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2022년 3월 13일 본문 말씀: 욥기 38:39-41
(38:39)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38: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질문은 이미 답이 하나님쪽에 있지 인간쪽이 있지 않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인간이 답을 할 수 없음을 미리 아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쪽에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가?” 문제는 인간쪽에서 답을 하려는 생각 자체가 답에서 어긋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답에는 우주를 움직일만한 실효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욥을 추궁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오락가락하는 까마귀 새끼에는 먹을 것을 예비한 자가 누구냐고 말입니다. 당연히 욥은 아니지요. 그리고 그 여느 인간들도 아닙니다. 여기서 답변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까마귀 새끼를 거론하시는 이유는, 욥을 비롯해서 인간의 한계를 들추어내기 위한 의도로 사용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8:5, 9-10에 보면,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만 빼고 모든 자연세계가 하나님께 찬송하기 위해 명받고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피조세계는 허무하게 썩어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0-210
피조세계가 망가지고 있는 것은 피조세계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주적, 곧 하나님의 원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피조세계를 보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저 것이 내 것이 될 것인가 아닌가, 저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따지면서 의미를 챙기는 식으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주변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피조세계가 실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는 겁다. 여기에서 인간은 빠져 있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와 담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땅이란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나는 영토’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인간을 장악하고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땅이 하나님께 알려온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9-10)
원수를 척결하고 악이 설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지켜 보고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는데 땅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물로서 덮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인간들에 의한 지도를 무의미하게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에 없는 대지’ 혹은 ‘지도가 없는 대지’ 정책입니다.
지도란 인간들이 대지 위를 살면서 자신의 편익만을 위하여 생긴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인 뱀을 통해서 인간이 사는 대지 전체를 덮도록 조치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구석에서는 악마의 영향력에서 빠진 부분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은 치열하게 자기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상호 싸워봤자 악마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는 곧 피조물이 썩어짐에서 벗어날 방안을 인간이 만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투쟁은 갇힌 채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일종의 자물쇠 역할하라고 악마의 입에 거짓말이 나오도록 허락하신 겁니다.
인간들은 지도 그려진 대지 위에서 기어이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실제 이익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어떤 식이든 다 구사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어떤 장군들은 자기 부하들이 사기가 떨어져 전의가 상실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앞장서서 전투를 벌렸는데 나중에 부하들이 보니 장군은 눈에 안대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장군님의 장렬한 희생에 감복한 부하들은 전의가 불태워져서 전투에 나서서 결국 그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군은 거짓말로 눈을 잃은 티를 낸 겁니다. 거짓 희생이지요. 인간들은 신께 영광돌리기 위해 이렇듯 고결한 희생적인 방법은 다 구상해 냅니다. 하지만 모조리 가짜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방식이 모두 악마의 지배 아래서 진행된다는 겁니다.
즉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어떤 희생적 행동에도 주저하지 말고 나서게 합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실은 허무한 일이고 썩어짐을 되돌릴 수 없는 노력이 됩니다. 곧 인간이 스스로 자기 속임수에 갇히도록 만드는 겁니다. 달리 대안이 없으니 그것이라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인간을 자신을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물로 전 대지를 다 덮치게 했음을 잊지 맙시다. 그 어느 방식으로도 인간은 이 악마의 위세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시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시체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더라도 이 악마의 갇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주님은 이 땅에 열쇠를 준비하십니다. 전체를 악마의 거짓말로 인해 자물쇠 채워져 있게 하시면서 그 열쇠는 인간쪽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과연 열쇠는 어떻게 만들질까요? 요한복음 20:21-23에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바깥의 안목’입니다. 이미 악마의 세력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난 분의 안목이 하나님의 원수로 갇혀 있는 그 영토에 주어지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열쇠와 같은 기능을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은 달린 구원받은 강도처럼, 그는 자신의 강도됨이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조치라고 보았습니다.
‘바깥 안목’이란 자신이 저 강도같은 존재라는 점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런 자들이 오늘날의 천국 열쇠기능을 하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실패가 곧 인생 성공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6강-욥기 38장 39~41절(열쇠)2203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39~41절입니다. 구약성경 799페이지입니다.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질문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답은 이미 나와 있어요. 욥에게 질문한 그 답이 어디 있느냐. 욥으로 하여금 인간 자신에게뿐만 아니고 주변에 있는 사자, 젊은 사자, 까마귀 새끼, 바로 이런 자연물에 눈을 돌려보라는 겁니다. 그들이 이미 너희들보다 먼저 거룩을 나타내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고 암사자, 젊은 사자, 까마귀 같은 인간들이 아주 무시하는 이런 자연물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있는데 욥을 비롯해서 인간들은 전혀 암사자나 까마귀 새끼보다도 못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시편 148편 10~14절에 보면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거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되어있어요.
