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610a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 가신 영광의 나라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면 세상 입장에서는 없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영광의 나라는 없다.’ 이 세상에서는 없어요. 주님 가신 그 세계는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 잡아낼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17장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께서 갑자기 변화되었어요. 그래서 변화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 (Mt. Tabor)에서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되고 난 뒤 만약에 그 이튿날 다른 사람이 그 소문 듣고 다볼산 정상에 갔다고 치면 거기서 예수님이 기다립니까? 없죠.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날라가버린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잠시 뭐 봤어요. 엘리야와 모세를 봤고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다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그 현장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이더라’ 되어 있어요. 예수님만 보이더라.
그러면 자기가 엘리야, 모세 본 것은 가짜였습니까? 본인이 이건 진짜라고 우겨도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근거는 없어요. 네가 눈 두 개 가지고 나도 눈 두 개 가졌는데 네가 가진 두 눈으로 봤다면 나도 볼 수 있어야 네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거야, 이 베드로야. 그런데 너는 봤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가보자, 그 현장에. 어디, 어디? 돌밖에 없는데? 나무밖에 없네. 봐. 그 이야기 말고 네 나머지 이야기도 다 설득력이 없는 거야. 어디서 구라를 쳐? 이렇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난감하죠, 베드로 입장에서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봤는데 참으로 봤는데 난감하죠. 오늘 강의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해요. 고난은 역경이 아닙니다. 고난≠역경. 고난은 역경하고 달라요. 역경은 힘든 장애물이거든요. 장애물이라고 우리가 인식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계획한 게 있는데 그게 뭔가 껄끄럽게 잘 안될 때는 그것을 역경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말로 고생, 장애물로 여기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없는 것처럼 고난도 이 세상에 없어요. 고난은 그 안에 포착, 포획되는 거예요.
고난이라는 것은 성도에게 체험은 되지만 그것을 남한테 설득해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 해봐야 “너 천당 가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이런 식으로 역경 정도로 그들이 곡해를 해버려요. 해석을 해버린다고요. 고난은 고생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역경이 아니고 그냥 예상 밖에 홀연히 등장한 그 모든 것이 고난이에요. 마치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고난도 인간의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바보, 등신 다 되는 거죠. 완전히 주님이 성도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의 물리법칙은 동일한 공식을 가지고 똑같은 결과가 계속해서 되풀이되어 나와 줄 때 그것은 정식으로 진리로써 인정받습니다. 한 번 한 것은 안돼요.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측정을 해서 동일한 결과가 되풀이되어야 그것을 진리라 하는 겁니다. 3×5가 한번은 15되었다가 한번은 12되었다가 그러면 3×5는 진리값으로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 손을 떠났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손을 떠난 것처럼. 인간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 영광이 있는 것처럼 인간 손을 떠났어요. 떠났기 때문에 인간이 고난에 들어가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고난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겠다는 음흉한 속셈에 불과합니다.
천국 가는데 고난이 있어야 되겠구나. 그럼 고난 받지 뭐. 고생 좀 하지 뭐. 선교사로 나갈까? 북한 갈까? 이런 식으로. 북한 가서 아오지탄광에 들어가서 거기서 복음 전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자꾸 시나리오 쓰지 마세요. 역경을 기대한다는 것은 고난도, 하나님의 영광도 내가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는 건방짐에 해당됩니다. 교만에 해당돼요.
고난은 그냥 닥치는 거예요. 길에 가다가 바람이 불어서 휴지가 하나 얼굴에 딱 붙어 떼어보니까 이번 토요일에 당첨될 복권을 받았다. 그런데 버리고 싶어서 쓰레기통을 찾다가 쓰레기통이 아직 덜 차서 지금 버리나 안 버리나, 그냥 나중에 버릴 때 버리면 되지, 했는데 10억짜리가 되었다. 고난입니다. 역경이 아니고 고난이에요. 왜냐하면 그냥 공중에서 두 바퀴 반 돌고 얼굴에 붙었으니까. 세 바퀴 돈 것도 아니고 두 바퀴 반 돌았으니까. 나한테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죠.
그러니까 고난 속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과 같아서 내가 익히 기존에 알던 나의 삶의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는 그러한 특이점을 가진 새로운 영토에요. 특이영역이에요, 특이영역. 물리에서는 이것을 특이점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블랙홀이라고 해요, 블랙홀. 기존에 있는 모든 물리법칙이 그 구멍 안에 들어가면 전혀 통하지 않아요. 양자법칙부터해서 상대성 원리도 통하지 않는 특이점이 있는 것처럼 특이영역입니다.
특이영역의 특징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모든 성경해석도 이 특이점 안에는 소용없어요. 내가 아는 신학으로 내가 아는 기도술로 불러내는 것은 사무엘을 불러내었던 여자 무당이나 하라 하세요. 병 고치는 권사나 하라 하세요. 왜 이 고난이 특이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나라에요. 보여야 있죠. 없는 나라인데 ‘없다’는 인간의 지식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그 속성이 그대로 지상에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것이 일종의 블랙홀이라면 특이점이라면.
그래서 인간이 고난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에 낚여야 돼요. 고난이 덮쳐 와야 되지, 내가 고난을 찾아가면 안돼요. 그것은 유사고난종교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데 목재상에 가서 적당한 나무 잘라서 사가지고 집에서 못하고 망치로 못질해서 십자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단 주의할 것은 옆집에 방해되지 않도록, 똑딱똑딱.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치수 계산해서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적당히 무게감, 중량감 느끼도록 십자가 만들어서 연습 삼아 몇 번 져보는 거예요. 져보면 결리거든요. 결리면 어깨에 덧대서 안 다치게 해가지고 몇 번 져보는 겁니다. 십자가 만들어내서 십자가 질 수 있어요.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디 뭐 상도동 가야돼요? 버스 몇 번 타야 돼요? 어디로 갑니까?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베드로 하는 말이랑 똑같아요. ‘주여, 어느 방향으로 가셨어요?’ 주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못 온다는 겁니다. 아니 주님 가신 길에 베드로가 갈 수 없다면 그럼 그 전에 하신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따라오라고 해놓고 주님 쪽에서 네비 다 꺼 놔버리고. 그러면 어느 주소를 찍어야 갈 수 있어요? 어느 주소를 찍어야......
그럼 혼자 십자가 지고 벗었다 지고 벗었다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옆에 파스 열댓 장 사놓고는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외치면서 있으면 주님께서 대단하구나. 이렇게 겸손할 수가. 내가 찾아올게. 뭐 그럴 줄 알았지롱? 택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런 건 없어요. 고난은 덮치는 것이고 남한테 설명해도 설명이 불가합니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릴 텐데 못 그리는 것은 여러분들 다 아시니까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병아리 그림에서 머리 위에 얹어진 계란껍데기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막 계란 깨고 나왔다는 거예요. 이 껍질이 고난이에요. 하늘에 계신 주님이 이 땅에 올 때 뭐를 깼어요. 성령에 의해서 오셨거든요. 성령에 의해서 오셨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 머리에는 이 하늘나라와 땅에서는 결코 연결점이 없음을 알리는 증표,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요단강에 성령 오실 때 마가복음에 뭐라고 표현되어있느냐 하면 하늘이 열렸다고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장 9절-10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그러면 성령오기 전까지는 하늘이 닫힌 거예요. 하늘을 열리게 하는 그 전담반은 성령이 하시지 인간이 못 엽니다. 인간이 낑낑거려가지고는 안 열려요. 하나님이 열어주고 성령이 열어준 그 가운데서 성령이 그 많은 인간가운데 예수님께 오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되시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인공 아닌 사람에게는 오질 않아요.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결코 영원토록 천국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다른 별칭이 ‘아들의 나라’에요. 예수님 나라가 천국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니까 너희들로 하여금 흑암의 권세에서 이끌어내사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와서 이제는 아버지께 들릴 때가 되었다 (요한복음 12장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하늘에서 오셔서 나는 너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13장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12장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들린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에도 나오죠 (요한복음 3장 13절-14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세가 장대를 들 듯이.
