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려진 통
2021년 12월 26일 본문 말씀: 욥기 37:1-7
(37:1)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
(37:2)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37:3)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37: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37:5)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37: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37:7)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엘리후라는 욥의 친구는 지독하게 정확하게 설교합니다. 빈 틈이 없게 설교합니다. 사람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설교합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서는 자체적으로 완벽해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신 일 사이가 벌어져 있습니다. 엘리후가 보이에 욥은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참으로 욥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의로움이 있다면 이 세상 만물을 만드는데 있어 욥이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욥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인정하게 되면 욥 본인의 창조에 대해서나 그 뒤 하나님께서 벌려놓은 각가지 일에 대해서 욥에게 창조 일에 참여하라고 초청할만 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같은 류의 의로움임을 그런 식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견줄만한 그런 의라면 하나님께서 욥의 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욥의 의를 살려주기 위해서도, 혹은 욥이라는 인간의 의가 일반적인 창조물들의 성취시키는 바탕으로 손색이 없음을 알려주시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조치는 욥에게 고통을 주신 겁니다. 이 말은 엘리후가 보기에 욥의 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나아가서, 엘리후는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의에 끼어들만큼 된다는 그 교만스러움은 지금껏 욥이 받은 고통으로도 징벌에 충족될 수 없다는 겁니다.
욥기 35:15-16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는 곧, 비록 욥이 고통받기 전에는 전혀 자신에게 과오나 죄를 안 지었다고 우기지만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난 뒤에 주장한 ‘자기 의 주장’은 그가 미리 받은 징벌로도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욥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욥마저 일반인들과 함께 묶어서 하나님의 공평됨을 말해주려고 합니다. 즉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 공평함을 위하여 동원한 것이 바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변화들입니다. 번개와 우레와 비 내림, 눈 내림 등등.
욥은 말합니다. “이러한 눈 비가 내리는데 있어 욥 네가 그 의로움으로 어느 정도 기여했는냐 따져봐라”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용기있게 나설 위인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오직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의로만으로 성취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결론이 신약의 복음 안에서는 실내용이 없는 주장이 아닐까요? 즉 눈과 비내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을 한다고 인정해도 그것으로 천국갈 수 있는 겁니까? 이것을 고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받아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자연의 변화와 하나님의 일하심 사이에 욥기로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계열에 들어서서 비로소 윤곽이 잡힙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노선은 신약의 메시야와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19:11-14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태풍이 와도 여호와는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지진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여호와는 계시지 아니하고, 불 가운데서 여호와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어디 계십니까? 그것은 ‘언약’과 관련해서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그것도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로부터 배신당한 선지자와 더불어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희생하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신의 아품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지는 식이라면, 신약은 하나님께서 먼저 “너희를 위하여 이런 희생을 했음‘을 알리면서 다가오십니다. 마치 페인통의 표면적인 멀쩡할 때가 전부라고 여겨지지만 그 페인트가 찌그려지면 그 내부의 새로운 표면적인 발생합니다.
