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의 처소
2022년 2월 13일 본문 말씀: 욥기 38:19-24
(38:19)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38:20)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38:21)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38: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38:23)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38:24)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대화는 항상 어깃장 납니다. 관심사가 일치되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지만 막상 만나게 되면 대단히 불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며 무슨 질문을 하는지를 익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질문하는 바는 필히 인과성(因果性)으로 진행됩니다.
즉 ‘〜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시베리아 지역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은, 대기 온도의 인관성 때문인데, 대기 온도가 올라가면 쌓여 있는 눈이나 얼음이 녹고, 표면을 덮고 있던 희생이 사라지니 햇빛을 반사하지 못하고 그대로 흡해서 다시 대기 온도가 올라간다는 겁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하면 시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고, 투자를 못하니 돈을 벌 기회를 갖지 못해서 기업 이윤이 추락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인관성의 개인적인 선택에서도 빠짐없이 적용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집을 구입하면서, 나이가 많은 집주인 집에 들어가서 집세를 조금씩 내다가 나중에 집주인이 죽고 난 뒤에는 그 집을 소유하는 ‘비아제’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 주인이 곧 돌아가실 사람같으면 집세가 비싸지요, 집 주인이 건강하면 집세가 낮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집주인이 곧 돌아가실 것 같아서 집세를 내고 들어갔는데 그 노인이 프랑스 최장수 할머니라서 죽지를 않고 도리어 집세 내고 들어온 사람이 먼저 죽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인과성이 탈 난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시도와 결정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존속하는데 기반을 두고 질문이나 행동이나 결심에 나서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인과성 자체를 깨트리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그게 23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를 무죄하다고 보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을 상대로 화평한 가운데 대화할 대상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교만의 원인을 압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박이나 아라비아의 열풍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리기 위한 무기로 쓰여짐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화내신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인간들이 바치는 제물만 바치고 복만 내리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인 욥을 상대로 해서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시기에 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질문의 답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진실 실습을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진행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를 구분짓는데 있어 하늘의 우박을 무기로 사용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진실이 되어 나타난 경우가 출애굽기 9:18-19에 나옵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즉 하늘의 우박은 인간들의 인과성 원칙에 준해서 자신의 노동의 열매요 대가라고 여긴 것에 대해서 무참히 폭격을 내려 죽이시는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로서 우박을 맞지 않는 쪽은 광명이 있는 곳이요 반면에 우박을 맞은 쪽은 흑암이 있는 곳이라는 원칙이 실제로 적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0:11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의 표준으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이 개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조치는 야곱의 12아들을 거쳐 지파가 되면서 이스라엘 전체가 담당하게 되는 기능입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을 병거로 삼으시고 주님께서 친히 이 병거에 올라타서 진격하게 되면, 이 이스라엘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에서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가 구분됩니다. 이 우박에 내림으로서 얻어지는 결과는 ‘진멸’입니다. 여호수아 10:40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그런데 이 진멸의 무기로 동원된 우박은 실은 최종적인 무기의 기능을 미리 보여준 바가 됩니다. 즉 이 세상의 자연현상은 우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앞장 세워 ‘진멸 전쟁’에 나서시는 이유는 오로지 광명에 속한 자들만이 존속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광명이나 흑암이나 가름하는 최종 기준은 신약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판정났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이렇게 판정을 내려놓고서 드러난 결과에 대해서 가차없이 준비된 불로 세상을 살라버리십니다. 즉 우박의 기능과 불의 기능이 같은 기능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계 8:7)
