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의 표정

아빠와 함께 2022. 1. 11. 17:27

하나님의 표정

2022년 1월 9일                본문 말씀: 욥기 37:21-24

(37:21)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37:22) 북방에서는 금 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37:23)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 하심이라

(37: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기 잘났다가 되어 버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이물질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엘리후가 자꾸만 자연 현상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자연에서 지식을 모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일에 인간이 방해해서는 아니된다는 취지입니다.

모든 자연 현상을 모두 다 알고 난 뒤,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해서 ‘나도 의롭습니다’라는 주장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일을 훼방하지 않고 잘 드러내는지를 아는 자라면, 그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따질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엘리후의 생각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표정이라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맑아지면 어떤 인간이라도 기분이 상쾌해질 겁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스스로 상쾌해질 일을 하시고 계심이 자연을 통해서 내비쳐진다는 겁니다. 구름이 낀 북방하늘에서 구름 사이에 눈부신 햇살이 조갯살처럼 내려오면 마치 금빛처럼 빛나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들도 이처럼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더는 욕심낼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욥은 그토록 자신의 의로움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서 규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딱 붙잡아놓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대외적으로 외치고 싶고 알리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한강에다 콩 심고 팥 심을 수는 없습니다. 쏜살같이 내달리는 강물에 다 실려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변화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일시간 붙잡아두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여지없이 방해받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에 주장에 대해서 욥이 반박하고 싶은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난 뒤에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라고 하지만 엘리후 너는 그것을 해낼 재간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이렇게 피해갑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 하심이라”(욥기 37:23)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누릴 뿐이지 우리가 다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이방민족에 속한 자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언급합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 나름대로 진리를 파악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터널을 뚫을 때, 서로 반대방향에서 뚫어오지만 중간에 만나지 못하면 터널이 뚫렸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만났다”가 아니라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외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엘리후은 이렇게 단정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칭 지혜롭고 경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욥 37:24) 오늘날 우리들은 신약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모르겠다’는 것에 우리가 같이 동의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도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이스라엘’이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그동안 이방민족들이 모르겠다는 그 진리가 끊임없이 제공된 곳입니다. 시편 121:1-2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그냥 하늘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위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동행하시면서 내뿜어지는 계시는 율법입니다. 즉 천지창조는 율법에 의해서  창조된 겁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자꾸만 지적을 받고 일치점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은 미래로 이스라엘을 이끕니다. 미래란 곧 ‘끝’입니다. 끝은 새로운 새로운 장소에 집결지로 알려지게 됩니다.

즉 율법 완성에 의해서 새로 생긴 집단의 등장을 향하여 질주합니다. 이 율법 완성에 의해서라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자신을 내어주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3:7에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아님’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이미 성도 안에 박혀있는 그 그리스도 외에는 일체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이는 곧 예수님께서 먼저 터를 잡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들을 그 터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현실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한 세계가 됩니다.(고전 3:21-23) 문제는 이러한 사실까지 그저 덧붙여지는 지식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욥처럼, 자신을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필요한 지식만 추가하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하실 일은 지식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깨고 들어오십니다. 즉 우리 내부가 예수님의 일을 통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띠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예수가 마가복음 9:25-27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한 아이가 죽어가는데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귀신들린 겁니다. 그 결과를 사람들이 보게 되는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이는 곧 사람이 죽는 이유는 인간이 악마와 결탁했기 때문이라는 그 속사정을 주님께서 일로 나타내시고 그 죽음에서 삶도 주님께서 관여하셔야만 가능한다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귀신 때문이며 그 결과로 죽어 마땅한 겁니다. 주님이 들어와 있는 자만이 생명과 결부된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지 마시고 주님께서 알려주심에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7강-욥기 37장 21~24절(하나님의 표정)2201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7장 21~24절입니다. 구약성경 794페이지입니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엘리후가 상당히 도발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경외하는 마음이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미워해야 인정할까요?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야 하나님 속이 시원합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몰라야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주제는 이겁니다. 욥보고 하는 이야기가 곧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네가 너를 붙잡고 있으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네가 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엘리후의 입장은 뭐냐 하면 관점을 하나님 관점으로 가져버리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이물질 같은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엘리후는 욥의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그 친구들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본인이 그걸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대로 하면 사람이 바람보다 못하고 사람이 태양보다 못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라는 것이 비 오는 물방울만도 못하다는 것이 인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활짝 보여주지만 인간은 욥처럼 또 욥의 친구처럼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하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시는 그 일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그런 현상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 엘리후처럼 쉽게 그럼 욥은 잘못되었다, 욥의 친구는 잘못되었다, 엘리후 너는 잘했다, 이렇게 쉽게 가시면 안 되고요. 우리는 욥의 입장을 들어봐야 돼요. 왜 욥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가 없었는지 그 이유가 뭐냐. 욥은 왜 본인이 자꾸 의롭다는 그 이야기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인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욥이 자기를 측정할 때 자기를 딱 집어놓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강에 여러분이 무엇을 심을 수 있습니까? 한강 흐르는 물에 콩을 심을 수 있습니까, 팥을 심을 수 있습니까? 심지 못하죠. 왜? 흘러가니까. 변화되니까요.

