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생명의 플랫폼

아빠와 함께 2021. 4. 4. 21:46

생명의 플랫홈 

2021년 4월 4일                본문 말씀: 욥기 22:6-11


(22:6)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22:7)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22:8)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22:9)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22:10)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22:11)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특별한 기준없이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선인과 악인으로 나눈다면 많이 가진 자들이 억울하게(?) 악인 취급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시기나서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세상을 살면서 타인의 것을 본의 아니게 강탈하지 아니하면 사람은 밥먹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나름대로 양보보고 또 양보했다고 하지만 더 세밀한 과정들을 전수조사하면 제대로 양보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선에 멈췄다는 것이 밝혀진다. 어느 선에 멈췄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타인에게 양보한만큼 의로움으로 보상받을 때까지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무작정 양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는 곧 자아의 가치가 여전히 살아있을 경우까지만 사람은 양보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과부나 진정한 고아가 이 세상 누구에게 다가와서 도움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분들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과부와 고아는 나의 자아성마저 허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언급하는 인간 사회의 윤리란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한다는 한계 내에서 가동되는 의인 흉내내기에 불과합니다. 세상 판단 기준에 있어 세상 인간이 탈락해야 하는 이유는, 일단 본인들을 무조건 착한 쪽에다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나처럼 살면 나처럼 의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나 늘어놓는 셈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판단을 무산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욥에게 고난을 안겨주셨습니다. 이유없이 무조건적으로 죽어야 될 악인으로 욥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인간은 악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례를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내비치고 계신 겁니다. 인간이 악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왜 죽어야 할까요? 욥의 고난을 통해서 정답을 내려본다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무조건 죽어야 한다’입니다. 그것도 ‘까닭없이’요. 지금 욥의 친구는 욥에게 고난을 내리신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이해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즉 사람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신은 사람으로부터 얼마든지 비난받아 마땅한 신이 되는 걸까요? 욥을 설명하지 못한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비난을 욥을 통해서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에게는 역할이라는 있습니다. 이 역할은 실상은 무조건적입니다. 이것은 본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기를 역할을 지정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착한 부자라면 반드시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약 마태복음 25:35-3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남들로부터 도움받을 합당한 자격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도움은 오로지 예수님을 돕는 겁니다. 그 외의 도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개인은 하나님과의 상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대한 자를 특별히 달리 골라놓았습니다.

특별한 달리 골랐다는 뜻은, 기존의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개인성을 하나님에게 쓸모있도록 내비치고 싶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어하십니다. 기존의 인간들 말고 다른 특별한 개인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싣고 싶어하십니다.

즉 천국과 통하는 개인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에게 대접하고 그분을 돌봐야 천국에서 인정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도움받을 수 있는 자와 도움을 줘야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하나님께서 일을 새로 시작하므로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곧 플랫홈(platform)을 지상에 설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새로 시작한단 말입니다. 무엇이 인간들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일이 개시된다는 말입니까? 즉 왜 기존 인간은 하나님께서 일을 새로 개시하시는 대상자로서 탈락입니까? 이점에 대해서 욥의 신약 기준으로 봐서는 적합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6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보통 인간들은 사망을 하나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플랫홈으로 했을 때, 예수님의 일대기를 통해서 두 개의 사망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기존 인간으로서는 이 점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첫째 사망이란, 모든 인간이 이 땅에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겁니다. 둘째 사망이란 악마하고 인간이 연계 되었기에 악마가 가는 그 영원한 심판에 인간들로 휩쓸려야 마땅함을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님 마저도 둘째 사망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치고 첫째 사망과 그리고 둘째 사망의 노선에서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적인 조치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근거를 마련하신 겁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겁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기존의 세계에서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부활이 일어나게 되면, 부활이 가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분류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즉 첫째 부활된 주님의 영을 받는 자만이 첫째 부활에 합류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만이 둘째 사망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곧 둘째부활은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잉태된 새로운 존재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공식이 만들어집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지금 욥의 친구는 욥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곧 주님을 비난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뭐든지 우리 자신부터 시작하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7강-욥기 22장 6~11절(플랫홈)2104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2장 6~11절입니다. 구약성경 781페이지입니다.

