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바닷물 관리

아빠와 함께 2022. 1. 24. 08:51

바닷물 관리 

2022년 1월 23일               본문 말씀: 욥기 38:8-11

(38:8)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38: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38:10)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38: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하나님과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교만한 사태입니다. 이미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따먹지 말아야 한 것을 따먹은 처지에서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대화는커녕 감히 인간이 상종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욥도 하도 주위의 인간들 중에 답을 내놓은 위인들이 없기에 정면으로 대화하자고 요청한 겁니다.

하나님 만나서 자신의 서러움을 하소연할 생각이었습니다. 욥기 10:1-2에 보면,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욥기 19;25-26에 보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왔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상밖의 질문을 받습니다.

욥의 자기 이야기는 감히 끄집어낼 생각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훅치고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던진 질문은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이란 참으로 제한적입니다. 아무리 넓게 형성해도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겨결부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요구하는 것밖에는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하나님에 대해 안다’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인간은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쪽으로 막을 치십니다.

즉 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 바닷물의 관리에 관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닷물은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십니다. 이는 곧 왜 하나님께서는 바닷물은 갓난 아이처럼 다루어야 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욥이나 그 어느 인간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질문은 하시면서 답변은 내놓으시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욥이 감당한 사항도 아닙니다. 역시 해답은 신약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제시한 질문은 인간들이 기대했던 질문 자체가 아니기에 해답이 이미 주어져도 그것이 그 질문의 해답인지 인간들은 구분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상대할 대상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홀로 바닷물을 굳이 관리하셔야 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언약시대를 예고하십니다. 기존의 언약체제를 철폐하시겠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렘 31:31, 35-36)

즉 하나님께서 새롭게 진행시키려는 계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자기 백성의 마음에다 집어넣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방식을 폐지하시겠답니다. 바다 관리와 관련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가 끊임없이 땅을 집어 삼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것의 ‘교만한 물결’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바다 속에 어떤 하나님께 적대적인 존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바다의 짐승들이 그동안 육지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그동안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막으셨다는 겁니다.(창 8:21) 즉 사람들의 생각이 선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악해서 하나님께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바다를 관리해 오셨습니다. 나중에 최후의 전쟁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감히 메시야가 오시는 그 땅의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에 짐승의 자신의 최후를 자초하게 됩니다. 영적 그렇다면 이는 계약을 갱신하면서 다른 기준에 의해서 구원이 따로 다른 기준에 의해서 이 세상이 심판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만큼 자연상태를 질서있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생겨날 수 없는 지경이 된 겁니다.

누가복음 2:8,13-14에 보면,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납치하듯이 사랑으로 데려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약이 바뀌신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흔적이 있습니다. 시편 8편에 보면, 일방적으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된 자들이 하나님에게 반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욥처럼 하나님 앞에 따져보겠다고 나서는 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3-4) 즉 인간은 하나님께 직면 대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죽지 않고서도 하나님과 연결되는 특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하는 영과 함께 있는 공간’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왜 뵐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만날 수 없는 인간들을 자신의 나라에 넣어주시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거룩한 대표분으로서 성도의 삶을 대신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 11:16)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연구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님의 사랑, 곧 십자가에 함께 죽는 공간 안에서 일방적으로 기쁨의 상대로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열성이나 가치를 묻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9강-욥기 38장 8~11절(바닷물 관리)2201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찌니라 하였었노라”

지금 욥이 상대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센 분을 만났어요. 욥이 이렇게 직접 하나님과 대결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만고만한 인간들 상대해서는 자기에게 고통이 오게 된 원인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당사자 하나님과 직접 상대해서 해답을 얻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욥이 그 가운데서 모르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지금 욥이 하나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이미 인간의 경계는 죽음으로 뺑뺑 둘러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음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거기에 두루 도는 화염 검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 가운데서 죽고 난 뒤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죽고 난 후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죽음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운용되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미리 앞당겨서 죽음 세계를 알려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광야입니다. 광야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이미 죽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놨어요.

