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
2021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욥기 34:10-15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34:11)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34: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34: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34:14)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34:15)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인간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엘리후의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자신의 의나 올바름을 내세울 수 없고 따질 수 없다는 겁니다. 곧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조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나름대로 고유권한은 인간에게는 내세울 입장이 못됩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욥의 문제점은 욥이 전적으로 자기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사람에게 ‘나의 문제’라는 것이 성립될까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분노와 화냄으로 세월을 보내는 이유는 자기에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에 항상 불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결국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만 더 궁극적으로 나아가보면 하나님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 성품이 모든 인간에게 이미 타고났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상대할 대상조차 못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이런 의도는 멈춰지지를 않습니다. 내가 만족하는 나만의 세계에 자신을 영원히 놓여 지내기를 소망합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욥에게는 고통이 찾아들었습니다. 이 고통으로 인하여 욥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릴지 감을 못잡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있을까요? 그것은 아직 자신이 죽지 않고 있다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안 죽고 살아있으니 뭔가 의미있는 활동에 자신이 해내고 있는 중이라고 여긴겁니다. 엘리후아 노골적으로 욥을 공박하는 그 현장에 만약에 다른 인간이 그 장소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뭐 어쩌라고?”
즉 내 쪽에서 하나님에게 할 도리를 다 했는데, 그래도 바라는 결과가 안 나온다면 더는 인간인 내 쪽은 책임은 아니다는 겁니다. 욥에 있어서는 다른 친구들에게 있어서 욥의 현재 모습은 인간의 한계요 인간으로서는 벗어날 없는 질곡이요 딜레마입니다. 엘리후가 다른 친구와 다른 점은 욥을 제대로 안다는데 있습니다.
욥은 망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망가진 자신의 모습이 영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엘리후는 말합니다. “인간이 장애자가 될 지언정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냥 논리상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 때문에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논리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욥이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욥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욥 본인의 말에 욥 본인은 안 나쁘다고 말하기 때문에 엘리후가 지적하는 겁니다. 욥기 34:5-9에 보면,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나게 사용하신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욥이 훌륭하다는 증명함이 아니라 욥도 마찬가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욥이 모르는 바는, 인간은 애초부터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안 망하는 경우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주어진 고난을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진토, 무기물이 되는 이유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반격하고 불만을 갖기 때문이랍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 본인이 측정하고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격을 인간에게 준 적이 없다고 보십니다. 인간들은 본인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고, 산 사람으로서 살게 된 이유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이 평가내리겠다는 본성이 작동합니다. 욥이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이 그동안 말하고 행했던 모든 것에 자신이 평가해 볼 때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욥이 이점에 자신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극한 고통을 주시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라고 받아들여야 마땅하다고 엘리후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마땅함이 없었다고 엘리후가 간주했습니다. 욥이 참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주도권을 본인에게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관한 해답을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찾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거사나 일상적 요소들 중에서 하나님 예배에 끼어들 수 있는 수 있는 요건이 성립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여인이 어떤 일상을 살았던 예배는 주님의 영과 진리에 의해서 성사됩니다. 요한복음 2:19-20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즉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구약의 욥은 인간이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가 하나님 일에서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46년간 지은 성전과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비교하십니다. 46년간 동안 지은 성전에는 인간의 노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해준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은 다릅니다.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 죽은 인간들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죽은 자들도 주님의 부활의 혜택을 입는 그 행위 자체에 있습니다.
이와 비숫한 이야기가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 상이 있는 인물인 다니엘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다니엘 6:22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디에게 부담갖지 않고 처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고 다니엘을 죽음의 세계로 보내려고 하지만 같은 무기물로 돌아갈 사자마저 입이 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사자도 죽은 자요 다니엘도 죽은 자입니다.
그 현장에 살아 있는 자는 천사들 뿐입니다. 바로 이 제대로 살아있는 산 자의 활동만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 역할을 위해 다니엘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로서 행세해야 합니다. 주의 일이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그 죽음의 순간만 진정 출발점인 것을 말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길에 더는 불말이나 불평이 없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1강-욥기 34장 10~15절(출발점)2111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4장 10~15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욥에게 엘리후가 이와 같은 조언을 할 때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뭐 어쩌라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라고 한마디로 끝내죠.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하면 ‘그래서? 그래서? 그러면 내가 어쩌란 말이냐?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야지, 연약한 우리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말라’라고 모든 인간은 내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가 엘리후가 보기도 그렇고 하나님 보시기도 그렇고 인간 내부가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안에 강력한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 요소가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 중이에요. 하나님께 분노하는 중입니다. 짜증 나는데 나름 애써 그것을 자제한다고 내 나름대로 힘들어 죽겠다는 거죠.
