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지식과 지혜

아빠와 함께 2022. 1. 3. 08:47

지식과 지혜 

2022년 1월 2일                   본문 말씀: 욥기 37:14-20

(37: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37:15)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37:16)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37:17)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37:18)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37:19)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37:20)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엘리후가 일방적으로 욥에서 질문을 합니다. 질문하면서 대자연계의 현상을 자꾸만 가져오는 취지는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나 욥 개인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욥이 개인적인 아품과 거론하지 말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왜 거기에 존재해야 하느냐를 더불어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욥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아픔을 근거해서, “하나님, 왜 저는 남들과는 달리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는 식으로 따지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의로운데 왜 의로움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복으로 제공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이 욥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후가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근거를 일방적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 엘리후의 불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후의 지적은 단지 그 당시 욥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후가 욥을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제시된 오늘의 질문들에 대해서 오늘날 과학자들은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식이지 지혜가 아닙니다. 지식이란 인간 자신이 자기를 살려보기 위해 쌓아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번개같은 경우에 과학계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어놓습니다. “번개가 생기려면 전기원이 있어야 하는데 뇌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뇌우는 축전기 역할을 하는 구름을 머금고 있습니다. 구름의 상부는 양전하를, 그리고 뇌우는 음전하를 띱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전기를 띠는 대전 현상을 구름이 온도 차이로 서로 충돌하면서 구름 속 입자와 전자가 상호 교환되는 결과로 생각하고 지만, 명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양전하를 띤 구름 상부와 음전하를 띤 하부 간의 차이가 커지면서 전기장이 형성됩니다. 구름 송에서 전기적 부하가 생성되면 바로 아래쪽 지상의 물체는 물론 지표면에도 명향을 미치게 됩니다.

구름 하부의 음 전기장은 지표의 음전하를 밀처 내기 때문에 폭충이 지나는 지표에 양전하가 형성합니다. 이러한 전기장이 점차 강하게 발달함에 따라 구름과 지표면 사이에 존재가 하는 공기가 이론화됩니다. 공기 분자들이 전자와 양전하 이론으로 분리되면 플라스마plasma상태로 전환됩니다. 이 플라스마는 구름과 바로 아래쪽 지표면 간을 잇는 전도체로 작용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번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엘리후의 그 다음의 질문인 구름 하단부가 평평하다는 점과 대기의 순환, 즉 바람이 불면 갑자가 온도가 높아지는 현상, 그리고 하늘의 창공이 고르게 펼쳐져 있는 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과학적 설명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가 만약을 이것을 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성과 연결점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자연현상 설명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세상 모든 지식의 완성이라는 것이 ‘지혜’로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나 욥이나 욥의 친구나 그 시대에서는 그저 ‘모르겠다’로 일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르겠다’가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전부 앎’이 됩니다.

즉 ‘질문하는 인간’ 자체가 처참하게 망해지는 것이 곧 정답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왜 모든 인간은 망해야 할까요? 그것은 창조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즉 정답, 진리는 예수님의 움직임 속에서만 전달됩니다. 그 움직임이 완성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거기서만 “다 이루었다”가 성사되기 때문입니다.(요 19:30)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릴 때의 고통을 한껏 머금은 그 일그러진 얼굴 모습은 죄인된 인간의 허무함을 깊이 있게 드러내신 겁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의 변화된 얼굴을 십자가에서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인간존재는 그 거룩성의 격차로 인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세에게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너지는 얼굴표정을 인간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 세계가 이미 허무의 힘에 굴복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 몸을 살려보려고 여러 가지 질문들을 쏟아내고 연구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더욱더 허무의 무게로 짓눌려 무겁게 할 뿐인 겁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함께 고작 40일만 있었던 모세는, 비록 썩어질 아담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는 산 밑의 백성들이 감히 마주 대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을 함께 했던 그 예수님의 얼굴을 밧모섬에서 부활된 주님을 볼 때는 감히 정면으로 쳐다 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 1:16-17) 누가나 편하게 볼 수 있는 그 예전의 예수님 얼굴이 아니었던 겁니다. 모세의 경우도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타월로 자신의 얼굴을 전체 뎦어야 백성들과 대화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답이 갖는 영광성’입니다. ‘모른다’가 아니라 신약의 성도는 ‘안다’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성도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5-18) 바로 이것이 정답입니다. 즉 온 우주는 예수님의 의와 완전함과 거룩함과 거기에 따른 영광성을 위해 만들졌던 겁니다.

