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사람 없는 황무지

아빠와 함께 2022. 2. 20. 22:03

사람없는 황무지

2022년 2월 20일          본문 말씀: 욥기 38:25-30

(38:25)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38: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38: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38:28)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38:29)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8:30) 물이 돌 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폭우, 땅, 이슬,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운운하면서도 제대로 하나님의 창조과는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이 인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하나님쪽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이상한 본성이 있어서 자꾸만 피조세계를 자기를 거쳐서 하나님쪽으로 돌려보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조직폭력배같은 근성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맡기시지 않고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이미 인간의 권세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인간을 부추기기를,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1:28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될 때나 해당됩니다. 이미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고 난 뒤에는 이 말씀의 수행자가 되지를 못하고 도리어 고발당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그냥 이 세상에 널려있는 창조물들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인정하므로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메시야와 연류되어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즉 인간 중심이 아니라 메시야 중심이 될 경우에만 ‘창조’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하면 본인부터 메시야와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꾸 인간들이 메시야하고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 마주하려고 합니다.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을 모방하고 흉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면 하나님에게 대놓고 반발합니다. “내 인생을 왜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만드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면전에서 보고 따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욥처럼, 하나님의 분노 중에 서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분노해야지만 인간은 ‘자기 부정’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없는 황무지’가 나옵니다. 거기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은 모든 만사가 본인이 원하고 흥미가질 만한 경우에만 국한됩니다. 즉 골라서 흥미를 갖고 판단합니다. 땅을 보면서 사람들은 개간을 생각하고 농산물 생산을 염두에 둡니다.

농사지을 때 필요한 비를 하나님께서는 평균적으로 시기에 맞게 얼마나 내려주실 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림수는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런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땅은 원래 하나님 겁니다. 그리고 계절도 또한 하나님께서 실행하십니다.

그 들판이 인간들 사회에서 누구에게 뺏고 빼앗긴들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봄이 오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들판은 하나님 것이니까요.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겁니까? 그것은 빼앗겨서는 아니된다고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이 수동성임을 생각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중의 최고의 체험은 자신이 도외시되는 체험입니다. 나 없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잠시 눈을 딴데 돌리는 순간, 다른 차와 부딪쳤다 칩시다. 누가봐도 전방주시를 못한 나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왜 전방주시를 못하고 관심을 그순간 딴데로 돌리게 했나요?

그것은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 아님을 말해주시는 주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인간이 메시야와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맺어집니다. 아무 것도 내 쪽에서 한 것도 없이 메시야에 찾아드는 겁니다. 2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선수를 향하여, 그 선수를 응원하던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서 달리지 않는가? 그러면 앞 사람을 제치고 우승했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왜 1등한 그 사람은 어제 배탈나지 않았는가?”와 같은 취지의 말입니다. 모든 것이 수동성입니다. 능동성은 우리 인간 가운데 오신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 자기 사람까지 포함해서 그 전부가 예수님이 중심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오늘 본문 ‘사람 없는 황무지’의 의미를 알려면, 이 취지의 반대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필라테스 하기’입니다. ‘살 빼기 운동’입니다. 자기 살을 빼기 위해 그렇게 열심인데 그 일에 흥미를 두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살 빼는 주인공이 본인이고 본인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본인이 하지 않는 일, 곧 십자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흥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력을 방해하는 비-창조력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결코 ‘막살기’를 못합니다. 막사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하고 모험적이라서 본인이 나서서 말리기 일쑤입니다. 참으로 성도가 막사는 것을 이해하려면 일이 다 벌어지고 난 뒤, 뒤돌아 보면서 파악이 됩니다.

막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 위주의 일’을 쳐내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경쟁을 일괄적으로 거부하십니다. 이 인간 세계는 강한 자들끼리 토너먼트하듯이 시합을 벌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방해하면서 자기들이 살 권리도 따로 챙깁니다.

하지만 이런 형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일거에 정리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늘 빼앗기는 삶이 바로 주님의 창조를 제대로 경험하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정리하게 하옵시고 과거는 없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3강-욥기 38장 25~30절(사람없는 황무지)22022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25~30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레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인간들의 지혜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자기 가족 중심,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가족을 중심으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슬에 아버지가 있느냐, 비가 아버지가 있느냐, 얼음이 누구의 몸에서 태어났느냐”라고.