거기에다 나를 위로할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고 다그치기만 하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상처 입어서 미치겠다는 겁니다. 내가 상처 입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엘리후는 오늘 본문 15절에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무기물이다’라고. 여기 15절에 보면 “진토로 돌아간다”라고 나오는데 진토가 무기물입니다. 사람이 아니고 그냥 물질 덩어리죠.
사람들은 본인이 움직이는 조각품, 그저 재료 덩어리, 물질 덩어리라는 사실을 생각 못 하는 이유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불만 요소를 가진 세력이 우리를 부추겨서 ‘너는 살아있어. 너는 존엄해’라고 자꾸 우리로 하여금 간섭질 하는 하나님께 대들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습니다. 부추기고 있어요. 엘리후는 하나의 무기물이거든요. 과학적으로 말하면 분자 덩어리, 원자 덩어리죠.
분자 덩어리, 원자 덩어리는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다는 말은 살아도 죽은 것이고 움직여도 그저 무기물이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남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러한 무기물, 물질 덩어리를 서로 상대하면서 ‘나를 위로해달라. 나만 살아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고 후원해달라’는 이런 식이에요. 여러분들은 사람이 사람을 상대한다고 하잖아요.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를 상대해요. 바이러스 앞쪽에 축구화 밑창에 뾰족하게 스파이크 튀어나온 것처럼 32개의 변이 스파이크가 튀어나와 있어요. 그러면 마스크 생각하지 말고 누구를 붙잡아서 따져야느냐 하면 그 남아공 변이 바이러스를 붙잡아서 따져야 해요. ‘너 때문에 지금 우리 놀러 못 가고, 해외여행도 못 가고 답답해 죽겠다’라고 그 변이 바이러스에게 못 따집니까?
변이 바이러스는 생물이 아니고 무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기물인데 인간을 괴롭게 한다고요. 분명히 죽어있는데 그 죽어있는 재료 덩어리가 움직이니까 인간은 살아있고 바이러스는 죽었다는 구분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의학이고 과학이고 전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병 안 걸리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질문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는 무기물인데 왜 오늘도 움직이느냐?’라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죽은 자가 왜 죽은 음성을 듣고 죽은 자가 왜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깨닫게 됩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에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게 어느 정도 기적이냐 하면 스파이크 32개 갖고 있는 RNA 변이 바이러스가 졸지에 2시간 만에 사람 된 것과 똑같아요. ‘바이러스 너, 사람 되기만 해봐라. 우리 괴롭혔으니 죽여 버릴 거야’라고 대번에 나오죠.
‘나는 변이 바이러스입니다. 나는 남아공에서 새로 시작된 바이러스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처럼 나오면 사람들에게 환영받겠어요? 마스크 쓴 사람 우르르 달려들어서 아마 밟아 죽일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괴롭다’ 그러면 그 바이러스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너는 산 적이 없어. 왜냐 하면 너의 핵심은 무기물이 너의 핵심이기 때문에. 너의 핵심은 살아있음이 아니고 죽어있음이 너의 핵심이야. 나는 RNA지만 너는 DNA야. 똑같이 죽어있는 물질 덩어리야’
참, 이 이야기를 여러분 생일날 듣지 말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들어야 실감 나는데 우리가 언제 죽을 줄 모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언제 죽을 줄 모르니까. 그래서 엘리후가 욥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뭔가 모를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진토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 왜 저를 만드셨습니까?’라는 이제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예배를 누가 드리느냐.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겁니다. 이거 아는데 애먹었습니다. ‘인간 너는 빠져’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려요. 왜냐 하면 하나님만이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끼어들지 말고 쫓겨나야 해요. 그게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예배하는 자는 자기의 과거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다섯이든 여섯이든 그거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네가 남자 다섯 명, 여섯 명 사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죽었다는 사실이 내가 너를 사용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거예요. 네가 죽어있다는 사실. 아무도 산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살아있는 주님이 거기에 도달되면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살아있느냐. ‘나는 왜 흙이 되지? 나는 왜 흙이 될까?’ 주님께서 인간이 태어나게 하는 것만이 주의 일이 아니고 결국 흙이 될 자를 계속 살려주는 것도 꽉꽉 알차게 결국 주의 일만 고스란히 거기에 꽉 들어있어요. 주의 일만.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후라이팬 위에 아이스크림 놓고 실험하듯 하시는 거예요. 후라이팬 위에 아이스크림 모양 그대로 있을 때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온도 올라가면서 아이스크림이 전부 다 녹아버리고 바닥에 붙다가 증발해서 없어요. 그러면 아이스크림 나는 뭐가 이익이냐고 하지 마세요.
