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두 가지 세례(행18;24)이근호130627

아빠와 함께 2013. 7. 8. 14:09


대전20130627a-행18장24절(두 가지 세례)50강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18장 24절입니다. 여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알렉산드리아가 어디 있느냐, 제일 유명한 곳이 이집트에 있지요. 지금도 있어요. 지중해 해변 가에 있거든요. 지중해에 이리 있는데, 옛날에 제일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던 곳이에요. 터키가 있고 에베소가 있어요.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의 유명인사입니다. 아볼로가 왜 유명하게 됐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로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할 때, 그 아볼로에요. 

아볼로 이 분이 주특기가 뭐냐 하면, 설교를 열심히 해요. 고린도전서1장에 봐도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다, 하는 파벌이 생길 정도로 아볼로의 영향력이 컸었습니다. 설교는 잘 했는데, 24절에 보니까 이 사람이 학문은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니 학문은 많고, 도서관 대출 주전자니까 얼마나 세상의 지식은 여기에 다 모여 있으니까 제일 번성한 도시에서 살다가 세상 모든 교회하는 문물은 여기에 다 있거든요.  여기 살다가 들은풍월 있고 촌사람하고 약간 다르겠지요. 

성경에 능한 자라, 구약성경인데,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오늘 첫 째 시간에 강의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세례가 뭐냐 하는 겁니다. 세례라 하는 것은 제가 한 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세례라 하는 것은 ‘시간이 정지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시간이 스톱된 거예요. 시간이 갑자기 없어져 버린 거예요. 

시간이 있으면 변화가 일어나요. 어린애에서 청년에서 장년으로. 시간이 정지돼버릴 경우에 남는 것은 뭐냐, 자기의 정체성이 정립이 되게 되어있어요. 시간이 정지된 상태가 언제인가 하면, 꿈속의 우리 각자의 모습 속에 상상 속에 우리 각자의 모습, 그럴 때 나의 모습은 보통 몇 살쯤 되지요? 꿈속에 내가 나타날 때, 보통 몇 살쯤 됩니까? 꿈속의 나는 그냥 나만 느껴지지 구체적으로 거울보고 그렇지는 않잖아요. 안 나타나지요. 꿈속에서는 뭐가 되느냐,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시간이 중지가 돼버리면 나는 고정화되어 버려요. “이게 나야!” 고정화 되어버린다고요. 죽~~흘러가다가 스톱! 되어버려요. 

세례 받는다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래, 나는 믿음이 어땠어. 10년 전에 어땠어, 5년 전에 어땠어. 하다가 스톱! 하고 딱! 잡았을 때, 그 때 누구한테 잡히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잡히는 순간 변화되고 변화되는 나 자신은 사라지고 나의 정체, 나는 이런 존재구나! 하는 것이 딱 밝혀지는 그 정립되는 그 순간, 그걸 ‘세례’라고 합니다. 물주고 뿌리고 그런 거 생각하면 안돼요. 물주는 세례 같으면 세례 받고 난 뒤에 돌아서면 마찬가지로 또 변화되잖아요.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그렇지 않고 세례라 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떤 변화에도 변화지 않는 동질성이 감지되는 순간,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세례이야기 했기 때문에 응용문제 내볼게요. 쥐 잡았다! 하고 딱 잡을 때처럼, 세례요한의 방법은 뭡니까? 쥐 틀 마련하는 것은 아닐 거고, 주먹가지고 잡았다 할 것은 아닐 거고, 세례요한이 이게 니 모습이야, 하고 딱 잡았을 때, 그 동원된 재료가 뭐지요? 물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은 물세례입니다. 물에 풍덩 빠지면 시간이 그 안에 정지돼 버리지요. 정지되면서 인간은 물속에 빠져있고, 빠져있는 인간은 죄인이라서 빠져죽어야 마땅하고 따라서 세례요한의 물세례하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우리는 죄인이라 하는 것이 딱 고정화될 때, 그 물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가 정립된 것처럼 똑같이 하늘나라가 정립된 채로 자기에게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느끼게 되지요. 

내가 자꾸 왔다 갔다 분잡하게 움직이니까 하늘나라 생각났다, 안 났다, 바쁜데 내가 만약에 지금 교도소에 있어가지고 내일모레 사형 집행된다, 까뮈의 이방인처럼. 창살에 있는 별을 바라보면서 스톱이 될 때 지나온 살아온 모든 것은 그야말로 연극이 끝난 것처럼 무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무대에 뛰놀 때는 지가 천하의 환호를 받고 박수를 받고 인기를 받지만,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객석은 텅 비어있고, 무대는 조명세트도 다 철거된 상태에서 객석에 홀로 앉아 무대를 보며 정적만 고독만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되잖아요. 남아 있잖아요. 

