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공포의 산물

아빠와 함께 2022. 1. 31. 18:41

공포의 산물 

2022년 1월 30일             본문 말씀: 욥기 38:12-15

(38:12)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38:13)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38:14)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 같이 나타나되

(38: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아침과 새벽과 악과 관계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관식 문제를 부여받습니다. 욥은 자신을 의미있게 여깁니다. 즉 욥이 스스로 자기에게 문제를 출제하고 질문 던지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이 궁금한 것을 해답을 얻을려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결국 자신을 유(有)의미있는 존재가 되리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니까 욥은 자신을 여태껏 의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타인보다 월등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욥이 타인과의 차이남에서 자기 동질성을 확보해놓고서 그 동질성을 자기라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지적하는 것은, 소위 네가 안다는 것은 전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한 그 뜻과 상관없는 무의미한 주장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있는 것만 고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원천에 관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입니다. 처음의 창조 이전에 이 세상은 흑암안에 갇혀 있그 때문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오늘날 사람들이 창세기를 대하든지 혹은 욥기를 대하든지 자신이 사는데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계산하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죽어 마땅함’으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자신은 어두움이요 죄인이요 악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말입니다. 무조건 자신은 옳고 바른 것이 골라서 채택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욥이 직접 하나님 만나고 난 뒤 아뭇소리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질문은 쉽게 말씀드려서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죄인됨을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서 인간들 마음 속에서 악마는 들썩거리기 마련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스라 10:3의 말씀입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러한 조치가 현대에 와서 가당치나 한 겁니까? 사람들이 가정을 꾸미는 우선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달래고 사랑하는 사이에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함입니다.

에스라 선지자 이전에 사람들은 결코 율법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것도, 그리고 사업체나 국가라는 것도 실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용도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면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찾아옵니다. 이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홀로 살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홀로 살려면 힘이 모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힘되는 곳에 찾아나서기 마련입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결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하면서도 인간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스스로 파악해내지를 못합니다. 즉 살려고 하는 이 행위가 왜 근원적으로 문제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조성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의미있는 바는 따로 있습니다. 인간 내부의 욕망은 인간 자신을 유의미한 존재로 요지부동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 이전에 빛이 우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의 활동으로 인하여 악인이 규명되고 등장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즉 ‘예수님보다 나 위주로 사는 자’

과학하는 경우를 봅시다. 과학자들은 대자연을 보면서 질서를 정립하는 방식은 조화로운 대칭성입니다. 즉 아름답게 세상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선입견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대칭이 되는 반대되는 것들로 구성해보면 어떤 패턴이 생길 것이고 그 패턴을 이미지화 시키고 그러면 거기에서 유의미한 것이 나오겠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을 거치면서 대칭되는데 어울리지 않고 패턴에 맞지 않는 많은 불일치를 임의로 제거하게 됩니다. 왜 차이나는 것들을 제거할까요? 그것은 만약에 그 질서에서 제대로 있는 이미지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면 도로 본인이 무의미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소속을 본인에게 안 두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무믜한 존재가 되는 것을 무지하게 겁을 내고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타인으로부터 외면당하면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위한 어떤 질서가 형성’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제켜버리고 제거한 것들을까지 주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챙기시면서 하나로 연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일성을 확보되어 있습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빛 중심입니다. 그러나 인간들 입장에서는 빛이란 자연의 빛 외에는 다른 빛은 생각도 못합니다.

반면에 주님 입장에서 그 자연의 빛마저 악인을 색출하고 악인을 압박하는 용도로 쓰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점이 인간입장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한계를 어두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 이전에 먼저 빛이 있었는데 인간들은 범죄하여 빛보다 자신의 존재가 우선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단언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라고 말입니다. 어두움이니 어두움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빛이 왔으되 빛을 빛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한계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빛이 전부이고 이 자연의 빛을 이용하여 어쩔 수 없는 찾아오는 공포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가정→사회→교회→국가의 힘을 빌리는 식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이 국가로부터 뚫고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지는 성전입니다.

