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문제 없음

아빠와 함께 2021. 10. 17. 09:08

서울의존강의20211014a 베드로후서1장 4절(문제없음)-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4절-8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여기에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라고 하는 그것은 우리 주님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써볼게요. 주님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보시면 간편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통하는 통로를 한쪽에서 파들어가는 거예요, 한쪽에서.

보통 터널 공사할 때는 양쪽에서 파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베드로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희에게 준 약속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4절에. “지극히 큰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 약속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여서 천국과 이 세상이 막혀있는 것을, 터널을 뚫는 겁니다. 땅굴 파듯이 파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접근해간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땅에서는, 인간 쪽에서 접근하는 이런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안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다가오고 접근한다는 낌새를 차리지 못하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인간은 본인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가 안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파고 들어갈 때, 약속이라 했잖아요. 이걸 알기 쉽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약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약속의 내용이 뭐냐 하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게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쪽에서 들이미는 것이기 때문에 이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는 이미 문제없음이 드러난 거예요. 하자 없음이 드러난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도라 치고 약속이 여러분들에게 도달되게 되면 여러분들은 느낄 때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앞에다가 이걸 하나 추가하면 돼요, ‘(나는)’. 나는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거 놀라운 배짱 아니에요, 이거? 배짱 또는 이걸 사자성어로 내 배 째라. 내가 뭘 하게 되면 이것은 하자덩어리에요. 문제덩어리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마르다 집에 오는 것과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쌍방 간에 그 의도한 바가 달랐어요. 예수님은 아무 문제없는 걸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 집에 문제 생겼다는 거예요. 멀쩡한 오빠가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젯거리가 되고 문제된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주님께서는 “너희 오빠 죽었잖아.” “예.” 죽었으니까 마리아는 “아프다가 죽었으니까 걱정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요. “그게 문제가 되냐?” 오히려 반문하죠. “그게 왜 문제가 돼?” “아니, 오빠가 있다가 없으니까 문제가 되잖아요.” 이게 이제 마르다, 마리아의 주장이고 주님은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그게 왜 문젯거리가 돼?” 그게 왜 문젯거리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마르다는 오빠 죽었다고 울고, 예수님은 문젯거리도 아닌데 문젯거리라고 우기면서 우는 것보고 우시고. 그걸 가지고 사고가 안 맞다. 생각이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오늘 문자 막 나옵니다. “뭐가 문젠데?” “오빠가 죽었잖아요.” “그래서 뭐?” 중요한 것은 그 오빠를 내가 죽였다는 사실이란 말이에요. “내가 네 오빠 죽였어. 이래도 문제 되냐?”

“예수님이 죽이든 살리든 간에 멀쩡한 오빠가 죽었으니까 문제 되잖아요.” 예수님은 “그럼 나는 뭐고? 너네 집구석에서 나는 뭐야, 그러면? 네 오빠나 건강하게 해주는 시다바리가?” 여기서 시다바리라고 하는 것은 허드렛일 하는 일꾼을 말합니다. 내가 네 시다바리가? 마르다, 마리아 너는 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

이것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게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겠어요?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아무 문제없어요. 아휴, 내가 죄를 지었고... 그 죄 내가 짓게 했는데? 몸이 뭐 아프고... 그 아픈 거 내가 아프게 했는데? 이번 달 뭐 사고쳐가지고 이천 만원 물어준다고... 그 사고 내가 치게 했는데? 뭐가 문젠데? 애 공부가... 성적 내려가도록 내가 만들었는데? 이란 대표 팀이 한국 대표 팀과 축구 하는데 골대를 두 번인가 때렸어요. 알라신이 뭐 어떻고 저떻고 할 거예요. 주님이, 내가 했는데, 골대? 내가 골대 때려서 못 들어가게 했는데?

지금 아무 문제없는 것인데 마귀 쪽에서 문제를 자꾸 일으켜요. 일으켜서 심신이 약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걸 협박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협박이라 하는 것은 일어날 상황도 아닌데 일어날 상황에서 ‘너 어쩔래? 너 이제 큰일 났어.’ 라고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을 협박 또는 고급 용어로 말해서 겁박. 협박, 겁박. 옛날 조선시대에는 겁박이라 했거든요.

교회를 40년, 50년 다니고 뭐뭐 했는데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통로를 어디서 만든다고요? 한쪽에서 만든다고 하기보다는 말을 바꿔야겠다. 통로를 한쪽에서 뚫어요.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뚫고 들어온다고요. 한쪽입니다, 한쪽. 우리 쪽에서 마중 나가는 게 아니에요. 한쪽에서 그냥 뚫어요. 뚫는데 뚫는 그 현장에 우리는 어떻게 참여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약속이 주어진 형편에 대해서 확인 들어가는 겁니다. 어? 아무 문제없구나. 아무 문제없네.

그럼 나는 지금 누구한테 놀아난 거야? 아, 요거 마귀 봐라. 이거 못된 마귀 봐라. 아무 문제도 아닌데 마귀가 자꾸, 넌 큰일 났어. 넌 죽었어. 너 이제 어쩔래? 너 어떻게 수습할래? 이런 식으로 계속 흔들기에 악마가 아주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너 악하니까 더 착해야 되지 않아? 막 이런 식으로요.

특히 오늘 베드로후서 1장 4절부터 7절에 보면 거기 어떤 덕목의 리스트처럼 나와 있는 게 있죠.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요소들을 장착해야 되느냐 하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게 지금 몇 가지에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가지. 과목이 수능 과목보다 더 많은 것 같아, 내가 보기에는. 영어만 해서는 안 되고 영어, 수학, 무슨 탐구? 탐구, 탐구해서 거기다 체육까지 보태가지고 여덟 과목을 평균점 이상 되어야 60점 이상 돼야 천국에 합격되는 겁니까?

마귀는 이야기해요. 네가 덜 착하니까 더 착해야 되고 네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온전해야 되고 네 가지 밖에 안했으니까 네 가지 더 보태야 되고 일곱 가지 했지만 한 가지 더 남아 있고. 이런 식으로 자꾸 하는데, 인간은 덜 착하고 더 착하고 이런 게 없습니다. 모두 한통속이에요.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약속을 염두에 두면 어느 인간도 십자가 진 인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이 세상은 십자가 지지 않는다, 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화목하고 있습니다. 죽이 잘 맞는다 하죠. 죽이 잘 맞았어요. 십자가 져버리면 아무 문제없는데 인간들은 아무 문제없는 게 짜증 나.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한테 평생 공들여왔잖아요. 공들여왔다고요.

서울대학 가려고 강남에 학원 보내고 수십만 원 과외해가지고 서울대학 가려고 다 준비해놨는데 그래서 모의고사도 잘 나오고 했는데 서울대학교에서 ‘이번 서울대학교 입학 전형은 뽑기로 합니다. 공부 더 잘하고 덜 잘하고 그런 거 일체 안 봅니다. 뽑기 그 자체가 문제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만 뽑힐 겁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내가 시도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안 받는 거구나. 하나님이 뚫는 쪽에서 뚫는 통로하고 내 쪽에서 뚫는 통로가 맞아야 뭐 중간에서 거기 계십니까? 수고했습니다, 하는데 이게 안 맞아버리면 다 뚫었는데 보니까 지옥으로 가있어. 평생 실컷 뚫었는데 '여기서부터 지옥까지 약2km' 이런 푯말 나올 때... 아, 인생 기가 차죠.

악마는 알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서 인간의 모든 차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악마가 알기 때문에 악마는 그것을 감추는데 급급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천국 가는 통로를 네 쪽에서 뚫어라’ 그런 아이디어를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7절까지 줬다는 거예요.

