 출애굽기19장4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이스라엘이 된 게 아니고 그들이 어디에서 살던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애굽나라에 통일된 사고방식 안에서 그들은 그냥 그걸 삶의 거처로 살았던 거예요. 삶의 거처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는 것보다 쉽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뭐냐 하면 현실의 삶이란 이거에요. ‘육의 번식 과정입니다.’ 육을 번식하는 거예요. 현실의 삶이란.

“왜 돈 버는 겁니까?” 물으면 “자식들하고 나하고 법 먹고 살아야지요.” 이렇게 하거든요. “왜 밥 먹고 살려고 합니까?” 하면 “내가 돈 안 벌면 자식들이 죽잖아요.” 그러면 자식들이 죽으면 어떤 점에서 손해가 납니까? 자식 죽으면 어떤 손해가 나지요? 번식이 안 되지요. 번식이 안 되는 게 그게 왜 화가 납니까? 라고 물으면 번식은 나의 육의 확장이거든요. 확장. 확대다 말이죠. 확대. 나의 영향력의 확대를 말하는 거예요. 육은 그냥 모든 것을 키우고 확산하고 확장하는 그 본능 때문에 인간은 돈을 버는 겁니다.

그리고 돈을 벌고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돈을 벌고 나의 확장과 관련해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현실세계에서는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번식이 수월하니까요. 내 확장이 수월하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애굽나라에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요, 화초를 키운다든지 그 모든 일. 제가 아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있는데 <장발장>이라는 게 있어요. 레미제라블이라는 원래 뜻이 있고요. 우리나라에 올 때 장발장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여러분들이 그 내용을 아신다 치고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장발장이라는 그 소설에 보면 빵조각 훔쳤다고 5년 징역 받아가지고 아주 무서운 감옥에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장발장이라는 사람이. 그래서 네 번 탈옥해가지고 총19년을 사는데. 출석 후에 어떤 주교가 그 사람을 받아줘 가지고 그 사람한테 살다가 자기가 스스로 독립하겠다고 은그릇을 훔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훔쳐 나오다가 하필 타이밍 맞춰서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주교한테 “당신 물건 훔쳤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유명한 대목이 나오지요. 주교가 하는 말이 “아이고, 이 사람아! 이것도 가지고 가야지. 왜 안 가지고 갔어?” 하고 은촛대까지 줬습니다. 여러분 젊을 때 읽었던 기억납니까. 그 소설 기억납니까.

여러분, 이 책의 주제가 여러 가지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시장이 되어가지고 형사하고 여러 가지 있어요. 하지만, 모든 걸 희생하고 이렇게 장발장은 그렇게 남을 희생하고 퍼주는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본받자. 그게 주제가 되는데 이게 애굽나라에 장발장 소설이 있다고 칩시다. 원래 있고요. 프랑스 이야기잖아요. 그럼 애굽나라잖아요. 애굽나라에서 그 장발장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유명하게 된 것은 이게 뭐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딱 하나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은촛대가 있다. 있음이지요. 감옥 있음이지요. 장발장 있음이지요. 주교 있음이지요. 장발장 추적하는 있음이지요. 모든 게 있음이잖아요. 모든 게. 애굽나라는 뭐로 구성되어있어요? 있음과 있음으로 구성되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온다는 것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있음의 세계에 길들여진 우리가 있음이 없으면 죽는다는 우리를 무슨 세계로 만드느냐 하면 있음의 반대가 뭐겠어요? 없음으로 빼돌리는 거예요. 없음으로. 이게 구원입니다. 이 세상이 있는데 지구가 있는데 여기에 신약성경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요한복음12장도 그렇게, 요한복음1장도 그렇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세계에 오셨지요. 오셔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했어요. 떠난다. 자, 떠난다. 유대인들이 어디로 떠나지?

자, 주님은 떠난다고 이야기했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어디로 떠납니까? 유대인들은 ‘저 사람이 죽으러 가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유대인 생각과는 달리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떠난다 할 때에 어디로 떠나는 걸로 여러분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디로 떠나느냐 하면 아버지께로 떠나는 거예요. 아버지께로.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거예요. 그럼 아버지가 그 시대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지구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여호와는 인간들이 지어낸 기호에요. 어려운 말로 기표라 하는데. 그냥 기호에요. 그걸 상징이라 해요. 상징.

왜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이유는 그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있음과 관련돼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가짜가 되는 겁니다. 구원은 있음에서 벗어나서 없음이 되는 거예요. 있는 내가 구원받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내가 상상도 못한 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것을 구원하시거든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살잖아요. 그렇죠.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구원 받더라도 내가 내 이름으로 사는 현재 내가 천국가야 된다고 고집부리면서 교회 나간다 말이죠.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나의 있음과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있는 상상되는 천국 가서 주와 함께 있는 그 상상되는 나 사이에 무엇이 이게 절단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게 상상하는 나. 나가 도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걸 제거해 버립니다. 죽어라 인간아! 제거해 버려요. 구원받고자 나를 제거해 버린다고요. 여러분이 목제소에 가면 큰 통나무 제거하잖아요. 자르잖아요. 자를 때 전기톱으로 자르지요. 그러면 두 동강 나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007 살인 영화 보면 007이 위기에 있어서 전기톱에 잘릴 위기에 있는 그 장면이 나와요.

그림으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피라미드를 두 개 그리겠습니다. 피라미드를 두 개 그리면 하나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돼요.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를 자르겠습니다. 요 잘라 낸 요 판.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현실이고, 하나의 다이아몬드를 두 개의 피라미드로 잘라내요. 그러면 밑에 있는 피라미드는 잠재적, 판으로 잘라진 위에 있는 피라미드는 현실이고,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밑에는 숨어있는 것.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이걸 도중에 현실이 잘라버려요. 그럼 이 현실적이라는 말은 추상적, 이상적, 상상한 것. 이상적으로 상상한 것. 나는 이렇게 되고 싶어. 밑에 있는 피라미드는 자기 자신은 여기에 대해서는 무지. 모르는 겁니다.

내가 뭔가 되고 싶은데 내가 뭔가 현실적으로 성과를 가지고 싶은데 회사 부장에서 임원진 된다든지 성공하고 싶은데 정작 밑에 숨어있는, 빙산이라 합니다. 물에 떠 있는 것. 북극에 얼음에 떠 있는 산. 빙산의 아래쪽 물속에 뭐가 있는지는 이 나는 본인이 몰라요. 내가 과장에서 부장되는 그걸로 목표했지 부장되는 그 날부터 내가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본인은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부장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앞으로 살날은 6개월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런 거요. 모르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서 대칭적으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거예요. 계속 이게 피라미드니까 끝이 어떻습니까? 뾰족하잖아요. 니나 나나 다 하는 거 말고. 우러러 볼 수 있는 그 최고 정점을 향하여 인간은 욕망은 멈추지 않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현실은 우리의 뜻을 계속 잘라주는 거예요. 니 주제파악이나 해라. 니 실력감이 돼? 잘라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내 뜻대로 하라고 뭘 하느냐 하면 이 현실을 사랑하게 되는데 실제에서 결과는 뭐냐 하면 사랑이 뭐로 변화느냐 증오로 변하는 거예요. 세상은 매사가 내 뜻대로 안 해주는 이 더러운 세상. 본인이 그 감량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전부 다 내가 내 원대로 안 되는 것은 전부 다 남 탓이고, 세상 탓이라고 그렇게 비난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숨어있는 어두운 자신의 무지 때문에 발생되는 거예요. 무지함. 이게 전체가 바로 현실이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애굽이에요.

