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24;15)
여기 가증한 것이 필히 멸망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멸망이라는 운명에 완전히 고정되어버린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웠다는 거예요. 거룩한 곳과 멸망은 합치될 수가 없죠. 거룩한 곳에는 멸망을 안 세우니까. 세우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거룩한 곳에 멸망하는 자가 세워지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을 해버려요. 허락을 해버린다고요.
멸망의 것, 그러니까 사탄이죠, 악마,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의 최종 목적이 그냥 막연하게 돈 잘 번다, 부자 된다, 행복하다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노리는 게 있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유사 십자가, 유사 복음이에요. 거룩이에요, 거룩.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성도는 거룩하고 싶어요. 그런데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만. 너만 그런 게 아니고 악마도 거룩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악마의 운명은 이미 멸망되기로 작정된 거예요. 모든 위선자들, 거의 들킬 수가 없는 위선자들은 종교계에 다 모입니다. 종교라는 것, 거룩이라는 것,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최종적으로 장악하는 악마의 수법의 가현체에요. 심지어 모든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짐승이니까.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고 인간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못할 게 없죠. 희생, 봉사, 헌신, 충성 다 합니다. 고난 받기, 십자가 지기 다 해요. 그 많은 것을 다 하면서도 딱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봉사와 모든 헌신과 기도와 예배는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장로석에서 막 뛰어올라오고 하겠죠. 난 도망가면서 맞아 죽는다 하겠죠.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빠져나올 것인가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입니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면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한 용서는 없어요. 주를 위한 용서죠. 주님을 증거 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랑하라고 한 게 아니고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게 악한 사탄의 역사라고 되어 있거든요. 진리는 포함되지 않은 채 기적만 있는 게 사탄의 역사라 되어 있어요. 진리는 없어요. 복음의 진리는 없고 진리보다도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제공하면 그게 사탄이든 뭐 절에 가든 천주교 가든 뭐 자기 원하는 것 챙기면 그만 아니냐, 라는 것이 마지막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요일2;18) 악마 쪽에는 다수가 등장한 거예요.예수님 쪽에서는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 한분을 셋으로 나누었어요. 피와 물과 성령이 오직 한분만을 증거 합니다. 피와 물과 성령이.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5장 5-8절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셋은 방향이 뭡니까? 셋이 셋으로 되는 게 아니고 방향이 하나로 꽂히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믿음, 소망, 사랑은 분명히 셋이라 해놓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소망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되고 믿음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돼요. 사랑으로 통합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믿음과 소망은 믿음과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반드시 한쪽이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나도 사랑한다고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성사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랑이에요. 사랑의 보람을 느끼잖아요. 내가 만약에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께서 나도 너 사랑한다고 응답해주면 그것은 바로 악마가 만든 가짜 사랑이에요. 사랑은 다시 주님께로 최종 돌아가게 되어있지, 죽은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지 않아요. 나를 가져가는 거예요. 나를 가져가면서 그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벌써 우리의 사랑은 주께서는 안 받죠.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안 받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원인은 여기에 있어요. ‘있음’. 있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있음. 아까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석한다고 했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나 여기 있음 중심으로 이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뭐가 이익이고 손해냐, 그걸 따지면서 이익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손해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거예요. 더 달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들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이 있는데. 모든 죄는 피 흘림으로 끝났어요. 거짓 선지자가 어떤 경우라도 거짓 선지자는 이 말을 못해요. 성경에는 예수 안이 엄연히 있어요. 성령으로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중첩된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그 예수 안.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같이 있어요.문제는 지도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구글 지도에. 구글 지도에는 평양도 나오는데 예수 안은 나오지를 않아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한곳에 모이든 안 모이든 상관없어요.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그것은 이미 교회 안에 있게 돼요. 바빠서 못 나와도 할 수 없어요. 그것도 교회 안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깥을 보면 돼요. 투명한 튜브 있잖아요, 투명한. 이 투명한 예수 안에 있으면 바깥에 부르스 난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이럴 때 이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해도 소용없는 짓을 종교란 이름으로 교회란 이름으로 미친 짓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른 베드로가 해라, 해라, 해라. 마음대로 해라. 여기 바깥은 온갖 적그리스도 나와가지고 온갖 좋다는 신상 다 이야기해요. 뭐 거룩하고 성화되고 어떻고. 칼빈주의가 어떻고 구속사가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십자가까지 이야기하고요. 온갖 이야기 다 하고 있어요, 여기서. 사람들을 현혹하죠. 이걸 보고, 아이고 참 주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홀로 천국 뚫으려고 어지간히도 발악을 하는구나. 종교적으로 발악을 하는구나.
피 뿌림을 위해서 택하심 받은 그것, 이것이 수천 수만 명의 적그리스도를 이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용서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용서로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받은 용서이오니 이 용서가 나를 위한 용서가 되지 않고 주를 위한 용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