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교란
2022년 3월 20일 본문 말씀: 욥기 39:1-4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39:2)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9: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39: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하여 선으로 자신을 추적합니다. 뒤로 가면 퇴행, 혹은 퇴보요 앞으로 가면 발전 확은 전진입니다. 전진하면 좋은 것이고 퇴보하면 나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의 전전의 성향은 이미 창세기 11:4에 나와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즉 인간은 자기 완성을 위해서 방향성을 정합니다. 그리고 목표는 이미 하늘에 계신 하나님쪽입니다. 마치 욥과 욥의 친구들이 추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맞서서 찾아오신 겁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방향성을 정면으로 부정하십니다. 인간들이 질문하지 않는 질문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질문을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이 같은 인간들에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서로 노력해서 기어이 정답과 원칙을 만들어 보자고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질의하신 취지는 그들 인간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문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답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인간은 근원적으로 전진과 퇴행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를 들짐승, 혹은 집에서 인간들이 기르는 가축을 통해서 예를 드시는 겁니다. 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개에게 있어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을 흘러감에 대해서 개가 초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에게 있어서는 전진과 퇴행이라는 직선적으로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길러지고 있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범죄한 이후에 짐승들의 운명을 인간들 손에 맡겨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하는 것은 인간들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인간의 범죄가 무엇이기에 피조물들을 고통케 하는 겁니까? 그것은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통치에 놓이는 관계를 인간들을 강탈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가축을 기른다는 것은 가축이 원래 가치는 무시되고 오로지 인간에게 이익을 위해서 다루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이나 오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제직회하는데 있어 회의 규칙을 정하는 일, 인간들은 그 일이 마치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귀나 암사슴이나 개나 들나귀가 찹석했다고 칩시다.
그들이 당회장님의 요구에 따라 거수하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을 겁니까? 없습니다. 즉 인간들은 개인적이나 모임이나 그 어떤 경우라도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짐승들은 이런 것이 일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그대로 전달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짐승들의 팔자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소위 ‘자기 만’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6-29)
인간들은 짐승들이나 자연물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뽑아낼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일하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그러합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이 애써 만든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백합보다 못합니다.
이는 자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추구하는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지적하고 낮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영 들지 않으시는 겁니다. 암염소가 새끼 치는 때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탐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인간들이 얻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암염소의 새끼 치는 때는 그다지 시급하거나 중차대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모든 방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와 만날 수가 없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인간들이 굳이 관심두지 않는 쪽에서 질문을 던지시는 겁니까? 그것은 ‘의미의 교란’ 때문입니다. 의미란 인간 세계에서는 사물을 자기 중심으로 엮는데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인간 대 인간들에게 잘 통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러나 개나 짐승이나 그 무엇도 이런 인간들의 합리성을 충족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즉 인간들의 의미 구성에 피조세계는 전혀 협조할 이유나 의무가 없습니다. 이런 면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시도와 반대로 나섭니다.
어떤 평평한 곳에 언덕을 만들고자 한다면, 근처에 있는 흙을 파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그 파낸 흙으로 언덕이 형성되면서 근처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깁니다. 언덕에 있는 흙의 부피와 구멍으로 인해 비워진 부피의 합은 0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실시한 ‘의미의 교란’원칙입니다.
즉 인간들이 추구하고 실시하는 그 목적과 의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반대로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은 그만큼 인간들이 세상에 대해서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가시는 그 낮아짐의 방향으로 나아갈 재주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서 짐승들 및 피조물들만 학대받고 고통당합니다. 피조세계는 인간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듣습니다. 바로 이런 관계에 인간들이 끼어들어 그 피조물들을 힘들게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한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실은 1.자신의 이익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2.따라서 인간들이 피조세계에 붙여놓은 모든 의미와 그 사슬구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분노를 유발할 엉터리 의미들입니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4.따라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개념의 의미를 교란시키십니다.
