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딜레마

아빠와 함께 2021. 12. 6. 08:22

딜레마 

2021년 12월 5일                 본문 말씀: 욥기 34:31-37

(34:31)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34:32)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34:33)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34)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34: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34:36)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4:37)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방인들은 자들이 모여 하나님에 대해서 논하고 자신들의 바른 삶을 논하면서 여지없이 늘 빠지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묻지도 따지 필요도 없는 본인이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이들은, ‘우리 인간들은 일단 선하고 착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논쟁을 벌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의 결말은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도 증명해야 하고 인간의 훌륭한 자질도 증명해야 하니, 이 두 개의 증명이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은 물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그리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악을 원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 점에서도 당연한 사실이라면, 그러면 악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하나님과 인간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악인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설정되어야 될 악을 찾아내는데는, 하나님으로부터 몹쓸 병에 걸린 자를 찾으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악한 자는 후보감으로 욥은 당연히 유력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욥은 본인이 스스로 변호하기를 결단코 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하니 바로 이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면 되겠지요.

고난을 당하지 않는 주변 친구들 입장에서 본인은 고난이 없으니 그 자체가 아예 선한 존재라고 한껏 우길 수 있다고 여깁니다. 결국 욥이 받은 고난이 하나님의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딜레마를 가져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서 2:12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욥에 등장하는 이 논쟁을 모든 인간들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즉 언약이 없는 자들이, 언약 밖에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자신들이 선한 존재인 것을 결사적으로 확인하려는 이 모든 시도가 전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 경우들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욥의 문제점은, 일단 징계 받았으니 더는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과 몰라서 지은 죄는 하나님께서 미리 ‘그것은 죄이다’고 알려 주셨으면 안 지을 수 있는 죄였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욥은 죄인 아닌게 되고 죄도 없는 욥에게 벌(고난)을 내리신 하나님만이 자동적으로 나쁜 짓을 한 것으로 결론나게 했다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엘리후는 다른 친구들처럼 인간의 선함과 죄와 선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대로 움직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심이나 묻는 것이 아니라 직접 율법을 적용시키셨습니다.

그 율법 계시에 준해서 이스라엘을 평가하면 이러합니다. 에스겔 16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광여에서 거의 죽을 뻔한, 아무 것도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것들을 지니고 있는 가련한 여인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겔 16:6)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가련한 처지의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과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겔 16:8-13)

옷 안의 가련하고 보잘 것 없는 실상은 화려한 치장에 의해서 가려지고 주변 이방민족에게 오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이스라엘의 욕심을 부추겨주었고, 결국 이스라엘의 화려함은 주변 국가에 번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러다가 가진 것조차 다 빼앗긴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은, 조금이라도 ‘나는 선하고 복받을 가치 있다’는 허용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로마서에 복음이 언급됩니다. 거기에 인간에게 율법적 기능을 하는 양심을 한계를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양심대로 살다고 하나, 결국 온전치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3:23의 나오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에 도달됩니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인간은 진노받기 합당한 존재입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진노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진노를 피할 그 어떤 자기 선함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인간은 오기가 나서 “그래, 나를 지옥에 집어넣어! 용감으로 들어가 줄게”라고 큰 소리치지만, 하나님의 이렇게 일하시는 취지는 인간의 사적인 운명에 신경 쓰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아니면 이르지 못하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지옥갈 자들은 지옥에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피조물됨의 역할입니다. 창조주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피조물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오지 아니하면 인간은 정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욥기의 내용을 놓치지 않아야 될 이유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이방적인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이란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과 선함을 그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못하고 놓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본성에 근거해서 주변 세계를 해석하는 자들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기 자신은 늘 복받아 마땅하다고 알고 있는 이상, 이방이나 그 어떤 자라도 하나님의 영광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변명하고 사수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2강-욥기 34장 31~37절(딜레마)2112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4장 31~37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지금 엘리후가 이야기할 때 엘리후가 말하는 내용에 엘리후 여기 들어가지요, 욥의 세친구 이야기가 또 여기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욥의 세친구에 대해서 엘리후라는 사람이 다 들어봤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들 이야기 순서대로 들어본 후에 하나같이 쓸데없는 말만 했다고 일거에 엘리후가 평가했습니다. 엘리후보다 먼저 있던 세친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욥에게 먹혀들어 가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일괄적으로 평을 했어요.

