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것은 미완료된 것이고 뭔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어요. 미진한 거예요. 공포가 각사람마다 막 발산되고 있어요. 표출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가한 오후 시간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커피 마시는 그 순간에도 그 양쪽 사람 앞에 죽음이 뿜어내는 공포가 서로 발산되면서 커피 마시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죽음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쫓기는 내빼고 있는 도망자 신세로써 사람들이 그냥 분주하게 움직이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평소에 ‘사는 게 이기는가, 죽음이 이기는가?’ 한순간도 이런 사망의 공포와 공격을 안 받는 순간이 없지요.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전쟁에 승리한 거에요 사망을 포획한 거죠 “죽음아, 우리 게임 끝났잖아. 더이상 나에게 협박 못 해. 나 죽어도 살게 되어 있어. 그런 존재야 내가!” 성경이 그냥 위로조로 뭐 그냥 좋은 소리 해주려고 그런 거냐, 아니면 진짜로 부활에 의해서, 생명에 의해서 죽음이 포획되었다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는거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현실 세계가 진짜로 죽음이라는 것, 사망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체포되어서 포획되었느냐 그 말입니다.
‘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각자 속에서 발산되는지를 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하나님에 대해서 가차없이 1.원망이 터져나옵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죽게 하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런 2.원망이 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3.불뱀을 보내어 원망한 자들, 곧 죄인들을 죽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뱀’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물체’로 딱딱하게 굳어진 단 하나의 뱀입니다. 그 뱀은 놋뱀입니다. 그런데 그 4.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파 죽어가도 도로 살아납니다. 그것은 그동안 죄와 원망으로 인해 죽어가는 5.그 죽음을 이 놋뱀으로 포획하고 체포했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들을 죽게 하는 그 사망은 이 용서의 놋뱀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더는 너희들에 사망이 작렬하거나 공포를 주는 상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놋뱀 안에서 사망과의 전쟁은 이 종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했어요. 놋뱀을 만드니까 놋뱀 안에 죽음이 포획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 죽음은 어디 안에 갇히게 되었느냐 하면, 놋뱀 안에 갇혀 있게 된 겁니다. 놋뱀은 딱딱한 거예요. 안에 갇히면 죽음이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놋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놋뱀 쳐다보는 사람에게 아픈 사람도 낫게 하고 그 쳐다보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멈추게 돼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렇게 몸이 아픈데, 그냥 놋뱀을 만든 거예요. 불뱀은 살아 있지만 놋뱀은 굳어져 있어요. 사물성을 갖고 있으니까. 딱딱한 사물체, 물체니까, 고정되어 있으니까 완료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누구든지 몸이 아파도 다 살았어요. 이 놋뱀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은 사물성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어떤 분으로 인격화되어 버립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 14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사라졌다는, 분명히 이 땅에 사신 분인데 그분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더 이상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 실제 역사성, 실재성, 실증성, 이것이 바로 놋뱀의 실재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위로해주려고 “당신이 예수 믿으면 죽음이 오지 않습니다.” 이게 아니라. 우리는 증거 없이는 안 믿잖아요, 증거 없이는. 더 이상 죽지 않는 결정적 증거로서 놋뱀이 있는 것처럼, 그 놋뱀 안에 죽음이 포획된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라는 그 놋뱀 안에는 하나님의 죽어도 살 수 있는 용서하는 죄사함이 인격화로 구체화된 거예요.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나를 믿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쳐다보라, 이 예수님 가신 곳을 놋뱀 쳐다보듯이 ‘주님 저쪽으로 가셨지요?’ 이렇게 주님 가신 방향을 쳐다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미 죽음에 승리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좋은 소리 아니에요. 실제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했지만 실제, 그 비유는 실제 그런 일들의 다반사를 주님께서 대변해 대표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누구나 그렇게 성도는, 예수님과 짝을 이룬자는 누구나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이 전쟁은요, 나의 적이 아니에요. 나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나의 적이 아니고 이 미 끝나버린 주님의 전쟁이에요. “내 전쟁은 끝났어, 인간아! 