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9강 아브라함의 복

아빠와 함께 2022. 1. 14. 11:36

9강
여호수아는 1장부터 모세의 죽음으로, 마지막에 24장에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모세가 죽었지만 언약을 살아있고 여호수아가 죽었지만 언약은 살아 있다.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당부하는 것이 언약이다. 세겜에 돌을 세워 율법을 기록했다. 율법을 기록하면서 나는 비록 죽으나 110세에 죽더라도 언약이 살아 있다. 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은 인간은 죽어죽어야 한다.

인간이 죽을때마다 언약은 리셋된다. 쇄신된다. 언약이 종착적 인물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언약, 예언, 율법이 살아 있기에 인간은 죽어야 된다. 이 예언에 해당되는 인간, 율법에 해당되는 인간이 죽어나갈 때 마다 율법도 죽고 예언도 죽고, 언약은 살아나고.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여호수아처럼 모세의 죽음에서 모세언약이 살아 있고,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에 의해 죽는다. 모세 언약은 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이 끝난 시점이 되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갈라진다. 갈렙이 차지한 땅이 헤브론이었다.

무대가 있고 커튼이 있으면 퇴장하는 곳이 두곳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속한 산 가아스산 북쪽에 묻힌다. 그러나 갈렙은 헤브론에 묻히게 된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끝나야 하는데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더라고 한다(수 24:32).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지파다. 갈렙과 여호수아와 갈라진다. 갈렙은 유다지파다. 율법과 예언과 언약이 언약 변천과정에서 열두 지파가 균등하게 나가야 할 이스라엘이 특정지파가 주도권을 쥐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야곱의 열두 지파의 의미가 상실한다.

요셉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는 과정에 여호수아가 있다. 시편 78:67-68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뭐냐? 여호수아는 요셉, 에브라임 지파다. 여호수아가 들어간 자리는 모세의 자리다. 모세는 레위지파다. 율법이 지속되기를 뒷받침 하면서 율법대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 땅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죽고 요셉도 세겜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뒤에 바통을 받는 것은 율법이냐, 율법이 아니냐 갈림길에 여호수아가 있다. 율법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자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격화에 접어들면 율법 완성 인물이 요셉 지파에서는 나오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

율법이 인격화 되면서 율법외에 한 의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밖에서 한 여인, 룻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룻이 유다지파와 결합되면서 유다지파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왕체제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면서 언약은 살아 있다가 된다. 요셉지파를 버리면서 언약은 살아 있다.

시편 78편 요셉 장막을 싫어하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언약의 형성 과정에서 지파의 변화가 일어난다. 문자적으로 율법지키는 이스라엘은 아 옛날이여. 율법적 나라를 이룰 것 같았었는데 율법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다시 날라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거치시는가?

갈 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강의 내내 작살낸 이방민족이 이제는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증이다. 그럴 줄을 몰라지롱이 된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그 안에 이방민족도 구원된다고 단순히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율법을 모르는 자도 구원된다고 아브라함을 복 줄 때 들어 있다. 이방인 입장에서 복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 이방인에게도 값없이 제공된다는 것이 복이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준 복이 이방민족에게 주신다. 율법을 잣대로 해서 너는 내 백성이다 아니다를 주님께서 말소시켰다. 골로새서 2장에 십자가에 달릴 때 율법을 찢었다. 악사 다이렉트 보험증서를 찢어 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인지 그 본질을 드러낸다. 내백성 아님에도 내 백성되었다 하기 전에 그동안 율법을 잠시 사용했다.

내가 북쪽 이스라엘을 택하지 않고 남쪽 유다를 택했다.
여호수아 맨 마지막 24:32절에 요셉의 뼈가 등장한다.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뼈를 들고 나온다. 요셉의 뼈의 이동경로가 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미래의 예언도 함께 동행해서 이끌어진다. 죽은 사람 뼈를 왜 갖고 나오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끝은 요셉의 뼈가 묻히는 세겜, 열두지파의 땅 분배는 끝났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종결되었다.

이제부터는 열두 지파에서 한 지파가 부각된다. 요셉 지파의 주도권이 여호수아가 죽고 난후 주도권이 바뀐다. 원래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취지대로 돌아간다.

