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땅과 지옥문

아빠와 함께 2022. 2. 7. 12:17

땅과 지옥문 

2022년 2월 6일            본문 말씀: 욥기 38:16-18

(38:16)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38: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38:18)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하나님에게 질문해서 답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질문하시고 우리 인간은 그 질문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인간과 직접 만나게 되면 인간은 없는 존재, 즉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친히 만드시는 그 속에서 동행하신 하나님이 주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의 상상하는 신은 곧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은 인간과 협의가 가능한 신입니다.

하나님도 좋고 인간도 좋게 되는 건설적인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인간은 뇌물을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서 바치고 그 바친 귀한 것에 대해서 신은 기꺼이 응답할 책무가 주어졌다고 믿는 그 하나님이 곧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신들이 기도한 대로의 효험이 없으면 언제든지 ‘종교 갈아타기’ 혹은 ‘신 갈아치우기’를 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은 결국 한평생 살아온 것은 다 자기 덕이지 결코 신이 도와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있게 토해놓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상상이 멈추면 신도 멈추는 겁니다.

사무엘하 5:20-21에 보면,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효과가 떨어진 신은 언제든지 후딱 버릴 의향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은 꼼짝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욥은 자신이 교만했음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인간은 애초에 교만했습니다.

욥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교만의 일부입니다. 모든 산 사람은 다 교만합니다. 인간은 죽기전까지는 계속 교만합니다. 인간들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바를 인정하지 않고 본인이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하고 있음을 점에서 스스로에게 가상하게 여깁니다. 즉 땅에 대해서 인간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땅은 생존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질문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 아니라) 욥에게 땅에 사망문 찾아봤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땅에 대한 이해나 판단은 어디까지나 문제없는 자신들이 문제없이 잘 살기 위해 존재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해서 땅을 인간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탐구합니다. 자신들 살 궁리를 위해서입니다. 잘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지질학자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땅에 잘 아느냐?” 물으면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예 우리가 사는 지구의 원소 조성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철이 33%, 산소 31%, 규소 19%, 마그네슘 13%, 니겔 1.3%, 칼슘 0.9%, 알루미늄 0.9%, 기타 0.3%”라고 답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몸의 세포에 관한 원소 조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주의 118개의 원소 중에서 산소 65%, 탄소 18%, 수소 10%, 질소 3%, 칼슘 1.5%, 인 1%, 기타 1.5%라고 답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원소의 뭉치가 인간입니까?  즉 인간에게는 인간이 무엇이냐가 실은 필요치 않는 겁니다.

인간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님 차원에서 물으신 겁니다. 답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문제를 지니고 질문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하자가 없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에 접근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컴퓨터가 있다고 칩시다. 하나의 컴퓨터에는 데이터와 규칙을 집어넣어 결과물을 얻고자 하는 컴퓨터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컴퓨터는 데이터와 결과물을 집어넣어 규칙을 얻는 컴퓨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루시면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결과보다 세상의 운영 규칙을 나타내십니다.

이 운영 규칙이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위해 마지막 때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 곧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영이 미리 구약 때 욥의 시대에서 활동하신 겁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인간들이 생각하는 땅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공간이라고 여겨서 땅을 관찰하고 측량하다보니 하나님의 언약의 입장에서 필요한 땅이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인간들이 살펴도 사망의 문, 곧 지옥문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어떤 골짜기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에 해골들이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주께서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뼈들에게 말하고 시킵니다. “마른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즉 평소에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왔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결코 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통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식으로 우리 성도는 살아 있었던 겁니다.