이 영광을 위해 사도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도 다 걸었습니다. 즉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의 죽음에도 억매이지 않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답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어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6강-욥기 37장 14~20절(지식과 지혜)2201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7장 14~20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네가 능히 그와 함께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인간들 말고 자연이 있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고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바람과 번개가 나타나요. ‘심심한데 번개나 한번 쳐볼까’라고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잖아요.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번개도 여기 끼어있고 구름도 같이 끼어있고 궁창도 있고 궁창에는 별들과 해와 달도 끼어있는데 왜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같이 있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만약에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살게 되면 해와 달과 별이 있고 번개 치는 이유를 빠뜨린 것이 되고 그걸 빠뜨린 것이 되면 우리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이것이 오답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엉터리일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진정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만드신 것은 더불어 만들었는데 우리는 만든 것 중에서 자기에게 굳이 관심 가질 필요 없는 해와 달과 별이나 번개 치고 남풍이 부는 이런 것을 다 치워버리고 나머지를 가지고 ‘나는 뭡니까? 나는 어떻게 살면 돼요?’라고 우리 중심적으로 나오는 그 자체가 이미 오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후가 보기에 욥은 질문 자체가 ‘나는 왜 이렇습니까? 나는 착한데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요?’라는 식으로 질문 자체가 더불어 함께 하는 질문이 아니고 자기가 아쉬운 거, 자기에게 괴로운 거, 이것을 사람들에게 질문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누구에게 이걸 가져오느냐 하면 하나님께 들이미니까 엘리후가 보기에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같은 인간들 보고 ‘너는 편해? 나는 힘들어’라는 이건 주고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뭔데 나에게 아픔을 줍니까?’라는 식으로 되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과 번개와 구름과 궁창(성층권) 이런 거를 만드신 이유를 욥이 일방적으로 완전히 삭제하고 자기 아쉬운 것만 내미는 반칙적인 질문이 되는 겁니다. 이걸 엘리후가 욥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엘리후는 욥의 질문부터 문제 삼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엘리후가 욥에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전체를 만드셨는데 어떻게 너는 네 생각만 하느냐?’라고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엘리후가 욥에게 지적하지만, 만약 오늘날 우리에게도 지적한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군시렁 군시렁 답변을 내놓겠습니까? 그거 하라고 성경이 있는 거예요.

둘이 이바구한 거 들으라고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오늘날 우리 문제거든요. 우리가 어떤 가정 문제가 있을 때 ‘해와 달아 너는 왜 이리 밝게 빛나니?’라고 묻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전체를 아울러서 해답을 얻어야지 내가 아쉬운 것만 따로 낚아서 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이런 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여기에 대해 질문하면 오늘날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세워놓은 종교 교리같은 것이 있어요.

일반인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면서 다 그 종교 교리에 심취하는 교인이 되는데요, 그 종교 이름이 과학입니다. 오늘 엘리후가 질문을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라고 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오늘날 과학 공부한 사람은 “그거 알지요”라고 답변이 딱 나오는 겁니다.

번개가 생기려면 전기원이 있어야 하는데 뇌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뇌우는 축전기 역할을 하는 구름을 머금고 있습니다. 구름의 상부는 양전하를, 그리고 뇌우는 음전하를 띱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전기를 띠는 대전현상을 구름이 온도 차이로 서로 충돌하면서 구름 속 입자와 전자가 상호 교환되는 결과로 생각하고 지만, 명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양전하를 띤 구름 상부와 음전하를 띤 하부 간의 차이가 커지면서 전기장이 형성됩니다. 구름 속에서 전기적 부하가 생성되면 바로 아래쪽 지상의 물체는 물론 지표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구름 하부의 음 전기장은 지표의 음전하를 밀쳐 내기 때문에 폭풍이 지나는 지표에 양전하가 형성합니다. 이러한 전기장이 점차 강하게 발달함에 따라 구름과 지표면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가 이온화됩니다. 여기서 ‘이온화’라는 새로운 단어가 튀어나와요. 과학이라는 종교에. 이온화라는 것은 원자나 분자가 전자를 잃거나 추가적으로 얻을 때 이온화가 됩니다. 이온화된 것이 죽처럼 서로 섞일 때 그것을 플라즈마(plasma)라고 해요.

