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한계성
2021년 11월 14일 본문 말씀: 욥기 33:8-12
(33: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33: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33: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33: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33: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엘리후가 보기에 욥은 좁은 한계성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가 고난 받을 이유가 없는데 고난이 온 것은 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히는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히 합리적 추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성을 욥은 자신의 논리로 접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좁은 한계성입니다.
엘리후는 마치 욥은 고난없는 일반인처럼 대우합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반인들도 나름대로 일상생활 자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늘 예측못할 일을 마주하면서 당황합니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일반인들도 욥처럼, “내가 뭐가 잘못된 일이 해서 이런 고초를 당하는가”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엘리후는 세상을 한계를 넓혀봅니다.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욥기 37:9) 욥기 38:1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실 때에 폭풍우가 칩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욥 38:1) 인간의 개인적인 아품이나 상처가 아무리 깊다해도 대자연 전체가 소리치는 폭풍우 앞에서 너무나도 작은 문제인 겁니다.
엘리후는 이처럼 세상을 보는 범위를 넓혀서 보니 욥이나 욥의 세 친구가 발언하는 모든 내용들의 한계가 제대로 보인 겁니다. 그리고 한심스러운 겁니다. 게다가 욥조차,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으로 본다고 오해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게 되면 필히 나타나는 한계성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욥 33:10-11) 이처럼 세상을 좁게 보면 넓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환상(환타지)가 됩니다. 각자 자신들이 내뿜은 망상으로 형성된 세계 속에서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엘리후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욥의 시대의 한계성 폭풍우입니다. 대자연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대자연이 함께 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조차도 대자연의 일부에 해당됩니다. 자연스럽게 인간은 왜소함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왜소한다면 자신이 당한 고통도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친구들보다는 넓게 보는 엘리후는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담합니다.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욥 32: 21-22)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말은, 기존의 세계관의 한계를 잘 안다는 말입니다.
즉 기존 인간들이 무엇에 주눅들면서 벌벌 떠는지를 잘 안다는 말입니다. 세상 인간들이 만들어낸 망상의 구조 안에는 법으로 체제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법이란 옳고 그름을 놓고서 판정당하면 벌칙과 상으로 매사가 돌아가는 식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제까지 바르게 살던 사람도 오늘 악한 일을 하면 벌칙으로 어제까지 살았던 생활을 접어야 하는 원칙 같은 겁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바로 이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더욱더 좁은 한계성에 집착하게 만든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내가 얼마나 철저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놓고서 자기 존재성을 구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의로운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6:10-12에 보면, “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크게 넓혀집니다. 기껏 사람 대 사람의 투쟁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자존감과 체면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개인이 나설 전쟁이 아닌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 한 분의 가치와 효과에 대한 싸움입니다. 악마가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악마의 싸움과 칼이나 무력이나 권력을 들고 나올 현장이 아닙니다. 오로지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내가 설쳐대는 것이 내용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뿐인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악마 입장에서도 ’예수님만이 특별히 행함‘이라는 사실을 못 듣게 하는 식으로 전쟁을 진행시켜 나가게 됩니다.