어떤 자들이 광명에 속한 자들일까요? 요한복음 3:21에 나온 말씀처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즉 인과성 원칙을 내세우면서, 내가 행한 일에 적절한 보상이나 보람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진멸당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이 자연세계가 여전히 작동하는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날마다 리셋reset, 곧 재정렬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친히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를 구분짓는 작업입니다. 성도는 ‘내가 누구냐’고 묻는 자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를 물을 수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나 행함의 대가를 얻고자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2강-욥기 38장 19~24절(어디에 있는가)22021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19~24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에서 그렇게 평온한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문한 내용이 우리가 평생을 남들에게 한 질문과 내가 하나님에게 한 질문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관심사에 대해 궁금해서 하나님께 질문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기준이 돌아가는 현실과는 맞지 않는 잘못된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는 원활하지 않고 수월하지 않습니다. 합일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 따로이고 우리 인간들이 사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따로 계산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문의 취지를 알려면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어떠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질문하는 질문을 끄집어낼 수 없었는가.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었기에 이런 질문을 평소에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질문은 인과성(因果性)에 의해서 질문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과성이란 원인과 결과가 딱 맞아떨어지는 그 범위와 구조 안에서 질문하고 답변을 구하는 거죠. 인간은 평생 살면서 문제만 퍼질러 놓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인과성을 갖고 따지는 겁니다. 인과성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시베리아지역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게 되면 대기 온도가 올라가서 쌓여있는 눈이나 얼음이 녹고 표면을 덮고 있는 흰색이 사라지니 햇빛을 반사하지 못하고 그대로 흡수해서 다시 대기 온도가 올라간다’
이게 인과성의 세계입니다. 과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건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예요.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하면 기술에 투자할 여력이 없고 투자를 못 하면 돈을 못 벌어 기회를 얻지 못하니 한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이것도 인간사회에서 인과성이거든요. 그러면 기업까지 갈 것도 없이 개인적인 사정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프랑스에서는 개인 주택을 구매하는 방법 중에 비아제라는 제도가 있답니다. 이게 어떤 제도냐 하면 어떤 집을 살 때 나이 많은 주인에게 세를 내되 주인이 죽게 되면 그 집을 몽땅 자기가 갖는 일종의 연금제도 식으로 집을 구매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약간의 세를 주되 주인의 나이가 건강하면 세가 적고 주인이 내일모레 오락가락하면 세가 많아지면서 그건 조정해서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저씨가 자기도 그런 식으로 집을 구매하기 위해서 어떤 할머니 집에 세를 냈는데 그 할머니가 비실비실 곧 돌아가실 것처럼 생각했는데 나중에 프랑스 최장수 할머니가 되었어요. 그게 바로 인과성이에요. 계산하는 거. 그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세내던 젊은 사람이 먼저 나이 들어 죽어버렸어요. 집도 못 하고 죽어버리고, 인과성 박살 났어요.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인과성 노리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 구하는지 너무 잘 아세요. 그러면 그 인과성을 끊어야 하거든요. 그 끊는 것을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22~23절에 나옵니다.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그러니까 인간들이 시베리아 눈 덮인 것이 녹는 것을 이해할 때는 인간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더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서 인과성을 따진다면 하나님은 광명의 세계와 흑암의 세계 둘로 애초부터 그렇게 계획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로 우박을 사용하는 거예요. 우박이라는 자연현상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24절에 동풍이 나오는데 이 동풍은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말합니다. 갑자기 뜨거운 온도가 확 높아지는 것이 지구 온난화 때문이 아니에요. 온도가 높아지는 것은 너희들 흑암에 사는 인간들은 이 땅에 살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광명의 세계가 따로 있고 흑암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그것조차도 모르느냐를 알리는 용도로 자연 세계가 활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이런 질문을 어떻게 인간이, 그런 식으로 자연이 활용된다는 것을 어떻게 인간이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못하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축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자꾸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자리가 광명이 있는 곳인가 아니면 흑암이 있는 곳인가, 네가 딛고 있는 곳을 보라는 겁니다.
제가 유튜브 강의(379강) 올릴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본향을 향해 가는 것은 내가 내비게이션 가지고 꾸역꾸역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발 딛고 있는 바닥이 컨베이어시스템처럼 저절로 움직이듯이 주님의 계획이 내 발 딛고 있는 것을 자동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까지 옮겨 가는 거예요.
내가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두 바퀴 구르든, 세 바퀴 구르든, 오백 미터 스케이트를 타든, 중국이 메달 다 가져가든 관계없이 메달 몇 개 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 주님의 계획대로 광명에 거할 자는 광명으로 가고 흑암에 거할 자는 흑암으로 그렇게 계획대로 너는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너는 너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처소로 네가 사라질 수 없다.
사과에 벌레 먹은 곳이 있잖아요. 구멍은 분명 나 있는데 벌레가 안 보여요. 그때는 칼로 딱 쪼개보면 사과 내부에 벌레가 파먹은 길이 다 보이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숨어서 기어들어 가더라도 잘라보면 다 들통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숨을 곳이 없어요. 자아 하나를 숨길 곳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간단합니다.