장대를 든다는 말은 평소에 땅을 보며 늘 있던 백성들의 시선 처리가 항상 지표면,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민수기 21장에서 어느 순간에는 땅 보지 말고 뭔가 땅을 떠난 다른 시선처리를 모세가 요청한 적이 있어요. 땅에 주어진 이 불뱀이 땅에서 살던 불뱀인 줄 너희들이 알고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물도록 물어, 물어! 배후에서 시킨, 그 불뱀이기에 이 불뱀의 동작과 너희들을 공격한 그 점과 하늘에 계신 분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뱀모양의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형식으로 해서 아래가 아니라 위,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것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불뱀처럼 땅에서 일어난 일과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 동질의 일로서 주님의 일은 땅에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늘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늘의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땅에서 개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땅에서 살던 인자가 십자가, 부활로 인하여 들릴 때가 온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보고 네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도 어떻게 땅에서 하늘의 일을 못 찾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못 찾느냐? 옛날부터 모세는 이미 땅에서 일어난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누누이 당부를 했건만 어떻게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는 연결 사건들을 네가 왜 파악을 못 하느냐? 소위 선생이라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늘 쳐다본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벌어진 하늘의 일과 관련성을 일찍 지어줘야 주님 가신 코스로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겁니다. 땅에서 일어난 주님의 일, 하나님의 일,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난이라는 말은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좀 쉽죠?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아무리 설명해도 난감한 이야기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에요. “그리스도”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 참, 그리스도 안. 이게 정말 어려워요. 아까 제가 제 딴에 쉽게 한다고 한 것이 바로 ‘특이점, 특이영역’이라고 한 거예요.
뭔가 안, 공간, 특이 공간. 안(in)이니까 공간성이잖아요. 반경 몇 km입니까? 를 물을 수 없는 공간이 있어요, 이 땅에. 뭐 그런 공간이 다 있어요? 면적이 얼마입니까? 를 물을 수 없는 공간. 그게 무슨 공간이냐? ‘그리스도’ 해놓고 ‘안(in)’ 이라는 전치사를 붙여버리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냔 말이에요. 어디 있는데? 우리는 ‘어디 있어? 그 형태가 어떻습니까?’ 이런 걸 막 묻고 싶은 거예요.
어렵지만 설명해야 되겠죠. 오늘 나오는 첫 번째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땅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어요. 우리는 이미 안에 있다고요. 시간과 공간 안에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건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써볼게요, 시간과 공간 안에 개체가 들어있죠, 그렇죠? 그러면 ‘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겁니다, 조성한 거고. 그래야 안(in)이라는 의미가 성립돼요.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영역은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기존의 시간, 공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덮치는 거죠, 낙하산처럼 덮치는 겁니다. 사적으로 구원해달라고 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밖에 안돼요.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런 것밖에 안된다고요.
뭐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합시다. 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성경이 오죽 어려워야죠. 어떻게 설명해도 한계가 있어요.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기가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 그만큼 해왔던 짓을 보란 말이죠.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느냐?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 그게 가장 기본적이죠. 그것 말고 다른 기본이 없잖아요.
심지어 영화관에 가도 팝콘 들고 가잖아요. 뭐 배고픈데 영화가 재밌겠어요? 뭐 먹어가면서 버터발린 옥수수 팝콘 먹어가면서 배도 채우고 배가 차야 영화도 재밌잖아요. 그게 현재 기존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동시에 우리는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일말도 없습니다. 애한테 묻습니다. “너 커서 뭐 될래?” 그것을 왜 묻느냐. 커서 뭐 된다는 것은 이미 시간이잖아요.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나리. 어디서? 공간이잖아요, 공간.
<엽기적 그녀>보세요. 그 영화 보면 나중에 나무 밑에다가 시간 캡슐 집어넣고 만나자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만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출세 못하면 부끄러워서 동창회도 안 나오는데 왜 만납니까? 사람이 10년 후에 만나자 해놓고 못 만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벌써 안목이 세련되어졌기 때문에 옛날 인물은 내 취향이 아닌 걸로 이미 달라졌어요.
촌에서 시골교회 피아노 치는 것도 아니고 풍금 치는 그 아가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죠. 왜냐하면 총 주민 546명 가운데 제일 예쁘니까. 뭐 반하고 난리 나죠. 네잎 클로바 뜯어가면서 문방구에 가서 반듯하게 비닐 코팅한 것 주면서 지장 찍고 이것처럼 영원하자. 그래가지고 걔가 서울로 이사 가서 유학가 보세요. 그다음 한 10년 뒤에 시간 캡슐 열려고 가보면 그 아가씨는 인물도 아니죠, 뭐. 촌닭이죠, 컨츄리 꼬꼬. 내가 미쳤지. 뭘 보고 십년을. 아이고 미쳤다. 그거 보고 그 다음부터는 약속시간 안 나가죠. 여자 혼자 기다리고. 내가 갑자기 드라마를 써버렸네. 이야 이거 재밌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드디어 약 올라서 보따리 싸가지고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그 장면, 아까 건 1회분이고 이제 드라마 2회분 들어간 거예요. 우연히 만나서 그 땐 누군지 모르다가 나중에 재벌3세 되서 결혼하고.
변동 상황에서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창조하는 겁니다. 그 때의 내가, 내가 아니에요. 우리는 어떠한 체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 자체가 세상 보는 눈이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합니다. 나도 내가 내일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요. 변함없다. 우리 사랑 영원하자. 네가 영원을 알기는 알아? 여기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번 읽어보세요. 더 어렵습니다. ‘하늘나라는 네가 살던 방식 아니다’ 그 말이거든요. 자 그다음 한번 읽어보세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 안에서...... 이것은 미치는 겁니다. 해석 자체가 안돼요. 해석을 하려면 다른 쉬운 것 가지고 어려운 것을 풀어줘야 해석인데, 너네 집 어딨노? 미장원 옆에. 미장원이 어디 있는데? 우리 집 옆에. 이게 해석이에요, 이게? 말이 안 되죠. 둘 다 동일하게 어려워요. ‘하나님 나라’ 해놓고는 ‘성령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럼 성령 안은 어디 있나? 하나님 나라에 있지. 지금 놀리는 거예요, 뭐에요?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들어오지 말라.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되어 있죠.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자, 이 점을 이렇게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목숨 버릴만한 가치를 얻지 못하면 고난 속에 안 들어온 것이다’ 하늘나라 속에, 성령 안에 안 들어온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낯선 곳에 들어가려면 기존에 내가 나를 지키던 방식이 총동원되거든요. 들어갈 만해서, 내가 다칠까, 안 다칠까? 이거 너무 심한 모험이 아닌가? 수백 번도 더 검토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을 저는 두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춤. 주춤하는 거예요. 또는 좀 천박한 말로 간보기. 깨작깨작 간보는 거예요.
