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곧 실패
2022년 3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39:5-12
(39: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39:6)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39:7)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39:8)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39:9)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39:10)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39:11)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39: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만남은 곧 실패입니다. 실패을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욥과 만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원만한 만남만이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변에 있는 동물에 대해서도 실패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을 실패자로 자인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본성이 내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특별한 존재로 자임합니다. 그래서 비록 완전치 않는다고 해도 나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부지런하게 주변을 살피고 관찰합니다. 그 관찰의 대상에 동식물도 포함합니다. 어떻게 잘 이용해 먹을 것인 것으로 한시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그 동물로부터 도리어 관찰당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인간처럼 자의식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본능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라서 인간이 필요할 때에 언제든지 활용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동물로부터 배워서 인간 자신에 자신의 죄를 느낄 경우는 없다고 장담하는 겁니다. 그리고 동물을 제키고 직접 인간은 하나님과 상대하기를 바랍니다. 무시대상은 동물이 인간이 동급으로 다루어질 리는 없다고 여깁니다. 동물은 인간보다 늘 모자라고 어리석기에 인간은 마땅한 동물을 동물 다루듯이 냉혹해서 해도 허물될 것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인간들의 자신만만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적받게 됩니다. 즉 인간들은 쉽게 주변에 있는 들 나귀와 들 소와 만난다는 점을 주님은 착안하십니다. 더는 동물이 인간의 보완물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보완물은 대체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프랑스 여인이 2차대전 때, 독일 남자를 사랑해서 사귀다가 결혼하기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난 뒤 그 독일남자는 전쟁에 나가 죽습니다. 그 여인은 너무 큰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일본 남자를 사귀게 되는데 그 일본 남자는 어디까지나 전의 남자의 대체물이 아니라 보완물입니다. 결코 전의 남자에 대한 여인의 사랑을 극복하거나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남자는 죽고 없는 상태에서 그 여인은 자기 곁에 그 죽은 남자를 보완해줄 존재를 찾아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여인은 죽은 독일 남자와 둘이 하나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모든 만남은 실패입니다.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일본 남자라는 보완물이 등장했다고 해서도 그래도 그 일본남자와는 하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은 죽은 남자와 하나되려고 억지를 쓰는 겁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욥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필요한 보완책을 강구하다보니 심지어 하나님마저 나의 보완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하나됨을 피해가십니다.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만남은 애초부터 실패다”를 분명히 하시는 것, 바로 만남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만남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한 사랑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도리어 우리 자신을 소멸하고 우리의 무지와 무능을 드러내시는 사랑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8:21)
즉 사랑 가지고 계획잡거나 소유화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어린아이로 다루십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 스스로 계획이 실은 당연히 실패되어야 함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욥은 자기보다 가치없다고 여기는 들 짐승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지적받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모든 인간은 동식물에 의해서 지적받기보다는 노골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지적받습니다. 구약 때도 당나귀나 사자나 개를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1:7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의 밤은 ‘개도 짓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하게 해서 발람 선지자를 꾸짖었습니다.(민 22:28) 다니엘 선지자에게는 사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입이 봉해졌습니다.(단 6:22) 즉 짐승들이라고 단순히 인간의 보완물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류 전체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십니다. 마태복음 16:1-4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쉴새없이 자연물을 관찰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관찰하는 그 관찰물에 의해서 인간들은 도리어 감시당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물론 자연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으로서 성립되는 상황입니다. 인간들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신들의 판단에 하자(잘못)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진정한 자아를 알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8:15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빵이 없는 곳에서 누룩 언급이 생소했습니다. 그 누룩은 예수님께서는 4000명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에 빵을 남기신 그 빵의 기능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지는 인간의 죄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인간의 죄를 밝혀내시는 의도로 진행되었던 겁니다. 이로서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 이러한 기적을 상시 담겨있는 조건으로만 성립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를 만드시는 그 실패 속에서 구원의 성공을 이끌어내시는 주님의 주도적 활동을 찬미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8강-욥기 39장 5~9절(만남이 곧 실패)2203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9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799페이지입니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껄이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누가 자식이 떠드는 것을 말릴 수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한마디로 만남은 실패입니다. 자식과 부모든 목사와 교인이든 모든 만남은 실패입니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두 사람이 하나 될 수 없는데 왜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 바로 제3의 요소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둘에서 하나가 되는데 그것을 실패하게 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제3의 요소를 끄집어내는데 그 제3의 요소가 바로 ‘1’일 때 몰랐고 ‘2’일 때 몰랐던 바로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의 아픔을 보완해 달라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나를 대신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추켜세우고 지켜주는 하나님으로 계속 우리는 그 하나님을 붙잡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세상에서 찾거든요. 옛날 영화인데 1959년도에 상영된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에 보면 어떤 프랑스 여자가 독일 남자를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로 약속한 그다음 날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는데 남자가 죽고 말았어요. 너무너무 사랑한 남자가 죽은 거죠.