그럴 때, 그 시간이 정지되면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하늘나라 왔을 때, 나는 과연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이냐, 아니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떤 존재냐, 비로소 물살이 있을 때 정지된 상태에서 보통 꿈이나 기존 이런 것은 다 끊고 그냥 내일 모레 사형집행 당하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뭐 그런 소리가 들린다 이 말이지요. 이게 정지돼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앞으로 교도소 나가서 사업을 해야지, 라는 그러한 또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이제는 그것은 그렇더라도 일단 여기서 죽을 경우에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장했다면 나가서 떡볶기 장사를 하던 치킨 집을 하던 간에 치킨집하다 죽어도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 세례 받은 그 지점을 잊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한 번 받은 세례는 그 다음부터는 세례의 정황이 되풀이 되는데 우리 머리위로 이게 안착이 되면서 되풀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방금 한 것은 말로 하기 어려운데요. 이 분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요단강 속에 들어갔으니 죄로 인하여 죽은 자고 여기에 들려오는 바깥소리가 뭐냐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 할 때 이 가까이를 빼버리라 했지요. 그러면 뭡니까? 하늘나라가 그냥 와있다, 이리 보시라 했지요. 가까이 왔다라는 것은 왔다는 뜻이에요. 그냥 온 거예요. 왔을 때, 이 사람이 물에서 나와서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관계없이 나됨은 요 지점이 진짜 나의 나됨이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고, 부자이시네요.” “아이고, 사업에 성공하셨네요.” 해도 그 세례 받은 사람은 그런 껍데기에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고 전에 세례 받을 때 그 모습이 변함없이 내 모습이 되는 거예요. 변함없이. 

장사를 잘하든 애가 공부를 잘하든 그것에 훔뻑 빠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와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 앞에서 나는 죄인의 모습이고 회개함으로서 천국 간다는 이 관계가 요 순간을 이 사람은 잊을 수가 없다 이 말이지요.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저는 ‘따라다닌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치킨 집을 해도 늘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 잊을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이. 

그래서 아볼로라는 사람이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말은 세례요한이 마지막 선지자거든요. 최후의 선지자 세례요한이 옴으로서 그 전까지 있었던 모든 구약의 모든 말씀은 이제는 완성의 때가 되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세례의미를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세례요한파가 있어요. 이 세례요한 파는 뭐냐 하면, 물세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파에요. 그리고 이 세례요한은 모든 구약의 완성으로서 세례요한이기 때문에 세례요한 이 파에서는 세례요한을 뭐로 보느냐 하면, 메시아로 봅니다. 

하나님 오시기 전에 마지막 메시아, 길에 가다보면 우리 동네에 있는데 고속도로 들어서게 되면 마지막 주유소가 있어요. 이것 기름 안 넣으면 고속도로에서 비상기름이 없습니다만, 마지막 주유소 있잖아요. 고 마지막을 세례요한으로 본 겁니다. 그러면 첫 번 째 나오는 어려운 건데요. 세례요한이 마지막이라면 그러면 세례요한 이후는 무슨 시대입니까? 이것이 종말시대 되겠지요. 마지막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렵다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지금까지 세례요한까지 이어왔던 이 역사에다가 이 종말을 같이 붙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어렵다는 거예요. 붙일 수 없습니다. 

만약에다가 기존 역사에다가 종말을 갔다 붙여버리면 어떤 오류가 생기는가 하면, 지금까지 몇 천 년 흘러왔다. 몇 만 년 흘러왔다. 그리고 종말 속에서도 몇 천 년 남아있다. 종말 속에 몇 천 년이란 이 개념이 그 전에 있는 몇 천 년, 몇 만 년 개념과 똑같은, 1년에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돌잖아요. 그 연수에 따라서 같이 계산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없어요. “야, 종말이 시작된 지 벌써 2000년이 됐어.” 이런 말은 쓸데없는 소리에요. 왜냐 하면, 베드로후서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과거에 역사라고 여겼던 그 역사인식 자체가 이미 물속에 들어가 버리면 물속에 뭐도 녹아져버리는가 하면, 지구가 한 바퀴 돌때마다 1년이야, 라는 것이 자신의 운명과는 아무 관련성 없는 걸로 들통 나버리는 거예요. 