요셉의 장지는 세겜이다. 에브라임 땅이다. 여호수아와 같이 정탐한 갈렙이 차지한 땅은 헤브론이다.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가족묘지다.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의 가족묘지가 헤브론 막벨라 굴이다. 막벨라 굴에 누가 묻혔는가?

사라(창 23:9), 아브라함, 이삭(창 35), 리브가, 레아, 야곱이 묻혔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계통은 열두지파 있기 전에 막벨로 굴을 누가 차지하는가가 중요하다. 여기를 유다지파 갈렙이 차지한다. 벌써부터 유다지파와 요셉지파는 갈길 따로 가자는 것이다. 나라 주도권이 어느 쪽이 원천으로 통하는 노선인가? 유다 노선인가, 요셉 노선인가가 암시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예언할 때 유다와 요셉이 누가 우위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 오리로다

유다지파는 49:8-10
유다에게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언을 하면서 모호하게 유언했다. 유다자식은 잘될 것이다. 요셉 자식은 멋지게 될 것이다. 모호하다. 그러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셨다. 멋진 것이 세냐, 잘 될 것이 세냐? 강한 것이 세냐, 더 큰 것이 세냐?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진행과정에서 처음 먼저 요셉이 이스라엘의 반석의 자리를 차지하다 그것을 유다에게 인수인계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이 진행된다. 왜냐하면 모세의 후계자가 레위지파가 아니라 요셉지파 여호수아다. 요셉지파로 가버린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죽음이 중요하다. 마지막 까지 잔소리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여호수아다. 갈렙은 자기 것 챙기고 가만있다.

그러나 가만있다가 이방나라가 약속의 땅을 짓밟아 버릴 때 사사시대가 끝나면서 사무엘 상 진행되면서 서서히 레위 지파나 다른 지파보다 유다 지파가 드디어 두각을 나타낸다. 다윗 조상을 따라 가보니 열두 지파에는 없다. 왜냐하면 모압여인 룻에게서 태어 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일을 그런 식으로, 족보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가?

그 내용에 대해서 아예 어렵다고 단서를 붙이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로 오셨다.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모른다. 장성한 사람에게는 멜기세덱을 안다고 한다. 히브리서 7장이다.

레위지파에 아브라함의 정신이 온 것 같지만 레위지파를 뚫고 유다가 독보적으로 등장한다. 왜 이렇게 뚫고 들어와야 되는가? 아브라함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열두 지파로 평등하게 가는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족보 없는 멜기세덱의 족보가 어디에 징후를 드러낼 족보가 나와야 된다. 수직적인 요소가 아브라함 속에 개입되어 있는 사실을 아브라함 후손들 가운데, 족보 바뀜, 족보 교체 현상을 통해 수직적인 것이 여기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레위지파가 일어나야 된다. 제사 담당이다. 율법이 있어야 자기 의미가 발생한다. 율법을 먼저 주고 레위지파가 율법을 쥐고 있으니 레위 지파 없으면 이스라엘이 망한다. 정치적으로는 요셉 지파가 다스렸 지만 이스라엘 전역에 레위지파가 파견되어 있다. 땅은 없지만 이 땅을 보존할 엔진 원동력은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복과 연결된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레위지파를 빼 버리면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될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제치고 유다지파가 나왔다. 변화되었다. 율법의 시효가, 용도가 끝났다.

갈라디아서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율법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 내용에 대해서 보조적 위치에 있다.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이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에 있는 내용 속에 너희가 복을 받을 만해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있는 복이 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취지를 아브라함에게 복으로 제공했다. 지파의 바뀜을 통해 하늘의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 메시야 온 것이 맞잖아라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모르고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이스라엘이 지파가, 주도권이 교체되는 과정자체가 신약에 와서 왜 우리 능력으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시범적으로 다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역사는 율법이 주도권을 쥔다.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하여 율법을 받았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여기에는 저주만 있다.

인간들이 못 지키고 저주받으니, 저주 받는지 아닌지 이스라엘이 시범조교로 가나안 땅에 살아봤다. 살아오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복 받았다고 여겼는데, 말씀대로 지켰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님이 오시니 예수님을 죽였다.

마지막 시간에 하는 모든 이야기는 당신은 죽을 때 무슨 구멍으로 들어가서 죽습니까? 죽을 때 성공적이 죽음을 해야 마지막 웃는 자로 승자가 된다. 죽을 때 두 개의 죽음의 구멍이 있다.