그 말씀 세계, 언약의 세계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도 분명히 있고 천국문도 있고 지옥문이 있는 겁니다. 지옥문은 어디 있을까요? 이 세상 전체가 지옥문이고 이 땅에서 어느 곳에 있든지 천국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18:34-35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땅을 몰고 오실 분이 메시야로서 그분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도 나뉘어지게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고 골로새서 3:3에서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적 차원으로 보면 이 세상은 전부가 지옥문입니다. 어디에 살던지 상관없이 넓은 길로 가면 지옥입니다.(마 7: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매일 삶이 늘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1강-욥기 38장 16~18절(땅과 지옥문)2202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16~18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네가 바다 근원에서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찌니라”

답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은 구약 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답은 신약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죠.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고, 이방인에게도 질문을 던지시는 거예요. 질문을 던지시는 이유가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역량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의하거나 협력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고, 그렇게 진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협조하고 협력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민족에게는 신전이 있어서 하나님과 좋게좋게 우애롭게 살게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우리에게도 이익이고 하나님에게도 이익이니 이 재물 받으시고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 주시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순종하고 보답하겠습니다. 이러한 거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이것은 마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회를 이루며 협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협조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에 다윗과 전쟁할 때는 그들이 가져왔던 전쟁에 동원한 우상을 갖다 버리고 도망을 쳐버려요. 그 말은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신을 교체할 마음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나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을 때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신이라고 간주해서 다른 현실적인 효과 주는 신으로 바꿀 만한 그런 마음준비가 되어있었던 겁니다.

이익이 없는데 그 신을 왜 믿느냐는 식으로 이방 민족은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욥이 만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차이점은 성경을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나요.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그게 전부예요. 하나님 따로 있고 주님 따로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여호와 따로 있고 십자가 지신분 따로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민족들은 하나님을 선택했지 십자가 지신 그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해 폭을 넘어서 버린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그 모든 범위를 넘어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해 폭을 넘어선다는 말은 아주 쉽게 말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신을 믿되 이용가치를 계산해서 믿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신의 범주예요. 범위입니다. 신이 있다면 나에게 도움을 주셔야 신이 있는 거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인간이 그렇게 결정해 버린 거예요. 여러분도 교회 한 40~50년 다니면서 가끔 그런 생각 들지 않던가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상상해서 헛짓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요. 처음 교회 열심히 다닐 때는 문득 드는 것이 아니고 문~~~~득 들지요.

그렇게 몇 개월마다 한 번씩 생각 들다가 나중에 나이 들면 문득문득문득...들죠.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아버님, 하나님 믿어야죠’라고 하면 ‘야야, 하나님 내가 평생 믿었는데 없더라’라고 끝나버려요. ‘예수 믿었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뭐 해준 거 없어. 가만히 따져보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아니고 내 인생 알아서 고생고생하면서 내가 너희들 다 키웠고 너희들 다 밥 먹여줬다’라는 고백으로 그만 툭 튀어나오죠.

이 말은 비로소 돌아가실 때 되어서 억눌렀던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은 아무짝도 소용없더라. 신이 죽었다는 말이 나도 나서서 ‘여기 한 표요’라고 손드는 식으로 인간은 자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신에게 비겁하게 의지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한결같은 열망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기에게 자랑할 거리가 계속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신이 했다면 나의 영광을 신이 빼앗아 가는 식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신은 싫고 다만 주님께서 영광을 잘 해줬다고 격려할 때 그 신은 같이 사귈만한 가치가 있는 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주님의 차이점은 그냥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가 재물 가져다가 안겨주고 섬기고 하면 되는 거예요. 마치 병든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뒷방 차지하고 있을 때 용돈 드리고 먹을 것 주시고 돌아보면서 가끔 전화 드리고 찾아뵈면서 맛있는 간식해 드리고 때로는 좋은데 모시고 가서 구경시켜드리면 자식으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며느리가 와서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저것도 좀 드셔보세요. 식혜 드세요. 감주 드세요’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시어머니가 ‘스톱, 잠깐만. 네가 땅의 넓이를 아느냐’라고 하면 ‘어머니, 노망드신 것 같은데 그만하시고 우리가 섬기는 대로 곱게 받아드시면 사랑받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마시고 그냥 받으세요’라고 하면 시어머니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질문할게’라고 하면서