여기에 또 ‘플라즈마’라는 단어가 과학이라는 종교 교리에 나옵니다. 플라즈마라는 것은 태양이 플라즈마 현상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계속 빛을 전달한다는 겁니다. 플라즈마된 공기의 전자와 양이온이 분리되면서 플라즈마 상태로 전환되면서 구름과 바로 아래에 지표면 사이에 전도체, 여기에 또 ‘전도체’라는 단어가 등장해요. 플라즈마라는 이온화된 것이 모인 걸쭉한 죽처럼 생긴 겁니다.

여기서 전하가 발생 되면서 차이에 의해서 그걸 중성화시키려고 전기 이온화의 차이를 해소시키는 차원으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번쩍번쩍’ 번개가 치는 거예요. 욥이 만약에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엘리후가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구나’라고 깜짝 놀라겠습니까? 이걸 깜놀이라고 하는데. ‘내가 너에게 졌다’라고 이렇게 나옵니까? 지금 엘리후는 욥에게 그 입 다물라고 하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고.

본문에 보면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라고 나오는데 구름이 왜 평평하냐고 묻는 거예요. 구름이 평평한 것은 적란운이라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생겨서 그런 건데요. 구름이라고 하는 것은 온도가 상승하면서 구름 덩어리가 수직으로 상승하게 되면 1000m마다 섭씨 10도씩 온도가 내려갑니다. 그러면 위로 올라갈 때 처음에는 구름이 아니고 뭐냐 하면 물의 분자가 기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수증기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락모락 김 나는 것을 수증기라고 하는데 김 나는 것은 수증기가 아니에요. 그건 액체입니다. 기체는 수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김 나온다, 김 서린다는 것은 벌써 이건 액체죠. 그냥 물입니다. 그게 올라가게 되면 외부 압력이 낮아지면서 기거서 온도는 감소하고 부피는 팽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보일의 법칙(Boyle's law)입니다. 여기서 또 ‘보일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과학 교리가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선악과 법칙이 나오는데 과학이라는 종교는 보일의 법칙이 나와요. 이 보일의 법칙에 의해서 상 전환이 일어나는데 상 전환은 액체, 고체, 기체의 상 전환이 물리 세계에서 일어나는데 상 전환이라는 이것도 과학에서 나온 용어거든요. 기체가 과포화된다는 이 ‘과포화’도 과학 용어예요. 온도가 내려가면서 먼지나 입자를 만나면 이게 물방울이 되는 거예요. 이게 구름입니다.

구름이 되는 고도를 가지고 상승응결 고도라고 합니다. 이걸 영어로 표현하면 ‘LCL’이라고 합니다. 상승응결 고도(LCL)가 되면 아래에서 급작스럽게 증발이 일어나면서, 증발이라는 단어도 과학 단어인데, 상층에 포화상태에서 응결된 것이 갑자기 증발하면 여기에 뚜렷한 경계 현상이 일어나서 그 구름의 바닥이 칼로 자른 듯이 평평하게 떴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됐나? 엘리후?

그러면 엘리후가 ‘네가 하나님의 기묘함을 아는구나. 다시는 너에게 묻지 않으마’라고 되는 겁니까? 아니에요. 엘리후는 지금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인간 위주, 생활 편리 위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질서 가운데서 골라잡아 내 생존, 더 살기 위해서, 왜 사는지 모르지만 무조건 살기 위해서 이런 지식이 있어야 밥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17절에 보면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그것도 알죠. 지면에서 10km 위에까지 대기라는 대기층이 있습니다. 대기층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순환하거든요. 적도 부분이 제일 뜨겁게 햇빛이 비치니까 온도가 올라가서 지구를 둘러싼 공기층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이게 위로 올라가요. 올라가니까 생긴 빈자리에 북극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온다고요.