그러니까 이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자연물은 하나님에게 직접 노출되고 직접 하나님에 의해서 다뤄지고 있는데 인간은 변명과 쓸데없는 핑계가 그렇게 많아요. 그건 인간이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거기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이 서로 마주치면서 비교가 되고 대조가 되는 그런 환경을 사회라고 합니다.

인간이 돌과 비교하고 이슬이랑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비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들끼리 누가 잘났는지 그런 식으로 정신을 거기에 팔고 모든 인생 목적을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두다 보니까 하나님은 뒷전이었습니다. 돌멩이 같은 거, 비, 광야, 땅, 이슬, 하늘에 별, 이런 것들이 사람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쓸쓸하지 않거든요. 몸부림치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 있으면 자기 역할은 다 했다는 식인데 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없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이슬이고 얼음이고 서리라면 있는 그 자체로만 ‘아이고 신기해라. 나라는 것이 왜 존재하지’라고 감탄하며 그 신비로움에 고마움을 연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찡그리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예요. 자기 욕망 때문이죠. 욕망이 어디서 왔죠? 그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걱정입니다. 남이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죠. 그런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거기에 대해서 화젯거리가 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주목하고 거기에 관심과 시선이 모이고요.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할 때 선수들이 헥헥 거리며 쓰러질 정도로 결승점을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습니다. 옛날 김대중 대통령 있을 때 이봉주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등을 했거든요.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어요. “조금만 더 달렸으면 1등 할 건데 왜 힘을 못 내냐”

사람들은 인간들이 경쟁하는 거 보면 알지만, 주님이라는 결승점이 자기에게로 달려온다는 사실을 몰라요. 오늘같은 본문이 그렇잖아요. 하나님 만나려고 했는데 욥은 하나님 못 만나요. 하나님 되는 결승점이 하나님이 달려들어서 직접 욥을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달려들 때 칭찬하려고 만나시는 것이 아니에요. 달려들 때 하나님은 분노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화를 내십니다.

화를 내시는 이유가 그래야만 우리가 그 앞에서 자기 부정이 되고 자기 부인이 됩니다. ‘아, 나는 저 이슬만큼도 못하고 저 얼음덩어리보다 못하구나’라고. 하나님은 얼음덩어리 그 자체로 하나님께 충분한데 인간은 하나님이 충분하냐가 관심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내 욕망에 맞췄느냐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 찡그리고 화내고 있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대목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제가 욥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구절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26절입니다. 이 본문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여기에 나오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가 아니라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라고 나와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에게서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없다고 치고 내가 하나님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존재로만 있지 인격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사람들은 황무지를 볼 때 비가 촉촉이 와서 농사 짓기 적당했으면 좋겠다는 자기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거둘 수가 없어요. 모든 게 인간들은 나 있음을 거기에 넣고 이해하고 해석해요.

너도 그렇고 나도 그러니까 둘 다 바보고 쪼다고 둘 다 하나님의 영광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영광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고 안 나와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사람이 KBS 아침마당이라는 프로 나와서 도전 무대 참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프로가 뭐냐 하면 나와서 자기 사연 이야기하고 트로트 하나 부르고 5승 하면 상 주는 프로예요. 이름은 김용오 씨고 나이는 67세인데 중국무역유통 사업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티비에 모자이크 처리하는 거 제일 보기 싫어요. 그럴 것 같으면 뭐 하려고 내보내는지 모르겠어요. 같은 흙덩어리인데 뭐 볼 거 있다고. 인간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진흙의 굴곡이고 진흙의 요철이에요. 요철이 어떻게 만들어지다 보니까 이쁘게 보이고 요철이 나올 때 안 나오고 들어갈 때 안 들어가면 못생긴 것이고. 못생기면 결혼도 못 하고 그런 거죠.

돌멩이가 이쁜 돌멩이도 있지요. 이쁜 돌멩이도 주께 영광이 되고 못생긴 돌멩이도 주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중간에 끼어든다는 것이 위험한 짓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참 위험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항상 나의 존재를 끼워 넣고 해석을 ‘하나님, 복주세요’라고 하면서 자기가 복을 가로막고 있어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겨누는 무기가 된다니까요. 자기를 찌르는 무기가 돼요. 김용오 씨가 하는 이야기가 장모님이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장모님이. 그리고 둘째 처형이 유방암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내가 유전성 대장암, 난소암 말기에 걸려서 대장 1/3을 들어내고 난소 들어내고 열두 차례의 항암치료를 하면서 몸이 엉망이 되어서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겁니다.

