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7강 이질적 요소

아빠와 함께 2022. 1. 14. 11:34

7강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계속해서 티걱티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부터 율법, 언약의 주도적인 인도와 이끄심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냐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율법의 현존, 언약의 살아 있음을 믿으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땅에 거주하기인가? 아니면 언약에 거주하기인가? 땅에 거주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언약에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전쟁 중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에 거주하는 자들이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광야를 통해, 죽음과 실패를 보았기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에 거주하기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없다.

언약 백성만 살면 되는데 여호수아 9장에 들어가면 기브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기브온 족속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에게 없다고 생각했든 어떻게 살 것인가의 요소가 언약만이 지배해야 하는 땅에 이스라엘을 속이면서 쑥 들어왔다. 어떻게 살것인가?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 기브온 족속들이 그전에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니 기브온, 히위족속에 속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야, 전쟁의 신이라고 평가했다. 전투력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가 알아서 기어야지 덤비다가는 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스라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이 땅에 해야 이 땅에서 살 것인가? 적들이 너무 세다. 홍해, 요단강 통과했고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아이성 작살냈다. 그러니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장술을 펼쳐 자신들은 먼 곳에서 왔다고 거짓말하여 위장 항복을 했다.

가나안 전쟁과 전혀 무관한 족속인데 원치 않는데 말려들었다는 식으로 우리는 여호수아의 종이라고 약속의 땅에 쑥 들어왔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속아 넘어갔다.

출 34:15-17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맹세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럴 리는 없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의지할 때는 하나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이런 처지에서 다른 민족과 언약을 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럴 리가 없다. 언약을 세우는 백성으로만 존재합니다고 자부하고 싶지만, 언약을 전개하는 이 과정 속에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냥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하나님을 믿고 살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단출하게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네 의견이 어떠냐고 훅 들어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 하나님은 믿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럴 경우 네 생각이 어떠냐고 훅 들어올 때,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하나님 주신 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믿으려고 준비해도 내가 선택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믿겠다는데 하나님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의도적으로 조장하시나. 잘 믿겠다는데, 목숨 받쳐 믿겠다는데 네 목숨 잘못 받쳤다고 할 때 그 결과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여호수아 할 때 이상한 일은 신나게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고 찬미하고, 파티 열고 끝날 문제인데, 왜 이질적인 요소, 출애굽기 34장에 위반되는 이방민족이 정당함을 갖고 들어오는가? 고난도 없는 비언약적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사는 일을 획책하시는가?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가?

의문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여호수아 신나게 해석하다가 기브온 사건에 걸린다. 잘하겠다는데 왜 이물질이 끼었는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브온이 속였다. 이 동네가 아니라 먼 동네에 왔기에 이스라엘의 대적이 아니라고 한다. 오랜 여행 가운데나 볼 수 있는 곰팡이를 보이면서 먼 곳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우리가 당신의 적인가? 아닐 것이다라는 의견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이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니 대적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자 기브온 쪽에서 말로 떼우지 말고 서류로 작성해 달라고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당신들이 가장 신봉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서 우리를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 우리와 맹세해 주시고, 모든 족장들에게 이야기 해 달라고 한다. 족장들도 여호수아의 말을 들은 후 살려 두자고 한다. 족장까지 다 속아 넘어갔다. 속이는 자를 누가 이기는가?

