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눅10;1-4)
보내심의 반대말은 소유성, 뭐를 갖고 있다는 거에요. 인간이 뭐를 갖고 있으면 내가 어딜 밖에 나가도 후딱 갖고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후딱 자기에게로 되돌아와요. 보내심이 성립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보내심이라는 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아무리 멀리가도 다시 정들었던 그리고 소중한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잠시 떠나는 건 되지만 누구로 인하여 보내심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디 다녀올까? 갔다 올까? 이것은 본인이 본인을 보내심이기 때문에 다시 본인 자리로 오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보내심이라 할 수 없어요. 진정한 보내심이 성립될려면 내 것이 내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져야 되겠지요.
“전대나 배낭이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기존의 갖고 있는 소유성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의 가치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새로운 나라, 영생의 나라의 가치, 뭐로 표현 하느냐? 빈손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익 혹은 손실이 빈손한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익을 봤다 손해 봤다 빈손한테는 할 소리가 아니지요. 주님께서 보낸다는 것은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에요.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무엇을 뜻하느냐? 새로운 나라의 원리, 원리 구성을 칠십 인의 집단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기존의 세상 말고. 모든 요소가 충족이 돼요. 주님이 보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졌기 때문에 결국은 나의 삶이란 그 속에 뭐만 가득 들어 있느냐 하면은 보내심의 취지로 가득한 거에요 취지로. 보내신 자의 보내신 뜻만 가득한 것. 이게 보냄을 받은 자의 배짱이죠. 전혀 꿀릴 게 없어요. 보냄을 받은 자는 뭐가 날라가느냐.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지요. 빈손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가져가기 때문에 이익이나 손실 같은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이 다 끝난 지점에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었고 얼마나 손해가 되었느냐 그런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나를 보낸 적이 없다는 그것을 그냥 티를 내는 거에요.
왜 칠십 인들 기존의 세상에 각처에 왜 둘 씩 해서 보내느냐. ‘타인과 나를 교환시키기 위해서’에요.
주님이 보낼 때는 이미 보내기 전에 나는 기존 세계의 일원이에요.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보내심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보낸 쪽이 기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 예수님에 의해서 보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의 모든 세계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타인’, 남이 돼요. ‘남’. 남이 되고 그 남 중에 내가 바로 그 기존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남이 되는 겁니다. 정 들었던 내가 나 답게 살려고 애썼던 그 동네에 그 나하고 똑같은 나의 분신들, 나를 빼다 박은 나, 또는 그들을 닮고자 애썼던 나를 보내심의 나로 교환을 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들은 소유 가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며 사는 반면에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 가지고 버티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에요. 그런 차이를 느끼게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교환이에요. ‘교환’. 전혀 예상 못한 새로운 나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바꾸어라가 아니라 이미 바꿔진 것이 기존의 세상 속의 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그걸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래야 체험해야 보내심의 이 특별함이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계속해서 올라오기 때문에. 감격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 자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에 속한 분이 오셨기 때문에 이 보내심을 받을 때는 무엇을 빼야 되느냐 하면은 웃음과 울음 또는 기쁨과 슬픔 이런 감정적인 요소를 빼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옛날에 우리 내 소유가지고 기뻐했고 내 소유가 달아날 때 울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교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냉정하고 차갑지요. 굉장히 어려워요.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세상의 기쁨과 슬픔은 다 쏙 빼야 된다 이 말이죠. 세상적인 기쁨과 슬픔은 일상에서 보면 탄력이에요. 내 것이 증가하고 내 것이 잘 된다는 것으로 기뻐했던 그 일상적인 습관,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문안하지 말라는 말은 인기 있는 것. 인기 있는 것 이런 거 원하지 말라는 이 말이거든요 세상적인 기쁨과 슬픔은 일상에서 보면 탄력이에요. 내 것이 증가하고 내 것이 잘 된다는 것으로 기뻐했던 그 일상적인 습관,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타인을 만나는데 무슨 타인을 만나느냐? 악마, 귀신을 만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는 겁니다. 시시한 사람은 가라. 너 말고 너 배후자. 유명한 것과 인정받는 것과 차이를 줘야 되는 겁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다 떠나버리면 이게 절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는 거죠.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 자신부터 과연 나를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가를 타인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물어보는 겁니다. 이게 인정이에요. 그러니까 인정은 뭐냐 하면은 다 떠나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것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는 것.. 