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부정한 백성

아빠와 함께 2022. 2. 26. 02:59

부정한 백성

2012년 7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4:13-17

( 애 4:13, 개역)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렀도다』

(애 4:14, 개역)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 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애 4:15, 개역)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애 4:16, 개역)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애 4:17, 개역)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 보았도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 인간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루 스케줄 중에서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개입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가 언제일까요? 내 뜻대로 잘 될 때가 하나님의 일이 개입되는 걸까요 아니면 내 일이 제대로 알 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 경우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원칙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이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를 신자와 불신자를 가려내고 구분짓고 구별하시는 식으로 인간을 향하여 일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자가 누구냐를 찾으시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지금도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탐색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방나라 구원받으라고 말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 백성을 백성으로서 간주하시고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 같은 내용을 불신자에게 갖다 대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은 오로지 자신이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인간이 도화지라면 이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은 모두 자기 자신이 그리고 싶은 야심과 계획과 희망을 그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이 나서서 직접 그리십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본디 원했던 바가 전혀 그려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 사람의 인생에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도화지 삼아 그리고 싶은 것은 거룩이요 의로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이나 의에는 관심없습니다. 아마 이점에 있어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기어이 하나님이 거룩와 의의 그림을 그려내고 맙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이 여전하고 일관되고 지속되고 있음을 말씀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성도의 일상에 개입하게 될까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방민족 앞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하십니다. 마치 어린 아들이 밤에 오줌을 이불위에 싸니 얼마가 아이에게 키를 쓰게 하고서는 이웃집으로 다니면서 소금을 얻게 하는 풍습과 같습니다.

이게 어찌 자기 자식을 미워하는 하는 일이겠습니까 남의 자식 같으면 소금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기 때문에 특별히 키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 백성이 거룩한지 아니면 부정한지를 살피십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하루 종일 보내는 스케줄 안에서 들어있지 않는 관심사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기 백성과 남의 백성을 가려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의 안에서 지내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롯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 당시에는 노아가 의인으로 살아야했습니다. 비록 롯이나 노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의해서 무관심과 배척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그 방식이 곧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려내는 방식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볼 줄 모릅니다. 도무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자체에 관심두지 않습니다. 취미가 같고, 성격이 같으면 누구나 구애없이 관계가 갖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 구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자가 없는 겁니다.

바로 이런 판국에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거룩의 기준을 작렬시킵니다. 레위기 10:10에 보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거룩’과 ‘속된 것’이 짝을 이루고, ‘부정’과 ‘정함’이 짝을 이룹니다. 곧 속된 것이 거룩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왜 부정한가 라는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하는 겁니다.

그 거치는 과정 중 하나가 레위기 12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2-5절)

즉 이스라엘의 어떤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그 약속의 땅에서 더러움의 증거로서 부정한 행위를 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더러운 여인이 아들이라는 더러운 자식을 낳아서 거룩한 땅을 더렵혔기에 40일 동안 기다려야 정상적인 존재로 일상적 삶에 나설 수 있다는 겁니다.

레위기 12:6에 보면,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안목으로 봐서는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7일+33일=40일 동안 이 여인은 거룩함에 참여 하지 못할 존재가 되는 것은 본인이 본인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거룩의 거룩을 그리시는 겁니다. 그 그림은 곧 죄인을 속죄하기 위해서 누군가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그림입니다.