아무리 해도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게 말입니다. 구원이란 전진과 퇴보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테두리 안에서 보호 받는 식으로 성사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되는지 그 이유가 우리 인간의 잘못된 의미에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7강-욥기 39장 1~4절(의미의 교란)2203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9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99페이지입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은 질문을 같은 인간이 남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것과 그 취지가 다릅니다.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이건 지식으로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우리가 노력하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서로가 지혜를 짜내면 암사슴이 새끼 낳을 때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서 진리에 도달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의 질문에 하나님에게 답변한다 한들 이미 그 답변을 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질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인간이 진리를 추구해서 세상을 알아서 하나님과 접선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뒤로 빼시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질문 대상이 산 염소, 암사슴, 그 뒤에 5절에 나오는 들나귀, 이런 것들에 특징이 있는데 염소 앞에 붙는 ‘산’과 들나귀의 ‘들’입니다. 인간은 나귀나 염소나 사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합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 삼는 거예요. 네가 어느 정도 장악했다고 여기는 것은 전혀 그것은 너의 오해라는 겁니다. 어떤 피조물도 인간 손에 장악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이 자연 세계를 인간의 손에 넘긴 적이 없어요. 오히려 인간 손에 있던 것들을 주님께서는 반대로 빼냅니다.
쉽게 말해서 짐승보고 하는 것을 사슴보고 이야기하고, 암사슴보고 이야기하고, 산 염소보고 이야기하고 들 나귀보고 이야기하기를 ‘너는 인간하고 놀지 마라’라는 식이죠. ‘너 사람하고 놀지 마라. 너 그러다 물든다. 너 다 망친다’라는 식이에요.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배제 시키는 거죠. 하나님의 활동에서. 왜냐 하면 인간이 벌써 시건방지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자연물을 인간 손에 맡기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도 은연중에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오뉴월 개 팔자가 최고라고.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이 개는 자기 삶에 목적이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는 시간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는 목적이나 의미가 필요치 않고 시간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주님의 열심이 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도 그렇고 들풀도 그렇고.
인간에게 묻습니다. 어느 팔자가 괜찮은 팔자냐고. 본인의 목적을 가지고 본인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의 범죄 한 모습과 그냥 하나님께서 장악하셔서 개는 개대로 암사슴도 산 염소도 다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는 모습과 어느 것이 진정 하나님의 통치와 관리를 제대로 보여주느냐고 묻는 거죠.
여기 산 염소가 새끼 칠 때와 5절에 들나귀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이 말은 뒤에 5~6절 보면 사람들이 들나귀를 풀어놓고 치는데 인간들이 나귀를 부를 때 휘파람을 불면서 ‘나귀야~이리 오너라’라고 하잖아요. 이것에 들나귀가 아주 코웃음을 칩니다. 오라 해도 오지 않습니다. 짐승들이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실제로 산 염소가 새끼 칠 수 있어요. 하지만 산 염소가 새끼를 치는 그때, 때까지 인간이 알아서 과연 산 염소에 대해서 모든 것, 전부를 인간들이 장악하면서 산 염소가 새끼 치는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인간은 그럴 재주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먹잇감과 팔아넘기기 위한 그런 것만 따지면 되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산 염소 그 자체에 대해서 인간이 누락시킨 정보와 지식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필요한 것만 챙기고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무지합니다. 