그러니까 인정받는 것하고 유명한 것하고 어떻게 됩니까? 정반대지요.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정 쪽이지만 유명이라고 하는 것은 유투브나 이런데 ‘좋아요’ 많이 올라오고 SNS 거기에 팔로워가 많고 교회 목사는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서 자기 알아주는 사람들 많을 때 그렇게 되어버리면 진정 스스로 자기 인정이 거기서 날라가버립니다. 그래서 가정주부 같은 경우에 나이 50 넘도록 애들 둘이고 셋이고 키워놓을 때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아이 잘 키웠습니다’ 하고 칭찬들 하지만 그 자식들이 엄마를 엄마의 수고와 애씀을 인정하지 않으면 굉장히 어떤 허무함을 느끼죠. 그럴 때 남들로 부터 인정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인정하는 그 스스로의 기준을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과연 나를 인정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칠십 인 같은 경우에는 보내실 때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마귀를 만나라. 귀신을 만나라. 이거는 세상 사람들은 귀신, 마귀 그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칠십 인이 만나야 될 것은 낯선 것, 같은 말로 다른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낯선 것, 다른 것, 없는 것. 주께서 보내실 때 악마와 귀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칠십 인들에게 부여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말씀’,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보낸 거에요. 주님의 말씀으로. 주의 말씀 보내가지고 저 사람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그 사람을 그동안 배후에서 지배했던 귀신과 마귀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걸 보라고 주의 말씀을 주신 거에요. 그걸. 그러면 여기 칠십 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는지 마가복음 9장 43절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이야기를 세상에 나와서 한번 전해봐라 이 말입니다. 전해 보게 되게 되면 그동안 인간 세계를 장악했던 그 귀신과 악마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반응을. 쉽게 말해서 극단적이다. 극단적이다. 우리의 소박한 삶의 행복을 당신은 모독한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들 보낸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은 생태계 파괴에요.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겁니다.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참다 참다 숨어 있는 귀신들이나 마귀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냥 멸망 선언입니다. 일방적인 멸망선언이에요. 소련 탱크나 러시아 탱크가 와서 밀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칠십 인들이 외쳐야 될 이 일이.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말은 꽁꽁 숨어 있는 악마와 귀신이 튀어나오게 하는 능력, 그 능력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같은 말로 생태계 파괴, 멸망선언. 멸망 선언의 결과로서 그들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세상에 대해서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하게 만들어라. 의심이 믿음의 시작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이 시작된 거에요. 의심한다는 것은. 그 의심이 세상에 대해서 의심한다는 말은 세상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꿈과 희망을 펼칠 그 미래의 무지개 꿈에 놀아나고 있는 나 자신부터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파괴는 모든 길을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길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지나간 그 흔적이 바로 새로운 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길이고요 그 내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보내심,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길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 자체가 길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고난 뒤에 돌아보면 거기에 없던 길이 새로 생긴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라고.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은 기존의 모든 길을 무시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의 길은 길이 아니었었습니다. 인간보다 악마가 뛰어나니까 악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인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과 악마는 알잖아요. 그래서 귀신과 악마는 바로 그들이 그렇게 감추고 싶고 막아서고 싶은 거에요. 그 길을 들키고 싶지를 않은 거에요. 그 어떤 길도 천국으로 통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 때문에 악마는 인간들이 길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그냥 동의하고 그걸 후원해준 겁니다.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전부 다 사적인 길이거든요. 부분으로 하면 다 희극이고 전체로 보면 비극이라고. 인간은 자기 전체가 비극인 것을 모르고 코 앞에 있는 어떤 성과 잘되고 회사 잘되고 가정 행복하면 자기는 웃어도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다 코로나 걸리면 울어야 되는 줄 알아요. 코로나 걸려서 울었어요? 그게 길인 줄 알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 길은 없습니다. 전부 다 막혀있는 거에요. 길인 줄 알지만 길 끝에 가면 전부 다 막혀서 없어요. 그냥 몸부림쳐본 거에요. 악마는 알아요. 천국 가는 길이 없다는 걸. 악마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없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이 되는 겁니다.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세상 어디에 갈 필요 없어요. 지옥 가는 길로 안 갈 때 그냥 살아. 그냥 살면 지옥 가요. 그냥 살면 지옥 가요. 자동이에요. 무슨 나쁜 짓해서 지옥 간다. 아니에요. 그냥 살면 그게 지옥 가는 길이에요. 새삼스럽게 지옥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일상에 탄력 받아 살면 그게 지옥이에요. 벌써 지옥생활 시작했고요.