여호수아 13:2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발람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 전쟁 가운데 죽는다. 발람의 죽음은 저주로 통하는 죽음이다. 그런데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고 엘르아살 제사장도 죽는다. 이 죽음은 발람의 저주스런 죽음과 대비되어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서 죽는다.
그러면 발람의 죽음이 왜 중요한다. 이 발람이 이스라엘과 어떻게 엮였는가?  이스라엘에 대해 왕의 존재를 예언한 사람이다.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

바알이 왕이 나온다고 예언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현재 왕이 없다.
민수기 23:21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발람이 이스라엘이 끝날 때 등장하는 왕을 발람이 예언했다. 발람이 예언하고 저주스런 죽음을 당한다. 하나님의 예언은 저주스런 죽음과 축복된 죽음을 양상한다. 두 죽음은 예언에 준해서 결정된다. 쉽게 말해서 복음 전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뀌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발람은 바뀌지 않았다. 돈 받고 예언했다. 복음을 전하고 예언을 전해도 본인이 사는데 급급했지 어디에 죽을 것인가가 본인의 희망사항이 아니었다. 성도의 희망사항은 어느 구멍에 빠져 죽는가에 있지 어떻게 주님 덕분에 밥 먹고 사느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발람이나 하라 하세요. 수직적인 멜기세덱의 연결고리가 되지 않음에도 그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바른 말인데 전하는 본인은 지옥가고 있다. 그것이 어느 상황인가? 이스라엘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여호수아 24장에 여호수아가 무엇을 암시하는가? 내가 죽고 난 후에 너희들은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예언을 한다. 이에 백성들이 16절에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런 말하는 것을 보아 글렀다. 여호수아는 언약의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날 때 끝이다. 아직 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아는 것이 없다. 율법을 지켜라. 율법이 임시적 조치로 있는 것을 여호수아는 모른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처음 약속으로 돌아간다.

율법이 쫙 내려온다. 율법이 내려올 때 저게 방주다. 구원의 방법이다. 저것을 믿어야 된다는 자들이 이스라엘인데 잡으려하는데 율법이 붕 떠서 날아가 버렸다. 날아가면서 저주를 뿌린다. 너희들은 율법을 못 지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후 430년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이 저주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희 들이 지옥 가는 것을 당연시 해야지 지옥 가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 본인이 지옥가야 된다. 지옥가거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 이야기 한다.

여호수아가 이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자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장만 넘기면 사사기가 나오지요. 사사기가 나오면서 그들은 끝났다.

지도자가 없다. 열두 지파가 평등하게 나갔기 때문이다. 레위지파 제사장도 있어도 돈 주지 않으면 제사장 못한다. 레위지파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돌아다닌다. 레위지파가 붕괴하니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 버린다. 레위지파가 첩 열두 토막으로 잘라 보내자 베냐민이 날아가 버렸다. 왕이 없어서 그랬다. 왕을 주세요. 이방나라와 같이 되었다.

살기 위해서 사는가, 언약 때문에 사는냐? 살기 위해 사는 것은 그냥 삶이다. 언약 때문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죽는가? 막벨라 굴에 갈 것인가 아니면 발람처럼 이 세상 살다가 허무하게 남들 가는 것처럼 그냥 죽을 것인가?

여러분에게 장래희망사항은? 잘 죽자. 제대로 죽자. 주님께서 성령께서 마련해 주셨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다른 희망 사항은 품지 말라.

세상적인 희망사항은 이미 성도로써 확정되었다. 다른 희망사항은 없다. 제대로 보고 죽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매일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막벨라 가족장지에 주제넘게 초청받아 들어가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묘지로 오셨다. 죽을 때 나와 더불어 죽자. 내 안에 들어와서 죽어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다른 수가 없다. 내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 그 노선을 따라 온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유다지파는 열두 지파와 접촉점이 없게 된다. 독보적이 된다. 유다 지파 안에 모압 여인 룻이, 율법체계에서 용납되지 않는 개 같은 이방여인 룻이 유다지파에 들어오면서 유다지파가 둘로 나누어진다.

ⓐ지상의 유다지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 예수님이 오신 족보다. ⓑ모압여인 이방인 룻, 외부인이 들어온다.

