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916a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절-4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가 사도죠. 그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과 동일하게 받은 사람 맞지요?”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우리가 고기 잡는 보통 사람인데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경로, 똑같은 절차를 밟는 분들 계시지요?”라고 물으면서 이 편지를 날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베드로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이 사도가 되는 것과 똑같은 경위를 밟은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편지 받은 사람이 ‘그것은 뭐 사람이 할 수 없지. 하나님이 하시지.’ 라고 궁시렁 궁시렁 뭐 ‘나도 이제 5년 됐는데 10년 되면 뭐 변화 있겠지.’ 이렇게 하겠죠. 그런데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의 신기한 능력”이 나오죠, 신기한 능력.
지금 사도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사도된 것이 신기한 능력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것 받았죠?”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사람을 모욕주고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동네에 교회 있어서 재미삼아 교회 다녔습니다. 지금 이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교회 다니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훌륭하게 신앙생활 했냐를 묻는 게 아니고 레벨이 어느 정도 레벨이냐 하면 “신기하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하실 자신이 있어요?” 라고 묻는 거예요. ‘신기한’ 능력이에요, 신기한 능력.
쥐나 개나 다 할 수 있는, 인간이 연습하면 되는 것 말고요. 인간이 연습하는 것 말고 신기한 것. 신기하다는 말은 예측 불가, 예상 불가죠. 예측 불가, 예상 불가가 신기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예측하고 누가 예상합니까? 내가 예측하고 내가 평소에 예상하잖아요. 그러면 신기하다는 것은 무엇을 완전히 박살내는 겁니까? 거덜내는 겁니까? 신기할 게 없는 나를 신기함이 이 ‘나’에게서 나오는 예상과 예측을 그냥 묵사발 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능력’이에요.
그러니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3절만 내려가도, 그냥 내려가는 것은 아무나 내려가지만 제대로 보고 내려가게 되면 쭉 내려가다가 중간에 턱턱 걸리는 턱 같은 게 있어요, 턱 같은 게. 빠찡코라는 게 이런 건데 중간 중간에 장애물들이 있고 구슬이 위에서 내려와요. 내려오면서 턱, 턱, 턱, 턱 걸리는 거예요. 걸리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빠찡코 구슬이 본인한테 안 떨어져요. 엉뚱한 곳에 툭 떨어지는 거예요. 그 곳에 툭 떨어진 게 누구냐 하면 베드로거든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으로부터 신기한 능력, 여러분들 받았어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건 완전히 약 올리는 거예요. 약 올리는 겁니다.
방금 제가 구슬이 떨어진다고 했죠. 이 구슬에다가 베드로를 집어넣어봅시다. 그 다음 구슬 말고 베드로 당신이 한번 떨어져 보세요. 베드로가 떨어지면서 툭, 툭, 툭, 툭. 장모 병 낫기, 물 위를 걷기, 뭐 툭, 툭, 모조리 그 모든 경로가 무슨 능력이다? 나의 예측과 예상하고 전혀 관계없이 신기하다는 능력으로서 현재 베드로가 사도가 되었는데 이 경로와 동일하게 밟아온 사람이 여러분 맞죠? 라고 베드로후서라는 편지를 보낸 겁니다, 편지를. 사도의 편지가 이제 슬슬 짜증나려고 하죠. 뭐 편지도 좋게 좋게 안하고 이게 뭐에요? 완전히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 신기한 능력 중에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 그 신기한 능력이 연속되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무슨 단어냐 하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교묘하게 소설 쓴 게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이것과 같은 의미가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옵니다.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해당되고, 베드로는 “우리가 공교하게, 묘하게, 속아 넘어갈 만하게 각본 짠 게 아니요” 그냥 능력 받은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17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절에,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이게 지금 여러분들이 들어보니까 바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 산 이야기죠.
지금은 다볼 산 (Mount Tabor)이라고 하는데 그 변화 산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때 누가 있었느냐 하면 3인방,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직접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어제 수요설교에 의하면 ‘주님이 계시는 현장’이에요, 주님이 계시는 현장.
그런데 평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자기 현장이 있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있잖아요. 눈에 뭐 보이는 대로 들어오죠, 이 현실은. 그 현실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기존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잠시 옮겨간 거예요. 그것을 방금 제가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신기한 능력. 이거 뭐 인간이 통용하는 단어와 의미는 전혀 먹히지를 않죠.
여기서 강의의 공식 하나 냅시다. 공식 하나 만들겠습니다. 간단한 공식이에요. ‘모든 의미는 의미 없다.’ 공식입니다. 게임 끝났어요. 모든 의미는 의미 없습니다. 어떤 시선에서? 신기한 시선에서. 신기한 능력의 입장에서 모든 의미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울고 불고 난리치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나는 요새 매일 짜증이고 매일 화난다. 지금 어디에 얽매이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자기가 의미를 지금 뿌려놓은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공교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신기한 능력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사는 게 변화 산입니까? 아니죠. 아침에 뭐 빵 먹을 때 갑자기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변화되었어요? 아니죠. 앞에 있는 남편 얼굴이 뭐 해같이 빛났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러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간단하죠. 그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네가 아는 세상의 현실로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철칙입니다.
강의 다시 해볼까요?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하고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다들 받으셨지요? 그것은 신기한 능력으로 받으신 것 맞죠?” 라고 할 때 그게 신기함에 해당되려면 내가 하는 평소의 행동이 신기함에 침입되거나 들어갈 수가 없어요. 오히려 깎아내야 될 대상들이죠.
그런데 우리 인생은 뭐 이렇게 예수 믿는다, 복음 안다, 복음 이야기하다 보면 한 두 시간씩 이야기하면서 얼굴에 인상은 혼자 다 찡그리고 있어요. 신기한 능력으로 기뻐해야 되는데 기쁨은 없고 감사도 없고 그냥 짜증내면서 내가 아는 복음은 이 정도입니다, 그거 뭐 배틀하나 자랑질 하나...... 그것은 여러분의 앞길에 여러분이 압침을 뿌려놔서 그래요.
지가 뿌려놓고 아야아야아야. 지가 뿌려놓고 밟고서는 아야아야아야, 난 왜 걱정, 근심이 많습니까? 그거 누가 뿌려놓은 거예요, 압침을? 그 때 뭐라고 합니까? 다 네 탓이야. 세상 탓이고 문재인 탓이고 저 김정은 탓이고...... 전부 다 자기 탓이에요! 그 ‘자기 탓’이라는 말을 제가 바꾸겠습니다. 이게 뭐냐? ‘의미 탓’이에요, 의미 탓. 기존에 있는 의미는 의미가 없어요. 없는데 그 의미에 맞춰 살려고 애를 썼다는 거예요, 맞춰 살려고.
왜 의미 없는 그 의미에 맞춰 살려고 하느냐? 맞춰 살 때, 나는 남들을 통해서 ‘내가 사람이다.’ 라고 규정받고 싶은 거예요.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지, 맞지? 자꾸 남한테 묻는 겁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서 내가 사는 정답을 얻으면서 우리는 자꾸 끌어 모으고 있어요. 확보하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는데 임신해서 아기가 태어났잖아요. 태어났을 때 애가 일주일 만에 시름시름 앓아요. 자꾸 아파요. 죽어가고 있단 말이죠. 그 때 다윗이 금식을 했거든요. ‘하나님, 봐주세요. 저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 죄 때문에 태어난 아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회개하고 내가 알아서 참회할 테니까 저 아무 죄 없는 아이만큼은 살려 달라.’ 라고 했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 아이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일주일 만에 죽었죠. 기억 안 나요?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다윗이 1번, 대성통곡했다, 아니면 다윗이 싹 표정을 바꿔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번입니까? 아무렇지 않죠. 왜냐하면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이 아버지로서 내가 죄인이어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다윗 내가 책임지겠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의미도 없는데 그 의미 없는 것을 내가 책임지는 아버지이고 싶은 거예요. 내 잘못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무의미라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예요. 그게 죄가 된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예요.
제가 지금 책을 쓰고 있는데 수련회 강의 시간에도 얘기했어요. 다윗 언약은, 다윗에게 준 언약은 누구를 제거하느냐? 다윗을 제거합니다. 이것은 부산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어요.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을 제거하고 이삭 언약은 이삭을 제거하고.
