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아멘

아빠와 함께 2021. 7. 19. 16:26

서울의존강의20210715a 베드로전서5장 11절(아멘)-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1절-14절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 보면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라고 했죠. 권력에는 두 종류의 권력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눈치 못 채고 있어요. 성경을 통해서 보면 두 종류의 권력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이 경험했고 체험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권력을 체험한 거예요.

그것을 ‘어두움의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의 권세, 세상 주관자들’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도바울 편지에 보면. 어둠의 주관자들, 세상 권세. 도대체 세상 보는 안목이 어떠했기에 이 세상을 향하여 어둡다고 함부로 그렇게, 그것도 골라잡는 게 아니라 일괄적으로, 세상? 그냥 어두워. 세상? 그것은 꽃 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짹짹거리는 새가 있고 뭐 시냇물 흐르고 낙엽 떨어지는 거? 아니, 아니야. 세상은 이렇게 봐야 된다는 거예요.

자, 한번 볼게요. 성경적으로 ‘세상=권력의 장(場)’, field죠, 영역. 세상이란 권력이다. 권력의 장이고 권력 자체가 힘이니까 힘이 작용하는 곳, 어둠의 힘이 작용하는 곳. 세상은 어둠의 힘이 작용한다는 그러한 주장의 정당한 근거, 확실한 근거를 댄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처참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빠져나갔잖아요, 예수님께서. 누가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다녀간 그쪽의 속성이 까발려진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다녀간다’하고 죽어도 세상은 아무것도 노출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같은 권력장(權力場), 권력 안에 있기 때문에. 수천, 수만, 수억 명의 인간이 이 땅을 살다 죽어도 세상은 끄떡도 없어요. 뭐 어둠이고 하는 것은 하나의 낭설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구라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딜 봐서 세상이 어두우냐? 네가 이 땅에 살면서 국가로부터 생활보조 많이 받았잖아, 그게 어둡더냐? 국가에서 준 재해기금 받을 때 돈 색깔이 시커멓던가요? 받아봤어요? 돈 색깔이 시커멓고 거기에 막 악마의 얼굴이 그려져 있던가요, 뿔이 있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랬죠.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극단적인 표현까지 동원시켜 가면서 “이 악한 세대야”라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던가요? 여러분, 못 찾아내죠? 찾아내지를 못하죠. 왜 우리가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극단까지 가지 않아서 그래요, 극단. 마지막 끝까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극단까지 가지 않았다’ 이것을 이렇게 하면 아주 쉬울 겁니다. ‘이 세상은 모두, everybody,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 세상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극단까지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반대 방향으로 간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죠, 예수님.

세상 모든 사람, 아담에 속한 모든 사람이 희한하게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바로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누가 이야기해요, 대중가요 가사는 이야기해도 노래 제목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맞습니다. 그 말은 충분히 동의합니다, 별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똑같이 발 맞춰 가면서 가는 거예요. 마치 김정은이 평양 광장에서 사열할 때 남군도 마찬가지지만 여군도 다리 쫙쫙 올리는 거 보세요. 그거 하고 나면 한 달간 하체가 거의 움직이기 힘들다고 해요. ‘이제 만나러 갑니다’ 거기서 그런 이야기해요, 그 여군 출신들이. 진짜 몇 번 하다가는 사람 장애인 만들 정도로 각을 지어서. 그게 권력의 장(場)이에요, 그게.

물리적으로 전자를 한 방향으로 쫙 보내는 겁니다, 똑같이. 그러니까 권력의 장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의 속성을 실제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연대감을 느끼고 포근함을 느껴요. 협동심, 연대감, 단결력, 여기에 사람들은 뿅 갑니다. 뿅 가요.

여러분들이 교회 부흥회 안 한지 40년 이상 지났겠지만 그 부흥회 볼 때, 노래 부르잖아요. 전도사가 앞에 아래 강단에 가서 박자 맞춰 손뼉으로 강대상을 친다고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치잖아요. 목소리 약하다 하면 다시, 목소리 더 세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 시간 주께서 임하십니다, 좀 찾으세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막 강대상 두드리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의 보이스, 소리와 강대상 소리가 어우러져서 인간의 신체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리듬감을 찾아줘서 그 리듬에 맞출 때 그 효과로서 우리는 하나다. we are the world~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리는 같이 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겠죠.

어떤 힘의 결집에서 오는 여유로움, 넉넉함, 이런 것에 사람들은 매료됩니다. 교회 교인 서너 명 있는데 연대감 해봐야 숫자 뭐 세 명, 네 명이서 연대감은 별 소용없는데 만약에 사천 명, 오천 명이 <실로암>이라는 노래를 논산훈련소에서 장병들이 한번 불러보세요. 야,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이 말이죠. 천국이 따로 있나, 여기가 천국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서 걸핏하면 회식하고, 1차 술 먹고 2차 노래방에 가고 3차는 개 되고 뭐 그런 겁니다. 그거 뭐 하자는 이야기에요? 회사에 충성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조직에 충성하라는 이야기에요. 조직이 살아야 네가 산다는 거잖아요, 그 회사에서. 너는 조직에 고개 숙이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칠 때 조직이 너의 앞길을 인도할 것이다, 너의 앞길을.

자, 여기 보세요. 같은 방향이죠. 같은 방향이니까 뒤돌아보는 건 없고 이건 너의 앞길, 미래라고 하는 거예요. 바로 이 세상의 질서라는 것은 ‘방향 잡기’입니다, 방향 잡기. 방향에 뒤처지면 안 되고 방향에 엇박자 나면 안 되고. 그것은 도태 되서 낙오자 취급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단언합니다. 어느 인간도 이 악하고 어두운 권세에서 박자 안 맞추고 “나는 뒤로 돌아가”하고 뒤돌아 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력의 속성과 우리 내부의 생존의 속성이 딱 죽이 맞기 때문이에요. 죽이 맞다고요. 그래서 어제 수요예배에서 그런 얘기를 했죠. 사람은 자기를 지켜주는 말만 알아듣는다고요. 자기한테 이익이 오는 말만 알아듣고 그 외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 많은 성경 구절을 이야기할 때, 뭐 골라잡는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 중에서 나한테 이익이 되는 말만 귀에 들어오고 나머지는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선택하는 그 기준은 도대체 누구를 모방한 거예요? 누구한테 세뇌 받아서 그런 기준이 정해진 겁니까? 이 악하고 어두운 세계에서 죽으라고 하지 않아요.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살자. 그러면 살 수 있어. 죽는 존재만 손해 보지, 산 사람만이 승리자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의 속성상 그것을 거역하고 그건 아니야, 라고 나설 그런 근거는 우리의 속성 안에 전혀 없어요.

그래서 지옥이라 하는 곳은 죽어봐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벌써 이 지옥의 속성과 이 세상의 속성이 이미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살면 그냥 그대로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을 내쫓는 세계잖아요. 주님이 없는데 천국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러면 주님은 모시면 되지 않겠느냐? 주님이 안 모셔지죠.

오늘 강의의 핵심은 여깁니다. 주님은 우리가 초청해도 안 와요.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 실루아노가 나오고 마가가 나오고 하는 주님이 하는 모든 스케줄은 주님이 주님 본인에게 스스로 한 스케줄이에요. 인간의 협조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인간의 생리를 너무 잘 알거든요. 인간은 지밖에 모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입장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모신다는 그 자체보다 더 역겨운 짓은 없습니다. 역겨운 사고방식은 없어요.

내가 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냥 지옥이나 가라, 지옥이나 가. 뭘 모셔? 모시는 의도가 뭔데? 뭐?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나를 모셔? 주님, 우리하고 협조해서 동업합시다. 이게 말이 돼요? 인간이 자기 스케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거기에 동의하고 합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빠져나온 것이고 어떻게 빠져나왔는가. 극단까지 가서 빠져나온 거예요, 극단까지. 어느 인간도 주님 따라서 극단까지 갈 사람 없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주님 따라가겠다고 엑셀 확 밟다가 십자가 앞에서 급브레이크 확 밟아버렸어요. 그래서 돌아버렸어요. 난 주님을 배신한다. 브레이크를 너무 심하게 밟으면 차가 돌아요. 그 자리에 스톱하는 게 아니고 주님 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버려요. 가자, 고기 잡으러.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이 권력의 한계점입니다.