그래서 그 여자는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 일본 남자를 사귀었는데 그게 바로 히로시마 내 사랑이에요. 이것은 여자가 진정 사랑했던 독일 남자의 대체물이 아니고 보완물이에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대체물이 아니고 보완물. 일본 남자가 알면 기분 나쁘겠지만, 아무리 일본 남자가 잘해줘도 그건 네가 잘한 것이 아니고 그 여자와 독일 남자가 하나 된 그 사실을 주위에서 도와주기 위해서 붙여준 그러한 여분의 것이죠.
내가 좋아했던 그 남자만큼 잘하라는 땜질용으로 그 일본 남자를 그 여자가 사랑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랑이 문제가 있는 것은 인간의 사랑은 다 계산이 있어요. 다 계획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인간의 계획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왔다가 교회에서 사랑해야 한다고 하니까 ‘뭐, 까짓것 사랑한다고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사랑한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랑은 대체물도 아니고 그저 보완물 정도예요. 그 사랑은 계산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이 사랑 자체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능하게 만들어버려요. 나를 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21절에 나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나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능해요. 설교시간인지 뭔지 상황판단 못 합니다. 무능하고 무지해요. 사랑이 그런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무능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무지해도 괜찮아요. 괜찮은 것이 아니고 무지하고 무능하면 무능할수록 사랑은 빛납니다. 차라리 어린아이같이 그 앞에서 뛰놀면 됩니다. 계산하지 말고 자기 앞일을 계획하지 말고, ‘주님 사랑 알았으니 이제 천당 가겠지’라고 미리 따지지 말고요.
왜냐 하면 나를 포함한 나와 너의 사이가 아니라 나가 빠져버린 나도 몰랐고 너도 몰랐던 낯설게 찾아오는 그 제3의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찾아오신 거예요. 저는 그것을 인간의 진정한 바깥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바깥이란 쑥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바깥에서 들어온, 마치 욥에게 하나님이 들어오듯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느냐.
뭐 변화가 있어야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왔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변화가 뭐냐 하면 우리의 지형, 이 바닥이 이제부터는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단단하게 해놨던 모든 구성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해요. 이런 비슷한 예는 바로 에스컬레이터 앞에 설 때 그렇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설 때 가만히 서 있으면 소용없어요. 그 발판을 일단 밟아야 해요.
발판을 밟고 성질 급해서 에스컬레이터 위를 막 뛰어 올라가는 사람들 봤죠. 역에 보면 있는데 주로 범인이 접니다. 빨리 가서 택시 1등으로 타기 위해서 그렇게 갑니다. 에스컬레이터를 왜 올라갑니까? 가만있으면 그 발판이 올라가게 되어있어요. 사랑이 올라가는 건데 그 사랑이 올라가면 내가 기대하고 예상하지 않는 다른 곳에 나를 세웁니다.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높은 곳에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우면서 내가 주인공이라는 그 역할을 우리는 망쳐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랑에 맡기면 되고 에스컬레이터 올라타면 나중에 눈뜨면 천국인데 왜 좋은 것을 안 할까. 좋은 것을 안 하는 이유가 우리 만남 자체가 나의 속내를 완전히 들춰내기 때문에 그것이 굉장히 괴로운 거예요. 그 대표적인 자리가 바로 맞선자리예요. 내가 만약 여자라면 맞선자리에 들어갔을 때 어떤 남자를 만나잖아요. 어떤 남자를 만날 때 그냥 아무 느낌 없이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내 남자가 될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 뭐 하는 사람일까, 온갖 것 다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평소에 길에서 흔하고 흔한 그 낯짝이고 얼굴이에요. 평소에 길에서 보면 쳐다보지도 않는 얼굴이 앞에 딱 앉아있는 거죠. ‘저 남자에게 내 운명을 전부 맡기란 말씀입니까, 하나님?, 내가 이 시간에 굳이 저 남자와 이야기를 해야 하나, 따뜻한 커피나 마시고 갈까?’