이삭 언약이 이삭을 제거한다는 말은 이삭을 바보로 만들었다는 거죠. 자기 아들한테 속아 넘어갔어요. 자기를 속이는 아들이 정통 계통을 이룹니다. 이게 말이 돼요? 안 속인 아들은 정식 하늘의 약속의 계통이 아니에요.
한번 따져보세요, 논리로. 아버지를 바보로 만드는 아들이 하나님께서 점지한 진짜 아들이다. 이것은 결국 아버지의 가오, 아버지의 자존감, 자존심, 그 거짓말하는 야곱 앞에서 이걸 챙길 수 있습니까, 못 챙깁니까? 못 챙기죠. 못 챙기는 그것을 신약에서 ‘자유’라고 이야기해요.
자유란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안 챙기게 하는 게 자유이고, 자유가 아닌 것은 챙길 필요도 없는 것을 챙기는 것이 바로 속박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속박, 허무에 대한 속박, 종속됨, 노예가 됨, 바로 왕의 노예 되듯이 노예가 됨,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해드릴까요? 자유란 속박될 필요 없는 것한테 속박 안 되는 것. 바보 등신 같은 짓은 속박될 필요도 없는데 거기에 자진해서 속박되는 것.
이 세상은 신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아니, 목사님 모든 것,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신기한 주의 뜻인데. 다 하나님의 기적이죠.” 라고 이야기하실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현장감 속에는, 인간은, 인간의 현실은요, 하나님이 주신 봄, 여름, 가을, 겨울, 꽃잎 이런 걸 따지는 게 아니고 내게 와서 내게 의미가 되는 요소만 그것을 꽃다발로 만들어서 그걸 바로 나의 삶의 현장감이라고 이렇게 뭉쳐요. 뭉친다고.
그래서 열 살 때 현실감 다르고요. 열두 살 때 현실감 다르고요. 스무 살 때 현실감 달라요. 지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만들어서 의미 꽃다발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지가 만들고 지가 그 안에 종속되고 속박되고 그것 때문에 울고 불고. 책임진대. 맨날 책임지겠대. 책임지는 인간이 그래 죽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네가 평생 책임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더냐 이 말이에요, 무슨 소용이 있더냐. 어머니, 효도해드리겠습니다. 해놓고 아들이 먼저 죽어버리고 뭐 이런 경우 있잖아요. 효도 받을 생각했는데 먼저 죽어버렸어요. 술 먹고 감기약 먹고 먼저 죽어버렸어요. 합병증 일어나가지고. 그것도 멀리 외국에 나가서. 기가 차죠, 부모로서.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데, 아들인데.
베드로후서 내용이 뭡니까? 물으면 베드로후서 내용은 신기한 능력들의 카탈로그, 항목들, 쭉 나열된 항목들이에요. 5절에 한번 봅시다.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게 전부다 신기한 능력에서만 나온 거예요, 신기한 능력에서. 우리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신기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하느냐. 7절에,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예를 들면 이 7절 같은 본문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본인이 남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본인이 타인을 사랑하려고 해요. 이래놓고 베드로후서 1장 7절을 지켰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의미 없는 의미에 종속되어 있고 책임 없는 책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아, 지금 이해했는지, 내가 잘못인가 하는데 쉽게 갈게요. 인간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성도 자체가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이에요. 자기가 사랑인 것을 알면 그 의미는 신기한 능력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신기하지 않은 사랑은 내가 해야 돼요. 내가 하고 자꾸 물어봐야 돼요. 자꾸 물어본다고요. “오늘 설교 어땠어요?” 자꾸 물어본다고. 이거 뭐 무슨 답변을 원하는데? “참 잘 했어요.” 그런 답변을 원해요? “오늘 강의 어땠어요?” 그걸 왜 묻는데?
미장원에 갔다와놓고 남편한테 물어요. “뭐 달라진 거 없나?” 니 미장원 갔다 왔는데 내가 꼭 그걸 찾아내야 될 의미, 책임이 뭐 있어요? “뭐 달라진 거 없네.” 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관심이 0도 없다는 뜻이야. 오늘 밥 없다. 너 알아서 라면 끓여먹던지 니 마음대로 해라.” 남편한테는 아내 머리 스타일 바뀐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없는데 아내가 일방적으로 자기가 종속된 의미를 강요해놓고 거기에 협조 안한다고 아주 저주를 해버린다고요.
이게 무슨 사랑이고 이게 무슨 경건이고 이게 무슨 형제 우애고 이게 무슨 절제입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내 의미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여기 나오는 베드로후서 1장에 믿음, 절제 이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 상관없어요, 이것은.
그러면 내가 사랑을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원천이 뭡니까? 그 매카니즘, 그 과정은 어디서 나온 과정입니까? 물으면......야, 이거 베드로후서 결론 부분을 벌써 이야기하면...벌써 이야기하자. 내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합시다. 주님이 주님한테, 하나님이 주님한테 토스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연락해요. 우리는 뺀다니까요.
모든 성경의 의미는, 우리의 의미는 일체 인정 안하고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연락 취할 때 발생되는 그 의미만 하나님께서 받아줘요. 우리는 “나가.” 하고 그냥 이탈시켜버려요. 주의 일에 자꾸 끼어드는 것을 이렇게 배제해버린다고요.
오늘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신기한 능력부터 시작했거든요. 제가 분명히 신기한 능력이라 했죠? 그 신기한 능력이 뭐냐 하면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 산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가 봤다는 거예요. 그럼 베드로가 봤다는 것은 능동입니까, 수동입니까? 수동이죠.
지금 눈 반짝반짝해서 잠 안 올 때 빨리 이야기해버려야겠다. 자, 마태복음 17장에 변화 산입니다, 변화 산. 변화 산 이야기죠. 변화 산은 공간이죠, 특정 장소죠. 평소에 뭐 변화 산 등산 안 해봤겠습니까? 뭐 높이는 내가 가보니까 한 500m도 안 돼요. 차 타고 올라가니까 15분 만에 올라가던데 이 변화 산에 갔을 때 갈 때마다 변화됩니까? 아니죠. 변화 산은 특수한 공간이죠, 특수한 공간. 특수한 공간이잖아요, 변화 산이. 특별한 공간이죠. 이 특별한 공간에서 신기한 능력이 나온다면 이 공간은 위에서부터 주셔야 돼요.
이런 원리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제가 3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요.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보고 하신 말씀인데 굉장히 교묘해요, 이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공간 문제잖아요, 공간 문제. 그럼 아담이 있는 곳에 아담이 있겠죠. 그 아담이 있는 공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합류한 공간,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찾아올 때 아담은 기존의 공간 말고 하나님이 찾아 들어오신 새로운 신기한 공간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변화 산이에요. 야고보, 요한, 베드로 데려와 가지고, 가자. 그러면 몇 명 올라갔어요? 야고보, 요한, 베드로 세 명에다가 +1, 예수님 이렇게 네 명 올라갔죠. 올라가보니까 몇 명 있었습니까? 여섯 명이죠. 올라가보니까 거기에 엘리야도 있었고 모세 있었잖아요. 네 명이 올라갔는데 이 네 명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보기에 현장이에요, 자기의 현장. 인간의 현장에서는 카운트가 되니까. 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예수님, 딱 네 명 올라간다. 분명히 자기는 네 명으로 알고 있어요. 이게 베드로 세계의 의미입니다.
의미인데 틀어버리죠. 이 의미를 틀어버리고 여기서 두 명이 추가가 되는 겁니다. 엘리야와 모세. 그러면 추가가 되면서 아, 추가가 됐구나. 이렇게 되지를 않죠. 나의 카운트, 베드로의 카운트가 뭐가 됩니까? 일절 부정당해요. 너는 의미도 없는 곳에 네 의미를 고집했다. 신기한 능력이 찾아오기 전에 네가 먼저 성급해서 나는 진리를 안다. 라고 너무 성질이 급해버렸어요.
아담은 어디 있느냐. 아담은 지 있는데 있겠죠. 그러나 아담으로 하여금 ‘제가 어디에 있습니다.’ 를 보통 아담의 이웃사람, 그 때 아담에게 이웃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담의 이웃사람이 “아담, 어디 있어요?” 하면 “나 여기 있어요.” 이 의미, 인간들의 현장감에서 있는 의미, 인간들끼리 소통되는 그 의미의 세계 있잖아요, 언어의 세계, 그것하고 비교해서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을 때 아담은 이렇게 답변해야죠.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죠. 그런데 그 유사한 답변으로 아담이 이야기한 게 뭐예요? 여러분들이 아시잖아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아담의 답변은 뭐였습니까?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그럼 이웃사람이 아담보고 “아담, 어디 있어요?” 이야기하면,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라고 합니까, 안 합니까? 다 같이 벗은 입장에서 숨을 것도 뭐 없잖아요. 그렇죠? 답변이 다 다르죠?