밀려오니까 적도 0~30도, 30~60도, 60~70도 사이에 내부적으로 계속 순환을 하게 됩니다. 뜨거운 공기가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가 밑으로 내려오고 내려온 공기가 적도에서 뜨거워지면 다시 위로 올라가고 그걸 대류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새로운 과학 용어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재미 하나도 없으시겠지만 할 수 없어요. 지금 물었기 때문에 답변하는 거예요.

적도 0~30도에서 대류가 순환할 때 순환하면서 발생하는 바람이 부는데 그 바람을 무역풍이라고 하고 30~60도에서 부는 바람을 편서풍이라고 하고 그 위에서 부는 바람을 극동풍이라고 합니다. 이게 지구의 남반구, 지구 남쪽과 북쪽이 바람의 방향이 달라요. 다른 이유가 코리올리효과가 있어요. 이것도 과학 용어인데 코리올리효과란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자전에서 회전하는 각운동량이 있는데 각운동량은 수학적 용어입니다.

각운동량이라는 것은 회전운동 하는 물체의 운동량을 가리키는데 물체의 운동량과 물체와 회전축 사이의 거리를 곱한 값으로 표현하는 벡터량입니다. 코리올리효과에서 북반구에서 미사일을 쏘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고 남반구에서는 왼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람 방향이 똑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치우쳐서 비스듬하게 부는 거예요. 남서풍처럼.

됐나? 엘리후야? 이러면 엘리후가 ‘오홋, 네가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구나’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에요. 인간의 지식은 욥의 고통처럼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는 그 자체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 하나 더 있는데 18절에 보면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궁창이라 하는 것은 지구를 이루는 대기층이 몇 층이 있느냐 하면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이 있어요. 층마다 온도 차이가 있는데 온도가 점점 낮아지다가 성층권에서는 점점 온도가 높아지고 성층권은 오존층이 있어요. 그 위에 중간권으로 가면 온도가 다시 낮아지고 열권으로 가면 위로 올라갈수록 매우 급격하게 온도가 상승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공평하게 펴지는 거거든요.

이런 이야기, 대류권(지상 고도 0km~10km)에서 성층권(지상 고도 10km~50km), 성층권에서 중간권(지상 고도 50km~80km), 중간권에서 열권(지상 고도 80km~1000km)으로 이루어졌다고 과학계에서 이야기해요. 과학계에서. 그러면 과학이 왜 이걸 이야기하는데요. 이걸 알아야 우리가 밥 먹고 살지. 그럼 밥 먹고 살면 뭐 하는데? 몰라.

그거는 지식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왜 죽였는지 아나? 몰라. 지금 엘리후가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시초에, 최초에 이 대자연은 왜 인간만이 아니라 대자연과 더불어 인간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지금 엘리후가 안다는 것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겠고 욥 너도 모르잖아. 모르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줬습니까’라고 그렇게 대들지 말고 그 입 좀 다물라는 겁니다.

지금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이야기가 모르면 입 좀 다물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욥 이야기가 신약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에 나오고 우리는 모르니까 입 좀 다물라는 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이제는 입을 벌려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성령께서 인간의 한계, 인간 자체적 한계로 몰랐던 것들이 신약은 전부 다 정답이 주어졌습니다.

목숨 바칠 정답 있으면 충분히 목숨 바칠 수 있다고요. 그것 모르면 무거운 육체를 질질 끌고서 70세, 80세, 90세 가는 거예요. 90세 된다고 진리 압니까? 알면 살지요. 그런데 90 되어도 100세 되어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이재명이는 압니까? 알면 목숨 바치죠. 모릅니다. 윤석렬도 모르고요. 그런데 사도들은 알려줍니다. 아니까. 어느 정도로? 내 목숨은 그까짓 것 진리 앞에서 중요하지도 않아요.