더하라, 더하라, 더하라, 더하라. 여덟 가지의 요소를 완전하게 장착해줘야 너는 합격되고 중간에 여섯 개하고 두 개 빠지면 이건 불합격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그런 악마의 해석에 의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요.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문제 있음의 그 공포감에 자기는 어쩔 줄을 몰라요. 그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모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7절 괜히 봤어, 괜히 봤어. 난 십자가만 볼 건데 이거 괜히 봤어. 난 신의 성품에 참여 못 할 거 같애. 벌써 1단계 믿음에, 그다음에 덕을, 하는데 믿음도 지금 없는데 덕까지 추가할 자신감이 하나도 없네요. 왜 자신감이 없느냐 하면 회사 다니거든. 바빠, 지금. 경건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돈은 벌어야 되겠지, 이거 지금 믿음의 덕까지 쌓아야 되니까 봉사할 시간이 모자라요. 이거 지금 큰일 났어요. 걸음마에요, 걸음마. 그뿐 아니라 덕에 지식을...이거 뭐 조직신학, 성경신학 다 해야 돼요. 큰일 났어요.

이걸 이렇게 해석합니다. 믿음? 문제없는 믿음이 약속 안에 들어있다. 덕? 아무 문제없는 덕. 지식? 아무 문제없는 지식. 절제? 아무 문제없는 절제. 이것을 주께서는 하늘에서 뚫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미 인간 쪽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뭔가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천국 가는 그 계단, 천로역정 계단 있잖아요, 그 계단과 비교해서 주님 쪽에서 내려오는 약속은 누구 일이냐 하면, 오늘 이게 결정적인데요, 이게 나의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일이 아닙니다.’ 에 멈추면 안돼요. 더 결정적인 것은 ‘나의 일에 내가 끼어들면 안돼요.’ 안 된다. 끼어들면 문제없는 게 문제가 생겨버려요.

괜히 엄마가 한 잡채를 맛없다고 지가 요리하다가는 잡채 다 망치거든요. 엄마가 완전한 잡채의 맛을 냈는데 지가 손대가지고 엄마, 얼마나 맛있게요? 니나 먹어라, 이거! 난 안 먹는다. 요리는 주님이 하시고 먹기는 성도가 먹는 거예요. 성도가 요리하고 먹기는 주님이 하는 이런 건 없어요. 통로는 한쪽으로 뚫었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닙니다.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이기 때문에 주의 일의 필수 요건은 뭐냐 하면 주의 일에 네가 끼어들기 있기, 없기? 없기! 너의 일에 네가 끼어들기 있기, 없기? 없기! 그럼 저는 어떻게 삽니까?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그게 믿음이고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게 절제고 그게 덕이고 그게 형제우애고 그게 지식이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그럼 시키는 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그걸 내가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라는 대꾸가 나올 수 있겠죠. 그런 대꾸가 나온다는 것은 지금 자기 형편이 주님 보시기에는 문제가 없는데 지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금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내 인생이 없어요. 주께서 만들어가거든요.

오늘 낮에 했던 그 안양강의의 테마를 다시 적어보겠어요. 물론 안양강의를 듣겠지만 또 직장 다니느라고 못 들으시는 분들을 위해서 하겠습니다.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구원은, 생명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거예요. 창조된다는 말은 너에게는 없고 예수님 내게만 있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예수님이 없는 쪽에 예수님의 것을 여기다가 기지, 기지 알죠? 군대기지 또는 통신사에서 기지를 만들죠, 여기 성령을 파견해서 기지를 만드는 거예요.

그럼 기지를 만들면 그 공간은 내 공간입니까, 주님의 공간입니까? 주님의 공간이죠. 보통 망명할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한다고 하면 비행기타고 미국으로 가야합니까, 안 그러면 대사관 가면 돼요? 망명할 때 대사관 가면 되잖아요. 대사관 알려드려요? 광화문 그쪽에? 그 영토는 서울에 있지만 그 영토는 미국 영토에요. 이미 대사 협약할 때 협약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기지국을 만든 거예요. 이 기지국이 와야 천국하고 핸드폰이 터집니다. 안테나가 막 네 개 다 차있어. 그 기지국에서 아까 요한복음 12장 말씀처럼 주님께서 문제없다고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어려운데 뭐냐 하면 주께서 문제없다고 찾아올 때는 문제가 너무나 많은 곳에다가 주께서 기지국을 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없음이,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오게 되면 그때 인간은 내가 만족하는 믿음, 내가 만족하는 덕, 내가 만족하는 지식, 내가 만족하는 절제, 내가 만족하는 인내, 내가 만족하는 경건, 내가 만족하는 형제 우애, 내가 만족하는 사랑이 내가 평소에 어떤 것을 가지고 이러한 리스트로 만족했던가, 자기의 허점을 주께서는 노출시킵니다.

봐라. 네가 네 인생 하니까 온갖 문제투성이잖아. 그러니까 문제없음은 내 쪽에 문제없는 거야.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신의 성품, 그런 것을 우리가 가지려고 해요. 이렇게 가져야 천국백성이 말씀대로 합치된다고 생각해서 가지려고 하거든요. 그 가지려는 것이 탐심입니다. 가지겠다는 것은 내게 없으니까 이런 걸 장착해서 내 쪽에서 하늘나라로 새로이 천국 가는 통로를 한번 개발해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루트 개발, 통로 개발, 새로운 등산로 개발하듯이.

그거 개발하면 결국 개발된 천국 가는 길은 누구 이름 붙이겠습니까? 주님 이름 붙이겠습니까, 자기 이름 붙이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간증 집회. 그게 간증집회에요. 모두다 간증 서너 개쯤은 다 갖고 있죠?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러한 성경말씀을 가지려고 하는 그것을 탐심으로 규정하느냐 하면 인간은 죄 짓는 식으로만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한시라도 죄 안 지을 때가 없기 때문에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탐은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니까 내 쪽에서 통로를 뚫는 그런 부질없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진리란 반대를 만나야 드러난다. 이게 주의 성경 전체에 나오는 원리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 진리란 길이란 생명이란... 그냥 주님께서 나는 진리다! 이러고 돌아가셨습니까? 누구를 만났어요? 반대하는 힘과 마주하면서 진리가 진리답게 길이 길답게 생명이 생명답게 새롭게 창조된 그 통로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이거든요.

그럼 제가 아까 그랬죠? 성도 안에 주의 일의 기지국이 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성도를, 신의 성품을 받은 사람 또는 약속을 받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겠어요? 반대가 되는, 반대를 맞닥뜨리는, 그 현장을 조성해주시는 겁니다, 반대.

반대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성도라면 반대되는 사람을 만난다는데 그 사람이 누구지? 이렇게 생각할 거죠. 구약은 그런 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 반대되는 것을 두 자로 ‘우상’이라 합니다. 기드온 같은 경우에도 그런 예가 되는데요. 가만히 있는 기드온, 포도농사 짓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우상을 부수어라’ 하고 시켜요.

한번 물어봅시다. 기드온이 평소에 우상 부수는 것을 자기의 삶의 어떤 사명감으로 목표로 삼았습니까, 아니면 포도농사로 사는 게 목표에요, 기드온은 평소에? 지 포도농사해서 자기 소유 챙기는 게 목표지, 우상 섬기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사사기 6장 성경에 보면 천사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통로를 어디서 팝니까? 하나님 쪽에서 통로를 파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포도농사에 관심 있는 것 보고, 요새 뭐 새로운 품종이 나왔대요, 청포도 비슷한 비싼 거 나왔는데 그거 심어서 얼마 받겠노, 그거 신경 쓰는 사람한테 갑자기 나타나가지고 ‘나, 천사. 이제부터 지시 내린다. 너네 동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상 그거 대낮에 부숴버려라. 그것도 대낮에 부숴버려라.’ 이런 지시를 내린 거예요.

천사의 지시니까 문제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문제없죠. 그 지시가 하나님 보시기에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문제 있을 리 없고 시키는 대로 하는 천사가 문제 있을 리 없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드러나느냐? 지금 기드온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기드온은 그냥 소박하게 자기 포도농사 짓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그 현장에 기드온을 가지고 강제로 합류시켜버립니다, 강제로. 그럼 기드온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포도농사는 내 일이지만 우상 부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잖아요. 그렇게 할 만하겠죠? 실제로 그 뒤의 행동이 그러했어요.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데 왜 나보고 시키느냐.