시편 84:3-4,10에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예 자신 위주를 주님께 맡기는 겁니다. 어떻게요? 빛 앞에서 서서,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어두운 죄인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생각이 없으니 굳이 공포스러운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홀로 살지 말게 하시고 늘 주님과 함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0강-욥기 38장 12~15절(공포의 산물)2201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12~15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문제출제를 하는데요, 이 문제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에 있는 내용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 되려면 새벽이 와야죠. 그 새벽 되는 것과 이 세상에 악인이 설치는 것과 네가 서로 연결해서 기술하라고 하나님이 욥에게 주관식 문제를 내십니다. 땅이 지층이 되어서 주름진 것, 땅이 어떤 모양을 드러내는 것, 땅이 모양을 드러내는 것과 빛이 비치는 것과 그 관련성을 네가 아는 대로 말해봐라.

면접시험이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17절에 보면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들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라는 계속해서 그런 출제가 한 두 문제가 아니고 계속 나오는 거예요. 15절에 보면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라는 이러한 어려운 난해한 문제들이 풀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한 곳만 신경 써서 관심 두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은 두루두루 볼 줄 모르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거기서 집중해서 하다 보니까 막상 하나님이 딱 등장하니까 하나님은 두루두루 다 연결하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아침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거는 자연과학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아침을 해명하는 방법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설명이 되는 거죠. 지구의 자전과 공전, 지구 자전축이 23.5도로 기울어진 기울기, 이런 것들 가지고 아침을 설명하면 뭐가 누락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왜 악한 자가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이게 비켜 갑니다. 이게 연결성을 갖추지 못하게 돼요. 그래놓고 과학은 자기 똑똑하다고 자랑질하고 있지요.

그러면 이 악인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악인을 설명하려면 빛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로 설명될 때 그때 악인이 등장한다고 되어있어요. 쉽게 설명하면 악인의 특징은 빛없는 곳에 간다. 그 운명이 빛없는 곳으로 악인은 처박힐 수밖에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계획을 하셨다는 거예요. 빛없이도 목숨 부지하면 살만하겠다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지옥의 특징이 어둡다는 겁니다. 사방이 어둡게 되면 인간은 왜 공포심을 갖게 되느냐 하면 자기의 위치 감을 가질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방이 동서남북 다 깜깜해버리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평소에 자기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진행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두움보다 빛으로 나오는 이유가 자기 자신의 내가 여기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기 유의미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활동한다. 유의미라는 것은 의미 있는 거, 인간은 자기가 의미 있다는 거, 나 그냥 무심코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뜻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악인이라는 거예요. 악인의 특징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의미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밝은 곳으로 나가요. 빛이 있는 곳으로.

옛날 왕들 보세요. 높은 곳에 조명발을 제일 많이 받는 곳에 왕이 있고 저기 쓸데없는 인간들은 저기 밑 구석에 있는지 없는지 구분도 안 되는 쪽으로 어두운 쪽으로 빠지잖아요. 그래서 출세라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빛이 많이 비치는 곳으로 네가 기어 올라가라는 말이죠. 축축하고 어두운 데 있지 말고. 확 눈에 띄는 쪽으로 가란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여러분이 유심히 보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 백성의 출현이 어디서 출발하게 되면 어두운 데서 출발해요.