외부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율법 없다. 율법에 의하면 모압여인 룻은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개 같은 존재이기에.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백부장 같은 경우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다. 그런데 누가 천국백성인가?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천국 백성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행함이 아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이것 까지 설명 못하고 여호수아 24: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마지막 시간은 19절로 끝났다. 너희들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내가 받은 계시가 이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21절에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입은 살아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인간의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다. 조금만 잘살고 잘 사면 앞으로 잘 될 것이다. 과거 연속이 미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미래를 모른다. 미래는 예언에, 약속에, 언약에 속한 문제다. 우리가 본 것은 여호수아다. 신약이 아니다. 십자가에 준해서 여호수아를 해석하자 이 말이다. 그들이 못 지키면서 지키겠다고 큰 소리 치는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나는 열심히 지키면 복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복을 못 받았는데 왜 살았지. 그게 복이다. 이방인인데 왜 구원받지. 그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봉사했다고 하신다. 밀대 들고 청소 좀 했는데 봉사라고 하신다. 이게 봉사야. 교회 헌금 이천 육백만원 했는데 이게 헌금이야. 아무리 봐도 돈낸 적이 없고, 돈을 이동했을 뿐인데 그것을 헌금이라 해 주시니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복으로 다 쳐주신다.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별 볼일 없는 이방인인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너 율법 없지. 없습니다. 죽어 마땅하지. 마땅합니다. 천당 가라. 이렇게 됩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5,6장에 금식할 때 찡그리지 말고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이방인처럼 달라고 하지 말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시는가?

이 말씀에 의하면 이런 구제, 금식, 기도를 네가 못한다. 못하기에 한 것으로 쳐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인가? 창세기 12장에 나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할 것이다. 축복과 저주가 너의 삶, 너 중심의, 너 기준을 나는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이 오셔서 복과 저주를 새롭게 규정하신다.

재규정. 다시 규정하신다. 다시 규정하려면 기존 우리 규정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선하다 악하다는 매일 같이 주께서 삭제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결과물로서 우리 삶 자체를 복으로 간주하신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고집이 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고 한다면 일단 한번 맞고 보자고 하신다. 네가 무슨 짓이든 착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니옵니다라고 하면서 착한 일을 할 때만 착하다고 하면 일단 두 방 맞자고 하신다. 네가 무엇을 해도 착하다.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착하다고 했는데 주님은 네 행동에 대해 책임 지지마라고 하신다. 그 때문에 너는 착해. 사람 찔러 죽여도 착해. 너는 어떤 판정도 하지마. 네가 거짓말을 하든 너는 착해. 이것은 성령이 안 오면 믿을 수 없다. 육으로 살게 되면 자기 판정에 매료당한다. 자기에게 미친다.

자기 환상에 빠져 있다. 너 말고 아브라함, 네가 스스로 결정한 삶의 결정 말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율법 없이 주신 복, 저주받은 자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그냥 집어 넣어주신다. 아브라함의 복의 역할이다. 그냥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율법과 상관없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다. 유다 지파 아닌 초월적 유다지파 오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라 한다. 기쁜 소식이다. 내가 너에게 기쁘다는 말은 내가 너에게 준 것으로 기쁘다.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쁘다. 네가 주님의 사랑의 받아서 내가 기쁘다가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예쁘다 하기 때문에 예쁘다 하는 그것이 내가 기쁘다. 

구약과 연결시키면 아가다.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예쁘다. 아가서의 특징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늙지도 않는다. 서른 되어도, 팔십 되어도 예쁘다. 그냥 내가 예쁘면 예쁘다. 죽음을 이길 정도로 사랑한다. 죽음에 들어가도 아름다움으로 튀어 나올거야. 이것을 지혜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지혜를 완성했다. 구약 전체를 완성하러 오셨다. 구약에서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룻은 이방여인이라 율법도 없는데 보아스로 하여금 혼인하게 했다. 율법 없는 쪽에서 왕이 등장했다는 것은 하늘의 초월적 왕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기에 시점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장 역할을 한다. 율법이 왕이란 인격으로 구체화 된다.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다.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맨 마지막에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
시작은 아담의 존재들이 있다 이것을 거쳐, 주님의 언약을 거쳐, 요동치면서 교체되어  예수그리스도로 최종 종결된다.

언약과정인 여호수아 한 대목을 잘라서 본 것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체를 보고 부분을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안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완료시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쓰여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는 것을 도리어 우리의 구원보다 더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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