내일 주님와도 종말이고 오늘 와도 종말이고 내일 온다고 해서 오늘 들 종말이고 이런 거 없다 이 말입니다. 똑같은 종말의 본질 속에 갇혀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고, 이것은 시간뿐만 아니고 공간도 달라져요.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감람산에 오시면 한국은 그 시간에 재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기존의 사회에서는 재림 못해요. 시차가 7시간, 8시간 차이가 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시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여러 개 나타나야 돼요. 이거 희한한 현상이잖아요. 주님이 오실 때는 모든 지구상에 다 같이 본다 했거든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지구 모든 사람이 볼 것이라고 했는데, 지구상에서 볼 것 같으면 예수님이 도대체 어디 떠야 된다 말입니까? 저 태양에 떠도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잠자고 있는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으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네요. 

종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 개념에 억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시간과 공간자체가 물속에 들어갈 때 다 같이 폐기처분해야 될 대상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회개하면서 “하나님 제가 회개한지 25분 됐는데, 15분 뒤에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화장실이 급하니까.“ 이렇게 물속에 들어가서 그러한 시간을 따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볼 때, 종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에게 종말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지금 아까 소나기 왔잖아요. 지금도 절에 가지만 소나기를 반기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에게 이 소나기는 누가 줬어? 물어보면 “소나기를 누가 주다니? 알아서 수증기가 올라가서 내리는 기지, 누가 줬어?” 이리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비와 햇빛을 주시는 분은 분명히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회개를 할 때 무슨 내용으로 회개를 해야 합니까? 비와 공기와 모든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이 은혜성에 대해서 우리 인식이 제대로 따라 붙이지를 못했지요. 평소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는 저절로 감사합니다, 나오다가 갑자기 팔이나 뿌러지고 이러면 또 속상해서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데 멀쩡한데, 나는 승진하는데 주께서 이렇게 만들고. 하나님 너무 조치를 잘못한 거 아닙니까?”해서 장부보세요. 실수한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원망이 되거든요. 

그동안 공짜로 햇빛과 공짜로 비를 받아 쳐 먹어 놓고는 그거는 감사할 줄 모르고 심지어 밤에 잘 때 생명 뛰는 것은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뭔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서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제 글 썼지요. ‘행운이 불행이다.’라는 거. 제가 어디서 힌트를 얻어서 쓰게 됐냐 하면, 그 글의 내용은 아시지요? 자식보고 성공해서 잘 키웠다 했는데 그 자식이 자기의 반석을 몰라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인데 남들 보기에는 멋있어요. 주님께서는 시편에서 뭐라 하십니까?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 하리로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자식을 기껏 잘 키웠다는 게 껍데기 쭉정이로 만든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성공도 아닌데 부모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고 유학하고, 재벌3세하고 결혼하고 하니까 뭔가 대단해 보이거든요. 

그러니 부모들이 자식을 전부 다 그런 식으로 키우고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걸 복 받았다, 보거든요. 주님이 준 행운을 받았다 하는데, 제목이 뭐냐, 행운이 불행이다. 제가 이 글을 쓸 때, 어떤 아이디어로 썼느냐 하면, 뉴스를 보니까 어떤 술 먹은 여대생이 밤늦게 부산입니다. 버스를 탔어요. 버스가 끊어졌는데, 버스가 오니까 자기는 행운이다 싶어서 탔는데 그 버스가 통근버스라 해서 그 기사가 그 여대생을 가지고 모텔에 가서 성폭행을 하려 시도한 거예요. 자기는 분명히 행운인데 탄 그 버스는 자기에게 불행을 안기는 버스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길이 두 갈래 있거든요.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잖아요. 역시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구나! 하고 후닥닥 넓은 길로 탔는데, 그 넓은 길이 인생 조지는 길이 돼버린 거예요. 더 이상 자신의 머리 위에 지은 집이 반석에 지은 집인지, 그것조차 잊어버리게 만드는 신나도 너무 신나, 너무 인생이 잘 풀리니까. 한 방에 인생역전 돼서 너무 잘 풀리는 거예요.  로또 당첨된 사람들이 60%가 망해버렸답니다. 로또 당첨 한 방에 하고 60%가 망해버렸어요. 직장 다 버리고 요 내버리고,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로또 되고 난 뒤에  남편이 아내에게 자랑한다고 “여보, 로또 1등 됐으니까 쏠게, 당신 통장에 4억을 얹어놨어.” 지는 좋아했지요. 집에 가보니까 마누라 돈 빼서 도망가 버렸어요. 돈 4억 있으니 남편하고 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동안 그 부인은 돈 때문에 이혼 못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는 로또라는 행운이 가정파탄의 불행으로 이어진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시험에 우리는 안 넘어 갈래 야 안 넘어 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다 넘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죠. “니가 마귀한테 안 넘어가는 것은 니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마귀가 손을 못 대서 영생의 길로 가게 되는 거지 니가 알아서 영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땅의 종말자체가 하나님께서 종말 만들었다는 이런 생각이 강하게 되면, 내가 세례 받을 때 그 모습으로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우리는 이미 진리를 벌써 낚아 채버린 거예요. 알게 된 거예요. 이걸 성경에서는 ‘예수 안’이라 하는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예수 안에 있다는 자체가 진리라서 이미 다 알아버린 겁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이제는 더 이상 지옥갈래도 지옥 구경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예수 안이란 캡슐 안에 들었기 때문에. 그 캡슐이 있는 곳에 우리는 빠지지도 못하고 우리는 그 안에 함께 천국을 가야 될 입장입니다. 가야 될 입장이면서 바로 그것이 이제는 캡슐의 위력이 앞으로 어떤 변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주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것을 증거용으로서 성도는 살아가는 겁니다. 그 정도를 아볼로는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알았지요. 