이 원리처럼, 신약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먼저 오셔서 우리들의 교만과 자만을 먼저 지적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손해가 오거나 망가지는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동안 본인도 알지 못했던 원망이 내부로부터 터져나옵니다. 즉 “저는 하나님에게 최선을 다했건만 주님은 저에게 상처만 주었습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를 위장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칠 때의 원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먼저 우리의 죄를 자기에게로 가져 가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이 공식으로 다음의 말씀에 적용시켜 봅시다. 마가복음 8:22-26에 보면,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소경의 눈을 뜨는 절차에 주님의 몸이 ‘안수’ 형식으로 개입되므로서 그 소경은 점차 일반인 범주에서 이탈됩니다. 즉 주님의 특수성이 새겨진 인생이 되는 겁니다. 뭔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인간은 ‘나무’같은 인간들이지만 주님에 의해 고침받은 자신의 몸의 안목으로 새롭게 보이는 인간들과는 달리 자기에 함께하신 분은 일반인이 아닌 특별하게 인간을 제대로 밝히 보이는 안목을 지닌 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와서 비로소 밝혀지는 언약의 구체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새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5강-욥기 37장 1~7절(찌그러진 통)2112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7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엘리후가 욥에게 이렇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욥이 지독하게 자기변명과 자기변호로 일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욥에게 달려들어서 아주 개처럼 물어뜯습니다. 이것을 아주 고상한 말로 공평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때문에 고생 더 했다고 해서 특별대우 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너나 나나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7절에서는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자기가 뭘 했다고 우기는데 그렇다면 하늘에 눈 내리는 것에 네가 어떤 점에서 협조했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게 6절에 나옵니다.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라고 하나님이 하실 때 욥 네가 어떤 도움을 주었느냐고 욥에게 따져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큰 비가 내리든 작은 비가 내리든 욥 네가 그렇게 의롭고 잘했다고 우기는데 하나님만큼이나 잘하고 의롭다면 소낙비 내릴 때 네가 한 부분이라도 담당해야 비가 내린다는 의로움에 네가 하나님께 너의 몫의 의로움을 나서서 주장할 수 있고 자기 지분을 얻어야 논리가 맞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네가 너의 인생을 꾸려 나가는데 어느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쪽으로 엘리후가 욥을 코너로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네가 하루하루 살고 네가 하루하루 목숨 부지하는 데 있어서 네가 너에게 도움 된 거 있느냐를 한번 따져보라는 겁니다. 엘리후가 참 지독합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하느냐 하면 지독하도록 정확하게 설교해요. 참, 교인들이 가장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정확하게 설교하는 거예요.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그 영화 자체가 ‘매트릭스’라는 컴퓨터거든요. 컴퓨터가 인간 모양으로 나타나서 스미스라는 얼굴 똑같이 생긴 인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스미스라는 요원이 주인공을 향해 총을 막 쏩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서 총알을 다 피해버려요. 유명한 장면이거든요.
엘리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데 과연 우리가 피하는 모션(움직임)을 취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냥 내가 정확하게 이야기할 때 만약 옆에 총이 있었다면 그 총알을 다 맞으라는 겁니다. 총알을 다 맞게 되면 욥은 구멍 난 사람처럼 뻥뻥 뚫려 있을 거예요. 그게 하나님 보기에 욥이 더 이상 너보다는 낫다는 어떤 공평성에 위배 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거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누구에게도 쏠 수 있는 화살이요 총이고 하나님의 공격용 무기인데 욥이 ‘나 빼주세요’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나는 착하니까 나는 좀 특별대우 해주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정답이라면 그동안 욥이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우리가 보기에는 소용없는 일인데도 이게 성경에 이렇게 두껍게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마냥 소용없는 것이 아니에요.
소용 있어요. 소용 있는데 엘리후가 보기에 욥이 그동안 고통을 받은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받은 고통보다 욥 본인이 잘났다고 하는 것에 대한 벌이 더 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35장 15~16절에 보면 엘리후가 아주 심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지금 고통받고 있는 욥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 매를 덜 맞았다는 겁니다. 네가 지은 죄에 비해서 매를 덜 맞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말하기를 나는 지은 죄가 없는데 고통받고 있다는 거죠. 네가 고통받으면서 그 이후에 나오는 그 발언들이 고통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고통받고 난 뒤에 알게 되는 그 죄들이 네가 받은 고통보다 초과하는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 엘리후의 주장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주 독해요. 꼭 이준석 같아요. 갑자기 정치적 발언같이 되어버렸는데. 그냥 물어뜯는 거예요.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이건 반칙이야, 이건 표를 의식하는 거야’라고. 어떤 사람이 산에 운동하러 올라갔는데 그 동네 60대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이준석이는 철딱서니 없이 우애 그렇게 이야기를 하노’라고 이야기를 해요.