“네가 바다 근원에서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라고 하면 며느리가 저지하죠.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시면 자식들에게 미움받습니다. 효도 못 받아요. 정신 차리세요’라는 식으로 자식들이 불쾌감을 드러내죠. 왜 늙은 부모가 나보다 똑똑하냐는 겁니다. 등신같지 않고. 왜 아직도 똑똑하고 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인간에게 섬김받으면 되는 것이지, 하나님 자기가 뭔데 지금 우리가 잘하고 있는데, 과학이 발달 되었는데, 이만큼 경제가 발달 되었고, 로켓 타고 화성도 가고, 마, 달에도 가고, 마, 최민식이 이야기한 것처럼 잘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믿어요. 종교 그딴 것이 뭐가 필요합니까. 과학이 있는데. 과학이 종교를 대신했잖아요. 옛날 종교는 미신이었잖아요.

지금 따져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신은 그냥 뒷방 차지하고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천국이나 보내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쪽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겁니다. 저쪽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겁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전부 다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교만한 겁니다. 그놈의 살아있는 것이 문제예요. 살아있으니까 자꾸 신을 섬기려고 하는 거예요. 신에게 자꾸 어떤 질문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신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왜? 자기는 부족한 것이 없고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뭐가 진리입니까, 하나님?’이라고 묻는데 진리가 문제가 아니에요. 진리냐, 비진리냐가 아니고 네 자체가 그렇게 묻는 그 자체가 교만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은 없는 존재예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예요. 그래서 질문을 통해 욥 자체를 있으나 마나 한 인간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옛날에 경북여고 다니는 고모가 계셨는데 경북여고 다닐 때 가정시간에 뭘 배웠는지는 그 열 명 넘는 식구들이 다 알아요. 고모가 카스테라를 해주면 그날은 가정시간에 카스테라 만들었어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시집와서 요리학원 다녔는데 그날 저녁 메뉴를 보면 요리학원에서 배운 것이 나와요. 짜장면을 배우면 그날 저녁은 짜장면 해주시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나타남, 행위라고 하는 것은 나 여기 있다는 가치, 존재의 의미를 부각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인간에게는 진실된 거예요. 거기에 무슨 오류가 있어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데 이 자체가 무슨 오류예요. 내가 여기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질문하는데 그 질문 중에서 유념할 것이 있어요.

질문이 그냥 ‘욥 너는 기죽어 있어라. 너는 그냥 나에게 없는 존재야’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질문 자체가 인간에게 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누구에게 하신 거냐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 할 질문이에요. 욥의 모든 질문을 누가 가져가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싹 가져가셔서 자기가 성취해 버리시거든요. 질문하는 자가 하나님이고 그 질문에 응답해서 정답을 내놓으시는 분은 욥이 아니고 욥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래서 그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네가 땅에서 지옥문을 발견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걸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질문해 봅시다. 과학자들, 특히 지질학 전공한 사람들, 자연과학 전공한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은 땅에 대해서 전공자인데 땅에서 지옥문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어보세요. ‘이 세상은 100개가 넘는 원소로 구성되어있다’라는 이것이 인간이 알고 있는 땅의 바닥입니다.

땅에서 시료 채취해서 분석해 나가면 110가지 정도, 정확히 하면 그 이상이 되겠지만 대충은 100가지로 보면 됩니다. 나머지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질학자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땅에 잘 아느냐?” 물으면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예 우리가 사는 지구의 원소 조성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철이 33%, 산소 31%, 규소 19%, 마그네슘 13%, 니겔 1.3%, 칼슘 0.9%, 알루미늄 0.9%, 기타 0.3%”라고 답할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이렇게 원소로 분류하면 지옥같은 원소, 지옥이라는 원소가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리고 인간 몸의 세포에 관한 원소 조성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주의 118개의 원소 중에서 산소 65%, 탄소 18%, 수소 10%, 질소 3%, 칼슘 1.5%, 인 1%, 기타 1.5%라고 답할 겁니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이게 인간입니다. 지구로 보면 지구에 제일 많은 것은 철, 규소, 이런 것이 많아요. 동그란 구같은 인간의 요소(지구 내부구조)가 내핵, 외핵, 맨틀, 지각으로 구성되어있어요.

