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인간세상은 없다

아빠와 함께 2022. 4. 3. 21:07

인간 세상은 없다 

2022년 4월 3일             본문 말씀: 욥기 39:13-18

(39:13)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39: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39: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39:16)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39:17)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39:18)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오늘 본문은 타조와 말과 매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이 짐승을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피조물이다. 이 짐승들의 지혜 여부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묻습니다. “과연 이들 짐승이 욥(인간) 보기에 과연 지혜있다고 보느냐 아니면 지혜없다고 보느냐”는 겁니다. 이런 물음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타자의 자기 알 방치는 인간들 보기에 분명 무정하고 냉혹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무정한 타조를 왜 하나님께서 기르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도 인간과 가까이지내지만 그 말의 용맹함은 인간의 용맹을 능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독수리)가 산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또한 높은 곳에 먹이감을 발견하는 것도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대적 우월함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지혜 안에 갇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 획득했다고 자부하는 선악 지혜로 땅에서 인공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물들의 양산은 결국 ‘인간 세상’을 형성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기에 ‘인간세상’을 하나님께서 청소해버립니다.

가차없이 없애버립니다. 없어져야 할 세상을 사람들은 마치 영원할 것같이 여기면서 이 인간세상 건설에 매진합니다. 그 안에서 모아지는 지혜는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분노를 취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연의 생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우월함을 자랑하지만 그들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들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것과 인간이 지상에서 만들어낸 것과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자기 지혜로 본인을 계속 살려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나 타조나 말이나 매를 살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영원토록 살려내려 합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것에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려 하시려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말고 제3의 인물이 따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잠언 8:22-26에서는 이 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더구나 이 지혜라는 분은 사망과 생명을 결정짓는데 유일한 기준이 되십니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36) 즉 이 지혜가 있으면 영생이요 이 지혜가 없으면 저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 들어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선악지혜 밖에 계신 생명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 창조 전에 원래 계획하셨던 주님의 지혜의 가동이 됩니다. 마태복음 10:26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복음을 전한 취지가 나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도 없는 창세 전의 지혜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제공되고 그 지혜를 제자들이 전하게 됩니다. 이 ‘알 수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비극이 발생됩니다. 즉 인간들은 왜 자신들의 지혜로 알 수 있는 영역밖의 내용을 전하느냐고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살해버린 사건말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몸은 분해가 됩니다. 주물공장에서 쇳물로 집어넣어 무쇠솥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하면 먼저 주형틀(거푸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조형틀을 만드시고 거기에다 예수님의 자신의 지혜를 그 안에 내용물로 집어넣으면, ‘예수님의 지혜’로 새로 생겨난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집어넣어 그들도 예수님 계신 곳에 오게 만드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희생되어야만 합니다. 즉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악지혜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희생당하셔야 합니다. 그 희생당하시면 나온 살과 피가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작됩니다.

예수님을 희생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식은 마태복음 9:11-12로 표현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즉 인간들은 의사를 필요로하지 않으면서 의사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의사가 필요한지 아니한지 본인들의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끝까지 자기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목숨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창세 전의 지혜’를 살려내려고 하십니다. 이것으로 인해 새로운 지혜가 들어오게 된 자는 계속해서 세상 사람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세상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 세상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큰 일이라고 한 줄로 압니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태초의 지혜와 교환되어야만 살 수 있는 목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친히 기르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7-29) 즉 주님의 지혜로 기르심을 받는 것들은 더는 자기 목숨에 미련두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지혜로 만든 세상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할 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게 보는 겁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이 고귀한 일에 자부심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9강-욥기 39장 13~18절(인간세상은 없다)22040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9장 13~18절입니다. 구약성경 800페이지입니다.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욥이죠, 인간과 대화하십니다. 대화하실 때 인간이 알고 있다는 선과 악, 그 한계지점, 문제점을 하나님께서 들짐승을 가지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13절에 타조 나오고 19절에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6절에는 매(새종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짐승의 특징은 욥이 가지고 있는 선악 체제로 볼 때 과연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지혜롭지 않다고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 짐승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그 짐승보다 얼마나 뛰어나고 지혜로운가를 의젓해 하면서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인간 말고 외부의 짐승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찮게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선악 체제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멀쩡한 지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인해 인간들의 문제점은 주위의 어떤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요. 비록 남들이 무슨 말 하게 되면 자기 안에서 자기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것 자체가 선악 지혜의 한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거든요. 이상하지요. 선과 악을 아는 것이 무슨 죽을 일이고 나쁜 짓이라는 겁니까? 따먹은 것은 나쁜 짓인데 선과 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같이 일할 수 있는 공통의 인식을 갖는 건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공통의 인식을 갖지 못하게 그렇게 인간보고 따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사이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계셔서 그렇습니다. 한 분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6절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복음 전도의 취지에 대해서 언급하신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너희에게 전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울 종로학원에서 배우는 그런 거 말고요, 에듀윌에서 배우는 공무원 시험 말고, 중개사 시험 나오는 출제범위 말고, 수능시험 나오는 거 말고, 감추어진 거, 인간이 안다는 것으로 인하여 감추어진 거,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의구심을 갖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우기는 그것으로 인해 감춰진 것,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준 그것을 받은 너희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숨은 것을 발견하게 하시는 이러한 특별한 일에 대해서 너희들은 세상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란 말이죠. 그것을 나중에 고린도전서 편지에 보면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지혜인데 앞에 뭔가 붙어요.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지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창세 전부터. 그러니까 이건 시험에 안 나오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시험, 뭐 중간고사, 사법고시, 이런 모든 시험은 오직 목적이 뭐냐 하면 인간은 지혜롭다는 것을 찬양하기 위함이에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들은 오직 인간 세상이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갖가지 지혜들을 발굴하려고 그런 노력하는 겁니다. 그런데 잠언서 8장에 보면 인간의 세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지금 인간의 세계라는 것은 생겨나지 말아야 할 나라예요. 인간 세상인 이 세계는 생겨나지 말아야 해요. 없어져야 해요.