9절에 보면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라고 나오는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홀로 높이기 위해서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셨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중에 끼지도 못하고 있어요. 로마서 8장 20절에 보게 되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오”라고 되어있어요.
그리고 굶게 되는 까마귀, 식량이 없어서 헤매는 젊은 사자, 굴에 엎드린 암사자, 이것들을 친히 먹이실 때 이 피조물의 모습은 뭔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생생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고 허무한데 짓눌려있는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것은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날개를 펼 수 없고 활개를 칠 수 없도록 만드는 어떤 힘같은 것이 있는데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굴복되는데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세상 피조물이 한결같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그때를 고대하고 있다고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따로 자연 따로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자연의 운명이 같이 결부되어 있고 그 결부된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자연은 알고.
가해자 인간은 모르고 피해받은 자연은 ‘인간들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져 가고 있다. 먹을 것도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굶주리고 먹을 것 없어서 부르짖을 때 오늘 본문 41절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정상적인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가 없지요.
이럴 때 누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였느냐. 그것은 물어보나 마나 하나님 자신이죠.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인간들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이 나서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아, 우리가 제대로 할 일을 못 했구나. 이제부터 까마귀 보면 음식 준비하고 간식 준비해야겠구나’라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다고 전체 까마귀 다 살릴 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집에 개 일곱 마리 있는 것, 그거나 키우지. 열 마리, 스무 마리, 이렇게 못 키우잖아요? 기껏 일곱 마리만 키우죠. 그렇게 자연물을 다 돌볼 수가 없게 된 그것으로 하나님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면 마땅히 인간은 다시 피조물이 원상복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죠.
허무한데 굴복했으면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면 인간에게 어떤 다른 추가적 조치가 필요한 거예요. 까마귀 새끼에게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준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주어서 그 인간으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에 충족될 수 있는 그런 상태로 전환하는 그런 일을 누가 하시는가. 인간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는 것은 이미 답이 나와 있어요. 우리 인간은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답이에요. 이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에요. ‘뭐, 좀 기도해라. 못합니다. 헌금 좀 하지? 못합니다. 전도해. 전도 못 합니다.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영광 못 돌립니다’라는 이게 정답이에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라고 하는 이게 바로 악마예요. 마귀가 그렇게 부추기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이런 구절 막 대면서 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십자가만 빠지면 악마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걸려 넘어지는 십자가만 빠지면 그게 바로 목회 성공이고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십자가 빼는 일이에요.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고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을 향하여 질주하자고 나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뭘 모르냐면 열차는 있는데 앞에 기관차가 빠져버린 거예요. 그냥 무능한 열차뿐인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마귀적 주장을 하는 이유가 자기가 옛날에 일상적으로 살아왔던 것들이 전부다 마귀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면 자기가 성공할 수 있다는 그 관성과 버릇을 그대로 하나님에게도 들이미는 겁니다.
‘말씀만 하시면 종이 듣겠나이다. 시켜만 주세요’라는 이런 식이에요. 십자가 빠지면 그대로 다 됩니다.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해서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하나님을 못 박아 죽였단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습니다. 십자가 들이대면서 우리의 진짜 본모습을 보게 하죠. 사회에서 큰 개를 키우던 인간이 군대 가라고 하니까 군에 개를 들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말도 안 되죠.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불신자에게 은혜를 줍니다. 사랑을 줘요. 하지만 인간이 교만하게 되면 사랑도 소용없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뭐냐 하면 까마귀, 암사자, 이런 것들이 나올 때 주님께서 인간의 문제를 경유 해서 질문을 던지거든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볼 때 그냥 거기 있다고 보지 않고 내 것으로 그냥 있다고 할 때 의미가 생긴다고 보는 거예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구나도 아니고 내 것으로, 저것이 내 것 될까, 내 것이 아닐까를 따지면서 ‘거기 뭐가 있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약점입니다. 크게 잘 못 된 거예요. 그 원인은 욥은 모르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계시를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건 땅에 관한 문제입니다.
