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십자가와 자연

아빠와 함께 2022. 2. 28. 09:37

십자가와 자연 

2022년 2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38:31-33

(38:31)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38:32)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38:33)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지금 욥은 하나님하고 대화합니다. 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곧장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모르고 있는 것만 질문합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자신이 뭘 모르고 있는 것인지조차 본인이 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욥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신청한 것은 결코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도 있지만 아는 것은 확실히 옳게 알고 있음을 확정받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엉뚱합니다. 욥이라는 존재는 이 땅에 곧장 사라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사실이며 이 사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즉 기존의 욥과 하나님께서 영원히 같이 살 마음이 없는 겁니다.

하늘의 별은 분명 인간들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보여진 그 별에게 인간은 이름을 붙여 왔습니다. 묘성, 삼성, 열두 궁성, 북두성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인간에게 그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내가 무엇을 안다’는 것에 타당한 이유을 찾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별은 곧 인간이 별을 헤아린다든지 별이 이용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연을 바라보고 있고 그 자연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은 하나님에게는 ‘없는 자연’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이 없는 자연이라도 ‘자연’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원천을 이스라엘에게는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4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즉 모든 창조는 빛에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빛이 나타나면서 만물 속에 이 빛의 요소가 스며들게 된 겁니다.

빛이란 감마선, 알파선,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마이크로파 같은 전파선만을 두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 소리, 전기, 자기, 분자의 상호 운동까지를 포함한 개념입니다. 즉 빛이 없으면 물질도 없는 겁니다. 모든 물질은 이 빛에서부터 출발한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눈에 보이는 세계는 빛과 어두움으로 축소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5;7에 보면, 빛과 어두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더구나 이사야 45:18에 보면,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별의 움직임과 위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관찰과 경쟁하고 시비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으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사라졌음을 고려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별을 객관적 관찰과 탐구의 대상으로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별이나 새나 잡초까지 하나님의 인격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는 겁니다.

“묘성을 아느냐?” 정도가 아닙니다. “묘성이 다발로 모여 있음을 아느냐?”입니다. 세 별이 나란히 곁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삼성이 실은 아주 먼 거리로 풀어져있는 형편인 것을 아느냐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견해 차이를 부각하십니다. 북두성은 다른 별을 이끄는 별이 아니라 도리어 인도받는 별인 것을 아느냐라는 식으로 질문하십니다.

만약에 욥이 여기에 대해서 “저는 그 정도는 압니다”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별과 예수님이라는 인격적인 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느냐?”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은 그냥 객관적 탐사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인격적인 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련성을 욥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별들이 빛의 반사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빛 자체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창세기 1장에서 첫째 날에 태양이 만들어지지 않고 이미 빛이 있고 난 뒤에 네 째날에 가서 달과 태양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난감한 생각을 갖습니다. 더구나 셋째 날에 식물이 있고 그 다음 네 째날에 가야 태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아해합니다.

식물은 태양에서 오늘 빛에 대해서 내부 에너지 장치인 엽록소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태양이 없이 식물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는 태양보다 식물이 하루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놓고 과학과 논리적 합의를 도출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빛과 어두움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배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 9-10에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신약에 와서는 구체적 인물로 인간 세계에 나타났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이 이끄는대로 해서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별을 본 것이 아니라 빛을 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주의 중심은 우주 어느 쪽도 아니요 아예 중심이 없는 것도 아니라 이 지구가 됩니다. 이곳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왔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일어나려면 유대인들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신앙이 필요하고 그들이 이 신앙으로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여버려야 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로 하여금 별을 헤고, 각자 세상에 나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하는 일의 끝이 결코 하나님을 죽이는 식은 아니라는 것을 자부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모르면서 기어이 하나님을 살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3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은 안드로메다 있는 어떤 별은 지구로부터 870만광년으로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 측정이 넷째날 해와 달과 별이 생기면서 비로소 측정이 됨을 알지 못합니다. 그 전의 시간은 오늘날 단 하루의 시간에 해당되는 기간 안에 하늘께서 공중에 달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따라서 인간들이 그 안다는 지식과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그것이 곧 흑암입니다.