알고 보니 기브온 사람들 히위족속은 정복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왜 하나님께서 난처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이스라엘만이 살아야 될 땅에 이방민족이 섞여 사는 결과를 왜 낳습니까? 궁금하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믿음 자체를 주님께서는 둘로 나누셨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믿음을 확장 시킨다. 너를 믿지 말라. 너를 믿지 말라는 내용이 새끼 쳤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은 주님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신념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나에 대한 믿음, 이것은 신념이다. 이 세상에서는 구분이 안 되지만 주님 나라에서는 구분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이야기 하지만 아브라함을 이스마엘을 낳는다. 분명히 야곱과 에서 가운데서 장자가 야곱이 되어야 하지만,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 세우려고 할 때 야곱은 형을, 아버지를 속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훅 들어온다. 그때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균열이 일어나야 한다. 균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내 신념이 쪼가리 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믿습니다 할 때 하나님 믿는 나를 믿는 것을 동반했음을 놓치기 쉽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대성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너를 의심하라. 너를 의심의 대상으로 믿는 믿음을 하나님 믿음에 집어넣어라. 합체해라. 나를 의심하는 데는 네가 어떤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 그래서 내가 제거 대상이 된다.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도 언제든지 제거대상임을 기브온을 집어넣음으로 약속의 땅에 정착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약의 끝이 아니라 중간과정에 불과하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이성을 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성의 법칙을 사용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나팔을 불 때 내외벽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면 이 추진력으로 그냥 가는 거야. 여리고 성이 강하고 견고한 성이었는데 무너뜨렸으니 아이성은 작으니 아이성은 그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 여리고성 점령할 때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파생시킨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은 우리와 동업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하면 대견스럽고 동업자 자질이 좋고 태도가 양호하다고 스스로 믿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 결과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동업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빠뜨린 것이 있다.

여호수아 6:2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붙이시니라는 뜻은 빈 쇠꼬챙이만 들고 있으면 닭고기, 어묵, 햄도 끼어주신다. 우린 딴청 피우고 있는데, 줄줄이 다 끼워져 있다. 변화가 일어났다. 빈 쇠꼬챙이에 무언가가 채워질 때,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누굽니까? 왜 나에게 붙였습니까라는 질문을 내가 했다를 대신해서 다른 분에게 질문을 해야 된다. 여리고 성 함락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질문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이다. 내 선에서 이 결과를 가져올 일이 없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내가 강의 시간에 졸고 있는 것이 내 뜻이 아닙니다. 내 선에서 설명할 수 없다. 내 쪽에서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나를 평소에 나를 의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한결같습니다. 이것을 네 자로 하면 ‘붙이시매’ 이다. 이것을 붙이시는 전쟁이다. 여호와 전쟁은 붙이시는 전쟁이다. 가기만 하면 자석에 철이 붙듯이 떡떡 붙는다

고린도전서 15:8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 오셔서 사울을 주님께 붙이셨다. 너 이제부터 사도야.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이 자기 믿는 믿음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함되었다. 나는 불신자라는 내용이 내가 믿어야 되는 내용 속에 합류된 기쁨, 나는 불신자라는 것, 내가 쏟아내는 것은 더러운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사도바울은 고백하게 된다. 배설물과 주께서 행하심이 같이 결합이 될 때 믿을 내용이 완성된다. 참 쉽지요. 나를 의심하면 된다.

식사기도 할 때 믿음의 내용을 확장하면, 귀한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면 내가 밥 먹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했다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여 저는 이것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제 자격이 없습니다. 허겁지겁 먹는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리현상을 일어나게 하셨다.

그런데 7장에 넘어가면 관성의 법칙, 습관의 법칙이다. 한번 인정받았으니 계속 인정받을 것이라는 교만을 떨었다. 여호와께 묻지 않고 믿고 쳐들어갔는데 패배했다.

그 이유가 여호수아 7: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는 말은 너 자신도 하나님께 다 바친 물건과 동급이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물건에 대해서 함께 바친 것이 되어야 된다. 붙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공로만 영광 돌리기 위해 전리품을 모을 때 자기도 놓아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놓아라는 말이다.

그런데 귤이 먹도 쉽다고 귤을 가져가면 네가 하나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너는 바치운 자다. 내가 귤 좋다고 내가 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었다가 되니 믿음의 내용에서 자신을 의심하라, 믿지 마라가 빠진 것이 되니 탈락이다. 생명책에서 탈락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치 형사가 도박장에 급습해서 도박현장에서 열 명을 잡았는데 아홉 명은 인정하는데 열 번째 도박하는 사람이 형사님 제가 제보해서 승진하셔야지요. 제가 협조 안했으면 건수 못 올렸다고 하면 너도 수사 대상이야. 네 자리에 가.

아이성을 정복할 자격은 이스라엘에게 없다.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전리품이라면, 기생라합이 전리품이라면, 이스라엘도 전리품으로 유지되어야 된다.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되어야 된다. 우리 물건 훔치지 않았다고 할 때 아간이 그 짓을 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망령되이 행했다. 아간을 돌로 치고 불사르고 돌무더기를 만들었다.