"이 길은 천국 가는 길인가요" 문제는 성경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미 그 거짓말하는 악마와 한 패이기 때문에 내가 어느 쪽이 천국 가는 쪽입니까? 물을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데 여기 파수꾼이 있어요. 파수꾼이 굉장히 다리 건너는 사람에게 겁을 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이 다리를 건너고 싶어도 내가 허락한 사람만 건너지 만약에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건너버리면 당신은 교수형에 처하겠다 하고 기세등등하게 파수꾼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답변 한 개만 해가지고 어떻게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느냐. 질문은 뭐냐? 그건 복음적으로 답변하면 돼요. 답변은 이겁니다. 나는 지금 저 교수형 당하기 위해서 저 다리를 건넙니다. 이러면 파수꾼이 할 말이 없어요. 죽겠다는데 뭐.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악마와 귀신들이 인간을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옳고 그름과 그리고 선과 악을 주님 쪽에 일임한 게 아니고 그걸 내 쪽에서 내가 처리할려고 그걸 유혹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게 그게 화근이 된 거에요. 그게 바로 마귀 들린 상황입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은 상황이 존재가 그 상황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 방법은 이제는 여러분도 아셔야 돼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처 방법은 뭡니까? 내 결정과 내 선택과 내 행함과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해가지고 옳은 길로 가는 그것이 배후에 누가 있다? 악마가 있는 것을 악마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발췌시키는 말을 칠십 인에게 담아서 보내야 돼요. 왜? 그 보낸 자리에 주님이 길이 되시기 위해서 가시기 때문에. 보낸 자리에 가시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뭐가 없다? ‘보내심’이 없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시작점이니까 내가 판단하니까.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뭡니까? 자, 내가 문제를 던질테니까 이걸 네가 선과 악으로 해가지고 이걸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 한번 보라. 네가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어떻게 하라? 빼버려라. 오른 팔이 범죄하거든 손을 잘라버려라. 오른 발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그래야 나머지라도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느냐 하면은 결국은 이 지옥불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지옥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인간 세상, 이 세상에 주님께서 지옥불이라는 그 단어를 개념을 언급했다는 자체가 이 세상과 지옥불이 관련성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불 속에 우르르 지금 침몰되고 있다는 거에요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너희들 옳은 판단하면 지옥불 안 간다는 말은 지옥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문제는 옳은 판단인데 문제는 옳은 판단을 하겠다는 그 순간 무엇이 날라가버립니까? 누군가로부터 보내심이 없다는 것이 완전히 들통이 나버린 거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에요. 누구를 보냈다는 말은 사람하고 싸워서 승리해서 쾌감을 느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하고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현재 이런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게 만드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영적 사람들, 영적 존재들 그것을 어차피 주님이 만날 거니까 칠십 인 보고 너희들이 먼저 만나봐라. 그리고 그 만나는 그 과정이 내가 해야 될 그 길과 일치되는 길이라고 하는 거에요. 누구를 보냈다는 말은 사람하고 싸워서 승리해서 쾌감을 느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하고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현재 이런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게 만드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영적 사람들, 영적 존재들 그것을 어차피 주님이 만날 거니까 칠십 인 보고 너희들이 먼저 만나봐라. 그리고 그 만나는 그 과정이 내가 해야 될 그 길과 일치되는 길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교환할 타인이 없잖아요. 교환할 타인이. 지금 궁극적으로 칠십 인이 뭐라고 하느냐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지요. 너희 이름이. 그 기록된 것이 뭐냐? 누구의 생명책이냐? 예수님의 이름의 생명책이에요. 그럼 예수님이라는 그 타인과 교환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겁니다.
