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내 것 없음

아빠와 함께 2022. 4. 10. 22:36

내 것 없음 

2022년 4월 10일             본문 말씀: 40:1-5 

(40: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40: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0: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

(40:5)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인간의 죄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진해서 찾아오셔서 대화를 하시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죄를 발굴하기 위함입니다. 그 방식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방대한 빅테이터 속에서 나온 겁니다. 엄청난 양의 정보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질문 위치조차 너무나도 일방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자신을 의인에 해당된다고 자부했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신중하고 엄밀한 시선을 보냅니다. 하지만 욥은 자기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시선을 알지 못합니다. 욥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죄였던 겁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욥의 동작을 멈추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욥은 자기가 쏘아댄 시선에 머물러 있었고 그 끝자락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욥의 자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툰다’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과는 다투십니다. 욥의 어떤 점이 예수님과 차이나게 할까요?

욥에게는 자기 바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바탕이 확보되면 그것을 키우고 확장하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확실한 지식이 확보되었다고 여기면 그것을 기초로 해서 진리값을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하나님과 다툼이 됩니다. 당연히 이 다툼에서 욥은 무식한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 것만큼의 정보량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계속 밀어붙일 고집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과연 욥의 바탕은 무엇일가요? 그것은 바로 죄였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죄인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이 원리는 신약에 완성되는 원리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he hath made him to be sin for us, who knew no sin; that we might be mad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여기에 ‘죄를 삼으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인간은 자신의 것을 확정하려고 합니다. 가정이 바로 그런 활동을 곳입니다.

‘나의 번식’을 도모하는 곳입니다. 인간 모든 육의 활동은 번식에 있습니다. 나를 닮은 나의 복제물의 양산입니다. 나의 육신적 모습 뿐만 아닙니다. 나의 사상과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물러받는 그런 자식이 되어서 단절됨이 나의 영속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나를 희생해서 나를 건지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너’라고 표현되는 ‘나’와 상대하는 바가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제 3의 요소를 발생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를 죄답게 삼으시는 작업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기에, 의인으로 자처한 자를 도리어 죄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욥은 더는 자기 바탕을 상실합니다. 자기 시선을 머물 곳에 갖지 못합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시선이 오는 것에 시선을 모읍니다. 자기에게 관심두지 않고 하나님의 질문과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빅 데 어터(거대한 정보양)에 준해서 발생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게 됩니다.

즉 나를 미처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적합하다고 여겨서 일어나는 그 일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압니다. 그렇게 선물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죄 없으신 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죄 삼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찾아오기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완벽한 삶을 구상하고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쏠리게 되고, 날이갈수록 자기 것만 증강하게 됩니다. 자신의 움직임과 활동에 스스로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 무(無)로 취급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구원받는 자로 하여금 ‘나의 것이 없음’을 경유하도록 함이 나타납니다. 탕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드이어 이 둘 째 아들은 ‘나의 것’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상을 몰랐습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빅 데이터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모든 돈을 다 잃었습니다. 더는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빈 손으로 그는 아버지 집을 찾아오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바랐던 바가 이것입니다. 더 키울 나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 그 전에 있었던 모든 것도 다 아버지의 것이었던 겁니다.

탕자도 이점을 잘 압니다. 아버지로부터 혜택을 입고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또다시 나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로 인해 아버지에게 피해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입니다. 그는 직장 생활을 제대로 못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퇴직후 생활을 대비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행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자기 것은 하나도 없고 다 남의 것입니다. 세 번째 예로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와 부자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차이점은, 부자에게는 자기 것이 있었고 거지에게는 자신의 것을 일체 없습니다. 특히 부자에게는 아직 죽지 않는 동생 5명이 있습니다. 이 동생들의 장래까지 걱정이 되어서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까지 다시 인간 세상에 돌려보내어 인간들의 지상 생활이 다가 아님을 알려주고 형님이 온 이 지옥불에 안 들어오도록 해줄 수 있느냐고 제안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거부합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의 지향점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거지 나사로를 흉내내어 무소유로 산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는 것 자체가 선물인 것을 아는 것이 큰 행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주목하지 말고 선물이 주시고 은혜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0강-욥기 40장 1~5절(내 것 없음)2204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0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80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 질문의 범벅 속으로 지금 욥이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것은 다투는 거, 싸움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 자신의 공간, 자신의 공간은 하나님과 싸움이 되는 공간이 된다는 것을 인간들은 감히 상상도 못 했죠. 그리고 주님의 공간은 따로 있었고 그 둘 사이에 하나님이 찾아올 때 질문형식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빅데이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정보의 양, 그 양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특징을 보게 되면 4절에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시선이 왔을 때 우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 답변하라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움직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움직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참 바쁩니다. 우리가 바쁜 이유는 남들이 같이 바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화점에서 한정품 나왔을 때 천천히 문 열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없습니다. 아침 11시 문 열자마자 유리창이 깨지든 말든 마구 달려가죠. “로렉스(시계브랜드) 200개 나왔습니다”라는 이런 말 듣게 되면 머리 터집니다. 그 경우가 우리 일상이 되고 말았어요. 모든 경우가 그래요. 어디 좋은 아파트 나왔다고 한다든지, 수성구 개발했다고 하는 그런 전화들도 많이 오잖아요.