그런데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알았는데, 뒤에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라, 이리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아볼로가 누구한테 과외를 받느냐 하면, 그 뒤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사람은 로마에서 추방된 부부에요. 한 쪽은 로마에서 추방돼서 고린도에 왔고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고린도에 왔고 둘이 잘 만났어요. 이 똑똑한 아볼로가 누구한테 배웠는가 하면, 똑똑해도 배워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한테 과외를 받습니다. 받고 난 뒤에 아볼로가 무릎을 치는 거예요. “아이고,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세상에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를 모르고 내가 안다고 껍죽댔구나! 아이고, 제가 복음에 대해서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해서 더 알고 난 뒤에 아볼로는 알고 난 그것가지고 그 다음부터 더욱 더 고린도 위해서 복음을 증거 했어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누구한테 봉사했습니까? ①아볼로한테 봉사했다. ②그리스도의 몸에 봉사했다. 누구한테 봉사한 겁니까? 그리스도 전체 몸에 봉사한 거예요. 왜냐, 아볼로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테니까. 그래서 성도가 하는 모든 봉사는 그 댓가를 타인에게 받지 마세요. 왜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다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주님의 은혜를 받았고 받은 힘으로 뭘 하든지 간에 주님의 힘 주신대로 하라, 했거든요. 이게 은사인데. 주님의 주신 힘으로 받았고 그러면 내가 애들 밥해주는 것도 애들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혹시 애들이 예수 믿으면 더욱 더 좋고. “엄마, 밥을 해줘서 고마워요. 나 예수 믿을래요.” 이러면 더욱 더 좋고. 

어쨌든 간에 뭔가 하는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봉사를 받았기에 받은 주님의 은사를 발휘함으로 말미암아 나만 베푸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베풀었던 것이 또 이중 삼중의 연결을 통해서 난데없이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망처럼 서로 서로 얽혀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전부 다 얽힌 거예요.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은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돌아다니라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개 키우는 것도 주의 봉사되게 하십니다. 

왜? ‘계시는 행동이다.’ 계시가 행동이에요.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주께서 계시의 힘에 의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개에게 사료 주는 것도 감사함으로 하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개에게 사료 주든지 개 키우든지 뭐든지 감사함으로 하면 돼요. 여기에 무슨 특별히 꼬집어 내어서 요것은 주의 일이고 이것은 내 일이고 성도한테는 예수 안에서는 이건 없습니다. 세례 받을 때 적립된 그것만 잊지 마세요. 왜? 하늘나라가 눈앞에 머리 앞에 내려앉을 것 같아요. 나는 물속에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니는 죽어야 돼!” 

그런데 그러면 이 정도 알았으면 복음 아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뭐가 빠졌는가 하면, 예수님의 성령세례 의미를 몰랐던 거예요. 예수님의 성령 세례 의미는 뭐냐, 요건 물세례보다 약간 더 복잡합니다. 왜냐 하면 물세례는 같은 인간 세례요한이 같은 인간인 나에게 물로 들어가, 니는 물속에 빠져죽어도 마땅해. 그 속에서 들어봐! 하늘나라 가까이 왔다는 것을. 하늘나라는 너같이 회개하는 자에게만 들어가는 거야. 이게 세례요한의 물세례라 했잖아요. 