지금 스가랴10장8절하면서 내가 무슨 이야기하면서 여기까지 왔느냐 하면 휘파람으로 불러낸다는 거예요. 그 휘파람 불러낼 때, 휘파람으로 불러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현실적으로 나잖아요. 나.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고 나는 구원되지 못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나가 우리로 가야 돼요. 나가 우리로 바뀌면서 구원이 된다고요.

나의 구원을 원했는데 주께서는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있어요.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무슨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아니지요. 무슨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누구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의 대표자. 우리의 대표자만 나를 쓸 수 있어요. 그 분이 누굽니까? 그 분이 바로 주님이다 말이지요. 주님만이 아버지로부터 나라는 것을 유일하게 인정받은 거예요.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이는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유일하게 나라고 인정받고 나머지는 인정받지를 못한 겁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숨어계시니까요.

숨어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겁니다. 숨어있다는 말은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의 지혜와 천기에도 진짜 하나님은 자기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감추는데 성공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만 오직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라는 자격으로 나타나요. 아버지. 누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니에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버지가 돼요. 우리 아버지 아닙니다. 만들어줬다고 아버지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휘파람 불지 않고, 독수리 날개를 동원하지 않았더라면 뭐가 없다? 구원이라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믿을까, 부처님 믿을까,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휘파람을 불러줘야 돼요. 휘파람 소리를 들어야 되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야 돼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독수리 날개로 구원된 아이디어가 이렇게 우리라고 집합된 그런 사람들 속에 어느 누구도 꿈꿔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걸어서 구원한다. 보따리 얽어매고 나온다. 그런 건 할 수 있는데 독수리 날개 업어서 애굽에서 나온다는 아이디어는 인간치고 그 누구도 거기서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휘파람 부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원인이 이미 우리에게 나 여기 있음 자체가 지금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 여기 있는데 나 여기 있도록 그동안 나를 잘 관리하고 인생을 이만큼 살도록 애썼는데 이게 나의 구원에도 뭔가 보탬이 되는 아이디어가 제공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를 관리한 것처럼 뭔가 시켜만 주이소. 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인생 이만큼 살도록 애썼는데 까짓 것 구원 받는 것도 애쓰면 들어갈 수 있겠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궁시렁 궁시렁 다른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럼 휘파람 불어서 나온 것은 다 빠지지요. 독수리 날개 업은 거 다 빠지지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내가 착실해서 구원 받는 것은 그런 구원이란 없습니다. 애초에 성경에서는 그런 구원 없어요. 아니 구원 자체가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옆집에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아저씨보고 “아저씨! 요즘 왜 늦게 오십니까?” 아저씨 뭐라고 합니까. “니 누군데?” “여기 101동 아닙니까?” “101동은 네 집이고 나는 102동이야.” 이게 남의 아버지 가지고 왜 그리 닦달 내요. 말 안되지요.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리고 예수님만의 아버지에요. 우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 호출하게 되면 여기서 없던 나. 그냥 죽을 때까지 나만 챙기는 그들이 나가 해체되고 그게 “헤쳐 모여!” 나가 해체되고 우리 안에 다시 모이게 돼요. 이산과 집산. 뿌리 채 다 조각 조각나고 그게 다시 집산, 모아지는 것.

나는 죽고 우리로 모으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입니다. 내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 우리는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구원받은 나, 너, 너가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될 때는 접착제가 있어야 돼요. 우리끼리 모여서 교회 만든다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런 건 없어요. 접착제가 뭐냐 하면 유일하게 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들어야 이게 우리가 돼요. 예수님이 빠진 우리는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줄 때 너가 알아서 나한테 오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불러줘요. 휘파람 불 때.

그걸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이걸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의 영향력 또는 작용이라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되면 나의 이름은 주의 이름 앞에 죽습니다. 의미 없이 이건 박살나야 돼요. 깨져버립니다. 이제는 우리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사는 새로운 존재로 픽업당하지요. 픽업당한다고요. 그래서 그동안 내 이름을 위해서 내 명예를 사는 것은 내가 자율성으로 선택해서 결심해서 오기로 버티고 노력해서 애써서 힘들여서 내 인생을 나답게 살아왔지만 이제 일체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고 주님이 애쓰고, 주님이 노력하시고, 주님이 희생하시고, 그것만 소복이 우리한테 차게 될 때 그게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19장4절에 보게 되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했음과 애굽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애굽에 살던 사람은 그 애굽에서 빠져 나올 생각이 있다? 없다? 전혀 없습니다. 그 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하겠다는 아이디어를 히브리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나라에서 나가게 기도한 게 아니고 압제가 너무 심하니까 좀 온순한 사람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줘서 여기에서 내 육의 번식이 원활이 되도록만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의 번식인데, 우리의 뜻은 뭐냐, 나의 육신의 번식이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의 육의 번식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탈출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생존에 유리하게 행동하는 게 인간인데 어떻게 자기 육을 파괴해요. 안되지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자기 있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멀쩡하니 있는데 없음이 되고, 죽음이 되고, 이건 내가 가장 원치 않는 바지요. 내가 원하지 않는 사항이다, 이 말이지요.

현재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를 어떻게 더욱 더 멀쩡하게 달라고 해버리면 아까 한 이 피라미드에서 자꾸 위쪽의 뾰족한 곳에 출세와 성공을 지향해 버리면 이건 점점 더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멀어지지요. 실제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이게. 실제와. 그래서 이런 사람이 교회가면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하나님 좀 도와 주이소.” 이런 식이에요. 그냥 묻지 말고 그냥 도와 달라는 거예요. 도와주시고, 우리 가정 잘 되게 해주시고, 화목하게 해주시고, 내 아들 취직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딸 빨리 시집가게 해주시고, 자꾸 자기 육의 확장이에요.

