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공격
2022년 1월 16일 본문 말씀: 욥기 38:1-7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38: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38: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무기를 발달에서 볼 때에, 단거리에부터 시작해서 장거리로 무기가 날아갑니다. 어쨌든 직접 상대의 신체를 타격으로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무기는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덮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굳이 공격하지 않더라도 말씀 셩취에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알고 있었던 그 말씀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점으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 예로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들고 나오신 겁니다. 즉 이 세상에 창조할 때, 욥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겁니다. 답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욥과 그 친구들이 논쟁하는 것들이 전혀 하나님에게 먹히지 않는 말만 했다는 겁니다. 욥과 친구들은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보들은 어디서 가졌왔냐는 겁니다.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8:20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따로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본인들이 세상 탐구에 나설 수 없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장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거부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탐구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에게 전혀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 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답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질문할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 답변할 자격도 없는 자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 직접 찾아오시기 전에 욥은 대단한 자신감으로 하나님을 뵈울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욥기 13:18,22에 보면,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기 19:7에도 욥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즉 욥 자기 쪽에서 아무리 하나님보고 기도 응답해 달라고 요청해도 하나님께서는 딴 전을 파시는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과감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단정짓습니다. 욥기 31:35-37에 보면,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나를 공격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어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해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 하나님은 도리어 욥 자신을 향하여 시비거십니다. “무지한 말로 사실을 왜곡시키는 자가 바로 욥 너다!“는 겁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천지창조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창조 때, 욥은 참여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인의 한계입니다. 이방인들이 신을 찾을 때의 정보는 같은 인간들의 동의를 받아낸 것 뿐입니다.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계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사 45:15)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질문자이요 답변자가 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할 만한 위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또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질문으로 덮여져 있는 ‘말씀의 세계’이기에 그 숨어계시는 하나님 본질에 합당한 말씀으로 창조되고 유지되어 온 겁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욥을 정죄하고 나무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욥 자체를 말씀 세계를 완성하는 일원으로 집어넣기 위해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니 욥은 답변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함을 감격스러워 해야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품어져 있음을 이스라엘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139:7-10에 보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특화된 대상이요 삼키워졌습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가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생각해놓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체가 문제성 있음을 감안하지 못하고 내뱉은 겁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치고 ‘오직 신의 영광만이’, ‘오직 신의 주권성으로만 통치되는 세상’은 언급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방인이던 이스라엘이던 한결같이 이런 신학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은 자기 문제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어디 있었느느냐?”고 물으시는 것은(38:4)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었다”를 고백케 하는 겁니다.
즉 진리란 항상 나를 비켜갈 때에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위주의 삶의 패턴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마치 머리에 부상을 당하고 철판으로 떼운 자가 겉으로는 머리카락으로 잔디를 만들어 철판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막상 하나님께서 질문으로 수시고 들어가면, 처음에는 하나님 주권 위주로 정답을 말하는 것 같지만 곧장 딱딱한 철판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즉 스스로 자아라는 자기 철판을 뚫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아를 뚫고 들어오시게 했던 그 말씀의 질문만이 우리 안에 전부를 채워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 말씀만 영원토록 우리 마음에 남아야 합니다. 그 질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의해서 대신 답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질문이요 답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은 감히 하나님에게 답변할 자격도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늘 받기만 하는 존재임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8강-욥기 38장 1~7절(말씀으로 공격)2201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폭풍 가운데서 나타났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폭풍 가운데서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나타나셨거든요. 이것은 어떤 무기체제에 있어서 인류 역사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살해할 때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돌을 던진다든지 또는 칼을 가지고 직접 그 사람의 신체에 세포를 후벼서 세포를 파괴하면서 죽인다든지 아니면 화살을 쏜다든지 불을 지른다든지 이렇게 인간의 신체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식의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대상으로 그렇게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타격을 하시지 않고 말씀을 그냥 던져버려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공격하고 “무지하면서도 잘난 체하는 게 누구냐? 나와. 내가 너를 직접 타격하겠다”라고 나오실 때 왜 하나님께서 욥을 죽이지 않고 말씀으로 공격부터 하시는가. 그것은 전에 욥이 이야기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들끼리만 인간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자꾸 인간들만 의식하는데 이 전체가 말씀의 세계입니다.
사람에게 이야기한 그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끼어들어서 이미 다 듣고 계셔요.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못하겠습니까.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같은 사람에게 이야기한 겁니다’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 현장에 주님께서 다 듣고 계셨습니다. 듣고 계시다가 ‘아, 그건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고 나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니까 내가 봐 줄게’라는 그런 거 없습니다.