과연 이 복음이 나를 살리고 천국 보낼만한 것인가 내 쪽에서 간을 보는 거예요. 그 간보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이 살 때까지 해왔던 그 짓이에요. 저 사람이 나와 사귀고 난 뒤에 얼마나 많은 손해가 있고 얼마나 많은 이익이 있고. 그 손익계산을 해서 손해보다는 이익이 많다 싶으면 간보는 식으로 한번 사귀어 볼게. 그게 흥정이고 그게 하나의 기대잖아요.
사람이 결혼할 때 청첩장 돌리고 결혼식하고 뭐 그렇게 하는데, 이제는 말한다. 전에부터 이야기했지만 분명히 얘기합니다. 결혼은 동업이다. 결혼은 동업이에요. 저 인간 만나서 내 수입이 얼마나 증가하나. 내가 쇼핑하는데 지장 있겠느냐. 그거 계산하는 겁니다. 그걸 결혼 전에 누가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요. 사랑으로 하는 줄 아는데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랑은 없습니다. 잠시 있었는데 그게 돈으로 변해요. 돈으로 측정된다고요.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고 돈이 밥 먹여주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누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이미 정해졌어요. 나는 나만 사랑해요. 나만 사랑하니까 들어갈 틈이 없어요. 내 사랑에 협조 가능하면 사랑해주고.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내가 계속 존재하는데 필요한 돈이 필요한 거고 그 돈 대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까이 거, 사랑한다는 말, 그거 뭐 돈도 안 드는데 얼마든지 해주지 뭐, 해주면 되죠.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됐냐?”
남편이 있다가 아내보고 “당신 나 사랑해? 진짜 사랑해?” 두 번 물으면, “너 오늘 무슨 저지레했지? 야, 이거 안하는 짓을 하고 있네? 뭐 또 용서구할 게 있어? 사랑해. 들어보고. 일단 들어보자.” 들어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저 인간이 저지레한 것이 돈으로 계산해서 얼마나 손해 봤는지 그걸 하는 거예요. 사실은 과속해서 7만원 긁혔어. 그러면 딱 계산해서 올해 들어 몇 번이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 돈입니다. 동업이에요.
인간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사랑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전부다 자기가 최종점이에요. 이것이 기존의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낯선 곳에 가더라도 자기 자신을 놓치거나 잊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신보고 이야기해요.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으면서)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맨션 세 채, 초막 세 채 짓자고 말한 그게 뭐냐 하면 이거 지어서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거예요, 베드로가. 내가 살아왔던,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일체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세계가 올 줄은 베드로가 상상도 못한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켰던 그 수법과 그 스킬, 기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 그 세계로 주께서 데려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한 거예요. 네가 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상상한 세계가 아닙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갈 수 없다면,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아가서 한번 보겠습니다. 아가서 보고 사도행전 13장 38절 보겠습니다. 아가서에서 두 구절 찾아보겠어요. 아가 3장 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그 다음에 나온 말이요,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냐. 솔로몬의 애인이죠, 술람미 여인. 거친 들에서.
주님께서 거친 들 같은 이 세상에 오셔서 거칠게 사시다가 주님께서 하늘나라 갔다면 그 코스는 이제부터 유일한 생명의 코스이고 다른 길은 없어요. 그 거친 들 이외에는 다른 길 없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거친 길이에요, 거친 길. 얼마나 거친지, 거칠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통과할 수 없는 망가질 대로 다 망가져버린, 파쇄 된, 종이 파쇄 되듯 다 파쇄 되는 것을 겪어야 되겠죠.
아가 8장 5절에 보면,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그러니까 이 솔로몬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면 자기 여자가 거친 들이라는 그 조건 자체를 짊어지고 오는 그 여인을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히 사랑해야 될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 거친 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주제는 뭐냐. 고난을 통해서 구원이 아니라 그냥 고난이에요. 고난 자체가 걸어오는 거예요, 주님한테. 마치 아버지 앞에 주님이 고난 자체, 십자가 진 자체로 아버지한테 가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 지고 그 고난 자체가 걸어서 너로 인하여 내가 흘린 그 십자가 피가 나에게로 오게 하라, 이 성도들아. 나에게로 오게 하라. 너 말고! 짊어진 그 십자가 피가 오게 하라. 그 놋뱀이 오게 하라. 너는 모세처럼 놋뱀이나 들어라 이 말이죠.
남이 욕을 하든 말든 내가 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역경이 아닙니다. 역경을 내가 딛고 안 딛고. 역경은 내가 아직 살아있고 내가 부정되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고난은 고난이 나를 삼켰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는 고난만 돋보이고 나는 그 안에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낯설기만 한 거예요. 무중력 상태에요. 오늘 제목을 ‘무중력 상태’로 할까? 무중력 상태. 자기 몸을 가눌 길이 없어요. 분명히 남들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 살면서 본인만 무중력 상태에 포획 되었어요.
마치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듯이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처럼 베드로가 던지고 사도가 던진, 주님이 던진 그물에 포획된 고기처럼 뭔가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나를 그 안에서 놀게 하는 거예요. 낯선 공간이 되게 하는 겁니다. 기존에 내가 했던 원칙, 착실함과 착함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그 새로운 낯선 공간.
그 복음적 이야기를 어느 가수가 유행시켰어요. 가수 이름이 기억나요. 김용임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하는 노래가 있어요. 밧줄로 꽁꽁 나를 묶어라. 나를 사랑의 밧줄로 포로 잡아가라 이 말이거든요. 얼마나 출애굽적입니까? 김용임씨가 그걸 의식하고 복음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사랑의 밧줄 꽁꽁 묶어라. 사랑의 밧줄로 당신한테 끌려가는 행복을 누려보자. 당신한테 포로된 행복을 누려보자.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면요, 사랑의 밧데리 같은 건 아무 필요 없어요. 밧데리는 갈아야 되잖아요. 이건 갈 필요가 없어요. 뭐 온 몸에 사랑의 자국이 있어, 너무 묶어가지고. 그러나 이걸 풀면 안돼요. 꽉 조여야 돼요. 꽁꽁 묶는 거예요. 내 욕망, 취지를 용납 못하게. 내가 내 힘으로 살겠다는 그 못된 옛 성품이 이 동네에서는 무용지물 되게. 김용임씨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고난이라는 말을 하느냐. 이 세상 자체가 목숨을 끊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시간 공간이, 이 인간세상이 목숨이 끊길까봐 걱정하는 세계지, 목숨을 알아서 끊는 세계는 아니에요. 그래서 이질적이에요. 너무 복음이 좋아서 ‘그까짓 거 내 목숨은 어떻게 되도 괜찮습니다’ 이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참 대담한 선언인데 선언하면서 이 형용사를 썼어요. ‘다른’. ‘다른’의 3종 세트에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라 했어요. 이 말은 성령, 예수, 복음이 유포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단어가 유포되고 있으니까 그 단어를 쓰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아닌가? 이 단어 쓰는 것도 어디냐. 이 단어 쓸 정도 같으면 일단 그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라고 봐주자. 안 그래도 지금 쪽수가 모자란 판에.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데. 대충 이 umbrella, 이 우산 속에 들어온나, 이 핵우산 속에.