주께서 묻지요. “왜 그래야 되는데?”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 몰라요? 저? 새벽 기도한 저 모릅니까?” 이런다고요. 주님하고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총체적으로 관리합니다. 개별적으로 나를 상대 안 해요. 예수님이 중심이 된 그 우리만 상대한다고요. 그럼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요건 여러분에게 질문 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나머지라는 것은, 애굽에서 빼기 히브리인들 나오면 이게 뭐냐 하면 애굽의 나머지가 되겠지요. (애굽-히브리인들=애굽의 나머지)이건 산수 중에 산수 아닙니까. 이거 어려운 거 아니지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 빠져버리면 애굽에 있었잖아요. 애굽에 있는데 히브리인들 빠져버리면 히브리인들은 그들에게 없음이 되지요. 애굽에서 빠졌으니까 없음이 되지요. 그러면 현재 나머지는 여전히 있음이 되겠지요. 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조치했느냐 이 말입니다. 제 질문이. 히브리인들 빠지고 난 뒤에 애굽사람들 어떻게 했습니까? 재앙을 내린 거죠. 그리고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에서 어떻게 죽었습니까?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너왔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물에 다 빠져 죽었지요. 저주지요. 죽음이지요. 이걸 가지고 약속의 땅에서는 진멸이라. 하나 남김없이 다 죽이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애굽사람들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와 아론이 찾아오지 않았을 때에는 그들이 정상적인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그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우리 사는 것은 아무 하자가 없고 나라가 제대로 잘 굴러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백성 히브리인들을 데려가 보니까 이 나머지는 무슨 꼴이 났습니까? 진멸당하고 전부 다 지옥 가는 꼴이 난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물어보면 답변은 맨날 내가 하고. 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갈라질 때 하나님의 방법은 뭐였습니까? 어떻게 구분 짓고 어떻게 갈라 세웠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그렇죠. 그거지요. 히브리 갈라질 때 열심하라, 기도하라 이런 거 했습니까? 헌금하라 그런 거 했습니까? 입구에 뭘 바르라 했습니까? 피 발라라 했지요. 왜 히브리인들의 열심과 충성, 봉사는 왜 안 받습니까? 둘 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애굽의 이데올로기에 같이 살던 오직 자기의 육의 번식밖에 모르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자기 피가 아니에요. 자식 피가 아니고 무슨 피? 외부에서 투입된 피.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구분해 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피를 잡아라 한 게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의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듯이. 여기는 이 피라 하는 것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이 구원받는 히브리인들이 흠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이들이 흠이 있다는 말이에요.

흠 있는 자가 기도를 하던 흠이 있는 거고요. 흠 있는 자가 충성 봉사해도 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안 받습니다. 왜냐, 히브리인들이 하는 모든 그 기도나 요구사항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에요. 우리가 아니에요. 이 애굽사람하고 똑같아요. 자기의 육의 번성과 번창밖에 몰라요. 내 잘되는 것밖에 몰라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내 도와주면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해 줄게. 어떤 흥정이나 거래에 나선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뭘 했는지를 몰라요. 그냥. 그냥 자기 욕심과 욕망 외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절에 가서 비는 거 하고 전부 다 똑같아요. 전부 다. 절인지, 교회인지, 성당인지, 다 마찬가지에요. 내 잘되게 해주면 좋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건 애굽이에요. 애굽. 왜 그래야 되느냐 물으면 내가 여기 있잖아요. 있음이에요. 있음.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음을 키우겠다는 겁니다. 주님은 없어졌는데 계속 있음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있는 내가 내 욕구에 만족하기 위해서 있게 해 달라. 니가 뭘 했다고 요구를 해요. 뭘 잘 났다고 그런 요구를 합니까? 하나님을 무당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스가랴10장8절 봅시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그들을 구출시켰다. 어디에서? 나밖에 모르는데서 구출한 거예요. 나에서 우리로 바뀌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구속하였음이라. 그 다음 말이 뭐예요? 우리나라 말로 세자? 그들이. 바로 그들이 집단화 됐잖아요. 그들이. 이 그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전부 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휘파람 불어서 우리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동일하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 중에서는 내 힘으로 했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시 장발장이야기 해봅시다. 장발장에 은촛대가 있었다. 거기에 감옥이 있었다. 형사가 있었다. 주교가 있었다. 이 세상에 유명한 문학이라는 장발장에서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모든 게 뭐냐, 있음이에요. 있음. 있는데 착하게 살고, 있는데 괜찮은 인간이고, 있는데 복 받아서 잘 됐고, 전부 다 있음이라고요. 있음. 그럼 이 장발장이야기를 오늘날 교회하고 연관시켜 봅시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예요. 전부 다 뭐예요. 있음이잖아요. 있음. 있음이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요.

민수기22장에 보면 선지자가 등장해요. 무슨 선지자냐 하면 발람 선지자가 등장해요. 민수기22장23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말을 안 듣고 자기 길로 안가고 밭으로 막 들어가지요. 그럴 때 이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어떻게 했습니까? 달랬습니까? 채찍질 했습니까? 때렸지요. 때릴 때에 28절에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이렇게 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나귀입니다. 나귀가 말을 하는 거예요. 무엇을 꾸짖기 위해서? 발람 선지자를 꾸짖기 위해서. 이 말은 선지자는 누구 말을 들어야 돼요? 나귀는 누구 말을 듣습니까? 여호와의 말을 듣지요. 그럼 선지자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본인의 의지에 따라야 됩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야 됩니까?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야 되겠지요. 나귀를 통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나귀를 통해서. 자기 뜻대로 안한다고 때리는 거예요. 그러나 이 나귀가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쥐어 팼겠어요. 바로 교회가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에요. 예수님을 쥐어 패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되느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만하지요. 피 흘릴 만하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죽으신 거예요. 전부 다 주님한테 달라고 하느냐, 지가 잘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없앨 의향이 없습니다. 키울 의사만 있어요. 차라리 발람보다 김유신이 더 낫습니다. 김유신은 유연히 말을 타는데 말이 평소의 버릇대로 기생집으로 막 가는 거예요. 그 때 김유신 장군이 자기 말한테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칼을 들고 “이~ 내가 대선전의 김유신인 줄 아느냐, 이제는 대통령 당선자인데 이런 행동하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김유신의 말은 평소에 이럇! 하면 어디로 갔어요? 항상 기생집에 술 먹으러 간 거예요. 그러니까 김유신만 타면 어디로 갈까요? 개인택시처럼 그럴 필요 없어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기생집으로 가는 거예요. 김유신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니 같은 말은 더 이상 탈 필요 없다. 해가지고 죽여 버립니다.