그런데 성령세례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하면, 지상이 아니고 하나님 우편에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은 그릴 수 없어요. 왜냐 하면, 구약에 보면 오른편에만 이 지상에서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오른편만. 이 오른 편 자리가 뭐냐 하면, 구약의 주의 이름만 있는 자리고, 주의 이름이 있는 자리는 존재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밝혀져요. 

소급해서 밝혀진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으로 할 것 다 했는데 실패로 끝났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난데없는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 때, 그 놀라운 일을 소급해 볼 때, 보이지 않는 주의 오른편 주의 이름이 한 걸로 들어난 방식, 이게 바로 구약의 진미입니다. 상당히 복잡하지요. 쉬운 예를 들면 쉬워요. 

저기에 블레셋군대들이 수만명이 왔는데 그 장군 하나 키가 3미터 30인데 그 사람은 목청도 좋고 스피커도 좋았는데 이 쪽 이스라엘 점령을 향하여 “나하고 한 판 붙자, 사울 나와” 지금 객기를 부리고 있는데 여기 이스라엘 진영은 기죽고 있는데, 여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해서 하는 말이 “이 싸움은 인간들과 싸움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의 싸움이다.” 사울이 말렸습니다. 애 하나가 또 죽었어! 게임이 되나 말이지요. 330인데, 그런데 다윗은 들어가서 골리앗을 치고 가서 모가지 쥐고 기념품을 가지고 오고 승리했잖아요. 그래서 이번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의 승리다.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다 드러내게 하는데 주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소급해서. 그걸 제가 오후예배에서는 삽질한다 했거든요. 

이것은 내가 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점에다가 하나님이 삽을 들이대서 그 부분을 달랑 제켜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구멍 뻥하고 어떻게 돼요? 구멍이 뚫리면서 “아이, 요것만큼은 내 자존심인데.” 자존심에 아예 하늘을 보도록 앞 뒤 사이를 구멍을 뻥 뚫어 놔요. 가슴팍이 있으면 가슴팍에 구멍 뚫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자존심과 내 위신과 찬란한 장점들이 고스란히 있던 금고 같은 곳에 화살이 날아오더니만 뚫렸어요. 우리는 골리앗이 된 거죠. 

우리는 골리앗인데, 예수님은 소년 다윗이 되는 거죠. 지가 잘 났다는 것은 지 잘난 근거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 부위에 뭐가 날아온다? 소년 다윗의 돌이 날아오지요. 이게 통째로 날아오지요. 그럼 콰당! 하고 넘어지면서 승리는 주님의 승리가 될 때, 그게 바로 성도가 가야 될 인생입니다. 그게. 

애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볼 때, 공부도 안하고 말썽만 부리고 “아이고, 신이시여, 신께서 실수했습니다. 어떻게 잘난 나에게 어떻게 저렇게 속 터지는 자식이 나왔습니까?” 할 때 주님의 소년 다윗처럼 성령을 보내가지고 돌팔매 던져버리면 뻥하고 뚫리면서 ‘아이고, 이거 이쁘기도 하여라, 요거 지금 공부는 못해도 밥도 잘 먹고 세상에 내 자식 같이 귀한 자식 없다.‘ 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주님의 승리지요. 주님의 승리에요. 그럼 애가 엄마의 중얼거림에 깼어요. “엄마, 나 잘 때 무슨 소리 했어?” “으응 아니, 그냥 자. 아이고, 이 이쁜 거.” “엄마, 갑자기 나에게 잘해주는 거야.” “주의 은혜야.” 니가 잘나서가 아니라 니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너는 동일한 너인데 주께서 성령이 와서 작살내버리니까 내 자식은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되고 학교석차가 10등내에 들어야 되고, 그래야 내 자존심에 부합돼. 라고 했던 그 자존심에 성령의 불이 찾아와서 구멍을 뚫어놔 버리니까 붕 뚫려버린 거죠.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점은 물세례는 뭐냐, “그래, 나는 회개해야 돼!” “나는 죄인이어야 돼!” 라는 쪽이 방향이 내 쪽이에요. 마지막 최종이 내 쪽인데, 성령세례는 뭐냐, 위를 보게 돼 있어요. 이게 어디서 왔지? 이 돌팔매가 어디서 왔지? 오! 주님은 이미 계시고 거기에 내 생명이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 생명을 쥐고 있는 거예요. 옛날 신화적 표현 같으면 주님께서 심장을 쥐고 있는데, 펄떡 펄떡 심장이 내 심장이라. 뽑아서 주님이 심장가지고 간 거예요. 옛날 이집트 신화에서는요, 인간의 모든 영광과 생명은 인간의 심장에 있다고 한 겁니다. 이집트의 신화는 사람은 죽지 않아요. 죽지 않아서 이시스, 오시리스 세계에 갔다가 다시 살아오게 되면 그 껍데기 자기의 벗어 놓은 옷 껍데기 찾아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미라를 만들어내요. 미라를 잘 만들어나야 되고 미라는 사막지역이기 때문에 잘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한 거예요. 

