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주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

아빠와 함께 2022. 4. 11. 13:19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1;10)

9절에 “형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9절에 “영원한 형벌” 그리고 10절에는 하나님께 “영광” 이렇게 나옵니다. 언제 그러냐? 그 날에, 그 날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날이 어떤 날이냐? 그날이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입니다. 다시 오시게 되면 거기에 영광을 받아야 될 사람들과 형벌을 받아야 될 사람들이 여기서 분류가 이루어집니다. 그 날, 주님의 때, 주님의 시간이 작렬하는 그 때지요, 그런데 인간의 시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이 결정해서 영광스러운 사람과 형벌 받을 사람을 분류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한 자격과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어떤 시간이 투입되어서 모든 시간을 중지시키고 “시간 그만~! 역사 그만! 흘러가는 시간 이제는 그만하자.” 이렇게 끝내버리고 완전히 분류를 시키는 그런 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왜 다른 사람은 안되고 예수님이, 그분이 나타나는 그 날만 되느냐?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보면 안식일이라는 게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절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의 때가 있는 거예요. 안식이라는 것은 일곱째 날인데 그 일곱째 날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나라 이스라엘에게만 일곱째 날이 순환해서 반복해서 돌아갑니다. 6일째까지는 노동하고 7일째는 쉬어라. 이게 안식일 규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망했어요. 망했다는 말은 안식과 연결될 수 있는 제대로 된 노동을 못 보여줬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거든요. 그 인간들이 6일 동안 어떠한 식으로 어떤 성질의 노동을 뭔가 했을 것인데 그 6일 동안 그들이 한 노동이 7일 날의 안식으로 온전히 이어지지를 못했어요. 이스라엘이 자신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고 이방인은 지옥 간다, 그렇게 자부했지만 그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진짜 영원한 형벌과 영광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제대로 된 6일의 노동으로 투입하셔서 그리고 제대로 된 안식을 보여주신 그분만이, 그분만이 영광과 형벌의 대상자를 결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왜 안식일을 주었느냐? 안식일이라는 것이 율법화 되어서 주어지게 되는 이유는,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시범조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안식일을 거기다가 작동시킨 겁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한 거예요. 예수님은 성공한 것이고요. 그 증거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12장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나름의 노력을 했겠지요. 그럴 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초를 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1-1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이렇게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줄 때 어떤 조건을 달았는가 일체의 조건을 묻지를 않았습니다.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하나님을 믿어야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도달하는데 유일하게 성공한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냥 아무 대가 없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이게 나중에 예수님 이후에 교회가 되면 이게 집단화가 되는데 이거 뭐 건강한 자 아픈 자 상관없이 전부 다 동일하게 안식의 혜택을 입어야 한다는 그 약속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1-2)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의 완성자고 달성자라는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 그 사실을 기피하는 사람, 나는 못 믿겠다, 도저히 못 믿겠다, 나는 내 역량을 믿을 거야, 나는 내 종교적인 심성을 믿을 거야, 이러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해서 기피하는 자, 이게 바로 믿음에 화합지 못한 자거든요. 안식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아니고, 제가 아니고, 어느 누구건 아닙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그분이 달성한 안식을 우리에게 나눠주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그 안식에 화합한 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 천국이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에 같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 때 그냥 빈 깡통으로 만든 게 아니고 거기다가 안식일 율법, 안식일 원리원칙을 전부 다 깔아놓으신 거예요. 깔아놨기 때문에 처음 창조했던 그 안식일의 만족함, 하나님의 만족함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도중에 사람들을 탈락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만드시고 안식일 집어넣어서 “안식일 지키면 너희가 복을 받고 안식일 없는 이방 나라 저주할 수 있도록 해줄 게.” 그렇게 했는데 이스라엘이 본인들이 안식일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7의 순환구조로 되기 때문에 7일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이 아니고 1일부터 6일째까지 동안에 자기 노동을, 안식일과 연결되어 있는 끊어지지 않는 그 취지가 이어지는 노동을 1일부터 6일까지 동안에 해내야 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배 시작할 때 보았던 시편 3편 2절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라 하는 것이 성도가 아니거든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안 도와주고 자꾸 예수님 자신의 노동의 완전성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노동은 뭐냐? 