엘리후의 말 속에 첫 번째 친구, 두 번째 친구, 세 번째 친구 다 들어있지요, 그다음에 욥이 이야기한 거 다 들어있지요. 욥기 3~33장까지 이야기가 다 들어있지요. 마지막으로 엘리후 본인 의견 들어있지요. 그리고 친구 네 명에 욥까지 총 다섯 명에 이 말을 성경적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여기에 누가 또 뛰어드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여기 뛰어들어요.

우리가 뛰어들어서 우리는 욥의 세친구 말 들을 거냐, 욥의 말을 들을 것이냐, 엘리후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내 생각을 따로 여기 첨가할 필요가 있는지를 두고 우리는 이 본문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 의견이 다른 다섯 명이 욥의 고난받는 사건 속에 다섯 명이 다 뛰어 들어가서 제각기 자기 의견을 펼치는 겁니다.

펼치는데 그 의견이 다 틀렸느냐, 아니면 하나는 맞고 다 틀렸느냐, 둘 맞고 다 틀렸느냐, 그걸 오늘날 성경을 보는 우리가 판정을 내릴 것을 요구받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예는 이거예요. 성경 덮어버리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뭔데, 그게? 내가 아픈가? 욥이 아프지. 욥이랑 내가 다른 인간인데 욥이 이런 말 하고 욥의 친구가 그런 말 할지라도 우리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내 일이 아니라고 느껴져. 나는 지금 내 돈벌이하는 것이 더 급한데 이런 남의 일까지 끼어들어서 할 것이 뭐가 있느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 욥이나 욥의 세친구나 엘리후나 전부 다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하나의 원칙으로 완전히 그것을 장악할 수 있느냐에 나름대로 의견들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의 한 분야가 신학이에요. 신학은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그냥 자기 이바구 떨고 자기 의견 내놓는 겁니다. 철학의 일종이에요.

그러면 욥의 친구가 철학을 내놓고 욥도 철학을 내놓았으면 우리는 인간 아닙니까. 우리가 내놓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여기 앞에 나란히 놓으면 그것도 철학 중 하나가 되고 마는 겁니다. 신학 중 하나가 되고 인간의 의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데 왜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는 인간들의 의견을 성경 욥기에 이렇게 써놓아서 이걸 번역을 또 하는데 번역하는 말이 우리나라 어떤 책보다 어렵게 해놓아서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납득갈 텐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33절에 보면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라고 물어요. 32절에 보면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라고 자꾸 이렇게 물으니까 듣는 욥이, 만약 엘리후 앞에 우리가 욥이라면 듣는 입장에서 그대로 하라는 말인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지 헷갈리는 거예요.

31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할 자가 누가 있느냐고 하면 욥이 대번에 ‘내가 뭐 어쨌는데, 왜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네가 지어내서 해버리면 거기다가 네가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강요하면 어디까지나 그건 네 생각이고 내가 거기에 답변할 의무는 없지 않느냐’라고 되는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엘리후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말들을 하는지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내가 징계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징계받은 죄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죄를 안 지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제는 범죄 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했다고 엘리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정리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사람이 한 번 벌을 받았으면 이제 뉘우침이 있어서 두 번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욥이 이야기했는데 엘리후는 말하기를 ‘그럴 위인은 없다고 내가 이야기한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벌 받았다고 해봐야 과거지사입니다. 다 잊어버려요. 인간의 본성이라 하는 것은 한번 지적받고 두 번 다시 그런 행동 안 한다는 그런 보장 없어요. 한 번 했으면 두 번 할 수 있는 재주나 기술이 늘어나게 되어있어요.