요셉 같은 경우는 무려 40일 동안 미라를 만드는 작업이 걸렸어요. 창세기보면 나오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그 당시 인간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활용해서 거기에다가 주님의 계시를 담는 그걸 마차로 여겨서 화물차로 여겨서 껍데기는 인간의 문화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담는 거예요. 노아 방주에 있어서 정결한 짐승 잡잖아요. 정결한 짐승의 피를 내면 같이 더러웠던 짐승도 같이 죽음의 심판을 이겨냈다는 그 당시의 제사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피를 그런 식으로 그 시대에게 소개해 주는 겁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의 영이, 이미 선지자에게 임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영은 미리 임해가지고 장차 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혜택을 그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겁니다. 그들이 전파한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미리 가서 전파하게 된 거죠. 그게 노아 때 주께서 전파 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바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아들 바치는 그 예수님의 정신을 이미 아브라함 시대에 실습을 시킨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식 죽이려 할 때, 옆에 수양이 있어가지고 수양을 대신 잡고 덕분에 자기 아들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나지요. 그러면 수양은 예수님이고 죽었다 살아난 것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다가 보고 기뻐했느니라, 요한복음 8장56절. 굉장히 신기하지요. 

이게 물세례가 돼버리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과거에 물세례 받았어. 몇 년 몇 월 때 물세례 받았어. 목사님이 나에게 물 뿌렸어. 이렇게 하는데, 성령세례는 아예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그게 그걸 초월해서 지금 계속해서 성령 안에 있으면 성령세례에요. 물세례는 한 번 받았으면 몇 년 전에 받았다가 되지만 성령세례는 그 안에서 사는데, 거처를 함께 하겠다하는데 성령이란 자체가 아파트니까 주님과 함께 사는데 성령세례를 뭘 또 받아요. 살고 있는데. 

성령세례는 시간이고 한 때 그랬다는 것이 그 안에서 의미가 없는 겁니다. 성령세례는 뭐냐, 날마다 우리의 기초 십자가를 볼 수 있도록 주께서 모든 상태를 엮어나가는 그러한 배치와 배열 속에 그물 속에 우리가 지금 주님의 흔들리는 속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겁니다. 아까 했지요. 계시는 곧 액션이다. 행동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압력을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밀어 넣어요. 그래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 하지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가는데 거기에 앉은뱅이 있었지요. 그 베드로 요한이 일부러 짜 맞춰서 연출한 거 아닙니다. 미리 돈 주고 “어이, 아저씨 내가 몇 시에 갈 테니 거기 앉아 주세요.”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거든요. 가니까 만났어요.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께서 이 자리에 배치했다고 본 거예요.  문제는 성령세례입니다. 위에계신 그러니까 지상에서는 인간은 어떤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어요. 몸이 개별자이기 때문에. 

“아저씨, 일어나세요. 아저씨 용기내보세요. 안되나 일으켜 볼까?”하고 일으켜 세운다고 벌떡 일어나는 거 없어요. 그냥 앉아 있고. 위에 계신 주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면, 봉사거든요.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 걸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 당신도 능력 있다, 하는데 능력 있는 게 아니고 예수이름으로부터 난 믿음이 저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해서 우리는 그냥 목격자,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행인 1, 2에요. 그냥 아무 상관없이 지나가다가 눈에 띠인 거죠. ‘아, 주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주님께서 나처럼 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일을 벌이셨구나!’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신앙생활에서는 원인과 결과에서 원인은 없어지지요. 뭐만 남습니까? 이 세상에는. 모든 게 결과만 남지요. 원인은 어디서 찾습니까?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분이 원인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예수 믿는데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가르쳤습니다.” 이런 소리는 제발 하덜덜 말아라, 말이지요. 

그럴 때, 이렇게 나오지요. “누가 너희를 가리치리요, 성령께서 너희를 친히 가르친다.” 말이 이 말이에요.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원인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남한테 전도한다. 전도하는 자체가 주님의 결과에요. 우리는 늘 그걸 소급해서 감사해야 해요. 그러니 범사에 감사해야 해요. 자식들이 좀 애를 먹이더라도 내 자식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니까 지나 내가 다 결과로 사는 거예요. 2층에서. 