죽어도 사는데 그게 진리라면 살아야 하겠다는 그것에 얽매인 것은 지식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지식은 우리를 힘들게 해요. 왜냐 하면 지식은 인간의 소유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이 처음에 선악과를 따먹을 때 욕망이 작용한 겁니다. 저거 알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아담을 말리지 않았어요.

따먹지 말라고만 했지 따먹을 때 나서서 하늘나라 경찰들 보내서 못 따먹게 강제조치하지 않았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그 자체도 인간에게 지혜가 되지 못하고 지식의 일 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그냥 살아갈 뿐이에요. 그러면 정답은 어디 있느냐, 비밀은 어디 있느냐, 진리는 어디 있느냐? 신약에서 성령 받은 사도가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에게 짙은 허무는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다. 예수님에게 허무가 있는데 그 허무는 예수님 자신의 얼굴이에요. 왜냐 하면 일그러진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거든요. 그 일그러진 모습을 자아낸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해답이 이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봐라. 인간들의 말로가 내 모습이다’였습니다.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지식이 뭐냐, 지혜가 뭐냐가 아니라 묻는 것조차, 묻는 그 입조차 같이 허물어져야 할 우리의 몸입니다.

그리고 이 몸이 허물어지면 몸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가, 해와 달과 별도 빛을 잃어버리고 같이 모든 것이 짜부라져요. 이게 무너진다고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보면 불에 타버려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면 내가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더 존재한다고 물었던 그 질문 자체가 불쏘시개로 타버릴 아무 소용없는 헛짓을 한 거예요. 질문 자체가 소용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던질 그 자체가 그럴 권한과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아무 소리 않고 곱게 허물어져서 어느 때, 어느 날 알 수도 없는 날에 그냥 눈 감고 숨 거두면 그것조차도 주님의 해답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하게 죽어버리면 그 일조차도 주님께서 하신 일이 됩니다. 왜냐 하면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미 주님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제가 그것을 거창하게 푼다고 해서 거창해지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이미 함축되어 있어요. 그럴 때 예수님은 질문하시는 분이 아니고 뭐냐 하면 그냥 구원자도 아니고 그냥 죽었어요. 구원자로 오셨는데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자는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본인 자체가 구원의 대상으로 먼저 들어가셔서 아버지로부터 구원의 대상이 되어서 구원이 됨으로써 여기서 새로운 구원의 대상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고 부활에 이르느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비밀에 의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얼굴이 바뀌죠. 허무하게 일그러진 그 얼굴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간다든지 부활의 주님의 얼굴을 볼 때 차마 우리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나와요. 16~17절에 보면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사도 요한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봤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요.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 얼굴을 봤는데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냐 하면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초라한 얼굴이 아니에요. 일그러진 얼굴, 고민이 있는 얼굴, 우수에 찬 얼굴이 아닙니다. 얼굴은 모든 내면을 보여주는 바깥의 표현이에요. 사람들이 옷을 입는다고 하는데 이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옷을 벗는다고 말이 안 돼요. 옷을 입는다, 벗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옷을 벗는 것이 아니고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옷이라는 것을 임시적으로 걸치는 거예요.

옷 안에 들어있는 우리는 점점 더 삭아집니다. 점점 더 후패해 가요. 이게 진리예요. 이게 정답입니다. 이집트에 바로왕은 관 자체를 화려하게 장식해도 그 안을 지금 뜯어보면 미라가 완전히 썩어 있어요. 그게 어디 남의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신약에서는 주님 얼굴의 변천을 가지고 비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3장 13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얼굴 자체가 달라졌어요. 본인도 몰랐어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는데 그 시내산에 대해서 과학에도 원칙이 있듯이 시내산에도 하늘나라의 원칙이 있어요.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원칙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살 자가 없는 거예요. 얼굴에 영광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기 위해서 어떤 인간도 주님의 얼굴을 볼 때 부담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얼굴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의 얼굴이 본래 얼굴이 아니고 주님의 얼굴이 우리 죄 때문에 함께 우리 죄 속에 들어오면서 주님의 얼굴이 아니고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주님의 얼굴이 그걸 되비쳐주는 거예요. 거울처럼.