그 뒤에 골반 암 말기라서 항암치료 세 차례 받고 부작용이 심했답니다. 그다음에 표적 항암치료 등장해서 그 치료받고 있다고 하고 그다음에 자기 어머니가 위암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본인이 대장암으로 제거 수술받았다고 합니다. 그 집안이 암 집안입니다. 모조리 암이에요. 암 종류도 다양해요, 유전성 대장암, 난소암, 유방암, 직장암, 골반암, 위암.

그 사람이 암이 지긋지긋하다고 이야기하면서 트로트 딱 하나 부르고 내려왔거든요. 인간이 암에 걸렸다는 것은 주께서 걸리게 하신 거예요. 그게 주께서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주님의 결승점입니다. 제발 죽으라고 암 걸리게 하셨는데 병원에 의사들이 살려내고 고만 살라고 달려들었는데 병원에서 또 살려내고 이건 뭐 주님과 한 번 해보겠다는 뜻인지. 그 하소연을 누구에게 하느냐면 같은 인간들 보고 무대에서 하소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아이고, 안 되었다. 하나님은 무심하기도 하시지.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나는 안 걸렸지롱~나는 잘났지롱~아싸! 더 살 수 있어’라고. 주님은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를 내리는데 인간은 사람 있음을 딱 집어넣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어야 하는지를 자기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해요. 자기가 압력을 가하고 시위하고 대들고 대항하고 데모하고.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성경은 땅이고 비고 이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선물이 인격화된다는 거예요. 인격적인 분과 연루되어 있다는 거예요. 땅, 해, 달, 별,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 한 분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인간만큼은 이것이 잘렸어요. 해와 달과 별이 전부 다 주님께 쏠려야 하는 관계망이 자기에게 도달해서 거기에서 멈춰버렸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대로 했는데 왜 인생이 이렇게 난장판이냐는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욥도 마찬가지로 한번 따져 보자는 거예요. 욥은 주장이 뭐냐 하면 ‘하나님, 너 나와’라는 식이에요. 도대체 억울해서 더이상은 못 살겠으니 하나님에게 나오라는 겁니다. 물론 반말은 안 했겠지만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분노 가운데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인간 자기로 멈춰있는 것을 아예 자기에게 구멍을 뚫고 주님과 연관되게 하는가.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해요.

결론부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이 ‘내 종’이라고 하셨거든요.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그다음에 이스라엘은 ‘내 신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 하나님에게 받을 수 없고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해요.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그 메시아가 우리로 하여금 종이 되고 백성이 되고 신부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가 주인공인 이 자리가 주님 앞에 뺏겨야 합니다. 뺏기는 이것을 가지고, 뺏기고 다시 주는 이걸 ‘창조’라고 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은 마귀에 속아서 비창조, 창조를 훼방하고 방해하고 존재가 되었어요. 주께서는 창조를 돌은 돌, 이슬은 이슬, 하나님이 직접 아비가 되셔서 얼음을 만드셨어요. 별도 그렇고 해도 그렇고. 그런데 인간은 이미 범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비 됨을 인간 쪽에서 거부합니다.

마지막 도착지점을 하나님이 아니고 본인에게 도착지점을 해놓으니까 본인이 본인을 제거하고 없앨 수가 없어요. 없앨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느냐. 일제 시대 유명한 시 중에 귀한 시가 있는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예요. 고등학교 때 외우기는 했지만 이게 지금 생각하니까 정말 함축된 말씀이에요. 들을 두고, 들은 원래 하나님 것인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일본이 와서 ‘내 땅이다’라고 하고 조선사람들은 ‘빼앗겼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이 원래 주인이 있어요.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 땅이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겁니다. 봄은 인간 좋아라고 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좋아라고 봄이 오고 여름 오고 가을 오고 겨울 오는 겁니다. 이 몸을 빼앗겨야 한다고요. 빼앗겨서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 되도록 빼앗겨야 해요. 빼앗길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와서 주께서 찾아오시면 분노 가운데 오시는데 십자가가 분노고 하나님의 저주 아닙니까. 그 저주 앞에서 내가 이 육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홀라당 다 빼앗겨야 하고 부정이 되어야 해요.