주님이 보내실 때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보냄을 받습니다. ‘보내심’, 자신의 의사와 생각과 무관함. 그럼 누가 하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님에 의해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에게 꿈은 그냥 쳐들어온 거에요. 마치 뭐와 같습니까? 율법적 기능과 마찬가지에요. 율법이 왜 오느냐? 여기 지금 바벨론 나라에 누가 와 있느냐 하면은 언약의 백성,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와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는 반드시 무엇을 유발한다? 율법이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기능이 뭐냐 하면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 거에요. 율법의 기능이. 그러면 이방나라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어느 시대든 간에 그 시대는 율법이 율법답기 위해서 형성되야 될 그 환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환경을.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거에요. 자,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다? 율법에 의해서 장악된 세계다.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해주는 겁니다. 그건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그걸 먼저 혹독하게 체험했던 겁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약속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면서도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혔다는 것. 그것은 역시 율법은 자신의 취지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걸 명확하게 보여주잖아요. 인간의 결심, 인간의 각오 그것은 다 헛된 짓거리다. 이 세상에 일관되게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원칙이다. 그래서 비록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포로 잡혀갔지만 율법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오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사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왕이 해야 되는데 그리고 그 혜택은 백성에게 돌아가야 되는데 지금 이스라엘 왕이 없잖아요. 망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있잖아요. 백성은 있으니까 그 왕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이방 나라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구원하도록 조치를 일관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책임자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책임을 혜택을 입는다는 인간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때는 그거는 나도 죽지만 너도 죽어야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뭐라고 해요? 우리의 왕이라고 하지요. 왕이 죽었으면 우리도 죽어야 하고 왕이 부활하면 우리도 살아야 될 그러한 운명이 같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예수 안이 형성돼요. ‘예수 안’. 독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개별자라는 의식은 예수님 나라에 통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 악마의 나라에도 통하지 않아요. 악마의 나라도 악마의 운명과 같이 하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 전체가. 왜냐하면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니까요. 신의 운명이 곧 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신이 지옥가면 나머지 다 덩달아 다 나머지 인간은 다 지옥가야 돼요. 방금 이게 뭐냐 하면은 방금 율법적인 속성이고 기능이에요. 이게 구약이거든요. 신약의 칠십 인,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잖아요. 자기 백성 같으면 여기에 어떤 요소가 와야 돼요? 율법적 요소가 그대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전달해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지. 이걸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는지.
마치 식구 다섯 명이 있는데 이 다섯 명이 어느 교회 가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네 명은 뭐 성경에 기독교 이론이 그렇구나 이랬는데 한명은 그 십자가 복음에 꽂혀가지고 이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자기가 전에 살던 나와 십자가 안의 나를 새로운 나를 바꾸고 싶은 그러한 갈망이 생긴 겁니다. 이거 얼마나 특이한 현상이에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 이 말이죠. 율법에 의해서 세상이 조성된다는 것은 일체 이걸 거부하고 있는게 이 세상사람들이에요. 이 성경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악마의 시험이란 바깥 세상의 기준으로 이 세상, 복음 또는 언약 안의 세상을 평가받는 것. 이게 바로 시험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바깥의 세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이 이러쿵 저러쿵 이쪽을 마치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평하는 게 이게 시험이고 유혹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하는 것처럼 장애자를 돌보고 어려운 사람 돌보는 그게 교회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위로해줄 때 그게 교회의 할 일이다 라는 기준은 어디서 나온 기준입니까? 세상에서 나온 기준이죠. 그게 유혹이라는 거에요. 그게 시험이에요. 시험.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교회 붙드는 것 보면 나는 납득이 안돼요. 십자가 안다면서 자기 가정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 보면 이건 나는 웃기지도 않아요. 교회 잘 다니면 가정이 행복해야지 무슨 그런 이론이 있어요. 지금 칠십 명이 이야기할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에요. 율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율법의 완성.