모든 것이 내가 움직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찾고자 합니다. 이게 왜 문제냐. 우리가 시선을 나의 공간을 확보하고 키우기 위해서 시선을 거기에 두거든요. 그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그것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고 주께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주께서 그냥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에 의해서 막강한 정보량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지금 너의 그 계획이 네 뜻대로 성사된다고 믿고 있냐?”라는 식으로 질문하시는 거예요. 답변은 욥기 오늘 본문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저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움직임 멈추겠습니다. 그저 주님이 주는 시선 쪽으로 얼굴을 돌리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부부죠. 얼굴을 맞대는 거요. 서로 얼굴을 보고 시선을 주고받는 관계가 한 몸 관계 아닙니까? 하나님과 하나 된 관계.

지금 욥은 자기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가 6절에 나오는데,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폭풍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작은 소리, 나의 큰 소리, 이런 것들이 다 먹히도록 만들어요. 내가 하는 소리가 폭풍 소리를 전혀 뚫지 못해요. 강력한 빗소리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질문은 우리 모든 바탕을 없애버립니다. 우리 모든 삶의 공간을, 우리 바탕 자체가 아무것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바탕으로 삭제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의 시선과 주님의 지시, 주님의 질문, 주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 코앞에 있는 모든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할게’하고 그것을 하게 되면 그건 예상하는 것이 되지만 ‘주께서 이런 일을 주셨습니까?’라고 되면 그건 선물이 되지요.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알기에 새삼 언급하는 것조차도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씀인데 한 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보면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나오는데 백합화를 봅니다. 방금 설교한 것을 적용시켜보면 우리 시선이 백합화로 가 있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백합이 스스로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자기에게 가미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경북여고 생각나는데 교화가 백합이거든요. 교훈은 진선미. 좋은 건 다 갖다 붙여놨네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 그러니까 실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29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나는 백합 말고 인위적이고 인조 적인 거, 인공적인 거를 주께서 언제 달라고 했느냐는 거죠. 그저 백합만 같아라. 다시 말해서 아름다워라 하는 말이 아니고 어떤 너의 수고와 애씀을 다 삭제시킨 인생이 되어라. 그러면 너의 인생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 빅데이터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들에 백합화를 피도록 능력을 발휘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을 죄인 만들기 위한 겁니다. 인간들을 죄인 만들려는 이유가 있어요.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인간의 육은 동질성에서 동질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기 번식에 있다고. 자기 번식이 자기 복제예요. 육에서 육을 복제하고 번식하는 거뿐입니다. 아이에게 ‘피아노 쳐라, 공부해라’라고 하는 이게 뭡니까? 번식하는 거예요. 내가 너 공부하라고 열심히 돈 벌게. 번식하기 위한 에너지와 그 자금을 대기 위해서 돈 버는 거예요. 전부 다 번식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기 자식에게, 특히 손자 손녀에게 계속 관심을 둡니다. 사는 이유와 목적과 행복과 보람이 바로 나이 들면 손자, 손녀에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뿐이에요. 그것에 시선이 가 있어요. 주님의 시선은 신경도 안 씁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의 동질성을 내가 키운다. 확보한다’라고 하는데요. 진짜 이 인간의 육의 번식에서 벗어나고 영의 번식으로 가려면 여기서 뭐가 발생 되어야 하냐면 죄가 발생 되어야 해요. 그게 비동질성이에요.