32절에 보면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라고 나오는데 내가 죄를 알아서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내가 ‘아, 이게 죄였습니까?’라고 몰라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내가 죄짓기 전에 미리 ‘이것은 죄다. 하지 마’라고 미리 했으면 ‘제가 죄를 안 짓겠습니다’라고 할 자가 있느냐고 엘리후가 이렇게 묻는 거예요. 엘리후가 보기에 욥의 주장이 이렇다는 겁니다.

‘내가 몰라서 죄짓는 것에 대해서 사전에 알았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죄는 아마 안 지었을 겁니다. 나는 의로우니까요’라고 욥이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벌써 앞에 이야기한 31절도 헷갈리기 시작하죠. 31절은 뭐냐 하면 한번 잘못해 놓고 징계받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안 한다고 욥이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미리 이게 죄인 줄 모르고 나중에 보니까 죄였는데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셨으면 내가 알아서 ‘예, 제가 그 죄를 안 짓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인간에게 있다고 욥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엘리후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후가 보기에 욥은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 너는 아느냐. 33절에 보면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라는 이것은 또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스스로 나는 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싫어한다면 나는 그 싫어하시는 일을 안 하는 쪽으로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라고 욥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거예요.

엘리후가 보기에 그 뜻은 뭐냐 하면 엘리후가 욥을 분석하는데 이 분석이 어려워요. 그렇게 되면 욥 주장대로 한다면 인간은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의 징계가 오면 ‘아이고, 잘못되었구나’라고 하든지 아니면 징계가 올 때 ‘아이고, 이건 사전에 알려주면 안 할 일인데 몰라서 했습니다’라고 이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욥은 지금 하나님을 빙자해서 네 맘대로 산다는 것이 33절에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34절, 35절, 36절 37절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세상에 악인들이 입만 떼면 했던 비겁한 변명거리에 일종이라고 엘리후는 욥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합니다. 지금 욥에 대해서 엘리후가 그렇게 평가를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느냐 하면 욥 말고 엘리후 본인이라면 어떤 식으로 죄를 사전에 안 지을 수 있고 죄를 짓더라도 사전에 그것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하나님께 죄를 안 지을 수있는 방안이 엘리후 너에게 있는지 물을 수 있어요.

욥이 제시하는 선택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 전부를 다 끄집어낸 거예요. 빼도박도 못 해요. 몰라서 죄지은 거니 반성하면 그만이고 알아서 죄지은 거면 징계한 것으로 퉁치면 되고 그래서 엘리후 본인도 욥을 보고 어떤 딜레마에 빠졌는데 자기가 해결책이 없습니다. 자기도 딜레마 빠졌는데 욥을 비난하기 바빴죠. 딜레마가 뭐냐 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죄를 지었던 모르고 지었던 알고 지었던 어쨌든 인간이 선하고 의롭다는 그 사실은 한결같이 남는다는 거예요.

엘리후나 욥의 세친구가 지금 무슨 아이디어를 못 끄집어내고 있느냐 하면 내가 애초부터 어떤 것을 해도 지옥 갈 존재라는 것을 본인이 증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한계가 있는 겁니다. 지옥에서 태어나 지옥에 누워 온몸이 저주에 젖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저주를 받았다는 그 생각조차도 극복해서 그래도 나는 천국 가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는 이 저주성을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죄는 지어놓고 지옥 안 가려고 하는 이 양면성을, 옹고집을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그러니까 욕만 몽땅 얻어먹은 거예요. 엘리후도 해답이 없고요. 결국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것은 욥 네가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이라고 해서 그 의인이라는 주장 자체가 악하다는 겁니다. 그건 욥의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것이 ‘그러면 내가 죄인이라는 증명을 해봐라’라는 것에 대해서 앞에 세친구를 비롯한 네 번째 나온 친구도 답을 못하고 있어요.

욥 본인도 못 하고요. 내가 죄인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위에 아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가 알아들었던 풍월을 가지고 말하죠. ‘인간은 죄인이며 그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 피를 흘렸다’라고 했는데 듣는 사람이 ‘스톱! 잠깐만, 잠깐만.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왜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겠는데 네가 한번 증명해 봐라’라고 하면 여러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점심값만 날린 거죠.