“네가 왜 사람만 의식하고 말을 했느냐”라고 하나님께서는 다그치십니다. “너는 네 눈에 사람 보이지? 나를 왜 의식 못 했나?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왜 의식 못 했지?” 그러니까 너는 평소에 그냥 ‘하나님 눈 감아 주세요. 저는 사람에게만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그걸로 끝내겠습니다’라는 그런 심보 자체가 전체가 말씀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독하고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어요. 세상 끝날까지. 그러니까 ‘하나님 우리 집에 와주세요. 하나님, 우리 교회에 와주세요’라는 그런 기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쓸데없는 기도예요. “네가 뭘 나를 초청해. 네가 초청하나 마나 할 것도 없이 너는 그냥 네가 있는 그 자리가 원래 내가 펼쳐놓은 자리에 네가 그냥 끼어든 거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시편 139편 8~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바다 끝에가도 거기 계시고 하늘 끝에 또는 땅끝에 어디를 가더라도 주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이 만드신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나타났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욥이 복을 받아서 그래요.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욥이라는 특정 인물을 지목해서 찾아왔다는 그 자체를 욥은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욥을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욥이 생각하는 세계에는 나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욥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욥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다른 발언들이, 다른 이야기들이 그냥 성질대로 펼쳐졌다는 것을 욥으로 하여금 다 이야기하게 만들어 놓고 제일 끝부분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이 무지한 자야, 네가 말한 것은 내가 말하는 것과 틀린 이야기를 너는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라는 겁니다.
욥기 19장 7절에 보면 욥이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찌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내가 이렇게 안타깝게 부르짖고 기도 응답해달라고 요청해도 주님께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욥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이 게으르다, 하나님 쪽에서 업무가 나태하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고 딴청을 피우시니까 내가 기도해도 기도하는 것도 모르실 수 있다’라고 온갖 인간들의 끄집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고 욥기 13장 18절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이렇게 욥은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자부하고 자신만만 해하고 있습니다.
20~21절에 보면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와는 마음이 똑같고 한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대서 벌주시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칭찬할 것이라고 자신만만 해했습니다.
이것이 엘리후를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욥기 31장 35~37절에 봐도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하였으리라”
그러니까 욥은 ‘고소해. 고소해. 하나님의 그 고소장을 다 알고 계시니까,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분명히 판결 내리실 거야’라고 자신만만 해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판결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38장에 나타나서 “무지한 말로 나의 뜻을 훼방하고 가리는 자가 누구냐? 욥 너 맞지?”라고 나서십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갑자기 욥이 뻘쭘해져 버렸어요.
지난번 오후 설교에서 제가 이야기했는데 터널을 뚫을 때 자기는 이쪽에서 터널을 뚫고 나오면 저쪽에서 터널을 뚫는 사람과 중도에서 만날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왜? 하나의 빈틈도 없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밟아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욥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 자료 소스(source)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자기가 태어나서 경험하고 들었던 그거 다 끌어모아서 이건 옳다고 판정을 내린 거예요. 어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시험을 친 적이 있는데 답변이 아주 희한하게 나왔습니다. ‘고려는 누가 창건했는가?’라고 선생님이 문제를 냈는데 답변을 ‘최수종’이라고 쓴 겁니다. 그러면 고구려는 누가 창건했는가? 송일국이가 창건했겠죠. 이게 인간의 한계예요.
이사야 45장 15절에 보면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스스로 가려진 하나님. 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는 거, 나오는 것마다 엉터리이고 자기 생각뿐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결론만 제시합니다.
그리고 둘 다 모르면서 둘 다 아는 척하면서 진실 된 결론에 도달하고자 소위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신학교에서 그걸 가르쳐요. 그걸 가르치는 것은 잘한 일이에요. 지금 생각해도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은 잘한 겁니다. 왜? 그것이 왜 틀렸는가를 말할 수 있는 소스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신학책에 나오는 이천 년 신학 역사를 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뿐이고 하나님의 주권 사상뿐이에요.
천주교나 기독교나 교파를 막론하고 심지어 이슬람교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이고 있어요. 이슬람도, 힌두교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는 곧 오늘날 교회이고 성당이고 절간이고 이슬람교라는 겁니다.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종교에 도착했다고 천당 다 온 것처럼 이제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뭐가 됐어요? 뭐가.