그럼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너한테 시키는 게 문제 있냐? 없습니다. 그럼 네가 대든다면 문제는 하나님한테 있는 게 아니고 너한테 문제 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상과 싸운다는 것은 지금 이 우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리에 대적하는지에 대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 관심이 없어요. 자기 일에 바빠가지고 관심이 없다고요.

여기 약속, 신의 성품, 믿음에 덕, 이거 다 관심 없어요. 믿음에 덕 가지면 얼마 주시렵니까? 우리는 돈에 관심 있는 거예요. 덕에 지식 가지면 나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가게 해주시겠습니까? 뭐 이렇게. 그런 데에 관심 있어요. 인간은 자기 일이 따로 있어요.

여동생하고 오빠하고 사는 거, 이거 마르다 자기 일이거든요. 자기 일인데 주님이 찾아와서 오빠 죽였잖아요. 죽여 놓고 뭐 문제 있나? 기분 나빠? 내가 보니 기분 많이 나쁜 것 같은데. 오빠 죽었는데 기분 안 나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네가 문제 있다.

진리라는 것은 문제 있음과 마주치는 것이 제대로 ‘아, 문제없음이 찾아들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우리는 우리 일대로 바쁘다고 자꾸 핑계를 대는데요. 주님은 더 바빠요. 주님은 자기 백성 안 놓치기 위해서 주님은 더 바쁘게 일하신다고요.

자, 기드온이 포도농사 지었을 때 주님께서 우상을 부수라 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물어봅시다. 포도농사는 주께서 시키신 일입니까, 아니면 본인이 자기가 자기한테 시킨 일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주님이 시킨 일입니까? 아니죠? 여기서 나온 결론은 주께서 시키지도 않는 일을 본인이 얼씨구나 좋다고 그 일을 하면서 그것을 사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상이란 또는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같은 말로 우상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들고 그 결과를 내가 지키는 것. 이게 죄고 이게 우상이에요. 내가 만들고 이걸 다른 말로 내가 나한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되고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보면서 신의 성품 나오니까 얼씨구나, 하고 나도 신의 성품 가지련다. 할 때 그게 탐심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주님이 나서야 되지, 우리 쪽에서 통로를 뚫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나서서 이루어지면 안돼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하죠. 그럼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그냥 놀까요? 이렇게 하거든요. 평소에 안 놀았어요? 하여튼 주의 지시를 따를 생각은 안하고 지 편할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는 놀고 주께서 시다바리처럼 다 하라 이 말아닙니까? 마당쇠처럼. 마당쇠 알아요? 마당에 있는 금속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고 노비가 돼서 자기 양반집 빗자루 질 하는 게 마당쇠에요. 그 마당쇠, 노비가 그 일하면 그게 자기 일입니까, 주인님이 시킨 일이에요? 주인이 시킨 일이잖아요. 자기는 노비니까 종이니까. 일종의 재산이거든요. 그래서 주인도 노비를 함부로 안 죽여요. 자기 집 컴퓨터를 왜 깹니까? 하나의 기계인데요. 기계를 비싸게 돈 주고 사가지고 노예시장에서 사가지고 그걸 죽일 리가 있어요. 아끼고 아끼죠. 계속 노비로 써먹기 위해서.

바로 이 관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해야 됩니다. 주님, 내 일이라는 것은 아예 없네요. 주여, 내 일이라는 것은 아예 없네요. 이제 안 써도 되죠? 쓰면 시간만 낭비되고... “주여, 내 일은 없네요.” 그래서 주님께서 답변하기를, “그게 네가 지금 기분 나쁘다는 거야, 기분 좋다는 거야? 태도를 분명히 해.” “내 일은 없네요.” 하고 입이 툭 튀어나와가지고 “그럼 내 일은 없네요. 그럼 나는 무슨 재미로 사노? 아휴...” 한 숨 쉬는 거. 그럼 주님께서 “어이, 어이, 어이. 헤이. 지금 기분 나쁘다는 거야? 너 표정 보니까 기분 되게 나쁜 거 같은데?” “그게 아니고요. 주님 잘 하셨다 그 말입니다.” “아니, 잘 하셨다는 그 태도가, 톤이 상당히 듣기 기분 나쁜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왜 기쁨이 없고 왜 감사가 없습니까? 왜 입이 댓 발 나옵니까? 왜 나옵니까? 주님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싫다는 게 아니에요. 왜 나는 나로 인한 보람을 허락 안 하냐, 이것 때문에 기분 나쁜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고 싶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나는 나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나는 나에게 감사하고 싶고 나는 나에게 고맙다는 소리 하고 싶어요. 고맙소~ 고맙소~내 나올 줄 알았어. 나는 나에게 고맙다 하고 싶어요. 오직, only, 난 그 생각뿐이야. 나는 나에게 감사하고 나에게 고맙고 내가 기특하고 내가 사랑스럽고 딱 그뿐이야. 뭐 복잡하게 할 거 없어. 딱 그뿐이야. 난 그 보람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이야기하면 입이 댓 발 나오는 거예요. 뭐 안 믿는다하면 또 지옥 갈까 싶어서 싫고 그렇다고 마음은 땡기지 않는 거예요. 고맙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거예요. 모든 정신이 나한테 고맙고 나한테 감사함으로 쏠리기에 온 혼신의 힘을 다하고 거기에 정신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오빠 죽여 버리니까 마르다, 마리아가 삐친 거예요. 삐쳤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2절을 한번 봅시다. 제가 요한복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구나 그 절차를 경과해야 된다는 겁니다. 12장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아주 퍼펙트한, 완벽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지금 마리아는요. 자기가 갖고 있던 그 귀한 향수를 그냥 낭비해버립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뭐라고 합니까? 바로 그 이야기했잖아요. 왜 그 비싼 것을 그렇게 허비하느냐 또는 낭비하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나사로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뒤에 마리아가 알게 된 것은 내 것이 있는 한 그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또 집안에 향수 다 뿌리라는 말이 아니고요. 마리아는 나한테 고맙고 내가 나한테 감사할 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섞여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러면 마리아의 결정은 뭐냐 하면 나의 일은 쫙- 삭제를 하는 거예요, 나의 일. 나의 일은 삭제를 한다. 사선을 긋는 거예요, 사선을.

사선을 긋는다니까 생각나는데 컴퓨터에서 한글 작업할 때 이런 게 있거든요. S자, 주체(主體, suhbject) 에다 사선 긋는, 이런 게 있어요. 그럼 이것을 한글에다 쳐야 되는데 이걸 어떻게 치느냔 말이죠. 문자표에 이게 안 나오는데. 그때는 편집하는 데에 들어가서 앞에 not 붙이고 S하게 되면 이게 나와요. 이건 팁이에요, 수식 편집.

S가 주체거든요. 마리아가 주님의 온전함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면 바로 나의 것에다가 사선을 그어버리는 겁니다, . 이것은 나의 것의 허비 또는 나의 것의 낭비인 동시에 나의 낭비, 나의 허비. 이 말은 나는 이제부터 낭비하는 인생을 살겠다, 아유 즐거워라. 아유, 즐거워라.

내가 하는 가치를 내가 솎아내서 뽑아내서 나 이정도 가치 있다, 라는 식으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겠다는 그 일을 나는 청산하겠다. 아이고, 내가 내 인생을 낭비하다니. 그것으로 즐거워하겠다는 거예요.