그래서 극단은 뭐냐? 주님의 극단이 나왔는데 마지막 극단까지 가려면 나와 주님과 헤어지게 된 그 지점, 그 경계선까지 가는 거예요. 나와 주님이 헤어지는 것. 쉽게 말씀드릴까요? ‘나’가 나는 나다. 그 다음 한 1m 가서 나는 나다. 한 2km 가서 역시 나는 나야. 3km 가서 역시 중요한 것은 나는 내가 중요해. 이것을 계속 유지하다가 유지하다가 경계선이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버려야 돼, 그 지점 직전까지가 인간이 갈 수 있는 데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줄곧 내가 살아왔던 방향을 고수하려는 본성이 있어요. 내가 살아온 방향은, 남들과 동조가 되는, 동조라는 말은 어울린다는 뜻이에요, 남들이 나를 봐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고 뭔가 수긍이 되는 그런 모션과 태도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계속해서 타인과 주고받고 연락 취하고 서로 아는 사이라 교류를 하면서 나 어때? 너무 이상하지 않지? 네가 보기에 뭐 고만고만하지? 이걸 계속 확인받으면서 이 악하고 음란한 어두운 세대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며 고만고만 살아가는, 그렇게 될 때 그게 우리 자신입니다.

‘나’라는 것 안에는 타인과의 화해 무드가 깔려있어요. 화해 무드가 깔려 있습니다, ‘나’라고 할 때는. 나만 옳다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옳은 것에 대해서 나도 옳다고 가하는 태도를 보여주면서 그다지 모나지 않은 생활,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생활, 유들유들하게 묻혀가는 생활. 그걸 한 마디로 얘기할까요? 방금 이야기한 긴 형용사,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불편하지 않은 생애’, 우리의 소망 아닙니까? 불편하지 않은 생애.

너무 티 나지도 않고 너무 뒤처지지도 않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고 너무 티 나지 않고. 그냥 평균, 중간치에 날 찾지 못하게 깊숙이 숨어버리고 싶은 그러한 의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같은 동반자들이 많으니까 섞여버리면 티 나지 않잖아요. 발견되지 않죠. 마라톤 할 때 앞에 가면 중계방송 카메라 화면에 잡히죠. 꼴찌로 가도 꼴찌가 궁금해서 카메라 잡는다고요. 그런데 중간쯤 거의 다수의 모집단에 섞여가게 되면 이건 뭐 물을 두 컵 마셨는지 한 컵 마셨는지도 모르고 그냥 대충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불편하지 않은 생애를 다른 말로 하면 대충 따라가 주면 그럴싸하게 o.k.되는 인생. 이게 우리의 로망이잖아요. 철없을 때는 어깨에 문신해서 티 내려 하다가 나중에 문신이 또 잘 안 지워지는 모양이죠. 나이 한 사십 넘어 가지고, 어? 어깨에 문신 있네요. 그때 철없던 시절에 했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핑계 대면 되니까.

그러면 이러한 불편하지 않는 인생에서는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어둠의 악한 권세와의 싸움이라는 그런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낯설죠.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니에요? 하고 반문하고 싶죠. 그냥 대충 어물쩍 넘어갑시다. 너무 오버하면 안되죠. 믿음 좋은 사도바울 니나 하세요, 이런 식으로.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실루아노 나오죠, 12절에. 그리고 13절에 마가 나오죠. 실루아노, 마가 그들은 경계선을 넘어서서 다시 온 사람들이에요. 그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 내용을 알려면 베드로전서라는 거룩한 성경책에 나오는 이 명단 있잖아요, 실루아노 그다음에 마가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 지켜보는 너, 이건 아무래도 전쟁 같아.

그러니까 실루아노와 마가가 쇼윈도 안에 들어있는 마네킹처럼 포즈를 취하고 정지 자세로 있는 것 있잖아요, 표정도 없이. 백화점 쇼윈도에 있는 마네킹처럼. 아, 고것 참 신기하다, 우리는 지나가면서 신기하긴 한데 저게 사람이라면 팔 아프겠다, 아이고 안됐다, 우리끼리 불편하지 말자, 하고는 그냥 쑥쑥 지나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마네킹의 자세, 마네킹이 안에 들어있는 그 쇼윈도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없습니다.

오늘 주제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데 내가 찾아가는 천국은 곧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밖에 나갔죠. 이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셨잖아요. 그럼 제가 아까 뭐라고 운을 뗐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주님 가신 그 코스 따라서 주님과 나 사이가 만나는 그 경계선까지 가야 된다고 했죠, 극단까지.

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 뭐가 살아있었느냐 하면 ‘나’를 위하여,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내’가 잘 되도록, ‘나’의 미래가 보장되도록. 항상 앞에 뭐를 집어넣습니까? 나를 포기하고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주님을 찾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누구를 위함이에요, 주님을 위함이에요, 나를 위함이에요? 나를 천당 보내려고 이런 시도를 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주님께서 건너올 때 십자가로 건너왔기 때문에 계속 ‘나’가 있는 이상은, 나를 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서는 이 경계선, 십자가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실루아노와 마가는 뭐냐? 실루아노와 마가는 대단하냐, 우리보다 더 뛰어나냐? 그만큼 뭐 신앙이 너무 좋아서 십자가를 통과했느냐? 아니에요. 이들, 마가와 실루아노는 성령에 휩싸인 사람이고 성령에 휩싸였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세 자, ‘고맙소’에요, 고맙소. ‘고맙소’라는 말은 자기한테 고맙다는 말이에요, 자기 아니고 다른 분에게 고맙다는 말입니까? 다른 분에게 고맙죠. 그러면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의 특징은 그냥 모든 일에 고맙소~ 고맙소, 모든 일에 고마워요, 모든 일에.

경계선 바깥에 십자가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최선의 노력만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까딱까딱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늘 자기 점검해요. 이 자기 점검이 특징입니다. 늘 자기 점검해요. 혹시 내가 개차반같이 행동해서 내가 손해 보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잘못 행동해서 갑자기 몇 달간 받지 않은 벌을 한꺼번에 받지는 않을까. 자기를 건사해야 되니까요. 건사라는 말 알아요? 내가 생각한 나답게 나를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조심스럽게 산다면 그것은 누구한테 고마워하겠어요? 본인이 본인한테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악하고 어두운 세력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종교입니다. 자기가 조심스럽게 자기를 간수하고 관리하고 조절하고 지켜내는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죠. 내가 마귀한테 져서는 안 된다. 여러분, 이 말이 성립이 됩니까? 내가 마귀한테 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묻고 싶어요. “마귀한테 이기면 무슨 이익을 얻습니까?”하고 묻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계, 이 죄악된 세계에서는 인간의 생각 하나, 행동은 모두 자기한테 이익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자기한테 이익이 오지 아니하면. 이게 불리하냐, 이익이냐를 늘 계산하거든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고 나를 그대로 지키고 싶은 내가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될까. 이것을 멈출 수가 없어요.

아예 고맙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한테 칭찬하고 싶은 거예요. 잘했어, 인간아. 잘했어. 선방했어, 그 정도도 대단한 거야. 남들은 이 정도 만큼도 안돼. 너는 복 받을만 해. 내가 나를 계속 격려하고 싶은 거예요. 참 잘 살아왔다고. 참을 때 그때 잘 참았어. 양보한 것, 그것 아주 잘했어. 베리 굳, 나이스, 훌륭해. 내가 나를 똥개삼아 내가 나한테 훈련시키는 거예요. 앉아! 아, 예. 일어서! 잘했어, 잘했어. 사료하나 더 줄게. 갖고 놀아라. 장난감 줄까? 다음에는 개 유치원 보내줄게, 이런 거. 다음에 미용해줄까? 머리 곱게 빗어줄까?