어떤 노인네가 청년에게 “야, 너 참 머리숱이 많구나”라고 하면서 머리를 만져 주었어요. 청년인데 왜 이리 머리숱이 많은가 하면서 만져 주니까 처음에는 머리숱이 많아요. 좀 더 깊이 들어가니까 딱딱거리는 철판 소리가 나요. 어릴 때 교통사고 나서 철판 깔고 거기에 머리카락으로 덮어놓은 거예요.
처음에는 신학 한다고 신났지요. ‘주여, 영광을 받으소서. 이 진리대로 성도에게 전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유명한 찬송 가사도 있잖아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주님께서 그러시죠. 들고 가는 복음 자체가 엉터리라고. 처음에는 자기가 복음 들고 간다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풍성한 머리카락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뭔가 부딪혔어요. 딱딱한 것에. 철판 소리가 나요.
이게 누구에게 부딪힌 것일까요. 자아에, 나 위주의 영광에 부딪혔죠. 하나님 빙자해서 나의 영광 찾는데 거기에서 딱 스톱된 거예요. 진도가 안 나가네요. 앞으로~앞으로~가야 하는데 나가질 않아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 옹고집, 그 완고함에, 그 교만함에 이게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성 프란체스코라는 성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1208년도에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 전에 서기 540년경에 베네딕트 수도원이 먼저 있었고 한 660년 후에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세워지고 그 후 12년쯤 후에 도미니크 수도원이 생겼어요. 그 당시 13세기경에 유명한 수도원인 성 프란체스코와 도미니크 수도원이 라이벌(경쟁) 관계예요. 도미니크 수도원은 주로 공부하는 쪽이고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소위 도 닦는 쪽이죠.
고려 시대 양대 불교의 교파가 교리 쪽으로 나온 것과 참선하는 쪽으로 나온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걸 합해서 지눌(고려승려)이라는 중이 만든 것이 조계종입니다. 균형을 맞춘다고요. 신라의 의상과 원효가 서로 다른 색깔의 교파였는데 그 둘을 합한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서로 반대쪽을 취함으로써 자기가 반대가 아님으로 내가 진리에 속했다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게 딱딱한 철판이에요.
그런데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신심이 깊었는지 공중에 나는 새와도 대화하고 들에 꽃과도 대화하고 공중에 나는 참새와도 대화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질 않아요. 성 프란체스코가 참새와 대화한 것은 심심해서 그런 거예요. 심심해서요. 인간의 본심은 뭔가 말하고 싶은데 자아라는 철판에 탁 튕기면 그다음부터는 뒤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누군가를 상대로 말을 해야 해요. 여자분들은 기원에 안 가봤죠. 하루종일 할 일이 없어서 기원에 가는데 기원에 가도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와 바둑 안 두고 멀뚱하게 앉아있는 사람. 바둑을 안 둬주는 겁니다. 주로 바둑을 안 둬주는 이유가 몸에서 냄새나는 노인네는 상대를 안 합니다. 바둑인지 고문인지 분간이 안 가요.
말쑥하게 생긴 좀 배운 할아버지 같으면 대번에 바둑 하러 옵니다. ‘돈 천 원 내기할까요?’ 그런데 허름한 노인네들은 거기서 왕따시켜 버립니다. 그런데도 오는 이유가 심심해서 오는 거예요. 인간은 밋밋하고 지루한 인생을 근원적으로 못 견딥니다. 뭐라도 일을 해야 해요. 선교하든지 전도하든지 기도하든지 뭐라도 해야 해요.
연세 많은 할머니들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에 있으면서 뭐부터 하느냐 하면 새벽기도부터 나와요. 그것 때문에 새벽기도에 교회 기름값 팍팍 나가는 거예요. 기도하러 오니까 겨울에는 기름을 때야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얼마나 다행인지요. 새벽기도 2~3시간 동안 하는데 그 기름값을 누가 대겠어요. 그 할머니는 기도하러 와서 새벽부터 대화하는 거예요. 프란체스코가 참새와 대화하듯이.