동질성에서는 남자, 여자, 이렇게 두 사람이 있으면 되는데 비동질성은 세 사람이 있어 줘야 해요. 죄가 발생해 줘야 합니다. 죄가 발생 되어야 나의 육의 번식 자체가 죄인 것을 그때 비로소 압니다. 인간은 자기 영토, 자기 자리,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죠.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지만 들으면 여러분들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 말은 주님이 ‘너희들 죄 나타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지? 내가 너에게 질문할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 너의 죄를 하나의 인격화 시켜서 만들어 낼 거야’라는 뜻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을 너의 죄라고 앞에 만들어서 너의 앞에 제시할게’라고 우리 앞에 내세우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죄가 바로 거기 있네. 주님의 찢기시고 피 흘리는 저 비참한 인생이 바로 내 모습이잖아. 내가 감춘 내 모습이잖아’라고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투시던가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다투고 있어요. 하나님은 욥을 죄인으로 삼으신 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안 다투셨지만, 욥은 지금 하나님인 나와 다투고 있고 그래서 욥 네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너는 그런 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나의 빅데이터, 내가 아는 이 세상이 내가 만족스럽고 내가 원하는 존재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문을 하시는 거고 그래서 바탕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움직임을 스톱시키고 멈추시는 겁니다. 욥은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입으로 손을 막으면서 “저 말 안 할게요”라고 하죠. 어떤 뜻에서 보면 “내가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그것도 좀 입을 가렸으면 좋겠어요. 그 말조차도 하지 말고.

여기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 말씀은 불교, 이슬람교, 정통개혁신학, 성화론,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이 좀 들었으면 좋겠어요. 자꾸 죄를 안 지으려고 하지 말고요. 죄를 안 짓겠다는 말은 나는 내 영토, 내 자리를 포기 못 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주님의 시선, 이런 거 다 싫고 내가 만들어 낸 내 인생을 고집하고 싶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너의 번식이다. 너의 복제야. 너는 너밖에 몰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네가 만들어 낸 너,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나의 복제물인 네가 되고 나와 너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3의 요소인 네가 기피 하는 죄가 너와 너 사이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쥐어 짜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재료로 삼으시겠다는 겁니다. 죄를 모아서 의를 생산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통해서 죄 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뭐냐. 아버지와 다투지 않는 아들,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죠. 우리는 짜낼 대로 다 짜내버리고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은 길거리에서 파는 기름 쏙 빠진 전기구이통닭처럼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한 질문을 쏙 다 빼 내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바탕의 자리가 아예 없게 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에서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5장은 잘 아시다시피 탕자 이야기,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가서 자기 자리를 마련했지만, 그 탕자가 돌아올 때 뭘 인식하느냐 하면, 내 자리가 없음을, 그리고 내 자리가 아예 없어지고 난 뒤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기를 원했어요.

왜? 내 몫이 있으면 아버지 옆에 있어도 아버지 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어도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이용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부자고 아버지가 잘사니까 나는 필요한 것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면 이건 신자 아니죠. 신자는 나를 위한 나의 자리가 아예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더는 시선을 나에게 꽂히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 것뿐입니다. 어떤 것도 아버지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 것으로 등기 이전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짐 싸서 가출해 봐야, 하나님의 빅데이터인 그 거대한 정보량에 나만 챙기는 나는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사실을 주님의 시선 속에서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탕자가 자기 재산 가지고 도망치는 것을 아버지가 원했던 바예요. “다 날리고 오너라. 제발. 네 것은 다 날리고 와서 더 이상 너에게 시선 두지 않기를 원한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고 까불면서 자기는 경찰관 폭행한 래퍼, 아버지가 고위직이라고 그걸 자랑하고. 교도소 1년 들어갔다 나오면 인간 좀 되면 좋겠다고 온 국민이, 그것도 정치에 관심 있는 국민이 다 원하고 있어요. 제가 장제원 아들이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이 아버지 이용해서 내 자리 확보하려는 이 심보를 누가 욕합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와 같지요.