욥과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이 세상과 더불어서 늘 한시도 쉬지 않고 달라지고 변화된다는 것을 본인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로 갈지를 본인이 몰라야 되고 또 알 필요도 없는데 그게 아쉬운 겁니다. 나는 내가 나를 규정할 때 비로소 내가 사는 즐거움을 누린다, 뭐 그런 식으로 인간 안에서 한계처럼 다가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면 인간이 잘못한 죄가 많습니까, 안개가 죄가 많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의롭다’가 되어버리면 안개는 가만있다가 의문의 1패를 당하는 거예요. 안개가 있다가 졸지에 악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네 인생은 안개라 하니까 ‘내가 왜 안개냐? 난 안개 아니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걸 둘러싼 안개는 가만있다가 띵~하고 얻어맞는 거예요. 안개가, 그럼 내가 나쁘냐? 내가 나쁘단 말이야?

욥과 욥의 친구는 하나님을 상대하면서 우리 인간들끼리만 상대하면 거기서 해답이 나오는 줄 알고 있어요. 인간들 세계가 그러니까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엘리후가 얘기하는 것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 이치를 다 알고 난 뒤에 그걸 종합해서 다 파악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나는 누구다, 이렇게 해야 정답에 가깝다는 거예요. 정답으로 가는 길이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욥에게 말하기를, “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면서 그럼 구름이 편평한 이유를 아느냐? 뭐 번개 치는 이유를 아느냐?” 그럼 욥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내가 그걸 굳이 왜 알아야 해? 나는 나만 알면 돼.” 그럴 때 엘리후가 화를 내는 거죠. 너는 너를 붙잡아서 나는 이렇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자격도 그런 처지도 입장도 되지 못한다 이 말이죠.

엘리후의 주장은 이겁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겨, 그냥. 그냥 맡겨. 그럼 그 이야기를 듣고 욥이 또 뭐라고 하겠어요? 맡겨버리면 내가 누군 줄 모르잖아. 그럼 엘리후가 뭐라고 하겠어요? 굳이 네가 알아야 해? 너에 대해서 네가 왜 굳이 관심 두지? 그 자체가 수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결국 욥기는 인간들끼리 붙여놔 봐야 해답이 안 나옵니다. 그럼 해답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마지막까지 갈 때까지 가야 하거든요. 성경에서의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장소를 말합니다. 새로운 집결지를 말해요. 끝이 됨으로써 요지부동한 특정한, 더 이상 시간이 진척될 이유가 없는 그 지점까지 가자는 겁니다. 가게 되면 뭐가 보이느냐. 우리의 뒤통수가 보이는 거예요. 우리의 뒷면이 보입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앞면만 보는데 뒤쪽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 본문을 통해서나 앞의 말씀을 통해서 자연을 하나님의 표준으로 봅니다. 표준으로 보면서 자연의 변화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자기 내면을 보여주는 표정, 자연은 표준이고 인간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의 뜻을 드러내는 표정으로 보는 겁니다. 그 표정을 보는 증거가 여기 21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욥 너는 하늘이 맑은 것이 좋으냐 어두컴컴한 것이 좋으냐’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 욥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그거야 하늘이 맑은 것이 좋지’라고 하면 엘리후는 ‘네가 그걸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맑은 것을 좋아해. 거봐. 하나님이 맑은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 너는 너의 몸 아프다고 해도 맑게 갠 하늘에 대해서 네가 감사한 적이 있어?’라고 따지고 들어오네요.