“내 얼굴 보고 너의 얼굴 찾아라. 너의 본 모습을 찾아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대자연 속에 나는 뭡니까? 어떻게 삽니까?’라고 묻지 말고 이 대자연 속에 진짜 내 얼굴은 뭔지를 물어야죠. 그걸 주님께서 자기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으로 비춰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이 아니고 지혜예요. 천문학자 되어서 지옥 가고, 생물학자 되어서 지옥 가고, 물리학자 되어서 지옥 가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백날 쳐다보고 있는데 지식은 얻었는데 자기 얼굴을 볼 수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일그러진 얼굴, 십자가의 그 얼굴, 버림받았기 때문에 생긴 얼굴, 괴로워하는 얼굴, 저주와 맞닥뜨렸을 때 나타나는 얼굴. 모세는 40일 동안 이 세상 죄와 분리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그 모세 얼굴이, 우리와 똑같은 아담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처럼 변화되어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그 격차 때문에 감히 보지를 못 해서 수건을 가지고 덮었습니다.

수건 덮어쓰고 내려왔어요. 달랑 40일 있었는데요. 얼굴이 달라졌어요. 뭐 거기서 해독 주스 마셨어요? 아무것도 안 마셨어요. 물도 안 마셨어요. 그게 정답입니다. 물 없이 사는 것이 정답이에요. 우리는 지금 물 마시고 살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해답이 아닌 거예요. 망해야 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모세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지금 성령이 바로 그 수건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성령이 있는 곳에 죽음에서 벗어나니까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뭐 김정은이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누구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자유는 본인이 썩어짐에서부터 눌려서 자유가 없는 거예요. 이거 하면 내가 더 사는 데 도움 될까, 이거 하나 더 팔면 돈이 더 생길까. 돈은 왜 생겨야 하나? 살기 위해서. 살아서 뭐 하는데? 몰라.

주님은 자유 하게 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해답을 모르니까 자유 할 수 없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죄의 세력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남의 일처럼 들리는 거예요. ‘나에게 해당 없네. 나는 주의 영 보다 현찰이 더 좋습니다’라는 식으로. ‘나는 재해지원금이 더 좋습니다’라는 그런 거.

그래서 영광 이야기하면서 고린도후서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광의 복음의 비밀인데요. 4절에 보면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의 얼굴이 영광의 광채거든요. 주님이 어떤 존재이며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던 변화산에서 해같이 빛나는 그 앞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넋이 나갔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 받아놓고 주님 말씀에 넋이 안 나갑니까. ‘주여, 이번 주에 제가 교회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얼마 벌게 해줄 거예요?’라는 생각한다고요. 그거 생각하며 80을 보내고 90을 보내니 갈수록 얼굴은 치즈 녹아 내려가는 것처럼 점점 더 침울해지고 어두워지고 온갖 기미 다 끼고 화장발 안 받고 이게 어쩔 수 없어요. 아담의 욕망 때문에.

그럼 차라리 이런 말을 하세요. 차라리 죽여주세요. 주여,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때 주님이 ‘죽는 것도 네 마음대로 안 된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는 더 살아야 해. 너는 돈 더 벌어야 해. 한 달 2000만 원’이라고 하시면 우리는 괴로움의 함성을 지르겠죠. 이렇게 주님의 영광, 복음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은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열 손가락 다 잘린 피아니스트가 그냥 감사해서 주님 품 안에 안 긴 것과 같아요.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열 개 잘렸다면 자기로서는 절망이죠. 그 절망이 바로 해답입니다.

주님께서 절망적으로 십자가 달린 그 모습을 자기와 동일시 하면서 아버지께서 약속대로 건지지 않으면 이대로 망해야 마땅한 처음 시초의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을, 내 얼굴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죠. 올해 시작되었는데 자기 얼굴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찾으면서 망해야 할 것이 망하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일찍 망해서 주와 일찍 동거할 수 있는 그 희망으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식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지혜라고 오해했습니다. 성경 보면서 날 살릴 지식 뽑아 내놓고 복음 알았다고 착각했습니다. 주님이여, 말씀이 나를 죽이게 만들 때, 이 세상의 말을 죽이게 만들 때 도리어 감사와 고마움이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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