하나님의 일의 기본이 뭐냐, 청소하는 거예요. 저는 사람들 잘 모를 때, 그럴 때 그 사람의 자질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면 저는 일단 청소를 하느냐로 봅니다. 자기 집구석 혼자 있을 때 청소하는 그런 거 말고, 여럿이 있을 때 청소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를 봅니다. 청소가 제일 안 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 자기 몸의 청소를 안 해요. 술 담배 하는 사람.

너무 율법적이 아니냐는 생각에 겁이 살짝 나는데 사람마다 사는 환경이 달랐고 술 담배가 나쁜지도 모르고 살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는 무리한 말이 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에게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이야기 아니고 주님은 일단은 이 세상을 청소합니다. 불로써 다 태워버려요. 왜냐 하면 진작 없애야 할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뭘 대비시켰느냐 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키우시는 것들과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들과 강하게 대비시킵니다. 인간들이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죠. 어떤 자기의 기술, 손재주, 지혜를 집어넣어서 물건을 만듭니다. 물건 하나하나에 인간을 찬미할 만한 재주 덩어리가 그 안에 다 담겨있어요.

그래서 만약에 내가 만든 물건을 하나님께서 그 킹콩같은 엄청난 발바닥으로 밟아버리면 사람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끼죠. ‘내가 애써 만들었는데 왜 뭉갭니까?’라고. 그래서 생긴 현상이 바로 하나님의 희생하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시고 기르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타조나 말이나 독수리는 인간 입장에서 지혜 없는 거예요. 39장 마지막까지 다 할 건데요, 인간 보기에 지혜 없어 보이는 것이 세 개 나오지요.

여기 16절에 타조는 인간들 보기에 무정한 사람, 무정한 부모가 되는 거예요. 냉정하고 어리석고 정이 하나도 없는 거죠. 왜냐 하면 자기가 알을 나았으면 좀 보호를 해야 할 텐데 보호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버려요. 16절에 보면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라고 하시며 욥에게 물으시는 겁니다. “인간아, 욥아, 너희들 보기에 이게 지혜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욥이 그건 지혜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겠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18절에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그렇게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조차도 타조는 무시해버리고 자유롭게 말처럼 달려버린다는 겁니다. 자, 인간아, 타조가 지혜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인간이 지혜 있다고 판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는 범위 내에서만 지혜 있고 그 밖에 나와서는 인간의 선악 체계로 적용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지요. 잠언서 8장 22~2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의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들은 말하죠. ‘그럼 어쩌라고?’ 여기 지혜라는 분이 등장해서 최초의 지혜가 등장해서 지혜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할 때 인간은 여기 잠언서 8장에 대해서 ‘우리가 뭐 어쩌라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세계는 없다는 겁니다. 이 지혜의 세상, 그러니까 선악 체제 이전에, 이미 선악과 이전부터 계셨던 그분의 세상만 하나님이 인정하는 세상이고 나머지는 싹 다 없애버립니다. 사랑의 재개발처럼 싹 다 엎어버리고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너의 지혜로 이걸 수긍할 수 있느냐, 흔쾌히 용납되느냐고. 할 말이 없지요. 벌벌 떨면서 ‘용납해야지요...’라고 하면 주님은 “그럼, 내일 죽여버린다. 네가 굶어 죽는다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영상을 보게 되면 나이 60쯤 되는 아주머니가 길을 걷는데 갑자기 저쪽 건물에 폭탄이 떨어지니까 깜짝 놀라는 장면이 영상에 나와요.