어두운 데서 빛이 있는 곳으로 돌출되는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집니다. 유월절 밤이 어두운 밤이거든요.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천지창조가 일단은 어두운 곳에 있어요. 어두움에서 어디로 오느냐 하면 빛으로 나오거든요.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나오는데 빛이 없으면 창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창조된 자의 가치와 자존심과 그들의 유의미성을 드러내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고 빛이 인간의 존재보다 우주의 존재보다 빛이 더 우선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어요. 그렇게 해서 에덴동산이 있게 되었는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들은 빛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 빛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창조의 근원, 창조의 속성이 빛인데, 그렇게 빛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어둠이라고 하고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는 생명의 빛이 사람의 어두운 곳에 비추매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고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분명히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빛이 없으면 그냥 어둠 그대로 있고 어둠 그대로 있으면 그 안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은 없다. 이렇게 분명히 나와 있는데 요한복음 1장 5절을 보면서도 인간은 누구 위주냐면 자기 위주예요. 내가 요한복음 1장 5절을 보고 뭘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5절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것도 겁나요. 이게 분명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욥기를 통해서 먼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악인이 뭔지 그것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악인의 특징은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악인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공포를 만드시는 거죠. 그래서 가정이라든지 사업체라든지 교회, 국가, 이런 모든 것이 공포의 산물이에요. 뭔가 무섭기때문에 구성한 단체가 가정이고 국가고 사업체고 교회이고 이런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보면서 근원적으로 오해를 하는 것이 워치만 니의 ‘육, 혼, 영’의 삼분설을 많이 이야기하고 정통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삼분설 아니고 이분설이라는 ‘육, 영’을 주장하며 둘로 나누고 어느 것이 맞느냐고 하는데 둘 다 번지수가 잘못되었어요. 둘 다. 육과 혼과 영으로 나누는 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개인에 속합니다. 개인은 홀로 있으면 무서워요.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가면서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시도가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에요.

그러면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면 안 무섭습니까. 무서워요. 그 개인에 속한 육과 혼과 영의 그 공포심은 성경의 다니엘 같은데 보면 뒷부분에 보면 누가 공격을 하느냐. 개인적으로 ‘나는 착해. 나는 바르게 살았어. 훌륭하게 살았어.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양심적으로 살았어’라는 것을 누가 박살 내느냐 하면 국가가 박살 냅니다. 국가가. 나는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 받을 거라는 그 복을 누가 밟느냐 하면 소련 러시아 탱크가 밟아 버린다니까요. 우크라이나를.

우크라이나에 그리스정교 신자가 한 둘이 아니거든요. 우크라이나는 현재 지구상에 밀 수출국 제5위입니다. 온통 밭이고 논이에요. 전부 다 밀밭이에요. 그래서 유럽에서도 우크라이나를 노리고 있습니다. 완전 곡물 곡창지대예요. 곡창지대는 대부분 농사짓는 사람들이고 농사짓는 사람들 특징은 보수적이에요. 어떻게 보수적이냐 하면 종교에 대해서 보수적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러시아정교회, 기독교죠,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 삼위일체를 숭상하는 것이 그리스정교회 특징이에요. 그것을 그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믿었던 기독교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복 받고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간다고 믿고 있는데 제가 서평 올린 ‘피에 젖은 땅’이라는 책도 다시 보고 요약도 보는데 우크라이나에 스탈린이 와서 탱크로 밀어버리니까 우크라이나에서 500만 명이 죽었어요. 인구의 1/3이 다 죽었어요. 그렇게 죽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디로 갔느냐면 수용소로 포로 잡혀갔어요.

개인적으로 윤리 도덕 지키고 하나님 믿고 종교 신앙 유지하는 거 국가에 못 이깁니다. 백신은 추적장치가 있기 때문에 추적받으면 이건 666에 걸린다고 백날 요한계시록 내용 숙지해도 마트에 못 가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주사 맞고 마트에 가야 하는 거예요. 개인적인 윤리 도덕, 영과 혼과 육, 이런 것들 아무짝도 소용없는 이야기예요. 개인이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공포심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자체적으로 빛의 사람이 되겠다는 시도예요. 빛이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빛 된 생활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거라는 그것이 바로 악인입니다. 유의미성이라니까요. 하나님의 빛보다도 내가 빛을 믿게 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오는가 하는 그것부터 먼저 챙기고 계산해요. 개인적으로 공포심이 있으니까 뭘 하든지, 신학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 공포를 잊어보려고. 아마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 탱크에 밟힐걸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업하면서 우리는 기독교 믿는 병원이고 기독교 믿는 치과이고 기독교 믿는 회사라고 입구에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간판 걸어놓고 해도 직원들 회계장부 조작해서 사기 쳐서 160억 떼먹으면 끝나는 거예요.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업체 자체가 내가 사업한다는 거, 병원 한다는 거, 공장을 한다는 거, 이런 것들이 공포심에 발로예요. 춥지도 않은데 입술 파르르 떨면서.

