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 받기
2021년 12월 19일 욥기 36: 1-16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35: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5: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35: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35: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35: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35: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35: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35: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35:13)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 하심이라
(35: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
(35:15)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35:16)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가 욥이 전에 말한 말을 꼬투리잡고 공격합니다. 욥기 7:20에서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라고 욥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그들을 비난할 바탕이 없다는 것이 엘리후가 욥을 도리어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욥기 13:25-28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고 말합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이러한 발언들이 욥이 정당한 일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에게 대드는 일로 보이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정당성을 따로 찾을 수 없도록 욥이 자기 정당함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욥이나 엘리후나 욥의 친구들이 놓치는 것은 바로 ‘내가 누구냐’보다 ‘내가 무엇이 되어가나’에 관심이 두어야했습니다.
이는 마치 시냇물 안에 들어 있는 돌멩이와 같은 처지에 인간들이 놓여 있음을 인간들이 알아야 합니다. 시냇물은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 흘러가는 물살에 의해서 돌멩이는 인정사정없이 깎기고 아프게 스치게 됩니다. 이럴 때 돌들은 자기 걱정만 하는 겁니다. 이런 사정을 일반화하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도한 모든 일에 대해서 결국 추궁당하게 된다”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하는 일로 통해서 본인 자신을 구성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과연 스스로 완벽하게 구성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들의 언어라는 것은 마치 벽돌과 같아서 아무리 곱게 곱게 틈을 줄이면서 쌓아올려도 현실 그대로를 온전하게 표출할 수가 없습니다.
틈이 있게 마련이고 이 틈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발각되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인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그는 나를 비난하느냐?”라고 화를 내게 마련입니다. 시냇물 안의 돌멩이가 시냇물 전체를 생각못하고 자기 입장만 주장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구약 성경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서 훈계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기껏 같은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각자 나름대로 최선과 노력한 것들을 내어놓는 것이 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합니다.
본인의 노력에 찬사와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식으로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천년이 가도 널 잊을 수 없어.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입니다. 즉 자신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기에 천년이나 가도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욥은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바로 그 분으로부터 상처도 받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욥은 구약 사람입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일단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상호 섞여서 충돌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충성도가 좀 모자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오늘 욥기에 나오는 욥과 같습니다. 즉 “제가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 알려주세요”라는 식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말하면 ‘비(非)’됩니다. 즉 ‘〜 가 아닌 것’이 됩니다. 열어로 하면 non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끝지점에 가서 하나님은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하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단순히 ‘〜가 아니다’ 수준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수준’입니다. 영어로 하면 anti입니다. 대적하는 것이고 반대하는 성향을 들어냅니다. 엘리후가 지금 욥을 평가면서 이 경로를 몰아세웁니다. 욥은 단순히 모자란다가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에 개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개를 열심히 도둑을 향하여 짓습니다. 이때 도둑의 반발은, 자신이 도적절한 것을 생각 안하고 감히 짐승이 사람보고 짓는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안 망지려고 극히 방어합니다.
지금 구약적 인물은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마땅히 자신이 사라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발휘할 뿐입니다. 이게 오늘날 신약 시대에 보여주는 보편적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수 취급합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로 상처받았다고 반발합니다. 즉 non을 거쳐서 anti로 나아갑니다. 이는 끝까지 자신의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놓지 못하는 인간들의 근원적 본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근본적 근성을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확보되어 있고 그것을 성도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마치 옛적에 우리 나라 주부들이 양말 하나라도 알뜰살뜰하게 꿰매어 신기기 위해 못쓰는 동그란 백열전구를 떨어진 양말 속에 집어넣어서 양말 구석구석 사정을 표면적으로 살펴보게 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가 문제이며 어디를 고쳐야 할지는 표면에 달라붙어 있는 그 인간 자체는 모릅니다.
하지만 백열전구의 자리에서는 훤하게 다 보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이 겪었던 것은 자기 백성의 허점을 꿰뚫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본인의 육신적 본성이 욥의 경우를 비켜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항상 자기 변명과 자기 변호에 열중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음을 압니다.