하나 놓칠까 싶어서 대충 전부 다 들이는데 사도바울은 대담한 이야기를 해요. 다른 복음과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다른 예수와 진짜 예수님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없으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다른 성령과 성령을 구분할 줄 모르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누가 줬느냐 하면 악마가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악마가. 그러면 악마 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바로 나오죠. 너 잘났다, 그래. 너는 뭐 그리 잘났는데 함부로 평하느냐? 너는 네 관점에서 보니까 네가 옳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논리에 일관성이 있어야지. 네 잣대만 옳고 우리 잣대는 틀렸다는 근거를 대라. 이렇게 나오겠죠. 네가 진짜 사도인지 증명해보라.
그 뒤에 고린도후서에 11장 이후에 쭉 나오는 이야기가 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환난과 고난 받았다고 나오는 거예요. 환난과 고난 이야기가 쭉 나와요.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행적과 동일한 행적이 주께서 나에게 강제로 그 주님의 고난을 주님 스스로 재현하는 데에 자기를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 자기가 고난 받아서 이만큼 하면 천당 가겠지, 하고 노리는 게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계셔서. 살아계신다는 말은 안 노시는 거예요, 살아있어서 계속해서 사도에게 묻는 것은 “네 목숨 건질래, 복음 건질래?” 라고 주께서 촉구하시면서 주님 가신 그 길로 가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게 했을 때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일단 주께서 사도바울에게는 챙길 것을 챙겨줬어요. 그게 뭐냐. 삼층천이라는 거예요, 삼층천. 그 삼층천을 사도바울은 은혜라 했어요. 그 삼층천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지적하는 것이 허용이 안 되는 세계에요. ‘나 여기 있습니다’ 가 허용이 안 되는 세계. 삼층천에서는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만 통용되지 나 여기 있습니다, 는 필요 없어요. 주님 거기 계시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거든요. 증인은 본래 증거 해야 될 본 주인이 없으면 증인 자체가 무의미한 거예요. 증인만 덜렁 있고 본 주인공 하나도 없으면 그건 말도 안 되죠. 아니 영화 보러 갔는데 등장인물 쭉 나오고 영화 끝나면 그게 무슨 영화에요? 보이지 않는 주인공 옆을 강강술래 하듯이 등장인물들이 둘러쳐서 뭔가 계시다고 한다면,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은 각자 자기 자신을 안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 순간에 가운데 계신 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분들은 주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를 안 하고 주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자기 이야기를 안 하니까 시비 걸 건덕지가 없죠. 너 이번에 기도 몇 시간 했어? 두 시간. 난 세 시간 했는데.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 몇 시간 시켰어? 세 시간 시켰어. 난 두 시간 시켰는데 너 고생 좀 했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앞에 헌금 얼마 시켰어? 난 만원했어. 난 오천원밖에 안했는데 넌 돈 많이 날렸네. 이런 이야기.
항상 ‘주께서 살아계셔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만.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저건 하여튼 교회 올 때마다 늦게 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저 사람은 하여튼 주께서 꼭 늦게 오게 하셨어. 그것도 매주 그것도 시간 맞춰서 꼭 35분. 예배 시작 10분 후에 와. 앞에 기도하고 그런 거 다 지나고 꼭 그 때 와. 아닐 건데 자기가 행사 싫고 설교만 들으려고 오는 거 아닌가? 한번 물어보자.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 이렇게 하네. 그럼 믿어줘야지. 그런데 너무 정확해. 주께서 하셨다면 그렇게 매번 정확할 리가 없는데 하여튼 믿음은 안가지만 말을 들어줘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데.
이걸 다른 말로 오늘 본문대로 하면 고난이 그렇게 내 머리 위에 계란 껍질 뒤집어씌운 거예요. 계란 껍질이 없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계란 껍질을 뒤집어 써야 돼요. 이걸 벗겨버리면 안돼요. 그럼 병아리 되어서 안돼요. 계란 껍질 있어야 이게 거듭났다는 뜻이에요, 이게. 방금 막 태어난 거예요, 병아리처럼 노랗게. 뭘 찢고 깨고.
그야말로 어디서 나왔는가? 거친 들의 생산품이에요, 거친 들. 이 세상은 거친 들 아닙니다. 주님이 거친 들이라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주님의 체험에 입각해서 그 동일한 체험, 거친 들의 체험이 흠뻑 젖어든 사람이 바로 고난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걸 사도행전 14장에서는 우리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된다고 이야기한 거죠.
그럼 아까 제가 남겨둔 이야기해봅시다. 사도행전 13장 38절부터 보면 이것 지금 사도바울이 설교한 거니까 제가 그냥 읽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이 이 현장에 와서 저와 여러분들께 설교한다고 보세요. 사도이기 때문에 진짜 귀신이 알아 모시는 사도에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으니까. 귀신나라에서도 유명한 분이 설교할 때 어떤 식으로 설교하는가. 3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 사람은 예수님이죠.
이게 설교내용이에요. 죄 사함이에요. 죄 사함이니까 이걸 듣는 우리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라는 반응을 보이면 안 되고 우리가 그동안 내가 있던 시공간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게 어둠의 권세거든요. 내가 뭐 남보다 나쁜 짓했습니까? 이렇게 되물으면 안 되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형편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에서 못 빠져나왔으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그까짓 내 목숨보다 더 월등하게 소중한 내용이에요.
나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밥 먹고 살았다, 이 내용보다도 나는 주님이 오셔서 죄 사함의 능력을 받았다는 이것이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하다든지 그런 말은 그 앞에서 들이댈 가치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거예요. 내가 나 살려고 행한 내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심이 결국 우리에게 죄 사함으로 주어진 거예요.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 힘으로 죄가 안 사해지니까 문제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식으로 착하게 해서 죄를 씻으려는 그 자체가 곧 지독한 죄였음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소급해서 정리될 수 있는 거예요. 39절에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갑자기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하의 의인으로 대우해주시는 겁니다, 의인으로.
머리에 고난의 달걀 껍질 하나 덮였을 뿐인데 우리로 하여금 ‘반갑다 친구야’ 되는 겁니다. 이 천국 친구야, 이 의로운 친구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죄라는 죄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이 깨끗한 친구야. 형용사가 붙으면 붙을수록 점점 더 미안해지네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의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된 나의 친구야. 돈보다 친구가 더 낫다, 돈보다. 이 친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 너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 이 이야기. 이게 귀신도 알아주는, 귀신도 저 사람은 사도 맞다고 인정해 준, 하나님이 보낸 사도라고 했던 그 사도 바울이 한 설교의 핵심 부분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설교가 뭐냐 하면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았다, 죄 사함 받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난 뒤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48절 다시 보세요. 그럼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럼 천국 가는 사람이 발생되는가.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 조치로서만, 말씀만 준 게 아니고 말씀을 믿게 한 그런 어플리케이션, 그 앱까지, 아이디, 비밀번호까지 한꺼번에 다 준 거예요.
지식만 준 게 아니고 이 지식이 아니라 곧 너희에게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을 알게 하는 눈까지 뜨도록 성령께서 영생 준 자에게 성령을 꽂아주는 겁니다. 꽂아주는 거예요. 야, 친구야 너 통장에 돈 십만원 넣어줄게. 넣어줄게. 벌써 세 번 네 번해도 소용없어요. 전화를 이렇게 해야 돼요. 친구야, 네 통장 한번 조회해봐라. 십만원 꽂혔을 거야. 꽂혔다는 말. 십만원 꽂혔다.
아무개야, 너한테 영생 꽂혔다. 성령 꽂혔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성령 꽂혔잖아요. 정말 여러분 성령 꽂혔습니까? 10분 쉬는 동안 한번 확인해보세요.