즉 인간을 배후에 조정한 악마는 어두움 속에 숨어버리고 남은 인간들은 별을 헤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으로서(요 1:5) 그 악마는 어두움에서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구원의 능력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흑암에 속한 그 인간에게 피해를 본 오직 십자가의 피뿐입니다.(고전 1:21-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오셔서 제대로 빛과 어두움이 최종적으로 나뉘어졌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4강-욥기 38장 31~33절(십자가와 자연)2202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31~33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지금 누구와 대화하느냐 하면 욥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욥을 상대로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그 차이점은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대화해버리면 욥은 자기 궁금한 것을 알고자 할 거예요. 궁금한 것을 내가 획득하고 알게 되면 나는 그만큼 나를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귀해지고 고귀해지기 때문에 갈수록 중량감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 수가 없어요. 아는 게 너무 많으니까 아깝잖아요.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상대로 욥기 전체를 하나님을 대화 상대로 끄집어내서 대화를 시도해서 자신의 질을 높이고 내가 타인보다, 친구보다 월등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태권도 시범에서 가장 우사스러운 일은 막 공중 날라서 찼는데 송판이 안 깨질 때 뭐 했는지 모르겠어요.

송판 안 깨지면 자기 발만 아프죠.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했으면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하나님 쪽에서 주셔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답변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욥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별을 집어넣습니다. 자연을 집어넣었죠. 자연을 집어넣으면 이 자연(nature)이라 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는 자연이 있는 게 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로 분해되느냐 하면 자연은 이사야 45장 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자연의 분류법인 ‘종ㆍ속ㆍ과ㆍ목ㆍ강ㆍ문ㆍ계’라는 이런 생물학적 분류법에 전혀 하나님은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연은 인간이 생각하는 생물체계에 나오는 자연이기에 하나님 쪽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쪽은 모든 것이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으로 나뉘어버려요. 달리 말해서 하나님 쪽에서 자연은 그냥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고 살아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 다 빼고 봐요. 하나님의 말씀 다 빼고 과학적인 객관적 사실로써 저것을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 속에 인간이 자연의 일 부로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포유류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죠. 포유류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를걸요. 그건 인간이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욥같은 경우에 나름대로 자연에 대해서 박식하고 다 안다고 생각하고 접근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연은 말씀이 포함된 자연이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집어넣은 자연 가지고 질문을 해버리니까 말씀이 빠져있는, 그러니까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있는 복음이 빠져있는 그런 별, 그런 해와 달, 그런 것으로 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별자리 가지고도 주님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해서 욥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한 자연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욥을 어디까지 몰고 가느냐면 “욥아, 네가 있나?” “네,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없어.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야. 네가 너 없애 줄게. 너 죽여줄게. 너 없어질 거야. 너 사라질 거야”라는 것까지 나가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죽으니까. 하나님께 따졌던 그 욥이라는 인간 날아가 버리죠.

이것은 에녹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본인이 생각한 엘리야, 즉 엘리야 생각하는 엘리야, 모세가 생각하는 모세, 에녹이 생각하는 에녹은 이 땅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베드로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원래 생각했던 복음과 관련된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자연 자체가 주님 안으로 모든 것이 집약될 수가 없죠. 여기 이사야 45장 12절에 보면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라고 하실 때 인간들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내가’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펴신 것이 아니라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차이를 모른다고요. 그러면 ‘예수님 만든 것이나 하나님 만든 것이나 두 분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이 만들었다 해도 그건 맞는 말이잖아요’라고 할 때 그것이 옳게 고백한 것으로 된다면 그러면 십자가는 어디서 찾아내는데요?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은 유대인이 주장했습니다.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주장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렸단 말이죠.

뭐가 없었어요? 십자가라는 언약 완성의 요소가 빠져있으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뭐 ‘빠라(bara)’라고 하면서, ‘빠라(bara)’가 히브리어로 ‘창조했다’라는 뜻이거든요, 그 창조를 믿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죽였어요. ‘빠라(bara)’같은 소리 하고 있네. 히브리어, 헬라어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다고요. 복음을 모독한다고요. 그게. 그 헬라어, 히브리어를 왜 합니까? 원어를 알게 되니까. 원어를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원어 몰라서 죽이는 것을 원어 알아서 더 죽이게 되는 거죠.