욥이 지내온 모든 생애가 오늘도 성도에게 매일같이 되풀이 됨을 인정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타인으로 비난받을 때, 배후에 주님이 계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114강-욥기 36장 1~16절(비난받기)2112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6장 1~16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이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시며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그 눈을 의인에게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찌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 하나님은 곤고한 자들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
엘리후가 말을 할 때 이게 하나님의 견해인지 지금 자신의 견해인지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견해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간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오시려면 지금은 구약시대이기 때문에 한참 멀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래서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우리에게 훈계하실 때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전부 다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욥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충고하는 충고자가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인의 말을 본인이 마감시키고 최종 완성할 그런 자격자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결국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어떤 정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정답 만들려고 애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옳다 네가 옳다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논쟁을 욥은 진짜 하나님 만나기 전에 그러한 힘든 경험들을 욥도 해야 하고 오늘날 우리도 해야 합니다. 이걸 한마디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주도한 일은 내가 타인들로부터 추궁당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일은 아무리 완벽하고 잘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헐뜯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내 뜻은 그게 아니라고 달려들고 비난하고 저항하고 꾸중하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욥은 경험해야 해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경험해야 합니다. ‘네가 뭔데 감히 나에게 달려드느냐?’라는 식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가 주의 뜻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나무람을 당할 때 혹시나 그 나무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여기 엘리후도 하나님을 거론하고 욥도 평소에 입만 떼면 하나님을 거론하죠.
그러나 엘리후와 욥이 다 같이 뭔가 빠뜨린 것이 있어요. 인간은 우연이 될 가능성만 있습니다. 인간은 우연적 존재예요. 우연적 존재라는 말은 자체적으로 최종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최종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자기주장을 할 때 최종적이라고 간주를 하고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하는데 더 쉽게 말하면 인간은 좋은 것을 가지고 내가 나를 완벽하게 구성하려고 해도 구성할 재주도 없고 그러한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내가 완전하게 나를 구성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남에게 욕 얻어먹을 각오가 필요하고 준비태세가 필요한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말을 사용하는데 말은 벽돌과 같은 거예요. 벽돌과 같아서 벽돌을 쌓고 쌓게 되면 그 안에 틈이 있게 되어요. 아무리 자기는 완벽하고 완벽하게 말을 해서 나는 더 이상 시비 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벽돌 자체 사이에 항상 틈이 있어서 온전하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언어를 구사하는 모든 인간 속에 인간들의 문제점이죠.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완벽하게 행했다, 아니다’를 가지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두려워하고 말하는 것도 두려워해요. 어차피 내가 완벽하게 내 뜻을 설명 못 할 거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자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입을 다물 것 같으면 아예 밥도 먹지 마세요. 테이프도 바르고. 입 다물고 있다고도 밥 먹을 때는 입이 막 작동을 하지요.
챙길 것은 챙기고 남에게 욕 얻어먹을 짓은 아예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은 아주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이건 아주 비겁한 짓이에요. 누가 와서 당신은 왜 당신을 완벽하게 구성 못 했느냐고 나무랄 때, 이건 하나님이 나무란다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맞잖아요. 이렇듯 저렇듯 구약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은 본문에 엘리후가 길게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판별하는 분이라서 욥 너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제대로 일 못 했다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엘리후가 자꾸 욥에게 내가 잘못한 들 하나님에게 무슨 해가 있고 내가 착한 들 하나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 대목이 욥기 나옵니다. 욥기 7장 20절에 보면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라고 나옵니다.
또 욥기 13장 25~28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라고 욥이 한 적이 있어요.
욥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하죠.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왜 하나님이 저를 집적거립니까? 하나님이 집적거린 들 하나님께 이익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익될 것도 없으면서 가련한 나를 아무것도 아니고 벌레같은 나를 왜 그렇게 못살게 구십니까? 좀 이유나 들어봅시다’라는 식으로 욥이 답답해서 이런 하소연을 한 거예요.
욥의 이런 하소연을 우리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평소에도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정말 가만~~~~~~히 있는데 왜 나에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말이죠. 나는 아무것도 안 한고 가만히 있는데. 부부간에 대화할 때도 나는 가만~~~히 있는데 ‘밥 먹으세요~’라고 하면 될 것을 ‘밥 먹으러 오라고 했는데 뭐하고 있노?’라고 말투가 다를 때 밥 먹고 안 먹고 하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고 듣는 어감이 시비 거는 어감처럼 들려서 나는 정말 가만~~~~~히 있는데 왜 자꾸 자기의 분노를 나에게 터뜨리느냐고 할 때 지금 상대방에게 대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에게 대듭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힘든 저녁을 주시고 이런 사건을 폭발시키십니까. 큰 사건, 작은 사건, 왜 자꾸 폭발시킵니까? 나는 정말 가만히 있는데’라고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약적 인물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딴소리 다 치우고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은 뭘 잘못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하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느냐.