따라서 제가 어제 이야기한 수요설교에서 인간은 자기를 배신해야 돼요. 내가 나의 목을 쳐버려야 돼요. 자기 욕심만 챙기는 나의 목을 치지 아니하면 그것은 지금 절에 온 겁니다. 교회에 온 게 아니고 점집에 온 거예요. 천국에 가는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에요. 목을 침을 당한 나에요. 유월절 어린양과 바꿔치기 한 거예요. 예수님이 유일한 나가 되고 그 예수님한테 휘파람 부름을 당한 거예요. 독수리 날개로 업어온 거예요. 따라서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스가랴10장을 봅시다. 9절에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되어있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각 나라, 주변 나라에 씨 뿌리듯이 뿌린 거예요. 어휘~ 어휘~ 하면서 씨를 뿌린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살던 거예요. 약속의 땅에. 약속의 땅에 갈릴리 바다 있고, 요단강 있고, 사해바다 있고, 지중해 있고. 위에는 레바논, 아래쪽에는 이집트. 그 중간지역 지금 팔레스타인 이 지역 현재 이스라엘 사는 이 지역이잖아요. 여기서 살던 사람을 주님께서는 여기에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살고 있었잖아요. 있음이지요. 있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각 나라로 앗수르, 바벨론, 북쪽은 앗수르, 남쪽은 바벨론, 그 당시 바벨론 나라가 어디까지 통치했느냐 하면 이집트까지 통치했거든요. 심지어 터키까지 통치했어요. 그러니까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힌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가고 아라비아도 가고, 현재 이집트 밑에 있는 수단, 이디오피아, 거기에도 가고, 여기에 그리스도 가고 여기에 살아야 될 사람들이 다른 우상을 섬김으로서 온 나라에 다 흩어져 살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어때요? 그냥 무의 자리에요. 비워있는 자리가 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다 흩어졌고요. 마치 씨앗 뿌리듯이 흩어진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곳에 오셔가지고 휘파람 불어가지고 흩어졌던 자기 백성을 바로 이 자리에 불러 모은다는 그 약속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러 모을 때에 어떤 사람을 불러 모으느냐 하면 우리가 이 자리에 살 만한 가치가 없었다,를 뼛속까지 이미 그걸 알고 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이곳에 이 약속의 땅에 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안다는 말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나의 가치와 주님의 가치의 경쟁에서 누가 이겼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구원의 가치가 나의 생존, 나의 번식의 가치를 억눌러서 이겨버린 그런 사람들만 천국에 가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317b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한 것 중에서 복습 비슷한 거 한 번 해볼게요. 여러분, 어떨 때 증오가 생깁니까? 미움이 어떨 때 생기지요? 아예 지금까지 증오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는 사람 없지요. 그럼 어떨 때 증오와 미움이 생깁니까? 미움이라는 것은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있는 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 또는 방해하는 것, 협박하는 것, 위협할 때 증오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럼 증오는 뭐냐, 일종의 방어태세, 방어지요. 방어. 밀어내는 거예요. 미는 것. 밀려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판단과 선택이 여기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저거 나한테 유리한 것, 불리한 것. 유리한 것을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요, 나한테 불리한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 선과 악을 합쳐서 모으면 뭐가 돼요? 선과 악을 합친 지식을 뭐라고 합니까? 선악지식.

선악지식은 창세기2장에 보면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이 뭘 따먹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어서 선악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럼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과실 하나 도둑맞았구나!”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아니면 뭔가 벌칙이 있습니까? 선악을 알게 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지요.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존재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계속 우리가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이 작용을 뭐냐 하면, 죽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하는 거예요. 지옥으로 갈 사람들은 바로 요런 식으로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내가 방어한다. 요런 사고방식 자체가 지옥으로 가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일관되잖아요. 일관.

그래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미워하고, “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 자식보고 “니는 왜 아빠, 엄마의 마음을 그렇게 못 헤아리느냐? 내가 그렇게 잔소리해도 왜 못 알아 듣느냐?” 이게 미움이잖아요. “니가 있으면서 내 목표와 목적이 지금 방해받고 있잖아. 니는 하여튼 나한테 도움이 안 돼.” 이게 뭐냐 하면 그런 마음자세가 지금 선악과 따먹은 티를 여과 없이 완전히 발산한 거예요. 폭발시킨 거예요. 그래서 이 전체를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니가 따 먹었으니까 죽이라고 하고, 악마는 뭐라고 합니까? 악마는 따먹었으니까 뭐가 됐다? 너가 이제 뭐가 됐다? 신. 니가 하나님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악마 말을 들으면, 악마 말을 쉬운 말로 들으면 이거에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라.”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이것이 내부적으로 폭발하고 있어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라. 잔소리 하지 말라도 포함 돼요. 나를 건드리지 말라. 내 앞 길을 태클 걸지 말라. 이런 거요. Please. 제발 부탁한다. 지금 나를 건드리면 나에게서 무슨 행동할지 나도 종잡을 수 없어. 그 때 니 후회하지 말고 내 건드리지 말라.

첫 째 시간에 이걸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제 뭐냐 하면 존재. 또는 있음의 성격이지요. 이걸 아신다 치고 지우겠습니다. 제가 글을 쓸 테니까 이 글의 공통점을 맞춰보세요. 장미, 낙타, 풍경, 아파트, 사람, 탱크,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전부 있다는 거예요. 공통점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뭐냐,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걸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냥 없음이 아니고 의미 없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평생을 살아도 똑같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잘 때까지 그걸 일년 같으면 365번, 10년, 100년까지 산다 칩시다. 살아도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시간 때우면서 그냥 가는 거예요. 의미 없어요. 이거 어떡할래요.

여러분들이 <모나리자>라는 그림 아십니까? 어떤 귀족집 아주머니. 머리 단발 비슷하게 해가지고 눈썹은 없어요. 눈만 있고. 웃는지 분간도 안 되는. 모나리자. 이 모나리자 그림을 제가 직접 봤거든요. 프랑스 르불 박물관에서 봤는데. 이 모나리자 볼 때에 묻습니다. 1번 모나리자 귀족 부인 이 아주머니를 본다. 아줌마 본다. 2번 풍경 본다. 몇 번이겠습니까? 풍경 봅니까? 모나리자 봅니까? 모나리자 보지요. 그만큼 이 풍경을 놓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의미 있다고 하는 것만 선별적으로 뽑기 때문에 정작 자기만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것과 관계없다는 것은 전부 다 관계없는 걸로 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의미라는 것이 전부 다 본인에게만 의미 있지 억지에요. 쉽게 말해서 인생은 억지로 산다. 사람들은 전부 다 억지로 살아요. 그저 떠밀려서 살아요. 떠밀려서. 어떤 사람이 술을 안 좋아해요. 방송이나 술 먹고 음주운전하면 화를 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에 술을 다 없애야지. 술 먹고 저렇게 음주운전하고 술 먹고 나쁜 짓하고 저러면 안 돼. 술을 강제로 못 마시게 해야 돼.” 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촌에서 영덕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요즘 와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방울토마토가 판로가 없어요. 안 팔리는 거예요. 이유가 뭐겠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술집 영업을 안 하니까 안주로 방울토마토를 구입을 안 해버린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그냥 단편적으로 술 먹는 사람 싫다고 했지만, 술집이 없어버리면 지가 농사 짓는 방울토마토를 팔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류 되어 있고 얽혀 있는 겁니다. 분명히 나는 나의 의미를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의미를 챙기도록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아요.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구출한다는 말은 나만 달랑 구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를 뒤 배경 있잖아요. 모나리자만 구원한다면 주님께서 뒤 배경이 있잖아요. 그 배경을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출이에요. 구원이에요. 니가 속해있는 세상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팔자. 욕해도 가려가면서 욕해야 돼요. 고객이 있을 수가 있다고요. 고객이.