예수님의 노동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노동이에요. 어느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걸 확정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안식에 들어갈 자격자가 아무도 없다. 그 노동에 충실했습니다. 그것도 말씀에 준해서. 뭐 살인 안 했다고 우기는 사람 “남 욕하면 살인자야.” 죄인 만들어버렸지요. 나는 그래도 착실하게 바르게 산다는 사람 “네 오른손, 오른 눈 멀쩡한 것 보니까 너는 말씀에 어긋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너 뻔히 다 알잖아. 네가 기부한 것 지금도 기억하고 있잖아.” “바람 피운 적이 없다고? 네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 다 알거든!” 도대체 주님의 노동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노동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어느 인간도 내가 죄인입니다, 이걸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의 실력으로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님의 창조의 원리는 안식에 이르는 것만 주께서 살려내는데 어느 누구도 안식에 이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흙으로 다 만들어버린 거예요. 전부 다 탈락시키는 거예요. 안식에 들어오지 말라고 탈락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때에 주님께서는 오신다 하잖아요. 주님의 때가 따로 있어요. 인간의 때는 ‘그냥 기회만 주시옵소서, 기회만 주시옵소서.’ 계속 자기의 몸을 견지하려는, 유지하려는 시간적인 여유분만 자꾸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때고요, 주님의 때는 오직 한 번으로 끝내 버립니다. 단 한 번으로 끝내 버려요. 7월 10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은, 모든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으로만 전부 다가 죄인이라는 것이 충분히 확정이 된다는 뜻이에요. 규정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노동은, 주님의 노동은 인간이 자꾸 의인인 체, 의인인 체 하는데 예수님이 단 한 번의 행위로도 인간은 내가 잘난 게 있다든지 나는 살 권한이 있다든지 이럴 수 없게 아주 입을 잠가버리는, 자크를 잠가버리는, 율법의 모든 완성은 십자가거든요, 모든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 한 차례 날을 주는데 바로 그 날이 그 날이에요. 주님의 날이 단 한때, 그걸 ‘때’라 하거든요, 때, 한 ‘때’에 준해서 한꺼번에 세상 모든 실상이 내막이 깔끔하게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무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고 인간의 도리는 지옥 가주는 거예요. 그것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 창조할 때 그 안식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합당한 인간 빼고 나머지는 다 탈락시켜요. 그래서 아담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죽는 순간이 되면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의 극한의 점이 되어버립니다. 점으로 변해요. 하나의 순간으로 소실되어 버립니다. 없습니다. 인간은, 그 점에 빨려 들어가기 위해서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는 거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단 한 차례만 허락했는지? 이것은 인간에게 기회를 준다고 해서 확정된 죄인이 의인될 가능성은 제로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속죄일 제도, 대제사장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내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소실되니까 참 허무하잖아요. 이 허무하다는 이것을 우리는 아주 슬프게 여기면 안 돼요. 내 시간만 쳐다보는 사람한테는 이 허무가 정말 짜증 나고 하나님한테 화내고 싶지만, 분명히 안식일이라는 율법 규례가 있고 그리고 창조의 원리에 관심이 있고 마음 두는 사람한테는 그 안식일에 참여할 재주도 없는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짐을 더는 식으로 ‘아이고, 나라는 인간은 쓸데없이 되는 것도 없이 나를 천국에 올려보내지도 못하면서 자꾸 나에게 무거운 중량감만 주고, 밥 먹여 줘야지, 때 되면 화장실에 가줘야지, 목욕시켜 줘야지, 이 무거운 쇳덩어리 같은 것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속 시원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성도한테는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단번에 세상을 끝내는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동안 주께서 어떤 작업들을 해왔는지’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걸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사셨으니까 그 율법에 의하면 7의 순환구조 1, 2, 3, 4, 5, 6, 7, 그 7의 순환구조가 되어가는 겁니다. 순환구조가 되면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켜야 되지 왜 단번에 그렇게 되는가? 그게 7의 순환구조가 반 토막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때가 이 땅에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다는 말이고 그 외에는 택한 백성 아니에요. 택한 백성과 택한 백성 아닌 자가 섞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그 마지막 결정적 때를 위하여 예수님 몸에 부착된, 예수님 몸에 부착된 시간은 안식과 연결짓는 그런 시간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게 7의 순환구조에요.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예수님 몸이 진짜로 형벌 받을 자와 영광 받을 자를 구분시키는 그런 결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 예수님의 시간들이 따로 있어요. 이것과 인간의 시간이 같이 이스라엘 성경 속에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서 주님의 자기 시간이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피어나는 시간이 이방 나라 시간하고 좀 다릅니다. 예수님의 시간을 갖고 있던 민족이 다니엘이고 주님의 선지자 중에서 남은 자, 이스라엘 중에서도 선지자 다니엘의 경우를 보게 되면 그 내막이 펼쳐집니다.