“고기 잡는 베드로가 이런 새로운, 주님이 추가적으로 주신 그 의미 속에 의미의 장 속에 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나처럼 된 사람 혹시 있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내가 지금 고함 질러서 경찰, 동사무소에서 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집회 한다고. Calm down, calm down. Relax, relax.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것과 만남으로만 거기서 의미가 생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전달할 때 그 의미는, 인간 세계에서는 의미가 발생되지 않고요, 아버지가 아들 되신 예수님과 연락하면서, 연락, 약속이죠, 약속을 이루었을 때 발생되는 그 의미 있잖아요, 그 의미만 하늘 나라에서 받아줍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그 의미에는 무엇이 들어있냐 하면 감사하게도 주께서 일괄 책임졌다는 내용이 거기에 담겨있어요. 아, 이거 복음 아닙니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 여기 경건, 형제 우애, 절제, 인내, 사랑,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런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날아다니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종이 접어서 비행기 날릴 때 “아들아, 간다.” 하고 아버지가 탁 뿌릴 때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고 받을 때. 이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잖아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내가 포착한다. 포착이라는 말은 없지만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내가 끝까지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이것이 내 뜻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이 종이 비행기로 비유되죠. “간다이~” “예~ 주신 것만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성도는 뭐냐. 주님의 의미를 실어 나르는 결과물이죠. 이 세상의 의미 말고 다른 의미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징조로서 등장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게 사도 베드로고요.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존재 가치가 막 업 되지요? 잠깐 물 한잔 마시고요. 지금 너무 신기해서 제가 놀라겠습니다.
자, 책임은 없습니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책임을 져버리면 지상에 통용되는 나의 의미가, 이 더러운 의미가 감히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의미를 훼방질하는 거예요.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여기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이 뭐냐. 날아다니는 나에다가 이름을 ‘믿음’이라고 쓰고 ‘덕’이라고 쓰고 ‘지식’이라고 쓰고 ‘절제’라고 쓰고 ‘인내’를 쓰는 거예요. ‘경건’을 쓰는 거예요, 내가. 날아다니는 종이 비행기라고 했는데 이것을 좀 고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고상하긴 고상한데 이게 어려운 단어가 되어가지고...... ‘사라지는 매개자’. 어렵죠? 사라지는 매개자.
이것을 화학용어로 이야기하면 ‘촉매’. 촉매가 더 어려워요. 촉매라 하는 것은 화학반응에 본인은 끼어들지 않으면서 협조만 하고 빠져버리는 것을 촉매라 해요. 협조만 하고 빠져버리는 것. 일종의 중매쟁이죠. 물론 중매쟁이가 중매 서려다가 지가 소개한 남자하고 결혼하는 중매쟁이도 있다만 그런 건 특수한 경우이고 자기는 빠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건질 자를 건지고,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건지고, 자신은 승천해서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리 성도도 이 땅에서 사라지기는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결국 죽으니까. 죽으면서 성도가 존재하는 그 존재가, 또 어려운 것 하나 합시다, 성도가 존재하는 그 존재가 공간적이고 영역적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할 때 ‘아담이 거룩하지 않다’를 아담 자기 입으로 발설했어요. “나는 벌거벗었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숨죠. 인간은 자꾸 숨어요. 같은 인간한테는 안 숨는데 하나님이 등장하면 숨어 버린다는 말은 처음 만든 인간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뭔가 비정상이 됐다 이 말이죠. 숨어버리니까.
아들이 시험치고 난 뒤에 자랑질 할 때는 엄마 오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어요, 자랑질 하려고. 그런데 지금은 시험이 없지만 옛날에는 시험치고 난 뒤에 성적표가 나올 때는요. 자꾸 엄마 얼굴에 안 띄고 싶어요. 띄면 ‘가만있어보자. 아들한테 내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꾸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예 안 띄는 거예요. 띄었다 하면 “참, 오늘 성적표 나왔지. 성적표 한번 보자.”, 성적에 자신감이 없으면 숨어버려요.
왜 숨습니까? 자, 이게 문제에요. 왜 숨습니까? 나의 의미를 남한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견지하고 유지, 지탱하기 위해서. 나의 나다움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제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죄가 뭐냐. 죄라는 것은 난처한 입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전 방어에 나서는 게 바로 죄입니다. 난처한 입장에서, 내 입장이 난처해지기 전에 안 난처해지기 위해서 어떤 상황을 조작해가는 거예요. 현실을 조작해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조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가지만 누구는 안 속아 넘어가느냐?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노리는 마귀죠. 바로 마귀가 그 때를 노리고 그냥 덮쳐버려요. 어떤 일을 벌여놓고 그 다음부터 조마조마 한 거예요. 일이 성사가 안 될까봐. 아들이 수능 쳤는데 수능점수가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듯이.
뭔가 목표가 있고 장래에 어떤 계획이 있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악마의 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꼭 그게 잘 성사가 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내 처지나 입장이 난처하게 안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거. 칠순 잔치 벌여놓고 손님 많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거. 손님 오되 저쪽에 시동생은 안 왔으면 좋겠다, 이런 거.
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며칠 전에 저한테 전화가 세 통이나 와서 해보니까 아, 이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자기 엄마를 시동생들이 무시하는데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를, 엄마 남동생들이 누나 되는 엄마를 모독하고 하는데 아들 되는 입장에서 그 삼촌들에게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걸 상담이라고 저한테 한 거예요.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게요? 뭐 아무 문제없네요. 그거 신앙문제 아니네요. 제가 답변하기를, 엄마 핑계대지 말고 삼촌 핑계대지 말고 본인이 성격 이상한 건 생각 안 해봤어요? 조카가 성격 좋으면요, 조카 봐서라도 조카의 엄마 되는 누나에 대해서 험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카 자체가 성질 더러우면 집안 싸그리를 욕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씹게 되어 있다고요. 씹고 험담하고 뒷담화 하고. 그 엄마에 그 아들 똑같지 뭐,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의미를 지킨다는 것은, 이것은 공식이랄 것까지 없고 상식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꼭 남한테 험담을 하게 되어있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자체가 남에게 죄짓는 짓이에요. 남 험담 안 하고 살 수가 없어요. 밀어낼 걸 밀어내야 내 의미가 아름다워지고 고상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얘기 있죠? 바리새인은 그 세리 없으면 누구 욕 했나 몰라.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꼭 못난 인간이 있어줄 때 자기는 상대적으로 빛이 나는 겁니다. 그게 자기 의미를 간수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그게 종속된 거예요. 무의미에 종속된 거예요. 마귀한테 종속된 거예요. 그것은 전혀 신기한 게 아닙니다. 너무나 상식적이에요, 너무나 일반적이고. 다들 그렇게 살아요.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아직 오늘 강의의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남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타인들을 포진시킨 이유가...... 타인에게 갉아 먹혀야 돼요. 그때 우리가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 타인은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에요. 타인에게 나의 의미, 나의 자존감이 갉아 먹혀야 돼요. 파 먹혀야 됩니다. 집에 또 뭐 쥐 키우라는 말은 아니고요. 쥐 말고도 다른 비슷한 거 많잖아요. 그들에게 파 먹혀야 돼요. 파 먹혀야 됩니다.
말썽꾸러기 손자가 있다든지, 손녀가 있다든지. 특히 연로하신 부모가 있을 때 나이 오십이나 육십 된 아들, 딸들은 자기 자존감 다 파 먹힙니다. 효도는 해야 되겠고 감당은 안 되고. 요양병원에 가려니까 월 200만원 줘야 되고. 돈 내라 하니까 지만 돈 내고 다른 형제들은 처음엔 좀 내더니 다음엔 십만 원, 이십 만원 내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이 정도 되면 자존감 다 파 먹혔죠? 좌로 해서 파 먹혀 들어가고 우로 파 먹혀 들어가고 아래에서 파 먹혀 들어가고 위에서 파 먹혀 들어가고.