그다음 22절에 보면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하나님은 이 자연 세계에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쉬지도 아니하시고 자신을 드러냈다. 북쪽에서 뭐가 나오냐면 금빛의 태양 빛이, sunshine이 나올 때 우리는 태양 빛을 보고 ‘태양이 얼굴을 내비치네’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엄이 나온다고 왜 너는 구름 바깥으로 제치고 나오는 찬란한 빛깔과 햇살과 하나님의 위엄을 연결할 수 있는 눈이 왜 없는지를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 있는 욥이 그렇게 되면 엘리후에게 ‘그렇다면 너는 모든 자연 세계에 대해서 다 알아? 저건 하나님의 무슨 표정인데? 저건? 다 물어볼까?’라고 나올 것이 뻔하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23절에서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라고 자기 빠져나갈 궁리는 다 챙겨 놨어요. “측량할 수 없으니” 그저 주시는 폭 만큼만 알고 감사하면 되지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뭐냐? 우리가 하나님이냐.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고맙다고 여겨야지 그걸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해?

그러니까 엘리후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는 데까지만 알고 나머지는 그냥 하나님께 맡기도록 합시다. 욥 당신이 그렇게 하나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내가 무엇인가’라는 자기에 대한 집착, 그냥 집착이 아니고 자기 의로움에 대한 집착, 이런 것에 대해서 너무 파고들었고 자기가 아프면 그냥 아프면 되는데 ‘내가 왜 아파요?’라고 아프니까 자기가 톡 튀어나오는 거죠. 사람이 아프면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결국은 측량할 수 없다고 하고 그런 뒤에 사람들은 엘리후 나처럼 측량할 수 없다고 하고 끝나면 될 텐데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그러니까 ‘나는 안다. 지혜롭다’라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원대한 지혜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바로 이방인들끼리의 이바구(수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이 인간 쪽에서 계시를 밟아 나가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쪽에서 나설 때 세밀한 수학적 방식을 동원해서 최첨단으로 나와 세상과 우주를 알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물리학입니다. 그것도 근대 물리학이 아니고 양자물리학에서 이게 나오거든요. 그렇게 양자물리학에 나오니까 철학 하는 사람들이 양자물리학 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렇게 놀리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아, 너희들의 주장을 내가 간단하게 설명해 볼까? 인간이란 통속에 들어앉은 두뇌이다’

너희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은 내가 해석하는 단순한 전기신호가 바로 이 세상이라는 거고 그걸 영화로 이야기하면 매트릭스 1, 2, 3편이다. 통속에 두뇌만 있고 전기신호만 외부에서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그 전기신호에 의해서 색깔도 구별하고 사람 형태도 구별하니까 결국 나만 달랑 있으면 현실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잖아. 그게 가상현실이잖아.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하느냐 하면 퍼트남이라는 철학자가 물리학자에게 시비 거는 거예요. 너희들이 결국 주장해봐야 전해질로 가득 찬 통속에 두뇌만 달랑 넣어놓고 전기로 신호만 계속 보내서 전기적 신호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 현실이잖아. 그거 말고 다른 것이 있느냐.

왜 철학자가 물리학자에게 욕을 얻어먹느냐 하면 철학자의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생명이란 1과 0의 디지털 정보란 말이죠. 모든 것이 1과 0의 Information(정보). 캐고 캐보니까 남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0이냐 1이냐, 없음이냐 있음이냐. 그 둘밖에 없는. 그 사이에서 자기들끼리 스스로 부딪치면서 반응을 나타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이 거기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다만 있을 확률이 있다고 관측하는 순간 그 사물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확률상 어디에 번져있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볼까’라고 보는 순간 그 사물들이 쪼르르 집합해서 ‘이거 보고 싶었죠? 그죠?’라고 나오는 거예요. 이걸 양자 중첩이라고 하는 겁니다. 확률상 퍼져있다. 보고 있을 때는 어디 있는 줄 모르다가 관찰하는 순간 비로소 관찰 대상이 등장해서 ‘너희들 인간들아, 이거 보고 싶잖아’라고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나온 엘리후가 측량할 수 없다고 한 이야기와 똑같은 취지입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터널을 뚫는데 하나님이 뚫는 터널과 인간이 뚫는 터널이 중간에서 만나질 않아요. 만날 수가 없어요. 결국 인간에게 생명은 뭐냐? 정보다. 수학적 정보가 모여서 숨을 쉰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죽는 것은 겁내지 말자. 죽는 것은 그저 0과 1로 해리되니까. 해체되니까. 현대과학에서는 그게 뭐가 겁나냐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과학을 진리로 알아서 또 어떤 철학자는 뭐냐 하면 과학은 진리니까, 수학적으로 맞으니까, 인간은 죽었다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난다는 불교 윤회설을 들고나오는 철학자가 있어요. 들뢰즈라는 철학자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중구난방이고 엉망진창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부를 일 이년 한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해 왔어요. 인류의 모든 역사적 과학적 자료를 도서관에서 다 봤단 말이죠. 다 뗐어요.