다니엘 4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다니엘 4장 25절에 보면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줄을 아시리이다.” 이렇게 돼요. 여기에 일곱 때 그리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난다는 것을 여러분이 먼저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이게 꿈을 꾼 내용인데요. 누구의 꿈이냐? 느부갓네살이 꿈을 꿔요. 개인적으로 다 꿈을 꾸고 이 세상에 느부갓네살만 사는 게 아니고 수억의 사람들이 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가장 하나님과 근접되어 있는 특정한 인물을 거기서 하나 뽑았어요. 그게 누구냐? 느부갓네살 왕이에요.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을 통째로 정복한 왕입니다. 이스라엘을 정복하다 보니까 다니엘도 포로로 잡아 오게 되었어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겨서 멸망하는데 그중에 누가 섞여 있었는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선지자가 그 안에 같이 담겨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을 통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를 누가 가장 가까운 데서 그 계시의 진가를 드러내느냐 하면, 바로 느부갓네살이 가장 진가를 드러내요.

느부갓네살이 두 개의 꿈을 꾸는데 두 번째 꿈이 뭐냐? 내가 꿈을 꿨는데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런데 다니엘 4장 13절에, 한 순찰자가 와서 그 나무를 잘라버리고 짐승을 떠나게 하고 그루터기가 있는데 그 그루터기를 철과 놋줄로 동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설명합니다. “느부갓네살 왕 당신의 나라를 당신이 통치한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이 통치한다고 보십니까?” 다니엘과 관계되어있는 그분 외에는 모든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부갓네살왕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전 인류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일곱 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족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통치해야 만족스럽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통치해야 되는데 인간이, 짐승이 그 통치를 중간에 가로막고 말았어요. 그래서 25절에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즉 가로막았던 그 가로막을 주께서 뽑아서 던져버립니다. 던져버리니까 그다음에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이것이 일곱 때를 통해서 폭로가 되는 거예요. 진실이 폭로되는 겁니다. 일곱 때를 통해서. 인류를 대표하는 거예요. 제국은 하나의 제국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류는 바벨론 제국 안에 다 흡수통합 되어있는 그 타이밍, 그 상태를 말해요, 그 상태를. 일곱 때는 짐승의 때입니다. 인간은 짐승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중간에 차고 들어와서 가로막고 있는 역사를 지금껏 해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게 짐승이, 짐승이 가는 곳이 지옥이거든요, 지옥이 유황불이거든요, 그 짐승이 가는 곳에 인간이 가는 게 왜 마땅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제대로 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에게 형벌이 온다는 것은 그것은 ‘아이고, 재수 없다. 안 됐다.’ 그게 아니라 ‘그거 뭐 당연한 것 아니야? 그거 당연한 거잖아.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도리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성도고 ‘그게 아니야. 우리에게 기회를 주게 되면 우리가 바르게 살 기회만 준다면 하겠다.’ 하는 것,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그렇게 사기 치고 있는 거지요. 기회라는 것도 가능성이 있을 때 기회지 아예 처음부터…  안식과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우상 섬겨가지고요. 안식일의 취지를 모르니까요. 뭐 그냥 하루 쉬면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착각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지만 그 안식일의 순환구조의 의미도 모르고 그저 자기 몸 하나 챙기려고 안식일 지킨 거예요. 다니엘에게 속한 때는 어디에 나오느냐? 다니엘 9장에 나옵니다.