그럼 낭비를 어떻게 하느냐. 낭비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낭비를 하게끔 주께서 일을 시킨 것이 돼요. 왜냐하면 여기 12장에 보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진리는 항상 무엇을 마주쳐야 나온다? 진리가 아닌 것과 마주칠 때에 진리가 등장하죠. 12장 4절에, 가룟 유다가 말하기를, 그것도 그냥 가룟 유다가 아니고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절에 보면 그 비싼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한테 주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고 이게 주님께서 원하는 뜻이라고 우기며 주장하는 거예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 가룟 유다의 생각이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믿음에 덕을, 덕에 절제를, 하는 그 순환 구조에다가 그대로 집어넣으면 인간들은 그게 딱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경건하냐. 그렇게 경건한 것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가져야 그다음 단계가 경건이니까 도대체 이것은 계급이 이등병에서 일등병, 일등병에서 상병, 상병에서 병장, 병장에서 하사, 하사에서 중사, 중사에서 상사, 상사에서 원사, 특상사에서 원사, 그러려면 한 상사쯤 되는 그 정도로 성화된 거룩한 생활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를 팔아 나눠주는 일을 할 수 있다, 라는 아이디어가 예수님 팔아먹을 가룟 유다 쪽에서 이미 제시되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 오시기 전에 아무도 십자가 진 사람이 없죠? 십자가 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은 우리가 그냥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중무장되어 있다는 거예요. 꽉 차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의 성품이 되겠다는 탐심을 내고 내가 주의 성품이 되겠다는 그 목표와 목적의 집요함을 갖고 있는 이상은 우리는 내 쪽에서 통로를 뚫는 그 작업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한번 해보자. 어디까지 뚫었는지, 몇 층까지 뚫었는지. 삼층 천이 아니라 오층 천, 칠층 천까지 뚫을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가룟 유다이고 열두 제자가 다 그렇게 살았어요. 베드로도 다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지상에서 하늘로잖아요.

그런데 마리아의 방향은 뭡니까? 세상에, 그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방향. 내 것을 다듬고 내 것을 훌륭하게 신의 성품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러한 거룩하고 거룩한 성품을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게 아니고 지금 마리아가 보여주는 것은 졸지에 뭔가 하늘에 있다가 땅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그 빌딩 옥상에 있다. 5층 옥상에 주님이 계시다. 그럼 제자들은 가룟 유다부터 해서 제자들은 그 힘든 계단을 올라가면서 1층, 헥헥, 2층, 3층, 4층 해서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이제 주님 만난다 생각하는데 4층에서 어떤 아줌마가 투신자살했어요. 저거는 주님 만나는 방향이 아니고 반대방향이죠. 왜 자기를 던져? 본인이 구원받아야 되는데. 본인을 왜 포기하느냐 이 말이죠. 도저히 납득이 안 되죠.

그래서 복음 설교나 강의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제가 뭐 영어를 했습니까, 프랑스어를 했습니까. 한국말을 해도 또 한국말도 사투리 많다는 핑계를 대가지고 아예 녹취하시는 분들이 표준말로 녹취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대요. 표준말로 녹취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문법이 틀렸느냐? 틀린 것도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방향이 틀렸어요, 방향이. 가룟 유다적 사고방식이에요, 가룟 유다적 사고방식.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야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신의 성품을 그 짜투리라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는 보람으로 예수를 믿어보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좋은 아이디어를 줬으니까 그 아이디어를 따라서 신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뜻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다 했으니까, 그것도 아무 하자 없이, 문제없이 다 했으니까 주님의 것은 문제없었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일 때 그동안 네가 추구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처리할래? 내가 두고 볼 거야. 두고 볼 때 두고 보기는 뭘 두고 봐요. 두고 볼 때 어떻게 두고 봅니까? 그냥 낭비하는 거예요. 내 인생 자체를 낭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낭비하는 방식이, 마리아야, 내가 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네가 지금 반복하고 있다. 복제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자기 장례식을 마리아가 미리 나보다 앞서서 마리아 자기 죽음으로, 자기 비싼 것까지 포기해서 난 이딴 거 내 인생에 이제 필요 없다, 난 이제 죽을래, 하는 포기, 자기 죽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예수님의 장사, 십자가 죽으심을, 십자가에 함축된 그 의미를 마리아가 자기 인생을 통해서 그렇게 보여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알고 했습니까? 아니죠. 마리아는 그냥 하고 싶었어요. 자기가 비싼 그 향수를 주님의 발 앞에 같이 접촉하고 싶었어요. 결과적으로 돌아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나중에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으로 봐서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의미 붙이는 당사자가 마리아 본인이 아니고 자기 하는 일에 주님이 의미를 붙였으니까 그 일을 주님이 자기 일이라고 회수해서 가져가버린 거예요. 마리아야, ‘멋진 일을 했다. 그래. 네가 한 일이 내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될 그 취지, 바로 딱 그거야. 그 일에 네가 참여하게 된 거야.’ 라고 확인해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성도의 어떤 인생 가운데서 허비되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어요. 왜? 알뜰살뜰 주님께서 다 가져가니까. 그래, 필요했었어. 나를 증거 하는 데에 꼭 필수적이었어. 주님이 일방적인 의미를 갖다 붙이는데 우리는 다만 황송무지로소이다. 그저 부끄럽고 감사할 뿐이죠. 그러니까 인생이 무엇의 연속입니까? 감사와 주님께 고맙소와 연결될 뿐이죠.

내 인생 개떡 같은데 개떡 같은 그 일도 주님께서 잘했어, 잘했어. 이러고 있으니까... 뭐? 뭐 잘했는데? 잘한 게 있어야 잘했지. 그래,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을 했구나. 주님 시킨 적 없는데? 이건 내가 했는데? 내가 해도 주님이 시킨 일로 전부다 의미 전환을 다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첫째 시간의 제목은 뭐냐.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 노래 있죠? 뭐 꼭 불러야 됩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이것은 충격적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평생을 해도 아무리 신학을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 일 없어요.

머리 길어서 미장원에 머리 깎으러 갔는데 미용사가 어제 야근해서 피곤했는지 한쪽은 짧게 깎고 반대쪽은 그냥 둬서 맞지를 않아요. 아줌마, 이게 뭡니까? 아줌마가 은혜 받아서 오, 아무 일 없네. 외국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하면서 What's the matter? 이렇게. 아이고, 영어 방언 터지면 안 되는데. 무슨 일 있어? 아무런 문제없어요. 이게 문제 있지, 없습니까? 다음에 맞춰서 반대쪽 끊어줄게. 아무 문제없어.

주님한테 문제없으면 우리한테 문제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11014b 베드로후서1장 4절(문제없음)-이 근호 목사

우리 자신들이, 우리 인간들이 주의 일에 나설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주의 일이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이에요, 전체를. 여덟 개로 나누는 게 아니고 하나에요, 하나. ‘1’에 관한 이야기에요. 1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하나에요. 너는 믿음 있고 믿음에 덕, 두 개밖에 없지? 내가 분명히 여덟 개 다 채우라 했지? 2와 8의 문제, 8보다 2가 적다(2<8)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에 관한 문제에요. 그걸 첫째 시간으로 말하면 아무 문제없음에 관한 문제.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흠 있는데 이건 네가 마저 채우고 와야지. 모자라잖아. 그런 식의 주의 일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모든 세상의 이야기가 수천만 개, 수억 개의 의미가 있더라도 전부다 하나의 의미에서 파생되어 나온 겁니다. 전부다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의미 하나마다 개념 하나씩 붙이잖아요, 그렇죠? 개하고 소는 다르잖아요. 개하고 소는 다르고 개는 개라고 맞췄는데 소는 소인 줄 모르고 이걸 가지고 염소라고 했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겁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다 틀린 건 아니잖아. 인간들은 맨날 하는 것이 내가 죄인이지만 다 죄인은 아니잖아, 맨날 이런 식으로 있어요.

성경에서 만약 하나님의 법이 365가지라면 그 중에서 360가지 지켜도 얼추 많이 지킨 게 되니까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비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5가지 없는 건 좀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는 이유가 이 모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연 세계라 하면 자연 세계를 율법으로 촘촘히 덮고 있습니다. 촘촘히 덮는다. 머리카락을 머리에 심을 때 의사가 머리에 그물망 같은 것을 먼저 씌워요. 이 그물망 보세요. 촘촘하죠? 여기다가 막 심는다고요, 한 개에 삼천 원씩. 심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율법으로 촘촘히 다 지배되고 있어요. 통제되고 있다고요. 그 중에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긴 게 돼요.