이런 인간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산 염소나 암사슴이나 이렇게 인간들이 생물로 분류하는 이런 짐승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이것은 의도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형성된 모든 인간 세계에 대해서 깡그리 그거는 전부 다 하나님께서 “나는 모르겠다. 이 더러운 것들”이라고 하시며 한꺼번에 아예 주님의 안목에서 다 제거하고 지워버리신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환풍기가 고장 나서 부품 바꿔서 수리했고, 빗자루 구입해서 재정부에 청구해서 지출했습니다. 이거 복음입니까? 복음 아니죠. 중국에서 은행 다니다가 그만두고,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의 젊은 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386대 1이라고도 하고 어떤 곳은 수천 대 1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이게 복음입니까? 복음 아니죠. 왜?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이 엮여있는 모든 관계를 한꺼번에 전부 다 꼴도 보기 싫어서 밀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권사 뽑고 장로 뽑을 때 2/3로 하냐, 1/2로 하냐 그런 것은 그저 노이즈(잡음)라고 해요. 왕~왕~왕 거리는 주님 귀에 소음 같은 거예요. ‘치아라. 시끄럽다. 치워라. 2/3로 하든 1/2로 하든 눈 감고 손들든 네 맘대로 해라’ 어디로 옮기냐. 청와대 옮길 때 용산으로 옮기냐, 광화문으로 옮기냐는 것들 네 맘대로 해. 아무 상관 없어.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 대 인간이 연합해서 뭔가 괜찮은 취지나 의미를 살리는 거, 하나님께서는 인정한 적 없습니다. 그걸 한꺼번에 그저 무지하다고 보는 겁니다. 무지. 하나님이 인간을 무지하다고 한 것은 들나귀가 인간을 무시하고, 들나귀에게 집에 오라고 해도 말 안 들어요. 그걸 7절에 보면 “업신여기니”라고 나와요. 들나귀가 인간의 오라는 말을 업신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저는 그걸 듣고 ‘당신이 언제부터 태양과 아는 사이가 되었느냐’라고 묻고 싶죠. 태양에게 뜨라고 하면 뜨고 지라고 하면 지는 인간과 태양 사이가 그런 관계입니까? 들나귀와 인간이, 암사슴과 인간이 그런 관계예요? 관계 다 끊어졌어요. 암사슴과 산 염소는 하나님 손에 달렸지 인간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이 인간 때문에 괴로워서 썩어짐을 당하죠. 괴로워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뿜어내는 그 소음과 오염과 죄 때문에 그 피조물의 고통 하고 신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통 소리예요. 이 피조 세계에서. 발람 선지자가 자기 나귀가 있는데 그건 자기 나귀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나귀가 가는데 앞에 천사가 와서 발람 선지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자가용인 나귀가 먼저 스톱(stop)하려고 브레이크를 걸었죠.
그렇게 브레이크 거는데 발람 선지자는 바보 같아서 천사가 눈에 보이질 않는 거예요. ‘이것이 왜 안 가고 난리야’라고 하며 무려 세 번씩이나 나귀를 때렸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귀가 인간을 나무라고 꾸중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때립니까?”라고 한 거예요. 발람은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막 돌아보는 거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지? “왜 때립니까?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때려요?”
여기서 나귀는 여호와 하나님과 한 편 먹었고 인간은 소외된 겁니다. 떨어져 나갔어요. 이건 전체 인간이 아무리 인간들끼리 의논하고 숙의하고 뭔가 보람되고 가치 있는 것을 시도해도 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치워버리십니다. 더럽다고. 지금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산 염소, 암사슴, 들나귀, 나중에 독수리랑 소랑 타조도 나오고 하는데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관심을 두는 그것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비켜나가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인간을 미워하십니다. 미워. 미워. 미워. 끝까지 미워해요. 오히려 사랑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에요. 성경에 사도행전 보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성경에는 성령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하는데 교회를 둘러보고, 노회, 기독교를 둘러보면 성령 받은 자가 의외로 없어요. 그러면 성경은 틀릴 리가 없고 ‘아, 이거 기독교계가 구라를 치고 있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라는 거죠.
성령 안 받아놓고 성령 받으면 이런 것이 좋다고 하니까 좋은 것은 알아서 그냥 ‘나도 성령 받았습니다’라고 손들고 나오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거, 바로 그러한 것들이 이렇게 욥처럼 하나님 계신 곳과 우리 있는 곳과 너무 격차가 진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틀어져서 서로 사고가 안 맞느냐.