내가 욕심내서 압박을 가해봤자 내 본색만 노출될 뿐이에요. 어제 수요일날 설교했던 가운데 난해한 중요한 게 있었어요. 제가 물어본 이유가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라서 이해했는가 싶어서 물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타락은 체험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타락했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타락을 우리가 수긍이 안돼요. 우리는 체험할 수 없어요. 아무리 체험해도 그 타락수준은 아니에요. 아무리 나쁜 짓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타락했다는 그 타락에는 영 우리가 감이 없어요. 

주님께서 십자가 질 때는 우리가 미처 체험하지도 못할 엄청난 죄 때문에 십자가 졌는데 우리는 십자가 지셨던 그 고마움을 기껏 내가 아는 죄의 수준에서 그 십자가를 “고맙습니다. 이 죄를 위해서 용서했군요.” 이리 받아들이니까 나중에 지금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엄청난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우리는 십자가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을 수가 있어요. “아, 바보같이 내가 이렇게 십자가 용서받았는데 또 내가 용서받은 만큼 내가 이것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구나! 안 돼, 안 돼, 나는 안 돼! 나는 자살해야 돼. 가룟유다처럼 지옥가야 돼!” 이렇게 될 공산이 있어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우리가 미처 감 잡지도 못할 그 죄를 미리 알고 십자가를 졌는데 우리는 안다는 그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서 지가 아는 범위에다가 십자가를 구겨가지고 집어넣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안다는 것은 무엇을 포함시키느냐 하면, 반성할 여지를 남기고, 반성할 여지까지 내가 체크했습니다. 하고 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다는 것은 무엇을 포함합니까? 내가 안다는 것은 혹시 내가 잘못했을 경우에는 거기서 충분히 내가 반성하거나 회개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까지 저는 압니다가 내가 아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결국 반성해봤자 지 자존심만 챙기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는 반성한다고 알아채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원인이고 우리는 이 땅에서 기껏 산다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거든요. 부스러기 쥐고 원인을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이지요. 어째거나 저째거나 하여튼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께서 용서하신 그 용서는 내가 상상의 죄까지 그 이상의 죄까지라도 용서했다는 사실입니다. Don't Forget To Remember. 절대로 잊지 마세요. 

타락은 체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내 채움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렇게 나와야 되고, 요렇게 되면 요렇게 나와 줘야 되지, 왜 주께서 내 뜻대로 안 하십니까? 주님을 완전히 가지고 놀려고 한다 말이지요. 

타락은 체험되지 않는다는 말의 같은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규정을 했잖아요. 그 규정한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할 때 내가 생각하는 죄인과 주님의 죄인이 격이 달라요. 격이 다른데 우리는 그걸 뭘로 채우는가 하면, 신학이나 삼위일체나 교리공부 이런 걸 가지고 근접해서 일치시키려고 애를 썼거든요. 그런데 강도가 삼위일체 공부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강도가 주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다? 몰랐다? 주님만큼 모르지요.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에 어디 갔습니까? 낙원에 갔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는 것이 내 구원에 원인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주님을 믿고 알기 때문에 요거 덕분에 나는 구원 받는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믿음마저도 결과이어야 되지 믿음마저도 선물이어야 되지 믿음을 내가 생산하고 생산된 믿음으로 주께서는 그 보상책으로 천국 보내주고 이런 것은 엉터리고 잘못된 겁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그렇게 배워보셨지요. 

옛날 주일날 목사가 침 튀기면서 가르치는 소리가 “마지막 때에 믿음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믿지 않았으니까 복을 못 받았지요. 가정이 피지 않는 겁니다. 믿음의 선지자들은 구원도 받고 이 세상의 축복도 받는데, 왜 여러분들은 오는 복을 찹니까?” 이런 식으로. 그러면 어떤 교인이 “목사님, 말씀을 믿습니다.” 하면 목사가 “말로만, 말로 때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또 추가로 해 준다니까요. 그럼 뭘 행하는데?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결국 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여러분, 안속아 넘어갈 거죠. 