서울의존강의20210610b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좀 난해할 겁니다. 어떤 점에서 난해하냐 하면 고난을 설명할 때 사도행전이라는 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고난 받을 때는 누구도 예수님 개인의 고난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개인의 고난에 예수님만 계시면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 그 제자들에게 파급이 되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지평, 새로운 영역이 사도행전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나 야고보나 사도바울이 가는 그 행적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행적과 유사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기적을 베풀었다고 소문 났는데 그들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은근히 기적 받을 때는 좋았는데 나중에 말씀을 전하니까 다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왜 어려우냐 하면 말로 전부다 응집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의 능력이 병 고치고 뭐가 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말로 응집이 돼요.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구원은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부활 후에 만났잖아요. 나도 그렇게 만나고 싶어요. 사울아, 사울아. 뭐 그런 것 좀 보고 싶은 거예요, 영광스럽게. 갑자기 눈이 막 장님 되고 누가 와서 안수하니까 눈 뜨고. 그런 롤러코스터 같은 짜릿한 체험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말은 너무 밋밋해요. 말 듣다가 졸 수가 있거든요. 실제로 사도바울이 설교하는 중에 3층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죽었죠. 죽었는데 사도바울이 또 살려줬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는 그 모든 육신의 것이 보조적이에요. 핵심은 죽었다가 살아나도 인간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눈으로 보고 듣고 기적을 바라는 이유가 기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인간의 몸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거든요. 몸이 아니고 말씀. 말씀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몸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 주님의 몸 안에 있다는 말은 나에 대해서 일체 미련을 끊어야 하는 겁니다. 내 몸이 행복하다든지 내가 잘 될 생각을 가지고 오면 안돼요. 나에 대한 미련을 끊어야 돼요. 내 몸이 있으면 내 자아는 내 몸 안에 있어요.
그런데 아까 어렵다는 말이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부르심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를 때, 우리 이름을 가지고 “아무개야~” 떨리듯이 부르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사도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 십자가 복음은 가는 가운데 김영순! 이철환! 너 판에 불렀어.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특정 개별적 이름을 부른 게 아니고 그냥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자기 존재, 자기 이름이라는 특정된 내 존재를 개무시하는 거예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요. 주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지음 받으면 그만이지, 굳이 내 존재가 구원이 되어야 됩니까, 안 되어야 됩니까? 그걸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구원을 하나님께 원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 자신의 말씀이 담기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론 아닙니다. 말씀론입니다. 구원론은 없고 말씀론밖에 없어요. 인간의 육체는 풀 같아서 없어지거든요.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곧이 곧대로 하는 신입사원이 와서 사내 분위기 딱 보니까 우리 부장님이 돈을 좋아한다고 해가지고 그 다음날 퇴근해서 집에 A4용지 사다가 열심히 돈, 돈, 돈, 만원도 아니에요, 그냥 글자로 돈, 써가지고 가위로 오려서 그걸 또 봉투에 넣어 가지고 두껍게 해서 딱 줬죠. 부장님 이거, 좋아하시는 거 신입으로서 내가 예의인데 돈 좋아하신다고 해서 돈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고, 얘 이거 사회생활 할 줄 아네. 신입인데 신입 아닌 거 같애. 얘가 주제파악 하네,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자랑한다고 돈 꺼내보니까 진짜 돈 나왔어요. A4용지, 저 같으면 이면지 사용합니다만. 우리가 구원 좋아한다면 주님께서 구원, 구원, 구원 해가지고 가끔 십원 써서 딱 줬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다 할 때는 이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해주기 바라는 그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의 한 모습이에요. 그것을 일체 개무시하듯이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네가 복음을 전했어?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고? 내가 묻는 것은 네 안에 나 있느냐를 묻지, 네가 뭘 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네가 열심히 나를 위해 뭘 했는가, 나는 그거 더러워서 안 받아, 더러워서. 구약에 보면 창녀가 들고 온 돈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죠, 더러운 것. 그 창녀나 오늘날 월급 타려고 스크루지 밑에서 일하는 집사님이나 다 같이 창녀죠, 뭐. 돈보고 일하는데. 사랑으로 할까요? 돈보고 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개코도 돈 나올 데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지 돈 있는데 그걸 사랑한다면 누가 믿겠어요? 재벌 3세보고 나 당신 사랑해. 그런 여자가 한 두명이겠습니까?
누가 주님을 사랑해요? 주님 뭐 볼 거 있다고요. 주님이 우리에게 현찰을 뿌렸습니까, 뭘 줬어요?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하라. 그 말씀 외에는 없잖아요. 멀쩡한 내 몸을 미워하라고 하니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열두제자 중에서 돈 깨나 있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미 세상에서 난 이미 죽었다, 하고 살아간 사람이 열두제자였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니 자기 목숨을 주께서 사용하시기 때문에. 네 목숨은 내 손에 있으니까 네가 관리하지 마라. 이미 목숨이 주님 쪽으로 넘어갔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모든 사도들이 말하기를 사나 죽으나 너희는 주의 것인 것을 네가 인정하지? 인정 안 한다고? 그럼 내 사람 아니지. 나는 설교할게. 사나 죽으나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자에게만 먹히도록 내가 설교할게. 그게 로마서고 갈라디아서고 에베소서에요. 그러니 제 말은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걸 주세요’ 가 성립 안 되고 그냥 말만 해요, 말만. 그냥 말씀만 한다고요.
로마서 10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10장 14절,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니까 듣고 믿고 구원받고. 딱 그겁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내가 너희에게 말을 전하는데 영생을 못 받은 자들은 그것을 사도바울 본인의 말로 아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안 믿는 자들은 네가 네 철학을 전하고 네 사상과 네 신학을 전한다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다 그렇게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는데 너희들은 상당히 독특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 말고 믿는 믿음이 너희 안에 말씀과 더불어 같이 어플리케이션처럼 작동하도록 주께서 말씀 전할 때 성령의 은사도 같이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하는 나도 네 구원에 관여한 바 없고 구원받은 너도 네 구원받은 데 있어서 너도 네 구원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는 식으로만 주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원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 그게 고난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고난의 세계가 고생의 세계가 아니라 어리둥절한 세계고 낯선 세계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구별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고 자유함이 치밀어오는데 말릴 수가 없네, 이 자유 만끽함을. 어떻게 내가 조절이 안돼요. 여러분도 그렇죠.
아직 어려운 게 많이 남아있어요.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에 강남강의에서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이야기를 했죠. 그 때 신명기 27장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테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 산에 있고 저 사람은 저 산에 있는데 저 사람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지어다” 축복을 날릴 때 이쪽에서 주저없이 “아멘” 하겠죠? “진실로 그러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마땅한 일입니다.” 라고 하겠죠. 그런데 뭐라뭐라 하는데 바람이 날려서 잘 안 들리고 뭐라뭐라 해놓고 끝에 이런 말을 들었어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 귀에 들려왔어요,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놓쳐서. 그 때 “아멘” 됩니까? 저주 미사일 막 날아오는데.