뭐 대단한 남자가 오는 줄 알았는데 지하철에서 늘 스쳐 지나가는 그런 남자, 튀지 않는 남자, 그런 수준 남자 꼽으라면 어디 시장바닥 가서 아무나 꼽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나의 특별한 남자란 말인가 하는 그런 실망스러움이 확 다가오죠. 이게 내가 생각한 것은 특별한 남자를 원했는데 너무나 평범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 내가 과연 시계를 보면서 몇 분이나 지체할지 그걸 계산하는 거예요.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몇 시간이나 이야기해 줘야 내가 예의 없는 여자라고 욕하지 않을지 계산하죠.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의 마스크라는 거예요. 그게 만남의 실패예요. 그냥 내 자체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이고 따라서 내가 만날 사람도 평범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평범한 남자를 만날 때 실망감이 넘치는 것은 내가 평소에 생각하기를 나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고 대단한 존재일 거라고 자기 스스로 마스크와 가면을 그렇게 쓰고 있었던 거예요. 그 가면을 벗기는 자리가 맞선자리입니다. 어떤 여자는 맞선을 100번 봤다는데 볼 때마다 가면 뒤에 가면, 그리고 가면 뒤에 가면이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또? 또 가면이야? 또 평범해? 도대체 언제까지 평범한 남자야? 이런 남자 같으면 소개팅할 거 없이 내가 길에서 골라도 고르겠다’ 소개팅에 나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길에서 막 고르는 그건 종류 말고 뭔가 내가 아는 사람이 소개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 그런 만남을 가졌는데 이제는 커피값부터 해서 시간, 옷 세탁비용, 이런 돈 계산 막 하게 되고 마음이 복잡해지죠.
그런 생각을 남자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만남에 대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욥에게는 인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동물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동물에 대해서 인간은 시시하게 보고 나의 보완물, 좋은 말로 하면 반려자, 나의 보완물로 생각하는 거예요. 동물의 특징은 왜 내가 나의 성질을 다 퍼부어도 되느냐 하면 동물에게는 자의식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의식이 없는 동물은 반려자로서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만약 특별한 존재가 되면 내가 만난 상대는 나만 특별한 자의식이 있어야 하고 상대는 나의 자의식 앞에 다 꿇어야 해요. 있어도 없어야 해요. 이건 일방적인 우리의 탐욕이고 요구입니다. 그런데 이 탐욕은 조상부터 물려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이 우김은 보통 우김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게 우리는 분명히 옳지 않다고 잘못되었다고 아무리 해도 내가 고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나만 특별해야 한다는 이것이 결혼한 후나 전이나 이건 고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건 누구를 만나도 그래요. 그래서 모든 만남은 늘 실패예요. 실패의 연속입니다. 이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가면을 썼기 때문에 내 가면 벗기면 될 거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가면 벗기면 또 가면 나오는데요. 가면이 몇 개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그 가면은 누가 요구하느냐 하면 남들이 요구하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워왔던 겁니다. 만약에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면 약간 정신병자 같을 수 있어요.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냐면 손녀에게 물어요. ‘할아버지가 좋아, 할머니가 좋아?’라고. 그러면 손녀가 ‘할머니가 좋아’라고 하거든요. ‘그런 할아버지는?’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하죠. 안 좋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가장 옆에 누가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옆에 할머니 있으면 할머니가 좋고 할아버지 있으면 할아버지가 좋아요.