물 없지요, 양식 없지요. 이거 어떻게 삽니까.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모세는 이미 경험한 것이 있어요. 물 없이 양식 없이 살아본 경험이 모세에게 있어요. 모세에게 있어서 죽음의 세계는 자기가 어릴 적 물에 빠졌던 것이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죽음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 정면으로 심판받는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였던 겁니다. 나 홀로 죽는 세계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서는 그 세계, 하나님 앞에서 도달되는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였습니다.

그것을 구체화 시킨 것이 바로 십자가 앞의 세계예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를 미리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거기에 대해서 골똘하게 탐구할 필요 없어요. 십자가 앞에 서서 그 십자가에 주님과 같이 올라가 보면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주어지고 그냥 죽음 정도가 아니고 저주의 자리, 그냥 죽음 정도가 아니고 저주예요. 그냥 숨 끊어진 정도가 아니고 저주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에 서서 인간은 비로소 ‘아~죽음은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원리가 조금도 변동 없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있구나’라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숨이 안 끊어지죠. 그러니 더 고통스러운 건데. 숨이 안 끊어지고 하나님은 원칙을 원칙대로 적용하는 곳, 그게 죽음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미를 알기 때문에 나사로같은 경우에 죽은 자 가운데 살려냈죠.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지만, 주님의 심판 가운데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한 열 명쯤 되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인간 선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지 제대로 예수님처럼 저주받고 사흘이라는 간격을 두고 아버지의 부활의 영으로 살아나는 그런 죽음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경험한 적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거예요. 엘리야가 불 수레 타는 거 부활의 열매 아닙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 부활 아니에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 부활 아니고 소생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저주를 통과할 정도가 되어야 부활이죠. 그냥 생명 15년 연장하는 거, 그거 부활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면,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죽음의 세계에 들어온 겁니다.

그 죽음의 세계가 둘로 나뉘죠.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인데 죽음의 세계 가운데서도 천국으로 오신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고 하나님과 직접 상대할 때 가능한데 오늘 본문은 구약이잖아요. 그리고 이방인이잖아요. 하나님과 상대하면 죽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면 다 죽으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누구를 보내냐 하면 성령을 보낸 거예요.

성령은 전에 이야기했지만 송월타월이에요. 성령의 수건을 가지고 중간에 화해의 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한 겁니다. 만나면 죽는데 안 죽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께서는 그 무거운 죄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저주로부터 해방되게 하십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3장 17~18절에 그걸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자유라는 말이 뭐냐 하면 전에 네가 어디 갇혀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갇혀있는 것은 자기가 어디 갇혀있는지도 모르고 갇혀있었던 거예요. 어디에 갇혀있었는가. 귀신에 갇혀있었고, 마귀에 갇혀있었고, 율법에 갇혀있었고, 저주에 갇혀있었고, 죽음에 갇혀있었고, 죄에 갇혀있었습니다. 갇혀있다는 그 사실을 알려면 자유 되고 해방되었을 때 뒤돌아보니까 내가 전에 저러했었구나.