네가 왜 새삼스럽게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교인들 안 오면 저는 굶어죽고요……” “이미 나는 사망을 이겼잖아.” 굶어 죽든, 데쳐 먹든, 찢어먹든, 어떻게 죽든, 우크라이나 들어가서 폭탄 맞아 죽든, 가평 계곡에 떠밀려서 죽든, 코로나 걸려 죽든 간에 그것은 내가 떨어버리지 못한 내 몸을 주께서 알아서 떨어버려 주시는 주님의 뒤치다꺼리였습니다, 뒤치다꺼리! 알아서 떨어내 주시는 치다꺼리에요. 우리가 못 벗는 우리의 껍데기는 압축해서 털어주시고 알맹이는 주님의 색시가 되어서, 신부가 되어서 회사 사장님과 결혼해서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없어요. 전쟁이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낙원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온에서, 왜 그 도가 이러한 죽음을 포획한 도가 왜 하필이면 시온산에서 그게 나오는가? 그 이유는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 원래 이스라엘 나라는 만든 취지가 뭐냐 하면, 이게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도 보여주지만 ‘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다’도, 그것도 보여주려고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내 것, 내 것 없으면 나는 못산다. 내 것 없으면 못 산다. 꼭 치매 걸린 노인네 같아요. 우리 집 쌀 떨어지면 나는 못산다. 내 것 없이는 못산다. 이 소유성은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이 정신병자라는 것을 확인해줍니다. 내 것 없이는 못산다.
모세 때 분명히 쳐다보면 어느 누구도, 아픈 사람도, 원망했던 죄지은 사람도 살 수 있는 그 신기한 물건 그 놋뱀이 그 후에 사물성, 물체성 때문에 그게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 말았어요. 그 물체를 내가 소유함으로써 소유된 내가 그 물체로 인하여 이익을 본다는 것, 내가 더 이상 죽음에 쫓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사람들은 당연시 여겼어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우상화된 그것을 섬긴다는 것은 본인 자체가 우상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은과 금, 어떤 눈에 보이는 물체성,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상이다’라고 하고 싶은 그 자세가 하나님께서는 그게 바로 우상섬김이라고 보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고 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신을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는 신을 내가 소유함으로써 그 신을 소유한 내가 살 수 있다, 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던 그런 이유입니다. 시온의 도가 아닌 우상의 도 때문에,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 내 편이니까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인간의 우상숭배다, 그 말이에요. 여호와를 우상 숭배하듯이 그렇게 섬기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게 그게 바로 인간이 지옥 갈 이유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道)가 흘러나오는 바로 그 시온에서는 전쟁이 마감되어서,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쏟아집니다. 다윗에게 있어 시온은 사망에 대한 진정한 승리의 최종적 증거가 담기게 됩니다. 다윗은 시온성에서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사망을 이기기는커녕 도리어 사망에 져서 죽어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통보에 의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창조 원리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빛도 만드시고 어두움도 만드시는 겁니다.(사 45: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7-19) 즉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십자가를 소지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포획하시고 전쟁을 마감하신 그 분이 가신 길을 쳐다 보므로서 더는 자기 전쟁이나 ‘자기 것’을 지켜서 사망의 공포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시온의 백성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우리아를 내 죄 대신, 죽어야 될 나를 우리아가 대신 죽게 하시는 이것이 이 시온산에서 일어날 주께서 주신 하나님의 도가 되고, 이게 진리가 되고, 십자가의 능력이 되고, 나로 하여금 사망을 포획한 하나님의 진리로 삼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진리성이 뭐냐? 시편 51편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거기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용서하심만 있는 시온성, 그 시온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전쟁을 끝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공포는 없어요. 이미 우리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내 전쟁이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이미 끝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경할 것은 시온산에 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것이 아까워서 ‘이제는 십자가 내가 다 안다. 십자가 내가 다 알고 용서 다 아니까 그래도 나는 내 것으로 나 살래. 그게 내 속성에 맞아.’ 그렇게 시온산에 갔다가 도로 내려가는 사람 있어요. 그 내려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이 쳐다보는 그 즐거움만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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