내가 나 되는데 있어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타고났어요.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구약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애굽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모세는 떼쓰리, 어떤 특정 집단을 모세가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왜 데리고 나왔을까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거룩하게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자기 스케줄, 쉽게 말하면 스케줄입니다, 자기 스케줄을 이 땅에 남긴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만의 역사에 동전으로 쫘악 흠을 그었다고 보면 돼요. 책상 사는데 동전 가지고 그어보세요. 책상 사장 기분 되게 나쁘겠죠? 인간들만의 자기 공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그 역사에다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모세가 쭉 흠을 내놨어요. 쭉 긁어내놨다고요. 그게 천국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러워 할 그 권력, 매끈한 그 권력의 표면에다가 무리하게 거기다 흠집을 내놓은 거예요, 모세가. 모세를 앞장세워서 재앙이 몇 개였습니까? 열 가지죠, 열 가지. 열 가지의 줄을 그어놨다 이 말이죠. 줄을 그어놨죠. 바로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할 때 장난인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최고의 권력이기 때문에 이 권력보다 더 센 권력만 흠집을 낼 수 있어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둘이 짝이 되어가지고 별 볼일 없어요. 오늘날 우리 성도 같아. 진짜 별 볼일 없어요. 그러나 배후에 주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지시된 지팡이가 있다는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죠.

자, 이야기를 쉽게 가겠습니다.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쉽게 가려면 아까 이야기한 전제를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돼요. 그게 뭐냐 하면 권력의 장이라는 겁니다. 권력의 장, 말은 쉬운데 이게 실제로는 모든 인간의 현실, 세계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힘으로. 앞에 이 단어를 넣어야 이해돼요. ‘이미’ 힘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미. 이미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요, 이미.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장사한다고 공무원이 와서 시비 걸고 나라에서 문 닫으라는 소리 안 하죠. 이것은 내가 투자해서 내가 가겟세 낸 내 가게이기 때문에. 그런데 코로나 터지고 난 뒤에 가게 문 닫으라 하잖아요. 1단계, 2단계, 3단계, 뭐 4단계까지 이야기하면서. 5단계, 6단계는 뭔지 그게 궁금해요, 7단계 이런 거. 아니 이것은 내 돈 가지고 가게 했는데 문 열고 말고는 원래 누구 소관이에요? 공무원한테 물어보고 “문 엽니까?” 이렇게 이야기할까요? 평소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내 가게인데 밤 10시까지 하든 12시까지 하든 피곤한 건 내가 피곤하기 때문에 주인, 내 마음인 거예요. 뭐 몸이 아프다. 아침 6시 되어서 ‘문 닫습니다. 몸이 아파서 못 합니다. 손님 나가세요.’ 이것도 자기 마음이에요.

뭘 못 느끼는 겁니까? 권력의 장을 못 느꼈던 거예요, 권력의 장을. 사적인 공간에서는 본인의 힘만 정말 신나게 작용할 뿐이지, 본인 외에 제3자가 내 가게에 어떻게 할 권한은 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이 말이죠. 국가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를 도와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코로나 보세요. 국가를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아니죠. 이미 권력의 장 안에서 조그마하게 가게 내서 이렇게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아무리 우리 회사가 잘 되고 싶어도 전체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금융위기 터져버리면 우리 회사도 그냥 넘어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게 관심이 없을 때는 내 것만 잘하면 되고 우리 가정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내 아이만 학교 보내면 된다 하지만, 학교에서 문 닫아 버렸는데 오지 마라는데 4단계라고. 그럼 혼자 덜렁덜렁 가방 들고 학교 갈까요, 담 타 넘고? 학교 가는 게 내 스케줄이었잖아요. 우리 가정의 스케줄이었잖아요.

그 스케줄을 누가 방해했습니까? 국가가 강제조치했잖아요. 우리는 강제조치 당하는 대상으로 살아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국가가 지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줄 때 당신들이 평소에 원하던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들은 사적으로 본인이 살고 싶어하잖아요? 국가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고개 끄떡이면서 “맞아요.”, “살고자 하는 걸 우리가 도와주겠다는데 국가 말 들어야죠.” 이렇게 할 때 여러분 반박할 수 있습니까? 아, 나 죽을라 하는데 왜 못 죽게 해? 이래서 국가를 원망했습니까? 그게 아니죠? 그래, 살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들어줘야 내가 결과적으로 하루라도 더 사니까, 그것도 건강하게. 오케이, 오케이. 네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이러고 있잖아요.

이해관계가 죽이 맞는 거예요. 이 세상의 권력과 자아가 갖고있는 이 속성과 딱 죽이 맞아요, 죽이. 죽이 맞는다는 말 알죠? 죽이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불편하기 싫은 거예요.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그냥 한평생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요란스럽기 싫고 성경에 실루아노나 마가처럼 유명인사도 되기 싫어. 신앙 좋은 사람이나 실어라. 여기서 내 이름은 빼줘요. 부끄러워서 못 쓰겠어. 이런 식으로 그냥 기어 들어가고 숨어 들어가고 안 튀고 유명치 않고 그냥 있는둥 없는둥 살고 싶어요. 그게 편해. 목숨 붙어 있으면 승리한 거지 뭐, 하늘의 별을 따야 돼? 이런 식으로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스케줄이 누구 스케줄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스케줄이죠. 그러면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자, 마태복음 8장 29절에서 누가 봐도 청년이에요. 그렇죠, 청년이죠? 거기에 귀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귀신 없어요. 이 어둠의 세계에서는 귀신은 없고 인간들만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대화가 통하는 거예요. 죽이 맞는 거예요.

대통령이 귀신입니까? 아니잖아요. 국무총리가 귀신이에요? 아니죠. 청와대 있는 사람들이 망령들이에요? 아니죠. 그러니까 말이 통한다고요, 말이. 귀신 빼고 갑시다, 이 말이에요, 귀신 빼고. 영적인 것 빼고 귀신 빼고 갑시다. 안 통할 리가 있어요? 말 통하죠. 귀신 빼고 가는데 말 통하죠. 나도 영적인 것 빼고. 대화 잘 통하죠. 어떤 청년이 무덤가에 있었어요. 누가 봐도 그냥 청년이 무덤가에 있는데 약간 행동이 이상하다 그뿐이죠.

그런데 그 현장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누가 스케줄 갖고 왔어요? 주님이 자기 스케줄 가지고 스케줄 적용시키겠다고 인간으로 하여금 극단까지, 극단에 있는 경계선으로 오라,가 아니라 경계선을 가지고 경계선을 가지고, 인간과 하나님은 이렇게 만날 수 없다는 경계선을 가지고 직접 누가 내왕하셨어요? 방문하셨어요? 주님이죠. 방문판매.

주님이 직접 그 청년에게 왔을 때 청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꼰대 왔네, 꼰대. 소문난 꼰대 왔네.” 이랬습니까? “나는 청년인데 청년한테 무슨 볼 일 있습니까? 주님 볼 일 보세요.” 이랬습니까? 그 청년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세요. 이게 인간의 말이에요, 악귀의 말입니까? 악마의 말이죠. 청년은 주님을 못 알아봤지만 청년 속에 있는 귀신은 주님을 귀신같이 알아본 거예요. 주님을 귀신같이 알아본 거예요.

자, 인간이 귀신 들렸다, 그것은 그 청년은 바로 본의 아니게 인간 세계의 제일 가장자리, 끝자락에는 누가 보초를 서 있느냐 하면 악귀가 인간이 주님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영적 존재가 복음을 못 듣게 이미 인간 세계에서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가로막고 있는 것이 꼭 어린이집 같아요. 선생님들이 서 있으면 어린이들이 그 안에서 놀잖아요. 그런데 그 어린 애가 애들하고 놀다가 어린이집 바깥으로 가는 담을 올라가게 되면 거기에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선생님들 있죠. 어어, 저기 가서 놀아. 여기 넘어오면 안돼. 위험해. 가서 놀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주님이 직접 찾아오게 되면 찾아오는 그 순간 청년은 본의 아니게 인간 세계의 극단, 인간 세계의 끝, 경계선을 그 청년은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도 아닌 자가 성도 되는 체험이잖아요.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경계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세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정말 내가 나한테 속았어요. 내가 나를 속였어요. 어린이집 애들처럼 그 안에 소복이 같은 애들끼리 까르륵 웃고 재미나게 살고 불편함 없이 주는 밥이나 먹고.