즉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내가 아닌 주님이 뭘하셨다‘가 악마를 이기는 유일한 무기라는 말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보여지는 세상 보는 안목의 한계성은 모든 인류의 한계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행한대로 세상이 그대로 따라가주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면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도록 마음먹어도 결국에서 하나님을 비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죄의 업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거에 일평생에 자신이 저질은 죄과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이생과 저생 사이에 장막같은 것이 있다고 여겨서 현생에 못다 이룬 평안을 내세에는 원없이 맛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종교계는 이러한 일반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들을 내놓게 됩니다. 인도의 갠지스강에는, 평생을 통해 지은 죄업을 한꺼번에 씻겨내겨가기 위해 갠지스강에 목욕하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죽을 때 다 돼서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씻어놓고 또 세상에 나가 죄지은 씻은 것이 무효가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발상이 갖는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하고 상대해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대하실 분을 하나님께서 따로 정하시는 이유는, 이 지구상에 그 어느 인간도 악마의 참소와 정죄함을 이길 위인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씻겠다는 의도조차 이미 자신의 정당함을 챙기려는 사적인 일이요 좁은 한계성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일을 두고 말합니다. 이 십자가 일로 모든 인간들은 이미 죽은 시체들입니다. 시체는 시체다워야 합니다. 죄를 씻고 말고는 주님 소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나를 위해서는 살기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9강-욥기 33장 8~12절(좁은 한계성)2111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3장 8~12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네 번째 등장하는 친구 엘리후는 욥의 세상 보는 한계에 대해서 너무 좁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욥기 32장 뒷부분부터 엘리후는 지금 가슴이 벌렁벌렁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아요. 32장 19~22절에 보면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같고” 곧 폭발할 거 같아요,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바로 엘리후의 말이라고 생각해도 되고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마음가짐으로 폭발하듯이 이 지옥같은 인간세계에 어떻게 섞여 살았는지 그 심정을 우리가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이 그냥 무심코 심심풀이로 나온 말씀이 아니고 터질 듯이 나온 것이고 폭발하듯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이 말씀을 전했던 갈릴리 주변 도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이런 말씀을 예수님의 터질듯한 심정으로 헤아려야 다소나마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2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게 전도예요. 주님의 전도는 이런 심정을 깔고 이런 말씀을 전한 거예요. 그리고 주님의 전도 특징은 몇 사람 더 건지려고 하시질 않아요. 그냥 사방을 둘러봐도 지옥인데요. 주님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겠습니까. 아무 기대를 걸 것이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일절 기대를 걸 것이 없다는 마음이라도 가져달라는 그런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일절 우리에게는 더 살 이유도 없고 뭘 더 해 봐야 나아질 기세라곤 없다. 그걸 주님께서는 아첨하지 않는 태도로써 거침없이 주님께서 말씀을 전했던 겁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만날 때 특징이 그래요. 그 사람을 자꾸 자기 소유화시키려는 경향들이 있어요. 한번 꼬셔볼까. 내 사람 만들어 볼까. 꼬실 생각하지 말고 내 소유 만들 생각하지 말고 복음을 설명하세요.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삐지든 말든 나는 모르겠고 나는 이렇게 터져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그거 설명하라고 아직도 우리 목숨이 간당간당 살아있습니다. 항상 아침마다 이런 마음으로 사세요. 눈 떠 보니 살아있네.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어, 눈 떴네. 이거 웬일이야’라고. 그래서 아첨하지 않는다.
욥기 32장 22절에 보면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라는 강력한 태도로 엘리후가 주장합니다. 이 아첨한다는 말은 결국 무슨 전제가 깔리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는 그저 사람들이 아첨하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기분 나쁘지 않은 식으로 그저 환타지, 망상과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고 엘리후는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33장 3절에 보면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라고 엘리후가 처음 32장부터 지금까지 계속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답답하다. 나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들 이야기 들으니까 도대체 더러워서 못 듣겠다. 내가 참지를 못하겠다. 나이 많다고 지혜 있는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지혜 없으면서 왜 그리 말이 많으냐’라는 식으로 32장에 되풀이됩니다. 33장까지 계속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본문을 붕 띄워서 갑자기 33장 8절로 온 이유는 그 앞에 엘리후에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겁니다.
엘리후의 심정은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욥과 세친구가 세상 보는 환경이 너무 좁다는 거예요. 너무 작다는 겁니다. 큰 한계를 볼 줄 모른다는 겁니다.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런 중요성이 있어요. 엘리후가 보기에 지금 욥은 고난받았다고 보는데 엘리후는 지금 욥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안 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우, 나 많이 아파’라고 욥이 하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픈데 뭐 어쩌라고. 너 아픈 것과 하나님과 무슨 관계 있는데’라는 이런 식이에요.