“까닭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욥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옳으냐 그르냐 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이야기를 누구만 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점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라고 나옵니다.

고아를 도와주는 거,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거, 그렇게 해서 천국 가는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도와주고, 주님이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고, 주님이 헐벗었을 때 입혀주고, 주님이 외로울 때 찾아주고, 주님이 갇혔을 때 돌아봐 주고, 주님이 병들었을 때 챙겨주는 거,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마태복음 2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 신약이고 오늘 구약의 욥기에 보면 누가 누구에게 해주느냐에 대해서 굉장히 모호합니다. 확정되지 않아요. 22장 5절에 보면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악이 크다는 말이고 죄악이 크다고 보는 겁니다. 6절에 보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라고 했는데 여기 “까닭 없이”라는 말도 문제지만 형제가 누구의 형제를 말하며 헐벗은 자를 누구를 말하는지가 불명확합니다.

왜냐 하면 욥 친구의 문제점은 본인을 이미 선한 자로 확정지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선한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도와줘도 의미 없고 도움을 받아도 그 도움을 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도 이 땅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 땅에는 있는 자들밖에 없고 없는 자가 이 땅에 없어요. 말장난 같고 그런데 물리학에 보면 이렇습니다.

물리학에 상대성 원리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빛을 정지시키면 그 현장에 빛이 없어진다고 나옵니다. 빛은 움직이는데 움직이는 것을 정지시킨다는 거죠. V(속도)를 제로(0)로 만들어 버리면 빛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없어져요. 예수님이 빛이라면 빛을 고정시켜놓고 보면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그냥 목수의 아들만 보이죠.

그 이유는 예수님을 보면서 판단하는 본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세상을 볼 때 분류시키는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 보는 모든 문명과 문화 그리고 이 세상의 구성은 인간 자체가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카운트한다는 겁니다. 하나, 둘, 셈을 하고 숫자화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내 것이 될 것이냐 아니면 내 것으로 필요 없느냐를 판단하면서 카운트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옆집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카운트함으로써 판단함으로써 그 도와준 것이 의로운 것으로 나에게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을 도와주게 되어있어요. 모든 행동은 이유 없어요.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지 안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인간은 카운트하게 되어있어요. 계산하게 되어있다고요.

지금 욥의 친구 가운데 엄연히 그 당시 메시아, 자기들 세계의 메시아라고 할 수 있는 욥이 있잖아요. 욥은 까닭 없이 지금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고난에 대해서 친구들이 빙 둘러싸고 그것을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어요. 왜 해석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출발점이 잘못되어서 그래요. 자기가 정당하고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그들의 생각도 잘못된 겁니다.

8절부터 보면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라고 되어있어요. 욥의 친구 하는 말이 부자가 되었으면 힘을 잘 사용해야 하는데, 힘을 잘못 사용해서 거기에 과부가 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고 고아의 팔을 꺾는다는 것은 고아가 가진 것마저 자기 것 만들어서 그렇게 자기가 거들먹거리면서 부자 되었다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바스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는 살만 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는 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아의 팔을 꺾었으며 얼마나 주린 자에게 제대로 안 베풀었던 그런 결과로 자기가 밥이라도 먹고 살고 있는지를 계산을 못 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부자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지만 부자는 나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누가 누구에게 들러붙어서 그렇게 사는 겁니까. 지금 이 엘리바스의 의견에 의하면 부자가 돈 있다고 부자 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때 비로소 착한 부자가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부자가 착한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등장해야 하고 그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부자가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게 돌아갈 그 모든 여분의 것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본인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찍었던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가 결코 악한 자가 아니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모든 인간을 죽이고 죽는 그저 악한 사람만 양산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에서 어떤 해결책도 주지를 못 한다. 자본주의 정신사고는 그야말로 편집적인 거고 영화에 보면 ‘스키조프레니아존’이라는 말이 나와요. 부잣집 아들이 그린 원숭이 그림 보면서 아래 한쪽 구석에 검게 칠한 부분을 정신병 증상, 조현병의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요.