서장하고 같이 밥 묵고 서장하고 같이 목욕하고, 어! 무슨 대사인지 모르죠? 영화의 한 장면을 어설픈 패러디 했는데. 마 느그 서장하고 같이 밥 묵고, 어! 같이 음식 묵고, 부산 깡패들 나오는 영화 있죠. 마, 이 땅에서 내가 취직하고 아파트 사고, 어! 내 아들 장가보내고, 어!, 지금 퇴직해서 연금 타고, 어! 나 이래 살았어. 애들끼리 놀아, 애들끼리. 애들끼리 놀면 그렇게 돼요. 누가 나보고 탓하지 마. 나 그렇게 뭐 완전하진 않지만 욕 얻어먹을 짓은 안 했어. 파출소 세 번밖에 안 갔어, 평생 동안. 경찰서는 큰 건 하나 가고 파출소는 세 번 가고, 술 먹고 까불다가. 그 정도죠.

다시 묻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왜 나와야 됩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그 히브리인들이 불편했어요, 편했어요? 그거 묻고 싶네요. 모세 따라 나오니까 불편했습니까, 편했습니까? 불편했죠. 이유가 뭡니까? 불편한 이유는 거기가 듣도 보도 못한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율법의 권력이에요. 기존의 애굽의 권력은 인간의 권력이에요, 권력장이. 그런데 십계명 받고 난 뒤에 율법의 세계는 율법의 힘이에요, 율법의 힘.

세상, 악마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위한 인간의 세계에요.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했어요. 그래야 그 어린애들이 담 타 넘어서 어린이집 밖으로 넘어가지를 않아요. 잘 먹이고 한 끼 3500원 해서 잘 먹이고 그 다음에 놀이터에서 놀이기구 주고 하루종일 놀다가 엄마한테 인계하면 그만이거든요, 부모한테. 그러니까 거기서 잘 놀면 되죠.

이 세상은 인간의 사육장이에요. 악마가 인간을 사육하는 거예요. 어차피 정신적으로 이미 사육당한 존재거든요. 사육이에요, 사육. 길들여지는 겁니다. 길들여진 그 속성이 이 세상은 아주 자연스러워요.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는데 그럼 쉽게 하겠어요. 쉽게 하겠습니다. 복음을 듣는데 있어서 누가 방해하던가요? 복음을 듣는데 누가 방해하던가요?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라는 생각이 방해해요. 집에 잠자고 있는 게 나을까, 성경공부 하는 게 나을까, 계산하잖아요. 계산한다는 말은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냐, 어느 것이 나를 덜 불편하게 만드는가.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3절 한번 보세요. “함께 택하심”이죠, 택하심. 그렇다면 제가 모세로 하여금 자기 백성을 끌어 당겨 나오게 했다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택하심이 나오죠.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도 택하심이 나오죠. 신명기 7장 7절에도 택하심 나오죠.

택하심 없는 세계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어요. 택하심이 필요치 않는, 알아서 기면 되는 세상. 알아서 잘 처신하면 살 수 있는 세상. 우리는 택하심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 세상이고 싶어요. 제가 다시 묻습니다. 택함 받아서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사는 게 편했어요, 불편했어요? 고달팠습니까, 어땠습니까? 아주 신바람 났어요, 아니면 고달팠습니까? 고달프죠. 얼마나 고달팠으면 Back to the 애굽, 애굽으로 돌아가자, 얼마나 고달팠으면.

주님께서 “돌아가려고 하거든 목숨 내놔라.” 왜냐하면 어린 양 목숨 팔아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걸 다시 원위치하려면 어린 양 목숨 내놔야 돼요.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가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용서 받아놓고 그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 히브리서 6장에 나와요.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다. 지옥에나 가라, 이 인간아. 왜? 피를 모독함이라. 인간이 용서받았다 하는 것은 그 다음부터는 용서해주신 분을 모독하지 않아야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요, 모독하지 않아야 될.

그동안 인간은 어떻게 살았다 했습니까, 방금?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손해냐 이익이냐, 그것을 계속 측정했죠.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는 선택이란 요소가 빠졌어요, 선택이라는 요소가.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선택을 이렇게 표현해놨습니다. 아주 엄청나게, 진짜 누구 말대로 야, 이거 구라 되게 세다고 할 거예요. 거짓말을 이렇게 과장되게 하다니 너무 심하다, 할 정도인 대목이 있어요. 출애굽기 19장 4절,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거기에 수많은 애굽 사람들을 어디에 업었다고 했습니까? 독수리 날개죠. 도대체 독수리 날개 평수가 몇 평입니까? 그걸 어떻게 다 해요? 너무 오버한 거 아니에요? 너무 과도한 평 아닙니까? 더구나 독수리 날개니까 이건 지상에서 걸어서 왔다는 게 아니고 날아서 왔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날랐느냐 하면 애굽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애굽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거죠. 애굽 군사들이 폴짝폴짝 뛰어봐야 지가 2m를 못 뛰어요. 독수리를 어떻게 잡습니까? 공중에서 날아다니는데.

그러한 요소들이 다 선택에 포함된 거예요. 선택 안에는 흉내 내거나 모방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요소가 들어 있단 말이죠. 그 선택으로 너희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 선택으로. 그러니까 그 선택을 해서 율법 주고, 율법 주니까 불편하다고 원망했죠. 네가 선택된 그 공간을 생각한다면 이만한 불편도 고맙다고 여겨라 이 말이죠. 이것도 불편이냐? 예수 믿고 집 홀라당 탔습니다. 타도 천당 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타도 괜찮아, 천당 가는 것에 비하면.

우리 천당 갈 때 어디에 업고 갑니까? 독수리 날개에 업고 가죠. 아니, 불에 안 타고 집 멀쩡하면 독수리 날개에 태워줍니까? 안 태워주죠. 우리가 어떤 짓을 하고 아무리 착해도 독수리 날개 안 태워주죠. 왜냐하면 나의 행함은 선택에 포함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착한 일을 해도 그게 선택되어야 될 근거가 되지를 못합니다. 아니 천국 갔으면 됐지, 뭘 더 원해요, 천국 갔으면 됐지. 뭐 6단계, 7단계, 4단계, 그거 뭐 다 실없는 소리들이에요, 그것은. 이 권력의 장이.

이것 정리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아까 중요한 것이 뭐냐? 행진이에요. 모든 인간이 같은 얼굴로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발 맞추어 차박차박 갑니다, 모든 인간이. 뭐 이렇게 뒤돌아보는 사람도 없어요. 그냥 그게 옳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부자되는 것이 인간 성공이라 하는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우리 내부적으로 나한테 압박을 가하고 있어요. 복음을 아는 사람이, 사는 꼬라지 보니까 이게 복음 알고 사는 거냐? 내가 나를 저주할 정도로. 그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인생 방향이 정해져 있습니다. 대열에서 이탈이 안돼요, 이탈이 안돼요. 그 정도로 권력의 장은 셉니다. 어느 정도 세냐? 그것은 10분 뒤에.

 

서울의존강의20210715b 베드로전서5장 11절(아멘)-이 근호 목사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펼쳐 보이느냐 하면 이 세상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어떤 어두움의 권세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작게 생각하게 되면 나를 위한 세계, 나만을 위한 세계로 그냥 소박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항상 외부에서 으름장이 나와요, 으름장.

애굽의 바로 왕이 으름장을 놓을 때에 주께서 대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선택입니다, 선택. 선택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는 이스라엘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오해입니다. 잘못 생각한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죠. 우리를 선택한 줄 알았는데 무엇을 선택했느냐 하면 어린 양을 선택한 거예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린 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항상 외부의 으름장에 대처하는 방법은 이스라엘로 이기려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 어린 양쪽으로 방향을 쳐다봐야 돼요. 어린 양, 제사.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의 효과와 효험 그리고 그 언약궤가 갖고 있는 위력,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것을 신약으로 번역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십자가 안에 모든 선택의 요소가 다 들어있다고요.