어디에서 권투 시합을 하는데 코치가 자기 선수를 링 위에 올려보내 놓고 말로 코치를 하는 거예요. 자기 선수가 상대에게 밀리니까 뭐라고 코치하느냐 하면 ‘맞지 마! 맞지 마! 맞지 마!’라고 코치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수가 직 싸게 얻어맞고 넉 다운되어서 10회전까지 가지도 못하고 5회전쯤에서 슬슬 내려오면서 코치가 어깨 풀어주고 위로해 주면서 ‘너도 참, 어지간히도 내 말 안 듣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누구는 뭐 맞고 싶어서 맞습니까. 코치를 할 때 구체적으로 지시를 해줘야지 ‘맞지 마! 맞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수동적 존재예요. 인간은 안 늙고 싶고 안 죽고 싶어요. 그러나 택한 백성은 압니다. 하나님께서 친다는 것을. 그때 우리는 빼앗기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내 것은 없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 결혼할 때부터 쓴 제일 오래된 물건이 있어요. 아직도 그 물건을 씁니다. 우리 집에서. 그게 뭐냐 하면 화장실 쓰레기통입니다. 그게 뭐 버릴 일이 있어야죠. 비우기만 하면 되는데. 비우고 버려도 어느새 꽉 차거든요. 비우면 또 꽉 차고.

우리 자신의 것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지 마시고요, 모든 주어진 것이 수동적이에요. 수동적이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저에게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 뭡니까 물으면 저는 단번에 이야기합니다. 내가 도외시 되는 체험이 최고의 체험입니다. 내가 도외시 되는 체험.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전혀 한 것이 없이 일어난 일 같은 거.

예를 들면 차 사고 같은 거. 나는 분명히 잠깐 한눈팔았는데 차에 뭐가 떨어져서 좀 집으려고 하는데 차가 와서 박아버릴 때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전방 주시하지 않은 나의 실수지만 내 입장에서는 또다시 질문을 바꾸는 거예요. 왜 전방주시를 안 했을까. 그건 네가 옆에 물건 줍는다고. 왜 옆에 물건이 떨어져 있을까. 따져 보게 되면 결론은 나옵니다.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관여하지 않은 사태가 내가 관여한 사태보다 훨씬 많이 있고 그것이 뭉쳐져서 오늘날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이 모여들어서 오늘날 내가 된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을 세자로 줄이면 막산다. 막산다는 의미는 뒤돌아봐서 붙인 해석이 되어야 해요. 내가 막살게 되면 너무 위험하고 너무 모험적이어서 내가 말려요. 내가.

주님이 막살라고 해도 내가 막 안 살아요. 왜?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그러나 뒤돌아보면 전부 다 내 맘대로 막 산 거고 주님은 주님대로 막 산 거예요. 어떤 것 하나 내 맘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연대와 고대가 농구시합을 하는데 1초 남았어요. 연대가 98이고 고대가 99예요. 한 점 남겨놓고 1초 차이로 고대가 이겨요. 연대에서 황급히 선수들을 모아놓고 작전타임합니다. 작전타임할 때 보드에 써가며 뭔가를 의논하는데 도대체 1초 남겨놓고 연대가 공 2개를 넣으면 이겨요. 그래서 선수들 모아놓고 코치할 것이 뭐가 있는가 싶은데 실컷 이야기하다가 시간 다 되어가니까 마지막으로 코치하는 말이 이래요. ‘두 개 다 넣어’

두 개 다 넣으라고 할 것 같으면 코치할 것이 뭐가 있어요. 그 말은 나도 하겠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이게 1초 남긴 것이 아니고 5분 정도 남았다면 절대로 그런 코치하지 않습니다. ‘한 개 넣어도 괜찮아. 또 5분 있어’라고 하겠는데 우리 인생이 언제 5초 남겨지고 언제 10초 남겨질지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왜? 우리는 수동적이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사람 없는 황무지, 이 사람 없는 황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 없는 황무지를 이해하려면 이것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필라테스’입니다. 필라테스는 자기 몸짱 만드는 운동이거든요. 필라테스 하려면 자기 괜찮은 몸만들기에 본인이 흥미가 있어야 해요. 사람 없는 황무지를 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느냐면 이게 아주 간단한데, 공 2개 넣으면 될 정도로 코치하기도 쉬워요. 그 이유는 흥미가 없어서 그래요. 흥미가 없어서 그래요. 인간은 흥미대로 살아갑니다. 기분 따라 살아가고 흥미대로 살아가요.