40일이란 이 어두운 세상에서 흐르게 될 모든 시간을 응축한 기간입니다. 즉 그 어느 인간도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기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벗어날 수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이 더러운 세상에서의 하루 일과를 모두 죄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부정하다는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이럴 때 성도는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름하는 일관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 종일 자기 자신만 챙기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애가4장 12-16(부정한 백성)1207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4장 12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4:12-17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 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성경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이것이 사람에게 준 말이 아니고 신자, 성도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자체가 신자냐 불신자냐를 가름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신자 같으면 여기 있는 이 내용이 자기를 구원하는,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자기를 살리는 말씀으로 이해할 것이고 만약에 불신자라면 오늘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옛날에 그랬겠지, 하고 외면하고 말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신자 될 사람, 쉽게 말해서 인간은 뭐든지 행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행한 것에 대해서는 일체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조치를 하는데 그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불신자가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하고 상관이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되기에 믿고 싶어도 믿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었는데 그 말씀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보다 더 다급하고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에서 신자냐 불신자냐, 이것을 가름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뿐만이 아니고 성경전체에 그것이 들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췌해야 될 것은 신자냐 불신자냐, 성도냐 성도 아니냐, 이것을 가름하는 내용을 뽑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도냐 불신자냐를 가름하고 뽑아내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하루 하루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여, 오늘도 저를 신자라고 간주해서 불신자와 가름하는 쪽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신자 따로 불신자 따로 구분해서 일하신다, 따라서 신자는 그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됨에 대해서 감사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안 들었다 치고 ‘당신은 평소에 월화수목,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갑니까?’ 물으면 뭐부터 따지는가 하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아침 먹고, 이런 자기 스케줄을 죽 나열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찾습니까? 9시에 산책가고 10시에 책보고 11시에 잠자리에 들고, 이런 자기 스케줄. 그러면 하나님이 신자냐 불신자냐를 가름하는 흔적이 그 사람의 하루 일과 스케줄에는 전혀 담겨 있지 않는 셈이 되는 겁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인도하셔도 감을 못 잡는 겁니다. 어느 대목에서 하나님이 개입했는지, 주께서 나를 신자냐 아니냐를 인식시키는 그 작업을 세시에 했는지 네 시에 했는지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저한테 묻겠지요. 하나님이 저에게 개입했다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져야 개입한 것인가, 저에게 묻게 되면 오늘 본문 성경 말씀에 나오는 이것이 농축되어서 우리에게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이 말하기를 ‘그 농축된 내용이 뭐냐’라고 물을 것이지요. 그것은 뭐냐,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나라 백성을 없애버렸습니다. 사라지게 했습니다. 멸망당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믿게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날마다 우리를 없앨 수 있는데 살려주시는, 그 일을 하신 거예요. 16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에 관심두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른 사람한테 욕을 얻어먹도록 하는 식으로 조치를 한 거예요.

 

설교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하루 종일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는 신자고 저쪽은 신자 아니야.’라는 것을 구분하는 작업을 하루 종일, 24시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식사하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가는 그 모든 장소와 환경에서 끊임없이 주님께서는 ‘네가 신자냐 아니냐.’하는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자냐 불신자를 가름하는 그 작업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장로들을 보내서 거룩하고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을 하신 거예요.

 

‘너는 거룩한 족속이다. 너는 세상 사람과 달라.’라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집어넣어 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감을 못 잡는 이유가 워낙 우리가 하루 일과의 스케줄을 내가 짜 놓았어요. 아침에는 뭘 하고, 오후 두시에는 뭘 하고, 세 시에는 뭘 하고, 이렇게 스케줄을 짜 놓아서 하나님의 일이 우리 속에 개입했다는 것을 눈치 챌 여력이 없습니다. 워낙 우리 자신의 일에 바쁘다 보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루 일과를 살면서도 ‘내가 어디를 봐서 신자인가? 내가 어느 대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지?’라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12절 봅시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을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못 믿겠다 하는 그것을 너는 하루 일과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믿고 싶어도 못 믿는 것을 너는 믿은 적이 있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스케줄 짜서 내 힘으로 내 인생 가꾼다.’ 그게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만 믿고 그것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의 하루의 스케줄을 준 것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을 이미 내 속에 매일 같이 삽입해 주고 있다, 매일 집어 넣고 있는 그것이 오늘 나의 하루 일과라고 이렇게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이 뭐냐, 13절에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렵게 할 것 없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롯입니다. 그리고 노아 당시에 방주 만들 때 의인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노아입니다. 그런데 노아 빼놓고 노아 옆집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하루 스케줄 가운데서 뚝딱, 뚝딱, 방주 만드는 노아의 그 소리에 대해서 관심들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 말입니다. 관심 없어요. 관심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성경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에 관심을 뒀다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뚝딱 뚝딱 방주 만들고 있을 때 그냥 저희들의 스케줄 따라 자기들 계획대로 살아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믿음 없이, 관심 없이 살았기에 그것이 노아의 모든 방주 만들기에 대해서 무시를 하고 모독을 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고 제사장들을 보냈는데 그렇게 보낸 것은 하나님 사람은 의로워야 되고 거룩해야 된다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그들 가운데 선지자와 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를 못해요.

 

왜, 자기 스케줄이 너무 바쁘니까, 자기 스케줄이 잔뜩 짜여 있으니까 거기에 정신 팔고 눈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다 보니 뭘 놓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름하는 그 작업, 그 일관된 작업을 그들의 눈에서 놓쳐 버린 거예요. 제가 믿음 좋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잘 못 들을까 싶은데 제가 드라마를 하나 봐도 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이고 부정 타지 않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이것이다.’라는 것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쪽으로 드라마를 보게 되면 한 명도 안 나와요.