어떤 사람이 자장면 중국집을 하고 있는데 길가다가 옆에 사람이 옷을 약간 스쳤다고 해가지고 싸워보세요. 나, 지금 저 중국집에 밥 먹으러 가는데 당신 때문에 기분 나쁘다 할 때, 그 사람은 내가 주인인 걸 모를 때 지는 손님 하나 놓친 게 되지요. 그렇잖아요. 안 싸웠으면 우리 집에 와서 먹을 텐데.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의미만 챙겨버리면 이 세상에 그것은 바보같이 사는 거예요.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막대 자 아십니까. 막대 자인데 접혀서 죽 펴면 죽죽 펴지는. 요새는 잘 안 씁니다만 요새는 기계가지고 하지만, 막대 자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a′-a-A 공식이 있는데요. S를 빗금 쳤는데 우리말로 하면, (나는) a′(상상한다. 뭘 상상하느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이렇게 되어야지.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지요.) → a (상상하는데, 내가 상상한 그것이 a′라고 한 이유가 내가 분명히 상상한 것은 a′인데 실제로 내가 현실적으로 내가 골라요. 내가 상상한 것은 a가 되는 겁니다. 요게 내 상상선이에요.) A(그런데 A는 요게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이 a를 충족시키지 않고 같은 A지만, A는 다른 것을 나로 하여금 강요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요건( → a′ → a)이 뭐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요걸 내가 상상한 이유는 그럴 때 나한테 의미가 있고 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서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걸로 내가 강요받는다. 강요받게 되지요. 이게 우리들의 무의미한 의미는 내가 시작했지만, 내가 원치 않는 의미로부터 내가 압박을 받고 협상을 요구받고 공격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의미는 어디 가서 찾습니까? 맨날 손해 보는 것 같고, 맨날 나는 눌리는 것 같고, 좋은데서 쫓겨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스가랴10장9절 봅시다. 그들을 여러 백성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와 함께 돌아온다. 아까 제가 그림 그렸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진 상황. 내가 그들을 애굽땅으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로부터 모으며, 길르앗과 레바논을 그들을 이끌어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애굽땅, 앗수르, 길르앗땅, 레바논, 그들 속에 살면서 인간들은 역시 나의 의미를 찾는다 말이죠. 나의 의미를.

그런데 주님께서 뭘 이기느냐 하면, 애굽을 이긴다. 애굽을 이기고 자기 백성을 빼낸다는 것은 애굽을 이긴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앗수르를 빼낸다는 말은 앗수르를 이긴다는 거예요. 또 레바논을 이겨요. 레바논을 이긴다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길 때 나와 주님 사이에 누가 이기느냐,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걸 묻고 싶어요.

주님이 이깁니까? 내가 이깁니까? 내가 이기면 나는 구원되지 못하고, 누가 이겨야 돼요? 주님이 나를 이겨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주님한테 날마다 지면 되는 거예요. 나의 의미가 나한테 소중한 나의 의미가 주님의 의미한테 패배하면 비로소 거기서 진짜 의미를 우리가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날마다 지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남하고 시합 붙을 때, 그냥 빈손으로 나가요?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나갑니까? 자기 무기 들고 나가겠지요. 자기가 무기 들고 싸우는데 저쪽에서 칼 들고 나오는데 나는 나무 칼 들고 나갔는데 저쪽에서 칼 들고 나의 나무 칼을 잘라버리면 나는 패배했잖아요. 어때요. 이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습니까? 세상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앗수르, 레바논, 이런 데서 애굽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그런데 주님한테 내 무기가 무용지물이 된다면 이건 그동안 내가 추구했던 나의 의미를 이제는 놔버리는 것이 이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의 무기를 우리의 자랑거리를 전부 다 댕강 댕강 다 치워버리는 것.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주님이 찾아와가지고 주님이 방향을 거꾸로 와가지고, 나는 → a′ → a → A 로 나가는데, 주님은 거꾸로 오셔가지고 결국은 마지막 누구를 겨냥하느냐, 나를 주께서 이렇게 미사일을 쏴서 공격( ← a′ ← a ← A)을 해버리는 겁니다. 공격을 해버리면 나의 의미라는 것이 댕강하고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면 이게 바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속이 돼요. 구출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감사하고 모든 일에 고맙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방금 요 그림을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나를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사회인으로. 이 땅에 사회인 되어가지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회인이 되어가지고 남과 어울릴 때 무엇 된 양 내가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나 그게 다 허망해요. 왜냐 하면 사회인이 되는 순간 주위에 나를 뜯어먹으려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거든요.

닥터 피시 하는 게 뭐냐 하면, 발을 담그면 내 각질 뜯어먹으려고 고기가 다 달려드는 것처럼 좀 산다, 좀 이렇게 밥 먹고 산다, 소문만 나도 와르르 달려듭니다. 가까운 일가친척부터 해가지고 멀리는 동창생 친구 다 달려듭니다. 온갖 소리 다해가면서 닥터 피시처럼 가만히 있어도 달려들어서 뜯어먹고 배부를 때까지 뜯어먹다가 자기 좋은 데로 다 나가버려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감사할 일이에요. 만약에 주님께서 안 찾아오게 되면 그건 감사가 아니고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증오로 바뀌는 거예요. 미움으로. “이것들이 친구라고 잘해줬는데 나는 니한테 최선을 다해서 잘해줬는데 니는 나에게 상처만 주는구나!” <고맙소>라는 노래의 가사에 있어요. 나는 니한테 정성을 다해줬는데 니는 상처만 주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리면 감사가 되어버리면 우리한테는 상처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뭐 내 것이 있어야 상처가 되는데 내 것이 없는데 무슨 상처가 돼요. 상처를 받아도 주님이 받지 내가 내 것도 아닌데 주님의 것을 갖고 있고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그동안 나를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났거든요.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면 그 후유증이 굉장히 심하게 돼요. 상처는 뭘 낳느냐 하면 보복과 복수심을 유발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그걸 보복과 복수하고 그래서 만회, 다시 원상회복하기를 노리게 돼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스트레스가 발생되고, 스트레스는 말기 암을 유발합니다. 말기 암. 말기 암은 면역성이 약화되어가지고 오미크론에 걸리면 남은 들 아픈데 혼자 아파요. 면역성이 약해가지고. 3차 맞아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아픈 것도 전부 뭐냐 하면 자기가 상처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면 상처를 받는데 애초부터 내 것은 없어요. 없는데 무슨 상처를 받아요. 왜 남하고 비교합니까. 비교 없으면 천국이고, 비교하면 지옥이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약속의 땅에 끌어 모을 때,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뭐냐 하면, ‘존재 너머로 가지 말라.’ 주님이 계신데 흩어진 사람을 모으되 절대로 이 주님 너머로 넘어가지 말라.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되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건 좋은데 예수님 재끼고 예수님 뒤에 뭐가 있노? 들어가지 말라. 이거지요.