아무리 땅을 파고파도 거기에 지옥문은 없습니다. 이건 인간이 교만해서 그래요. 시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라고 하시는데 인간은 지금도 땅의 넓이를 측량할 수 있습니다. 측량하지만 그 땅은 그 땅이 아니에요. 그 측량하는 땅에서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은 인간은 측량 못 합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을 인간은 측량 못 하죠.

에덴동산이 분명히 나오는데 에덴동산은 없다고 봅니다. 일률적으로 모든 땅을 동질화시켰어요. 그러면 인간에게 측량의 대상이 되는 땅은 뭐냐 하면 인간 본인들이 살기에 편리한 땅이라는 이런 규정을 먼저 해놓고 내 살기 위해서 카운트하는 거예요. 수학적으로 카운트하고 측량하고 계산하는 겁니다. 에스겔에 성전이 나오는데 성전 측량이 나오거든요. 에스겔 성전 측량은 그게 인간에게 없는 땅이에요.

없는 땅인데 천사가 와서 측량을 해버려요. 사람들은 간단합니다. 그 땅은 없다. 그런데 없기는 왜 없습니까.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그 땅이 나오잖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땅을 연구해도 지옥과 천국을 발견해 낼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교만해서 그래요. 그 교만한 논리를 제가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진리를 탐구할 때 현재 나오는 정보(데이터)와 인간이 미리 알고 있는 규칙을 컴퓨터에 집어넣어서 어떤 예상되는 질문을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데이터와 결과물을 집어넣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규칙을 끄집어냅니다. 죽은 데서 부활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은 데서 부활했다고 하면 인간들은 ‘나도 부활하고 싶다’라고 나오죠.

노노노.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죽은 데서 부활하느냐를 욥 너는 아느냐?’를 지금 하나님은 욥에게 지금 죽은 데서 부활하라는 것이 아니고 죽은 데서 부활하는 규칙을 네가 알고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그 규칙에 대해서. 그러면 그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면 욥이 포함되어 있단 말이죠. 욥이 포함되어 있으면 죽은 자가 그냥 죽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죽어버리면 그만이에요. 죽은 자가 죽고 난 후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어떤 결과에 대해서 이미 욥의 선을 떠나버린 겁니다.

그게 에스겔 37장에 나오는데 이건 여러분 안 찾아봐도 훤히 아는 겁니다. 인자 되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어떤 골짜기에 가요. 골짜기에 가니까 거기에 어떤 뼈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질문을 해요.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물으세요. ‘이 뼈들이 언제 죽었느냐? 저들이 무슨 죄로 죽었느냐? 누가 집단적으로 살해를 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니고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여기에 에스겔 답변 잘해야 합니다. 모른다고 하면 안 되고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이 뼈들은 주의 말씀으로 살 것입니다”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에스겔 본인이 지금 내가 과학적 인식과 판단으로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겔은 매일같이 질문 듣고 매일같이 답변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에스겔아, 내일 며칠이냐?” “2월 7일입니다” “네가 내일 살겠느냐?” “주께서 말씀대로 살리시면 삽니다”라는 것을 평소에 늘 습관처럼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신 받은 에스겔은 항상 죽은 자로 빨리 원위치,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야 해요.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 계시지 내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계신 분이 계신 그 활동을 하게 되면 그 생산되는 결과가 나니까요.