그동안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것을 없게 만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흡족하신 거예요. 이게 레위기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죽었던 양의 죽음과 결합해서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하나의 파스타같은 자기 음식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피조물로써 그 정도면 정말 영광인 줄 알아야 해요.
주님께서 흠향하시는 음식이 되는 것이 영광이죠. 그러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율법이 찾아오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욥은 율법이 없어요. 율법이 없는데 율법적 기능을 하는 게 뭐냐. 욥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고난이 찾아오니까 율법적 기능이 발휘되니까 뭐냐 하면 욥은 그동안 자기 존재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이 들통난 겁니다.
내 존재, 내 결정, 내 판단, 내 약점, 내 장점이 뭔지 온 정신이 자기는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치고 여기서 내 삶에 나만의 의미를 계속 살려보려고 애쓴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여기에 정신 팔려있는 것을 한꺼번에 완전히 무너지게 한 것이 난데없는 고난으로 온 고통스러운 병의 침입이었고 공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욥의 고난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을 과도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34장 5~9절에 보면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라고 되어있어요.
엘리후의 평가에 의하면 욥은 자기 생각에 몰두하니까 하나님이 내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그 점에 대해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이상 알 게 없을 정도로 의롭다는 자기 경계선을 쳐버린 거예요. 이거는 어떤 영역 싸움에 있어서 내가 여기서 완전하게 범죄 없이 깨끗하니까 여기는 내 자리로, 내 영역으로 접수했다는 겁니다. 고요한 영역으로. 그러면 누가 추방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낄 자리가 없고 결국 나 잘남으로써 하나님이 추방되고 쫓겨난 모양새죠.
결국 엘리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욥을 택하여 병을 준 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욥을 통해서 제대로 말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우리 모습이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을 택하느냐 하면 고통을 주되 이유 있는 고통을 주는 하나님 같으면 상대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고통을 줄 때 내가 문제 있고 이것을 수정하게 되면 하나님이 고통을 다시 면제해 주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나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서로 통하는 사이라고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체가 내가 죽은 존재가 아니고 살만한 가치가 있음이 증명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럼 모든 문젯거리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문젯거리네요’라고 하실 텐데 바로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문제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내가 문제구나’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다면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나오죠.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내가 나에게 문젯거리 된다는 그 자체가 내 본성에 의해서 그것이 짜증 난다는 거예요.
나는 잘나게 있어야 하지 못나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또 얼마나 자기가 몰랐던 그동안의 한계를 보여주는지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불교에서 탐심을 없애라고 하잖아요. 내가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불교의 진리는 나만 탐심 갖고 남들은 탐심 갖지 말라는 뜻이에요. 남들이 탐심 가져서 내가 사는데 힘들어지니까 탐심을 내도 나만 탐심을 내야지 남은 탐심 내면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만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양이 둘 될 수가 없잖아요. 이 세상에 태양이 둘 될 수 없듯이 최고자는 나만이 최고예요. 그러니 불교나 욥이 하는 이런 주장이나 전부 다 똑같은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합니다. 욥이 있는 이유는 바로 4~9절에 말한 것처럼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결별된 상태이고 망한 상태라는 거죠.
잘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이 친구야~제발 좀 정신 차려라. 네가 잘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이 애초부터 망했다는 거예요. 그걸 왜 못 믿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어차피 죽을 거 죽을 때 죽는 이유는 어차피 죽으라고, 망하라고 태어난 거예요. 원래 하나님께서 일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면 인간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본래 모습이 뭐냐 하면 흙입니다.
그러면 인간 사는 것이 뭐냐 하면 흙 안 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마스크하고 백신 맞고, 또 맞고, 이제는 부스터 백신까지 세 번 맞고, 세 번 안 되면 네 번 맞을 거예요. 나중에 노인네들 요양병원에 가보면 팔뚝에 온통 부스터 백신 맞은 자국들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보시는 내 모습과 내가 보는 내 모습이 틀려도 너무 틀려요. 그냥 나는 망하는 것이 내 사명이다. 좀, 이렇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망하는 것이 우리 사명이고 우리 임무입니다. 이게 얼마나 쉽습니까.