이건 시냇물 속에 있는 돌멩이 같아요. 인간은. 자기 위에 시냇물이 흐른다는 생각을 못 하고 돌멩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돌멩이만 바라보고 사는 거예요. 시냇물은 돌멩이도 있어야 하고 풀도 있어야 하고 다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돌멩이는 시냇물이 시냇물 자체에 대해서 관심 없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물길이 너무 세서 얻어맞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얻어맞고 못난 내가 돌멩이가 훤히 보이는 졸졸 흐르는 투명한 시냇물을 아름답게 구성하려면 바로 이렇게 못난 것들이 모여야 시냇물이 되는 겁니다.
전체 시냇물의 구성은 신약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욥이나 엘리후나 이런 사람처럼 자꾸 자기변명과 자꾸 자기 괴롭고 힘든 인생을 가지고 주께 결국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 누구를 사랑하는데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짜증 내면서 ‘하나님이여,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하는데 이런 노래가 있어요.
‘천년이 가도 난 너를 잊을 수 없어, 사랑했기 때문에’라고 노래해요. 그러니까 자기는 사랑을 어디까지 끌고 갔느냐 하면 천년의 사랑을 한다는 거예요. 천년을. 박완규라는 가수가. 자기가 인생을 몇 년 살았다고 지금 천년을 사랑합니까. 이건 구라도 보통 구라가 아니죠. 연애할 때나 이 기분이지 한번 살아보면 그게 천년은 고사하고 이틀도 못가죠.
사람은 시냇물 아래 돌멩이가 자꾸 자신을 돌멩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어요. 그래서 욥이 비난했고 엘리후는 ‘비난하지 마라. 하나님은 선악으로 처리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길게 이야기했는데요. 언론에서 2024년까지 코로나가 번진다는 겁니다. 올해 들어 이제 겨우 2년 지났잖아요.
누구 말마따나 백신 접종 70%만 되면 그때는 누구나 마음 놓고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고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지난 8월에. 누구 말에 의하면. 근데 이게 뭐예요. 12월에. 2024년 되어야 감기처럼 고정질병이 된다. 그러면 2년 버텼는데 내년 2023년도예요. 그다음 해가 2024년이고 겨울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지순례는 언제 가는데요. 이스라엘도 죽을 판이예요. 손님들 안 와서. 또 얼마나 겪어야 합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한 것은 이래도 지옥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지옥은 2024년 지나고 2025년 되면 코로나가 끊어진다는 희망이 있잖아요. 4년만 복역하면 코로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지옥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옥 가고 싶습니까. 그래도 지옥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입니까. 끝이 없는데요. 코로나 이거 하나도 온 심보가 다 뒤집어질 정도인데 코로나가 2024년까지 가면 2년 동안 우리는 어떻게 견딥니까. 마스크 더 쓰고 다닐 건데.
이것은 시냇물 속 돌멩이 생각하지 말고 덮고 있는 시냇물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을 봐야 해요.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사랑을 받는 존재는 사랑하는 그분으로부터 상처도 같이 받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욥기는 욥이 상처를 받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상처를 받아야 해요. 그게 사랑이에요. 상처 주고받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할 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부 사이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잘 사는 거예요. 상처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고. 진정한 사랑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그분에게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렸다는 거예요. 지금 욥은 아무리 욥이 욕을 먹어도 괜찮아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린 분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으면 그러면 되었어요.
그게 바로 장차 예수님께서 받을 상처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을 상처예요. 자, 그러면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인가.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에 대해 평가내리는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사람이 평가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평가내려 준다는 것은 굉장히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면 평가를 어떻게 받는가. 처음에는 ‘나는 아닌가? 나는 백성이 아닌가?’라고 시작해요. 이걸 어려운 말로 ‘no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非)’, ‘~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리고 ‘non’과 다른 말로 ‘anti’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티(anti)’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것은 존재가 아닌 것을 비존재라고 하고 인간이 아닌 것을 비인간이라고 합니다.
비인간이라는 말은 좀비, 괴물, 귀신같은 거죠. 이때는 ‘non’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안티(anti)’라는 말은 인간이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인간이 죽은 것과 좀비와는 다르죠. 죽은 존재는 묘지에 가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는 괴물이 되어서 살아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욥이든 누구든 모든 인간을 예수님이 주는 십자가 상처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아님’으로 해요.
‘너는 아니야. 너는 율법을 못 지켜. 아니야. 나는 주님의 백성이 아닌가 보다’라고 이렇게 시작하다가 네가 나를 반대했잖아. 내가 죽은 것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죽은 거예요.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단순히 ‘아니다’가 아니라 너는 적극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뀔 때 그냥 괜찮은 어떤 지혜라든지 괜찮은 어떤 정보만 주시면 내가 그것을 받아서 나는 천국 백성 된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아니다’에서 더 나아가 ‘반대한다’라는 이 절차를 걸쳐 줘야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욥에게 엘리후가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너는 하나님을 반대한 자’라고 나와요. 그러니 엘리후 본인 이야기인지 본인에 주님이 섞였는지 섞였다니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왔어요. 그때 그 집에 혼자 있던 세 살 먹은 아이가 딱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나가세요”라고 할 때 우선 ‘아니다’부터 출발해야 하거든요.