인간의 뒷배경, 인간을 차지하는 모든 배경, 꽃피고 목련 피는 이 배경, 여기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꽃구경하고 계십니까? 이게 우리의 지혜입니까? 우리 세계가 없는데요. 따라서 그 땅에는 우리 세계가 없는데 인간의 선악 한계로 자꾸 뭘 만들어요. 자꾸 비행기 만들고, 초고속 미사일 만들고, 수소 자동차 만들고, 자꾸 뭘 만들어요. 그렇게 만든 것을 건사하기 위해서 그다음 또 뭘 만드느냐 하면 법을 만들어요.

생명보험이나 뭐 청와대 하지 말고 옮기는 거나 이렇게 있음을 내가 계속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계속 법을 만든다고요. 그 법을 만드니 뭐 합니까? 그 법을 만들고 또 돈 좀 번다고 연봉 킹(King)이 누구냐를 찾고 작년 연봉 킹(King)은 게임 회사와 엔터테인먼트 대표들이다. 이런 거 하면 뭐합니까? 불로써 청소되는데. 그게 지혜가 아니거든요. 돈 벌었다고 뭐합니까.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 먹겠죠. 소고기 사 먹으면 뭐합니까? 소고기 먹고 힘내서 또 돈 벌어서 소고기 사 먹겠죠. 결국은 소고기 사 먹다가 지옥 가는 거죠.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이겁니다. 주형틀(거푸집)을 만들어요. 이 땅에 태초에 있었던 지혜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잠언서 8장 36절에 나옵니다.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그런데 35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 세상에 생명이 없다는 거예요. 태초에 지혜 가지신 이 인격적인 분, 이 인격적인 분이 오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고 나를 잃는 자는 곧 영원한 저주를 사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어요. 태초에 생명과 생명도 아니면서 목숨 쥐고 있으면서 이 목숨과 생명을 바꿔치기하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 실시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일단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지혜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지혜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지혜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기껏 인간이 지혜를 발동해 봤자 주님의 세계에 합치하지 못하고 이 세계를 자기 세계화하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그게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은 모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데 누가복음 3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 먼저 세례요한을 보내시는데 이렇게 일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3장 5절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라고 나오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소위 높다고 여기는 거, 출세했다고 여기는 것은 다 다시 내려앉고 없다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도 다시 돋워지고 인간끼리는 좀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자고 가난하고 하지만 드론을 띄워서 위에서 보면 그 높이가 그 높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높은 봉우리, 봉우리 하는데 이게 얼마나 한탄스러웠으면 김민기라는 사람의 노래에 ‘봉우리’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봉우리가 뭐냐 하면 뒷산에 봉우리가 있었는데 어릴 때는 그 봉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그 봉우리에 올라가 보니까 내가 올라간 봉우리보다 더 큰 봉우리가 있었다. 그런데 더 인생을 살고 보니까 어느 봉우리든 지금 내가 있는 봉우리가 가장 좋은 봉우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김민기라는 가수가 그렇게 말합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모든 인간을 균등화시킵니다. 잘나고 못나고 이런 것이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 지혜는 잘난 지혜든 못난 지혜든 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용납하지 않는 지혜가 되는 겁니다. 일단 세례요한이 와서 이걸 평정해버려요. 평정하면 그 뒤에 누가 오시냐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자기 지혜를 집어넣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서 영원히 예수님 나라에 함께 살게 할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주물공장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에요. 주형틀, 보통 거푸집이라고 하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틀을 만드는데 예수님 본인이 주형틀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살과 피를 저쪽의 주형틀에 전부 다 그 정보를 이동시키는 거예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고 이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주형 안에 내용이 뭐냐. 사람의 엉터리 같은 지혜로 인해 인간은 이렇게 지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 예수님 희생의 주형틀에서 희생을 아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고린도전서 1장 20~24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0절부터 보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지혜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희생당했습니다. 이 지혜, 욥아, 이 지혜가 너에게 있느냐.