상대가 훅 치고 들어올 때 본인도 그 점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복음이고 뭐고 복음도 없는 옛날 들었던 궁색한 변명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람이 살다가 힘든 일이 있잖아. 그럴 때 그것은 인간의 죄를 알게 되는 찬스가 온 거야’라고 하면 상대가 ‘그럼 힘든 일 없으면 죄인 아니겠네’라고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혼돈에 빠졌어요. 본인이 혼돈에 빠져요.

도대체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 죄지어서 그렇다는데 어렵다는 것이 한 달 수입을 몇백만 원을 잡고 어렵다고 하는 거냐. 천오백만 원 잡고 어려운 거냐? 한 달 수입 천오백이면 어렵죠. 뉴욕 맨해튼 가서 못살지요. 가난한 거예요. 거기 아파트 월세가 얼마인데요. 뉴욕의 아파트 월세가 평균 500만 원인데 어떻게 살아요. 물론 살던 사람도 있지만, 거기에 무슨 수로 삽니까? 그렇게 가난하죠. 평수도 스물 몇 평밖에 안 되는.

50만 원, 100만 원이 가난하다고요? 북한 가보세요. 100만 원도 얼마나 잘 사는데요. 북한은 코로나도 없지요, 백신도 필요 없지요, 마스크도 필요 없지요, 북한에는 인간이 괴로운 것이 없어요. 다만 양식이 없다는 그거 하나가 문제지요. 양식 빼고 나머지는 나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거리에 노숙자도 없어요. 전부 다 수용소 집어넣으니까.

그래서 이 해결은 구약 이스라엘이고 우리가 신약을 통해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의 해답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에스겔 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느냐가 나와 있습니다. 16장이 길어서 얼른 소개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에스겔 16장 6절에 보면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라고 나옵니다. 피투성이라는 것은 죽어간다는 말이죠.

그다음에 16장 9~12절에 보면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라는 이 말은 너의 본체는 세상 나라에서 아무 무가치한 버려진 존재인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이방 민족 보기에는 거지 떼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속의 땅에 집어넣어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다 채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식이에요. 너의 알갱이는 옷 속에 있는 화려한 보석 사이에 있는 알갱이는 더러웠다. 더러운데 뭐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 그 더러움을 가득 덮어 주었다.

덮어 주었는데 에스겔 16장에 보니까 사람들은 너의 알갱이가 어떤 모습인가는 생각 안 하고 너에게 걸쳐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에 반해서 주변의 이방 민족들이 너희들을 유혹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착각해서 옷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도 뭐 괜찮은 존재인 줄 알고 원래부터 자기가 이러한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 줄 착각해서 세상 신을 따라가서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이야기가 에스겔 16장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유월절 어린양부터 해서 이미 이스라엘을 산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로 보는데 그걸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거의 죽어가는 자. 숨이 간당간당 넘어가는 자,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는 그런 순간에 주께서 자기 생명을 담아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 오늘 욥기 이방인 민족을 보게 되면 이건 뭐 본인을 몰라요.

어쨌거나 나는 양심에 비춰볼 때 나는 착하다는 겁니다. 거기 친구들도 마찬가지고요. 착한데 누가 더 착한지만 남아있지 착한 것은 변함이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다 같이 모여 반상회 하면서 서로 오케이 하고 동의한다고 하는 거예요. 동의는 네 맘대로 동의해요? 성경 로마서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2장에 보게 되면 14절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의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렇게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로마서 2장 5절에 보면 “다만 너의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 될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을 뿐이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지키지만, 율법의 정신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진노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어있고 이방인들은 아예 율법도 없고 기껏 있어 봐야 양심인데 양심 자체가 애초부터 썩을 양심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 진노의 날에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그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 하나님의 심판대에 나란히 그쪽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 진노가 뭐냐. 바로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에게 슬픈 소식이 되는 경우에만 그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이 실망하고 이제 자기에 대해서 믿을 것이 전혀 없음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바로 복음 때문에 기뻐지는 거예요. 그것을 표정으로 실험한다면 이렇습니다. ‘아휴...슬프다...슬프다...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어날 때 ‘헤헤’라고 하며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바보 등신같이 나를 왜 믿냐는 겁니다. 나를.