그전까지는 욥의 세친구가 욥에게 ‘많이 아프지. 죄지은 거 있으면 회개해. 낫게 해주실 거야’라고 했는데 네 번째 친구는 범위를 넓혀 보자는 거예요. 욥은 엘리후에서 나중에 하나님에게로 넘어가는데요. 공통점이 있어요. 엘리후가 폭풍우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난 그 지점에서 38장에 보면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라고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폭풍이라는 것은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겁니다. ‘아프다, 기침 난다’라고 해도 갑자기 새카맣게 폭풍우 몰아쳐 버리면 사소한 일이 돼요. 뭐가 사소한 것이 되냐면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소한 일이 돼요. 우리는 개미가 살아있는 것을 사소하게 보잖아요. 모기가 살아있는 것을 귀찮게 보죠. 왜 우리는 그렇게 보지를 못 해요. 개미 한 마리, 모기 한 마리 가치밖에 안 된다는 그걸 보는 눈이 왜 우리에게 없습니까. 그건 한계를 넓히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 엘리후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것 가지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이것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 자체가 욥이 고난받았다고 우기지만 일상생활 자체가 결국 욥의 고난과 레벨이 같은 레벨로 우리는 지내고 있어요. 아침에 눈 떠서 밥 먹고 잠자고 하는 일상자체가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한계를 결국 너무 좁게 본 거기서 나온 고통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아는 것은 ‘힘들다, 힘들다, 맨날 힘들다’라고 하면서 죽을 때는 ‘죽으면 좀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 숨이 끊어지면 좀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만 해도 하루에 50명씩 자살하잖아요. 신문에 나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자살을 해보겠다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5천 명도 넘을 거예요. 5천 명이 뭐예요, 50만 명 넘을 거예요. 그건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인간의 환타지, 인간이 서로서로 동의하고 인정했던 그 환타지 망상 세계에는 뭐가 자리 잡고 있느냐 하면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법이 개입되어 있어요.
이거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저주 아래 태어나서 법에 시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악마가 인간이 법에 잡히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악마는 인간을 계속 놀리듯이 참소하죠. 고자질하죠. 얼레리꼴레리 하죠. 네가 그렇게 못 사는 것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계속 우리 양심에 고자질하고 하나님에게 고자질하고. ‘제 사는 것 좀 보세요. 하나님 당장 쳐버리세요. 지옥 불에 보내세요. 하나님 같으면 법대로 해야죠. 법대로 하면 저것은 살면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하나님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카톡으로 저에게 글을 보내신 분이 있는데 멀리서 복음을 들으시는 분이에요. 그 사람이 쓴 단어가 생각나요. 그분의 표현대로 하면 ‘깐족거린다’라고 했어요. 까분다는 말이죠. 악마가 계속 깐족거리면서 그 깐족거림에 파동이 우리 마음까지 계속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법을, 얽히고설킨 철재 구조물 같아서 우리는 매일같이 나만의 작은 환경에 집을 짓고 있어요.
구조는 법인데 그 법에서 무슨 희락이 나오고, 평안이 나옵니까. 법인데요. 맨날 내가 나보고 지적하는데. 법대로 했냐고, 바르게 했냐고,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맨날 나에게 지적하는데 거기에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욥이 고난받기 전에 열심히 살아온 것을 욥은 그냥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어도 다 덮어 주셔서 사랑이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본인에게 육체적인 고통이 오니까 갑자기 자기가 의식하지 않았던 법이 자기를 칭칭 감고 있었던 거예요. 법이 꼼짝 마라고 삼손처럼 칭칭 감아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 정 좋을 때는 기마이 막 씁니다. ‘사도 되나?’ ‘사라~ 사라~다 사라’라고 되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베풀 때는 법 없이 베푸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지적해버리면 ‘내가 뭐가 잘 못 되었는데’라고 나옵니다. 갑자기 법이 나와요. 그게 바로 환타지 망상입니다.
마치 자기가 법을 잘 지켜서 이 만큼이라도 건사한 것처럼 자기 의로움을 그런 식으로 챙기고 싶은 거예요. 제가 보기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보는 환경이 너무 좁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무지해요. 과학 하는 사람이나, 정치하는 사람이나, 철학 하는 사람이나, 농사 짓는 사람이나, 사업 하는 사람이나 내가 보기에는 너무너무 무지해요. 전부 다 환상 속에 빠져있고 법 속에 빠져있습니다.
자기가 온전한 사람인 줄 알고 윤리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나쁜 짓 적게 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겨우겨우 버티고 사는 줄로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무지한 사람이거든요. 무지한 사람인데 이 무지한 사람보다 더 못된 사람이 있어요. 입만 떼면 거짓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로 종교인들이에요. 목사들이에요.
나중에 엘리후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요, 한계를 넓혀 버리면 엘리후가 예리하게 욥을 지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너를 적으로 대적하지 않는데 너는 하나님을 너의 적으로 간주했다. 적으로 간주하려면 너에게는 적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자의식을 네가 임의로 조작해냈다고 보는 것이 엘리후가 욥에 대해 내리는 평가입니다.