연극 볼 때 연극세트장 뒤를 기웃거리는 꼬마아이 있잖아요. 서커스 할 때 애들 뒤에 뭐가 있나? 분장실에 들어가고 그런 짓 하지 말라, 는 말이죠. 만약에 예수님 뒤로 넘어가게 되면 여기는 나의 의미가 살아있고, 나의 의미가 살아있으면 이건 스트레스 받습니다. 소위 상처를 받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데서 울분을 터트립니다.

11절 봅시다.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권세)가 없어지리라” 애굽나라의 경계선 자체가 존재 의미 자체가 앗수르의 의미 자체가 나일강의 그 자체가 모조리 전부 다 없어진다 이 말이에요.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있음은 누구만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만 있음이 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실은 있어도 없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인생을 백년 살아도 백년 살았다 하지만, 백년 살고 돌아가실 때에 백년 살았던 기억도 날아가 버려요. 처음부터 인생은 없었던 거예요. 죽을 때 되게 되면 아~ 내가 살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죽는 이 순간만 있지 그 전 것은 백 살 때 죽는다면 99살도, 97살 때 한 번 찾아보세요. 없어요. 인생은 원래 없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초와 같아요. 초가 타면 어떻게 됩니까. 초가 이렇게 길게 있다가 없어지고 마지막 농만 있고, 이렇게 초만 까닥 까닥 있다면 이 모든 옆에 있던 거 어디 갔습니까. 없지요. 이걸 누가 하느냐, 시간이 하는 거예요. 시간은 인간을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겁니다. 모든 걸 없애는 거예요.

다 없어져도 누구만 있습니까? 우리 주님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없어지면서 주님과 관계를 맺으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겁니다. 니가 없어지는 자리에서 영원토록 안 없어지는 자리로 옮겨 주는 것.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목숨의 한계와 대비해서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 영원히 사는 것. 이제는 없어짐이 없는 것. 없어짐 자체가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되고요, 남의 이야기가 되는데 왜냐 하면 이 존재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원하다면 그 안에 우리도 영원한 거예요. 예수님이 영원하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아까 ‘육의 번성’이라 했지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영체의 번성’. 예수님의 몸의 부활 번성이라고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번성이 아니고 주님의 몸의 번성. 자기 백성들을 끌어 모으는 그 번성을 주께서는 하는 겁니다. 들어보니까 전혀 어렵지 않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들의 고집 있잖아요. “나의 의미,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거 하고 하나님의 고집이 있다고요. 하나님은 모든 것은 내 백성 만드는데 나는 지치지 않는다. 나는 양보 없다. 그것이 정면으로 이렇게 같이 마주해서 역사를 이어온 유일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리고 지금 스가랴를 보고 있는데, 스가랴는 누구 민족 이야기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에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다시 흩어 모으리라. 그런데 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신약이 되게 되면 이런 이스라엘 말고 진짜 마지막 이스라엘. 전체 이스라엘을 바로 요 원칙대로 구원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11장 넘어가기 전에 방금 했던 것을 요약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휘파람을 불어서 자기 백성을 한 곳에 모은다. 그 때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어디에 합류하느냐, 우리에 합류한다. 기억나시지요. 기억이 나서 그들을 한 장소에 모으는 거예요. 한 장소에 모을 때 구원 받은 사람끼리 모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본드처럼 하나를 결속시키는 어떤 한 분이 중심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모으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빠져버리면 우리가 안돼요. 그냥 친목 모임이 되지, 우리가 안돼요. 주님 이름으로 모여야 돼요. 내 이름으로 모이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고등학교 동창생을 제가 거의 안 만나는데 연락이 왔어요. 몇몇 친구들한테 만나자고. 만나가지고 미나리에다가 요새 팔공산 미나리 유명하거든요. 미나리에다가 삼겹살 구워 먹는 게 그게 세팅이 되어있어요. 대구 사람들. 미나리 삼겹살 구워 먹자고 하는데 그렇게 카톡에서 모이자 하는 거예요. 4월2일날 되느냐, 안되느냐, 보고 싶어 한다. 그때 동창회 모였다 칩시다. 그거 누가 불렀지요? 그 모임이 누가 불렀어요? 그건 아무도 부른 사람 없어요. 본인들이 선택한 거예요. 나도 얼굴 보고 싶다. 결심하면 모으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교회 갔을 때 모였잖아요. 누가 불렀습니까? 누가 불렀지요? 주님이 불렀습니까? 아니면 본인이 교회 가서 뭔가 자기한테 이익이 될까 싶어서 간 거예요? 본인의 결심이었습니까? 누가 불러서 간 거죠? 동창회하고 교회하고 오늘 본문 주께서 불러 주심하고 차이점을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동창회, 교회를 같이 보는 거예요. 동창회 미나리 삼겹살 먹으러 모였다. 모이자고 이야기했지요. 그거보고 “그래, 결심했어. 모여서 한 번 보자.” 이거하고 교회에서 모이자. 교회 모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꿈에 교회오라고 모이자고 했어요. 누가 오라고 한 거예요? 교회조직에서 이야기한 거죠. 교인이라면 집사라면 적어도 11시 본 예배는 재방 말고 본방. 본방사수. 11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교인의 책무요, 임무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법이고, 그게 규례지요. 그러면 법은 내가 지키려면 지키고, 안 지키려면 어떻게? 안 지킬 수 있잖아요. 인간의 자율성이 그대로 살아 있지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주님의 몸으로 모일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모이면 모이고 말면 말고 그렇게 되는 겁니까? 주님의 모임은 모일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가 서울에 있든, 목포에 있든, 대구에 있든 어디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 있음 자체가 주님 안에서 모여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의 모임이에요.

니가 독일가든지 미국가든지 북극에 가든지 우크라이나 전쟁하러 가든지 어디를 가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되게 했기 때문에. 우리. 영어로 We지요. 우리가 되게 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집구석에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돼요.