그 그림 속에 있는 정신병에서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서로 물어뜯으려고 환장한 정신병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거예요.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엎어버립니다.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지. 가난한 사람은 그러면 좋은 사람이냐. 부자 흉내 내기를 하죠. 부자가 놀러 간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몰래 들어와서 위스키 마시면서 파티 열잖아요. 영화 보면 나온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잠시라도 부자 되고 싶은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찾는 겁니다. 타인이 사는 그 모양새가 내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기생충에 대한 주제와 전 세계 자본주의 현상을 딱 두 자로 표현하면 맞아요. ‘빨대’ 그냥 빨대 꼽는 거예요. 가족 중에 형제간에 누가 잘 되면 다른 가족들은 전부 다 빨대를 꼽고, 자기 엄마는 그래야 우리 가부장적 집안이 형제간에 사이좋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형이 되어서 동생 100억 대의 재산을 빼돌리고 빨대 꼽고 자기는 가족 전부 다 미국 가서 살고 그 동생은 100억 빼앗기면서도 우리 집안이 잘되면 나는 참을 수 있다고 나오고. 이게 기생충에서 이야기하는 정신병자들이라니까요. 정신병자. 빼앗기면서 자기는 천사가 되는 거예요. 저쪽은 빼앗아가면서 악마가 되고. 고정된 역할이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그 사람이 아무리 부자를 욕해도 일단 부자가 되고 나면 자기가 전에 욕했던 그 부자 노릇을 그대로 똑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 우리 교인들은 부자가 없기 때문에 도대체가 부자의 사고방식을 못 느끼는데 그게 인간의 한계인데 어떻게 합니까. 자본주의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기껏 어떤 형편에 있던지 자기 정당성, 나는 착한 족에 속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남에 대해서 공격 질을 해대는 거예요.

남을 공격하는 것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 외에는 다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세계가 마찬가지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얼마 전에 뉴질랜드에서 저에게 어떤 질문이 들어왔어요. ‘목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부활절에 교회에서 성만찬 합니까?’라고 질문했어요. ‘안 합니다. 왜냐 하면 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안 합니다. 그런데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해줍니다. 왜냐 하면 목사는 지배자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봉사자기 때문에’

그게 의미가 있든 없든 목사 입장에서는 세례식이든 성만찬이든 의미 없지만, 교인 입장에서는 의미 있다고 하면 해줘야죠. 의미라는 것은 그 자체에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어느 자리에 어느 역할로 들어가느냐가 새롭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빼앗긴 과부 재산, 빼앗긴 물건, 헐벗은 사람, 바로 이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 왜 인간은 의인이 없고 죄인만 있느냐 하면 유일하게 헐벗은 사람, 유일하게 가진 것 없는 사람, 유일하게 죄 없으면서 천하의 죄인 되신 분이 추가적으로 이 땅에 투입하셔서 모든 인간을 향해서 너희들은 자칭 의인들이며, 너희들은 너희들 살기 위해서 온갖 핑계와 구실을 달고 있다. 너희들은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너희들은 여전히 조금이라도 잘난 구석이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바로 신약의 예수님이 그걸 지적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힘들 때 도와주고 예수님이 목말라해서 마실 것을 줘야 그것이 천국 백성이지 너희들끼리 백날 주고받고 해봤자 거기서는 진정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리그를 따로 해요. 누가 누가 과부 도와주나, 누가 누가 어려운 사람 도와주나, 자기들끼리 리그를 게임을 벌이고 있어요.