“저주받을 만하면 저주를 내려주시옵소서. 내가 저주받는 것이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주님답게 일한 것이 합당합니다. 아멘” 이럴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좋은 소리하면 달려가서 맨발로 영접하겠는데 “너 지옥 가”할 때 “아멘. 지옥 보내주시옵소서” 하고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마중 나올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니까 이게 인간들의 시공간에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는 천국에서 먹히지 않는 겁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제가 믿겠나이다.” 하는 믿음은, 인간들의 시공간에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면서 믿었던 믿음을 가지고서는 그 어플리케이션에 안 맞아요. 작동원리와 안 맞는 겁니다. 소켓이 달라 맞지를 않아. 부속이 달라요, 부속이.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믿는 사람은 웃으면서 기쁨으로 “내 믿음은 부속이 안 맞네.” 이렇게 여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제부터는 굳이 내 믿음을 가지고 주님 마중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아주 다행스럽다는 듯이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저는 그것을 주님 영접하는데 활용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내가 가짜거든요. 내 존재가 가짜, 내가 가짜거든요. 가짜인데 살았다는 것은 진짜 주님께서 지금껏 살려주신 거예요. 집에 강아지까지 다 살려주셨는데.
그러니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한다.’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돼요, 저주를. 길 가던 과객이 우리 집 들여다보면서 하는 말이, “이 집안 벼락 맞아라” 할 때 “아멘”. 시므이가 다윗 보고 “개 같은 이새의 아들, 저주 받아라.” 하니까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멘” 했죠 (사무엘하 16장). 세상이 저주를 해도 주께서 복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다.
이 말은 진짜 복된 사람은 복을 주는 데 가서는 복된 사람 티가 안나요. 저주를 퍼붓는 곳에 갈 때 주께서 거저 주신 복이 얼마나 소중한가 새삼 그것을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직도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전부 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에요.
학교 다닐 때도 그날 시간표 보면 기분 나쁜 선생님들 있을 때는 학교 등굣길이 괴롭죠.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직장 상사 출장 안 가나? 속으로, 제발 너는 내 눈에 띄지 마. 간절히 소원한다. 제발 내 눈에 띄지 마. 속으로만, 안 그러면 잘리니까. 퇴직하고 너 만나면 죽일 거야. 내가 돈 때문에 있는데 퇴직하고 나면 죽일 거야. 남자들은 이걸 느껴요. 군대생활 해봤기 때문에. 정말 그냥 하면 탈영이 되기 때문에 차마 내 인생 청춘을 여기서 망칠 수 없기 때문에 참지. 특히 군에 늦게 간 사람은 나이 저보다 10살 동생뻘인 사람이 까부는 거 보면 제대하고 한번 보자. 그러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 아는 사람은 하도 고참이 괴롭히니까 몰래 만나가지고 혼내줬어요. 너 까불다 죽는다. 입 다물고 있어. 예, 알았어요. 그 다음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상병님~그렇게 하고. 할 수 없어요. 돈으로 꽁꽁 묶였기 때문에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짓해서 저주를 받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저주 아닌 게 없어요. 죄 사함이 복이지 그 외에는 부자 되고 부동산을 몇 개 가지고 뭘 해도 승진하고 합격하고 그것은 전부 다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괴롭히는 고문 기구로 돌변됩니다.
늘 얘기하지만 서울 시장이 서울 시장이 아니고 9급 공무원 같으면 자살 안했어요. 자기가 자랑질하고 가문의 영광이었던 서울 시장이었기 때문에 관악산에 가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거 또 말도 조심해야 돼. 자살했다는 소문. 하도 음모론이 많아가지고 스웨덴 대사한테 맞아죽었다든지 하도 음모론이 많아서 그냥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어째든 자살이라 친다면 그거 왜 죽어요? 자기가 가상적인 자기한테 농락당한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저기서 ‘시장님’ 하니까 지가 뭐 대단한 줄 알고 있어요.
개 이뻐하면 침대에 올라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참, 개 이뻐하면 침대에 올라온다고요. 나중에 보면 개가 은근히 주인을 발로 찬다니까요, 내려가서 자라고. 안 그렇습니까? 지는 맛있는 거만 먹을라 해. 버릇 더럽게 들여놔가지고.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주위에서 으싸으싸 잘한다 하면 그것이 자기를 지옥 보낼 저주라는 건 모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하고 난리도 아니라. 자기가 속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이 나라는 인간이.
그 다음에 어려운 게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 그 다음에 어려운 이야기가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혼자 있을 때는 의미가 없어요. 항상 과연 내가 신자냐 신자 아니냐,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확인하는 길은 주님께서 누구를 만나도 어떤 경우를 만나도 만나게 해줘요. 주님께서 만나게 해줘요. 그래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가 저 산에 올라가서 임금님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그런 식이 아니에요. 가장 저주를 할 만한 것들이 있는 곳에 사도바울이 간 게 아니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성령께서 주님께서 가게 하시죠.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마귀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보낸 것같이 그 같은 코스의 반복이에요. 어차피 천국 갈 거 살아 생전에 지옥에서 들을 욕을 한번 배부르게 먹어보라는 거예요. 어차피 천국 갈 거, 지옥에 안 갈 거, 지옥에서 들을 수 있는 욕은 욕대로 다 들어먹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들었던 욕설이고 예수님에 대한 모멸감이죠. 욕도 욕이고 모멸감, 이것도 기분 나쁘지만 더 기분 나쁜 것은 이거에요. ‘냉소적’인 것. 차갑게 아예 안 들을려고 하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고 외롭게 만들어요. 많이 들었다, 많이 묵었다 고마 해라. 이거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어떤 성경 전체를 볼 때에 꼭 사이, 차이에서 복음이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아벨이 혼자서 도 닦는다고 복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누구를 만나냐 하면 형을 만나서 맞아죽죠. 그 아벨과 형 사이에서 피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게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지식은 혼자 있어도 지식이에요.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식이고 나의 잘남으로 되돌아오거든요.
나를 떠나게 만들고 이 의미가 나에게 도로 회수되는 일이 없고 주님께로 회수되려면 다윗이 사울에게 계속해서 쫓기는 겁니다. 그걸 제가 대전에선가 이야기했어요. 다윗이 쫓기는 것을 세 자로 표현했습니다. ‘자기장’이라고. 자기장 알죠? 자석의 필드(field). 자석의 필드가 어떤 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자석에 쇳가루를 뿌리면 자석 주위에 선을 형성해요. 쇳가루 뿌리기 전까지는 여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없고 그냥 못이 딸려 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까 파동처럼 어떤 장(場)이 형성되어 있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쇳가루를 뿌리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이 쇳가루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쇳가루로 사용하는 거예요. 주님의 장(場)이 이 현실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쇳가루 사이사이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독했던 흑암의 권세가 계속해서 이 사이사이에 핍박을 하겠죠. 그렇다면 복음은 차이 또는 사이에서 출몰한다는 원칙이 되는 겁니다. 홀로 도 닦는다고 신학 연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만나야 돼요, 원치 않는 자를. 자기가 도 닦고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오늘 이거 백 번 외우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외우고 나는 이미 죽었다. 십자가 피로 하고 나는 주님 앞에 쓰레기야, 쓰레기야. 나는 나쁜 인간이야. 나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해도 항상 범사에 기뻐해, 감사해. 하다가 자기 집 가까이 와서 보니까 차가 딱 긁혔어요. 누구야? 누가 이 짓했어? 건드리니까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안 건드릴 때는 주님만 등장하다가 자아는 없는 줄 알았죠. 딱 건드리니까 죽여 버릴래. 당장 죽여 버릴 거야. 걸리기만 해봐라. 뭐 이런 거.