아이성 점령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매복 작전이었다.

여호수아 8:7절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구원받은 자나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도구에 불과하다. 28절에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불사르고 영원한 무더기로 만든 것은 아간에게 한 조치와 똑 같이 했다. 이스라엘 속에 아이성 요소가 있다면 이스라엘 속에 이방 요소를 끄집어내고, 이방요소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방민족을 심판할, 붙이시는 전쟁에 흠집이 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셨다. 처참하게 하셨다.

8:29절에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아간의 돌무더기가 있듯이 아이성 왕의 돌무더기가 있다.

여호수아 8:30절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여리고 지나 아이성 이기고 에발산에 도착했을 때 해야 할 일을 이미 신명기 27:13-15절에서 말씀하셨다.
에서 미리 다 이야기 했고 그 때 가서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단을 쌓는데 에발산 밑에 단을 쌓는다. 단이 두 개가 아니다. 언약궤가 둘이 될 수 없다. 그리심 산은 축복 산이고 에발산은 저주 산이다. 어느 쪽에 제단을 쌓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단이 저주 산에 있을 때 축복의 미사일을 흠뻑 받을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때 안보이는 천국, 영생이 보인다. 한껏 저주스러울 때, 내가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저주의 자리,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행복한 자리, 그 기쁨의 자리다.

사람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왜 기쁜가?  자아가 자기를 믿기에 나가 둘로 갈라져 두 어르신을 다 모실 수 없다. 인간은 내가 이상적인 자아, 이상자아를 내가 달성할 수 없어서 사회에, 세상에 나간다. 가정에서 꿈꾸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사회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 자아 말고 나의 자아이상을 꿈꾼다. 나는 스스로 갭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기에 세상에 나가 내 꿈을 이루리라. 서울, 경기도에 가면 내 꿈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할 때, 꿈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자아 이상을 파괴해야 하는가? 그만큼 상처가 더 깊다. 이런 결핍 때문에 사는 것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기 욕망을 좁힐 수 없으니 아무리 밥 먹고 살아도 사는 게 비참하게 느낀다.

여기서 나오는 적절한 예는 존재의 이유 가요다.

내가 굳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김종환이라는 작곡가. 내가 왜 이리 사는 거야. 이것말도 다른 대안이 없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왜 이래 구질구질해. 왜 나의 인생이 이렇게 되었어. 촌에서는 잘나갔는데 서울 와서 이게 뭐야.

점점 더 자기를 감추고, 숨어들어가고, 음지로 들어가고, 남 눈에 띠지 않으려고 하고, 전화도 끄고, 나 찾지 말라하고 나 성공할 때까지는 가족도 멀리한다. 내부적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자아 속에 도피 생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낸 죄고 저주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는 율법아래서 누구나 축복 산에 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으면 축복산과 저주 산에서 어디에 앉아 있는가를 참여하면 된다.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저주받아 합당한 사람입니다. 참여하면 어떤 미사일이 날아와도 전부다 축복이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한다.

이런 논리라면 축복 산에 있는 사람은 손해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상대에게 축복을 날렸지만 자신들은 온 몸으로 저주를 받게 되는 손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단은 저쪽에 있기에 저주를 거쳐서 보기 때문에 이미 축복받은 상태에서 그 까짓것 저주받아도 제단에서 이미 해결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느 쪽에 서더라도 이스라엘은 말씀 안에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 자체도 전리품이다

신명기 27장의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대한 예언에 의하면 율법은 늘, 항상 살아있다.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공중에 축복과 저주가 날아다닌다. 이 상황이 주님과 함께 있는 상황이다. 내가 원하는 복 달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의 율법이 계속 튀어나온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나는 저주의 제단과 함께 한다. 제단에서 제물이,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저주의 피를 내고 홀라당 다 태워진다. 있음에서 제물이 없음이 되면서 잉여 에너지, 여분의 에너지인 용서가 나온다. 언약이 나온다.