그렇다면 전에는 왜 죽음에 갇혀있고 저주에 갇혀있었는지 그 사실조차도 몰랐는가. 그건 사람만 상대해서 그래요. 사람만 상대해서. 주께서 오순절 성령을 보내신 것은 이제 사람 상대 그만하라는 겁니다. 피곤하게 사람 상대하면서 좀 좋으면 좋다고 간 쓸개 다 빼주고 좀 못하면 삐져서 갈라서자고 하는 피곤한 그 짓. 사람에게 기대하다가 차이고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그런 신파극 당하는 네가 잘못이다. 네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하니까. 이게 그런 실망감이 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오늘 용감하게 욥은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감히 이건 상상도 못 해요. 그 거룩한 권위의 무게감은 눈에 뵈는 것이 없겠죠. 다른 친구들은 거기 끼어들지도 못합니다.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어요. 요한계시록 1장에도 사도 요한이 그렇게 잘 알던 예수님을 영광 중에 만나니까 감히 얼굴을 못 들었다고 나와 있어요. 얼굴을 못 들어요. 너무 무서워서. 상상 이상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뭐 불평불만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죠. 지난 낮에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원자폭탄 맞을 때 ‘1번 – 너무 아프다, 2번 – 사라진다’라고 문제 냈었는데 원자폭탄 맞을 때 아프다고 이야기할 새가 어디 있습니다. 내 존재감이 날아가 버렸는데요. 주님은 해같이 빛나잖아요. 그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그냥 엎드렸습니다. 자기 생각 안 해요. 여기가 좋다고 하면서 자기 것 다 내놓고. 그 정도로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삼층천에 올라갔던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우리는 너무 겁나서 사람이 상대할 수 없는 분을 이렇게 상대한다는 거, 이것은 그 전에 죽음을 전제로 해서 언급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실 때 서로 이야기가 통한 줄 알았어요. 욥이. 그런데 오늘 본문 보세요. 이야기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 착했잖아요. 하나님 섬겼잖아요’라는 그런 이야기가 그 현장에서 자기 입에서 나올 줄 알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선방날리면서 말씀하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바닷물 만들 때 바닷물을 어린아이로 생각해서 그것에 옷을 입혔다고 나오는데 오늘 본문 보면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라고 나오시는 거예요. ‘바닷물이 넘치지 않도록 문으로 그것을 막은 것을 네가 아느냐?’라고 나오실 때 이건 예상문제 없던 거예요. 수학 정석에 안 나오는 수학 문제예요.

이건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인간은 만나면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인간 선에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났다 쳐도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게 만드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실시하십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대표적으로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속에 들어올 때 인간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을 뒤로 감추고 예수님이 우리를 데려오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알 생각을 하지 말고 너는 감히 하나님에게 부름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입장에서 너는 이 십자가 안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제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실제로 성경 말씀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어떤 목자들이 밤중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거기 정말 다시 가고 싶어요.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명이 확 밝아지면서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나와요. 11절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나옵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목자들은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훅 들어왔으니까요. 자기의 예상밖에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현실이 들판인지 하늘나라인지 분간이 안 돼요. 그리고 13절에 아주 결정적인 말씀이 나오죠.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목사님 천사가 있기는 있었네요.

천사가 있다는 말은 나의 사소한 일상의 일은 이제 잊어도 좋다는 겁니다. 지난날에 내가 실수 한 거, 과거에 내가 사업 실패한 것은 이제 좀 잊어도 좋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나와요. 지금 하나님이 누구냐를 우리가 예상문제 끄집어내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하나님을 아는 그런 채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내가 기쁘대요. 그러면 되었잖아요. 피조물 입장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묻지 말고 너는 나에게 기쁨을 일방적으로 주는 기쁨의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자들이 그 당시에 유대나라 목자 노동조합 회장 되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이거 봤다고 해서 이 목자들이 국회의원 출마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국회의원 출마할까요? 국회의원 주면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런 거는, 3월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되느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입장에서는요, 그런 동영상 볼 필요 없습니다. 백신 동영상은 안 봤으면 좋겠어요.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다음이 땅에서는 기뻐하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이 뭘 안다고 기뻐합니까. 하나님이 누구인 줄 알아요? 기뻐하게. 몰라요. 아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천사가 와서 그들에게 바가지처럼 뒤집어씌우는 것은 ‘너, 찜 당했어. 기뻐하심을 입었어. 사랑의 대상이야. 끝’ 그러니까 목자 입장에서는 말로만 안 되잖아요. 근거는? 내가 사랑을 입은 근거는?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 거기에 너 대신 인생을 사실 분이 아기로 태어났어” 이걸 가지고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이 바가지처럼, 큰 폭설 내리는 것처럼, 그들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욥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면접신청 넣었지만, 면접 넣은 욥을 그런 식으로, 너는 나에 대해 아는 것 없다는 식으로 쳐버리시고 신약에 오게 되면 면접 넣지도 않았는데 하나님 쪽에서 확,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확 와버린 거예요. 네가 나에 대해서 궁금해? 궁금할 필요조차도 없게 되었어. 이 인간아.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러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뭐냐. 반문이죠. 어떤 반문이냐면 이렇게 묻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뭔데 저를 이렇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이게 바로 시편 8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궁시렁궁시렁 ‘이거는 왜 안 해주고, 저거는 왜 안 해주고’ 이런 거가 아니고 ‘왜 저를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삼아주십니까’