 

강동윤이도 안 나오고 백홍석이도 안 나오고, 단 한 명도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는구나.’ 에 대해서 믿는 모양새가, 물론 그 드라마 작가 자체도 그렇고 한 부분도 나오는 경우가 없어요. 어느 날 뭔가 하고 보니까 목사가 신랑 신부 축복해주는 그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복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드라마 자체가 복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거기에 대해서 드라마가 아무것도 안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 드라마에 푹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당신들 살아가는 것과 내가 하루 일과 잡아서 살아가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딱딱 잘 들어맞는가.’ 그 말이거든요.

 

그게 딱딱 맞으면 안 된다니까요. 딱딱 맞아버리면 그쪽은 불신자거든요,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과 하나님께서 다루고 있는 신자,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쥐고 흔들고 있는 성도하고 뭔가 달라야 하는데 같으면 곤란하잖아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뭘 어떻게 달라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식으로 달라야 된다고 이야기해 줘야 될 것이 아닌가, 라고 물으신다면 14절에 보면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 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부정하다는 것, 어떤 사람이 부정하다는 것, ‘너는 부정하고 네가 만지는 것도 다 더럽다고 규정받으면 살아가는 사람’ 서울 역 앞에 가면 있습니다, 부산 역 앞에도 있어요, 동대구역에는 안 보이는데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노숙자들을 보면 사람들이 다 기피하지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서 기피하는가, 더럽다고 하면서 기피합니다. 이것을 성경 용어대로 하면 부정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기 백성을, 다른 이방민족은 놓아두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다른 사람들한테 노숙자 이상의 면면으로서 이 세상에 깔아 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같이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조치에 의해서 더럽게 살아가는 것은 ‘너희들만큼은 내가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가름하는 기준이 ‘비록 네가 더럽지만 더러운 존재로 만들어 내신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네가 축복이라고 알아줘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예를 들어 봅시다. 옛날 제가 어릴 때에 그 촌에서 애가 밤에 오줌을 싼 거예요. 그 할머니가 그 애한테 쌀 뜨는 키를 뒤집어 씌워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소금을 받아 오라고 했단 말이지요. 얼마나 그것이 얼마나 정신적인 상처(트라우마)가 되었겠습니까? 오줌을 쌌다면 감춰줘도 시원찮은 판인데 오히려 엄마 아빠가 그 자기 애를 동네방네 우세를 하게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는 그것, 그것은 뭐냐, 두 번 다시 오줌 싸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잠을 자라, 그 말 아닙니까? 잠자는 애가 정신 바짝 차리면 잠이 안 오겠지요, 하여튼 그런 식으로 오줌 싸지 말라고 애한테 그런 수모를 안기거든요.

 

그것이 자식을 버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남의 자식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옆 집 애를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남의 자식, 지옥 갈 자식과 천국 갈 자식을 다루는 그 기준을 하루 스물 네 시간 스케줄 가운데서 얼마나 느꼈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키 뒤집어 씌워서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 만드는 식으로까지 하시면서 나는 너를 이렇게 성도라고, 천국 갈 사람으로 다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기준 개입을 우리는 하루 오후 세시에 알았습니까, 언제 알았습니까, 언제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면 내가 하는 계획이 만사형통할 줄로 오해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돈 잘 벌든지 하는 일이 잘 되든지 놔둬버리고 자기 백성한테는 ‘네가 돈 벌었느냐, 건강하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갈 수 있을 정도로 합당 하냐, 거룩함에 합당하고 부정 타지 않고 깨끗한 의인이냐, 노아처럼 그리고 롯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 인생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전부 개입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아,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감 잡아야 돼요. 성도의 삶이란 그 재미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일구어 놓은 인생은 지옥 갈 사람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재미가 없어요. 하지만 지옥 갈 사람을 다루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다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성도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정하지 않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0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들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룩해지는데 뭘 로 거룩해지는 겁니까? 돈 벌어서 거룩해 집니까, 열심히 일해서 거룩해 집니까? 대체 거룩 안하면 지옥 가는데, 천국 가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그 거룩을 어디서 수입합니까, 어느 시장에서 어느 마트에서 거룩을 팝니까?

 

거룩이 없으면 지옥가고 거룩이 있어야 천국 가는데 그 거룩을 어디서 구입하느냐 그 말입니다. 거룩 한 근에, 킬로 당 얼마 합니까? 또 거룩이 한 평당 얼마씩 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창세기부터 죽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천국 가는 백성을 원한다, 천국가려면 거룩해야 하고 따라서 거룩을 원해야 한다, 거룩을 원해야 하는데 우리가 거룩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놀라운 사실이죠. 그저 세상사람 흉내 내고 따라가기에 급급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하나님, 저 거룩합니까?’라고 묻는 일도 거의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 관심사가 너무 달라요. 자, 그러면 거룩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2절에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약간 웃음이 나는데 좋아서 웃음이 나는 것이 아니고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는 것이 뭐냐?