그리고 그 치매 걸린 부모님은 나한테 달려들고. 달려든다는 말이 치매 걸린 노인네가 오줌 싸고 똥 싸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동네방네 나가서 아들, 며느리 욕하는 거예요. 억울함이죠. 온 동네가 불효자 다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면서도 버리지 않고 홀로 담당해야 돼요. 담당하면서 얼마나 자기 의를 지키려고 하겠어요? 그게 죄에요, 자기 의가.
그러니까 이거 빼도 박도 못하는 내 인생. 차라리 고양이 같으면 안락사 시키면 그만이잖아요. 안 되죠. 왜 내 곁에 있는 것이 내 자존감을 파먹느냐 이거에요. 파먹는다는 말은 여러분들 고구마 생각하세요. 고구마를 보통 주택에서 저 밖에 놔두면 쥐들이 와서 파먹죠. 아침에 가면 벌써 고구마에 이만큼 이빨자국 나서 다 파 먹혀 있죠.
인생은 노출된 거예요. 내 인생은 주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놈도 와서 파먹고 저놈도 와서 파먹고요.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얼굴 좋다. 아줌마, 많이 행복하죠?” 속으로는 ‘네가 우리 집구석에서 한 사흘만 살아봐라. 아주 미쳐버릴 거야. 이게 사는 건지 죽는 건지 아마 분간 안 될걸? 욕 한번 볼래? 바꿔서 한번 살아봐, 그러면?’
어떤 인간도 만족 못하는 이유가, 아까 공식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미가 없는 곳에 자기가 압침을 뿌려놓는 거예요. 지가 뿌려놓은 의미에 지가 밟히고 한 거예요, 지가. 거기다 또 교회까지 가니까 경건까지 해야 되니 이거 뭐 이중 삼중, 이제는 예수님한테 파 먹히게 생겼어요. 똑바로 해! 그게 신앙인이야? 자칫하면 지금 네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지옥 갈 점수야, 지금. 내신 성적 올려야 돼. 뭐 이런 식으로 막 들어오게 되면 여러분 어쩌려고요? 만사 놔두고 다 도망치죠.
그럴 때 바로 창세기 3장이잖아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지? 바로 공간 문제에 있어서 주님이 찾아오는 공간이 의미가 있는 공간이고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공간은 의미 없는 공간입니다. 나 혼자 욕 보고 나 혼자 설쳐대고 나 혼자 온 오지랖 다 떠는 공간, 그거 아무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아무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그 상담했던 아저씨, 나이 한 40대 중반정도 된 거 같아요. 그 사람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누가 남한테 욕을 듣는다는 말은 그 사람한테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딱 보면 밉상같이 생겼거나 밉상 받을 짓을 했거나 호감이 아니고 호불호가 완전히 갈라진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안 찾아오면 난 마귀한테 속한 건데 주님이 찾아와야 되는데 그럼 어떻게 찾아옵니까? 이게 또 관심사가 되죠. 주님이 안 찾아오면 안 되는데 찾아와야 되는데 그럼 찾아올 때 어떻게 찾아오는가. 세상은 격파되면서 작동하는 거예요. 깨지면서 작동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찾아온 주님이 위에 계신 게 아니고 주님이 남기신 흔적이 이 세상의 단면 속에 있기 때문에. 격파되어서 쪼개져야, 단면이 드러나야, 십자가의 흔적이 거기에 다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단층 생기죠.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보이던 표면이 갈라져버리면 지층이 보이듯이, 칼로 통으로 잘라버리면 그 내부가 드러나잖아요. 그 내부 안에, 저주받은 세상 안에만, 어두운 세상 안에만 빛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빛이. 그 안에 빛이 들어있다고요. 이 빛이 신기한 능력이죠. 이 세상이 아직도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이 신기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온다는 것은, “아담아 어디 있냐? 손잡고 집에 가자.” 하고 엘리야처럼 하늘로 붕붕 나는 게 아니고 세상을 격파해버려요. 너를 험담하고 너를 공격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의 세계를 감추는데 급급하지 말고 노출되어야 돼요. 쪼개져버려요.
쪼개지니까 딱 쪼개보니까 진짜 의미, 바로 십자가, 십자가의 거저 주시는 용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의롭게 하시는 그 내용과 그리고 내 힘으로 그동안 악착같이 이만큼이나 됐다고 모아뒀던 쓰레기 있잖아요, 그 쓰레기와 주님의 은혜가 같이 섞여있던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내가 성과 이뤘던 그것가지고 사는 보람과 즐거움을 얻었던 겁니다. 이만큼 나처럼 잘 살기도 힘들어. 너희들이 나처럼 노력해야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거야. 이렇게 으스대다가 옆에 원치 않는 타인, 아까 타인이라 하면 치매 걸린 부모님부터 해서 원치 않는 타인, 갑자기 딸이 결혼해놓고는 아이 좀 봐주세요. 나도 맞벌이해야 되겠습니다. 해가지고 장난꾸러기 쌍둥이 아들 둘이 맡기고 가는 이런 경우 있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몸살나가지고, 아이 가볍게 보고 들다가 나중에 오십견 걸려서 아이 들지도 못하고 이런 경우들. 딸은 지 돈 번다고 재미있고 조선족 아줌마 데려오면 최소 150만원은 줘야 되는데 엄마는 하루 종일 보고 돈 한푼 안 주고. 아이들 간식 값은 엄마 돈으로 다 나가고. 자기네 가정은 돈 벌었다고 좋다고 희희낙락거리고. 엄마는 골병 드는데. 엄마한테 용돈 준다는 게 어버이날 5만원 주고 추석날 5만원 주고. 엄마는 뭐 돈 없이 살아요? 조선족 250만원 주면 이것도 250만원 줘야지. 뭐 부모자식 간에, 엄마 나 사랑하잖아? 그걸로 다 떼워 버려요. 사랑하면 골병 들어야 돼요? 골병 더 들어야 더 사랑스러운 거예요?
딸 시집보냈으면 끝난 줄 알았는데 시집보내고 나니까 더 치대죠. 아들 장가보내고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더 치대죠. 세상에 며느리 생일잔치 해주는데 얼마나 호사스럽게 생일상을 해주는지. 시어머니 생일도 몰라. 그런데 며느리 생일은 사진 찍어놓은 것 보니까 온갖 해물로 가득 찼어요. 그저 비나이다. 우리 아들 바가지 안 긁게 해주세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여전히 그렇게 당하면서도 십자가보다도 내가 얻었던 성과를 더 의미 있게 챙기는 그것, 그게 절제입니까? 그게 인내에요? 그게 경건입니까? 그게 형제 우애에요? 그게 사랑입니까?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과시에요. 나 이 정도 하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자기 과시입니다. 이게 계속 숨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미 주기 위해서 찾아왔건만 도망을 치는 거예요. 주님의 의미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의미로 살겠습니다, 하고 내빼는 거예요. 복음이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려요. 복음이 들리지 않는, 십자가가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려요. 십자가가 너무 부정적이고 긍정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내빼기 바쁘고 도망치기 바빠요.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구원 받으세요.’가 아니라 나처럼 신기한 능력 받은 사람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만 편지한다. 왜?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이 너희가 누구냐, 너희에게. ‘너희에게’라고 했으니까 제가 수요일에 한 표현으로 한다면 ‘균질성’. 똑같아요. 너희 안에 다 포함되어요, 너희 안에.
니느웨 안에 어린애 12만 명이 다 포함되듯이 니느웨는 잘나고 부자이고 배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만약 예를 들어서 아프가니스탄에 그들이 회개해서 다 같이 그 순간 심판이 면제되었다면 아프가니스탄에도 의사가 있고 배운 사람이 있고 못 배운 사람이 있고 다 있지 않습니까? 아프가니스탄에 지금 성장산업이 뭐냐 하면 양귀비 마약입니다. 마약 재배가 성장 산업이에요. 왜냐하면 거기에 고용인원이 11만 명이거든요. 여기 탈레반 자금의 60%가 마약재배에서 나온 수익입니다. 이걸 미국에서 동결시켰어요. 그러니까 탈레반이 보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자기들 테러 자금 대주는 쪽이죠.