이럴 때, ‘오늘도 내가 살았구나. 신난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일관된 정확한 규칙대로 시행하셨음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 규칙에 해당되는 분이 누구냐 하면 진리요, 생명이고 길이 되신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냥 겉저리로 주님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거울 앞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도 그래요. 늘 아무것도 없는 처음 개척교회 할 그때로 계속 돌아가야 해요. 아까 피아노 반주를 들으면서 개척교회 할 때가 생각났어요. ‘아, 저거다. 바로 저 반주였어’ 지금 반주자가 바뀌었는데 40~50년 전 그때 뭐든지 귀하던 그때가 생각난 겁니다. 사람이 작은 것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받고 있으면 그리고 말씀도 너무 많이 들으면 시시해져요.

그냥 술렁술렁 넘어가고 후딱 다른데 관심둬요. 욥이 하나님을 만나는 이 찬스, 이게 아빠 찬스가 아니고 하나님 찬스인데요, 도대체 내가 누구냐를 다시 질문받는 겁니다. ‘나는 결과를 얻습니다’라는 것에 좋아하지 말고 어떤 원칙에 의해서 주어졌습니까? 그 원칙이 바로 이제부터 이야기할 ‘지옥의 문은 어디 있느냐’라는 겁니다. 이거 모르면 오늘 설교 헛들은 거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지옥의 문이, 사망의 문이 있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과학을 공부해도 사망의 문이 없거든요. 땅속에서 마그마가 나오는 지옥의 문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데 가스가 유발되면서 불꽃이 피어올라서 환경에 해를 끼치고 지역 주민의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고 해서 메운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 지옥문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땅에 지옥문이 있다고 하고 인간들은 땅에 없다고 하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모든 땅이 지옥문이에요. 그러면 모든 땅이 지옥문이 되려면 누가 와야 하느냐. 땅을 넓게 보시는 분이 오셔야 해요. 예를 들면 누가복음 17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길지만 축소해서 말씀드리면 노아의 때를 쭉 이야기하시고 34~3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땅인데 평면적으로 두 남자가 같이 잠을 자고 두 여자가 같이 풀을 뽑고 있어서 누가 봐도 두 사람이 나란히 있어요. 같은 측면에. 그리고 매를 가는 그 장소가 땅입니다. 땅에 지옥문 없어요. 그냥 잡초를 뽑고 있지 지옥문 찾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천국 문 없습니다. 없는데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알고 있는 땅에 사건이 플러스 되는 거예요.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무슨 사건? 심판 사건. 심판 사건은 메시아가 개입되는 것을 가지고 심판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지막 심판 날에 메시아가 오게 되어있어요. 메시아가 와서 조용해도 이미 심판이 시작된 거예요. 하늘에 계신 메시아가 땅에 내려오면 이 땅은 심판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의 범위가 넓혀지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그 집 앞에 거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거지는 천국 가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 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 입장에서는 그 사람은 지옥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해석할 때는 일반적인 땅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땅에 사건이 일어나 버립니다.

그 땅에 사건(십자가)이 일어나 버리면 땅 자체에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두 종류의 땅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것이 언약 사건인데 하나님의 언약이 품고 있는 새로운 땅, 볼펜 심 같은 예수님이 같이 몰고 오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예수님이 앞장 서버리면 예수님이 뾰족한 심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땅은 비로소 지옥문이 되고 천국 문이 되는 겁니다.

말을 하는 것보다도 쉽게 갑시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아무것도 없는 2차원 세계에서, 누구는 이 세상을 삼차원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2차원입니다, 2차원 세계에서 예수님이 열쇠를 가지고 여니까 그 여는 장소가 이게 천국 차원으로 가는 출입문이 되는 거예요.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이야기할 때 제가 차원 이야기하면서 손가락 가지고 평면에 누르는 그림 그렸지요. 바닥에 사는 벌레들은 이쪽 손가락과 저쪽 손가락까지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쪽 손가락과 저쪽 손가락이 다른 차원에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그냥 낮은 차원에 접촉한 거죠. 그런데 낮은 차원에 있는 생물들은 자기 입장에서 새끼손가락 있는 곳과 엄지손가락 있는 곳까지 시간이 흘러야 그게 나온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실은 그게 동시성인데요.