이 세상 인간들은 하나의 톱니바퀴에 맞물려서 돌아가는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것. 단독으로 떨어져 나온 부속품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려 돌아가는 ABCDE 모든 관계와 관계 속에서 독자적으로 떨어져나갈 수 없고 갖다붙여야 같이 돌아가는 것. 톱니바퀴 물려있기 때문에 같이 망하는 거에요. 같이. 이 세상은요 따로 노는 게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하든 놀든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어요. 남 탓. 그게 과연 율법 앞에서 통하겠는가. 율법 앞에서 통하겠는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기계에요. 인간은 사회에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요. 레미콘 있지요. 레미콘 안에 들어갔다고 봐요. 그 레미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운전할 때도 자기 혼자 빙빙 돕니다. 콘크리트 굳지 말라고 섞이면서 돌잖아요. 기계입니다.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 기계가 인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때는 기계로 여기지 않게 하고 이걸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버려요. 인간으로. 왜? 배후에 마귀가 인간을 인간다움을 새로 조성해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집어넣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냥 선악과 모르는 인간이 아니고 선악과 알게 된 인간으로 배후에서 악마가 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언약을 가지고 “너 나와! 너 나와!” 잘 알지요? 노래 자랑할 때 일대일 배틀할 때 아무나 찍어서 “너 나와!” 악마가 인간을 선악과 아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인간을 가짜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주님께서 진짜 인간을 비추기 위해서 “너 나와!” 할 때 그때 율법으로 인간을 찾아옵니다. 로마서 2장 3장에서. 율법에서 여기서 뭘 보느냐 하면은 네가 법정에서 말하는 네가 의로우냐를 따져요. 법정에 설 때. 이 율법을 네가 지켰느냐? 법적으로 딱 모든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을 딱 들이대가지고 네가 율법으로 의로운가 한번 보라.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면 게임 끝났어. 그러니까 남 탓을 하지 말란 말이에요. 남 탓. 나는 뭐 성경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그런 소리하지 말란 말이죠. 네 양심 자체가 율법적이니까. 남 탓이고 내 인생 너 때문에 조졌다 나는 착했는데 저쪽에서 어떻게 했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 그냥 율법으로 딱 들이댑니다. “네가 오른 눈 범죄 할 때 오른 눈 뺀 적 있느냐?” 다시 말해서 내가 한 말이 장난으로 보이냐. 내가 전도하면서 하는 말이 농담으로 여겼어? 그걸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끝까지 밀어붙여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얼마나 율법적입니까. 저주라는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율법적이에요. 이거는 그냥 빈 말이 아니고 이거 내가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는 뜻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에요. “너 말이야.” “왜요?” “너 왜 내 말 지켰어 안 지켰어? 너 나 사랑해 안 사랑해?” 주의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우리의 마지막 도달점, 우리가 물러설 데가 없는 끝점이 주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안 가봐도 우리의 미리 끝을 경험토록 하시는 거에요. 이 복음 안에, 십자가 안에. 그래서 로마서 3장에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어디 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이 얼마나 율법답게 나오는지요. 인간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창세기 3장에 그들이 수치스러워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옷을 만들죠 옷. 치마를 만들잖아요. 이것은 인간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옷을 만드는 것은 옷 위에 옷을 입은 거에요. 옷은 뭐냐? 인간의 몸 자체가 옷인데 거기에다가 옷을 입어버리면 이 몸 자체가 갖고 있던 옷의 아름다움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옷에 의해서 다 가려져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가리지 않는 옷 자체를 하나님이 원하는 몸 자체를 보여주는 옷을 입혔죠. 치마 입은 그 옷을 뭐로 바꿔치기 했습니까? 짐승의 가죽옷으로 바꿔요. 이 가죽옷은 여기 가죽옷이 옷이 아니라 이 몸 자체를 그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 가죽옷을 만든 겁니다. 인간이 만든 치마라는 옷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요소를 가리는 그런 옷 말고 하나님의 하신 그 자체가 옷이 된다는 사실을. 몸 자체의 변화를 예시하시면서 가죽옷을 입힌 겁니다.