10절에 보면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라고 하는데 엘리후는 ‘웃기고 있네’라는 뜻이에요. 네가 뭐라고 하나님이 감히 너의 대적이 되냐는 거죠. 우리가 성경 전체를 다 알잖아요. 하나님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 아니에요. ‘비켜라. 비켜. 좀 비켜봐’ 인간을 배후 조종하는 게 있어요.
악마가 하나님의 적입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악마 쳐넣으려고 지옥 만든 거예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악마 편이 되고 말았어요. ‘악마 짓 하는 것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일. 상. 생. 활.
일상생활이, 오직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거, 하나님 생각은 틈도 들어오지 않고, 오직 내 생각으로 내가 내 인생을 설계하는 거예요. 그게 엘리후가 보기엔 욥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할 때 ‘내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주섬주섬 자기 것을 자꾸 끄집어내요. 마치 여행 캐리어에 짐 검사하듯이 ‘삐~~’하고 경보기에 걸리니까 ‘한번 봅시다’라고 하면 주섬주섬 막 꺼내면서 ‘제가 뭐 무기를 훔쳤습니까? 한 번 보세요’라고 공항에서 짐 풀어서 결백하다고 하면서 자기 행한 것을 계속 끄집어내요.
이 끄집어낸다는 것이 뭐냐 하면 평생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기가 하는 그 프레임, 경계선이 내가 행한 것만 기억하는 그게 자기 일상생활의 한계 전부예요.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여러분보다 나이 적은 사람들, 40대 같으면 20대 아이들이 말하는 거, 10대가 말하는 거, 그리고 유치원에서는 7살이 어르신네예요.
유치원 7살이 유치원 3~4세 아이들 노는 거 보면 꼭 애들처럼 노는 거예요. 애들처럼 논다는 것이 뭡니까. 끄집어내는 놀이가 자기가 끄집어낼 역량이 있는 그 안에서만 놀거든요. 7살 어르신네들 보면 이제 곧 초등학교 들어갈 입장에서 보니까 ‘꼭 알라(어린애)같다’라고 하는 거예요. 노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욥이 노는 것이 어린애같이 노는 겁니다. 투정 부리고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제시하신 환경, 한계라는 것은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전체의 보따리를 다 풀어버린 거예요. 신약에서. 그래서 인간의 잘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내가 독생자를 보낸 것은 그들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했어요. 심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갈굴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갈굴 가치가.
여러분 그동안 무엇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고난받는 거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고난받는 것은 뭐가 됩니까. 기준은 예수님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고난의 기준이에요. 투정 부리는 것이 기준이 아니고. 자기를 괴롭히니까 짜증 내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 너 말고 주님이에요. 너 말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 고난받았다는 겁니다.
이거는 악마와 상대할 문제예요. 양이 양끼리 상대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악마와 상대할 문제예요. 그래서 엘리후가 어떤 해답같은 것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에게 진실로 버림받는다는 거, 버림받는 것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이거는 신약에 복음과 굉장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 욥기 32장 22절에도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라는 것이 그냥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라 이걸 실제 상황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자가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 지금이라도 우리 생애를 취소시킬 권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인간들은요, 자기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뜻이 인간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그런 식으로 해왔던 거예요. 일상생활 중의 하나가 교회 다니는 거예요.
일상생활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일상생활 주인공은 내 일상생활이니까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내가 주인공 된 듯 교회 오나 교회 안 오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가 없어요. 한대수라는 나보다 나이 많은 가수가 있습니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히피 문화에 심취해있던 가수입니다. 그 사람이 부른 노래 제목이 뭐냐 하면 ‘행복의 나라로’라고 되어있어요. 초등학교 말고 국민학교 나온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 노래 제일 처음 가사가 뭐냐 하면 ‘장막을 걷어라’예요. 그 사람이 히피 출신인데 히피가 뭐냐 하면 인간 존재 의미가 행복에 있다는 겁니다. 행복은 어디서 구하느냐 하면 모든 국가에 있는 법과 제도와 권력으로부터의 도피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겁니다. 어떤 제도나 권력도 나의 양심을 건드릴 수 없다.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살자. 약을 하든 마약을 하든 그렇게 살자. 이게 히피족의 특징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적이 뭐냐 하면 이 세상 굴레이고 장막인 거예요. 그 히피가 나온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하면 소련과 미국이 철의 장막으로 나누어지고 그 장막으로 나눠진 실제적인 실정성의 결과가 남북 관계가 휴전선으로 갈라진 거예요. 그래서 그 갈라진 남북 분단된 국가에 와서 한대수라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장막을 걷어라’였습니다. 땡! 금지곡 되었죠. 안기부에서 이거 불순분자라고 찍히고. 뭐 어쩌겠다고. 남북 간에 대화하겠다는 건지 뭔지 장막을 걷으라고 한 거죠.