이게 굉장히 쉬운 일이거든요. ‘자, 오늘은 또 뭐하다 망할까?’라는 이게 얼마나 쉽습니까? 티비를 자주 안 보는데 보면 자꾸 짜증이 나서 안 보는데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탤런트 김혜자를 보고 국민 어머니, 또 뭐, 국민 아빠라는 말을 하는데 세상에 흙을 보고 국민 어머니, 국민 아버지라는 말이 기가 차서. 국민은요, 국민 가수밖에 없어요. 그것도 김유하밖에 없어요.
왜 7살 먹은 아이가 그렇게 좋으냐 하면 남에게 위협이 안 됩니다. 할머니들이 자식은 안 좋아하는데 손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양육 부담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양육 부담이 덜하면 내 존재에 위협이 안 돼요. 인간은 망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가 망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망하게 만들어 놓고 네가 망하는 이유는 신도 아닌 것이 자꾸 살았다고 오해를 하는 그것이 네가 망하는 이유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스크림처럼 만들어 놓고 후라이팬 위에서 다 녹여버리시는 거예요.
녹아가는 과정에서 주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주님의 사람이에요. 그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 망하는 즐거움이. 교회 하는 것도 욕심이고 탐심이에요. 정말 자기가 무기물처럼 된다면 어떤 은혜를 받으며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기차가 막 터널을 확 들어갔을 때 갑자기 공기의 압력 차이로 모든 것이 먹먹해져요. 먹먹해질 때 자기 자의식이 없어져요.
최고 아닙니까?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뭐 자식 걱정이고, 믿음이 어떻게 되고, 성화 되고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먹먹해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좋겠는데 기차를 자주 안 타니까 일어날 일이 많지 않지만. 사람이 먹먹할 때 자신의 개성이 사라지고 특징도 따질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생각할 때 톡 쏴야 하거든요. 톡 쏘니까 그때부터 자기가 마치 영원히 살아야 할 것처럼 톡 쏘는 가시를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전부 다 찌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주일학교에서 이야기하듯이 인간이 범죄 하는 이유는 자기 결정과 자기 판단이 오류가 있었던 것에 대해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올라오면서 그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가게 하시는 분들 손님을 보게 되면 두 종류밖에 없어요. 통닭집이라고 하면 기분 좋게 오는 사람과 기분 더럽게 인상 구기고 들어오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밖에 없어요.
교사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 얼굴 보면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화내면서 들어오는 아이와 기쁘게 들어오는 아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인생 전체가 분노하며 살아간다고. 그 분노를 왜 하느냐면 나는 분명히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모든 선택과 결정이 내가 봐도 잘못된 선택이에요. 이거는 뭔가 박하사탕처럼 뭔가 터트려야 하거든요.
터트리는데 그 터트릴 때를 찾는 거예요. 자기 원통과 절통과 분통함을 찾기 위해서 남들에게 퍼붓는 겁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면 우리 주님이 아시거든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남에게 대접받는 대로 네가 대접하라”라는 이 말씀이 인간에게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화내고 있는데 뭘 대접해요. 선택 중에서 제일 잘못된 선택이 배우자 잘못 만난 선택입니다.
그러면 이미 선택을 했는데, 이미 해버렸고, 태어나버렸는데 어쩌라고? 태어나서 이제 살겠다고 내 본성이 그런데 지금 와서 어쩌라고 어떻게 해결책이 있느냐. 엘리후는 신약을 잘 몰라요.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께서 뭔가 일 하실 거라는 그 정도만 이야기해요. 엘리후도 잘 몰라요. 하나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엘리후가 의미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느냐를 드디어 신약에 가면서 확실히 알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장소 문제입니다. 이건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거든요. 특정한 장소를 마련해서 그 장소에서, 그 장소를 ‘예수 안’이라고 하는데, 그 장소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들었는지가 나옵니다. 제가 요한복음 2장 16절을 읽어볼게요.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있고 요한복음 2장 19~2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한복음 2장 21절에 계속 보면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해서 예수님의 자기 육체가 나와요. 이 육체만이 생명이 있는 육체고 이 육체만이 살아있는 육체이고 그 외에 육체는 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기물입니다. 바이러스 같은 존재예요. 죽었는데 움직이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이것이 뭐냐. 주님께서 어떤 장소를 자기 육신으로 장소를 제공합니다.