원어를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언어 연구한 사람이 그걸 몰라요. 욥이 탐구하고 욥이 더 알기 위해서 하나님 더 알려고 한 것이 죄라는 사실을 욥은 발견한 거예요. 나에게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하자가 없다고. 하나님은 두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에요. 욥 만들고 예수님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만들고 욥은 죽이고 예수 안에서 욥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친절해도 못 알아들으니 어찌합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을 이사야에서 빛과 어두움을 만드신다고 할 때 “나는 빛도 짓고”에서 예수님을 먼저 설정해야 빛이라는 것이 예수님과 관련해서 의미가 나타나고 어두움이라는 것도 그냥 깜깜한 것이 어두움이 아니고 예수님을 못 알아본 상황이 어두움이에요. 그리고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에서 예수님 모르는 것이 환난이 됩니다. 여호와가 주고, 주가 예수님 아닙니까. 신약에서.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를 사도행전에서 전부 다 ‘주’로 다 바꿔놓는 거예요. “여호와를 믿으라.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전부 주로 바뀌는 거예요. 그거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혼동해서가 아니라 몰랐던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래요. 그 계시가. 그걸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감춰진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비밀을 알게 하는 것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성령이 와야 그 비밀을 아는 겁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 속마음인데,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우면서 전 세계를 재해석하게 하시는 그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은 신학교 안 다니셨겠지만, 신학교 간 사람들을 통해 한 번 간접 경험해 보실 때 신학교의 모든 학문에 십자가와 관련 있는 것이 있는지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것도 십자가와 관련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공부를 한 교수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고 학교 다니면 공부한 신학생들도 자신을 의인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내가 신학교 가서 목사로 헌신하겠다는 이 생각 자체가 죄 덩어리인 것을 본인이 인정을 안 해요. 더 나아가서 내가 존재한다는 이 느낌 자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만 존재하지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죽었다’라고 했어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죠. 그러면 그리스도가 산다고 해야지 내가 산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걸 체중 재는 몸무게에 집어넣읍시다. 뭐 믿지도 않겠지만.

오늘 본문 욥기 38장을 보게 되면 묘성이 나오는데 묘성이 뭐냐 하면 우주에 쏘아 올린 우주 허블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에서 조사한 사실에 의하면 M45 자리에 있는 플레이아데스성단이 묘성이에요. 성경에서는 묘성인데 그 시대에 사람들이 표현하기를 묘성, 그러니까 욥 시대에 묘성이라고 했지만, 현대 천문학에서는 M45 자리(플레이아데스성단)입니다. 별이 몇 개 정도 있느냐 하면 200개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묘성을 매어 ‘떨기’라고 나오는데 떨기는 송이나 다발을 말합니다. 꽃들을 여러 개 모여 놓고 한 떨기, 두 떨기, 이렇게 세잖아요. “네가 별들이 한 송이 채로 있게 하겠느냐?”라고 지금 하나님이 묻는 겁니다. 떨기라는 것은 우리말로 하면 ‘알알이’라고 하죠. 별들이 알알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네가 그렇게 볼 줄 아느냐는 겁니다.

그다음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라고 나오는데 삼성전자나 반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삼성을 삼태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리온자리(사냥꾼 자리)에 가면 사냥꾼의 허리띠 부분에 별이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은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라고 하시는데 이 삼성의 띠가 우리 보기에는 같은 위치에 나란히 세 개씩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거리가 상호 떨어져 있어서 거리 시차적 착각으로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너희 인간들 보기에는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풀어져 있다는 뜻이에요.

그다음 32절에 보면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내겠느냐”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농사지으면서 유목민족이 농사 지으면서 유목 생활하기 때문에 맨날 보는 게 밤중에 별을 봐야 방향을 알 수 있어요. 방향을 보면서 그것 가지고 점치는데 어떻게 점을 치느냐 하면 낮에 태양이 지나간 자리를 황도라고 하는데 밤중에 그 황도의 길을 가는 그 별 무리에 별을 다 헤아릴 수가 없으니까 태양이 지나간 그 길 따라 별 하나씩 한 자리를 인간이 배정하는 거예요. 그래야 외우기가 쉬우니까.

그렇게 배정을 하는데 거기에 날짜를 정합니다. 예를 들어 3월 20일부터 4월 19일까지 태어난 사람은 그 황도(태양이 지나간 자리)에서 양자리가 되고 그다음에 4월 20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황소자리, 그다음이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저울)자리, 전갈자리, 사수(활 쏘는 사람)자리, 염소자리, 물병자리, 물고기자리, 이렇게 12개를 일 년의 기간에 배정해놨어요.

그렇게 한 달씩 배정해놓고 그렇게 해놓은 이유가 점을 치는 거예요. 오늘의 운세를 치는 거예요. 2022년도 4월 20일~5월 20일 사이에 생일을 가진 사람은 황소자리에 점을 어떻게 치느냐 하면 ‘님아 당신의 의지하는 마음이 금성이 2022년이 시작되면서 당신에게 돌아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어요.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마음이 괴롭더라도 마음의 기를 모아 차분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의 별자리의 운세로 안정감을 찾을 겁니다’

이게 바로 여성 잡지나 신문이나 경제신문 이런 데 나오는데, 옛날에 다방에 가서 동전 넣어서 뽑고 하는 그런 거, 이런 거를 심심해서 한다고 하는데 심심하다고 이걸 왜 봅니까. 심심하면 이재명이나 윤석렬 이야기하는 거나 보든가 하지. 이런 걸 왜 봅니까. 보는 이유가 내가 나의 미래를 점치고 싶은 겁니다. 뭘 하면서? 열두 개 별자리를 보면서. 결혼 앞두고도 별자리 보고. 이건 동서양 구분 없이 전부 다 하는 거예요.