그 수법을 여러분들은 미리 아셔야 돼요. 제가 어제 화요일날 경상북도 봉래에 가서 누굴  만났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손 양원 목사님은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자기는 그걸 도저히 못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가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손 양원목사는 원수를 사랑했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손양원목사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았다고 했어요. 자기는 손 양원 목사처럼 못되니까 그러면 나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천국 못갑니까? 라고 연세가 87먹은 할아버지가 질문을 해요. 생전처음 보는 사람인데 붙들고 이야기했어요. 세상에 원수를 사랑해 버리면 원수 없어져요. 사랑할 원수가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립이 안돼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립되려면 주께서 계속해서 원수를 만들어내야 되고 그 만들어낸 원수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키지를 못해요. 

우리가 원인이 안 되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의라는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한 그 대가에 대해서 우리의 눈이 가게 되어있어요. 주께서 원수를 사랑했다가 아니라 내 행함에다가 치중하게 되고 집중하게 되고 집착을 하게 되는데 원수를 사랑 못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으니까 도대체 원수도 사랑 못하는 이 지옥 갈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천국을 가게 되지? 하고 쳐다보니까 우리는 강도처럼 모든 원인제공자가 누구다? 옆에 달린 예수님에게 있음을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 안에 있는 효과요, 특징입니다. 이제 성령세례 아셨지요? 물세례는 내가 뭔가 받았다! 가 되잖아요. 성령세례는 내가 쥐었다, 받았다! 가 아니라 성령이 나를 쥐는 것이 성령세례에요. 지금도 성령 좋아라고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계시자체가 액션이에요. 아침에 눈뜨고 행동하고 설거지하고 이불 개는 모든 것이 성령주시는 사랑의 힘으로서 우리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감사해도 감사한 입이 부끄러워. 감사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골라잡아 감사하려하니까 이거 감사하면 이거 안 감사한 것처럼 바짝 넘어가서 미안스러워.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감사하도록 마음이 나오도록 우겨 나올 때 또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그 상황 속에 배치하신 겁니다. 

아볼로는 그 전에는 몰랐던 거예요. 나 요한세례 받았다. 나 많이 안다. 구약 도사다! 라고 했다가 괜히 까불다가 브리스길라, 아굴라 수가 높은 사람한테 바둑 수가 높은 사람한테 걸려들었어요. 배워보니까 지가 너무 까불었다는 것이 들어난 거예요. 이제부터는 세례요한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아볼로를 새삼스럽게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미 아볼로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 주님께서 절차를 밟지요. 니는 우선 세례요한의 물세례부터 해야 되고 그 다음에 니는 고린도에 가야 되고, 거기서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나야 되고, 이 모든 절차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원인이 돼서 우리는 결과대로 그냥 들어갈 뿐이에요. 

채매 걸린 노부모에게 “어머님, 요 약 드시고요, 그 다음에 이 빨간약 있지요, 요 약 드시고요, 이 노란 약 드시면 됩니다.” 라고 정신 바짝 차린 자식이 주듯이 니는 요한의 세례를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니는 고린도에 가야 되고, 그 다음에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나야 되고, 니는 성령세례 안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소급해서 알아야 되고, 니는 전해야 되고 전부다 주님의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의 절차입니다. 

그러니 이런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성령세례 안에서는 똑같은 효과를 내요. 모습은 달라요.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치고, 어떤 사람은 복음을 외치고, 어떤 사람은 장에 가서 고기 팔고, 다 다르지만 삐져나오는 주님 바라봄이라는 것은 동일하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하는 점에서는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분이라 할 것도 없이 천지일보에서 16가지 질문을 해서 하루아침에 다 보내줬는데. 그 질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모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질문이 뭐냐 하면, 세상 목사들 모인 곳에 주와 함께 있다 하는데 그 말이 맞느냐 하면서, 주의 이름이 뭐냐, 세상교회에서 주의 목자들이 모였으니까 주님이 함께 있는 곳이다. 따라서 목자들이 모인 곳에 대해서는 교인들이 거기다가 모든 필요한 비용들 다 대야 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질문한 거예요. 그 질문이 흘러서 나한테 왔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답변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반드시 주님만 쳐다보기 때문에 영웅이 없어요. 전부 다 걸레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 바라보기 때문에 오직 회개하는 모습만 나올 뿐입니다. 

“나, 이렇게 나쁜 놈이야, 그래도 구원받았어.” 전부 다 자기가 주님 앞에 주님과 비교해 볼 때 자기가 참 허접스럽다는 것을 그걸 모습이나 행동이나 언어로나 모든 걸 보여줍니다. “나는 니한테 섬김 받는 게 있을 수 없어. 나는 오히려 섬겨도 은혜에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모습이 나올 때, 높은 자가 없고 전부 다 낮은 자만 생기는 그 현상이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