사도바울이 천막장사 안돼서 발발발 떨었습니까? 죽는 게 소원인 사람이요? 원단 수입 안 되어서 단가 높아질까 봐서 걱정하며 ‘주여,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빛의 특징은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드러나면 그걸로 오케이예요. 이스라엘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주님께서 빛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차이나게 해버려요. 과학 이야기하면 싫어하는 사람 있어서 곤란한데 과학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과학에서 의미를 만드는 방법은 일단 모든 것을 2차원적으로 깔아둬요. 모든 있는 것은 ‘소인수분해’라는 것이 있어요. 수학에 나오는데 이걸 해서 소인수분해는 자연수를 소인수의 곱으로 나타낸 것을 말하는데 분해가 끝장난 숫자가 소수예요. 소수로 하면 모든 것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0’과 ‘1’로 결국 갈라져요. 디지털이라고 하죠. ‘0’과 ‘1’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대칭을 만들어요.

자연과학에서 결론 내린 것은 이 우주는 모두 대칭성이라는 겁니다. 이걸로 보는 거예요. 플러스(+) 전자에서 마이너스(-)전자가 있고 양전자 있으면 음전자 있고 양의 물질이 있으면 음의 물질(암흑물질)이 있고 전부 다 대칭성이에요. 나비의 날개도 대칭이잖아요. 왜 대칭이냐고 과학자에게 물으면 그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뿐이에요. 누가 아름답게 했느냐고 하면 그냥 아름답게 진화되었다고 하죠.

여러분, 진화라는 말은 없습니다. 진화라는 말은 거짓말이고 변화라는 말이 맞아요. 그냥 변화된 거예요. 변화. 변화되었는데 좋게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작은 것 안에 많은 복잡한 것이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워요. 인간의 덩치만큼도 안되는 박테리아 안에 인간 덩치만큼의 DNA가 들어가 있으면 그건 더 정교한 기계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진화 발전같은 것이 없어요.

그냥 다른 어떤 용도가 있는데 그 의미를 위해서 그냥 인간은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은. 국가가 발전되었어요, 인간이 발전되었어요? 이건 주님 보시기에 발전 자체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국가보다 인간이 더 발전되었데요. 식물보다 동물이 더 발전되었고, 파충류보다 포유류가 더 발전되었고, 전부 다 이런 식이에요. 그게 왜냐 하면 지금 있는 자기 자신을 유의미, 의미 있게, 어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2차원의 ‘0’과 ‘1’을 이치를 가지고 대칭성으로 구분해 놓고 그걸 패턴으로 만들어요. 패턴에 ‘0’과 ‘1’을 해놓고 색깔같은 것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일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인간들이 자기 위주예요. 그래서 인간은 그 가운데서 뭘 빼는가 하면 차이 나는 것을 다 제거해 버립니다. 남는 것은 동질성밖에 남지 않죠. 동질성만 남으니까 ‘나는 나다’라고 이런단 말이죠.

‘나는 행복하고 배부르다. 우리나라는 평화롭다’ 그러면 우크라이나는요? 왜 거기는 신경 안 씁니까? 그건 남의 나라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아닌 차이 나는 것은 다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현재 아프카니스탄 국민의 60%가 굶어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점심 먹었잖아요. 내 일이 아니잖아요. 나와 차이 나는 거잖아요. 이거 제쳐버리면 남는 것은 동질성이에요.