이 말은 율법의 온전함에 대해서 하나님은 양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보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열 개이지만, 아홉 개이지만, 여덟 개이지만 그래도 다섯 개는 했잖아요, 이렇게 봐 달라 하면 안돼요. 다 지켜야 돼요.

그리고 이 율법의 모든 의미는 ‘다 이루었다’에서 비로소 의미를 분배받습니다. 의미를 분양받아요. ‘다 이루었다’에서. 율법은 인간이 지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루신 분이 따로 있어요.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율법 보고 예수님을 경유할 때 여기 문제없음이 되는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지켰잖아요, 할 때 이게 의가 돼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가 되는 겁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궁극적인 모든 복합된 의미로 하나를 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이거든요. 예수님은 아들이에요. 아들의 임무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오직 아들만 받아요. 아들 외에는 안 받습니다.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에요. 상속된 아들의 나라에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영이죠, ‘다 이루었다’의 영을 우리에게 주게 되면 아들이 아닌데 양자 삼아주는 겁니다. 양자 삼으면 예수님의 그 위치에 그 자리에 합류하게 되면 우리가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되었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용납한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모든 의미가 예수님의 의미로 완결되었음 안에 같이 놓여있을 때나 그게 되는 거예요.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의미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의미가 존재에 바탕이 되고 원천이 되는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만약에 여덟 개이고 오늘 같은 경우에 리스트가 여덟 개인데 여섯 개밖에 안하고 두 개는 남겨 놨다. 형제 우애와 사랑을 전하라, 그것은 바빠서 못했다. 직장 생활 한다고. 뭐 투잡 다니니 언제 할 시간이 있겠어요? 아침에 나갔다가 밤 11시에 들어오는데 뭐 되겠어요, 이게? 형제 우애 할라고 하는데 자고 있으니 형제 우애 안 되죠. 빠뜨렸는데 주님 재림하셔가지고 “너는 딴 거 다 했는데 형제 우애를 빠뜨렸구나.” 이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곤란하겠죠.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생각하기를 빠뜨렸다, 모자란다, 미흡하다, 이렇게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상 22장 19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절,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자, 거짓 영이 등장합니다. 이게 이쪽 편에 단일화 된 의미에요. 예수님은 다 이뤘잖아요. 다 이뤘다는 의미가 있고 이쪽에는 모자란다, 미흡하다, 빠뜨렸다, 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거짓 영이에요. 거짓된 거예요, 거짓된 것. 7개해야 되는데 6개해서 1개 남겨 놨다. 6개 한 것은 의미 있게 쳐주세요,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이 전체가 1개를 빠뜨렸다는 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이게 거짓된 의미에요, 거짓된.

양(量)적으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질(質)이 거짓된 거예요. 거짓되었으니까 최선을 다했습니다. 빠뜨렸습니다. 노력은 다 했는데 바쁘다 보니까 한 개를 못했습니다. 형제 우애는 중간에 빠졌네요. 이런 식으로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의 모든 의미를 쓸어 담아서 다 이루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방식은 모든 의미를 자기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어디서 가짜가 등장해서 나도 다는 아니지만 70%는 이뤘다고 나온다면 그걸 가지고 아이고, 70%나 하셨어요,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네가 바로 거짓되다 이 말이죠. 주님이 진리면 주님 외에는 거짓이에요, 거짓. 악마에요. 마귀의 유혹이라니까요.

성도가 문제없음을 부여받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요구에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 이미 주님이 아우르는 주의 일에 합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질적으로. 그러면 우리는 질적으로 그럼 우수합니까? 라고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질적으로 우리는 쓰레기에요.

주님이 율법 안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 그리고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자, 도저히 자력으로서 하나도 지킬 수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죽은 자를 없는 자를 있게 하시는 그 효과를 주께서 다 이루었거든요.

따라서 주님의 다 이루심, 주님의 문제없음을 받은 사람은 필히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바로 쓰레기구나. 아, 내가 의지가 조금 모자라구나, 이게 아니에요. 내가 완벽하게 착하지는 않구나, 이게 아니라 나는 아직도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마귀 일이 되는 이유가 주께서 저쪽 편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벌써 게임 오버, 끝났어요.

이미 다 이루어서 주께서 아버지로 기뻐하고 있는데 뒤늦게 와가지고 “제가 아버지가 원하는 짐승의 고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야야, 나 벌써 축복 다 줬어. 야곱에게 다 줬어. 에서 너는 소용없어. 야곱이 나를 속여서 벌써 다 가져갔어.” 복은 다 가져갔어요. 에서가 하는 말이 “아버지여, 조금이라도 남겨둔 것 없습니까? 찌꺼기라도, 국물이라도 없습니까?” “국물도 없다. 너는 이제 영원히 동생한테 지배받아라. 너는 동생을 주라고 섬겨야 되고 너는 저주받아야 돼.”

아주 냉혹하고 우리 인간들이 감히 생각 못한 차가운 주님이 설계한 세상의 현실 구조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설계한 게 아니라 주님이 설계한 거예요. 아주 차가워요. 주님의 문제없음, 주님의 다 이루심,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이것은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에요, 거짓 영에.

3+5=? 8. 거짓말, 인간아! 2×7=? 14. 거짓말! 그게 거짓말이야. 2×8=16이라 한다고 그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됩니까? 안되죠. 하나님, 2×8=16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래서? 뭐? 그게 내 영광이 된다고 생각 하냐? 그걸 가지고 진리이고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거짓 영, 악마가 배후에서 그렇게 너를 세뇌시켜서 그런 사고방식이 있다 이 말이에요.

열왕기상 22장 19절에서 21절까지 그 내용은 천상회의에서 본 거예요. 미가야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천상회의에 올라가게 한 거예요. 그래서 거짓 영이 이 세상을 거짓되게 속이도록 하는 그러한 매카니즘, 그러한 자극조차도 하늘나라 하나님이 이미 알고계신 이야기에요. 네가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게 아니고 그게 주님이 시킨 일이라니까요. 악마가 거짓 영을 유포하는 그것도 주께서 시킨 일이에요. 모든 의미를 주님 혼자 아우르는 거예요, 전부다. 주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이죠.

이제부터 어려운데 그러한 단일의미성, 갑자기 제목을 <단일의미>로 하고 싶은데 이 단일의미가, 아무 문제없음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그냥 이것이 덕이고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절제고 이것이 인내고 이것이 형제 우애고 이게 사랑이고 이게 지식이다, 라고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단일의미에서 온 이 믿음은 지상에서 질적으로 거짓 영을 먼저 하나님께서 유포시켜놨거든요. 그 거짓 영에서 마중을 나오는 거짓 믿음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가 또 거짓된 믿음에 대한 거짓 개념을 알아야 우리가 진짜 믿음의 의미를 추후에 아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네가 평소에 거짓되게 살았잖아, 믿음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은 믿음 없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파란 불에 건너가면 차들이 와서 나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우리는 횡단보도를 파란 불에 건너가는 거예요. 모든 일이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여기 삼발이 안 무너질 거라 믿고 이거 하는 거예요. 어떤 것도... 이게 벌겋게 보인다고 이게 피가 아니고 독이 아니죠. 그러니까 마시는 거예요. 먹자. 설마 독을 탔겠나? 또 독을 탄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사람들은 이걸 쉽게 말해서 선입견이라 합니다, 선입견. 선입견에서 나 행복위주로 내가 의미를 내 쪽에서 출정(出征)시킵니다, 출정. 출정이란 말 알죠? 군인들 전쟁 나갈 때 보내잖아요. 모든 의미는 내 쪽에서 출정해서 내 쪽에서 회수가 돼요, 나한테 유리하도록. 유리한 게 나에게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은 고요하지 않아요. 각자 내뿜는데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 주인공을 더욱더 기쁘게 하고 내 원래 의도에 부합되도록 의미를 던졌다가 거기에 걸려들어라, 해서 그 의미를 회수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이렇게 군가 부르면서 퇴근하는 겁니다. 오늘도 걸려들었어, 오늘도 성공했어, 이런 거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재난지원금 준다 했잖아요, 재난지원금. 질문할게요. 재난지원금으로 헌금이 될까요, 안 될까요? 재난지원금은 동네시장 같은 데만 되고 대형마트도 안 되거든요. 그건 메이저 회사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소비 진작의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서민들에게 써라. 그럼 재난지원금으로 목사 월급은 안 됩니까? 가난한 목사도 서민인데요. 어떻습니까? 결국 이 말은 나라에서 의미를 출정시킬 때 교회를 나라에 포함 안 시키는 거예요.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교회 가는 천당 갈 인간들은 짜증난다, 이래가지고...