욥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이 많았어요. ‘하나님, 저 지혜롭잖아요, 의롭잖아요’라고 얼마나 수다를 떨었습니까. 너는 네 속의 제 삼의 요소인 죄가 너를 지배하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탕자는 자기 자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또 자기 자리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불의한 청지기. 회사 다니면서 돈 다 빼먹고 자기 퇴직한 후에 방책을 도모하는 이 불량 직원, 이 직원은 자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남의 것을 가지고 횡령하고 있어요. 더 이야기하면 ‘우리도 그러면 되겠다’라고 할까 싶어서 넘어갑니다.

세 번째가 이야기할 것이 많은데 이게 뭐냐 하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는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부자는 아직도 자기 것이 있어요. 심지어 지옥을 가더라도 자기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에 남아있는 자기 동생 5명을 걱정하고 있어요. ‘네 걱정이나 해. 네 걱정’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떠날 때 가족이 아무도 없어요. 육의 번식이 아닙니다. 아무 가족도 없습니다. 가족이 없다는 말은, 번식할 내가 없다는 말은, 곧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살아도 이미 죽은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자기는 떵떵거리며 잘 산다고 하지만 피부가 조금만 긁혀도 피 나잖아요. 삶에서 조금만 흠집이 나도 거기에 죽음이 깔려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한순간도 죽음이 자기를 떠난 적이 없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돈 벌고, 떨면서 열심히 살고, 죽음이 자기의 기초가 되어있으니까 밥을 먹어도 맘 편하게 먹은 적이 없어요.

옛날 우리 어머니 대구 서문시장 앞에서 장사할 때 밥을 한 번도 편하게 먹은 적이 없어요. 밥 먹다가 손님 오면 ‘예~’하고 나가요. 그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밥 시간이 따로 없어요. 그냥 때우는 식이에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거리 없으면 한가하게 밥 먹지만 일거리 많을 때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요. 쫓기듯이 밥을 먹습니다. 죽음이 우리 기초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 나사로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그는 아무것도 자기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는 이 땅에 있으면서도 내 것이 없으니까 고통이 없어요. 거지인데 고통이 없어요. 그런데 부자는 재산이 많으니까 관리한다고 고통이고 죽고 난 뒤에는 동생 걱정한다고 고통이고. 그래서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오늘 설교 제일 어려운 부분이 아브라함이 하는 이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나사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서 부활했잖아’라고 알려지면 다섯 명의 동생들이 회개할 거라고 하니까 누가복음 16장 29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라고 나옵니다. 이게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이 말씀은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그 효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확정된 효과를 준다는 거예요. 모세와 선지자들의 그 말씀이.

왜?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그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식으로 모든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재료로 들어가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었으니까 그 십자가가, 죄 없으신 분이 흘리신 그 죄의 피가 우리 죄를 겨냥해서 우리 죄를 없애주고 주님의 시선과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영토가 되게 하시는 그 바탕이 모세와 선지자가 전한 그 말씀대로 모두 완성하신 주님에게 있는 겁니다.

거지로 산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로 살면 고통스럽죠. 말씀과 선지자에 입각해서 선지자 노릇 하면서 거지로 사는 것이 주께서 주신 역할이라고 그렇게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인간에 대해서 어떤 집착같은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난 뒤에 살아생전에 자기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은혜야, 너 나를 믿었잖아. 나는 너에게 인정받고 싶어”라고 말하고 가평 계곡에 빠져 죽었거든요.

왜 주님의 시선 의식 안 하고 남편이나 아내의 시선만 의식하고 살아갑니까? 이게 보험금 8억 걸어놓고 남편 죽이는 일뿐만 아니고 우리가 서로 가족에게, 일가친척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특히 자식들에게, 이런 것을 부담 주지 마세요. ‘내가 너 공부 잘하기를 믿었잖아. 왜 농땡이부려. 너는 왜 경찰관 폭행했어. 믿었는데...’라는 식으로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과도한 세상 적인 부담 주지 마세요.

그건 기껏해야 나의 복제물에 불과하고 나의 복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를 놓쳐버려요. 죽음은 죄에서 오거든요. 그 죄 문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주께서 하나님께서 친히 죄로 삼으셨다는 이 사실이 진정한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이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는데 비로소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내 자리가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들을 죄 삼으셔서 이미 죄를 해결하고 난 뒤에 우리 모습을 우리 모습으로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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