아까 말씀드렸죠. 세상의 으름장은 인간은 사적으로 살고 싶어하는데 국가가 ‘도와줄게’, 할 때 국가가 ‘너 살려줄게’ 하는 취지와 개인적으로 나 살고 싶다는 취지가 죽이 맞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애굽에서 굳이 나갈 필요도 없고 나갈 마음도 없어요. 심지어 히브리인들도 모세 아니었으면 전혀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에서는 ‘어떻게 살겠다’가 아니라 어린 양을 살리기 위해서는 ‘너를 포기하라’는 거예요. ‘너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라’ 이것이 이스라엘 내부에 작용하는 언약의 법칙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안 되는 거예요. 어린 양 이용해서 옛날 내가 나를 살리고 싶은 그 본성을 이름만 이스라엘로 바뀔 뿐이지, 이름만 교회로 바뀔 뿐이지,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 바깥의 사람이나 ‘나부터 살고 보자’는 변함이 없어요. 나부터 잘되고 보자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요. 이게 교회적으로 되게 되면 우리 교회나 잘 되자, 이것이 변함이 없다고요. 십자가 마을은 코로나 걸리지 마라, 이런 거요. 지가 무슨 마을인데 코로나가 뭐 무섭다고 안 오겠어요? 뭐 돛대에요? 왜 안 와야 되는데?

이미 죽은 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를 선택한 적이 없다. 네 속에 있는 언약을 선택한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운 게 아니고 자신의 언약을 위해서 싸웠어요. 자신, 주님을 위해서 싸운 거예요. 나를 위해 싸우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 자신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뿐이에요.

그 부산물로 포로 된 자가 그 전쟁의 여파로 전리품으로 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오늘날 성도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전쟁의 부산물로 생긴 거예요, 부산물로. 그래서 선물이에요.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고 선물은 우리가 선물이 되었고. 그냥 공짜로 덕 본 거죠. 천국 안 들어가도 되는데, 천국 안 가도 되는데 주님께서 승리했다는 티를 내려고, 주님 승리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선택하신 거예요.

그러면 천국의 힘은 뭐냐? 베드로전서 5장 11절에 나옵니다.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권력이 세세토록 누구에게 있을지어다? ‘그에게’ 있을지어다. 여기 ‘나’가 빠졌죠. 권력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이득이 있다, 가 완전히 빠졌죠.

그 뒤에 12절에 나오는 실루아노와 마가에게 아예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권세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본인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몰랐을 때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 세상 권력 안에서 어떻게 내가 하루하루 내 나름대로의 스케줄을 보냈는지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세상과 보조 맞추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죠.

아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악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귀신이 악귀가 주님보고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한 거죠. 그것을 한번 적어볼게요. 한쪽은 지옥입니다. 다른 한쪽은 천국입니다. 주님께서 지옥을 다녀갔기 때문에 생긴 곳이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은 천국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옥을 만들어낼 책임이 천국의 주인한테 있습니다. 주님이 다녀갔기 때문에. 주님이 다녀간 이곳을 지옥 만들기 위해서 천국이 있다고 보시면 되거든요.

천국만 있으면 안 되고 천국과 더불어서 이 천국의 주인공되시는 주님을 학대하고 천대하고 무시하고 핍박했던 이 세계는 필히 뭐가 돼요? 지옥이 되어야 천국이 빛이 나요. 천국이 값을 한다고요. 그러니 천국만 만들었다 생각하지 마시고 지옥과 천국이 같이 짝을 이루어서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지옥은 주님이 아니 계신 곳. 천국은 주님 계신 곳.

천국과 지옥의 결정권은 내가 어떻게 악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가와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의 실수, 나의 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아까 단팥빵 잡쉈죠? 죄 지은 겁니다. 왜 그 빵을 먹을 때 우물 없는 아프리카에 빵을 구제 안했습니까? 이렇게 따지면 뭐 할 말이 없죠. 아까 주스 드실 때 그 주스를 지금도 물이 없어 힘들어하는 아이티 주민들에게 보내주시죠.

인간이라는 것을 한번 따져봅시다, 인간. 여기에 많은 권력의 장이라 했죠, 권력의 장. 권력의 장은 악마입니다.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합해서 이 사회라고 보지 마세요. 이것은 인간의 권력이지, 어둠의 권력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아예 어둠의 권세자라 했어요. 어둠의 권력이에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둠은 인간의 권력이라 하는데 아니에요. 악마의 권력이에요.

그러면 인간들과 인간들 간에 무엇이 형성되어 있는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 아까 첫째 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살고자 하는 것도 그렇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죠. 이 인간들이, 내가 살기 위해서 많은 요소들이 끼어듭니다, 많은 요소들이. 참 이것은 수련회때 하려고 준비한 그림인데 오늘 여기서 또 하게 되네요. 이거 해야 돼요. 내일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 스케줄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작살 내거든요. 내 스케줄은 인정을 안 합니다. 뭘, 지금 해. 예. 하죠.

수학에서 서수라는 게 있는데 서수는 순서의 나열을 숫자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A→B→C→D→E로 나갈 때 이것을 ‘5’라고 해요, 순서가 있는 서수에서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A→B→C→D→E→F도 있을 거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의 관계성이 있을 때 관계가지들이 있을 때, 순서를 맺을 수 있을 때, 일부 짝지은 이것을 가지고 쇄(鎖), 쇄라는 말은 집합론에서 쓰는데 너무 어려우면 연쇄라고 합시다. 여러 가지의 경우로 짝을 맺어 관계 지을 수 있겠죠.

바로 이것이 나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수많은 다양한 요소들이 나의 성장 과정에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게 그래서 타인과 공통점도 많고 타인과 다른 개성이 많은 이유가 그 개성은 연결고리의 방향이 동쪽에서 왔을 때, 서쪽에서 연결을 받은 사람과는 의견이 안 맞는 거예요. 의견이 맞지를 않습니다.

여기 전 하나 펼까요? 전 하나 펴서 둘이 연애할 때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겠습니까? 부채도사가 할 때, 가만 있어 보자, 연결고리가 비슷한 가정에서 왔으니까... 이거 되네, 둘이 하면 딱이야. 한쪽은 유학 갔다 오고 한쪽은 북한 갔다 왔다면 이 결혼 될 리가 없죠. 연결고리가 다른데 사고방식이 다른데. 그러니까 세월을 그냥 곱게 흘러온 게 아니에요. 가정형편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기억 속에 들어온 거예요, 기억 속에.

그것을 제가 수요일에 ‘내속된 기억의 배반성’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내속된, 속에서 쭉 이어져 온 기억들로 인하여 요나는 하나님을 배반한 겁니다. 낯을 피한 거예요. 자기 인생이 치욕스럽게 되는 것을 용서 못하는 거예요, 본인이. 내 존엄함이 치욕스럽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누가 와도 본인에게는 분노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 잡아 잡수세요. 자살하면 그만 아니냐 이거에요. 내가 죽을게, 죽을게. 아이고, 하나님 대단하다. 내가 죽을게, 여기서. 배 뒤집어져라, 내가 죽을게. 난 잠이나 잘란다. 배가 뒤집어지든 말든 난 이미 죽은 몸이다. 보통 고집이 아니죠.

이 고집이 뭐냐 하면 이미 내가 여기 있잖아. 이미 있는 나를 왜 죽으라고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에요. 사는 쪽으로 얘기해서 예수 믿으면 산다고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보고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 안에서 선택했지, 너를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 전에 우리를 ‘주 안에서’ 택했다는 말은 주님보고 너를 선택했다는 말이에요. 주님 부각 되라고 너를 선택했지, 네가 부각 되라고 너를 선택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너 구원이나 받으라고 선택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주님께 종속되라고 선택된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혼자 까분다고 혼자 잘난 체하면서 참......<비상>이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임재범의 <비상>. 가사를 보게 되면 ‘나도 이제는 세상에 나가리라 내 날개를 펴고’ 날개 펴고 가자마자 교통신호 위반 걸려라.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세상에 굴복할 때 나를 받아주지, 굴복하지 않고 내 뜻을 펼친다면 어느 세상도 어느 직장도 그 인간 안 받아줍니다.