이처럼 의미라는 것은 의도가 있어요. 의도 없는 의미는 없거든요. 결국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이익이 되는 조건 하에 사람들은 그걸 의미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인간들과 싸웠던 겁니다. 의미를 놓고 싸웠던 거예요, 의미를 놓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믿음이에요. 자기 잘 되기 위한 믿음이에요. 그럼 그 믿음에 어떤 내용도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겠다, 오실 메시아를 믿겠다, 도 이 믿음 안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로 메시아가 왔거든요. 진짜로 메시아가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은 어떻게 활용되느냐 하면 진짜 메시아를 죽여 버리는 쪽으로 믿음이 적용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이었습니다. 너희들의 믿음은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희들이 구원받기 위한 믿음인데 네가 구원받겠다는 그 믿음이 결국은 예수님을 살해하는 데에 써먹혔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믿음의 의미는 그 안에 ‘나는 꼭 구원 받아야 돼’가 포함 안 되어 있어요. 나, 나는 꼭 구원해주세요, 라는 인간의 앞선 요구는 주께서 완전히 개무시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이용한 거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저는 빠뜨리면 안 돼요. 저는 꼭 천당 가게 해주세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니까.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당 가게 해주세요.’ 라는 요구조건은 삐- 주께서는 그걸 믿음의 내용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 베드로후서에 나오잖아요. “믿음에 덕을”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에 덕이니까 자기 선입견부터 이제 출발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신의 성품이 되기 위해서.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기 쉽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한번 봅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중간에 ‘정욕’이라는 단어 나오죠. 보입니까? (네) 아, 보이는구나, 그게. 그다음에 세상에서 뭡니까? ‘세상에서 썩어질 것’ 나오죠. 이거 지금 누구한테 있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있다 했잖아요, 이 세상에.

이 세상은요. 모두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 전체가 썩어질 세상이고 정욕이 파고를 치는, 정욕이 요동치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비어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에요. 이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산물이에요. 이 세상의 생산물이에요.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애가 배 안에 있으면서 아, 지금 말고 대선 끝나고 태어날게. 뭐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나온 거예요, 그냥. 이것은 부모 탓이라 하지 마세요. 부모도 지 마음대로 안돼요. 태어난 출발부터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누구 마음대로입니까? 그것은 천상회의 마음대로죠. 천상회의에 악한 영, 거짓 영도 있다 했죠? 우리는 그 하나님 세계에 농락당한 거예요.

우리는 어떤 자율이나 자유의지라는 게, 그런 단어 자체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 자유의지가 있다, 없다 상관없이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는 채로 움직입니다. 자유의지가 없으면서 새삼스럽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결정권이 있느냐... 얼마나 없었으면 그거라도 이야기해서 위로 받는지.

아예 애초부터 우리 것, 내가 꾸려나가는 내 인생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귀를 이 땅에서 통치자로 왕 노릇하라고 집어넣은 거예요. 왕이라 하는 것은 ‘꼼짝 마라’ 에요. 왕이 길 가는 노예보고 ‘게 섰거라.’ 하면 무조건 서야 돼요. 무조건 서야 된다고요. 평소에 내 팔은 내가 흔든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못 씁니다. 얼어붙어요, 왕 앞에서. ‘게 누가 있느냐?’ 하면 ‘마마.’ 하고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수루메 게임입니다. 일본말로 수루메, 우리말로 오징어. 이 땅은 오징어 게임이에요. 좋든 싫든 게임 속에 빠졌어요. 계급사회입니다. 가진 자에게 아부해야 푼돈이라도 건져요. 이 구조를 내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니까 맞닥뜨린 거예요. 태어나니까 우리가 마주하는 거예요. 몰랐어요, 그거?

이거는 주님도 예외 없어요. 주님도 이 땅에 오니까 악마가 주님한테 길들이기 하는 것 한번 보세요. 신참 길들이기. 신입이~ 해가지고 예수님을 신입으로 보고 길들이잖아요. 돌이 떡 되게 하라고 이런 식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

악마의 지시라고 우리가 못 느끼는 이유가 악마는 모든 의미가 예수님 하나로 종결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꾸 우리 편에 서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로해줘요. 네 인생은 네가 개척하는 거야. 아무도 안 도와줘. 네가 열심히 해봐. 그러면 언젠가 너는 성공할 수 있어. 우리가 주의 일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알겠죠? 모든 것을 주께서 어우르기 때문에.

자, 정욕, 썩어짐. 이것이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나오죠. 세상은 말씀대로 되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주의 문제없음은 무엇을 끄집어내는가? 정욕이 이미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문제없음이 작렬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은 썩어질 것들로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가 기지국이기 때문에, 기지국. 우리가 주님의 호출대상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통신의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함께 있으면 세상의 썩어질 것 속에 우리가 태어났으며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사고방식, 선입견들이 주님 보기에 썩어질, 질적으로 이미 거짓 영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발견하는 즐거움.

따라서 드디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죠.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신의 성품이라 하니까 천사처럼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신의 성품은 이미 이 땅에 오셨습니다. 행세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 분이 신의 성품이에요.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에요. 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보고 싶냐? 나 봤으면 하나님 다 본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 외에 더 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자를 대서 어디 한번 보자. 키가 얼마냐, 이거 뭐 양복 할 것도 아니고, 가슴둘레 얼마냐 이거 재고 하는 게 형상이 아니라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시는 일, 기능, 취지, 의미, 그게 형상이에요, 주님 하시는 일이. 신의 성품이 그런 거예요, 질적으로.

따라서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믿음, 덕,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꽂아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일단 믿음이잖아요. 믿음이 우리한테 딱 들어오게 되면 ‘아, 썩어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이런 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악마가 거짓 영이 하는 것으로 속아왔구나.’ 그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믿음에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믿음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준 믿음이 썩어질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썩어질 믿음을 발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이유가 내가 이 육신이 그 따위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도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게 바로 썩어질 믿음 아닙니까?

여러분, 행복이라는 말은 이게 아주 위험한 말이에요. 우리는 행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불행이 있어야 불행을 무서워하죠. 불행이 없는데요. 불행하고 싶어가지고 아예 자기를 불로 지져도 불행이 안 되는 게 문제가 돼요. 진정한 불행은,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불행해도 복이 된다는 그 자체가 불행이다.

아무리 지옥을 갈라 해도 갈 수가 없어요,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기지국이 됐기 때문에. 기지국에서 본사가 철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지국이란 이런 처지가 내 쪽에서 변계, 변경이 안 돼요. 완전히 몰수되었거든요.

마리아가 보여준 하나님의, 신의 형상은 뭐냐. 그냥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거예요, 낭비하는 것. 그러면 그 낭비한 것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마리아야, 너 낭비했지? 마리아야, 낭비했기 때문에 이제는 네 건 없지? 그럼 마리아 너를 내가 사용해도 되지? 할 말 없지? 네 것 다 빼냈으니까. 살림 다 나갔으니까. 낭비 했으니까.