우리끼리예요. 우리끼리. 우리끼리 공포스럽지 않으면 그게 오케이예요. 그게 행복이에요. 그런데 만약 북한이 쳐들어온다. 그러면 강력하게 밀어붙여야죠. 밀어제쳐야죠. 금강산 관광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래야 우리끼리, 우리 동질성이 유지되잖아요. 배 불려서. 남에게 왜 줍니까. 뭐, 베트남 도와주자고요? 그러면 축구 하면 누구 응원할 건데요? 우리나라. 바로 답 나오잖아요. 우리나라.

자기 우선이라니까요. 자기 유의미. 내가 한국 사람 같으면 한국 사람이고 싶어요. 그게 자기 의미입니다. 이게 악인이에요. 왜? 동질성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동질성에 차이성을 딱 가져다가 붙입니다. 그게 예를 들면 이겁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 나온 줄 알면 여러분 놀랍니다. 성경에 이런 것이 있었나 싶어서 놀랄 거예요. 한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읽으면서도 떨릴 거 같아요. 너무 놀라운 말씀이어서.

에스라는 포로 이후에 율법을 가르친 사람이에요. 에스라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스라 10장 3절에 보면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자기 집에 있는 마누라가 복음 모르거든 당장 헤어지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맹세해서.

혹시 자식 가운데서 ‘나 교회 안 가요’라는 아이가 있거든 전부 다 호적 다 파서 남의 자식처럼 처단해버려라. 이게 에스라 10장 3절에 나옵니다. 또 성경 없는 이야기 했으면 내가 큰일 날 일이죠. 차이 남,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 너희들의 육신적 본성에 의해서 그냥 나 좋아하면 전부 한패라고 끌어모으는데 그게 공포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래요.

뭔가 어두움에 속했을 때, 방향을 모를 때, 동쪽 남쪽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그냥 어두움에 있을 때 어두움 안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자기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모집하고 다 끌어들여서 그냥 내 한 몸 살면 되는 식으로 밀어붙인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이고 뭐고 그건 안중에도 없고요. 1903년도에 일제시대 때 한국 사람들이 호남지역에서 농사지을 때 일본이 산업 한다고 쌀이 모자라서 전라도에 있는 쌀을 전부 다 수출해서 가져갔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가 곤란해요. 전부 다 가져가 버리니까.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어디로 갔느냐 하면 하와이로 갔어요. 하와이에 가게 되면 고무 농사나, 바나나 농사, 그 밖에 여러 가지 일이 있을 건데 노동자가 모자라서 하와이로 한국 사람이 많이 갔습니다. 총각들이 대부분 많이 갔죠. 가서 거기서 안정을 하고 난 뒤 나이가 차니까 결혼을 해야 하잖아요.

결혼할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본국에 있는 한국 여자와 하겠다고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어요. 사람은 보지도 않고 사진만 보고 벌써 혼인이 결론 난 겁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진 신부’라고 했어요. 사진 신부. 사진 보고 그냥 오케이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이 내 아내나 내 남편감을 고를 때 ‘나는 의미 없어’라고 이런 식으로 고르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있느냐를 보고 골라서 내 아내 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내가 쪼개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동질성을 붙잡는 겁니다. 왜 붙잡느냐. 그래야 내가 덜 무섭기 때문에. 공포심이 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못 다니니까 자기들끼리 연합해서 ‘일제 물러가라’라고 하면서 해외에서 군자금 보내고 연합하는 그것도 공포심이란 말이죠. 일제 대항해서 독립군 만들고 해도 결국 보다 더 큰 나라인 일본군이 와서 탱크로 밀어붙이니까 그것도 끽소리 못하고 없어지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고등학교나 중학생이 와서 자랑하기를 ‘우리 집에 2.5통 트럭 있다’라고 자랑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웃겠습니까. ‘우리 집에 포르쉐 있다’라고 하면 ‘우와~’하겠지만 아직 아이라서 무조건 덩치 크면 최고인 줄 알고 2.5톤 트럭 있다고 하면 ‘아, 너희 아버지 화물 운송하면서 먹고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부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인간은 자꾸 뭐가 키우는 거예요.