인간은 전진하고 싶어요. 자꾸 자기를 앞으로 전진하고, 전진하지 못하면 퇴행이라고 하죠. 발전하지 못하면 퇴보한다. 그러한 선형(Linear)으로, 하나의 선으로 딱 그어놓고 점점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경향들이 있어요. 이거는 뭐 인간들이 스스로 살아보려고 하는 못된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선(linear)이 아니에요. 그냥 동그라미예요.
동그라미에 갇힌 상태에서는 전진도 없고 퇴보나 퇴행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키워주면 키워주는 대로 사는 것이고 오뉴월 개도 요새는 잘 못 잡아먹지만, 복날 되어 잡아먹으면 먹히는 거고, 그것이 개 본인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개가 스스로 자기 팔자에 대해서 개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거 봤습니까? 개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굉장히 염려하고 그러는 거 봤습니까? 그런 거 없지요.
개 나라에 신문 있고 방송 있습니까? 개들한테 BTS 방탄소년단 그룹 같은 거 있어요? 없잖아요. 그래서 개들에게 하자가 있습니까? 개들의 견생(犬生)에 문제 있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 나오는 산 염소, 암사슴, 들나귀 있는데, “암사슴아 너는 왜 새끼 낳을 때를 나에게 알려줘야지 왜 그냥 낳고 그러냐?”라고 우리가 암사슴에게 따지고 때리고 할 자격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 세계밖에 몰라요. 그저 자기를 이상하게 발전 쪽으로 퇴화하면 안 되고 발전하고 또 발전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염소와 암사슴 그리고 들나귀 그리고 그 뒤에 계속 가축들이 나오는 이유는 이런 원리가 있어요. 언덕과 구멍의 균형. 어느 평평한 곳에 언덕이 있으려면 재료는 없고 삽만 있을 때 그럼 뭘 하느냐.
언덕을 만들려면 그 옆에 흙을 파내면 되겠죠. 흙을 파내면 모인 곳은 언덕이 되고 파낸 장소는 뭐가 되느냐 하면 구멍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덕과 구멍은 플러스 마이너스하면 이게 제로가 되는 거예요. 아무 문제 없음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자꾸 발전을 도모하는 거예요. 어떤 업적, 실적, 큰 성과.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과 지식을 알고 선악 지식이라는 것은 윤리 도덕뿐만이 아니고 모든 지식을 다 포함해요.
지식을 알고 자꾸 높아지고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높아지고 하나님이 아는 데까지 우리가 자꾸 높아지고 높아지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관심 두지 않는 빼먹고 있는 그런 지식을 오히려 그런 곳에 더 추궁하시고 그쪽으로 관심을 두는 거예요. 네가 추구하는 것과 내가 추구하는 거, 너희들의 추구하는 것 때문에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것을 아주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의미의 교란. 의미의 교란이라는 것은 일상적 사물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교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사슴이나, 새끼나, 이런 모든 이름이 그냥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더욱 인간 되게 발전시키려고 필요해서 붙이는 이름들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제직회 2/3로 할지 과반수로 할지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어떻게? 서로 원만한 관계 속에서 교회가 마이너스 아니고 플러스가 되기 위한 것이다. 양적으로 더 크기 위해서 우리는 제대로 합리적인 조치를 교회법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한다. 그런 자리에다 개 한 마리 풀어보세요. 개가 합리적입니까? 찬성하면 손 올리고 막 그러나요? 개는 전혀 합리적이 아니에요. 그래도 개는 계속 존재하고 숨 쉬고 살잖아요.