그런 버려진 너를 가지고 뭘 하느냐.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은 왜 가짜 믿음인가, 세상은 왜 가짜 덕인가, 세상은 왜 가짜 절제냐, 이걸 보여주는 데에 마리아가 한 행위 있잖아요, 그 낭비한 행위 그걸 앞장세워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를 다 전개시켜버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12장 가지고. 이런 여인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 퍼뜨려버리는 거예요.

마리아가 향수를 뿌릴 때 그 향수가 예수님의 신체 앞에서 얼마나 오래 갔겠습니까? 1번, 5분. 2번, 2시간. 3번, 3일. 4번, 6개월. 몇 번이겠습니까? 이게 조금 뿌린 게 아니고 옴팍 뒤집어썼으니까 많이 가야 한 2시간 갔을 거예요. 그럼 또 2시간 뒤에 마리아가 향수 구해서 갖다 부어야 됩니까? 아니죠.

마리아가 향수 붓는 것은 하나의 작은 의미에요. 전체 의미를 아우르는 데에 작은 의미가 드디어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참여하게 되면 전체 하나의 바퀴로 돌아가게 되는 이 의미가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계속해서 마리아의 작은 일이 온 천지 구석구석까지 그 향기가 파급되는 거예요.

마치 놀이동산에 가서 회전목마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어릴 때 기억으로 회전목마 타고 싶어서 타고 엄마가 안고 있던 애는 자기 남편한테 맡겼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애가 아빠 품에 안겨서 엄마를 찾는데 엄마가 회전목마를 방금까지 타고 있다가 도니까 엄마가 안 보이는 거예요. 엄마 없다고 울고 있으니까 저쪽 편에서 또 튀어나오는 거예요. 엄마, 여기 있네. 아이가 좋다고 와~하는데 또 돌아서 가버린 거예요. 엄마는 지금 회전목마 속에 마리아의 향기를 뿌리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엄마가 회전목마 회장님은 아니에요. 사장님은 아니지만 거기에 그냥 돈 주고 탔지만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그 업무에 참여했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주님이 하게 하셨다고. 그걸 믿는 게 진짜 믿음이에요.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한 작은 일을 주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겨 예수님의 자신 일의 일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한테는 두뇌가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팔이고 사지에요. 팔다리뿐이에요. 두뇌 부분은 주님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너 같은 거, 머리 쓰지 마. 머리 쓰지 마. 너 머리 없어. 너는 두뇌 없어. 이런 관계, 머리와 팔의 관계,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이 연결고리가 덕, 이게 절제, 이게 지식, 이게 형제 우애, 이게 사랑입니다.

썩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이 땅에 두면서 우리 이 세상 전체가 썩어질 것이고 그리고 전부다 정욕에 휩싸여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이루신 입장에서 그 실재를 낱낱이 파헤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가는 길이 성경에서는 고난이 많다 하잖아요. 고난이 많지만 사도 바울은 삼층 천을 보고 아주 즐거워했어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삼층 천에 올라갔잖아요. 삼층 천에 올라갈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사자성어로 ‘나는 없다’에요.

왜냐하면 삼층 천에 올라간 그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다 했으니까요. 본인이지만 본인이 본인을 잃어버릴 때 이것은 나한테 있던 나의 의미가 이제는 나의 의미를 떠나서 주님에게 있는 나의 의미로 의미가 전환되고 말았던 거예요. 의미가 바뀐 거예요. 그걸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의 나는 두뇌가 필요 없고 내가 따로이 나를 위한 의미를 가질 필요도 없어요. 그냥 선물로 부여받은, 할당받은 의미에요. 내가 어떤 향수를 뿌린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주께서 딱 그 공간에서 그 시점에 나로 하여금 하도록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시키신 일이에요.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어떤 일도 좀 뻔뻔스럽지만 문제가 없어요. 완벽하게 문제없습니다. 서울 시내에 시속 50으로 가야되는데 시속 100으로 가면서 아무 문제없어요. 그래가지고 미러 다 부숴지고 앞차, 뒤차 박아가지고 2000만원 물어줘도 아무 문제없어요. 왜?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이정도하면 거의 미친 수준이에요. 광신수준이에요. 이게 믿음이고 이게 덕이고 이게 절제에요. 상상도 못하죠. 시속 50이구나. 절제해서 40으로 가자. 이게 절제인데 그게 아니고 50인데 100으로 가는 이 절제.

문제는 뭐냐 하면 100으로 가는 게 절제이기 때문에 내가 100으로 한번 가봐야지, 이게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절제가 아니고 이게 덕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공이어야 되는데 갑자기 내가 이 썩어질 육신이 하고 싶어. 이 정욕이 가만있지 않고 나대기 마련이에요. 주님 핑계대고 이 판에 한번 100놔봐? 내 차도 아닌데 주님 찬데 한번 박아봐? 벌써 이건 썩어질 정욕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베드로후서 1장이 어떤 식으로 현실을 전개시키느냐가 중요하고 핵심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 받냐, 안 받냐를 확인하는 게 아니고 역시 말씀은 말씀대로 빈틈이 없어. 나를 말씀에다가 집어넣어서 말씀이 스스로 기어이 말씀되게 실현시킨다는 그 놀라운 기적적인 신기한 일을 성도는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이게 믿음이구나. 자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는 두뇌가 없으니까. 아, 주님 주신 덕이 이런 거구나. 이게 지식이구나. 이게 절제구나. 이게 인내구나. 이게 경건이고 이게 형제 우애이고 이게 사랑이구나. 이런 걸 주께서 기지국이라고 나한테 계속 공급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 중에서 여러 가지 다 있지만 세 번째 한번 봅시다. “믿음에 덕을” 자, 정답은 뭐냐. 예수님이 가진 믿음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덕을 거기다 드러내는 일을 예수님의 일대기를 통해서 하셨다. 그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했죠? 그게 덕이에요. 그게 덕이에요. 덕의 원형입니다. 참 덕스럽죠? 이 뱀 새끼야. 이게 덕이에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금 기웃거릴 공간인 줄 알아? 네가 어딜 함부로 끼어들어? 어딘데 네가 들이밀어? 야, 도끼 가져와. 쟤 잘라버려야겠다. 아이고, 얼마나 덕스러운지 몰라요. 얼마나 덕이 풍부한지 몰라요.

항상 원형을 예수님께 찾아야 되고 사도에게 찾아야 돼요. 사도 바울이 복음 모르는 사람을 얼마나 저주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게 덕이에요. 그리고 그게 절제고요. 그게 지식이고 그게 믿음이고 그게 경건이에요. 그게 형제 우애이고 그게 사랑을 거기다가 더하는 거예요.

원형이 따로 있습니다. 나한테 의미되는 식으로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그런 노림수를 해버리면 그건 썩어질 품성이에요. 저주받을 품성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는. 아직도 자기한테 머리가 있는 줄 착각이나 하고요. 내가 하나님께 가는 통로를 내 쪽에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복음을 빙자한 거짓 영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덕은 그냥 주시는 거예요. 모든 게 선물이고 그냥 받는 거예요. 아침 9시에 보니까 믿음이 선물되어 있고 10시에 보니까 덕이 선물되어 있고 그날 바빴어, 여덟 가지 다 오느라고. 그다음 오후 2시에 절제가 선물되어 있고 오후 4시에 보니까 지식이 되어 있고 또 형제 우애가 공급되어 있고. 이게 공급하라 아닙니까? 계속 공급해 들어오는 거예요.

와~ 내꺼다. 니꺼 아니야. 내가 하나님의 기지국한테 보낸 거야. 너한테 보낸 게 아니고 네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성품에다가 신의 성품에다가 내가 배달한 거야. 신의 성품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을,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을 확인차원에서 보냈단 말이죠. 절제 면에서도 문제없고 지식 면에서도 문제가 없고요.

