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것은 다투는 거, 싸움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 자신의 공간, 자신의 공간은 하나님과 싸움이 되는 공간이 된다는 것을 인간들은 감히 상상도 못 했죠. 그리고 주님의 공간은 따로 있었고 그 둘 사이에 하나님이 찾아올 때 질문형식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빅데이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정보의 양, 그 양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이 왔을 때 우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답변하라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움직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움직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참 바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움직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찾고자 합니다. 이게 왜 문제냐. 우리가 시선을 나의 공간을 확보하고 키우기 위해서 시선을 거기에 두거든요. 그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그것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고 주께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주께서 그냥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에 의해서 막강한 정보량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지금 너의 그 계획이 네 뜻대로 성사된다고 믿고 있냐?”라는 식으로 질문하시는 거예요. 답변은 욥기 오늘 본문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저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움직임 멈추겠습니다. 그저 주님이 주는 시선 쪽으로 얼굴을 돌리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부부죠. 얼굴을 맞대는 거요. 서로 얼굴을 보고 시선을 주고받는 관계가 한 몸 관계 아닙니까? 하나님과 하나 된 관계.
지금 욥은 자기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가 6절에 나오는데,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폭풍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작은 소리, 나의 큰 소리, 이런 것들이 다 먹히도록 만들어요. 내가 하는 소리가 폭풍 소리를 전혀 뚫지 못해요. 강력한 빗소리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질문은 우리 모든 바탕을 없애버립니다. 우리 모든 삶의 공간을, 우리 바탕 자체가 아무것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바탕으로 삭제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의 시선과 주님의 지시, 주님의 질문, 주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 코앞에 있는 모든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할게’하고 그것을 하게 되면 그건 예상하는 것이 되지만 ‘주께서 이런 일을 주셨습니까?’라고 되면 그건 선물이 되지요.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보면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나오는데 백합화를 봅니다. 방금 설교한 것을 적용시켜보면 우리 시선이 백합화로 가 있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 그러니까 실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29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나는 백합 말고 인위적이고 인조 적인 거, 인공적인 거를 주께서 언제 달라고 했느냐는 거죠. 그저 백합만 같아라. 다시 말해서 아름다워라 하는 말이 아니고 어떤 너의 수고와 애씀을 다 삭제시킨 인생이 되어라. 그러면 너의 인생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 빅데이터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들에 백합화를 피도록 능력을 발휘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을 죄인 만들기 위한 겁니다. 인간들을 죄인 만들려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의 육은 동질성에서 동질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기 번식, 자기 복제예요. 육에서 육을 복제하고 번식하는 거뿐입니다. 아이에게 ‘피아노 쳐라, 공부해라’라고 하는 이게 뭡니까? 번식하는 거예요. 내가 너 공부하라고 열심히 돈 벌게. 번식하기 위한 에너지와 그 자금을 대기 위해서 돈 버는 거예요. 전부 다 번식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것에 시선이 가 있어요. 주님의 시선은 신경도 안 씁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의 동질성을 내가 키운다. 확보한다’라고 하는데요. 진짜 이 인간의 육의 번식에서 벗어나고 영의 번식으로 가려면 여기서 뭐가 발생 되어야 하냐면 죄가 발생 되어야 해요. 그게 비동질성이에요.
동질성에서는 남자, 여자, 이렇게 두 사람이 있으면 되는데 비동질성은 세 사람이 있어 줘야 해요. 죄가 발생해 줘야 합니다. 죄가 발생 되어야 나의 육의 번식 자체가 죄인 것을 그때 비로소 압니다. 인간은 자기 영토, 자기 자리,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죠.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 말은 주님이 ‘너희들 죄 나타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지? 내가 너에게 질문할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 너의 죄를 하나의 인격화 시켜서 만들어 낼 거야’라는 뜻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을 너의 죄라고 앞에 만들어서 너의 앞에 제시할게’라고 우리 앞에 내세우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죄가 바로 거기 있네. 주님의 찢기시고 피 흘리는 저 비참한 인생이 바로 내 모습이잖아. 내가 감춘 내 모습이잖아’라고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투시던가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다투고 있어요. 하나님은 욥을 죄인으로 삼으신 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안 다투셨지만, 욥은 지금 하나님인 나와 다투고 있고 그래서 욥 네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너는 그런 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나의 빅데이터, 내가 아는 이 세상이 내가 만족스럽고 내가 원하는 존재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문을 하시는 거고 그래서 바탕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움직임을 스톱시키고 멈추시는 겁니다. 욥은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입으로 손을 막으면서 “저 말 안 할게요”라고 하죠.
죄를 안 짓겠다는 말은 나는 내 영토, 내 자리를 포기 못 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주님의 시선, 이런 거 다 싫고 내가 만들어 낸 내 인생을 고집하고 싶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너의 번식이다. 너의 복제야. 너는 너밖에 몰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네가 만들어 낸 너,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나의 복제물인 네가 되고 나와 너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3의 요소인 네가 기피 하는 죄가 너와 너 사이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쥐어 짜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재료로 삼으시겠다는 겁니다. 죄를 모아서 의를 생산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통해서 죄 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뭐냐. 아버지와 다투지 않는 아들,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죠. 우리는 짜낼 대로 다 짜내버리고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은 길거리에서 파는 기름 쏙 빠진 전기구이통닭처럼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한 질문을 쏙 다 빼 내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바탕의 자리가 아예 없게 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에서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15장은 잘 아시다시피 탕자 이야기,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가서 자기 자리를 마련했지만, 그 탕자가 돌아올 때 뭘 인식하느냐 하면, 내 자리가 없음을, 그리고 내 자리가 아예 없어지고 난 뒤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기를 원했어요. 왜? 내 몫이 있으면 아버지 옆에 있어도 아버지 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어도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이용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부자고 아버지가 잘사니까 나는 필요한 것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면 이건 신자 아니죠. 신자는 나를 위한 나의 자리가 아예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더는 시선을 나에게 꽂히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다 날리고 오너라. 제발. 네 것은 다 날리고 와서 더 이상 너에게 시선 두지 않기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탕자는 자기 자리가 없습니다. 2.누가복음 16장에 또 자기 자리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불의한 청지기. 회사 다니면서 돈 다 빼먹고 자기 퇴직한 후에 방책을 도모하는 이 불량 직원, 이 직원은 자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남의 것을 가지고 횡령하고 있어요. 더 이야기하면 ‘우리도 그러면 되겠다’라고 할까 싶어서 넘어갑니다. 3.세 번째가 이야기할 것이 많은데 이게 뭐냐 하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하나님 아버지, 욥이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는데 비로소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내 자리가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들을 죄 삼으셔서 이미 죄를 해결하고 난 뒤에 우리 모습을 우리 모습으로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내 것 없음"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점과 점의 만남 (0) | 2022.04.12 |
---|---|
주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 (0) | 2022.04.11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0) | 2022.04.11 |
사망을 포획함 (0) | 2022.04.10 |
자유 (0) | 202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