별이 움직이는 것은 배후에 신이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이 움직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별을 그렇게 하나님이 움직이게 하시는 이유는 내 장래와 장래의 액운을 미리 알아서 대처하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변화를 주셨다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또 빠져버렸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죽게 된다는 그 사실이 또 빠져버렸어요.

그다음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이 북두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천문학에 의하면 카시오페이아자리와 작은곰자리와 큰곰자리(북두칠성)가 한 자리에 만나는 그 중심 로터리에 북극성이 있어서 옛날 나침반 없을 때 유목민족이나 항해하는 사람들이 북극성 보면서 방향을 정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북극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속한 별들을 인도한다고 나오는 거죠. 누가 잡아당기는 것이 있단 말이죠. 북극성이 북두칠성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북극성이 작은곰자리의 꼬리 자리에 있기에 작은곰자리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사실을 네가 아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하면서 욥이 모르는 것만 골라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방법입니다. 왜 모르는 것을 해야 하느냐면 그래야 모르기 때문에 그동안 했던 짓들이 얼마나 죄고 엉터리고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는가를 그 한계를 알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인 욥과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어떻게 이야기하시는가.

자연을 이렇게 함축합니다. 모든 자연을 처음 자리로 돌려버려요. 처음 자리로 돌려버리면 그건 창세기 1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처음부터 어둠이 있었고 흑암 있었고 물이 있었고 하나님의 신은 물 위에 운행하시고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리고 4절에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나옵니다.

이걸 하나님의 택한 백성한테는 이걸 알려줘요. 모든 자연은 처음부터 이렇게 펼쳐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기 26장 7~8절에 보면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서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으로 창조하시고 공 안쪽 표면에 별을 달아놨어요.

별을 달아놓고 그 공같은 지구를 허공에 달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금의 천문학에서 이야기한 우주의 137억 년 역사에서 대칭성이 있었는데 그 대칭성이 깨지면서 새로운 대칭성이 발생하면서 그다음에 입자(quark)가 나타납니다. 모든 물리학은 대칭성입니다. 이 대칭성이 깨지면서 의외의 여분의 요소가 물질로 변해서 그 물질 변한 것이 뭐냐 하면 최소입자입니다.

이렇게 플러스( +)와 마이너스(-)가 서로 상쇄되어야 하는데 한 개가 남아돌면 물질이 된다는 겁니다. 실수한 거죠.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보지 않고 처음부터 빛이 있었고 빛이 어두움과 나뉘었으면 그 빛에 의해서 지구가 생기고 별은 언제 생기느냐. 별은 네 번째 날에 별이 생겨요. 순서가 좀 이상하죠. 창세기 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그러니까 태양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고 빛이 먼저 있고 빛의 반사체로 또는 매개체로써 태양이 나중에 있는 겁니다. 빛이 먼저 있고. 그러니까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구 중심이에요. 빛이 있었고 지구가 빛과 어두움, 그다음에 하늘의 물과 땅의 물, 그다음에 땅에서 식물이 생기거든요. 식물이 셋째 날 생기거든요. 넷째 날은 태양이 생기고. 그런데 지금의 생물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식물은 태양이 없으면 광합성이 안되기 때문에 식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요.

그리고 안드로메다자리에서는 빛이 지구까지 오는 데 850만 광년이 걸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며칠만이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하루 만에 다 만들었다고 나와요. 850년까지 올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 세 번째 날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거예요. 세 번째 날부터. 지금의 시간은 태양과 별에 준해서 오늘날의 시간이 진행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4~1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오늘날 시간이 셋째 날부터 시작했고 첫째 날과 둘째 날 시간은 지금의 시간이 아니란 말이죠. 사람들이 말하기를 “목사님, 지금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지금 과학을 믿고 있는 나 자신이 분명히 그 과학 자체는 치밀한 논리가 하등 오류가 없도록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서 실측과 실측, 측정과 측정을 통해 완벽하게 완벽하게 증명되어야 그다음 논리로 넘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끼어들어서 이건 오류라고 하면 대번에 폐기 처분됩니다. 과학 논문에서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뭐냐 하면 하나님 죽여버리는 거예요.

왜 과학적이지 않냐고 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네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그 본성이란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내용은요, 1장대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말씀대로 인간이 믿든 안 믿든 창세기 1장대로 밀어붙인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게 믿음이에요.

