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2021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35:1-8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35: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5: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35: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35: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35: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35: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은 자신의 선이 전혀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음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고 엘리후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자기 의견에 입각한 정답을 내어놓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는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욥과 욥의 친구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점 때문에 이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욥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면 모순이라는 것을 발생하지 않습니다.
욥이나 친구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하나님이 선하다고 믿는 자신들도 악할 리가 없다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즉 선한 하나님께서 선하게 작용하셔서 우리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을 선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고, 이 감사를 올리는 자신들도 선한 자들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욥에게 난데없이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소 엉뚱하게 보이지만 친구들 가운데서 가장 선한 욥에게 고통을 줘버리니 여기서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시는 점을 유지해야 하고, 그런 선한 하나님께서 매사가 선하게 작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인정하는 자들도 선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도 그런 하나님을 선하다고 인정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친구들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여전히 선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하는 욥은 선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선하지 말아야 하는 욥이 계속 본인은 선하다고 우기니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화를 내는 욥의 앞선 세 친구도 엘리후가 보기에 동일한 잘못으로 여겨집니다. 즉 선한 하나님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무조건 선해야 한다고 우기는 점에서 욥이나 욥의 세 친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레후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인간들의 세계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점이 신약에 오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모순으로 나타난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순되게 오시는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잘못된 주장에 억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능히 알리요’라는 말씀이 들어있는 것을 보아 인간의 능력으로 어느 인간도 자기 마음에 잘못되어 있음을 받아드릴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든 선한 하나님을 선한 분으로 자신의 마음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변증하려고 시도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삐뚤어진 마음이 티를 내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1-22)
인간의 마음이 왜곡되는 것을 말릴 그런 조절의 능력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없습니다. 결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엄하고 경우 있고 참되고 모든 것을 판정내릴 권한이 있음을 변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변호하려는 의도가 나쁜 짓으로 하나님에게 발각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알리려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 13절에서 27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은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맡기시고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자신은 멀리 갔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하자 왕이 되신 분은 그 종에서 10 고을 제공합니다. 둘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자 왕이 되신 분은 5 고을을 그 종에게 줍니다.
이와 같은 논조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게 되는데 그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를 소개하십니다. 세 번째 종은 왕이 되신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0-21)
즉 세 번째 종은 왕의 왕됨을 본인으로서는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종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 그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왕임을 인정한다할지라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상이 이점을 인정한 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 세 번째 종은 몰랐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모순이란 동일한 고백을 했다할지라도 그 고백을 듣는 당사자의 결정은 그 고백에 의해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왕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왜냐하면 고백하는 자는 그 고백으로 인하여 자기 정당성을 부정할 근거를 갖추지 않고 있다고 판정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즉 세 번째 종은, 종 자신 자체가 왕의 소유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유를 왕의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종 자신 자체는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주님은 인간 자체가 달라지기를 원하신 겁니다. 그 세 번째 종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조치의 대상이 됩니다.
즉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자기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주님의 것으로 귀속됩니다. 이와 비숫한 경우가 누가복음 10:30부터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결코 선한 자도 아니요 자비를 베푼 자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비롭다, 선하다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몫이지 그 사마리아인이 본인에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모순은 인간의 자기 판단을 끝까지 옳을 수 있다고 우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인간들 자체가 모순되니 주님께서도 ‘죽는 하나님’이라는 모순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일에 얽혀있음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모순
2021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35:1-8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35: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5: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35: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35: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35: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35: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은 자신의 선이 전혀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음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고 엘리후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자기 의견에 입각한 정답을 내어놓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는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욥과 욥의 친구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점 때문에 이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욥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면 모순이라는 것을 발생하지 않습니다.
욥이나 친구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하나님이 선하다고 믿는 자신들도 악할 리가 없다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즉 선한 하나님께서 선하게 작용하셔서 우리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을 선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고, 이 감사를 올리는 자신들도 선한 자들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욥에게 난데없이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소 엉뚱하게 보이지만 친구들 가운데서 가장 선한 욥에게 고통을 줘버리니 여기서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시는 점을 유지해야 하고, 그런 선한 하나님께서 매사가 선하게 작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인정하는 자들도 선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도 그런 하나님을 선하다고 인정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친구들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여전히 선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하는 욥은 선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선하지 말아야 하는 욥이 계속 본인은 선하다고 우기니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화를 내는 욥의 앞선 세 친구도 엘리후가 보기에 동일한 잘못으로 여겨집니다. 즉 선한 하나님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무조건 선해야 한다고 우기는 점에서 욥이나 욥의 세 친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레후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인간들의 세계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점이 신약에 오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모순으로 나타난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순되게 오시는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잘못된 주장에 억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능히 알리요’라는 말씀이 들어있는 것을 보아 인간의 능력으로 어느 인간도 자기 마음에 잘못되어 있음을 받아드릴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든 선한 하나님을 선한 분으로 자신의 마음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변증하려고 시도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삐뚤어진 마음이 티를 내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1-22)
인간의 마음이 왜곡되는 것을 말릴 그런 조절의 능력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없습니다. 결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엄하고 경우 있고 참되고 모든 것을 판정내릴 권한이 있음을 변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변호하려는 의도가 나쁜 짓으로 하나님에게 발각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알리려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 13절에서 27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은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맡기시고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자신은 멀리 갔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하자 왕이 되신 분은 그 종에서 10 고을 제공합니다. 둘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자 왕이 되신 분은 5 고을을 그 종에게 줍니다.
이와 같은 논조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게 되는데 그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를 소개하십니다. 세 번째 종은 왕이 되신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0-21)
즉 세 번째 종은 왕의 왕됨을 본인으로서는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종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 그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왕임을 인정한다할지라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상이 이점을 인정한 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 세 번째 종은 몰랐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모순이란 동일한 고백을 했다할지라도 그 고백을 듣는 당사자의 결정은 그 고백에 의해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왕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왜냐하면 고백하는 자는 그 고백으로 인하여 자기 정당성을 부정할 근거를 갖추지 않고 있다고 판정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즉 세 번째 종은, 종 자신 자체가 왕의 소유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유를 왕의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종 자신 자체는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주님은 인간 자체가 달라지기를 원하신 겁니다. 그 세 번째 종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조치의 대상이 됩니다.
즉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자기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주님의 것으로 귀속됩니다. 이와 비숫한 경우가 누가복음 10:30부터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결코 선한 자도 아니요 자비를 베푼 자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비롭다, 선하다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몫이지 그 사마리아인이 본인에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모순은 인간의 자기 판단을 끝까지 옳을 수 있다고 우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인간들 자체가 모순되니 주님께서도 ‘죽는 하나님’이라는 모순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일에 얽혀있음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