여기 교회에 몇일 안 나오면요, 안면 바쳐요. 눈치 바치고. 목사 만나면 괜히 변명하고 싶어지고. 코로나 걸려서 온 나왔습니다. 시집간 딸이 애 데리고 와서 애들 놀아주느냐고 못 왔습니다. 오려고 했는데 차 밧데리가 나가서 고장 나서 못 갔습니다. 여러 가지 변명들 하는데 그 변명을 왜 늘어놓습니까. 그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게 뭐예요. 결국은 자기 방어잖아요. 자기 의로운 방어잖아요. 나 그렇게 막 되어먹은 사람 아니라고. 막 되먹은 사람 아니고 무식한 사람 아니라고. 누구 보고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대상이 누굽니까? 목사에요? 장로에요? 누굽니까? 그들이 뭔데? 그들에게 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인간이 뭔가 선택하게 되면 의식해야 되는 타인들이 그 순간 쫙 깔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거예요. 내가 뭔가 변명하는 순간 변명을 들을 만한 사람들을 내가 무시하지 못한다는 그런 새로운 스트레스 받는 긴장된 관계가 또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냈어요. 마치 촌에서 오래간만에 시어머니 올라온 것처럼. 촌에서 시어머니 와가지고 갑자기 주는대로 먹으면 되는데 “보자, 냉장고는?” 냉장고 열어보고, 부엌 열어보고, 설거지 상태, 청소 상태,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니 까지게 와가지고 그래! 응? 이렇게 살림도 안 살고 내가 니 같은 여자 만난 걸 내가 처음부터 반대한 걸 알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거기다가 김치 싸대기까지 날리고. 그리되면 뭐예요? 그 다음부터는 촌에서 따르릉~ 해가지고, “야, 야, 며느리야! 내가 다음달 2주 동안 내가 너희 집 갈게.” 갑자기 뭘 받습니까? 스트레스 받지요. 나의 영토 아닙니까.

그러니까 세상사는 게 왜 힘드냐 하면요, 힘든 이유가 시어머니 때문에 힘든 게 아니에요. 교회 목사 때문에 힘든 게 아니고. 내가 나의 의로움과 내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가를 자꾸 떠벌여야 될 대상들을 내가 지금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자체가 본인을 스스로 힘들었다 말이지요. 그게 11절에 뭐냐, 그게 바로 앗수르의 교만입니다. 애굽의 규(권세) 규례. 법.

자, 교만. 앗수르. 여러분, 오늘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할 테니까 가만히 있으면 돼요. 앗수르는 이방나라입니다. 이방나라.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아는 거 생각하면 돼요. 이방나라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 대신 뭐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신은 뭐가 있느냐 하면 우상이 있지요. 우상은 뭐가 없느냐 하나님에 직접 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대접해서 복 받는 게 우상이거든요.

왜냐 하면 아까 배웠지요. 선악이지요. 선악. 착하면 뭘 받고 복 받고, 악하면 뭘 받고. 벌 받는 것. 이런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선악체제에 의해서 나한테 유리하도록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 세워 놓은 신, 하나님,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내가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다루기 나름이에요. 내가 뇌물 바치면 복주고 내가 삐지면 그냥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고, 그러다가 아쉽다, 병 들었다 하면 기도하면 병 낫게 해주고, 그게 우상이거든요. 그 목적이 뭡니까? 우상은 자체적인 목적이 없어요. 내가 신을 찾는 목적은 나한테 있지, 신한테는 없어요. 내가 필요한 대로 이용해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에요. 우상이라는 게.

저쪽을 이겨야 돼요. 같은 교회 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최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갑자기 최집사가 나쁜 사람이 됐는데, 김집사가 최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 애가 최집사보다 공부 잘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나가는 이유는 신은 내 열심에 대해서 호응하기 위해서 저 최집사 애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게 해줄 때 내가 아낌없이 십일조 드릴 수 있는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을 언약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뭘 만든다? 계약 요건을 내가 만들어서 신에게 그냥 앵겨주는 거예요. 나의 선약체계에 의해서.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이러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지 않습니까. 내가 헌금하면 헌금해가지고 하늘나라 확장하게 되면 하나님도 좋을 거고. 나는 헌금했기 때문에 나는 복 받고 나도 좋고. 윈윈할 수 있잖아요.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나라? 앗수르에요. 앗수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가짜 신으로부터 빼내주는 거예요. 가짜 신에서 빼내주는 거예요. 빼내고 보니까 앗수르가 뭐다? 앗수르가 교만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에 교만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왜냐 우리가 없을 때는 교만 안한 거 같지만 우리가 없음의 자리에서 있음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좀 사람들이 가졌다 싶으면 교만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아까 그 작은 다이아몬드있지요. 다이아몬드가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잠재되어 있던 나의 무지했던 모습이 교만한 자리에서 그게 발현이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이 정도로 시건방지게 사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구나!’ 내가 없을 때는 이게 발휘할 기회가 없었는데 내가 딱 좀 있어보니까 나보다 못난 건 완전히 밟아버리고 잘난 것엔 아부를 이렇게 잘할 줄 나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이 정도로 돈에 미쳤고, 돈한테 끔쩍 못하는 존재인 것을 내가 어릴 때는 내가 상상도 못했지요. 이 정도 비굴하고 추잡스러운 존재인지를. 상상도 못했지요. 나는 나만 챙기는 이기주의자인걸.

그럼 우리가 이기주의자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기주의자를 못 벗어나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기주의자, 얍삽한 인간 채로 어디를 간다? 천국을 가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복된 겁니까. 뭘 알아야 고치지요. 내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야 내가 알아서 고치는데, 내가 모르는데 뭘 고쳐요. 내가 뭘 고칩니까?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그게 겸손이에요? 더러운 사람 오면 박대할 수밖에 없는데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자꾸 주장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착한 사람으로. 착한 사람 코스프레 한다 그러죠. 자꾸 선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주께서 우리보고 사람 되라고 한 이야기가 없어요. “야, 인간아! 인간처럼 살아라.” 이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우상이 요구하는 거고. 그건 오늘날 교회가 요구하는 거죠. 당신이 병 아프고 못 사는 것은 당신이 저질이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을 안 고쳤기 때문에, 그런 벌을 받기 때문에, 징계를 받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고쳐보면 복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계속 사기를 쳐왔잖아요. 그 사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왜? 인간은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니까 스스로 사기꾼에게 넘어가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의인이 아니에요. 뭡니까? 죄인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이빨 아파서 치과에 갔는데, 치과의사가 “좀 아프실 겁니다.” 하고 딱 올려가지고 야무지게 딱 묶어놓고 이~ 하니까, 아야 아야! 하더니만 대번 치우고 내빼지요. 왜? 아프기 때문에. 교회가 좀 달래야 되는데. 교회가 진짜 복음을 전해보면 아프라고 도망 다 가버려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면 큰 예배당 다 가버리면 예배당 어떻게 됩니까?’ 라고 생각하실텐데 감사하게도 복음 전해서 큰 예배당 된 적이 없어요. 그냥 집에서 서너명 모이지요. 복음 전해가지고는 절대로 예배당 커지지 않습니다. 가짜를 전해야 돼요. 마귀를 전해야 교회가 크게 돼요. 우상을 섬겨야 크게 되는 겁니다. 고객 만족이 되어야 고객이 오거든요.