다니엘 9장 24절부터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27절까지 읽었습니다. 이 시간은 다니엘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고 이 계시는 예수님의 몸을 휘감은 주님의 독특한 주님만의 시간이에요. 주님이 활동하시는 시간이 몇월 몇 일이 아니라 70 이레로 정한 겁니다. 주님의 원래 시간은 주의 이름이 있었던 이스라엘에 있었던 7의 순환구조를 따라서 된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70년 만에 되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70년은 70년이 아니었고 더 세밀한 진리에 의하면 70 이레였습니다. 이레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한 주간을 말하거든요. 7에다가 7을 곱한 거예요. 70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에다가 처음 창세기 2장 1절에 나오는 7의 순환구조 그 내용을 집어넣는 거예요. 본질, 질적으로 그 본질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70년은 뭐로 변하느냐? 70 이레로 변하는 겁니다.
70 이레로 변하면서 이스라엘조차 이제는 이스라엘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70 이레의 세 등분으로 나눠져야 돼요. 삼단봉처럼 척, 척, 척, 삼단봉, 7, 그다음에 62, 더하기 1, 합하면 70 이레 돼요. 7이레 동안은 성전인데 약간 허술한 성전, 그 성전을 세워야 돼요. 모델하우스처럼 성전을 짓는 거예요. 그걸 박살 내는 기간이 62 이레에요. 박살 내는 기간. 그러면 성전은 박살 나 버린 거예요. 너희에게는 그런 의로움과 자질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회상시켜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건지겠다는 그 약속은 유효하기 때문에 마지막 1 이레,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려고 1 이레를 준비했는데 그게 1 이레가 아니고 반 토막 난 1 이레에요. 1 이레가 두 조각, 1/2과 1/2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왜 나눠졌을까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3, 14절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7년이 7년으로 이어져야 되는데 도중에 반 토막 나버렸어요. 축구에 전반전 후반전이 있는 것처럼 반 토막 나버렸습니다. 한때 두 때, 그다음에는 반 때에요. 때가 반 때가 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시간 의식에서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반으로 쪼갠다는 말은, 인간이 생각했던 인간의 때와 하나님이 인간세계를 친히 다스려서 자기 안식의 목적을 이룬다는 그 시간대가 교차 되는 지점에서 인간의 시간의 골조, 뼈대, 골조가 드러나서 인간의 모든 시간 브릿지, 다리는 끊어져 버려야 돼요. 끊어지면 철골 골조가 나타나듯이 이것은 반대로써, 반대로써 이것은 연결이 안 되는 시간을 인간들이 보내고 있는 겁니다. 누가 끊는가? 주님이 끊었지요. 주님의 때가 십자가가 끊어놔요. “그만하자, 그만! 그만해! 많이 했다, 이 짐승아! 짐승의 통치를 받으면서 뭘? 법을 지켜? 뭘 한다는 말이냐?” 주님의 노동만이 안식에 도달됩니다. 주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아주 유명한 예를 들었지요. 선한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고 그냥 선한 사마리아인. 어떤 사람,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누워 있는데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가고요.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취급받는 그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 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기의 여비까지 다 털어서 안전하게, 요새 같으면 병원이지요, 병원에 모셔서 비용이 더 들면 내 재산 더 낸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누가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는 그 말씀입니다. 인간인 나에게 더 착할 수 있고 더 의로울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적 기회를 달라고 하는 이 요청 자체가 짐승들의 생각이에요.