우박이 이렇게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해 예비 되었다면 이걸 실제로 적용한 역사가 있어요.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옵니다. 항상 욥을 설명할 때 욥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답을 얻지 못해요. 그냥 질문을 주고받을 뿐이지 답을 얻지 못하는데 답은 벌써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답이 있어요.
욥 시대는 아브라함 시대인데 욥은 아브라함을 모르잖아요. 아브라함을 보면 창세기 12장 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라고 나옵니다. 광명과 흑암이 이미 아브라함 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부챗살처럼 퍼진 열두 지파예요. 그 열두 지파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덩어리졌고 뭉쳐졌다고 보면 됩니다.
개인이었던 아브라함이 하나의 집단화 된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고요. 그 이스라엘의 한 일이 뭐냐. 아브라함의 한 일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듯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게 되면 기생라합처럼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건 진멸 당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서 왜 하나님이 마차나 병거를 타듯이 주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타서 마차를 모는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이럇~’하고 모시면서 전투하고 전쟁을 벌이시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여호수아 10장 11절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도대체 이 전쟁이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이냐 아니면 우박을 앞장세우신 하나님의 전쟁이냐를 분명히 보라는 겁니다. 칼에 죽은 사람보다 우박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겁니다. 죽는 사람 입장에서는 우박에 죽으나 칼에 죽으나 마찬가지지만 누가 죽이고 왜 죽이는가.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를 분명하게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부터 계획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심지어 나중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를 함께 분리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라고 하시고는 “욥아, 네가 그것을 아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네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걸 모른다고 나와 있어요. 주님께서 여기 21절에서 비꼬고 있는 겁니다. “네가 천 살 만 살 되어도 알 수 있겠느냐. 너는 몰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22절에 보면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라고 나오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질문은 인간 쪽에서는 해낼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보는 그러한 인과성이 원인과 결과로써 세상을 짜 맞춘다는 것인데 이건 이스라엘 역사에 비춰볼 때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 때 우박이 내릴 것은 상상도 못 했고요, 심지어 여호수아 10장 40절에 보면 태양이 멈춘다는 것은 여호수아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뭔가 아쉬움이 있어서 어떤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내용조차도 주님께서 그 내용을 여호수아에게 집어넣어 줬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춰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은 평소에 여호수아가 해와 달 정도는 내 손에서 다룰 수 있다는 자세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철저하게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종속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계획했던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가 둘로 나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그걸 뚜렷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 우박 이야기가 여호수아 말고 출애굽기 9장 18절에도 나옵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애굽이냐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광명이냐 흑암이냐는 것은 그 상황에 따라서 둘을 반드시 구분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원리원칙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야지 않습니까.
이걸 그냥 ‘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우박 내려서 작살났구나’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리셋(reset)된다고 하는 겁니다. 리셋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재정렬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우박같은 요소가 우리 인생에 개입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것은 날아가고 오늘 새로 주신 주님의 조건하에 내가 누구냐가 아니고 내가 지금 어디에 속했느냐를 매일같이 보게 하고 확인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20절에 보면 신약에서는 어떤 식으로 리셋(reset) 되느냐 하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나오는데 이게 정말 어렵고 중요한 말씀이거든요.
그들이 빛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악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이고 악인인 것은 이미 빛 속에 광명 속에 들어온 한에서만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는 것은 내가 평생 일궈놓은 어떤 범위 내에서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과성 가지고 나는 이만큼 노력하고 애썼다고 어떤 자리를 잡는데 그 자리 말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를 보여주는 자리가 광명의 자리입니다.
뒤에 요한복음 3장 21절에 보면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일을 해도 내 일은 애초에 없었다는 겁니다. 내가 아침에 무엇을 먹고 저녁에 뭘 마시든 그것조차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께서 제공해서 먹게 된 거예요.
저녁마다 골라 먹는 맛이라고 해서 아이스크림 집에 가서 온갖 것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저녁마다 타이밍 맞춰서 있는 반찬 주면 투정하지 말고 주는 대로 먹어. 그러면 기도하죠. ‘주여, 아내가 라면을 끓여 줬습니다. 컵라면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라고 해야죠. 물론 그런 말 하는 자체가 불만이 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바빠서 한 끼는 컵라면으로 준비했다면 그것조차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왜?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신 행위예요. 내가 내 인생 다듬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날마다 리셋(reset)되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인과성이 살아있으면요, ‘내가 너에게 월급 가져다준 것이 얼마인데 네가 그 돈 다 날리고 밥은 컵라면으로 주면 내가 무슨 재미로 이 가정에 월급 가져다주냐’라고 되면 이건 리셋(reset)이 안돼요. 재정렬이 안 된다고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예요.