그 할머니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쩌고~저쩌고~제 사정을 알아주시옵소서’라고 가만히 들어보면 맨날 자기 사정 알아달라고 하고, 그저 자식들 손자들 남산 위에 노루 새끼처럼 잘 뛰게 해달라고 하고, 이건 무속신앙 토속신앙에서 하는 멘트 그대로 가져와서 할 뿐입니다. 왜 하느냐. 심심하니까. 무슨 깊은 진리 하지 마세요. 심심해서 그래요. 심심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우리교회 보세요. 새벽기도 안 하니까 이 근처에 교인들 한 명도 없잖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최고의 전략이었습니다. 욥은 그럼 왜 그렇게 싸웠느냐. 욥은 근원적으로 심심한 거예요. 자아에 부딪친 거예요. 자아에. 이 자아를 욥의 친구가 날카로운 창으로도 그 철판같은 딱딱한 자아를 욥도 못 뚫고 친구들도 뚫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엘리후는 뚫어보려고 했는데 그냥 미끄러져 버렸어요. 함석판에 미끌려서 삐쳐나가고 마지막에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에 요나가 중요합니다. 요나의 고기는 요나를 삼켜버렸습니다. 삼켜버린 거예요. 지금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욥을 삼켜버린 거예요. 삼켜버리면 특징이 뭐냐. 이제 욥은 내 인생이란 것은 날아간 겁니다. 이제는 주님의 강력한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욥이 1~37장까지 그렇게 힘들었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보면 전부 다 인간들의 철학과 신학과 과학에 불과한 거, 구원의 능력도 안 되는 이런 주장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그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쏟아낼 것 다 쏟아내야 해요. 시칠리섬에 팔레르모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이상한 묘지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 죽으면 그다음부터는 생전 안 찾아오잖아요. 벌초할 때나 한번 오는 데 그것도 귀찮아서 아예 항아리 안에 집어넣잖아요. 그런데 팔레르모에 있는 카푸친 지하묘지는 천주교 문화가 있어서 지하묘지에 사람 해골을 묻지를 않아요. 지하묘지에 해골을 단체로 진열해 놨어요. ‘이건 우리 돌아가신 외할머니고요, 외할아버지고, 이분은 시삼촌입니다’라는 식으로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그거 왜 만들어 놓는가. 심심하니까.
거기에 참석한 사람에게 리포터가 인터뷰합니다. ‘왜 이런 으스스한 곳에 이런 것을 만들어 놓고 자꾸 찾아오십니까?’라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삶의 연장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여기서 우리 마리아에게 기쁨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천주교적인 신앙도 역시 딱딱한 자아성, 내 가족, 내 가족이여 영원하여라, 자기 혈육을 못 버리고 있어요.
도대체 인간은 인간을 못 버립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가 욥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뚫느냐 하면 그건 조금 있다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들어가야 하고요, 그전에 이방인의 한계를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면서 늘 누구하고 그동안 놀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릴 때부터 자기를 인형으로 삼아서 자기와 인형 놀이하면서 살아왔어요. 이게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문세가 그래요.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연민에 빠져서 자기와 노니까 자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딱딱한 철판에 자기가 뚫고 지나갈 수 없으니까 남아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철저한 자기 관리와 자기를 우호적으로 대우하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흔한 옷 한 벌 못 해주고, 그대 생일에 따뜻한 밥 한번 못 사주고, 미안해요~ 나만의 여인이여’라고 이러고 있어요. 김건모가 부른 ‘미안해요’라는 노래예요. ‘옷 한 벌 못 해주고~따뜻한 밥 한 번 못 해줘서 미안해요’라고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내가 상대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내가 나에게 미안하죠. 미안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내가 더 빛이 나는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내 관리를 철저히 하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폭풍 속에서 무지하다고 하시며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해요. ‘너 천지 창조할 때 어디 있었어?’라고. 여기에 대해서 욥은 답변을 못 합니다. 왜? 창세기 1장을 모르기 때문에. 모세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못 해요. ‘거기에는 오직 주님이 계셨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계셨습니다’라고. 또는 ‘거기에는 인간은 아무도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방인과 달리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혜택을 입은 줄 여러분은 아시길 바랍니다. 믿고 안 믿고는,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나중 문제고요. 하나님의 숨어있는 비밀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퍼부었다는 것만 해도 정말 특화된 특별대우 받은 특급사랑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걸 가지고 캡처라고 합니다. 동영상 볼 때 사진이 멋지다 싶으면 그 동영상의 한 부분을 캡처해버리면 내가 원하는 정지화면을 얻을 수가 있어요.