한국에 천만 성도라 했잖아요.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한 때 천만 성도. 이승만 대통령이 조성한 복음적 분위기에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만들었다고요, 부처님 오신 날 없을 때, 그 정도로 많이 호응을 해줬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교회에 가서 이 각박한 서울 생활에서 견디도록 부흥회도 많이 열고 교회가 많이 생겼어요. 기독교가 천만, 더 구라치는 사람은 천오백만 이렇게까지 거짓말했단 말이죠. 자기들은 신자인줄 알았죠. 늘 만나는 사람, 기독교 신자만 만나고 김사장 박사장보다 더 흔한 게 김집사 박집사였어요. 다방보다 교회가 많다는 소리 나오고.
그런데 코로나 딱 터지니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지? 그 많던 성도들은 다 어디로 갔죠? 그 많던 낙엽들이 다 어디로 갔지? 없어요. 자기 살려고 예수 믿은 거예요. 복음이 목숨보다 귀하다고 잘 배웠어요. 그런데 코로나 오니까 내 목숨이 귀하네. 내 목숨이 주님 목숨보다 더 귀해. 죄 사함이 날라가 버렸어요. 내 목숨 지키기 급급한 거예요, 내 목숨 지키기에.
그걸 사자성어로 ‘살고보자’는 거예요. 이랬든 저랬든 간에 복잡한 거 싫고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은 살고보자. 여기서 살고보자를 여섯 자로 늘이면? 나만 살고보자. 틀림없습니다. 건드려보니까. 내 안에 예수 믿는 나만 있었지 예수님은 안 계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5장에 나오는 예수 안이 아니었고 열심 내는 내 안에서, 주님께서 부르심이 아니라 불러줄 것을 은근히 노리면서 열심히 간절히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주님께 충성하고 싶었던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것을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었어요. 코로나 터지니까 더 살고 싶어. 그것도 여섯 자로 늘이면 나만 살고 싶어. 마누라? 아니 끝났어. 걸리든 말든 나만 살고 싶어. 나만, 나만 살고 싶어. 이거 어쩔 거예요? 이 사태, 어쩔 겁니까? 그동안 공들인 거 한방에 다 날아갔는데.
코로나라는 그 타인을 만났어요. 혼자 있을 때는 천하의 신앙인이 코로나 딱 걸리니까 코로나와 더불어 있을 때 자기의 본색이 다 노출된 겁니다. 그것은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온 것이 아니고 죽은 말씀을 내가 살겠다는 의도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해버린 거예요. 해석하니까 지식이 나오고 그 지식을 소지하니까 나는 복음을 안다고 우겼던 겁니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자들이 신학교수들이에요. 신학교수들의 공통점은 개척교회하기 싫다는 거예요. 개척교회하면 굶어죽거든요. 교수는 따박따박 월급 나오잖아요. 개척교회하는 사람들한테 신학 가르쳐주는 것으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지만 진짜 개척교회하면 밥벌이가 안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는 친척들을 막 불러 모으죠. 그걸 청호 정수기라 하죠. 아는 친척들에게 다 팔아먹어요. 그럼 끝났어, 이제.
그럼 이 난감한 사태를 어떻게 할 건데요.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만 살고 싶다. 이렇게 되겠죠. 이 본성이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해석하고 말씀을 이해해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나만 천당 가고 나만 살고 싶고.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무조건 가야 돼, 무조건. 이 본성은 인간의 힘으로 지워지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신앙해도 누굴 만나게 되면 없다고 생각했던 내 본성이, 나만 챙기는 우상적인 본성이 탁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미 말씀으로 완성되어 있죠. 완성된 그 말씀을 사도행전이나 성경 전체에서 자기 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건지는가. 바로 이겁니다. ‘배치’를 하는 거예요. 개개인을 부수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주의를 적재적소에 배치를 해서 새로운 관계를 엮어버려요.
그러면 이 배치에서 나는 나만 살겠다는 이것이 전체의 배치도에서 구도 속에서 무엇으로써 귀한 재료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구원할 것 같으면 이것은 아무런 가치 없어요. 그냥 이기주의고 나를 섬기는 우상숭배이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우상숭배자가 전체 판에서 배치가 되어버리면 이건 죄인이 되어서 주님의 자기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부속품이 됩니다.
그게 누가복음 15장, 16장에 나옵니다. 자, 15장부터 나오는 세 개와 16장에 나오는 한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합당한 것이 세 개있어요. 하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두 번째 잃어버린 보잘것없는 동전 한 닢. 그리고 15장에서 유명한, 잃어버린 집 나간 탕자.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필요한 거예요. 왜? 주님만 의인되기 위해서.
사람은 천국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의인되어야 간다는 그 상식에 의해서 자기가 복음을 지식으로 구입해가지고 스스로 알고 있는 죄를 스스로 알고 있는 피 가지고 스스로 그것을 믿는다 해서 스스로 자기가 씻어서 내가 기대하는 의인으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 시도는 나만 산다는 그 본성에서 당연히 나오죠. 그런데 그 모든 시도를 통해서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성령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찐찐 진짜 성령, 가짜 성령 말고 찐 성령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는데 꼴 보기 싫은 사람 딱 만나는 순간, 나가 죽어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해서 온갖 거 다 동원해서 너 사탄이지? 하고. 나만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본성이죠.
그래서 주님이 새로 짜주시는 환경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배치에요. 그 다음엔 더 어렵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 이해되시죠? 한번 적어볼게요.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달라진’,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달라진 배치는 아까 말씀드렸고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그러니까 배치가 아니면 총괄적인 의미는 없는 거예요. 사적인 의미는 의미로 인정 안 합니다.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장기알’이에요, 장기알. 우리는 장기알이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기 두는 사람 따로 있어요. 갑자기 한숨 놓이죠. 충분히 죄인 되어야 돼요. 어느 정도로 죄인이냐. 나만 챙기는 죄인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가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성령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 안에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마귀도 알아주는, 귀신도 알아주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의를 행하지 못하고 나는 원치 않게 죄만 짓는 그러한 죄가 우세한, 내 안에서 죄가 오히려 의를 이기는 그런 존재가 나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 입에서 결국은 찬양하리로다. 나오거든요.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1절 누가 읽어보세요.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권력이 어디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그 분에게 있습니까? 그 분에게 있죠. 그러면 그 분이 장기 두는 분이에요. 권력이 그분에게 있으니까.
그럼 권력이 그분한테 있다는 말은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신 그 분에게 권력이 있다는 말은 그 고난의 의미 속에 아픔의 의미 속에 내가 얼마나 골칫덩어리였다는 것이 담겨있죠. 골칫덩어리가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주님 자신의 영광과 그 죄 사함의 능력을 위해서 우리가 장기알로 배치가 됩니다.
자, 그다음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거예요. 어제의 배치는 어제로 끝났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어제의 의미를 오늘로 당기지 마세요. 어제는 어제의 배치에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예요. 과거의 일로 사과하지 마세요. 그 때는 사과하세요. 그러나 지나간 것을 지금 사과하지 마세요. 배치가 달라요.