어떤 사람이 와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흥미 없습니다’라고 하죠. ‘도를 알아서 조상제사 잘 드리면 복 받습니다’라고 해도 ‘흥미 없습니다’라고 해요. 우리는 흥미 없으면, 관심 없고 별 이익 없으면 안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상스럽게 우리가 흥미 있는 것은 이야기 안 하고 흥미 없는 것을 가지고 들이대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예요.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 두면서.

예를 들어 필라데스라는 운동을 할 때 우리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면서 뛰고 운동하고 합니까? ‘뺄 수 있어. 뺄 수 있어. 이 지긋지긋한 뱃살아’라고 이야기하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면서 뺍니까. 사람은 내가 없는 곳, 사람 없는 곳에 흥미를 두지 않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일과 우리 일이 서로 상관없이 가고 있는지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 없는 이 상태를 사람 없이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내 자리든, 여러분 자리든, 우리교회 어떤 자리든 사람 없이 교인 없이 교회가 되고 교회로 모였음을 주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그걸 예로 들면 제가 지난주에 이 자리에 섰잖아요. 그리고 오늘 다시 이 자리에 섰잖아요. 그러면 저는 어떤 자세로 서느냐 하면 지난 나의 후임자로 지금 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후임 목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임목사의 설교를 비난하고 아주 엉망 취급하는 거예요. ‘그건 설교도 아니야’라고. 이게 저만의 요령이에요.

지난주 설교를 ‘아이고, 그것도 설교라고. 여러분이 불쌍합니다. 저것도 설교라고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 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라는 후임 목사의 자세로서 하는 겁니다. 후임자의 특징은 전임자 까야 자기가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옷가게를 한다면 자기가 지난주 옷가게 운영한 사람을 전임자로 보는 거예요. ‘아이고, 참 옷 하나 팔겠다고 너무 속보이네요’라고 자기는 그게 아닌 것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있으면 그다음부터 모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워졌다고 보지 않고 다른 자기가 잘 되는 것에 신경을 써요. 여러분들이 세계사를 보게 되면 힘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19~20세기 들어오면서 그게 분명해졌습니다.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이나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사에서 보면 저쪽 변두리에 있어요.

그런데 세계 1차, 2차 대전은 누가 하는가. 소위 가장 문명이 발달한, 기술이 발달한, 과학이 발달한, 최대 강대국의 토너먼트가 세계 1차, 2차 대전이었어요. 1차 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제국, 이렇게 한패 먹고, 영국, 프랑스, 이태리, 일본, 러시아 그리고 후반에 미국이 가담해서 벌어진 전쟁이 1차 대전입니다. 그들 국가가 식민지 서로 먹기 위해서 부딪히다가 전쟁을 한 거예요.

2차 대전도 마찬가지예요. 독일, 이태리, 일본이 한편 먹고 저쪽은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가 붙어서 전 세계적으로 아프리카고 아시아고 다 관련되었어요. 2차 대전 때 일본이 시작하니까 만주 먹고 중국 진입하고 했잖아요. 대만 차지하고 필리핀 차지하고 나중에는 필리핀을 미국에게 주고 조선을 자기 것으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필리핀과 조선을 바꿔치기한 거죠.

이게 뭐냐 하면 최고의 짐승의 나라들은 항상 빼앗고 갖는 거예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세상에서 그걸 배운 겁니다. 그래서 항상 내 것은 없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뜻은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라고 하시며 네가 지금 세상에서 가는 방향이 너무나도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힘이 결국은 자기를 찌른다는 것을, 이 세상 나라는 주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가 짐승이 아니라고 하는 순간에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라고 하실 때 이미 끝났어요.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백성, 종, 주님의 신부, 이것은 주께서 지금 하게 하시는데 우리가 너무 가진 것에 대해서 기대하고 나의 도달점, 도착점을 내 쪽에서 자꾸 갖고자 하니까 이미 주님의 신부로 왔는데, 주님의 백성으로 왔는데 이걸 무시하고 내가 가져야 한다는 이거, 주께서는 화내시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내가 있어야 한다는 이것을 치워버리고 네 자리가 우리의 자리라는 것을 늘 바꾸어서 이야기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읽게 하옵소서. 똑바로 보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옵소서.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수상하고 망치게 하는 세상인 것을 우리가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한계와 마지막 모습 그리고 거기서 기다리는 주님의 사랑,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우리 자신을 난로 연통처럼 생각해서 성령의 관통하는 그런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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