한 몸에서 나오거든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차원에서 이야기한다고요. 그런데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자, 한번 천국 가볼까, 지옥 가볼까, 뭘 믿으면 되지?’라고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천국 문을 찾아가서 자기가 믿음으로 들어가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 주님이 사건으로 덮쳐야 해요.

두 사람이 매를 갈고 두 사람이 잠을 자도 그냥 이미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 땅이 곧 천국의 문이 되고 이 땅이 곧 지옥의 문이 되는 거예요. 땅의 개념을 메시아를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그 개념을 확대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이 어디냐? 어느 곳도 지옥이 되고, 천국이 어디냐? 어느 곳도 천국이 되는 거죠. 내 주 모신 곳이 천국이고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천국이죠.

이것이 인간의 과학적 인식을 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는 인간에게는 납득이 안 되죠. 납득이 안 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만이라고 합니다. 네가 믿는 신 자체가 이건 거짓된 너 자신을 위한 신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불연속성을 계속 강조했었는데 요나의 표적이 나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요나가 물에 빠지기 전에 큰 물고기에 삼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요나의 자기 인생은 불연속성으로 역사는 끝났어요. 자기 차원에서 요나는 끝났습니다. 물에 풍덩 뛰어들면서 자기는 끝났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요나를 받아줬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 땅은 네가 죽으면 그만인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땅을 누가 접수했는가. 주님이 접수해서 이제부터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구분하기 위해 주님이 활동할 땅이지 네가 활동할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활동해 버리면 땅은 천국과 지옥으로 평수가 확산되고 확대됩니다. 그래서 오늘 욥기에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욥에게 말합니다. “네가 땅을 다니면서 지옥문을 봤느냐?” 욥은 금시초문이죠. 그러니까 욥은 주님에게 질문할 쨉이 못 되는 겁니다. 결과는 신약에 와서 주님이 이미 결과를 알고 있어요. 욥은 새삼스럽게 ‘아이고, 이제 하나님과 상대 안 해야겠다. 이제 하나님과 바이바이 해야겠다’라고 말할 처지가 못 됩니다.

욥이 알아야 하는 것은, 곧 알게 되는데, 내 쪽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만나 달라고 요청할 권한이 나에게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는 것은 내 쪽에서 먼저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할 입장이 안 되기 때문에 헤어짐도 없어요. 사람이 헤어진다는 것은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너를 만나고 싶었다가 선행될 때 그다음에 헤어지는 것이 있어요.

남녀 간에 연애할 때 한 5년 사귀어 보세요. ‘우리 심심하니까 헤어지자’라고 하죠. 보통 다들 심심해서 헤어져요. 지루해서 헤어진다고요. 그걸 권태라고 하는데 이미 20대부터 권태예요. 만나고 헤어지고 이게 내 선택이 아닙니다. ‘나 이제 주님과 헤어질래’, ‘아버지, 주님 믿어야죠’, ‘나 이제 헤어질래’, 이런 것들이 성립이 안 됩니다. 본인이 예수님을 자기가 만나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욥도 마찬가지였어요. 자기가 하나님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시건방진 교만 덩어리였습니다. ‘이 교만한 욥아, 네가 의가 어디 있냐? 너는 의 없어. 너는 애초부터 교만했다’라고 이것을 주님께서 질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러한 정답이 덮치게 되면 우리 인생은 뭐냐 하면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오늘 하루하루 말씀의 사람으로 살려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제넘게 나설 위인도 못되고 그럴 위치에 있는 것도 모르고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그 넓은 길이 영생의 길인 줄 알고 착각했었습니다. 이제는 방향이, 가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목적보다 방향이 더 중요함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 없는 황무지  (0) 2022.02.20
어디에 있는가  (0) 2022.02.15
공포의 산물  (0) 2022.01.31
바닷물 관리  (0) 2022.01.24
말씀으로 공격  (0)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