이게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간의 시간은 모두 느부갓네살을 대표로 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을 하는 그런 본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살아봤자 점이에요. 살아봤자 흙이고요. 탁, 치니 꽥, 죽었잖아요. 죽는 순간 나는 없습니다. 성경이 진실인 것을 증명하라. 증명하지요. 죽는 순간 네 몸이 증명해요. 우리 몸이 증명해요, 우리 몸이. ‘아,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라는 시간 자체가, 나의 일기장이라든지 나의 모든 시간이 이게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간의 완성이 중요한 거예요. 나의 시간은, 철근골조는 끊어진 다리에요.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 전에 2절에 보면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저주받은)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스라엘에게만 약속했던 성전에 대해서 이방인, 지옥 갈 이방인들이 마흔두 달, 마흔두 달이 뭐냐, 3년 반입니다, 36개월, 그리고 6개월, 마흔두 달이에요, 짓밟아요. 한때, 두 때, 반 때에요. 3년 반입니다. 다 더하면 3년 반이에요.
이게 바로 70 이레 가운데서 소시지 처음과 끝이라고 보면 돼요. 62 이레는 의미가 없어요. 처음 7 이레는 성전 만들라. 그리고 70 이레 제일 끝에 있는 이레, 한 이레는 성전 박살났음.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이 일이 인간은 실패했는데 과연 하나님은 성사시킬 수 있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여기에 관심이 있다고요.
시간을, 인간 시간 말고 특별한 시간, 7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돌려버려요. 7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순환구조가 3년 반으로 두 동강 나버렸어요. 마흔두 달, 한때 두 때 반 때, 다니엘에 나온 것처럼 1260일, 일천 이백육십 일. 다니엘 11장 3절, 그리고 다니엘 제일 마지막에도 나오는 그 말씀. 이 시간 계산, 시간 계산은 바로 충분하게 인간의 죄가 끄트머리에 결국 누구와 결탁되어 있는가? 그 마지막 괴물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필요했던 주님의 자기 시간이었던 거예요. “나 인간하고 상대 안 해. 나는 인간을 조종한 그 영적 세력과 상대하겠다.”

그래서 다니엘에 보면 그걸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짐승의 그 죄가 드러나고 발작하는 그 절차들이 있어요.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한때, 두 때, 할 때 여기에 처음에 있는 그때, 주님이 시작한 그때는 그다음에 그때와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두 번째 때를 맞이해요. 두 번째 때를 맞이할 때 이것은 그래야 인간의 때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간으로 볼 때 인간의 때는 극성을 부리고 득세를 하고 기승을 부리는 겁니다. 인간의 때가 마음껏 기승을 부려야 이게 십자가와 맞닥뜨릴 수가 있어요. 인간들이 예수님 죽이려고 환장한 것 아니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이 인간 손에 제대로 제 본성 제 원칙 그대로 드러내려면 충분하게 예수님은 6일 동안의 노동을, 안식일을 맞이할 때까지의 노동을 다해야 되는데 그 노동은 뭐냐? 인간의 극단적인 죄를 죄 있는 그대로 죄다 다 들춰져야 돼요. 다니엘 7장에 보면 거기에 짐승들이 나오는데 네 가지 짐승이 나오지요. 그 짐승의 특징이 뭐냐? 기세등등하다는 거예요. 인간의 때를 그대로 가져가요. 한때, 두 때. 그러면 세 때, 네 때, 그렇게 해서 만 때라도 가져갈 기세에요. 첫째 짐승,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가 있고요, 둘째 짐승은 곰 같고, 셋째 짐승은 표범 같다. 이렇게 전부 다 이 땅 짐승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짐승들로 짐승을 표출할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짐승의 특징은 뭐냐? 항상 기세등등하다가 몰락하는 거예요. 몰락합니다. 한때 두 때, 가다가 ‘애걔걔?’ 반 때로 끊어져 버려요. 끊어지고 다른 짐승이 바통 받아서 한때 두 때 올라가다가 또 끊어져 버리고, 한때 두 때 올라가다가 또 끊어져 버리고, 대통령 하려고 나오면 교도소, 나오면 교도소, 나오면 교도소, 넷째 짐승이 제일 강하지요. 이 모든 짐승의 성격은 바로 첫째 짐승 바벨론 느부갓네살, 그 제국의 범주를, 종속되어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경우를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속에 심어놓았어요. 그게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자기의 복을 받고 자기의 시간을 룰루랄라, 하면서 자기 시간을 기대하면서 목적을 가지고 자기 시간을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야말로 기세등등하고 득세하고, 복 받았으니까 뭐 자기는 형한테 승리했다고, 이겼다고 하면서 갔는데 얍복강가에서 누굴 만났는가? 천사를 만나면서 야곱의 자기 시간이 막혀 버려요. 그때가 언제냐? 야곱은 천사를 만날 때 낮에 만나지 않습니다. 밤 속으로 끌려가요. 