이 선악과 따먹은 잘난 너야, 그 잘난 너를 스스로 포기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없지요. 그 지혜 때문에 인간은 잘났다고 자부하는데요. 그 지혜를 어떻게 포기합니까. 공부 정말 잘하는데 ‘나 대학 안 갈래’라는 소리와 같거든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한 수모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이 말이 굉장히 심오한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의사를 필요치 않는 자들이 의사를 보여달래요. 뭐 의사하고 바둑둘 일 있습니까? 의사와 농담하려고요? 절대로 나는 안 아프다고 우기면서 의사는 기본적으로 내가 한번 만나서 좋은 의사인지 나쁜 의사인지 내가 판정내리겠다고 우긴 것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던 거예요. 오늘날 ‘예수? 예수를 나에게 보여줘. 믿을지 안 믿을지 내가 결정할 게’라는 이것이 인간의 자기 지혜의 가동이고 작동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욥에 의하면 욥기에 의하면 인간에게 타조, 말, 독수리, 이들 모두 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친히 기르시는 거예요. 참새를 친히 기르시는 거예요. 그리고 들풀도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는 말씀인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갑자기 누구 생각나네요.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사람. 브로치를 위해서 염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동원해도 들에 핀 백합화의 수준까지 들어갈 수가 없어요. 누가 그렇게 백합화를 만드느냐.

시편 104편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신이 했다고 나와 있어요. 거기에 16절부터 보면 레바논 백향목 이야기 나오고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이고 높은 산들이 산양을 위하며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이고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고 해는 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쭉 나오는데 거기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104편 28~29절에 보면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영이 뭐냐 하면 주의 영이에요. 이 주가 누구냐 하면 창세 전에 이 세상에 기초가 되었던 그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들은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지금껏 계속 길러져 왔어요. 그런데 거기서 인간만 빠져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지혜로 오셔서 마치 참새가 아무것도 안 해도 길러지고 백합이 아무것도 안 해도 아름답게 피는 것처럼 너라는 인간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내가, 내 자체가, 나의 희생이 지혜가 되어서 너를 다시 새처럼, 그리고 들꽃처럼, 내가 다시 만들어 기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기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선악에 갇혀있는 이 지혜를 선악 안에서 선악 바깥으로 뽑아내 가지고 생명나무까지 먹이시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갈 재주가 없고요, 생명 되시는 주님께서 선악과로 잘난 체하는 인간들로부터 희생당해야 비로소 우리는 그 희생으로 함께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 지혜를 새롭게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까 시편 104편에 말씀처럼 그냥 살다 죽는 거예요. 더 살려고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살게 하시면 살다가 주께서 손을 펴서 취하면 다시 죽어버리고 거기서 호흡을 취한 즉 저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참새 입장에서나 타조 입장에서 전혀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만 손해라고 여기는 이 지혜, 엉터리같은 이 지혜, 이게 잘못된 거죠. 사는 게 뭐 벼슬입니까. 주께서는 복음이 살아있기를 원하지 내가 살아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 안 나오면 너도 죽어. 복음도 안 나오는데 네가 왜 살아있어. 네가 건방지게 강단에 왜 섰어.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 선악을 뽑아내요. 나는 착하다, 훌륭하다, 윤리적이다, 이런 거 다 뽑아내 버리고 ‘너의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 때문에 내가 죽었다’라는 것을 주께서 자꾸 집어넣습니다. 끝으로 왜 인간이 이렇게 잘못되었는지 그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일본의 어떤 여자분이 의사와 결혼을 했는데, 선보고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빨리 결혼을 했는데, 신속히 이혼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사귀던 의사가 코로나 한창일 때여서 마스크를 쓰고 나왔거든요. 선보는 자리에. 그리고 평소에 일할 때도 마스크를 썼단 말이죠. 그런데 결혼하고 집에서 마스크 없이 만났는데 입술과 아랫부분이 윗부분과 조화가 안 돼서 흉하게 보여서 속히 이혼했어요. 그런 이유로 심리학자들이 조사를 해보니 마스크를 쓰면 마스크로 인해 안 보이는 다른 부분 가지고 내가 과장된 착각을 하게 된답니다.

아래는 없는 것으로 치고 보이는 코와 눈과 귀를 조합해서 미남일 것이라고 과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든 거예요. 내 목숨이 있으니 천하에 내 목숨이 제일 귀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우리의 악마적 두뇌에 착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지혜 앞에 그런 지혜들은 아무짝에 소용없고요, 이미 네가 죄인이고 네가 헛된 지혜를 갖고 있다고 알려주는 지혜, 그 지혜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나라, 그것만 있어야 할 나라에 꼭 필요한 지혜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만물은 주님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은 남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이렇게 지독하게 듣지 않는 우리,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돈 정리  (0) 2022.04.18
내 것 없음  (0) 2022.04.10
만남이 곧 실패  (0) 2022.03.28
의미의 교란  (0) 2022.03.20
열쇠  (0) 2022.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