욥이 하나님을 만나서 경험한 것이 그거예요. 욥기 40장을 미리 읽어볼까요? 1절부터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라고 하니 욥이 3절부터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그러니까 손으로 입을 가리면 됩니다. 과학 따지지 말고, 상대성 원리, 뉴턴의 원리 따지지 말고, 그냥 생물학 하지 말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달랐음을 알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합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이 범죄 하고 죄악 된 인간이 아니기를 원하는 마음을 다 쏟아내게 만들어요.

해라~다 해. 그냥 별 헤아려. 별 이름도 다 지어. 그리고 과학 발달 더 시켜. 진화론이랑 창조론이랑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하고 난 뒤에 직접 하나님 만날 때,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 딱 섰을 때, ‘안다는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라고 그 이야기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융통성 하나도 없는 그 천사가 ‘이 사람 마음속에 피가 있네’라고 하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는데 피가 있네. 내가 그 피 앞에서 죄인이라는 마음이 들어있네. 이러면서 넘어가! 넘어가! 피를 보고 넘어가죠.

창세기 1장부터가 십자가 이야기되는 겁니다. 이거 누가 만들었는지 호기심으로 궁금해서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예요.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나오죠.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어? 아니 말씀이 있었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한 분이 아니고 두 분이야? 이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두 분인데 네가 하나 죽였잖아. 왜 한 분이어야 하는데 두 분이야? 그냥 하나 죽이자. 그래 죽였다. 그런데 죽였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요? 빛과 어두움이 신약에 가면 그 어두움이 어두움이 아니에요. 악마가 그 안에 숨어버린 어두움입니다.

인간은 숨지 못하고 악마는 숨어버리고. 요 얍삽한 악마가 자기는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라고 해서 인간의 눈을 밝게 만들어 놓고 인간의 밝은 눈 안에서 악마는 보이지 않는 악마로서 숨어버렸어요. 그런데 그거 주님에게 다 들켜. 내가 어두움을 지었거든. 주님이 “나와, 나와~”라고 하면 인간이 “주님, 저 말입니까?”라고 하죠. “너 말고 너의 배후에 귀신, 너 나와. 악마 나와!”

악마가 어두움 속에서 기어 나오죠.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렇고 모든 자연이 예수님 오셔서 빛과 어두움으로 결정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공중에 매단 이 지구와 모든 별들은 자기의 드라마가 끝났어요. 드라마 끝났는데 뭐 드라마 작가랑 무대장치 있을 필요 없잖아요. 그걸 중국산 라이터를 불로 다 싸질러 버려요. 끝났으니까. 주인공이 드러났으니까.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전에는 물로 심판하듯이 지금은 불로 다 태워버립니다. 예수그리스도 나타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데 그 헌 땅 가지고 코로나 연구 많이 하고 백신 많이 만들라고 해요.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 땅에서 예술 하고 어떤 사람은 문학 하고 어떤 사람은 신학, 어떤 사람은 농업, 어떤 사람은 회사 사장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 거든요. 어떤 사람은 도둑질해야 하면 하는데 하면서 나의 한계가 도대체 나는 나의 잘난 척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어디를 가도 거기는 어둠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악마가 갑질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그러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철학 하면서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볼 수 있도록 별을 만들었고 인간은 별을 연구했고 그 별 연구한 결과가 결국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던 하나의 이성적 횡포로 이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그 별을 연구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그 연구가 진짜 진리로 통하는 연구가 있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 때만 하는 마태복음 2장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리고 2장 9~10절에 보면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별이라는 이 자연, 이 개체는 그리스도가 당길 때 언제든지 당겨짐을 당해야 할 대상이었던 겁니다. 별은 인간의 헤아림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조종 대상이에요. 주께서 자기 일을 증거 하고 자기 일을 알리기 위해서 별을 당겼다면 들에 있는 들풀이나 참새도 전부 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면 진짜 하나님이 그 나라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예수님과 내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속에 육신으로 있다가 바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네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무식하고 선악과 따먹었으니 못 빠져나오죠. 그 무식한 악마의 지혜안에 갇혀있는 거, 그게 지혜가 아니라 진짜 지혜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가, 그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사도바울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할 거 없습니다. 십자가 피로 우리는 다 죄인이라는 그 이야기를 아주 기쁨으로 전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연구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진리, 아무리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예술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한계성, 답변도 없고 진리도 없고 아는 게 전혀 없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 인간 세계에서 홀로 오셔서 죽으신 그 십자가가 비로소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빛이고 빛의 문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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