‘아니다’에 도둑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 꼬맹이가, 너 가정교육 누구에게 받았어? 어디 어른에게 공손한 말 못 하고”라고 한다면 지금 상황이 그 상황이 아니잖아요. 지금 존댓말 쓰고 가정교육 잘 받으라는 그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돌멩이만 생각하면 상대방이 지금 나에게 뭘 이야기 한지 모르고 꼬맹이가 ‘선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말 안 했다고 기분 나빠하는 거죠.
이게 바로 자기 주제 파악 못 하는 거예요. 도둑이 들어왔을 때 개가 짖습니다. 그때 도둑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놈의 개가 어디 사람보고 짖어’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주제 파악 못 한 거예요. 개는 그냥 자기 영역에 들어온 것에 대해 짖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도둑이면서도 남들이 도둑이라고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해요.
주님 앞에서 시냇물 생각 안 하고 돌멩이만 생각하면 주님과 내가 어떻게 반대 관계이고 대치 관계이고 공격하는 관계이고 하나님 보고 밀치는 관계라는 생각 안 하고 자기 대우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대우. 그러니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그런 식으로 봐야 우리가 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요. 욥은 자기가 지금 대우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 섬겼으면 되었지.
‘non’이에요. ‘비(非)’ 그러면 내가 아닌가. 아닌가가 아니라 더 나가야 해요. 반대하는 사람으로까지 나가야 한다고요. 우리는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는데 너무 매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주가 일찍 유치원에 갔는데 말을 잘 못 해요. 한국말도 못 하고 독일말도 못 하는데 그 유치원에 가서 제일 먼저 배운 독일말이 뭐냐 하면 ‘마이네(meine)’예요. 한국말로 ‘내 것’
그걸 딱 볼 때 말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골라잡는구나. 자기에게 인상 깊게 새겨진 말에 있어서 본인이 나서서 습득하는 것이 언어구나. 한국말도 잘 못 하는 것이 독일말 처음 배운 것이 ‘마이네(meine)’, 내 것! 선생님이 독일말로 ‘이거 누구 물건이에요?’라고 하면 ‘내 것이요’라고 하는 거죠. 내 것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 거죠.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집단 속에 다가설 때 본인이 얼마나 상처받는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햇빛도 잊어버리고 공기도 잊어버리고 아침에 목숨 주신 것도 다 잊어버리고 맨날 입만 떼면 ‘하나님 저에게 왜 그래요. 왜 그래요’라고 자꾸 달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날 성도는 어떤 존재냐. 양말 속에 있는 조명기구라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릴 때 할머니, 어머니께서 양말 기우실 때 그냥 하신 것이 아니고 양말에 백열 조명기구를 넣어서 양말 터진 곳을 팽팽하게 펴서 쉽게 바늘이 오갈 수 있도록 그렇게 했어요. 우리 안에 주님께서 십자가로 밝게 펴놔요. 그러면 우리 안에 내 것이라고 움치고 있던 것이 백열전구 표면에 달라붙어 쫙 늘어나면서 펴집니다. 펴지게 되면 어느 구석 하나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의 선물 아닌 것이 없어요.
안에 동그란 백열전구가 들어가서 늘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입장에서 보게 하는 거, 우리에게 상처받은 입장에서 보게 하는 거, 우리로부터 대척 관계, 우리로부터 적으로 간주 되어서 우리에게 오해를 사신 그분이 우리 안에 모시고 다닌다면 우리는 단순히 내가 나를 어떻게 구상하느냐는 그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세요. 나는 어떻게 바르게 사는 인간이 될까를 궁리하며 자기가 자기를 만들지 마세요.
그건 대인관계에서 인간 상대할 때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주님에게는 내가 어떻게 되는 가가 아니라 이미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발그스레하게 그 위에 둘러싸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나 야곱이나 요한처럼 열두 제자가 욥의 그 과정 밟아가면서 처음에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가 좀 모자라죠?’라고 하는데 모자란 것이 아니고 아예 반대하고 배신한다니까요. 나는 저분 모른다고.
이왕 그렇게 태어난 거 십자가 앞에서 발그스레하게 늘 노출 시키고 드러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지적하더라도 지적할 만해서 지적한다고 남이 지적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지적한다고 생각해서 십자가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늘 주님의 은혜로 선물로써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