양이 있다가 죽어 없어진다. 제물 안에 내장된 하나님의 약속이 축복으로 나온다. 이런 공식이 제단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제단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인 자신이 지시 대상으로 합류하신다. 그분이 바로 나중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다. 본인이 출제한 문제를 본인을 정답으로 주셨다. 예수님을 만나야 출제경향도 알고 정답도 미리 다 안다. 우리는 그 정답노선에서 이미 의롭게 되었다. 수학정석이라는 책에서 수학문제보고 끝에 있는 답보고 문제보고 답보고 하는 식이다. 자신이 풀려고 끙끙거려봐야 자기 신념이다.

문제를 알고 저주를 받든지 복을 받든지 중요한 것은 언약이 살아 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용도로 살면 된다.

여호수아 8: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그리고 9장에 기브온 거민 이야기가 나온다. 기브온 거민이 왜 위장으로 속이면서 들어왔는가?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뛰어난 국가의 전투력으로 생각했지 붙여주는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고보자. 비언약적 요소다. 이스라엘은 말씀 중심이다. 기브온은 목숨 붙여 살면 그만이다. 그러니 비언약이 예루살렘에서 멀지도 않는 곳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여호수아가 맹세를 했다. 맹세 후 비로소 기브온이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언급하는 것은 왜 너희들은 나에게 묻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왜 경솔하게 네 마음대로 약조했느냐?

우리가 하나님 편에 합세해서 여호수아를 나무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왜 너는 내 지시도 안 받고 기브온 사람을 받아들였느냐? 우리가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느냐? 주님께서 네가 왜 그 자리에 있느냐고 하실 것이다.

여호수아는 앞일에 대해 예측하고 정답을 내릴 자격이 전혀 없다.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 내에서 새로운 사태 내에서 어떻게 하든 결정과 선택이 인간의 한계다. 그 한계가 이스라엘 내부의 한계로서 쑥 들어왔다. 깔끔하게 우리편끼리 살면 좋은데 인간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집어 넣으셨다.

여호수아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묻지 않고 언약을 맺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뒤늦게 지적할 때 사람들은 그 때 물을 걸 한다. 인간이 물어서 이것을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항은 지나간 뒤에 해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가 제대로 여호와께 물었고 기도해서 공로로 존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헛발질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헛발질이다. 헛발질 했는데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 존재를 더럽게 봐야 한다. 결과가 깨끗하게 나왔다면 하나님의 복음적인 효과와 능력이 개입되어 결과가 나왔다. 결과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감사하면 된다.  세상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한 달 수입이 2500원이다. 아침저녁 라면 끓어먹으면 없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면 된다. 그때 물어 봤으면 250,000원 받을 것이라는 후회를 하지 말라. 후회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논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도와주심만 부각된다. 너 참 의논 잘하네, 네 알아서 잘하네 가 없다.
 
여호수아 9: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인간 쪽에서 대책한 결론이 이것뿐이다. 만일 맹세 자체를 위반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4:15-16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만약 만일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는데,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속여서 맹세했다면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후속조치가 출애굽기 34장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 말라만 나오지 상대가 모르게 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곧 너는 원래 말씀 위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너는 항상 율법을 어기게 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것이 없다. 우리는 구별할 자격도 없고 항상 뒷북친다. 이제 죄, 이게 문제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웃고 있다.

실수는 우리가 하고 구원은 우리가 받는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 속한다. 율법의 완성이 우리 가운데 작용하기에 우리를 항상 실수하는 자로 우리를 다루신다. 어찌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런 현실에 대해서.

기브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되었다.
여호수아 9: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이들이 언약을 알아서가 아니라 살 궁리로 이스라엘 가운데 박혀 있다는 말은 기브온 사람들의 본성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언약하지만 속셈을 보면 약속의 땅이 좋아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우리가 살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폭로된다. 언약에 거주할 것인가? 땅에 거주할 것인가? 예수님이 좋으냐? 부동산이 좋으냐? 예수 안 믿고 십년 더 살래? 예수 믿고 지금 죽을래? 이건 본성적으로 툭 나온다. 이질성이 들어왔지만 이질성이 우리 가운데 내장되어 있다. 계륵처럼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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