 

사람이라 하는 것이 자기 인생이 하나의 도화지라면 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면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요. 그런데 오늘 방금 읽은 이 말씀에 보면 분명히 내가 도화지인데 그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리는데 그려진 그 그림이 곧 거룩이요 정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나 크레용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칼을 댑니다. ‘네가 아들을 낳으면 칠일동안 부정하고 그 아들의 양피를 벨 것이고 그 여인은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여 진다.’ 이것 지킨다고 돈 버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왜, 나라는 인생은 나를 위한 도화지가 아니고 주께서 그리고 싶은 대로의 도화지기 때문에 그냥 내 몸을 주께 맡기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칠일 동안 부정하고 그 다음에 33일 동안 지나야 되니까 합하면 40일입니다. 여인에게 40일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 전부의 기간을 응축시키면 그것이 40일이 돼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간세상 전부를 시간적으로 농축을 해버리면 그것이 40일 나옵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더러운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아들 낳았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이 더러운 아들 낳아서 또 더러운 세상에서 살게 만든 죄인이라고, 그것을 40일 동안 자인하라 그 말입니다.

 

산부인과에서 천사가 기다렸다가 방금 아들 낳았잖아요. ‘축하합니다. 욕 받습니다. 산후 조리 잘하세요.’ 천사가 이렇게 할 것인데 천사가 와서 ‘더러운 여인이 더러운 애 낳았으니까 빨리 8일 지나서 양피 포경수술 하고 아줌마는 삼십 삼일동안 아무것도 만지지 마세요. 당신이 더러운 아이를 낳았으니 앞으로 당신이 삼십 삼일동안 당신이 만지는 것은 다 더럽습니다. 더러워진 것은 지우개로 지우는 것도 아니고 매직으로 지우는 것도 아니고 그 더러운 것은 당신 대신 누가 희생제물이 되어 피를 흘려야 됩니다. 당신이 산부인과에서 애 하나 낳는 바람에 애꿎은 흠 없는 제물이 당신 때문에 죽어나갈 판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세상이고 그 세상에 당신 태어 낳고 당신만 태어난 것이 아니고 또 애까지 낳았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 낳으면 칠일과 삼십 삼일이에요. 그런데 딸을 낳았다. 딸을 낳으면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그 다음에 정결케 되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설교해 드립니다. 여기 10장 10절에 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짝을 이루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 짝을 이룹니다. 진짜 어렵지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짝을 이루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과 짝을 이룹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당신이 아들 낳고 40일 동안 주의 말씀대로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만지는 것은 다 더럽습니다. 나는 애를 낳은 죄인입니다.’ 해서 안 만졌다고 해서 거룩해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지킨다고 거룩해지지는 않아요. 죄 없는 상태가 돼요. 복잡하지요? 부부사이에 말다툼 하는 중에 남편이 이럽니다. ‘그래, 알았다! 이제 당신하고 말 안할게.’ 그러잖아요. 말실수, 말 잘못해가지고 부부싸움이 일어나는데 해결책이 뭐냐 하면, ‘그래, 내 말실수로 인해서 싸움이 되었으니 내가 말을 안 할게.’ 하면 그것이 해결책입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죄를 지었다, 내가 죄를 안 지을게, 하면 그것이 해결책이 됩니까? 그렇게 하면 천국 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럴 때는 말 안할게, 이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사랑해’ 이것이 해결책이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상대방의 처분에 자기를 맡긴다, 이런 뜻이거든요. 당신이 알아서 해, 당신이 뭘 해도 나는 좋아, 이것이라는 말이지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7일 동안 더럽고 33일 동안 정결해 줘야 거룩이 되는데 여자가 애 낳았다고 이제부터 아무것도 안 만진다, 그래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새로운 희생제물이 피를 흘려야 돼요. 재미있는 사실은 지옥 갈 불신자들이 이것을 믿겠느냐, 하는 겁니다.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우리 성도가 24시간 하루 스케줄, 밥 먹고 운동하고 책보고, 이 모드 것이 여자가 아들 낳는 것 하고 똑같습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을 안 벗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세상 안에서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자, 신자냐 뭐냐, 불신자가 뭐냐를 구분해 봅시다. 신자는 사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심을 믿는데 그 믿는 내용이 뭐냐 하면, ‘너 더러워.’ ‘믿습니다.’ ‘너 40일 동안 더러워.’ ‘인정합니다.’ ‘네가 더럽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야.’ ‘인정합니다.’ ‘너 대신 누가 죽어야 해.’ ‘인정합니다.’ ‘그 죽은피가 너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서 너를 천국 보내.’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거든요. 이게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거든요.