마찬가지로 균질성으로 너희라 하는 것은 우리들끼리 잘났다, 못났다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그게 뭐냐 하면 신기한 의미 속에 다 같이 동질하게 균질하게 예속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잘하고 못하고 없습니다. 다 은혜와 평강은 주님의 선물, 그 선물은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만 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선물이 뭐냐. 새로운 공간으로의 초청받음.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고 새로운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4절 끝에 “신의 성품”에 참여가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10916b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성도 자체가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어렵지 않죠? 거룩한 사람 (聖徒). 그런데 성도가 분명히 거룩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거룩해진다? 이거 뭐 이상하죠. 아니 거룩한 것이나 잘 지키세요, 거룩한 것이나. 주께서 거룩케 하신 것이나 감사하고 확인하라 이 말이죠. 그런데 아니, 모자라, 모자라. 더 거룩해야 돼.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성도 아니라는 티를 팍 내버린 거예요.
거룩을 내 선에서 처리하고 관리하려 하지 마시고 어떤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제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합세한 공간. 주님이 찾아온 공간.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났죠? 그럼 혼자죠. 분명히 탕자 혼자죠. 혼자인데 탕자가 혼자 있을 때 누가 거룩하겠어요?
탕자가 밖에 나가서 뭐 나쁜 짓하고 이걸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탕자가 혼자 있을 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잃어버렸다’고 해요, 잃어버렸다. 상당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혼자 자체는 완결된 거예요.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서, 독보적인 것.
인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악마의 마음을 품고 혼자, 인간이 나아가는 방향이 혼자에요. 집에 손자는 오되 4시간만 있어라, 이게 뭔 뜻이에요? 귀여운 손자가 오되 4시간 뒤에는 도로 갖고 가라 이 말이에요. 왜? 혼자 있고 싶다. 부부도 처음에는 같이 못 있어서 난리를 치다가 부부가 몇 년만 지나도 각방 써요. 각방 쓰기 때문에 원룸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곤란한 문제에요, 방이 하나기 때문에. 그런데 방 두 개만 되면 뭐 단호하게, 아니면 만약 원룸 같으면 시장에서 파는 가리개를 사서 하든지 꼴도 보기 싫다.
혼자 있는 게 이게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잃어버렸다. 아들인 탕자는 뭘 잃어버렸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양은 뭘 잃어버렸다? 목자를 잃어버린 겁니다. 동전은 뭘 잃어버렸다? 그 동전 주인, 처녀를 잃어버린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죠, 불의한 청지기.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이 세상에 지혜 있는 자보다 더 지혜 있다 했어요. 왜냐하면 불의한 청지기이니까 불의하다는 것, 정의롭지 못한 거예요, 나쁜 것=이 세상이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는 떠나야 될 세계를 대변해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인간이 희망을 둘 곳이 아니라는 것을 불의한 청지기가 도리어 떠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지혜롭다고 하는 거예요. 생각 잘 먹었다 이 말이에요. 생각 잘 했어, 생각 잘 했어.
회사를 이왕 떠날 거 회사 공금 횡령한 것, 잘 했어, 잘 했어, 이 불의한 놈아. 이상하게 앞뒤가 안 맞죠? 불의하면 이것은 잘못한 것이 되어야 되는데 불의했는데 잘했어요. 이 세상 자체가 모순을 야기하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 자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늘 나라에서는 의미가 없고 이 세상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는 의미이다. 떠나야 된다.
그러면 그 매카니즘의 원형, 그 과정의 원판은 어디서 왔는가? 주께서 하늘에서 오셨다가 떠났잖아요. 주님이 원형이에요. 모델이에요. 이 땅은 희망두지 마라는 것을 예수님이 몸소 오셔서 떠나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자, 그러면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격파됨으로써 작동한다. 이 세상의 의미 모든 것은 모순되었으니까 무너지는 거예요. 이 세상의 의미가 모순된다, 안 맞다는 것은 각자 각자가 혼자 살기 때문에, 각자 각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그 단어의 의미를 서로 자기가 회수해서 가져가버려요.
“자기, 나 사랑해?”, “그래, 사랑해.” 둘 다 사랑이라는 동일한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들어보면 양쪽 다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다른 의미로. 자기로부터 나온 의미가 자기에게 부메랑처럼 회수하는 용도로 단어를, 어휘를, 그런 의미를 자꾸 날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제 성경을 볼 차례지요. 성경에서 모든 인간이 그런데, 인간이 그게 한계인데, 안 그런 사람이 없는데 그럼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나를 제거하는 작업=거룩,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나를 제거해주는 게 거룩이에요, 나를 제거하는 것.
세상은 격파되어야 되지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로 나를 격파해줍니다. 나를 깎아버리죠. ‘나’라는 껍질을 자꾸 떼내어 버리는 겁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는데요. 방금 이것과 관련해서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사전에 방비하는 순간 거룩은 날아간다.’ 거룩은 사라져버리죠. 거룩은 사라지고 그 대신 걱정과 근심이 찾아들죠.
걱정과 근심은 왜 찾아오는가? 그 일이 벌어지면 누가 난처하기 때문에? 내가 당황스럽고 내가 난처하고 내가 몸둘 바를 모르기 때문에 ‘아, 끔찍해. 절대로 그런 상황 오면 안 돼.’ 라고 지가 사전에 몸을 바들바들 떨어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야구 팬이 야구장에 갔는데 꼴찌 하는 한화가 간만에 9대 3으로 이기고 이제 야구 마지막 9회 말 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2아웃에 만루가 되어가지고 자칫해서 홈런 치게 되면 역전될 판인데 그 다음 타자가 나와서 공을 쳤다 이 말이죠. 오래 가요. 멀리 가요. 그럼 한화 팬들이 뭐라고 합니까? “안 돼~ 안 돼!” 2시간동안 햄버거 먹으면서 응원한 게 다 날라가요. “안 돼~ 저 공 잡혀야 돼, 안 돼!” 그 때, “홈~런! 역전!”, “안 돼~”
학생들이 시험 준비할 때 요령 부린다고 내가 준비한 것에서 문제가 안 나와 버리면 안 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마주하고 만나고 부딪치는 모두가 무슨 괴성을 유발하느냐 하면 “안 돼~”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안 돼~”가 되고 사전에는 근심, 걱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심, 걱정.
그럼 뭐가 날라갑니까? 초조, 불안해지면서 뭐가 날라가요? 거룩이 날라가죠. 거룩이 날라가면 신의 성품이 날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신의 성품은 공간에서 제공하는 것이지, 내가 관리하고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거룩은 소유가 아니고 내 자체가 성도에요. 내 자체가 거룩이에요.
이것은 베드로전서 1장에도 나오는데요. 이것은 찾지 마시고 내가 일방적으로 읽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만 뿌려지면 거룩이에요.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와서는 그것이 신의 성품이거든요.
이렇게 근심, 걱정이 되어서 신의 성품이 날라가 버리면 아까 얘기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같이 다 날라갑니다. 다 날라가 버려요. 또 날라가는 걸 붙잡겠다고 흉내 내고 있어요. 덕, 지식, 절제 흉내 내면요, 마귀가 같잖아서 웃습니다. 내가 너 아는데 흉내 낼 게 따로 있지. 그걸 흉내 내나? 뭐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아이고, 내가 확 한번 쑤셔봐? 어디 인내가 되는지.
드라마 같은데 보면 이러한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이런 게 많이 나와요. 재벌 집 며느리로 시집 와가지고 재벌 코스프레 한다고 굉장히 말도 고상하고 점잖게 하죠. 점잖게 하는데 재벌 집에 며느리가 시집오기 전에 알던 남자가, 마약 좀 하는 남자가 와가지고 1억 내면 내가 입 다물게. 이렇게 나올 때 드라마 1회, 2회 되면 벌써 걔 죽었어요. 사람 써가지고 죽여 버리죠. 그 죽인 것을 감춘다고 한 5회까지 넘어가요. 나도 작가처럼 드라마 쓰겠다.
그러면 7회쯤 되면 남편이 그걸 알아요. 나중에 12회 넘어가서 마지막쯤 되면 남편이 지보다 더 나빠. 고게 반전, 고게 재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남편한테 농락당했구나. 마지막에 그렇게 괴롭힌 사람은 어디 가느냐. 나쁜 사람은 교도소 안 가요. 정신병원에 가요. 그게 펜트하우스. 딱 보니 스토리가 뻔하네, 뻔해.