지금 인간 세상에서는 엘리후가 보기에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은 감정적으로 살기 때문에 남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아픈 것만 너무 신경을 써서 자기 혼자만 이 세상에서 고생 제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데 그걸 엘리후가 공평하게 정리하겠다는 겁니다. 공평한 정리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37장 2절부터 보면 소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엘리후도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에 번개 치고 우레치고 토네이도가 퍼지고 파도가 넘쳐서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이거 하나하나가 주님의 의도이고 주님의 감정 실린 행동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도 구약적입니다. 사람을 윽박지른다고, 힘들게 압박한다고 해서 사람이 회개하고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구약적 입장에서는 엘리후 입장에서는 신약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밖에 못 하는 거예요.
이건 잠언서에도 마찬가지로 나옵니다. 잠언서 30장 4절에 보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고 물으면서 ‘이분은 바로 누구누구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냥 “너는 아느냐”라고 하면서 멈춰버려요.
‘너는 아느냐? 이런 분이 여호와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여기 욥의 친구 엘리후나 잠언에 나오는 계시의 한계입니다. 이 세상의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움직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고 뜻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욥이 그 점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이 움직이는 것과 하나님이 계셔서 움직이는 그 의미와 거기에 결핍된 거, 거기에 빠진 거, 그걸 욥의 친구도 모르고 욥도 모르고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해서 굉장히 미흡합니다. 꽉 채워져야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이 땅에서 왜 그렇게 폭풍이 주어지고, 왜 그렇게 태풍이 오고, 왜 비가 내리고, 어떤 때는 비가 안 오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뭣 때문에 어떤 계획을 갖고 그렇게 하는지를 그것까지 딱딱 알아서 채워줘야 하는데 그것은 신약에서 나와요. 구약에서는 그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구약에 보면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신약의 구체적인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5절에 보면 엘리야가 쫓겨 다닐 때 자기는 죽으려고 했어요. 850대 1로 이겼지만 소용없고요. 현상 수배범 되어서 도망을 칩니다. 내가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열왕기상 19장 5절에 보면 죽으려 했는데 천사가 와서 죽는 것도 못 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 전하고 나는 나의 할 일 다 했다고 그냥 콱 죽는다고 하는 이것이 결국 결핍을 채우지 못하는 구약적 인간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보면 죽어도 맘대로 못 죽어요.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라고 나오는데 이렇게 다시 죽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8절에 보면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라고 나옵니다. 시내산까지 가게 하신 거예요.
11절에부터 14절까지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겁니다. 11절에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라고 나오죠. 이게 바로 엘리후와 욥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강한 바람을 일으키고 그건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구약 사람들이 아는 한계예요. 그것뿐이에요.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정답이 됩니까?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는 말이죠.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라고 나오는데 지진 일어나면 사람들은 누가 일으켰다고 하겠어요? 여호와 하나님. 그게 정답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그걸 존재하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모르죠. 그리고 불이 있었어요. 불 가운데 있다면 거기 하나님 계시는 겁니까? 그냥 불인데요. 거기에 여호와 계시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구약 사람들은 거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거기에 여호와가 계신다고 이야기했고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어떤 일은 벌어졌는데 거기에 여호와가 안 계시다는 겁니다. 흔히 장로님들이 대표기도 할 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온 우주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어서 남북통일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이렇게 스토리가 시작되잖아요. ‘대통령은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하면서 하잖아요. 그냥 노골적으로 ‘누구 찍으세요’ 하면 될 텐데.
세상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선거에도 개입하고 남북통일에도 개입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남북통일 하려고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아이들 주일학교 노래 부르는데 이런 노래가 있어요. ‘아빠가 말했어요. 세상이 병들었데요. 하나님, 기도 들어주셔서 어서 이 마귀가 물러가게 하옵소서’라고 외손녀가 이렇게 불렀어요.
동영상을 보니 이렇게 불러요. ‘세상이 아프대요. 하나님, 제 기도 들어주셔서 어서 병이 이 세상에서 물러가게 하옵소서’라고. 코로나 일으킨 것은 하나님 맞습니다. 그런데 기껏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자세가 욥과 똑같고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그냥 물러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왜 물러가게 해야 하는데요.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네요.