그런데 그 손자, 손녀의 말에 목숨 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건 미친 거예요. 긴장 막 하면서 누가 좋으냐고 대답할지 전전긍긍 기다리는데 만약 자기가 할아버지인데 할머니가 좋다고 하면 ‘으악~~~’비명 지르며 괴로워하면 그건 이상한 할아버지죠. 그런데 손녀, 손자의 누가 좋은지에 대한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왜 세상에 나가서 남들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리 신경 쓰는 거예요? 이거 정신병자 아닙니까?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왜 그리 관심이 있는 거예요. 도대체 본인이 없어요. 전부 다 남들이 씌워준 마스크,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스크만 열 개를 썼는지, 스무 개를 썼는지 분간이 안 되는 겁니다. 마스크를 쓰니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거고. 여기 들소와 들나귀 나오는데 ‘들소와 들나귀를 볼 때 저것은 자의식 없는 거, 나를 위해서 있는 보완물들, 그러니 내 마음대로 내 힘으로 키우겠다’라는 식으로 욥도 그렇고 모든 인간이 이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합니다. “너와 들소의 만남은 실패다. 들소가 너의 말을 듣는 줄 알아? 내가 너의 말을 듣도록 주선했기 때문에 너의 말을 들었어. 들나귀도 마찬가지야. 인간 너가 뭔데 들소와 들나귀가 너의 말을 왜 들어야 해? 너는 들소 보고 모른다고 들나귀 보고 자의식 없다고 무시하지? 내가 보기에는 들소와 들나귀가 훨씬 낫다. 너는 매사에 네가 누구인지를 몰라”라고 이런 식으로 “~겠느냐? ~하겠느냐?”라고 계속 욥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하나님이 주선했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욥은 감사해야 해요. 자기가 벗겨낼 수 없는 가면을 주님께서 벗기는 것을 시도해주셨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러면 이 구약에서는 욥에게 자꾸 시비를 거는 식으로 ‘너는 너밖에 모르고 너는 너 자신을 모른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들소와 들나귀를 모른다는 것은 들나귀를 관찰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게 어려운 말인데요, 들나귀 들소가 너를 관찰하고 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최고이니까 자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그 시선에 대해서는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지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입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떤 해답이 주어져요. 그 해답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실패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발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려고 오신 겁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그 내용이 아주 길게 나와 있는데 짧게 설명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1~1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이점은 마태복음 16장 1~3절을 보면 더 보완되는 데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중요하니까 잘 들으셔야 합니다,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이렇게 인간이 관찰하는 거예요, 관찰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는 말이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그러니까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괜찮고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구름이 낀다고 하나,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러니까 너는 빼놓고 자연은 그렇게 과학적으로 발달하고 초고속 미사일까지 쏘아 올려서 사드에 표적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발달시키면서 푸틴 너는 왜 너를 모르냐는 말입니다. 인간은 왜 자기만 빼놓고 안다고 우기느냐는 겁니다. 본인을 도대체 왜 몰라요?
인간은 본인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와 대체물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나 죽고 나 대신 사시는 분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나의 보완물을 찾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사람이 싫어서 자기 개에게 유산을 물려준 사람이 있어요. 왜 개에게 물려줬느냐면 개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유산 물려준 그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자기 자신은 계속 가면 쓰고 나는 특별하다는 것을 유지하려고 개를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친구를 찾는 것은 고분고분한 친구를 찾아요. 대드는 친구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앞으로 개를 넘어서서 인공지능 시대에는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유산을 물려줍니다. 갈수록 가관입니다. 그런데 그 개, 하늘, 땅, 천기, 노을,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깨어집니다. 출애굽기 11장 7절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유월절 밤은 개가 짖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개도 짖지 않는 밤. 다니엘을 죽이려고 사자 굴에 넣었는데 그 굴속에 있는 사자들은 ‘합죽이가 됩시다! 합!’ 되면서 하나님께서 입을 완전히 봉해버렸어요. 뭘 먹으려면 입이 열려야 먹죠. 얼마나 굶겨놨는데 왜 안 먹고 싶었겠어요. 그래서 다니엘 빼내고 다니엘을 지키던 다른 공무원들을 대신 집어넣었을 때 그때는 사자들이 입이 열려서 웬 포식이냐 싶어서 다 잡아먹었어요.