여러분들이 바둑에 관심이 없겠지만 바둑을 둘 때, 같은 지점에 바둑돌이 있더라도 9단이 두는 것하고 9급이 두는 것하고 의미가 달라요. 그 근처 배석되어 있는 다른 놓여진 돌들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있는가를 생각해서 한 수를 딱 둬요. 현재 세계에서 제일 잘 두는 사람이 신진서 9단이거든요. 신진서 9단, 그다음에 박정환. 중국에서는 커제가 유명한데 그 사람이 한판 두는데 1억 딴답니다, 한 판 하는데. 그러니까 둘 때 온갖 생각을 다 하는데 심지어 신진서 이 사람은 인공지능한테도 이겨요. 기계한테 이겨요. 이세돌을 이겼다는 인공지능을 이겼다니까요.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겠어요. 한창 젊으니까 스물세 살인가 하여튼 젊으니까 된다고요. 그런데 잘 못 두는 사람이 딱 두고 나니까 그게 악수라. 상대방에게 다 잡히는 거예요. 꼭 뒤늦게 노래방 차리고 뒤늦게 비트코인 한다든지 뒤늦게 주식에 맛들여서 주식하는 사람들 다 떨어 먹잖아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무당이 사람 잡아요, 재주도 없는 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더욱 더 날이 가면 갈수록 죄인 되게 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사랑이 커지기 때문에. 전에는 이 주스 먹는 게 죄 아닌 줄 알았죠. 그러나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 배치가 있잖아요. 자기 자존심,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배치를 시공간에서 계속해서 스스로 자기에게 단련시켰어요. 지금 동영상 찍는데 이 주스 먹는 태도가 허접스럽게 먹을 때 얼마나 욕하겠는가. 이것은 평소에 자기가 행동을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한 수, 한 수 바둑 둔 거예요. 자기 인생에 수를 두고 바둑을 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다 죄가 된 거예요.
제가 전에 설교할 때 다윗 이야기했잖아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죽였다 했죠. 그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은 자기 일에 ‘충실’했다고 했죠, 충실. 자기 일에 충실한 거예요. 자기 일에 충실한 겁니다. 어떻게 충실했습니까? 자기 죄를 안 들키기 위해서 충실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원했어요. 왜?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이스라엘 왕은 모든 이스라엘의 죄인 됨에 모델이 되는 죄를 지어야 돼요. 그래야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그래야 하나님만이 죄 사함 하시는 진정한 왕이 되시기 때문에. 너 같은 허접한 인간들을 구원하니까 이것이 바로 진짜 천국에서 원하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아까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나는 죄 사함을 주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것 좀 액자 좀 하세요. 액자에 걸어놔야 돼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게 바리새인들을 자극시켰습니다. 에라이, 죽어라. 인간이 되었으면 하나님 말씀 지켜서 하나님 형상을 본받도록 해야지, 성화론을 해야지, 왜 그 반대소리를 하느냐. 유대인들도 주장했고 바리새인들도 주장했어요.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고 행함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게 바리새인 신학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한국의 신학교에서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바리새인 신학이에요.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기적으로 돼요. 그러나 기적 다음에 뭡니까? 기적 받았으면 그걸로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놀면 안 되죠. 기적 받았으니까 보답을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착실하게 살 능력을 받았으니까 능력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 몫이다.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이고 이것이 불교 교리에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니고 돈오점수(頓悟漸修)에요. 이게 불교교리에 나온다고요. 구원받은 것은 깨달음이고 깨닫고 난 뒤에는 성화해야 된다는 이것이 돈오점수거든요, 점수. 수행을 쌓는다는, 점차 수행을 쌓는 것이다. 돈오돈수는 한꺼번에 깨닫고 한꺼번에 수행도 끝났다. 믿음으로 의롭다. 이것은 성철스님이고.
인간의 아이디어가 신학하고 똑같아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모든 신학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미워하기 위해서 저주에 아멘 하는 게 아니고 복에만 아멘 하도록 방법론을 가르쳐준 것이 이천년 교회 신학이었습니다. 보이스피싱이 따로 없어요. 그게 사기꾼들이에요.
사람한테 좋게 하면 교인들 쪽수 늘어나겠지. 이게 목회 아닙니까? 그거 3년 동안 배울 거 뭐있어요? 이거 하나인데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쪽수 채워진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안 찾아서 그런 겁니다. 우리 교회 와서 찾으세요. 복 주나 안 주나 테스트해보세요. 창고에 넘치도록 복을 주죠. 물론 창고가 조그마하지만. 창고가 그릇만한데 복 받았네, 벌써 넘쳤으니까.
십일조하면 창고에 넘친다하는 것을 테스트해볼 때 테스트하는 그것이 혹시 안 될까 싶어서 욕심을 줄여버려요. 십일조 할테니까 이번 달 수입이 오천원 늘어나든지 아니면 오천원 절약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십일조를 줄곧 지켜봤다고 제가 믿겠습니다. 했더니만 시장가서 참외 사는데 오천원 헐게 샀어요. 주여, 믿습니다. 아멘. 이게 복 받은 거예요? 이게 복 받은 겁니까? 지가 조작을 해요. 자기가 조작한다고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속이지 마세요. 어차피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죄인이 될 경우만 죄 사함이 부각이 됩니다, 죄 사함이. 베드로가 배신을 해줘야 제자다워요. 제자들이 도망을 쳐야 진정 그들을 통해서 주님이 주님답게 등장을 하는 겁니다.
호세아 같은 경우는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알던 남자를 찾아가 결혼하고 난 뒤에 떠나버렸어요. 가버렸다고요. 이미 그럼 결혼이 무효가 되잖아요. 호세아는 무효를 시키지 않고 자기 부인을 찾아가가지고 멱살 쥐고 머리채잡고 끌고 오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그 바람난 남자에게 여자 데리고 산다고 한 달 생활비 얼마 나왔습니까? 2년 살았습니까? 한 번 보자, 한 달에 150 잡고 2년 계산해서 값을 다 치뤘어요. 값 치르고 데려왔습니다, 그 간음한 여인을.
그 간음한 여인이 한 범죄에서 우리는 평생 충실하게 벗어나지 마세요, 충실하게. 내 죄에 충실하세요. 내 죄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타고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이건 제가 지시, 명령하는 게 아닙니다. 본성을 살리라는 이야기에요. 잠재되어 있는 본성 있죠. 나밖에 모르는 거, 그거 죽이면 안 됩니다.
살려주시면 주께서 적절할 때 배치를 합니다. 어떻게 배치를 하는가. 만나기 싫은 인간들 만나서 나로 하여금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늘 까발리도록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신자라고 하지만 내가 나를 신으로 신봉했다는 것을 까발려줄 때 그것이 바로 죄 사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는 겁니다. 주께서는 배치라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 고난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 곳이 낯선 공간이에요. 결국 제목은 마지막 이 말에 있습니다. 낯선 공간. 이래놓고 두 시간 뒤에 또 배치가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만, 낯선 공간. 이 세상에서 내가 의롭다고 자랑질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공간. 이미 주님만 의롭기에 그 주님의 의로우심에서 나오는 죄 사함만이 이 죄 많은 나를 의롭게 함으로써 내가 의롭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시는 주님만이 의롭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안이 바로 성령 안이고 십자가 안이고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복잡해요. 벌써 배치가 달라져서 제목을 바꿔야겠다. 낯선 배치. 배치하는 것, 할당하는 것 알죠? 할당한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어디에 못 살아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꽉 짜여진 주님의 스케쥴에 따라서 만나기 싫어도 누구를 만나야 되고 안 아파도 아파야 되고 아파도 안 아파야 되고. 이것은 일방적으로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해서 주님이 용서했다는 그 결과물로써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잘남의 의미가 순간순간 새롭게 달라진 배치 속에서 또다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해주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작업에, 일어난 모든 일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