엘리야가 열왕기상 19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자연 변화와 하나님의 일하심과의 연관 속에서 빠진 부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여기 14절에 나와요.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 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버렸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유품정리와 사망진단서, 사망신고서를 본인이 작성하라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남이 사망진단서, 신고서 작성하고 유품정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유품정리에 돌입하는 거죠. 자기는 착했는데 왜 아프냐고 고통스럽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는 겁니다. 그 죽으라는 명령이 욥에게도 떨어졌고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 명령을 주신 겁니다. “죽으라. 그게 바로 언약이다”
하나님의 약속 완성은 죽음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기 때문에. 따라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우리는 미완료가 되는 겁니다. 이건 광주강의 첫 번째 파트에서 했어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만큼 모자란다는 겁니다. 완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티가 나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왜 제 몸을 아프게 해요, 아빠가 그러는데 세상이 아프답니다, 제 기도 들어주셔서 어서 병들이 물러가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이게 바로 외손녀가 벌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이 자기 죄도 모르면서 불평만 해대는 벌이라는 겁니다.
엘리후는 뭐만 아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네가 관여하지 않았는데 마치 어떤 지분이 있는 것처럼, 어떤 공적이 있는 것처럼 ‘왜 아픕니까’라고 따지는 이것이 너에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 된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그냥 문제만 던졌지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야는 언약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되어있지만, 언약 완성은 역시 신약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여튼 욥기로 다시 돌아와서 욥기에서 엘리후가 문제를 제시했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상세한 것, 자세한 것은 역시 신약성경에 와야 그게 밝혀집니다. 그러면 엘리후가 한 것은 뭐냐 하면 욥이 자기는 아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지은 적이 없는데 아프다고 할 때 여러분들이 움푹 팬 페인트 통은 그 안에 또 하나의 내부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페인트 통 표면적이 있잖아요. 그걸 발로 밟든지 해서 다시 찌그러뜨리면 그 내부에 그 전에 없었던 내부표면이 다시 만들어져요. 멀쩡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단 우리의 멀쩡한 표면적 가지고 감사가 된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갑자기 어디 차에 받혀서 허리가 나갔을 때 허리가 나간 만큼 우리의 마음은 찌그러진 거예요. 찌그러지면서 멀쩡할 때 감사의 양과 내 몸이 완전히 불구가 되어 찌그러졌는데 거기서 나오는 감사의 폭과 분량이 다릅니다.
멀쩡할 때는 온몸으로 드리겠다고 하는데 갑자기 자기 몸이 아파 버리면 이 병 낫게만 한다면 감사드리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찌그러진 만큼, 내가 몰랐던 죄가 내 안에서 겹쳐져 있고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무슨 일을 하실지 아시겠죠? 우리를 찌그러뜨립니다. 멀쩡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죄인으로 만들고 그 찌그러진 것을 주님이 나서서 하나둘씩 폅니다. 펼 때 죄인이 어떤 식으로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는가 그 절차가 나오거든요. 마가복음 8장 22~26절에 보면 그 절차가 나와 있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특이하게 안수를 두 번 합니다. 두 개의 과정을 보여줘요. 하나는 소경이었던 자가 희미하게나마 사람 걸어가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절차를 해주십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안수해줍니다. 한 번 더 안수해주니까 뭐가 보이느냐. 그 나무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이 이제는 확실히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라고 되어있어요.
만물을 밝히 본다는 것은 이 소경으로 하여금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본래 너의 집으로나 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껏 자기가 소속되어 있고 자기를 자기로 만들어왔던 세상과의 격리된 세계에 네가 말려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경을 눈 뜨게 하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병 고치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건 기억을 하셔야 하는데 그 병든 자는 가만히 있고 주님께서 다가가서 그 병을 예수님 자기에게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구원해요.
문둥병자가 있으면 문둥병을 고치는 방법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가서 그 문둥병을 자기에게 이전시켜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 문둥병 될 만한 죄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절뚝발이에게 가서 병을 가져와 버리면 본인은 문둥병자요, 거기에 추가해서 절뚝발이 됩니다. 마가복음 8장에 소경을 눈뜨게 했다는 말은 소경을 눈 뜨게 해주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건 일반 병원에서 해주는 거고 주님께서는 눈 감긴 자체를 자기 내부로 가져와 버려요.