그 야곱의 밤이 야곱의 죽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이고 창세기 32장 31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죽은 야곱을 새 이름을 줘서 살려낼 때에 해가 돋았다고 해요. 드디어 밤이 지나고 낮이 된 거예요. 이게 야곱의 이름이 바뀐 것이, 어젯밤에 하나님 진짜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진짜 활동하시고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대로 최후의 순간에 오신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증거인으로서 이제는 그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채로 이 세상에 등장한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이지요. 밤이 주관하지 않고 낮이 주관하는 것.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태양)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빛의 여인이에요. 하늘에 큰 이적이 있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느부갓네살은 느부갓네살의 꿈이 있었고, 요셉은 요셉의 꿈이 있었고, 바로왕은 바로왕의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은 전부 다 사적인 꿈이거든요.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개인의 꿈, 그 모든 개인에게 희한한 꿈같은 기적, 그걸 통할해서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현실을 현실답게 설명하는 기적적인 꿈은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바로 여자가 태양을 입고 새로운 여인으로 등장하는 그 여인, 그것이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10절에 “그 날에 강림하사” 안식의 완성으로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서로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그러니까 전반전 끝나고, 골조 끝나고 새롭게 이어받은, 주님의 성령 받아서 이제는 어두움에 살지 않고 최후의 밝음, 최후의 밝음에 합당한 꿈을 꾸게 된 그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던 이 세상은 짐승이 사는 어두운 세상이었다고 증거 할 수 있는 삶, 증거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강림해서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는 형벌을 그리고 복음을 아는 자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영광스러움이 된다는 이것이 이 세상 삶 속에서 어떠한 자랑거리보다 엄청나게 행운을 잡은 자랑거리 중의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질없는 소소한 걱정거리, 근심거리, 염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 이 모든 것, 이것은 짐승의 시간에 휘둘리다 보니까 그렇게 ‘기회를 주세요, 하나님! 기도합니다, 철야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이런 식으로 아직도 자기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니엘은 자기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잊었어요. 자기의 전반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딴 것 이스라엘은 필요 없어요. 왜? 주님의 시간 속에 합류되어 있다는 사실, 주님의 시간대에 합류했어요. 그때, 모든 것을 안식으로 만든 때, 일체 우리한테 이랬나 저랬나 따지지 않고, 묻지 않고, 지적질하지 않고 그냥 안식일의 혜택, 창조,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그 창조, “너에게 의가 없지? 내가 창조, 의 만들었다. 창조한 대로 그냥 너한테 줄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율법 이전의 상태거든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왜 주십니까? 내가 혼자서 안식을 완성했기 때문에 이 창조자, 하나님의 자격자로 너에게 나의 창조물을 줘서 너를 내 창조에 참여케 하는 것, 이게 바로 안식에 합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때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서 벌벌 떨지 마시고요, 어서 그날이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뭐 콕, 하고 꽥, 죽을 수도 있는 문제지만 어쨌든 우리 시간은 일체 하나님께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밝게 해처럼 빛나게 살아가시는 영광된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사람들의 만남이 점과 점의 만남인 것을 이제는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남들 부러워하지 말고, 남에게 질투하지 말고, 그저 한 점에 불과한 것에 탐내지 말고 주께서 거저 주시는 십자가의 의로 인하여 영광스러운 우리의 영토, 밝음의 영토가 있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 주일설교 "시간의 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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