시편 8편에서, 이게 좀 어려운데,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우리라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를 거기 시편 8편 2~3절에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2절을 먼저 보면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나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전쟁할 때 하등 힘을 뽑아낼 것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왜 하나님의 전쟁에 유용하냐 하면 뽑아낼 것이 없어서 유용해요.

뽑아낼 것이 없기 때문에 오직 주의 이름의 영광만을 100퍼센트 다 내놓을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이유가 자기 쪽에서 내놓을 의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소복이 눈이 오면 온 대로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요. 1 미터면 1미터, 2미터, 3미터, 그대로 고스란히 주님의 은혜가 쌓이는 겁니다. 우리는 그대로 거기에 파묻혀 살아가는 거죠.

‘뭘 해드릴까요’라는 말도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은 하찮은 저같은 것은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바쁘신 분이 뭐 저에게까지 다 찾아오십니까’라는 이 말이거든요. 이게 지금 좋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섭섭하고 무서워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 좋아서 달리 할 말이 없어요.

어떻게 저같은 인간을 이렇게 생각을 해주고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저도 아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처리해주십니까. 이렇게 질문만 던진 거예요. 그 해답이 어디에 나오느냐면 해답은 로마서 11장 16절에 나옵니다. 중요한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이걸로 끝난 문제예요.

앞에 첫 번째 제사하는 가루가,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을 말하는 거죠, 예수님의 몸이 거룩하면 그 몸을 먹었던 모든 인간도 덩달아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포함되어서 거룩해진 거예요. 그래서 제사할 때는 다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맏물을 바쳐요. 맏물 통과되면 나머지가 다 통과하거든요. 대리시험입니다. 대표시험이고요. 덕성여고 쌍둥이 시험유출은 일도 아닙니다.

‘주님, 이렇게 반칙해도 됩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할 정도예요. 예수님도 거룩한데 덩달아 우리도 거룩해져 버렸단 말이죠. 왜? 우리는 안 받으니까. 우리는 안 받습니다. 뭘 보고 받아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상대하지 우리는 안 받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생 살면서 우리 이름을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소급해서 우리 이름을 지워나가는 겁니다. 지워나가요. 연세 들면 다 그래요. 3*6=35이고 그런 겁니다. 연세 들면 구구단도 다 잊어버리고 무슨 말 하려고 하는데 기억도 안 나고요. 설교 듣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요. 설교 듣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다 잊어버려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강제로 잊어버린 존재가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연세 많은 분이 잘 안 헤어지는 이유는 너도 나를 모르고 나도 너를 모르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헤어지는 것이 뭐예요. 몰라요. 그냥 살면 옛날부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줄 알고 살지 꼬치꼬치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사적으로 따지고 개인적으로 따지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힘으로 버텨보려고 할 때나 생기는 겁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문제를 냈어요. ‘산에서 나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정답은 ‘산불이 나기 때문에’ 예요. 그런데 어떤 아이는 ‘거지로 보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건 평소에 얼마나 본인 체면과 자존심만 생각했는지요. 객관적인 이런 건 생각 못 해요. 객관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객관도 주관 속으로 오면 나에게 이익이 되냐 아니냐로 전환되고 말아요. 이건 아직 어리니까 자기 생각만 하고 그렇죠. 나중에 귀신 다 되어가면 ‘질문이 뭐예요?’라고 질문조차도 의미가 없어요. ‘나에게 질문 좀 하지 마라’라고 그렇게 돼요.