영적 세계에요. 영적 세계만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영적 세계의 정체를 들추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두 세계의 공시성. 공시성이란 말 어렵습니까? ‘동시성, 공시성’. 같은 장소에 같이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같은 시간에 같이 있다 같은 말인데. 공시성이 등장해요. 물리학 양자역학에서 칸막이가 되어있고요. 한 개 입자 전자가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둘 다 다 들어있다. 이게 양자역학에 나옵니다. 신기하지요. 하나의 전자가. 왼쪽 오른쪽 두 양쪽에 다 있다 이 말입니다. 두 양쪽에 다. 둘 중에 어디 있지? 하고 뚜껑 여는 순간 한쪽은 사라지고 한쪽만 나타나야 된다는 거에요. ‘불확정성 원리’. 굉장히 신기하지요. 이게 바로 공시성이고 또는 동시성이에요. 자기들끼리 서로 통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양자 얽힘이라고 해요. ‘양자 얽힘’.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뭔가 인간들이 관찰하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의도해서 거기에 보조 맞추는 식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들은 그걸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의미든 간에 우리가 납득이 돼야 비로소 의미가 되는 그런 자들이 인간들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에 언약이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 복음이라는 것 그게 얼마나 오늘날 교회에서 잘못되게 해석됩니까. 우리는. 내 납득대로 해석하면 그게 정답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 발각이 안 됩니까? 내 등짝에 악마가 있고 내 등짝에 귀신이 있는 것이 내가 발견이 안 되는 거에요. ‘나는 오류가 없다. 나는 정상인데’ 이렇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 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놓고 해답이라고 우기는 그런 세상이면서도 그게 자아거든요. 자아인데 자아가 돈벌이 나갈라고 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가, 주체로 변해요. 주체는 알지요. 남 눈치 보면서 살아가는 것. 눈치 안 볼려고 하면 뭐하면 됩니까? 집에서 살림만 하면 돼요. 자아가 되지요. 자아가 되는 게 코로나 걸려버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
세상은 자꾸 섞여서 숨어들어가는데 언약과 율법과 십자가는 우리를 뽑아내는 거에요. 기계이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이걸 인간으로 행세했던 율법과 마주해서 그걸 나중에 기계로 바꿔버려요.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너는 네가 주인공이 아니다. 생명책은 네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의 생명책. 그걸로 기뻐하라. 너는 주님을 위한 기계였다. 처음에는 네가 악마의 기계였지만 지금은 주님의 기계다. 그러나 중간에 거쳐야 될 과정은 뭐냐? 네가 인간으로서 행세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묻는 거에요. 이 세상에 나는 편승하지 않겠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진리관과 주관에 따르겠다. 인생 그렇게 살겠다. 그러니까 데모하는 거에요. 이 불의한 정권, 반대하는 거에요. 강력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세상의 정의를 찾으면서. 그것도 안 되면 청와대 청원하고 하지요. 이 싸움.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최후의 자존심 걸고 싸우는 것. 이거 영적 전쟁입니까? 육적 전쟁입니까? 육적인 전쟁이죠. 진리를 몰라요. 진리가 뭔지를 몰라요. 계속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면서도 어느 것이 가장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고 인권을 살릴 수 있고 내가 이 땅에 삶을 살 수 있는 그 맛을 제공하는 그런 정치 제도 그런 사회는 무엇일까 그걸 고민하고 고민하는 거에요. 남들 보기에는 아주 거룩한 고민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너 이리와. 이리와. 네가 범죄하면 너 지옥 가도 좋으냐? 이걸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 영에 시달려야 돼요 우리가. 느부갓네살처럼. 내가 살아온 이 세상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게 내가 정상인지를 의심해 봐야 되는 겁니다. 의심이 믿음의 시작이에요. 내가 지금의 나를 우리의 영원한 타자되신 주님과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바꿔치기’. 주께서 그렇게 해주셔요. 세상관으로부터 악마적 세상관으로부터 유혹을 받으면서 시험을 받으면서 네 속에 있는 말씀이 이기느냐 아니면 이 세상의 세계관이 이기는가를 직접 현장에서 경험케 하는 겁니다.
자, 제가 묻습니다. 약하고 병들고 약하고 가난하고 죽으면 그게 수치입니까? 부끄러운 일이에요? 방금 로마서 1장 16절 뭡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복음이 복음 세계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계가 복음의 세계에요. 나를 죽이고 만든 세계. 나를 그쪽에서 나를 부르심을 보내서 내가 이 세상에 살게 만든 그 원천이 바로 복음의 세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어떤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어떤 것도 경솔하게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오직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보냈단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시험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 세계에서 이 하늘 나라에 대해서 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이거는 인간은 몰라요. 다른 사람도 모르는데 악마는 알아요. 귀신은 안다고요. 자꾸 시험하는 거에요. 네 병들었잖아. 아프잖아. 너 가난하잖아. 너 이렇게 죽으면 인생, 보람 없잖아. 네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걸 수치스러운 걸로 공격을 해대는 것이 바로 악마, 귀신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해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가 하는 말을 비로소 마귀가 하는 말로 귀신이 하는 말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가 왜 세상을 향하여 자꾸 수치와 좌절을 느끼는지 주여 다시 한번 십자가의 말씀 앞에서 얼마나 우리가 복된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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