그게 무엇의 실패입니까? 나의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지를 들추어내는 거예요, 이 세상의 드라마들이. 인간의 인내, 절제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껍데기 같은 의미로 그냥 포장만 하는 거예요. 그걸 벗겨버리면 그 안에 인간의 고유한 자기 비밀이 나오고 그 비밀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죠. 난처한 입장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적 비밀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원리는, 거룩을 날려버리는 원리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잃어버리기 싫다’. 이것을 두 자로 하게 되면 ‘홀로’. 네 자로 하면 ‘홀로 살기’. 국민학교 2학년 아이들도 이렇게 삽니다. 홀로 살기. 안 가르쳐줘도 홀로 살아요, 홀로 살기. 그런데 성경에서는 홀로 살기란 잃어버림이라고 했죠, 잃어버림.
그러면 구약으로 가서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찾을 때 무엇을 동원시켜서 찾는가? 그것은 바로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 언약이 바로 거룩이에요. 할례 언약의 특징은 제거하는 겁니다. 무엇을 제거하느냐? 육을 제거해버려요.
할례 언약이란 육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 이게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라는 말이 그거에요.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끊어냄으로 말미암아 남성의 힘으로 생산되는 모든 육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겠다고 선언한 언약이 할례 언약이에요.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때 당시에 모세의 아들을 죽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죽입니까, 출애굽기 4장에서? 아버지 되는 모세를 숙소에서 죽여버리죠, 아들 할례 안했다고. 그럴 때 아내 십보라가 후딱 (아들의) 아버지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인공호흡을 하던지 이래야 되는데 아버지는 놔두고 아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요소가 누락되었는지 그걸 살피다가 할례 언약을 행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할례를 행했거든요. 했으면 그 포피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표피를 모세의 가랑이에다가 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어요.
그것은 왜냐하면, 아까 배웠죠, 촉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낼 때 모세를 하나님과 일직선상으로 보내는 게 아니고 촉매니까 화학방정식에서 화살표 위에다 쓰는 거예요. 촉매라고 해도 되고 또는 아까 한 것처럼 사라지는 매개자, 라고 할 때 여기서 애굽에서 나와서 아들을 만들어요.
모세 (촉매 또는 사라지는 매개자)
하나님 ----------------------> 아들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기 아들, 이 아들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낸다. 모세를 촉매로 해서 보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촉매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세와 아들의 관계 사이에 진짜 모세도 살고 아들도 사는 방법은 여기에 할례 언약이 들어가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이 모세와 아들 사이에 할례 언약이 들어간다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할례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 언약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것이 벗겨졌다,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거룩이고 신성한 거예요. 신성하다는 말이 거룩이라는 뜻이에요. 신성한 것, 거룩 또는 다른 말로 하늘의 요소.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린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 들고 여리고성을 함락했다는 얘기 아시죠? 여호수아 5장을 보게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은 6장이에요.
그럼 사람들이 우르르 가서 여리고성 몇 바퀴 돌고나서 무너뜨리라 하면 될 텐데 5장에서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 하면 길갈이라는 곳에서 단체로, 균질성입니다, 아까 균질성이라 했죠, 균등성, 단체로 모든 남성들은 할례 언약을 해야 돼요.
할례 언약은 더러운 것이 벗겨지는 것. 그 더러운 것을 한 자로 하면 육. 육이 벗겨지는 약속이에요. 계약이에요. 어렵지 않죠? 육이 벗겨져야 이게 거룩이 된다 이 말이죠. 바나나를 먹으려면 바나나 껍질을 벗겨내야 되죠. 자, 두 식품 회사가 있습니다. 바나나 우유는 노래야 된다, 아니면 하얘야 된다. 바나나 우유가 노래야 된다는 것은 빙그레, 하얗다는 것은 롯데에서 나온 바나나 우유, 어느 게 많이 팔렸겠습니까? 먼저 나온 게 많이 팔렸죠.
‘거룩하라’가 아니라 벗겼다는 증거를 가져와라. 이게 바로 거룩이에요. 저, 육 벗겨졌습니다, 십자가로. 이거거든요. 제가 성경 찾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것은 찾아봐야 돼요. 성경에 이토록 어려운 게 박혀 있다는 것이 여러분한테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한테는 굉장히 참 낯설고 신기해요. 골로새서 2장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러면 칼 가지고 자기 몸을 면도날로 째가지고 머리 위에는 십자가를 내고 다리에도 십자가를 내서 한꺼번에 확 벗겨내서 짐승 가죽 벗기듯이 하면 되느냐? 그게 아니고 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면 이것이 바로 육적 몸을 벗는 거예요.
12절에 설명한 게 더 어렵죠. 그렇죠? 사도 바울이 11절 이야기하고 12절 이야기해놓고 우리보고 이해하라고 지금 독촉하는데 이게 이해될 문제입니까? 아니, 너희는 함께 죽었다는 말이 이해가 될 문제에요, 이게?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해 안 되는 게 네가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자기 자신의 육의 행함에 대해서 일체 기대하지 않는 것. 벗겼다는 말은 갔다 버렸다는 뜻이거든요. 속된 것을 벗겨서 거룩한 것을 드러냈잖아요. 그러면 속된 것이니까 쓰레기잖아요. 쓰레기에 대해서 미련 갖지 않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세상의 의미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은 왜 의미 없는가. 내가 세상을 꽃다발처럼 내가 구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필요한 내 세상, 내가 기대하는 내 세상은 나, 이 육에서 나온 거예요. 똑같이 풍경을 보고 쌍둥이가 아무리 똑같이 인생을 살아도 각자 보는 현실관이 다른 이유가 자기가 보는대로 필요한대로 그것을 챙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챙기는 거예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욕해도 경상도 사람 중에서 전라도 사람 욕 안하는 사람 있어요. 왜냐하면 전라도 사람한테 특별한 큰 혜택을 입은 사람 같으면 입을 다물죠. 그렇잖아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이 체험한 것과 체험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래요. 체험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자기의 자아성, 본성을 낳아요. 인간의 본성은 본인이 기억한 것의 집합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믿는다는 이것은 정말...... 그 거짓말 그만 해라, 할 정도로 엉터리 중의 엉터리에요.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일방적이잖아요. 나를 믿는 것이 어떻게 절대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어요? 남들은 각자 자기 믿는 게 있는데요. 그래서 남녀가 둘이 만나서 사랑한다는 말, 믿지 마세요. 사랑을 믿지 마세요. 각자 노림수가 다른데 무슨 사랑을 해요?
제가 아까 안양강의 할 때 했던 예를 여러분들 안 들었으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물론 안양강의, 서울 강의 다 들은 사람은 지겹다, 고만 해라, 하겠지만. 남녀 사이가 너무 사랑한다고 확인된 이상 여자가 넌지시 남자의 마음이 정말 어느 정도인지 떠보기 위해서 여자가 남자한테 “오빠, 나와 같이 죽을 수 있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남자가 그 전에는 사랑한다 어쩐다 하더니 갑자기 심각해져가지고 근육이 경직되면서 얼굴이 긴장되어 가면서 “나는 말이야, 어릴 때부터 내 인생의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거야.” 미쳤나. 내가 너하고 죽게? 이런 뜻이에요, 그게. 지금 4년 간 사귀었던 사랑이 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순간에 다 날아갔어요.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도 결코 지 목숨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김세환이 노래 불러 봐도 찬송가까지 나와도 소용 없어요.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 하면 난처한 일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한테 잘 보여야 나한테 손해되는 짓은 안 할 거라는 뜻이겠죠.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거룩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본성이 우리 본성이거든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니까 숨기 바쁘잖아요. 숨었습니다. 어디 있느냐? 했더니 숨었다는 게 말이 돼요? 주와 함께 있다고 왜 말을 못해?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왜 말을 못해? 끝까지 자기만 챙겨. 벗었으므로, 핑계 대면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부끄러워서 못 나오겠습니다, 이 말이거든요.
할례 언약은 그걸 공략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면 약속의 땅에서 그냥 사는 것은 이스라엘인 내가, 각자 자기가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럼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과 기대, 목표가 뭡니까? 이 땅에 우리가 살았으면 좋겠다. 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니까 살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No! 안 돼. 안 된다. 더러운 인간은 여기 산다, 못 산다? 살 수가 없어요.
약속의 땅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장애물은 뭐에요?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간단해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여리고성을 차지하고 정복한 사람은 누구냐? 할례를 받은 사람이죠, 할례를 받은 사람.