어두움을 키우고 그것도 모자라니까 더 아는 사람이나 단체에 속하고 그것도 안 되면 많은 사람 있는 곳에 권력 탐하며 기웃거리고. 인간 사는 것이 그것 빼고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바르게 살았다. 복음 안다’라고 육과 혼과 영같은 그런 거나 외우면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로댕이라는 조각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만든 조각상이 뭐냐 하면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조각상의 그 사람이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데 그게 사실은 지옥의 문이라는 큰 조각품의 일 부 이고 그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컨셉은 ‘지옥을 생각하라’라는 겁니다. 거기에 문구가 뭐라고 있었느냐 하면 ‘여기 오는 자는 희망을 포기하라’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로댕이 이야기한 지옥입니다. 희망이 있는 유효기간이 눈 뜨고 살아있을 때, 아직까지 내가 있기에 나에 관한 희망만 내가 챙기고 추스를 뿐이에요. 이게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그 일방적인 욥이 오늘 된 통으로 하나님 앞에 선겁니다. ‘네가 이런 걸 아느냐, 저런 걸 아느냐’라고 선겁니다. 그러니까 욥은 자기 동질성 외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죠. 자기 생각밖에 없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이야기하지 않아요. 앞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해답을 미리 알아야겠습니다. 다음 구절까지 못 보니까, 내일까지 살지 못살지 모르니까 알아봐야죠.

시편 84편에 이스라엘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나오고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니까 시편 84편의 내용은 뭔가 뚫은 거예요. 개인이라는 것도 뚫어버리고 국가라는 것도 뚫고 나 자신을 위해서 또는 국가라고 핑계하면서 실은 그 국가에 속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사업체를 위해서 그렇게 살던 내가 최종 도달지점은 그런 육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성전, 거기서 삶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 결론은 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유의미, 자기밖에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장막, 이것이 우리가 한시적으로 일시적으로 살 동네이지 우리가 영원히 살 도착지점은 아니라는 것을, 잠시 잠시 우리가 겁나고 무서워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어디 힘 있고 돈 있는 곳에서 빌붙어서 ‘친구야’라고 하지만 그들도 우리도 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 땅, 이 악인의 세계에 뭐로 오셨는가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신다면 그 빛을 만났으면 우리는 아예 우리 자신이 어둠이라는 것을 자인하면 게임 깔끔하게 끝납니다. 그냥 우리는 어두워요. 그냥. 의미 없습니다. 그냥 그림자같은 거예요. 그림자 특징이 뭡니까. 어둡잖아요.

시편 144편 4절에 보면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나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너무 공포심으로 방어하지 마시고 호들갑 떨면서 경기 일으키지 마시고 깜짝깜짝 놀라지 마시고요. 그냥 인생이라는 것은 그림자라고 생각하며 그림자 폭을 넓혀버리세요. 거기에 푹 잠겨서 주께서 도와주면 감사하고 안 도와줘도 괜찮고 그런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산 사람에 대해서 전혀 부러워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피 흘리지 않은 사람에게 현혹되지 마세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로님과 권사님 만나셨는데 장로님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시면 권사님이 “장로님 피 흘리셨어요?”라고 하면 장로님이 “저는 피 흘린 적 없는, 그냥 어두움입니다”라고 하면 이제 서로가 대화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 이용할 생각 없고요, 이용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이용 받아보았자 공포만 더하고 1.5 톤 트럭에서 2.5 톤 트럭 되는 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이미 주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점점 더 자신이 어둡다는 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악인이라고 남들 욕하지만, 우리 자신의 의미를 챙기는 이것이 나 위주에, 나 우선에 악인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럴싸하게 똑똑하지만, 주님 앞에 나서니 완전히 무지몽매한 존재인 것을 왜 진작 몰랐습니까. 항상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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