지식 면 한번 봅시다. 지식 면의 정답은 고린도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지식에 관해 나와 있어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잘 들어보세요. 이미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하기 전에 복음이 없는 세계, 썩어질 세계, 정욕대로 사는 세계는 그 방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지식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 받은 지식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아까 얘기했습니다. 지식의 모든 의미는 단일의미라고요. 아, 오늘 제목을 ‘단일의미’로 하고 싶기도 하고... ‘단일의미’도 후보감이다. ‘문제없음’ 이것도 하고 싶고... 어느 것이 좋은가 여러분들의 무기명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단일의미. 단일의미가 뭐냐?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거예요.

그들의 높아진 것을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요. 예수님께서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그런 거짓된 이론과 과학과 철학이 꼭 필요했었었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단일의미로 그 현상을 새로운 의미로 생각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왜 그렇게 하는가? 6절에 보면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네가 문제없을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 문제 있는 것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뭘 준다?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벌하려 하심이라. 벌 내리는 것도 누가 벌 받는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벌 내리는 그것조차도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갖는, 하나로 아우르는 의미 속에 포함이 된 예수님 일의 일부에요, 벌 주는 게.

주님께서 지옥 불에 보낸다는데 “주님이 자제해주시고 주님께서 절제를 이야기하시면서 절제 안하시면 안 되잖아요. 절제 못하시면 안 되잖아요. 절제하세요. 저 사람은 우리 어머니인데 벌 주면, 지옥가면 안돼요.” 이렇게 말린다면...... 말리는 사람이 있겠어요?,주님 알고?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말리죠. 결국은 단일의미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통내버리죠.

자기 어머니를 지옥 보낼 때 보내면서 “너 믿음 있다며? 믿음에 절제, 뭐 자랑했잖아. 절제해보지.” “다른 건 다해도 이번만큼은 절제 못하겠습니다. 주님 잘못하신 거예요. 주님의 처사, 지금 잘못된 처사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했는데.” 이런 게 주저리 나오는 거예요. “‘그래.’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너한테 속아 넘어갈 줄 알았어? 그것은 나의 단일의미가 아니고 네 의미야. 네가 다른 엄마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 네 엄마라는 단일의미를 네가 감추면서 안 들키지 싶었지. 결국은 들켰잖아. 그게 바로 네 정욕이야.” 썩어질 거예요. 왜냐하면 정욕과 썩어질 것은 예수님의 단일의미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악마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저쨌든 간에요. 우리가 문제없어야 될 이유가 전쟁은 끝났어요. 끝났잖아요. 끝나고 난 뒤에 그 영화에 출연했던 게스트, 영화배우들 이름이 마지막 자막, 마지막 장면에서 올라가는 겁니다. 007역에 이 아무개, 이런 거요. 본드 걸에 누구 아무개. 이런 식으로 명단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단일의미에 캐스팅된 하나의 배우들이에요.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우리 두뇌에서 안 짜죠. 주께서 짜게 하시는 거예요. 너는 태어나면서 개 세 마리 키워라.

모든 계획이 나 좋으라고 했던 일이 아니라 주님 좋으라고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나를 거기다가 합류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요. 세상에 썩어질 내 욕망에서, 정욕이라 하지만 요새 우리 아는 용어로는 욕망, 그냥 욕망이에요, 욕망을 나쁘게 하면 욕심, 이 욕심에서 나오는 이 믿음, 절제 이것이 어떤 것이고 주께서 이런 의미 말고 주님께서 주신 의미는 이런 세상적인 믿음과 절제의 한계를 주님이 믿음을 줌으로서 부딪침을 통해서 그 차이점을 알게 하는 거예요.

아, 절제가 절제가 아니고 믿음이 믿음이 아니구나. 내가 행복하고 내 뜻대로 잘 되었다는 것과 은근히 뒤로 비밀거래를 했다는 그것을 확연하게 드러내죠.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또 깨닫게 되니 또한 추가적인 감사가 보너스로 또 주어지는 거예요. 야, 이거 뭐 복음 안다고 해놓고 또 나만 챙기고 있군요. 이런 것을 주께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베드로전서 1장에서와 같이 피를 뿌려서, 피 뿌림으로서 이렇게 완벽히 문제없음을 만들어준 은혜에 대해서 또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계속 부딪쳐야 돼요. 부딪쳐야 이게 진리이고 이게 거짓 영이고 그걸 구분하는 그 작업에 충실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이 원형은 전부다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하신 거예요. 뺨 맞으시고 십자가 죽기까지 자기를 복종케 하셨으니 아버지께 복종한 거예요.

인내, 그다음에 경건, 형제 우애. 형제 우애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이 복음 안에서 형제가 되려면 둘 다 마리아가 되어야 돼요. 둘 다 자기를 던져버려야 됩니다, 둘 다. 본인이 본인의 형제 우애를 가지고 오면 안돼요. 둘 다 단일의미로 던져버려야 돼요. 둘 다 두뇌가 없어야 되고 둘 다 자기 것이 없어야 돼요. 던져버려야 돼요. 그리고 단일의미에서 할당받을 때 형제 우애로 맺어지는 거예요.

형제 우애 다음에 뭡니까? 사랑이죠. 전에 낮 설교 시간에 사랑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다시 이야기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죽어라고 싸워라, 둘 다. 죽어라고 싸우거든요. 왜 싸워야 되느냐 하면 싸울 때 자기 의미, 자기 행복 의미가 다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 의미가 무기거든요. 내 걸 지키는 무기. 이걸 다 내놔야 돼요. 다 내놓을 때 더 이상 내놓을 게 없어요. 막 욕도 해보고 뭐라고 뭐라고 하고 욕하고 보복하고 질투하고 너 이제 죽었다 하고 막 꼬집고 온갖 거 다하고 난 뒤에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게 있거든 그게 바로 사랑이다.

많이 싸웠나? 왜 더 싸우지? 힘이 없어 못 싸우겠습니다. 왜 더 욕하지? 내가 아는 욕은 다 소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욕이 없어 안 나옵니다. 싸우고 난 뒤에 아우르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행복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남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한 하나의 무기술이에요.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사랑할 때 좋다고 하다가 헤어질 때는 아파. 많이 아파. 사랑은 이렇게 아픈가봐. 대중가요의 99%가 사랑의 좋음과 헤어짐의 아픔이에요. 그거 빼놓고는 아무 가사를 쓸 수가 없어요. 내가 차마 못한 이야기를 가수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면서 음악 듣고 있는 거예요. Fake love~ 해가면서. 페이크 러브. 방탄소년단이 불렀던. fake love, 거짓 사랑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거짓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싸움입니다. 내가 사랑해 준만큼 네가 해준 게 뭐가 있느냐 하는 자기 사랑에 대한 열매를 자기가 만회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부산 강의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사람들이 헌금할 때는 반드시 헌금 액수보다 회수될 용의가 있을 때만 헌금한다고요. 안 그러면 낭비가 되니까 낭비라는 미친 짓을 왜 하냐. 돈 갖다 뿌리는 짓을 왜 하냐. 이거 줘놓고 하나님께서 ‘네가 줬구나. 내가 30배 갚아줄게.’ 하는 그런 기대가 있을 때, 회수될 용의가 있을 때만 헌금해요. 돈이 아까워도 너무 아깝거든요.

돈이 어느 정도 아까우냐 하면 자기 부엌칼로 지 팔을 긋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런 미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을 갖다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 헌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만큼 했습니다. 했씁니다. 했씁니다!’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30배는 너무하고 본전이라도 찾게 해주세요.’ 그럴 경우 아니면 헌금 안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그래서 죽어라고 나를 공격하고 싸워라. 그래도 뭔가 남는 게 있거든, 남는 게 없으면 그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실컷 자기 본질 다 드러내놓고, 일종의 낭비죠, 마리아처럼 다 던져놓고 그래도 남는 게 있어요. 주께서 이런 못난 나를 대신해 채찍 맞아서 영생 주셨구나. 그게 바로 온전케 하는 단일의미에 흡수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모든 사랑과 덕과 절제와 경건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믿음과 절제가 얼마나 거짓되고 가짜인 것을 노출시키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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