왜 지옥 가느냐? 십자가가 없으니까 지옥 가는 거죠. 육의 몸이 있으니까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럼 천국은 왜 가느냐? 육의 몸이 벗겨졌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육의 몸이. 그러면 죽음에 두 종류가 있겠죠. 육으로 죽는 죽음, 그 다음에 육의 반대가 영이니까 영으로 벗는 죽음이 있습니다.
영으로 벗는 죽음은 자살하면 안 돼요. 이것은 주와 함께 죽는 거예요. 주와 함께 죽는 방법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이미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살렸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는 것,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면 그게 영으로 사는 사람이고 내가 악착같이 살았다, 내가 부지런히 노력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악착같이 살았다 하면 그건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다가 지옥에나 가라.
약속의 땅이 얼마나 거룩을 강조하는 땅인지를 레위기 19장 23절, 이것은 또 한번 찾아봐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참 애 먹여서 일단 사과드리고... 다 여러분 좋으라고 하는 건데.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레위기 19장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아니, 할례는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 보니까 각종 과목, 복숭아, 자두, 사과, 각종 과목도 할례 여부를 따지는 거예요. 3년 동안 그 과목을 먹지 마라. 그 과목이 나쁩니까? 사과나무가 나쁜 짓 했어요? 아니죠.
무화과나무가 나쁜 짓 했습니까? 그래서 주님한테 저주 받았어요?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은 바로 심겨진 그 땅 있잖아요, 이 땅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버려질 땅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무화과나무.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열매 보려 하다가 열매 없으니까 저주했잖아요. 말라죽었잖아요. 사람들의 관점은 뭐냐 하면 나쁜 짓 했으니까 저주 받았다는 건데 아니,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땅 그 자체가 주님 앞에 버림받을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 땅이 버림받을 땅이라는 주님이 제시한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주님의 피가 이 땅에 흘려졌기 때문에. 이 피는 하늘에서 흘린 피가 아니고 어디에서 흘린 피입니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데서부터 시작해서 그 피, 그 피 속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지상의 인간들이 이 하나님한테 어떤 짓을 했는가가 하나의 녹음 테이프 정보처럼 USB처럼 거기에 다 입력되어 있어요. 그래서 피를 앞장세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나오죠. 주께서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주님께서 뒤끝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입 닦고 그냥 포기하고 가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너희들은 멸망당해도 싸다고 계시한 겁니다. 이것이 제가 수요일에 얘기한 하나님의 현장성이에요. 하나님의 현장성, 하나님의 현실 감각이에요.
참 오늘도 이런 말씀 안 듣는 것 보면요. 사람들이 자기 의미를 포기 안 하고 나는 내가 평생 긁어모은 그 의미 안에서 내 나름대로의 현실을 즐기면서 살래. 이런 식이에요. 내가 뭐가 나쁜데?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내가 뭐가 나쁜데?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남한테 해코지 안 하면서 이만큼 건사한 것도 얼마나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장하다, 훌륭하다,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자부하고 싶다 이 말이죠.
오늘 9월 16일이죠? ‘9월 16일, 오늘 이상하게 맑음. 아침부터 나는 착한 일을 했다. 나는 평소에 생각했다.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고 왜 이렇게 착하게 사느냐. 마지막에, 그래 착하게 살자.’ 그게 육이거든요. 그걸 찢어야 돼요. 그 일기장을 찢어야 돼요. 만약에 그 일기장 내가 찢어버리면 그 사람들은 “안 돼~” 그게 사는 보람인데 그걸 찢어버리면 그럼 나는 어디 있는데요? 내가 없잖아요.
그래서 할례 언약이 세례가 된 것은 세례는 함께 죽는 거예요. 함께 죽되 하나를 탈락시키고 하나를 등장시키는 거예요. 나의 육을 탈락시키고 예수님의 몸을 나 대신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몸은 죽었다가 부활한 몸이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사도 바울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냥 언어에 불과하지, 현실로 와 닿지가 않죠. 와 닿지가 않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
우리가 아는 죽음이라는 의미는 육의 죽음, 내 목숨, 헥헥하다가 꼴까닥하는 것 있잖아요, 심정지 되는 것, 그 죽음의 의미만 계속해서 우리가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어제 수요일에 설교했어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무엇을 갖고 있는가. 현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현장성의 결과는 뭐냐 하면 분노하는 거예요. 나는 매일같이 분노한다. 분노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분노해요.
분노한다는 말은 감사가 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아까 감사가 나오는 방법을 이야기했어요. 감사가 나오는 방법은 바로 타인에 의해서 내가 파 먹혀야 돼요, 타인에 의해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남들이 파먹어야 돼요. 그러면 감사대신 격분이 나오죠. 너는 죽었다. 너는 내 손에 죽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손 본다. 죽여버린다, 내가. 가인이죠. 죽여버린다는 말은 내가 일단 살아나야 남을 죽일 게 아니겠습니까. 너는 죽고 나만 살겠다. 나만 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의 노림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사도행전 9장으로 이야기하면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하던 너다. 조를 맞추자. 너는 나를 핍박하고 나는 핍박 당하고. 이렇게 한 조가 되어서 구원 받자. 천국 가자.”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를 괜찮은 인간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핍박한 자로 받아줌으로써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책임도 짐 지우지 않는 주님. 책임 줘봐야 또 핍박할 건데요, 뭐. 뻔하거든요. 책임 줘봐야 잘 해보려 해봐야 또 내가 절제 하려고 하는데 절제 못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그런 환경에 몰아넣어서 못했습니다, 이런 거. 또 또 주님 탓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일체 어떤 책임이나 의무와 어떤 삶의 목적 같은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가 구성된다는 것은 기존에 떠돌아다니는 의미들을 주워 모으는 거예요, 떠돌아다니는. 마치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카트에 담듯이 괜찮은 것을 자꾸 뽑아요. 할 일 없는 재벌 며느리들 보면 심심하다 싶으면 강남에 있는 백화점 가서... 백화점 광고 보면 나오잖아요. 양쪽에 쇼핑백 들고, 한쪽에 다섯 개, 다른 한쪽에 다섯 개 해가지고 그것도 원피스 입어야 돼요. 바지 입고 그런 거 없어요. 원피스 입고 활짝 웃으면서 나오는 거요. 양쪽에 다섯 개씩 들어야 균형이 맞춰져요. 한쪽에 세 개하면 삐딱하게 되잖아요.
자신에게 난처한 입장, 그걸 주님께서 계속 우리에게 주입시킵니다. 난처해라. 난처하고 그것도 방비하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거룩이 사라졌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감사가 없는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요. 돈 있고 자식 잘 되고 다 되는데 이상하게 감사가 어느 날 뚝 끊어졌어요. 이거 뭐 단수조치도 아니고 정전된 것도 아니고 감사가 없어요, 감사가.
자기 지킬 용도로 돌아다니는 의미를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리고성에서 할례란 뭐냐. 할례 받았다는 것은 육이 떨어졌다는 거잖아요. 그럼 육에는 야곱 요소가 있었어요. 야곱 요소가 있고 이스라엘 요소가 있습니다.
야곱 요소는, 나는 형도 이기고 아버지도 속이고 이 모든 재산은 내 힘으로 얻었다. 내가 꾹꾹 참아가지고 이렇게 많은 아내와 자식들과 재산을 얻었다. 이게 야곱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요소는 야곱 요소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 요소를 죽여 버리고 나오는 게 이스라엘 요소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되고 난 뒤에 야곱은 야곱 요소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요청하면서 하나님의 복과 내가 정면으로 맞장 떴었구나. 나는, 하나님은 내 편이고 나의 적은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바로 죄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야곱이 따로 있었어요. 준비된 야곱이 있는데 기존에 육적인 야곱이 계속 이걸 끝까지 가겠다고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제는 그 용어를 그만 쓸려고 해요, ‘불멸의 위신’이라는 말을 그만 쓰고 싶은데 자기의 위신이 있잖아요, 위신. 습관에서 나온 위신, 그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였어. 내가 어떤 존잰데. 이미 남들은 내가 이렇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걸 억지로 고집하는 거예요. 고집하다 보니까 경직되고 긴장되고 감사가 날라가고 거룩에 대한 고마움 다 날라가 버리고 그저 누가 나 험담할까봐 늘 이렇게 초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촌한테 욕이나 먹지. 조카가 이쁘면 가만 있어도 삼촌이 잘해줘요.