누구를 위한 합리고 누구를 위한 이성적 판단입니까? 실컷 이성적 판단해보세요. 지옥 가지. 뭘 눈치채야 하냐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반대 방향으로 가시면서 모든 인간들이 더 발전을 추구하는 그 의미가 교란되어 있다는 겁니다. 교란. 교란되어 있다는 말을 그냥 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요,
어떤 사람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인데 나이는 들었고 벌써 한 8번은 떨어졌어요. 주위에서는 그만두라고 하는데 별 할 일도 없고 배운 가락이 사법고시 준비하는 것밖에 없어서 그냥 하고 있어요. 시험 치는 날이 다가오는데 대구에 친구가 연락 와서 함을 좀 지라고 하네. 그래서 보통 같으면 내일 시험인데 서울서 대구까지 못가잖아요. 그런데 함 지려고 대구까지 갑니다. 기차가 천천히 가니까 그 당시 유행하는 선데이 서울 잡지 좀 보고 하다가 더 할 거 없어서 사법고시 준비하려고 잘 나오지도 않는 참고서 제일 뒤에 문제를 뒤적뒤적하다가 그냥 집중해서 본 거예요. ‘아, 이런 문제도 있었네’
이렇게 실컷 함만 지고 공부도 잘 못 하고 그렇게 그다음 날 시험을 치는데 그때는 옛날 과거시험처럼 앞쪽에 문제를 펼쳐서 공개하는 식인데 딱 보니까 세상에 함을 지러 가면서 보았던 마지막 문제가 탁 나온 거예요. 문제 공개하면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아, 끝났다. 어쩌냐’라는 한탄 소리가 나오는데 본인은 기분 좋아서 막 답을 썼더니 9번째 사법고시 합격한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검찰 총장까지 되고 지금 대통령도 되고.
그러면 그거 돼서 구원받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일으키는 이 의미, 주께서 하시는 예수님 중심의 의미를 누가 먼저 교란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모든 것을 교란시킨 거예요. 대구로 함을 지러 가는 거, 시험 보는 거, 모든 것이 사적으로는 자기의 진취적인 발전과 가문의 영광이고 진보했냐 성공했냐는 와글거리는 이런 잡소리가 우리로 하여금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라는 그 질문을, 그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우리가 생물학 전공해서 산 염소가 새끼 치는 것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 아닙니다. 그렇게 네가 정답을 내리는 이유가 뭐냐. 목적이 뭐냐. 의도가 뭐냐. 너는 개가 안 되려고 했고, 산 염소 안 되려고 했고, 암사슴 안 되려고 했고, 들나귀 안 되려고 했잖아. 너는 너 나름대로 꿈이 있잖아. 그 꿈이 너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아까도 기도 제목으로 드렸지만 사람에게 슬픔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냐 하면 내 것이 있다고 여기니까 그것이 떨어져 나가며 슬픈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의미에 내가 존재함으로써 출생함으로써 교란시키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물론 배후에서 그런 짓을 했지요. ‘너만 잘 되면 돼. 네가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라고 계속 이런 식으로 교회 가서도 세상 가서도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어요. ‘주여, 아홉 번째 되면 뭐합니까. 이게 천국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왜 못 합니까? 했으면 대통령 후보에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하면 뭐하노. 잘 됐다고 소고기나 사 먹겠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가 의미를 교란시키는 당사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인간을 산 염소나 암사슴 취급해주셔서 예수님 안에, 전진도 없고 퇴행도 없는 그 안에 가둬서 키워주시는 주님의 크심을 알 때 이게 바로 나중에 40장에 보면 욥이 그걸 알게 돼요. ‘제가 발전하는 게 아니고 제가 더욱더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객기 부리는 그 순간에도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라는 그 고백, 이것이 우리의 기쁨의 고백이 되고 우리 삶의 원칙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에게 의미가 돌아가야 할 것을 우리 선에서 차단시키고 말았습니다. 내 것이 더욱더 강화될 때 우리는 기뻐했고 잃어버리면 슬퍼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움을 주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주의 십자가의 완결성 재림의 약속,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게 해주시고 그것으로 최종 완료되었음을 받아들이는 약속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