이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는 겁니다. 죄인이 아니면서도 모든 인간에게서 죄를 수집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회개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회개는 나를 보다가 나 안 보고 주님 보는 것을 회개라고 하거든요. 방향이 바뀌는 거. 나는 이런 죄인이라고 자신을 보다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주님이 내 죄를 내 허락도 없이 몽땅 다 허락도 없이 가져갔잖아요’라고 바뀌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죄를 가져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가져가셨음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예요. 나 쳐다보다가 나 안 쳐다보는 것이 회개란 말이죠. 모든 여호와의 일이 다 그래요. 민수기 22장 28~31절에 보면 거기에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라고 되어있어요.
나귀가 주인 지킨다고 일부러 말을 안 들었어요. ‘이랴~’하며 가자고 해도 앞에 하나님의 사자가 있어서. 이것을 여러분 가정에 적용시키면 집에 개를 한 마리 키우는데 평소에는 말 잘 듣다가 갑자기 말을 안 들으니 주인이 손을 댔단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개가 말을 하는 거예요. ‘주인님, 왜 때려요?’라고. 주인이 ‘네가 말을 안 들었잖아. 사료 먹으라고 하는데 안 먹고 삐졌잖아’라고 하니까 개가 하는 말이 ‘지금 내가 사료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안에 도둑놈 들어온 것을 모릅니까’라는 식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분명히 ‘나귀는 말 못 한다. 개는 말 못 한다’라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거든요.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비가 올 때 우리는 수증기가 응결해서 물방울이 되고 구름이 만들어져 온도 하강으로 비가 내린다고 상식으로 알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개입한다는 것은 엘리후가 아는 수준이고요. 신약은 그게 아니고 비가 내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뭔가 의롭다, 뭔가 알고 있다’라는 것이 죄임을 규정하며 끄집어내야 하거든요. 내가 아는 것이, 내가 착하게 사는 것이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희생을 모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질 것을 이미 전제로 해서 십자가 지겠다는 그 피 흘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는데 우리는 자꾸 주님과 이야기나 하며 놀 생각하고 주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말하고 찬송 드리면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기어이 우리의 페인트 통을 찌그러뜨려요. 그리고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헌신같은 소리하고 있네’라고 막상 일 터지게 하니까 나름대로 참는다고 ‘주여, 이러해도 참겠나이다’라고 처음에는 하다가 주님이 이래도, 이래도 하시며 강도 높이면 ‘더는 못 참습니다’라고 나오죠.
기어이 발설하게 만들어요. 나는 주님, 주님 하지만 나의 의를 지키는데 내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는 그 속 사정을 고발하고 밝혀냅니다. 고발하고 밝혀내 버리면 그게 바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죄가 노출된 거,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노출된 거,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아가요.
그러면 하루 일상을 살면서 반찬하고 가구 들여놓고 하는 전부 다가 내 손으로 해야 하는 유품정리입니다. 주민등록증 만드는 것도 사망신고서 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참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고 욕하고 반항하는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이 공평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느 누구도 잘난 인간이 없다는 것을 페인트 통이 찌부러질 때 작살 낼 때 ‘아, 내가 특별난 사람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특별난 사람이에요. 특별난 체험입니다. 어느 누구도 잘 먹고 잘살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특별한 특급 사랑이에요. 이럴 때 세상에 어떠한 변화에도 겁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파도치면 파도치는 대로 흘러가면 됩니다. 왜? 우리는 동해바다의 물방울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물방울이니까. 주님이 개입한 물방울이고 주님의 십자가 용서하심이 개입된 물방울이니까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면 되는 겁니다. 흘러가는 대로 돈 밝히고 흘러가는 대로 나만 챙기고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욥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구약 사람들의 한계도 알았습니다. 언약, 약속이 참 좋은 명칭이고 좋은 개념인데 신약에 와서 그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왔음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