앗수르는 이방나라입니다. 이방나라는 하나님이 달라요. 우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빼내줬다는 말은 이제는 그냥 죄인인 채로 못난 존재 자체로 주께서 이 자체로 부르신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할 것은 뭐냐, 내가 죄인인데 어느 정도로 깊이 관여했는가를 알아야 돼요. 내가 이 죄라는 게. 어줍잖게 지은 죄는 죄도 아니에요. 더 깊은 죄와 연류 되어 있어요. 모든 분야의 뿌리가 온 땅에 죄와 다 관여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무지하고 못났다는 것을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주께서는 그걸 계속해서 하게 하셔요. 그래서 여기 11절에 보면 앗수르의 교만은 낮아지겠고, 나중에 앗수르가 망합니다. 사람이 아주 큰 나라에 있을 때는 자기가 천년, 백년 갈 것 같지요. 나중에 망해버려요. 사람이 어떤 집안에 우리 집안은 어릴 때부터 아주 부잣집이라서 남들이 백년 먹을 것은 끄덕 없다. 넉넉하다 했을 때에 나중에 그 애가 고등학교 될 때에 집안에 보증 잘못 서가지고. 맨날 보증 잘못 섰데.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집안이 홀라당 망해버리고 나는 공납금도 없어서 대학교도 못 나오고 내가 친히 노래 불러가지고 가수해야겠습니다. 이리 해가지고 남도 가요제 나가서 트로트 불러가지고 우승해가지고 아나운서 만나서 결혼하고. 사연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연들 보세요. 옛날에는 다 잘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잘 살을 때의 나와 자기가 집안 망했을 때의 나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인이 달라졌지요. 잘 살 때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대요. 자기는 대학교갈 때까지 돼지고기가 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소고기만 먹었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어떤 종류인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나는 고기라는 것을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있는 앗수르, 애굽, 이 모든 환경이 그 사람의 현재 지식을 결정합니다. 이걸 아까 처음에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이데올로기. 이념이라 하는 거예요. 그 이념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이념자체가 죄에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사느냐 하면, 도대체 내 죄가 어디까지 뿌리가 있는가를 교회 다니면서 성경을 보면서 기도하면서 그 뿌리를 칡뿌리를 강제로 그걸 한 번 뽑아보세요. 도저히 우리 힘으로 못 고칩니다.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죄에서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죄에서는 고쳐지지를 못해요. 죄 자체가 습관화 되어있기 때문에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관행이라는 게 있잖아요. 관행. 그건 고쳐지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온 것은 의사가 온 것은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냥 올 때도 병든 자. 와서도 병든 자. 병든 자가 되어야 의사 빛이 납니다. 주님만이 의사입니다. 빛이 나지요. 그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갖고 있던 조그만 가방이라든지 책이라든지 우리의 건강이라든지 목숨, 이건 내가 어떻게 관리해서 노력해서 얻은 겁니까? 아니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거져 주신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은혜잖아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것 하나 내 것은 없고 주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요걸 한 번 따져 봅시다. 나는 있는데 어떤 나다? 죄인이다. 다른 말로 나는 교만하다. 나는 저질이다. 저질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나는 추잡하다. 추잡스럽다. 이게 더 나쁜 거죠. 저질보다 더 나쁜 게 추잡스러운 거예요. 알랑 떨고 하는 거. 먹고 살려고. 이런 나. 이건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죄인의 그 깊이를 모르고요. 아직까지 살아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살아있으니까. 교만에 더 교만할 가능성이 뭔지를 모르고 더 깊이 저질해야 될 것을 모르고, 추잡스럽다. 어느 정도로 추잡의 깊이를 아직 다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나이가 70됐다면 80되게 되면 좀 더 70때보다 추잡스러움이 더 강도가 질이 노골적으로 되겠지요. 바로 이렇게 나를 계속 몰아가는 거예요. 누가? 주님의 용서가. 주님의 용서의 사죄의 피가, 은혜가, 나로 하여금 계속 몰아가니까 주님의 용서하심과 나의 수준과의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것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이것이 감사와 고마움으로 나온다 말이지요. 감사와 고마움으로.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게 없고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 또 항상 기뻐하라. 고맙다고 늘 기도하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라.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더 저질스러워야 되는데 여기서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착해야지.” 이렇게 스톱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만약에 스톱! 멈춰버리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이 생기느냐 하면, 나보다 더 저질스러운 사람을 만날 때 자기가 졸지에 의인이 되어버려요. “아휴, 저런 인간 죽여야 돼. 어떻게 저것도 짐승이지 인간이야.” 주님이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본인이 본인보다 더 저질스러운 사람보고 지보다 못하다고 규정짓고 욕하는데 급급하지요.

그 말은 만약에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착하게 되면 또 어떤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저질인데 어떻게 저런 죄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는 왜 이렇게 착한데 나는 0.7%차이로 왜 떨어지느냐, 국민 여러분 미안하고 내가 못났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사람이 어떤 스톱이 되어 버리면 저질로 스톱이 되어버리면 나보다 더 못난 것은 묶어버리고 지보다 잘난 건 따로 묶어서 자기는 잘난 편에 속하다고 자부하고 그걸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뭐가 사라졌지요? 자기가 잘난 쪽이 되니까 갑자기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감사 날아갔지요. 고마움 날아갔지요. 하나님의 은혜 다 잊어버렸지요. 사는 게 박박하지요. 더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스톱하다 보니까 지가 스트레스 받지요. 사는 게 힘들지요. 남하고 경쟁해서 안 지려하지요. 이기려 하지요. 지면 잠을 못 이루지요. 잠을 못 이루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다크서클 다 끼지요. 그리고 뿔다구 나니까 탓을 남 탓 돌리지요. 말할 때 부드럽게 말이 안 나오고 강력하게 말이 나오지요.

“니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해. 니가 뭔데? 나는 나를 내 식대로 살고 싶은데 니가 뭔데 내 인생을 방해해. 태클을 걸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한테도 닦달내고. 집에 있는 애들한테도 닦달내고. 남편은 물론, 아내도 물론, 심지어 강아지한테도 발로 차고. 세상 모든 것이 나는 착한데 나는 훌륭한데 세상이 더러워가지고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안 알아줘서 내가 사는 게 다 남 때문에 힘들다고. 그게 바로 아까 앗수르에서 뭡니까. 이야기한 너는 신이다. 너는 남한테 밀리면 안 돼. 이겨야 돼. 그게 앗수르고, 그게 애굽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무조건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함이 아니고 피로, 행함이 아니라 피로, 우리를 이미 건져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하나님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그걸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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