주님께서 그 많은 사람과 이스라엘 민족 히브리인들을 캡처하듯이 여기는 특별히 욥을 캡처한 거예요.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더이상 욥은 궁시렁궁시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입만 다물어도 욥은 복 받은 줄 알아야 합니다. 캡처하듯 찾아오신 거예요. 욕을 얻어먹든, 꾸중을 듣든, 매를 맞든 고마운 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 내가 있다. 그저 주님의 생각만 있으면 되고 나 없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주님 생각만 있고 내 생각이 없는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내가 내 생각한다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생각을 포기할 때 이것이 주님의 캡처가 되고 주님 앞에 특화된 존재가 되고 그렇다면 주님이 생각한 그 말씀의 세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답변을 지금 하나님은 욥에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네가 천지창조 때 어디 있었느냐?”라고 할 때 욥이 여기서 과학적인 답변을 끄집어내면 안 됩니다. ‘인플라톤 장에서 양자 요동이 있었고 거기에 10억분의 1의 확률로 누가 튀어나와서 옆에 있는 다른 우주의 중력이 밀려와서 그 중력에 의해서 헬륨의 원소가 어떻게 생기고 수소의 원자가 몇 개 생기고 그것이 중력에 휘감기면서 그다음부터는 핵융합이 일어나서...’라는 그런 진화론적 과학적 설명은 욥에게서는 입을 열고 나오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질문할 때 질문에 캡처된 그것으로 그만 오케이고 됐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그것으로 그만 끝난 겁니다. 답변하지 마세요.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내가 뚫을 수 없는 자아를 주님이 질문으로 내가 뚫리지 않는 나를 주님이 질문으로 뚫고 내 안에 주님의 질문만 고스란히 남도록 그런 인생을 살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 내 안에는 뭐냐 하면 이 성경 말씀만 남는 거죠. 이 두꺼운 성경 말씀만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겁니다.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일어났는가. 나는 숨어있는 하나님이라고 했죠. 숨어있는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특화되었죠. 아브라함 옆집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요. 이삭이 특화되었죠? 이삭 옆집 사는 사람들 하나님 몰라요. 이삭에게만 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형 에서는 몰라요. 야곱에게만 밤에 천사가 와서 특화해서 “너 죽여버리겠다”라고 찾아온 거예요. 야곱은 죽여버리겠다는 찾아오심을 복으로 여긴 겁니다.
내가 있던 자리에 나 없고 주님의 말씀만 있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내가 새롭게 이동할 내 자리입니다. 이것을 바로 야곱 언약 속에 이걸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야곱 언약이 확대되면서 율법이 되고 하나님은 레위기 17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안에 피 흐르지?”, “네”, “그 피가 너의 본 모습이야. 너는 무기질이야. 너는 애초부터 죽은 자야. 나는 너를 신체로 보지 않고 네 안에 피로 보겠다. 네 피는 아무짝도 쓸모없는 피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피라고 질문함으로써 유일하게 소용 있는 어린양의 피와 대비하라고 하나님께서는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피는 소유물이 아니라 남겨둬야 하는 거고 네가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왜냐 하면 피가 너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피, 그리고 그 피와 대조가 되는 제단 위에 흘려질 우리 대신 죽어야 할 그 피, 그 피를 통해서 언약을 몰랐던 우리가 우리 안에 언약이라는 질문이 우리 안에 작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안에 십자가 있다. 그거면 됐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딴 건 자랑하지 않아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자, 과연 십자가를 자랑하는지 아닌지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여러분들 한 번 답변해 보세요. 문익점이 목화씨를 밀수해서 10개를 가져왔는데 그중에 9개는 죽고 1개 살아남아서 그때로부터 이 한반도에서 고려 시대부터 푹신하고 따뜻한 솜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1번 –다행스럽다, 2번- 아무것도 아니다. 몇 번입니까?
평소에 십자가, 십자가 해도, 갑자기 문익점 이야기하면 ‘야, 그때 문익점이 밀수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하거든요. 교회 와서는 십자가가 최고라고 하다가 교회 유리문만 열고 나가면 피보다 더 좋은 것들 찾고자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 이건 뭐 남 욕할 거 없죠. 주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딱딱한 자아의 머리에, 그 영구 없다고 하는 머리에, 쇠판 때기 자아가 있는 마음을 날마다 확인시켜주시고 말씀으로, 십자가로, 뾰족한 십자가로 뚫어서 무기물로 죽은 너희를 이 안에 십자가 피로 너희가 살았다는 것을 매일같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특화된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질문이 우리 안에 본질로 자리 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잘난 체하는 질문은 이제 쏙 들어가 버리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