인간은 살아봐야 철이 나는데, 뭐 살아봐도 철이 안나는 사람도 많지만, 인간이 살면 살수록 점점 양파껍질처럼 드러나는 것은 나 외에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나 말고는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남 믿었다. 진정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밖에 없어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집에 있는 강아지도 나를 안 사랑해요. 강아지도 자기 주장해요. 침대 막 올라와서 주인 행세하려고 하고. 아무도 내 편이 없어요.

내 편이 없는 그 본성으로 성경 내용을 자기한테 접속시킵니다. 살아왔던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에 뭐 선택이라는 말 나오고 구원이라는 말 나오니까 얼씨구나 하고 그걸 붙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는 그 속성은 속성대로 그 가정에서 주입된 거예요, 하늘의 뜻이 아니고. 그 성장 과정에서 가져온 그 속성이 기억으로써 내 자아를 구성해가지고 여기에 맞추어서 이 선입관 가지고 성경을 나 좋으라고 나 이익되라고 전부다 지 맘대로 해석을 해온 거예요.

기어이 죽을 생각 없습니다. 남한테 질 생각도 없고 양보할 생각도 없고 포기할 생각도 없어요. 우리는 살아오기를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의 모델이에요. 멀쩡하게 부자 되면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죽는 것도 보류야. 내가 성공할 때까지. 십 년 무명생활 후에 다시 떴다 할 때 부럽지 않던가요? 이십 년 무명생활하고 떴다 할 때 부럽지 않던가요? 언젠가는 쨍하고 빛 볼 날이 있을 거야. 희망이 나의 신이죠. 희망이 나의 우상이 되고 말았어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빛 볼 때 있을 것이다. 그 빛이 무슨 빛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이러한 의식 속에 무엇이 없느냐 하면, 붉은 걸로 할게요, ‘고맙소’가 없어요. 고맙습니다, 없습니다. 자기 철저이기 때문에. 자기가 실수했으면 그 다음에 착한 일로 만회할 생각하지, 고마운 대상이 없어요. 고마운 분이 없어요. 일시적으로 도움 줄 때 고맙단 소리 하지만 근원적으로 고마운 거예요, 근원적으로.

내가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내가 주저앉더라도 그것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 고마운 분. 일체 거기에 대해서 토달지 않으시는 고마운 분, 그 고마운 분이 모세를 따라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애굽에 살던 그 속성,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속성이 있는 그들에게 율법의 영역, 율법의 권력의 장(場)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잔소리도 너무 심했어. 이것도 하면 어긋나고 저것도 하면 어긋나고.

뭐 문신하지 말라, 여자는 남자 옷을 입지 말라. 세세한 데까지, 오징어 먹지 말라. 오징어가 얼마나 맛있는데 오징어 먹지 말라. 도대체 뭘 하는 게 촘촘한 그물망 같이 안 걸리는 게 없어요, 안 걸리는 게. 안 걸린다 싶으면 또 새로운 법을 조항으로 첨가해서 기어이 걸리게 만들어버려요, 기어이. 그것은 바로 이미 인간이 악귀에 악마에 사로잡혀서 나 스스로 노력해도 구원 가능하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요소가 인간의 기억 속을 꽉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잘났냐? 잘났어? 그렇다면 이거 한번 지켜보지. 저거 지켜보지. 계속해서 잘난 체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법을 쏘아댑니다. 그러면 사람이 넉넉할 때, 여유 있을 때는 법을 지키고 싶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법을 지키는 환경을 친히 주께서 조성해버려요. 참, 이게 난감한 일이에요. 멀쩡할 때 배부를 때 건강할 때는 언제든지 항상 감사가 돼요. 그런데 의도적으로 환경 조성을 짜증과 불평이 나오도록 만들어놓고 감사하라고 이야기해버려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 뭐 비어있는 땅 누가 못 들어갑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했죠. 그런데 정탐꾼들이 딱 들어가 보니까 거기가 비어있는 땅이 아니에요. 들어오기만 하면 죽여버린다고 하는, 덩치 크고 무기가 발달하고...... 이것은 게임이 안 돼요. 난민들 같은 이스라엘하고는 도저히 게임이 안 돼요. 해봤자 이것은 전멸당할 게 뻔하게 해놓고 주께서 들어가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약속의 땅에 못 가는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게 아니고 네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네가 애굽에 살던 행세 그대로 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인간을 다 광야에서 죽여버렸습니다. 광야에서 전사한 자들, 홍해 건너온 사람들 거의 다 죽었죠. 갈렙과 여호수아 빼고는 다 죽었으니까, 심지어 모세마저 죽었으니까 거의 다 죽은 겁니다.

따라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뭘 알았느냐 하면 내 능력으로 가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님을 알았어요. 그러면 자기 능력을 자기가 계산합니까, 계산 안 합니까? 계산 안 하죠. 자기 능력, 자기 실력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이미 죽은 자, 나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인정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유능함은 (인간이) 무능할 때만 드러난다는 이 법칙을 안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을 때 모든 것을 다 있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 ‘고맙소’가 될 수밖에 없죠. 뭐 쇼파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전부다 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상황 따라서,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주신 거예요.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주신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 가지고 내가 나 까불락거리고 나 잘난 체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써 꼭 필요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가정에 그걸 주신 겁니다.

우리 자신으로 내가 주님 마중 나가기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자가 아니고 주님이 친히 와야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여러 가지 소품들이 이 가정에 가득 차 있다 이 말이죠. 우리 가정뿐 아니라 모든 가정에. 따라서 이것은 하나의 배치죠, 배치. 설비를 배치한 거예요. 구조 배치가 나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조성된 환경이 아니고 주님만이 하셨다가 필요한 그러한 가족관계, 그리고 여러 가지 집안 관계, 인생 자체가 환경 조성이 그렇게 조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뭐가 등장하는가? 11절이 나오는 거예요. 모든 권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붙어요? 아멘. 매일같이 아멘이 반복되도록, 다른 말로 하면 매일같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오직 모든 환경 조성은 실질적인 권력자인 주님께서 딱 맞추어서 이런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택했다는 취지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아멘이 절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합력하여 지금 우리의 삶을 주께서 꾸려나가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주어진 상황을 가지고 이것을 내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고요. 이걸 내 거라고 해버리면 이걸 자꾸 키우려고 하고 자꾸 지키려고 해요. 그럼 주님의 권력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자기의 권력이 들어가서 본인이 본인보고 아멘,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잘했어, 훌륭했었어. 그 정도 하면 선방한 거야, 인생. 욕 안 먹을 인생 살았어. 내가 내 어깨 막 두드려요, 격려한다고. 잘했어, 잘했어. 대견하게 이렇게 훌륭할 수가 있나. 지가 지한테 훌륭하다고 이야기해주고요.

사실은 내가 나한테 칭찬하고 싶은 것을 사람들은 남에게 듣고 싶어해요.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이유가 칭찬받기 위해서 친구를 사귑니다. 좋은 소리 듣기 위해서 친구 사귀어요. 우리 친구 아이가?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칭찬 좀 해줘! 없더라도 만들어서 해줘, 이 말입니다. 주고 받고, 네가 나 칭찬해주면 나도 너 칭찬해줄게. 정 칭찬할 게 없으면 발톱 왜 그리 이쁘냐, 시시콜콜한 거 다 억지로 끄집어내서 하겠죠. 칭찬을 유도할 때는, 지한테 좋은 걸 이야기하고 죽이 맞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려면 뭐 하나 툭 운을 던지면 잘했군 잘했어, 하고 또 내 것 던지면 너도 잘했어, 하고 그렇게 세월 보내는 거예요. 그게 친구잖아요. 그 친구 없으면 강아지나 키우죠. 칭찬할 친구가 없는데. 맨날 뜯어먹을 생각하고 이용할 생각하고 무서워서 친구 못 사귀어요. 너한테 칭찬해줬으니까 이번에 내 보증 서라고 나오면 곤란하거든요.

아까 누가복음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상관 있으면, 상관이 되려면 만남이 되어야 돼요. 만남을 통해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결정되는 겁니다, 만남을 통해서. 그러면 여기에 오늘 본문 흐름이 11절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그 다음에 13절에 “택하심”되어 있죠.