그 장소에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투입되느냐 하면 죽을 죄인으로 그 장소에 기여하게 돼요. 그 장소를 형성하는데. 우리가 죽을 자로 투입될 때, 내가 죽어 마땅한 자인 것을 알 때 이미 우리는 성전화 된 거예요. 성전화. 죽어서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죽는다고 들어가는 순간 죽어야 하겠다는 그 고백이 그리스도 성전 만드는 하나의 벽돌로 이미 참여하고 있는 거예요. 죽어 마땅함으로.
사람이 죽을 때도 백 년 살다 죽었다, 90년 살다 죽었다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죽는 순간에 인생 살아왔던 모든 것이 10년이 되었던, 20년이 되었던, 그게 전부다 휘리릭 다 날아가 버리니까요. 처음부터 인간은 죽음이 마지막 결승선이 아니고요, 죽음이 출발점이에요. 우리는 반대로 거꾸로 살고 있어요. 우리는 출발점을 향해 가고 있는 거예요.
욥이 이걸 알 리가 있습니까. 엘리후도 잘 모르죠. 물론 구약 후반부에 들어가면 구약에 그 점이 좀 나와요. 다니엘 6장 22절에 보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거든요. 그 당시 다니엘이 다리오왕 때 다른 신하들의 시기 질투를 받아서 잡혀 들어갔어요. 기도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도해서 사자굴에 들어갔단 말이죠. 사자굴에 다니엘이 들어갔을 때 다니엘이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구약 사람이지만 약간은 신약적 요소를 다니엘이 안에 품고 있어요. 벽돌 색깔이 ‘나는 살아있다’에서 ‘나는 죽어있잖아’로 바꾸는 그 변색하는 지점에 다니엘이 있는 거예요.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사자 굴에 들어갔잖아요. 이미 본인은 들어갈 만해서 들어간 거예요. 왜냐 하면 죽었으니까. 죽은 인간이 사자굴 아닌 어딘들 불 속이라도 이미 죽은 인간이 못 들어갈 곳이 어디있어요.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장소를 무서워합니까? 여기는 변소라 냄새나서 싫다고 합니까? 무기물이 못 들어가는 곳이 어디 있어요. 다 들어가죠. 왜? 죽었으니까요. 살려고 하니까 주춤하고 따지고 요령 피우고 하지 죽은 인간인데 뭔들 못해요? 죽은 인간인데.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통제지휘소 머리통 날아갔다고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대 있으면 됐지 내가 왜 있어야 하죠.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사람들 생각에는 사자가 와서 다니엘 몸을 뜯어야 하는데 22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라고 나와요. 사자도 이게 무기물이에요. 자기 맘대로 안되고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다고요. 사자가 입을 봉했어요. 마치 틀니를 한 사람이 틀니 뽑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므라들죠. 장차 내 모습일 수가 있는데 사자 입이 오므라들었어요. 봉해서. 바보 같아요.
사자가 먹으라고 해도 안 먹어요. 천사가 하나님의 일로 개입되니까요. 그러니까 사자도 죽었고 다니엘도 죽었고 살아있는 것은 천사, 천사뿐이에요. 천사는 살아계신 주님의 지시를 받으니까 살아있어야죠. 이 천사같은 기능, 천사가 보는 안목, 이게 바로 다니엘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그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그것이 종말이에요.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이미 죽어있으면서 산 것을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주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먹먹해야 해요. 왕왕왕 하면서 먹먹해야 해요. 무슨 일 있어요? 먹먹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몰라도 상관없는 그야말로 자기로부터 벗어 났을 때의 먹먹함. 주께서 이끄는 대로. 이 특수한 장소가 뭐냐 하면 주님이 알아서 다 해주는 장소, 여기에 우리가 참여한 겁니다.
엘리후가 호되게 욥에게 나무랍니다. 너는 너밖에 모른다고. 너밖에 모르니까 그 결과가 그 꼴이 뭐냐. 결국은 너로 인해, 너 하나 살리겠다고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하나님은 나빠, 하나님은 나를 잘못 알았어, 내 쪽이 옳지 하나님이 옳은 것이 아니야’라고 욥이 이런 말 한 적이 없는데도 엘리후가 보기에는 그런 결과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이 그렇게 된 거예요.
단지 ‘나는 살아있다. 제대로 살자’라는 이것밖에 생각 안 하는데 결과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다시 우리가 먹먹해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저 세상 탓하고 남 탓하고 그것이 하루 일과 일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분통 터트리고 화 안 내는 것처럼 화내면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 아닙니까. 주여, 오히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신기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주님의 성전 재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