지금 욥은 가만히 놔두고 배제하고 욥은 그야말로 까닭 없이, 이유도 없이, 하나님의 고난이 그냥 덮쳐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뭔가 세상 사는데 다 이유가 있어요. 의미들이 있어요. 왜냐 하면 내가 나의 잘남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전부 다 의미를 미리 깔아놓은 겁니다. 나는 잘났다는 그 본질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전개합니다.

전개하게 되면 그 전개된 모든 결과는 역시 나는 잘났다는 겁니다. 그러한 모든 인간의 잘남의 시도가 까닭 없이 고난받은 욥에게 덜커덕 막혀버린 겁니다. 그걸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걸림돌. 십자가가 걸림돌이에요. 어떤 이유도 어떤 의미도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그게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개인은 하나님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앞에는 집단만 있을 뿐이지 개인은 존재하지 않아요.

성경에 두 가지의 단어가 인간의 모든 의미의 범주에서 벗어납니다. 한가지 의미가 충만이라는 겁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써 충만을 다 채울 수 없어요. 그 충만이라는 거, 성령의 충만, 사랑의 충만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인간의 말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그 충만이라는 말을 어떻게 묘사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람이 묘사할 수 없고 의미를 다 카운트할 수 없으면 이 말은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겁니다. 내가 없어도 충만하다는 뜻이에요. 충만이 나 보기 좋으라고 충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빼고 충만이에요. 그게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 되어 버리면 그게 에베소서 5장에서 그걸 뭐라고 비유하느냐 하면 술 취했다고 비유합니다.

저는 예수 믿고 술 취한 기억이 없어요. 술을 먹어야 알지. 갑자기 자기 의가 뱀처럼 올라오는데. 술을 조금 취하는 거 말고 진짜 제대로 취해버리면 본인이 본인을 잊어버려요. 본인은 잊고 본능만 나오죠. 짐승의 본능만. 개 되는 겁니다. 개. 진짜 개새끼라는 말이 맞는 거죠. 욕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안목입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할 때처럼.

너희들이 하는 모든 주장은 허례허식이고 속에는 짐승의 본능만 튀어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을 몰 때 인간이 악마와 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고 관자놀이에 악마가 권총으로 대고 협박하면서 인간을 몰고 다닙니다. 모든 일에 ‘너 이렇게 하면 죄인 되는 거야. 너는 망하는 거야. 너는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거야’라고 관자놀이에다 협박의 권총을 들이대면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그 본성 외에는 나올 것이 없어요. 십자가를 대적하는. 십자가가 우선이냐 내가 우선이냐 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우선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역할 바꾸기를 합니다. 욥으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아의 자리에다 이걸 박아넣어 버립니다. 그게 플랫폼(platform)이에요.

플랫폼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때 자리 잡는 것이 플랫폼입니다. 인간은 빠져라. 인간 말고 진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어떤 관계인 가를 플랫폼, 시발점, 그라운드, 기초를 예수님이 또는 그 당시 욥이 새로 주는 거예요. 그렇게 닦아버리면 죽음과 인간이 생각하는 죄와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이 등장합니다. 까닭 없이 죽이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뭘로 설명하냐면 죄지어서 죽는다고 링크시키는 거예요. 연결. 그러면 죄지어서 죽는다면 인간 본능은 살고 싶어 하는 거니까 죄지어서 죽는다면 더 오래 사는 방법이 뭐냐 하면 더 착한 일을 계속해서 만회해서 죽음이 못 따라오도록 하는 거죠. ‘저거 착함의 속도가 되게 빠르네’ 죄짓는 속도보다 착함의 속도가 빠르니 잡으려고 따라오다가도 너무 착하기 때문에 ‘아, 내가 졌다. 너는 오래 살아야 해’라는 이런 아이디어가 인간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기도하거나 헌금하거나 뭘 해도 ‘하나님, 저 착하잖아요. 죽이지 마세요’라는 의도, ‘아직도 착하니까 망하게 하지 마세요. 망하게 하시려고 하면 더 착하게 살게요’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개인의 우수성으로 정말 악마가 관자놀이에 총 겨누고 배후에서 철저하게 길들인 인간이에요.