그러니까 사자에게는 문제가 없었는데 다니엘의 제3의 존재인 하나님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왕과 다니엘의 만남을 실패로 만든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모든 만남을 실패로 만든 겁니다. 개가 짖지 않는 그 밤, 죽음의 천사가 오는 데 개가 짖지 않았어요. 이건 저번에 이야기한 발람 선지자에게 당나귀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한다는 것은 개가 자의식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루시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요소가, 제3의 특이한 요소가 나온다는 뜻이에요.
하물며 개도 당나귀도 그렇게 사용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복음 8장 15~16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이 말씀의 해석이 굉장히 어려워요.
누룩이 어디 있느냐면 떡이 있을 때 누룩이 있습니다.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니까 떡도 주지 않고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니까 ‘우리에게 떡 준 적 없잖아요’라고 제자들이 나오니까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와요. “내가 너희에게 4000명을 먹일 때 떡이 몇 개 있었느냐, 일곱 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곱 개마다 전부 누룩 다 들어있다는 말씀이죠.
그리고 8장 20~21절에 보면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저희들은 먹는 떡을 생각하고 먹는 누룩을 생각해요. 그런데 누룩이 뭐냐 하면 죄 덩어리가 누룩이고 이 누룩이 바리새인들에게 들어있고 제자들에게도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 우리 속에 누룩같은 죄가 있기 때문에요. 그래야 십자가의 피가 죄 사함이라는 새로운 제3의 요소로써 들어오는 거예요. 죄가 있어 줘야, 이 죄는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돼요, 제3의 요소인 죄를 전문적으로 씻는 제3의 요소인 피가 죄와 만남으로써 우리 안에서 주님의 실체,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우리는 내 행동, 착함, 훌륭함, 그거 남아있을 이유가 없고 남기지 마세요. 남기지 말고 그 자리에 주께서 행하신 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죄의 자리에 내가 있고 그다음에 주님의 피가 있으면 그게 바로 우리가 주님의 개요, 주님의 들나귀요, 주님의 들소요, 주님께서 다루시는 당나귀가 되는 겁니다. 이제 죄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집 앞에 하수구 공사를 해요. 우리집 근처 사는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점잖고 훌륭하고 자기는 죄가 없고, ‘죄가 뭐지? 나는 이때까지 죄지은 적이 없어. 실수한 적은 있지만 죄지은 적은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아침에 공사하려고 포크레인도 오고 장비들이 다 왔는데도 자기 차를 안 빼주네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공사 공공사업이 아예 없다고 하게 되면 전에처럼 차를 대놔도 자기는 죄가 없어요.
없는데 갑자기 제3의 요소인 공공사업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차 빼주세요’라고 하니까 ‘내 차인데 빼라마라 하냐. 너희들이 피해서 공사해라. 내가 왜 빼야 하는데’라고 하는 거예요. 뭔가 만남은 실패를 형성해요. 주님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기존 교회에서 실수 하는 거예요. 십자가와 만나요. 맨날 예수님 사랑하라고 하면 ‘예수님 사랑하지. 좋은 건데 왜 사랑 안 해’라고 하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만나세요. 이 천하의 죄인들아. 죄를 모르는 죄인들아’입니다.
십자가와 만나는 거예요. 십자가는 내 교회가 없어야 해요. 내 교회가 뭐예요, 그게. 그리고 내 인생도 없어야 해요. 내 추억이 없고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의 추억으로 바뀌게 하는 겁니다. 어릴 때 태어나는 것부터 해서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이 하나도 없어요. 내 일이 없는 이 가벼움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 일이 없다는 것은 내 미래가 없어지는 거예요.
있어 봐야 가짜인데 그거 뭐 하려고 내 미래 생각합니까? 주께서 당나귀, 들소처럼 우리를 부리는데 그 안에 십자가 피 들어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기도하라면 기도하는 말도 잘 듣는 우리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님 오실 때 바리새인들도 그것보다 더했고, 사두개인들도 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실패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죄밖에 없음을 깨달아서 주님의 만남이 성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