땅에는 하나님의 주적(主敵)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주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요한 적, 전쟁할 때 원수가 발생 되는 곳이 땅이었습니다. 그건 인간의 원수가 아니에요. 인간은 벌써 마귀에게 속해버리고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 되는 곳, 그것이 바로 땅에 진정한 의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 언급하시고 바로 4장에 넘어가면 땅이 아벨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하늘에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게 되어있어요. 그것은 벌써 주적이 활동하는 겁니다.
적이 이렇게 활동하는데 인간은 전혀 하나님의 적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어요. 저것이 내 것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내 것이 안 되면 버리고, 내 것이 되면 내가 취한다는 오직 이것만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 때 어떤 사람이 서문시장에서 원희룡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거 시체가 시체 만난 거예요. 그거 아무 의미 없습니다. 둘 다 시체가 시체 만나서 웃으면서 손 흔드는 건데 아주 똑똑하게 생겼다고 하는 거예요. 똑똑하게 생겨야 사기를 치죠.
성령이 개입되지 않으면 악령이 보이질 않습니다. 성령이 개입될 때 원희룡이 서문시장에 지나가면서 ‘십자가! 십자가!’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찍자고 했어요? 윤석렬 찍자고 했어요. 본인이 주적이 누구인지 몰라요. 자기 인생을 배려 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땅에서 뱀이, 악마가 기어 나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지금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그것만 생각해요.
흔히 사업하는 사람들 하는 말이 있죠. ‘물이 올라올 때 노 젓자’라고. 도대체 이 물이 누구를 찬양하기 위한 물인데 지가 왜 젓습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젓자. 사업은 될 때 있고 안 될 때 있고 하는 데 이때 힘써서 하자는 겁니다. 그 물이 누구를 위한 물인데요.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내 것, 네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땅에 지도를 그려놓고 내 것, 네 것을 두고 따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땅은 지도 없는 대지예요.
지도가 없는 대지.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대지이고 땅이에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땅. 왜? 이미 땅 전체가 하나님의 주적이 설치고 다니는 총괄지역이고 그들의 활동영토예요. 땅 전체가.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노아 때 물은 땅끝까지 모든 종족과 민족이 다 물에 잠겨버렸어요. 모든 피조물은 이미 물속에 잠겨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원희룡도 윤석렬도 마찬가지로 물에 잠겨야 해요.
사람을 볼 때 그냥 보지 마시고 물에 잠긴 채 보시기 바랍니다. 저 인간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저렇게 착실하고 열심히 살고 양심적이고 성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는 저 인간이 왜 저렇게 물에 잠겨야 하고 죽어야 하는가. 이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죽음 일색으로 바꿔놓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열쇠를 만들고요, 또 자물쇠도 만들어놔요. 일단은 자물쇠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곳에 악마가 주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적을 충분히 활용하십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자물통으로 잠가 버려라. 이 역할을 악마가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입에 거짓말의 영을 부여해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일관성이 있어요.
악마로 하여금 모든 인간을 다 폐쇄 구조 안에 잠겨있고 갇혀있도록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국민의 당과 민주당이 서로 다투는 것도 갇힌 채 다투는 거고, 러시아랑 우크라이나 싸우는 것도 갇힌 채 그들은 전투하고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누가 이기든 누가 망하든 그들의 운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많은 유튜브를 보게 되면 예수님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그런 것들이 99. 9999%입니다. 거의 100%예요. 예수님을 높이는 유뷰버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무시하지 말고 잘 귀담아들어야 해요. 그들의 주장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잘 해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안 도와주느냐는 불평과 불만에 관한 거예요. 인간들이 열심히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자기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님이여,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느냐는 식으로 거의 내용 들이 다 그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악마에게 갇힌 채 투정을 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에 마귀가 있다고 하니, 마귀를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려고 자기가 애쓰게 되면 마귀를 이길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저 열심히 살면, 열심히 하나님 말씀 듣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겁니다.
옛날에 어떤 장군이 있었는데 전쟁을 해야 할 상황에 백성들이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할 마음도 없는 거예요. 꼭 요즘 러시아 군인들 같아요. ‘괜히 왔어요. 뭣도 모르고 왔어요’라고. 그러니까 장군이 어느 날 앞장서서 지휘하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눈에 안대를 하나 한 거예요. “장군님, 왜 그러십니까?”라고 부하들이 물으니까 “내가 앞장서다가 포탄에 맞아서 눈이 하나가 완전히 실명되었다. 이제 완전히 애꾸다. 내가 장군이 되어서 이렇게 앞장서고 있는데 너희들은 뭐 하고 있는 거냐? 장군이 너희들 대신 죽어야 하겠나?”라고 하니까 그걸 보고 병사들이 ‘우리가 너무 안일했구나’라고 깨닫고 용감하게 나아가서 적을 무찌른 거예요.