다 뗀 것이 ‘세상은, 나는 뭐냐 하면 그냥 숫자다. 나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면 과학이 그렇게 해답을 못 내놓는다면 인간은 평생 죽을 만큼 고생하고 아무리 해도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해답이 왜 없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어요. 그 계시를 받은 사람의 의견을 직접 들어봅시다. 시편 121편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에 여호와라는 구체적인 하나님이 나옵니다. 여호와라는 구체적인 하나님은요, 왜 이게 구체적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계시를 준겁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못 지키지만 계시를 줬다는 것은 그 율법을 인수인계할, 인터셉트할 누군가가 인간들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남들은 못 지킴을 분명히 하고 홀로 지킴으로써 인간의 세계인 죽음 세계에 생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거예요.

그분이 오셔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고 하고 있는데 그게 여호와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판명하자는 것이 욥기에 엘리후라면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에서 동행하시는 분을 통해서 자연질서를 정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말씀이 구약성경을 형성하고 선지자들을 거쳐서 그 마지막 선지자까지 예언한 그분이 오십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 오시거든요.

오실 때 우선 그 결과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7절에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그렇게 하시고 그 자라나게 하시는 이유가 고린도전서 3장 10절부터 보면 길게 나오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내 하나님이 닦아둔 예수그리스도라는 터 말고는 나머지는 다 없애버려라”

그러니까 한평생 유치원 다니고 학교 다니고 했더라도 그것마저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고 간주하고 내 일은 다 치워버리라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아버지가 직접 예수그리스도와 아버지 아들과 같이 이야기해서 이 세상을 꾸려나간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여기서 사람에는 사도바울 본인도 포함이 됩니다. 욥이나 엘리후도 포함되고요.

22절에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라고 나오는데 이 세상에 있던 죽고 사는 모든 변화는 너희가 너희 되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들이었고 사건의 집합이었으며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전 부다 너희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질서들이고 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야기 끝난 거죠.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까 ‘어딜 네가 통째로 가지려고 하느냐. 가져와. 가져와. 내가 한 거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그려내기 위해서 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변화가, 내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변화가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죠.

그 과정을 우리가 엘리후나 욥처럼 어떤 철학이나 과학처럼 지식으로 알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엘리후나 욥처럼 지식 많이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지식에 있는 지식 하나 더 보탠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좀 복잡해요. 이 복잡한 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25~27절을 보게 되면 어떤 절차가 나오는데, 그 절차에 주목하면 이렇습니다.

21절을 먼저 보면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라고 여기 귀신 이야기가 나오고 어떤 아이가 귀신들린 이야기입니다.

25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라고 나오는데 여기까지는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장면인 것을 아시죠.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보면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라는 이 대목이 중요해요. 귀신이 나갔으면 나간 즉시 멀쩡해야 하는데 그 아이가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죽어있어요. 이 말은 어떤 절차를 보여주는데 절차가 뭐냐, 인간이 죽는 것은 전부 다 이물질, 인간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하나님을 방해하는 요소가 인간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있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할 때 그 말씀 속에 악마가 인간들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왜곡되게 인간을 설득해왔다는 겁니다. 과학, 물리, 생물, 온갖 철학을 하면서 네가 하는 학문으로 인해 네가 살아있다고 너를 설득해왔다는 거죠. ‘너는 생각하냐? 그러면 너는 존재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데카르트가 이야기했거든요. 네가 생각하니까 네가 살아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님의 것이 없으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가롯유다 예를 들어봅시다. 가롯유다는 스스로 예수님을 지식으로 파악하려고 했어요. 욥과 엘리후와 비슷하게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식으로 정보를 끌어모으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더 산다고 생각하겠죠. 주님께서는 가롯유다를 외통수로 집어넣어 버려요. 사탄이 들어간 상태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가롯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자살한다는 것은 스스로 비참할 수 있는 한계 너머로 본인이 갈 수 없게 된 거예요. ‘나는 더 비참하기 싫어. 나는 여기서 멈추고 싶어. 어, 안 멈춰져. 그러면 나는 비참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죽으면 되지’라고 한 게 가롯유다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 보게 되면 비참하기 싫어서 자살해요. 비참하기 싫어서.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는 원래 안개야. 원래 너는 비참해. 너는 안개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옆에 있는 안개 또 기분 나쁘겠지만.