자기를 지키다 보니까 여기에 원수, 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가 원수 갚을 잽이 안 된다. 네가 원수 갚을 권한이 없어. 네 육 자체가 원수인데 무슨 원수가 원수를 갚아? 그런 짓 하지 마.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정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정치라는 것은 원수 만들어가지고 원수를 이길 때 자기가 그 정권을 쥐는 시스템이잖아요. 그렇죠? 적이 없는데 정치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것 봤습니까? 죽어라, 이낙연. 죽어라, 이재명. 아니, 그래놓고 공정하게 욕했다 이 말이죠.
로마서 12장 20절,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이 말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산상설교에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이미 네가 바로 나의 사랑이 되었다.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사랑이니까 사랑으로써 그냥 살면 자동적으로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나의 원수마저 주님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죠.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 사랑해보니까, 드라마 제8회쯤 가니까 그게 원수였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죠. 친구 되어가지고 어린 애 공부할 때 도와줄게,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 남편의 숨겨진 여자였어요. 하이클래스 제4회.
주께서 가는 곳마다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켜주는 그런 현상들로 오는데 그게 거룩이 없고 성령이 없어버리면 이건 내가 감당해야 될 문제에요. 그러니까 맨날 주께 원망하기 바빠요.
“좀 조용히 좀 삽시다, 주님이여.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뭐, 뭐, 뭐? 일 있었나?” “나를 못 지키잖아요.” “그럼 네가 살아있다는 뜻이야, 지금? 너 지금 고집 부리고 있는 거야? 나는 너보다 더 힘들었어. 네가 뭔데 지금 포시라워서(호강스러워서) 먹을 거 입을 거 있는 중에도 뭐 이렇게 불만이 많으냐? 더 하면 돈을 전부다 뺏어버리던지 해야지. 가진 게 마땅히 지 건줄 알고 착각해가지고는. 이게 지금 아이 공부 잘 하지, 건강하지. 네가 뭐가 문젠데?” “아프가니스탄 여자들 구박 받잖아요.” 남의 나라까지 신경 다 쓰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당해도 싸요. 미국이 그렇게 도와줄 때 복음을 받아들이던지 말던지 했어야지, 이슬람 두건 쓰고 다니면서 남자들한테 몰살 다 당하게 생겼어요.
자, 할례 언약을 마무리지어야 되는데요. 과목도 따먹지 못한다는 것은 그 땅 자체가 뭔가 이 땅은 애굽에 있던 이 땅이 아니라는 그 티를 내라는 거예요. 그 티가 3년 동안 먹지 않기. 감 안 따고 포도 안 따고 과일 안 따기.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에 있던 그 땅과 이 땅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의 눈으로 보면 SiO₂에요, 산화규소에요. 산소가 된 규소. 성분은 똑같아요. 똑같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할례 받지 못한 과학의 시선이고요. 과학해서 천당 못 갑니다. 집사님, 맞죠? 과학에 관심 있으시니까. 과학에서 십자가 이야기하던가요? 안하죠.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것을 세상의 지혜라고 해요.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로 볼 때 어리석고 과학으로 볼 때 십자가가 어리석어요. 그게 바로 구원을 가로막는 거예요. 과학이 진리인 줄 아는 그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땅 자체가 약속의 땅이 될 때 그럼 그 과일을 먹을 때 먹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해야 됩니까? 신명기 10장 16절,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이건 더 추가된 거예요. 분명히 그 전에는 그렇게 이야기 안했어요. 몸의 할례로 그만 됐다. 이런 것처럼 됐는데 신명기 10장 16절에 보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아, 이건 진짜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랬죠. 오후 설교 제목이 뭐였습니까? <추가적 계시>. 기존의 계시는 내 몸이 다 알아먹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살면 되죠, 하나님? 그럼 나한테 벌 안 주실 거죠? 나 천당 가겠죠? 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계시가 추가되니까. 이 새로운 계시는 누가 가지고 오느냐 하면 바로 이 땅 지층에 박혀있는 선지자의 고난으로 오죠. 올 때 이 기존의 것이 선지자를 핍박하니까 고난이 발생되는 거예요. 새로운 계시는 인간이 뭘 지켰다는 전체를 죄로 규정해서 추가적인 계시가 주어져 버립니다, 추가적인 계시.
그럼 제일 마지막 계시가 무슨 계시입니까? 십자가죠. 그럼 십자가 이후의 계시는 무슨 계시일까요? 십자가의 반복이에요. 매일같이 근심되고 매일같이 웃고 감사하고. 또 돌아서서 다음 날 되면 다음 날 치의 근심, 걱정이 또 찾아오고 저녁쯤 되면 또 은혜 받아서 감사하고 웃고. 이거 미친 것도 아니고. 아침에 왕짜증, 저녁에는 잘못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회개하고. 그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또 마찬가지고 또 마찬가지고.
그래도 그 내면에 흐르는 잠재된 회로인 그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하루 치의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항상 최후의 용서는 앞에 있는 모든 과거 사건을 항상 일괄처리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일괄처리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할례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자, 마음의 할례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설명하기 전에 이사야 52장 1절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아,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할례를 고집하십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는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사도들이......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의도적으로 할례를 안 행했어요. 안 하니까 그들이 뭘 내밀었겠습니까? 이 이사야 52장을 딱 내밀었겠죠.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까지 행하고 예수 믿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할례는 그 할례가 아니다. 이 말씀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사야 52장 말씀을 다 이루어서 예수님 안에서 할례가 완성되었고 완성된 할례를 그냥 이방인에게 선물로 줘버리는 것이다, 선물로.
홈쇼핑에서 요새 뭘 파느냐 하면 8만원 선으로 해서 모든 제사에 필요한 전, 지짐, 튀김을 팔아요. 그 안에 종합 선물, 제사 음식 다 들어있어요. 8만원입니다. 과일까지 나중에 따로 사면 기껏 해봐야 20만원. 집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머리에 땀 닦고 돈 들고 맛없다고 욕먹는 거보다 이건 MSG 들어가서 맛 되게 좋거든요.
주께서 다 이룬 거예요. 주께서 다, 마음의 할례까지. 그거 뺀 홈쇼핑 아니에요. 마음의 할례까지 다 집어넣은 거예요, 마음의 할례까지. 그러니까 우리 육의 마음은 날마다 찾아오시는 성령에 의해서 매일같이 쪼개지는 겁니다. 쪼개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잠재되어 있는 은혜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자꾸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이 모든 말씀은 손댈 것 없이 다 이루었다. 확인시켜 주니까 감사로 수납하죠. 몇 분 가지도 않지만. 왜 몇 분 안 가느냐 하면 주께서 준비하신 사건을 또 일으키거든요. 계속 사건이 일어나요. 이 구멍 막으면 저 구멍 터지고, 저 구멍 막으면 이 구멍 터지고.
여호수아 5장 4절-5절, 그것도 제가 일방적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아까 이야기했지만 길갈에서 할례 행했잖아요. 할례 행하고 난 뒤에 6장에 가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데 5장 끝에 14절, 15절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늘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하늘의 요소, 천사가 등장하거든요. 자, 여러분 물어보겠습니다, 끝부분이니까. 유월절에 천사가 사람 인품보고 죽였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를 무엇을 보고 결정했습니까? 유월절 피보고 했죠.
그렇다면 여호수아 5장 끝에 나오는 군대 장관은 무엇을 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까? 5장에서 할례를 행했잖아요. 할례 행한 자들만이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약속의 땅에는 이스라엘만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이 함께 살기 때문에 그런 조건이 필요한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려면 육은 버리고 영으로 살아야 주와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살아야 주의 영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 장관이 와서 “누구야? 네가 무릎 꿇어.” 하니까 여호수아가 “예.” 하고 무릎을 꿇죠. 그러니까 “나는 너희가 할례 받은 조건 보고 내가 이 약속의 땅에 모든 적들을 물리쳐 줄게.” 이게 하나님께 지시 받은 군대 장관이 해야 될 일이에요.
쓰잘데기 없이 자기 잘난 것으로 천사 일을 주제넘게 방해하지 마세요. 지금도 천사는 십자가 중심으로, 성령께서는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주님의 현실이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령하고 신성하고 거룩하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일괄적으로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이게 얼마나 신기한 능력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