자, 연결시켜 봅시다. 선택은 누가 하는가?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그 분이 우리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러면 선택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요? 주님의 선택을 내가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내가 범죄 한다고 취소가 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됩니다. 한번 선택한 것은 요지부동이에요. 주님의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요. 주님을 배신한다고 믿음을 배신한다고 선택이 취소되지 않아요. 피 뿌림이 중간에 시답잖게 소용 없어지고 그런 거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11절을 한번 봅시다. 권력이 영원토록 무궁하죠. 그러면 이제 물어봅니다. 권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세계에서 주님의 권력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없어요.

자, 이 땅에 실루아노와 마가는 주님의 권력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이에요. 그러면 실루아노와 마가가 있는 이 권력장은 예수님의 권력이에요, 이미 부활에 성공한 권력이거든요. 죄와 죽음과 율법과 모든 걸 다 넘어선, 저주가 적용되는 저주가 떨어지는 현장을 벗어난 뒤에 적용되는 권력이에요. 저주나 지옥이나 불 심판은 남의 이야기에요. 누구한테? 실루아노와 마가한테는 남의 이야기에요.

남의 이야기인데 지금 실루아노와 마가가 눈에 보이기에는 다른 일반인하고 같이 섞여 있죠. 이런 배치는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 세계 속에 섞였어요, 안 섞였어요? 섞였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봤어요.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도 그것은 성령이 베드로에게 와서 고백한 거고 못 알아보는 거예요. 예수님의 가치를 못 알아보잖아요. 사람들은 실루아노와 마가의 가치를 못 알아봐요. 초등학교 문제 한번 낼까요? 다음 중 인류에 공헌한 두 사람을 뽑아내세요. ①실루아노, ②마가, ③아인슈타인, ④나이팅게일, 몇 번입니까? 실루아노와 마가라는 사람을 선택하면 땡, 이건 수능 떨어집니다.

주님의 권력은 이 세상에는 없는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라는 사람은 진짜 희한한 사람이에요. 이 땅에 없는 권력에 의해서 권력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에 고맙소,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없는,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삶에 보탬이 안 되는 권력에 대한 고마움, 다시 말해서 나를 살게 해주지 않는 권력에 대해서 고마움.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무슨 이익이 있다고, 아무 이익이 없는데요.

제 말이 어렵지 않습니다. 세례요한 생각해보세요. 세례요한 다 알죠. 이름이 넉 자 아닙니다, 요한, 두 자입니다. 세례요한이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노회장 하다가 죽었습니까, 당회장 하고 죽었습니까? 죽을 때 편안한 노년을 즐기면서 연금 받으며 죽었어요? 댕강, 쟁반에 모가지 잘려서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죠, 만인의 웃음거리.

또 한 사람, 이번에는 세 자입니다, 스데반 집사.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아서,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설교할 때 천사의 얼굴과 같아요, 천사의 얼굴. 설교할 때 표정 보면 주께서 말씀을 막 주는 것 같아, 아이 부끄러워라, 천사의 얼굴이죠. 그러나 천사의 얼굴은 개코,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었어요. 무슨 그렇게 터지는 천사가 어디 있어요?

우리를 선택한 권력은 이 세상에 어딜 가도 판매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살 수 없어요. 돈 주고도 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실루아노와 마가는 12절에 나오는 단어가 그 사람을 규정합니다. 그 단어가 두 자로 되어있죠, 12절에. 크게 쓰겠습니다. 참, 이거 너무 좋은 말씀이다. 크게 쓰겠어요. ‘은혜’. 너무 식상하죠? 그럼 바꾸겠습니다. 선물.

네 자체가 선물이야. 네 자체가 선물이야. 세상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어떤 인간 존재의 출현을 보여주는 선물이야. 아무리 너를 평가해도 평가가 안 되는 그 자체가 선물이야. 이게 바로 실루아노와 마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거예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면서 왜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왜 사도바울은 자기 이름을 거기다 거명했습니까, 집어 넣었습니까? 은혜가 실제적, 실질적이라는 말이에요.

이 ‘실질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인데요, 허망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실질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실증적이다 또는 더 쉬운 말로 하면 실제적으로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실루아노와 마가라는 인간이 등장했거든 이게 빈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베드로가 등장했거든 우리가 지금 성경 보고 믿습니다, 하는 이 말이 지금 헛수고, 헛짓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이게.

성경 전체가 농담이 아닌 거예요. 모세가 홍해를 건너온 게 농담이 아니고 실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조작한 것도 아니에요. 무덤에 있는 귀신 들린 자가 주님보고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아직 멸망할 때가 안됐는데 미리 예수님이 왔습니까?” 악귀가 하는 말이지만 악귀가 하는 말이 지금 실없는 소리 하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악귀가 그렇게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경계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끝이 경계선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타나면 그게 곧 경계선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이 오셔서 지옥과 천국의 경계선이, 예수님이 오시는 그 자리에서 이미 결정이 나버린 겁니다. 예수 있는 쪽과 예수 없는 쪽이 이미 결정나 버린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이 있잖아요. 그럼 이 세상에서 병들고 괴롭게 고달프게 살아도 그건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하지 마세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있습니다. 실루아노하고 마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 고난에 참여했다고 되어 있어요. 마가는 골로새서 4장에 보면 나와요. 4장 10절, 11절에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조카) 마가” 이 마가는 베드로의 비서죠. 마가는 처음 1차 전도하고 그냥 돌아갔어요. 그런데 결국 나중에는 사도바울과 함께 로마에 잡히게 된 겁니다. 같이 감옥에 갔었어요.

그러니까 도대체 성도 되는 걸 보고 나에게 이익이 되면 믿겠다, 이것은 마귀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건 간증 집회에서 그런 소리 해요, 간증 집회에서.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과 세상한테 일체 미련이 없이 살았다는 거예요. 아무 미련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모세를 따라 나왔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날 때 애굽에서보다 더 잘 살기를, 더 편하기를 희망했을 거예요. 그러나 막상 그들이 들어갔던 세계는 자기들만으로 구성하는 세계가 아니라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율법이, 무서운 저주의 율법이 기다리는 세계 속으로 쑥 들어온 거죠. 그렇다면 애굽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자기 잘 되겠다는 계산 있잖아요, 그것은 완전히 작살 나는 거죠.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너희 속에 있는 어린 양을 선택한 거예요. 그 어린 양의 선택, 그 선택의 위력의 요소가 있는 사람만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것이 너무 과장된 이야기죠, 독수리 날개로. 독수리란 땅에서 인간들이 관여할 수 없는 대상이 독수리 아닙니까? 닭 쫓던 개, 쫓아가봐야 닭이 날아갔잖아요. 날아다닌다고요. 인간은 기어가지만 인간 속에 함께 있는 그 어린 양의 요소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요소에요.

인간 세계에서 그 능력을 체포하거나 으름장 놓더라도 기죽지 마세요, 으름장 놓더라도. 으름장 놓는 것은 이 세상이 늘상 하는 일이에요. 우리 시키는대로 해야 살 수 있다, 그게 그들이 제안하는 조건입니다. 내 말에 복종하는 조건이 그거에요. 그럴 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내가 너희들 말 들어서 사는 게 아니라고. 이렇게 톡 쏘아붙이세요.

이렇게 주님을 놓쳐버린 세상, 그 세상을 가지고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나라 이름 나오죠? 바벨론. 제가 이렇게 웃는 것은 세상의 어떤 모든 나라도 바벨론 안에서 쪼개진 민족일 뿐이에요. 바벨론이라는 것으로 이미 규정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바벨론은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의 나라입니다. 짐승의 나라에서 갈라져 봐야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고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고, 그 모든 속성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의 속성 범주 안에 놓여 있어요. 바벨론의 속성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가 왜 다른 제국으로 달라지지 않고 바벨론으로 고정되는가. 그걸 바벨론이라고 굳혀버렸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바벨론 느브갓네살에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계시를 준 게 있어요. 바벨론 느브갓네살, 바벨론 왕에게 준 계시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느브갓네살 왕, 인류 역사의 모든 제국은 너로 끝났어, 이런 뜻이에요. 이미 끝났어. 확정되었어. 시간의 진행? 아무 의미 없어. 이 속성이 최종 속성이에요.