 

그러면 우리의 하루 일과를 도화지로 봅시다. ‘나는 아침에 6시에 일어나서 직장가고 일하고 점심 먹고 책 보고…….’ 이것은 내가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께서는 우리 손을 잡고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호작질을 하는 거예요. 죽 해 보면 그것이 바로 아들 낳는 여자와 같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하루 일과 스케줄 짠 것 가져와, 내가 보니 더러운 세상에서 또 네 더러운 육적 본성을 발휘 했구먼. 알았어, 알았어.’ ‘하나님, 앞으로는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다시 안한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호작질 하는 인생, 나밖에 모르는, 불신자하고 다를 바가 없이 똑같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 욕심, 그런 것으로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완전히 채워버렸어요. 꿈속에도 완전히 내 생각으로 채워버렸어요. 부산에 가면 롯데 야구경기 하는데 롯데가 질 뻔하다 이겼다, 그러면 그 야구장에 갔던 사람들 그 날 밤에 꿈꾸면 무슨 꿈꾸는지 압니까? 전부 야구하는 꿈꿉니다. 너무 아슬아슬 했기 때문에. 왜, 꿈은 기억이거든요. 자기 애 달은 것, 자기 안타까웠던 것, 자기 힘들었던 것, 충격적인 것들이 얽혀서 꿈을 꾼다고요.

 

그러면 하루 24시간 전부 무슨 생각하느냐, 전부 다 내 생각밖에 안하는 거예요. 내가 곱게 한 것, 멋있는 것, 이것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용했구나,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인생에다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토해놓게 하고 쏟아내게 하는 거예요. ‘너 이렇게 살았지, 두시에 이렇게 살고 세시에 이렇게 살았지?’ 다 토해놓게 만들고 그 다음에 ‘나는 너를 세상에 보낼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내가 하루 스물 네 시간 살아가는 것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라고 안 믿는 저쪽 사람들에게 불신자 앞에서나 신자 앞에서나 전부 다 그것을 떠벌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아저씨 그렇게 살면 안 될 건데요?’ ‘나는 이렇게 밖에 못사는데, 인간이 원래 그래요.’ 이거 하고 ‘아저씨,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너는 뭐가 잘났어?’ 이것 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우리 신자가 스물 네 시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우리가 내 놓을 것은 죄밖에 없는데 그 죄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때 그것을 곱게, 곱게 수용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전에 박사동에 있을 때 프라이드를 탔는데 그걸 타고 어떤 목사님하고 갓바위 고개를 넘어가는데 그분하고 좋은 관계로 처음 만났어요.

 

내리자마자 ‘목사님이 운전을 그런 식으로 해서 내가 죽을 뻔 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속으로 ‘운전한 나는 괜찮은데 당신은 왜 그러지?’ 나중에 가만 보니 커브를 너무 급하게 돈 모양이에요. 그분이 그렇게 일러주니까 ‘아하, 커브돌 때 나만 생각하지 말고 옆 사람을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운전해야지.’ 그거 사흘 갑니다. 나는 잘 했는데 주변 사람 볼 때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도록 우리는 살아가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것을 향하여 ‘너 같은 죄인을 위해서 내가 피를 흘렸다. 그래야 네가 거룩하다.’는 그 소식이 겹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루 일과,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스케줄입니다.

 

불신자, 지옥 가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거 못 믿어요. 왜, 그 음성이 안 들립니다. 하루 종일 살아도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잘 때도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그런 것 생각 안합니다. 하나님, 제가 또 엉망이었지요, 그런 것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이겼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신자 아닙니다. 성경 필요 없어요. 주의 계획도 필요 없어요. 주께서 개입하지도 않는 인생입니다. 그냥 내버려둔 이방인하고 똑같은 거예요.

 

신자는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엉망진창인 하루를 살아가도 그리고 남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더라도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마운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탁 탁 우리의 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성질을 토해놓도록, 털도록 그렇게 우리의 하루 일과를 진척 시킨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변호하고 자기 사수하고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그게 바로 불신자들의 모습인데 어느덧 우리도 같이 동반하지 않았습니까? 주의 말씀 생각하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죄를 용서하시는 그 예수님의 고귀한 피와 희생에 대해서 십자가 진리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