나에게 믿을 구석이 없다고 하면서 왜 자꾸 자기 자신을 믿느냐는 겁니다. 아무것도 희망이 없는데. 그러면 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떼놓고 양심과 양심에 대해서 호소하면서 내가 그나마도 괜찮고 건전하다고 따지면 바로 오늘 욥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됩니다. 욥을 통해서 인간의 딜레마, 인간이 어딘가 부딪쳤다는 거예요. 나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착해야 한다는 거예요. 무조건 착해야 해요.

나이 80 넘어서 감투 쓰려고 하니까 젊은 국회의원들이 ‘그건 노역입니다’라고 하는 거죠. ‘나야. 나. 킹메이커. 나 몰라?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라고 대답하니까 젊은 사람들이 ‘그게 바로 노역입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자기는 가치 있다고 하죠. 누가 뭐래도 나는 가치 있다고. 그러니까 그게 주제 파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이 싸움이 그거예요. 욥에게 고난이 꽂혀도 욥은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야기해 주세요.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라는 식으로 나오니까 엘리후도 답답하고 욥도 답답하고 친구들도 답답하고 다섯 명 다 모여서 답답한 거예요. 해답은 없지.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바로 이스라엘 자체를 멸망시키는 겁니다. 벌거벗은 이스라엘이 꼴딱꼴딱 죽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건진 것은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죽더라도 양심껏 죽지 말고 복음에 입각해서, 율법에 입각해서 제대로 죽으란 말이죠

죽어 마땅해서 죽는 거예요. 그걸 아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왜 살지? 이 꼴로 왜 살지?’ 할 때 사는 것은요, 성령과 성부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라고 살려주는 거예요. 그게 정답이에요. 욥은 정답을 모르지만 우리는 알아야 해요. 주님이 나에게 뭔가 덧입혀 주고 덧씌워 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함몰될 때 그때만 내게서 반복해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무너질 때 주님은 세워지는 겁니다.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한다는 원칙이에요. 주님과 정반대되는 나를 의도적으로 나와 동행하시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뭐 손해 볼 거 없어요. 무너져도 그건 마땅한 거예요.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율법 이야기가 로마서 3장으로 이어지면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라는 말씀에 딱 꽂혀버립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나의 골인 지점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 억울합니다. 내가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내가 천사도 아니고 그걸 좀 눈감고 봐주지 그것까지 갈구십니까? 이렇게 발악하다가 툭 부딪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라는 말씀이에요.

이거 들으면 인간은 또 오기가 생겨서 ‘그래그래. 나 죄지었다. 지옥 보내줘. 지옥 가면 되지’라고 되지도 않는 오기를 부리는데 하나님은 지금 그 차원이 아니고, 지금 네가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에게 영광이 안 되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위한 어떤 의미도 남겨둔 적이 없어요. ‘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지도 마.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하나님이 영광되는 쪽으로 원해서 하나님이 원해서 피조물 만들었지, 피조물이 자기 걱정하라고 만든 피조물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말을 했는데 ‘여러분 하나님 될래요? 피조물 될래요?’라고. 참, 답변 궁하죠. 피조물 같으면 자기 권리 다 박탈당해야 하고 내 속성으로는 지금 하나님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 된다고 하면 또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난처한 상황이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너의 본성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정리를 하세요. 복음을 위한 재료 거리, 요리할 때 찬 거리, 요리사가 요리 전에 생으로 가져오는 재료들, 그것들처럼 요리가 필요한 존재, 요리가 다 되면 한쪽은 천국, 한쪽은 지옥. 주님께서는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맛있게 잡수시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입혀지느냐 아니면 입혀지지 않은 존재냐, 이 세상에 피조물은 달랑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해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고생 안 하는 것이 이상하고 이 땅에서 죄 안 짓는 것이 이상하고 우리가 멸망 당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왜 당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어야 할 이유가 됨을 새삼스럽게 감사함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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