그 바벨론에다가 뭐를 집어넣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신을 받은 다니엘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 이름이 ‘인자(人子)’에요, 인자. 사람의 아들입니다. 다니엘은 예언이니까. 다니엘의 이름을 인자라 했거든요, 인자. 인자 되신 분이 와서 꽂혀버리면 예수님이 꽂아놓은 그 세계는 얼음땡이에요, 얼음땡. 스톱되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속성이 완전히 그 자체로 완결된 속성을 지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에 신상이 있고 이 신상의 있음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 ‘있음’이 ‘없음’까지를 다 보여줘요, 바벨론의 그 우상, 신상이. 금, 은, 동, 놋, 철 그 다음에 철과 진흙이 섞였죠. 이미 그 바벨론 안에 모든 인류의 끝이 함축해서 여기 농축해서 신상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는 말이죠. 그 신상은 어떻게 됩니까? 끝에 뭐가 날라오죠? 돌멩이 하나가 날라와서 발을 쳐버리죠. 치니까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는 거예요. 인류의 역사는 더 진행되지 않고 제자리 뛰기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가 커서 뭐가 되었습니까? 태산. 그게 바로 인자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바벨론에 나오죠.

그러니 바벨론이라는 말은 오고 오는 모든 베드로전서 계시가 유효한, 모든 인류의 마지막 종말까지 오직 바벨론 제국 외에는 다른 제국은 없습니다. 그것도 두 개가 아니고 단 하나의 제국만 확정지어졌습니다. 단 하나의 짐승의 나라, 최후의 나라를 쳐버렸다는 말은 더 이상 인간 나라에 기댈 것은, 얻을 것은 전혀 없다. 망하게 되어 있는 제국, 그것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곧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바벨론 제국에 누가 파견되어 있습니까? 다니엘하고 그 세 친구 파견되어 있죠. 그와 똑같은 형편에 놓여있는 자가 바로 마가요, 사도바울이고 실루아노고 오늘날 우리 성도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이게 바로 지금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11절부터 “권력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따라서 우리 가슴팍에다가 BTS 그런 것 좀 새기지 말고 ‘Amen (아멘)’. 우리 자체가 아멘이에요. 선택도 주님의 권력이고 그리고 이 바벨론 제국인 것을 티 내기 위해 이렇게 파견 근무하는 것도 아멘에서 온 능력이고.

그리고 베드로전서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그러니까 진짜 진짜 이스라엘, 주님 안에 있는, 그 주님에 의해 선택된 모든 자에게는 ‘고맙소’라는 마음으로 서로 인사들을 해라. 모른 척하지 말고.

오늘도 주님의 능력이 작용하니까 고맙죠? 예, 주님께 감사하죠. 주님을 경유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을 때에, 주일 낮 설교에서 회전 그네 이야기했잖아요, 여기 놀이동산에 움직이는 회전 그네가 핑핑 돌아가서 와아~ 커플들이 둘씩 한 조를 짜서 막 돌아가잖아요. 휙휙 돌아갈 때 이 기둥이 있어서 같이 구심점이 있어서 휙휙 돌아간다 했죠. 제가 주일 낮 설교시간에 물었잖아요. 여러분들 구심점이 있습니까? 나 말고, 자아 말고 다른 구심점이 있습니까? 중심점이 있습니까? 물었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두 사람이 교제할 때 무엇을 경유 해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의 택하심의 능력을 경유 해서 서로 대화가 오고 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서로를 이용 안 하게 돼요. 서로를 비난하거나 평하지 않습니다. 비판하지 않습니다. 무엇만 이야기해요? 사랑만 주고받죠.

사랑만 주고받으려면 이 사랑을 주님한테 부여받았잖아요. 부여받았으면 우리 처지가 바로 바벨론에 있던, 바벨론의 생리 그것을 우리의 자아성,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던 죄인들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도 죄인, 너도 죄인. 따라서 나는 너보다 더 낫다든지 나는 너보다 더 뛰어나다든지 믿음 좋다는 것은 이 사랑 안에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너는 십 년 믿었으니까 너는 나보다 더 낫다는 이런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바벨론에 있는 실루아노 그리고 마가. 실루아노는 사도바울의 비서에요, 마가는 베드로의 비서고. 그러면 이 사람이 실루아노, 이쪽이 마가, 이쪽이 베드로, 또 사도바울이 있다면 이 사람들의 모든 주제, 내용은 ‘나는 죄인이다’에요. 그래야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피 뿌림만, 피 뿌림의 그 가치를 우리가 모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은 특히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내가 나를 선택했습니까? 그런 것 아니죠.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런 것 아니죠. 이 말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생각하지 마세요. 부탁해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생각하지 마세요. 나의 온전한 행동으로 나의 인생을 책임질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실수 안 하고 내가 나쁜 짓 안함으로써 내 인생이 잘 풀리리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것은 선택이라는 요소를 작살 내고 예수님의 피 뿌림을 모독하는 마귀짓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그런 생각할 때 근원적인 감사함이 달아나고 말아요. 떠나고 맙니다.

특히 가까운 부부가 있을 때 만남이잖아요. 13절에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할 때 ‘너희’ 자리에다가 ‘부부’를 집어넣으세요. 부부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꼭 입술을 맞대란 뜻은 아니에요. 맞대도 나중에는 식상해서 이제 맞대는 것도 시시해. 재미 하나도 없어. 이거 뭐 하도 하다 보면 남의 입술 맞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등에 맞대는 그 피부나 그 피부가 똑같아서 뭐 짜릿하거나 아무 감동도 없어요.

진짜 감동은 새로움이 있을 때 감동이거든요. 새로움은 하루를 살면서 내가 죄 지은 것...... 죄 지었다는 말은 내가 나 지키려고 조마조마 살았고 불안불안 했고 걱정을 늘어지게 했던 그 죄 말입니다, 그 죄. 나는 나쁜 짓 안 했습니다, 주여, 나쁜 짓 안 했습니다, 절대 나쁜 짓 안 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죄. 그 죄가 얼마나 주님의 피를 모독했는가 그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새로움이에요.

그 새로움을 위해서 주님께서 늘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주십니다. 우리가 감추어놓은 이 악마적이고 세속적이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더러운 본성을 날마다 까발려주죠, 매일의 삶을 통해서. 네가 너를 지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택하심이 무효가 되니까. 무효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게 다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에 네가 아주 나를 훼방질하는구나.

특히 세상은 바벨론입니다. 이미 지옥이에요. 이미 지옥이라면 우리는 의젓해야 되고 그들의 으름장에 기죽지 말아야 돼요. 깜짝 놀라지 말아야 됩니다. 천국은 권력이 세세토록 있는 바로 그 분의 솜씨이기 때문에, 권력은, 천국 가는 것은. 천국은 주님이 보내줬는데 지가 잘나서 지가 갔다고 하면 안 되죠. 내가 행동 조심해서 갔다, 이러면 안 되죠.

오늘 본문은 이겁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외쳐라, 죽기 살기로. 우리 회사 취직시켜주니 감회가 어떻습니까? 이렇게 좋은 회사도 드뭅니다. 신입사원 한마디 하시죠. 우리 회사 어때요? 지옥에나 가라. 차마 그런 말 할 필요 없죠, 쓸데없이. 그저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앞에 뭐가 생략됐죠, 주께서 맡기신 일에. ‘주께서’는 빼고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내가 찾던 일꾼이 그런 일꾼이야. 속으로, 지옥이나 가라.

내가 뭐 너와 같은 방향인 줄 아나? 반대 방향이야. 나는 지금 경계선 밖에서 다시 세상을 찾아왔듯이 이미 우리의 생명은 하늘, 천국에 있고 그냥 놀이 삼아, 놀이라고 하기엔 너무 힘들다만은, 이 땅에서 그냥 세상 구경, 지옥 구경이나 실컷 한다고 생각하세요. 천국 가면 진짜 지옥 구경 못하기 때문에 원 없이 지옥 구경을 한번 해보세요. 남들이 얼마나 벌벌 떨면서 마귀한테 속아 사는지를 쌍안경 들고 관람하는 재미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하옵소서. 다 이루었다가 빈 말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준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인 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죽기살기로 이것을 고수하고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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