이것은 그 사람 일상생활이 그거예요. 그런데 그 장막을 걷으라고 한 것이 본인은 히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수천 년 동안 종교적으로 굳혀온 나라가 있습니다. 인도. 인도에 갠지스강 있는데 갠지스강 자락 중에서 목욕하기 좋은 도시가 있는데 바라나시라는 도시가 있어요. 이 바라나시라는 도시는 죽을 때쯤 되면 다 찾아오는 도시에요. 그 도시에 가면 갠지스강이 계단식으로 바로 있어요.
거기 가면 자기가 마지막 살면서 일상생활 하면서 자기가 생각해도 인간 환타지 속에는 법이 있으니까 자기가 양심상 나쁜짓 했잖아요. 그러면 돈도 얼마 들지 않아요. 아줌마 아저씨들이 갠지스강 가서 목욕하면 지난 시간 평생에 걸쳐 지은 죄목들이 다 씻어져요. 참, 편하다, 편해. 차비만 조금 들이면 돼요. 십일조도 필요 없고 봉사나 주일성수나 아무 필요 없어요.
흐르는 물에, 그 갠지스강 흐르는 물에, 자기 몸을 넣어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 세례요한이 세례 주는 요단강도 아니고 완전히 요단강보다 더 쉽죠. 요단강은 세례요한이 잔소리하는데 여기는 잔소리도 없어요. 여기는 왜 일찍 오지 않느냐 하면 거기에 한 번 담갔는데 또 죄를 짓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요령을 피워서 죽기 직전에, 이제 죽을까 싶다 할 때쯤 가족들이 그 사람을 모시고 물이니까 아무 데나 출입구 따로 없고 그냥 들어가면 되니까 들어가서 옷 입은 채로 속에 손 넣어서 목욕하면서 느낌상, 기분상, 어떤 해탈의 기분을 주는가 하면 씻을 때마다 나의 그 무거운 죄감이 살살 씻겨가니까 세상에 종교 중에 최고의 종교인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장막을 걷어라’예요.
일상생활은 환타지 생활에 법이 있고 이 법이 나에게 죄책을 주었고 이 죄책은 장막을 걷으라는 식으로 우리는 갠지스강 너무 머니까 예수 피 믿든지 해서 씻으면 된다는 그것, 그 사고방식은 여전히 법이라는 장막에 둘둘 감긴 채 나온 거예요. 모든 중심이 내 중심입니다. 이거 어쩔 건데요. 욥도 이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욥의 한계가 뭐냐 하면 ‘하나님 저를 적으로 보죠?’라고 하니 엘리후가 기가 찹니다.
‘네까짓 게 뭔데 적이야. 적은 따로 있어. 악마야. 법으로 참소하는 악마’ 율법이든, 성경이든 말씀이든 너를 법으로 규정하는 그것이 전형적인 악마의 방식이에요. 어쨌든 간에 복음을 못 듣게 하는 거. 누구에게? 망하는 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이 복음을 못 듣게 하는 겁니다. 그럼 복음을 들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욥이 잘못했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욥을 경유 하세요. 욥을 거쳐 가세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욥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생활이에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뭘 잘못했기에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우리가 너무나 좁은 환경, 망상의 환경, 일상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거기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남의 죽음에 슬퍼하지 말고 내 죽음에 벌벌 떨지 말고 예수님의 죽음을 바로, 똑바로 보고서 나는 이미 시체라는 거, 죽은 자가 죽은 자답게 즐길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의 족속 자체가 죽은 자인데 이제부터 주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건져내는, 십자가 피로 건져내는 그 작업이 우리 몸에 어떻게 불꽃처럼 늘 튀면서 매일매일 작용하는지 매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일을 증거 하고 그것을 체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좁게 보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의 한계가 그것뿐입니다. 내 잘되면 복이고 못 되면 저주로 여기는 이 갇혀 있고 닫혀 있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심정, 그러나 십자가를 성령을 통해서 똑바로 바라볼 때, ‘다 이루었다’라는 그 소리가 평생 우리 가슴속에 마음속에 늘 쟁쟁하게 메아리처럼 울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