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본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소거한다. 음소거 있잖아요. 음소거. 소멸시키는 것. 자기 목표 대상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어야죠.
특이한 인간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이한 인간을 딱 거기에다가 꽂아버립니다. 그 특이한 인간이 등장은 일반인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지킨다는 것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거에요. 특이한 인간에 실려 있는 그 운명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현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 뒤에서 이렇게 떠미는 사람의 정형적인 인물, 세례 요한입니다. 선지자죠. 내가 세상에 보낸다. 네가 네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보냈으니까. 보낸 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자가 선지자에요.
‘누가 너(임청일)를 보냈더냐?’예수님이 보냈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지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특이성(세상과 어울리지 않음)이 없고 인간들끼리 생각하는 그러한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선과 악의 기준 이게 교만이에요.
세례 요한은 누가 공격하느냐? 선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공격하고 악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세례 요한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진리는 뭐냐? 선과 악을 그 갈라짐에서 그 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인간에서 끄집어내는 그 모두를 교만하게 만들어요. 왜? 주께서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 열심히 지켜버리면 관심사가 누구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되어 버리면 본인은 폐쇄적 자아관이에요. 갇혀버려요. 스스로.
세례 요한이 보통 인간과 차이점이 뭐냐? 없지요? 없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없다는 게 차이점이에요. 없다는 게. 세례 요한이 훌륭하다 하면 따라잡겠는데 그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인간이 따라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인간들은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거에요. 지킬려고 하는데 세례 요한한테는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킬 필요도 없어 너희는 이미 깨졌어 너는 이미 파멸의 대상이야. 이게 특이한 거에요. 이게. 이게 특이한 거에요.
세례 요한이 인간하고 전혀 다른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뭐가 다르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좌표계가 달라요. ‘좌표계’. 환경이 달라요. 환경이. 같은 인간인데 환경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덮쳐진 환경입니다. 좌표계 세례 요한의 시간계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거에요.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온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이 지켜 이미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세례가 중요한 것은 소급, 나 자신을 말소하고 말살하고 없애는데 제거하는데 세례 주는 자가 핵심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세례 받는 자가 의미가 없고 세례 주는 자만 있으면 되고 거기에 합류하는 식이에요. 세례라는 게. 성령의 세례가 뭡니까? 육으로 살던 인간이 육에 대해서 미련 뚝 끊고 이제부터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게 성령 세례거든요. 내가 열심히 했던 모든 성과를 성령이 했던 성과에 섞이지 않고 갖다버리는 거에요. 세례는 뭐냐 하면은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 세례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죽이는 게 세례라고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 그냥 와. 그냥 와. 하나님 것 더하기 내 것 더하기가 아니라 하나님 것 1이잖아요. 그러면 내 것은 1 앞에 못 더하고 버리라고 하는데 물속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 물세례고 불속에 버리는 게 불세례고 십자가 앞에 버리는 것이 이게 성령 세례가 되는 거에요.
인간의 시간과 주님이 주시는 성령 안의 시간이 중첩된 자가 성도에요. 성도. 성도 안에는 인간이 해볼까? 구원받아볼까도 있고 뭡니까? 이미 구원되었음도 구원도 함께 들어있는 거에요. 실제 상황이 이러니 뭐 사람 꼬실려고 복 받을 겁니다 잘 될 겁니다 이렇게 구라 떨면 안돼요. 교회가 사람 끌어모으는 데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숫자는 이미 정해져버렸어요.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에요. 내가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을 빗나가게 하십니다. 어긋나게 하시는 방법이에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 앞에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제논은 거기까지 몰랐지요.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시간계가 움직이는 거에요. 앞선 시간계를 뒤에 시간계가 못 따라잡으니까 이게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에요.
구원은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야 깨닫게 되거든요. 뭐 세상 다 부질없는 거 이거는 교만입니다. 겸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이미 주의 일에 한 일로서 참여됐다는 사실을 보는 거에요. 너는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지,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을 초탈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그거는.
도대체 세례 요한을 어디서 왔는지를 이 점을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소실점’.
내가 결국은 하나의 점으로 점 있는 쪽에서 나를 출발시키고 결국 그걸로 귀환시키기 때문에 현재에 있는 나의 어떤 형식에 대해서는 내가 이것을 붙잡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있다가도 없어지니까
소실점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미궁이에요. ‘미궁’. 또 다른 말로 하면 미로. ‘미로’. 미궁. 소실점은 한 점으로 당겨가지고 딸려가지만 미궁은 자꾸 중앙으로 갇히게 돼요. 갇혀있어요. 중앙으로 갇혀있다고요. 자, 중심이 자기 자신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여기 갇혀있는 이 인간을 세상 부귀 영화 명예거든요. 명예 자기 정당성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기 못 빠져나온 이 성도를 어떻게 합니까? 이걸 캡쳐를 해요. 이걸 오려냅니다. 이걸 오려내요.
이걸 오려내게 되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운 시작점이 여기서 발생돼요. 새로운 시작점. 오려내게 하신 주님이 시작점이 됩니다. 그럼 시작점에 들어오게 되면 다 이루었다.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가 새로운 시작점으로 그 인간을 새로 개시하게 되는 겁니다. 도려내는 거에요. 자기 힘으로 이차원 평면을 못 벗어나면 도려내서 위로해서 바짝 크레인가지고 들어올리는 거에요.
처음부터 밖에 있었다-성도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는다 할지라도 세례 요한의 본인한테는 소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상관없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가 되는 죽은 자로서 이 땅에 같이 살아온 여유를 부릴 수가 있는 거에요. 여유. 이걸 가지고 겸손하다 합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께서 주의 일을 스스로 하기 위해서 벌리신 일이에요. 그 일이 뭐냐? 나의 파괴입니다. 자, 나의 파괴할 때 이걸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하나님의 특이한 점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어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 요한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좌표계에 포함이 되어있는 거에요. 주님의 좌표계에. 수직적으로. 그러면 수평적으로 이런 세상적인 좌표가 있고 여기에 속하지 않은 수직적인 좌표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있는 거에요. 주기도문에 이런 말씀 있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어디서 이루어진다? 땅에서 이루어진다. 이게 바로 원래 계획했던 예수님의 좌표계에요. 그걸 지금 세례 요한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에요.
성령 안에서는 매일 뭐냐? 매일 시작점이 되는 거에요. 매일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샘플로 시료로 사용합니다. 딱 도려내가지고. 성도 자체의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이 이미 구원했기 때문에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 요한같은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 있거든요. 따라서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있다? 없다? 없지요. 없는 거에요. 괜히 우리 속에 있는 옛날 그 세상의 사물에 갇혀있던 그것이 그냥 육이 살아있으니까 그게 매일같이 터져나올 뿐이죠.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의도한 거지만.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었고 이제는 적용만 남아있는 그런 판국에 그 적용 대상으로 저희를 채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었기에 세례 요한처럼 주의 십자가 복음 전하라고 구원해주셨사오니 세상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날마다 증거케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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