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와 역사를 함께 지니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예수님의 본질은 시간이 없는데, 잠시동안 역사에 나타나신 분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지? _ 예, 우리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 물론 너희들은 시간 속에,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살고 있지만, 그러니 시간에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진정 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즉 나 예수가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는 분인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을 믿는 너희들도 역시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믿을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성도-묵시적 피막(투명하기때문에 보이지 않음)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기 소유용이 아니다
비성도-자신의 과거사로 둘러싸여 있다-얼마든지 함부로 해도 된다
소유가 아니라 섬김-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피막이 있으므로
성령이 함께하심=묵시와 역사의 공존(주님이 상황을 만들어 주심)
'시간의 역전' 이란, 십자가에서 수직적으로 뿌려오기 때문에, 수평적 시간으로 보면 역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무리 거짓말로 에서를 속이고 에서가 무슨 일을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다 지워지는데, 왜냐하면 오늘은 새로운 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 즉 어제를 지금 내놓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분명히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지나간 과거는 없다는 말이죠.-"네가 어제 그렇게 했잖아?"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해서 하는 소리
"과거는 사라진다" 라고 했는데, 혹은 이것을 "과거는 죽어 없어진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역사, 즉 시간에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함을 의미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가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지만, 즉 그들에게는 미래의 시간이다. 그런데 ⓑ그 미래의 시간이 미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작동해서 변화산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묵시에게 역사로 갈 때 예수님도 죽지만 구원받을 자도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죽게 하심으로서, 묵시세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과정 속에서 베드로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는데 말이죠.)베드로가 과거에 가졌던 기대, 즉 자기 목적과 의미가, 예를 들어서,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그런 것도 모두 다 사라진다를 말합니다. 그런 이것을 모두 다 합쳐서 한 글자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육(肉)' 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아예 시간을 없애버리고 공간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면, 즉 묵시를 공간화를 하게 되면, 그것은 '예수 안'이 되고, '성령 안'이 되고, '십자가 안'이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별세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는 너희는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다".-엡2: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지금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피막이 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너는 항상 불신자이고,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런데 그 해결점은 너에게 없다"
이것 하나만 기억해도 되는데, 시간이 공간으로 변한다는 말이죠. 즉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죠.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즉 확정이 되었기 때문이죠. 이미 천국에 왔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죠. 성령께서는 '예수 안' 이라는 공간을 돋보이기 하기 위해서 시간을 잘라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는 잊어라" 라는 것인데, 과거에 자기가 잘한 것도 있어버리고, 잘못한 것도 잊어버려라. 그런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공간 안에 함께 계시면서 구원하시기 떄문에.
예수님께서 역사를 경유해서 다시 묵시로 되돌아가는 그 경로가 예수님의 별세 안에 함축이 되어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시간이 아니고, '십자가 안'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공간이다. 즉 시간을 공간으로 바꾼다는 것인데, 이것을 제가 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는데, 즉 '피막 안의 존재' 라는 말이죠.주님의 별세를 통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에 자기 백성들을 동참시킨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이 역사에서 묵시로 가려고 하면, 주님이 원형이 되어서 이룬 이 코스에 합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역사에서 묵시로 가는 것을 '부정(否定)'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나,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자기 부인, 즉 부정을 경과하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면 부정의 코스를 밟아주어야 한다
부정은 자기가 사라지는 것인데, 부정해서 자기가 긍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긍정이 되는 것인데, 우리도 같이 더불어서 긍정이 되고 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피막 안에서 우리는 불신자가 되어서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신자는 주님의 충분하고, 주님의 신자됨의 효과를 불신자가 누리는 공간, 그것을 두고서 '예수 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과거에 자기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을 때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러하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역할로서 자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부정을 통해서 부정으로, 즉 부정의 극한으로 간다는 겁니다.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말이죠.
이것은 제사의 제물을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남는 것을 제물뿐이다. 이 제물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확대된 것이 예수 안이고, 그것이 곧 천국이다. 이게 아들의 나라인데, 살짝 예수님을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5장의 제사는 아브라함을 위한 제사가 아닌 하나님 자신을 위한 제사인데, 즉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고,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십자가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면 안 된다.그러니 자기 자신이 주님에게 꿰차여져서 주님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12장 1장에 나오는 '산 제물' 이라는 것인데, 우리 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의 세계가 아니라 누구의 세계라는 겁니까? 주님의 세계라는 것이죠.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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