인간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자체로 네가 분석하고 파악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거예요. 자꾸 조금씩 조금씩 기르시는 거예요. 야구장 관중석 제일 뒷자리에서 공을 하나 던져보세요. 공이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탕! 탕! 탕! 탕!’ 이렇게 계단식으로 되어있는 의자들 아래로 하나씩 튀기며 떨어지죠. 공이 떨어지듯이 주께서 바닥 상태, 기저상태,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 아무것도 아닌 안개 상태로 우리를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 경계선으로써. 그걸 우리 힘으로 하면 우리는 자살밖에 안 해요.

‘비참에 비참이 이것입니까?’라고 하면 ‘아직 멀었어. 더 비참해야 해’라고 하시면 ‘알았어요. 그냥 내가 죽을게요’라고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자살한 사람 중에서 얼마나 교훈적이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차마 누구인지 이름을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어디 바위 위에 올라간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사람이 자살한다는 것은 스스로 내가 해 놓은 말이 있고 남에게 듣는 존경심이 어디인데 여기서 내가 비참하게 되어버리면 내가 못 견디지.

그러니까 그게 바로 안 돌아보시는 거예요. 버려두시는 거예요. 너는 그냥 너 잘난 맛에 살았지. 하나님의 위엄이라든지 자연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표정을 너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너는 지금 계속 네 생각만 했다는 거죠. 여기서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고 했거든요. 일단 사람들이 죽었다고 본 거예요. 한 단계의 절차를 보여준 거예요.

‘귀신들렸다. 살았다’라고 하지 말고 ‘귀신들렸다’와 ‘살았다’ 사이에 딱 뭐가 벌어지게 만들고 이 아이는 귀신들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귀신들린 자체가 죽은 거라고 본 거예요. 창세기 3장 말씀처럼 “이것을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라고 그 아이의 죽는 모습을 통해 아담이 죽었다는 사실을 미리 하나님이 표정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인간이 못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인간을 인간이 살려내는 것도 인간은 못 하고 누가 하느냐면 주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보면 ‘죽은 거 맞지’라고 하시면 손을 내미시고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라고 주님께서 한바탕, 야구장에 계단식 의자들 있는 관중석에 공 떨어지듯이 그 절차,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에 좋아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자기에게 집착하는 자체가 이건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야고 십자가의 공로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살려내는 그 절차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이 누구라고 하지 말고 자기 내부를 해부하듯이 자기 내부, 자기 간 쓸개가 있는 내부를 쪼개서 보여주는 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투명한 유리벽 저쪽에는 멀쩡한 사람만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이쪽에 성도가 ‘아니야,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면 저쪽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뭐라고?’ 안 들리는 겁니다.

투명한 유리벽 때문에 저쪽에는 오밀조밀 찾는 사람이 많아요. 그쪽에는 밀집되어 있어요. 이쪽에는 자기 내부 다 해부되어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왜 영생으로 가는 길은 찾는 이가 적어서. 저쪽은 오글오글 많아요. 그래서 이쪽에서 뭐라고 외치면, 그러니까 이게 투명한 것이 문제라, 아예 안 봤으면 괜찮은데 뻔히 저쪽은 넓은 길인데, 저쪽은 가서는 안 되는 길인데 전부 다 자기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내가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 사도바울의 이 변화, 나는 이렇게 허접한 인간인데 여기에 피 묻혀서 나를 용서했다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아주 특이한 자이지만 오늘날 신약에서 하나님이 생산한 성도는 바로 자기의 내부를 마음껏 보여주면서 ‘나는 이미 죽었어. 자살을 벌써 열 번도 더 했어. 이젠 자살 지겨워서 안 할 거야’라고 하며 주와 함께 사는 즐거움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안다 안다 하지만 기존에 자기가 안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채,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려는 그 무리한 집착과 그러한 열심히 오히려 주의 사랑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시고 주께서 변함없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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