또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여성이 청소년기가 되면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는?’ 답변은 이렇게 했습니다. ‘무섭고 난폭하고 폭력적이다’라고. 점점 사납게 되었다는 거죠. 아마 당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당한 것만, 체험한 것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 겁니다. 바다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이러한 문제가 불쑥 튀어나올 때 욥은 그냥 입을 다물죠.

이 말이 뭐냐 하면 ‘네가 나와 상대할 쨉이 되냐’라는 말입니다. 네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으면 ‘한번 따져봅시다. 하나님’이라고 이따위 소리 하는 자체가 아직 이게 구약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에 와서도 복음을 모르고 구약적 인물로서 신앙 생활하는, 신앙생활 아니고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의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가사를 들려드릴 테니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이 되는지 느껴보세요. 옛날 찬송가 470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가사가 나오는데 이 노래를 쭉 읊어보게 되면 우리는 이 노랫가락에 빠져서 그 평안함이 나에게 확 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엇이 지금 문제가 된 거예요? 내가 바로 십자가에서 때려 죽을 천하의 죄인이라는 것을 내 선에서 이것을 희석한 거예요. 마치 나는 죄인 아닌 것처럼 찬송가 불렀으니까 하나님께 칭찬받을 인간인 것처럼 내 선에서 나를 관리했던 겁니다. 이런 오류가 교회에서 99.99퍼센트 늘 하는 일이 그 일이라는 거예요. 분명히 로마서 11장에는 너 말고 주님이에요. 가루가 거룩하기 때문에 네가 거룩하게 된 겁니다. 너 은혜 받은 거 말고. 은혜받은 너 말고 주님이라니까요. 주님 하신 일이고.

이제 오늘 본문 바다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새언약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3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라고 나오고 35~36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나오면서 하나님께서 뭘 풀어버리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너에게 약속하기를 바닷물이 너를 넘지 않게 하고”라고 나오고 오늘 본문 욥기에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좀 특이한 것은 바닷물을 교만의 물결이라고 했습니다. 욥기 38장 11절에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라고 나오죠. 바닷물이 어디 감히 육지를 넘치느냐는 말입니다. 왜 넘치면 안 되느냐 하면 육지에 누가 오실 거냐 하면 장차 메시아가 오실 거예요. 다니엘에 보게 되면 짐승이 뭘 노리고 육지로 쳐들어오느냐 하면 육지로 넘어서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밀어붙이는 그 전쟁이 마지막 최후 전쟁이에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바다가 늘 출렁이면서 육지를 노린다는 거예요.

노린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가 건방지다는 겁니다. 건방진 성깔을 하나님이 알아서 “아직 때가 안되었으니 가만있어. 때가 되면 내가 육지로 올라가게 해줄게”라고 하나님이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욥이 아는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욥에게 성경 전체를 다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바다가 파랗고 색깔 예쁘고...’라는 그런 거 아니고 바다가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는 데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욥 네가 아는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을 아는 우리는 알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바다는 육지를 넘치지 않도록 주께서 알아서 조정했다는 이게 바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에 나옵니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와 배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성도가 인생을 내 맘대로 못 사는 것처럼, 그리고 불신자가 자기 맘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것도 누가 구원되느냐 구원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 되심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사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누구십니까?’라는 이런 이야기하지 말고 주님이 알려주는 범위 내에서만 알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네가 아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부터는 주님 아는 것이 네 안에 흐르고 넘칠 것이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거룩한즉 너는 졸지에 사랑을 받아서 거룩하다’라는 겁니다.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제부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껴지고 다가오는 모든 체험과 경험을 다 모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시키는 겁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저게 나를 교만케 하는지,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교만케 하는지, 아니면 나의 마음을 한없이 낮추게 하는 것인지, 그것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교만할 때 주께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고 뒤돌아보니까 이것도 십자가에서 나오는 조정능력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받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만 바라보게 하는 그 원칙에서 안 벗어나게 해주는 복으로 우리를 늘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이게 바로 구약과 다른 신약 성경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 만들어지고 움직이는데 우리는 맨날 내 사정만 답답하게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시건방진 교만한 이 모습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 고통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조차도 회개하게 하는 주님의 자료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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