그렇게 적들을 섬멸하고 돌아와서 “장군님, 우리가 장군님의 희생 덕분에 살았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때 안대를 벗으면서 “사실은 하나도 안 아프지롱” 이렇게 나온 거예요. 부하들의 용기를 부추기기 위해서 가짜로 거짓말로 희생하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하는 짓이 기껏해야 그 짓밖에 없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잠가놓은 악마라는 자물쇠는요, 인간이 열쇠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통해서 악마를 통해서 모든 것을 잠가놓으시고, 노아 홍수도 마찬가지고요, 그다음에 열쇠는 주께서 따로 만드시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말은 그 안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좋은 순간이 있어도 생각해보면 전부 다 허무하기 짝이 없어요. 아까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구원받은 강도 말고 구원받지 않은 강도를 생각해보세요. 세 명이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거든요. ‘저 인간이 자칭 의인이고, 하나님이고, 메시아인데, 도대체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당신이 기도해서 나를 좀 여기서 건져 주면 내가 당신을 믿어 줄게’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저분이 왜 내 옆에 같이 달렸지? 달린 이유가 뭐지?’라고 되는 거죠. 강도 둘도 서로의 운명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갈라설 수밖에 없는 두 강도를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두 강도가 십자가에 같이 달렸다는 말은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해요. 예수님을 위해서 본인이 있는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사형대에서 나를 풀어주면 도로 남이 되잖아요. 도로 내가 되니까. 그러면 마귀에게 갇혀있는 자물쇠 풀지도 못하고 맨 그 폐쇄된 구조 안에서, 영토 안에서 그저 까불고 먹고 살려고 애쓰고 그런다고요. 자물쇠를 열고 나오려면 그 자물쇠가 어떠한 모양이어야 하냐면 우리가 현재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갇혀있는 그 밖에 안목, 밖에 시선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어야 갇혀있어도 더 이상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자물쇠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의 안목이거든요.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그러냐면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이건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동창생이고 친구고 모든 사람이 그래요. 오랜만에 동창생에게 전화와도 서로 이야기 주고받는 것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살려고 애썼다는 거죠. 전부 다 갇혀있는 삶이에요. 그런데 그걸 따져보면 뭐냐 하면 허무한데 굴복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서 뭐? 살아서 네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데. 무너지고 있잖아. 피조물이 썩어 가고 있잖아.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잖아요.
성경은 이 허무하고 썩어짐에서 누가 그걸 탈출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못 하죠. 왜? 하나님의 주적인 악마가 우리를 거기에 가둬놓았고 그걸 시킨 분은 주님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게 하신 거예요. 땅에서는 열쇠 없이 이 땅의 허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 모습이 뭐냐 하면 바로 강도의 모습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강도의 모습을 일치시켰던 그 예수님의 모습, 오늘 밤에 주님과 저는 같이 있는 거 맞죠? 같이. 같이 있는 거. 강도와 주님과 같은 자리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이 그게 바로 마귀의 틈새를 노린 거죠.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요? ‘너는 잘 할 수 있다. 너는 훌륭하다. 너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 너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할 거야’라는 이 말은 십자가가 빠진 상태예요. 십자가가 빠지면 십자가 옆에 강도도 같이 빠진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 빼버리고 강도 두 사람만 있다면 강도 둘 중에, 우선 둘 다 입을 막고, 둘 중에 누가 악마에게서, 악마의 힘에서, 허무한 데서, 썩어짐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럽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어떻게 맞출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바로 주님의 적이고, 우리는 저 강도나 진배없고, 강도가 되어도 할 말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이 땅에 주께서 남겨준 하나님의 천국 열쇠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풀면 풀리고 너희가 매면 매인다는 이 말이 오늘날 천주교 신부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거든요.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은 이 땅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열쇠로 살아가신다는 이 자부심은 여러분이 꼭 챙기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 죄인이라는 고백이 단지 우리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고백이 아니라, 주님의 열쇠 됨을 위하여 그렇게 쓰여야 하고 그런 고백이 나와야 함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주께서 해결하심을 알리고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