지금 컵라면 먹었다고 남편이 ‘내가 월급 가져다준 것이 얼마인데’라고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안 아프고 라면 끓여준 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지금 병원에 한 번 누워봐? 암 걸려서 한 번 누워봐? 나 만난 거 후회하도록 해줘?’라고 하면 남편이 ‘아이고, 컵라면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튼튼하게만 살아다오’라고 나올 겁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주 안에서 행하신 거예요.
사람이 인과성에 놀아나게 되면 자꾸 ‘내가 한 것이 얼마인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내가 성과를 어디에서 찾지? 내 인생을 누가 보상하고 만회해주지? 나는 이런 대우 받을 사람이 아니냐’라고 맨날 자기 성과만 기대하고 있단 말이죠. 그럼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요? 뭐 우박에 한 번 맞아볼래요?
이스라엘에서의 출애굽이나 우박을 동원한 이 전쟁은 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진멸하게 하는 거예요. 이방민족을 진멸하게 하는 겁니다. 이 구절은 어려우니까 제가 약간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10장 40절에 보면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를 진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진멸하게 하면서 이스라엘은 뭘 먼저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 일은 내일이 결코 아니다. 왜? 여호와의 행하신 일이니까’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행한 것은 진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나중에 사울 왕 때 하나님을 버리고 아말렉과 전쟁할 때 건질 만한 중요한 거, 튼튼한 소나 양, 이쁜 처녀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사무엘이 화를 낸 거예요. “왕은 왜 하나님이 시킨 대로 안 합니까?” 그러니까 사울 왕이 “백성들이 원해서요. 그리고 좋은 양이나 소는 남겨두었다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더 좋아하실 거라고 하네요”라는 그 생각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취지를 지금 망각한 것이라고 따지고 있습니다.
리셋(reset)이라는 재정렬 그러니까 항상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보상을 기대하는 거예요. 내가 힘든 만큼 어떤 대가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린 자신이 어제부로 진멸 당해도 마땅한 것을 자꾸 놓치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날씨가 포근했지만, 하늘의 자연은 우리가 착해서 포근한 것이 아니고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우박 내릴 수 있지만 봐주고 있는 겁니다. 기회를 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구약에서 그렇게 되어있다면 신약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너무 유명한 말씀인데요,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나오고 그다음 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제는 주께서 광명의 사람, 건질 사람들 다 건져버리면 더는 이 땅에 사람 살려둘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한꺼번에 처리해버립니다. 요한계시록 8장 7절에도 우박이 나오는데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 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 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약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천사 1은요, 예수님 십자가 위에 첫째 천사가 하는 기능은 심판하는 일이에요. 사방에 피할 곳이 없도록 만들어 놓고 한꺼번에 전부 다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그 심판할 때 우박과 불이 하나님의 오늘 말씀처럼 전쟁과 그들을 멸망하는 무기처럼 자연 세계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묘사하면 동그랗게 생긴 것이 자체적으로 폭삭 무너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광주에 39층짜리 아파트 외벽이 고스란히 무너지는 것처럼 자체적으로 버티다가 버티다가 더 이상 건질 것 없으면 그냥 자체적으로 와르르 무너져서 깔려 죽는 식이 됩니다.
그러면 아직도 멀쩡하다는 말은 택한 백성을 아직 다 건지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어제 알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가 그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경험하게 되면 무슨 효과가 있느냐 하면 내가 무슨 보상을 원하면 항상 불만이에요. 불만이고 두렵고 무섭고. 그런데 리셋(reset) 되어버리면 어제로 진멸해도 마땅한데 주께서 주신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주님의 행하심이고,
광명의 처소와 흑암의 처소를 구분하시는 그 작업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 자신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것을 진행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그 기쁨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세계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주의 손에 달렸고 자연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마시고 이미 필요한 것은 주님이 알아서 햇빛이고 공기고 온도 따뜻하게 맞추는 것까지 주님 자신의 일에 필요해서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거지 우리 원하는 것을 주께서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이 몰랐던 거, 내가 사는데 무엇을 주님이 도와주시는지 생각하는 사고방식 그것이 잘못이었고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하냐를 빛에 속하는지 어둠에 속하는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있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