나 대신 다른 개인이 왔잖아요. 욥 친구 말고, 욥 친구는 입 다물고 욥을 보란 말이죠. 까닭 없이 죽게 된 욥을 봐야지 나 죽는 것이 급선무고 나 죽는 것이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니까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너처럼 고아의 팔을 꺾지 않고 너처럼 과부를 탈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잘난 사람으로 살아있다고 지금 욥을 보고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 것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네가 저질렀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거예요. 그 미성년자를 성폭행해서 죽인 조두순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싫어해요. 그 사람이 얼마 전에 편의점에 소주 사러 왔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린 거예요. 저 인간이 나를 해치지 아니할까. 그런데 정작 우리를 해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해쳐요. 예수님이 우리를 해쳐요. 인간도 아닌 것이 인간 흉내 내면서 코스프레하는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거예요. 진짜 개이고 독사의 자식에 불과한 것이 인간이 냥 옷 입고 돌아다니는 꼬라지가 희한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냐는 그 대상인데 아직도 자기는 살만해서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신약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 개인을 대표하고 플랫폼이 된다면 여기서 나온 것이 뭐냐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내 몸이 목숨 끊어지느냐 이어지느냐, 착한 일 하면 착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하나님이 나를 안 죽일 것이라는 거, 악마에게 홀딱 올가미 씌워져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겁니다. 악마의 협박에 쌓여서 그 짓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산다는 그 자체가 죄예요.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이라는 환경 속에서는 필히 죄짓고 죽는 것이 이 세상이 인간에게 가하는 필연적인 메카니즘이고 코스예요. 그것이 프로세스예요. 잘나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산다는 것은 빨대 꼽아서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또 편의점 가서 빙그레 바나나 우유 사지는 마시고요.

자식 중에 하나 잘 되면 다 빨대 꼽아서 ‘너 때문에 형 잘 되면 좋잖아’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가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없다고 치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 도움 없이 살 수 있나요? 이건 상식에 속합니다. 가진 자식 믿지 않고 사는 부모 있을까요? 가진 부모 밑에 자식이 혼자 살 수 있을까요? 자기 형은 재벌인데 동생이 빌어먹을 수 있을까요? 안 되죠.

서로 서로가 압력과 협력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자체가 피해 아닌 자기가 피해인 줄도 모르면서 피해를 주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산다는데 이게 뭐가 잘 못 된냐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이게 통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나 살겠다는데 나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주님.

이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뭔데? 너는 욥이 아니잖아. 욥의 친구잖아. 네 속에는 까닭 없이가 적용이 안 돼. 너는 내 언약의 상대자가 아니야”라고 하시는 거죠.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망을 줍니다. 하나는 첫째 사망과 두 번째는 둘째 사망을 줍니다. 첫째 사망은, 둘째 사망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필히 마땅히 호흡이 끊어져야 한다.

이 땅에는 호흡이 끊어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이에요. 그걸 과학에서는 활성산소라고 합니다. 산소 중에서 전자 하나 더 받아서 그것이 세포로 들어가서 세포를 엉망으로 만드는 거예요. 과산화수소가 되어서 우리 세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공식으로 되어있어요. 그것을 공식으로 하면서 과학자가 말합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둘째 사망은 뭐냐 하면 한 번 이렇게 죽은 인간은 필히 두 번째 사망도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사망이 뭐냐 하면 지옥에 가야 할 악마가 가는 세상에 합류해야 한다는 겁니다. 욥은 이것까지 몰랐어요. 지금 죽는 것을 자기 안에 메시아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메시아 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껍데기로 동원되는 것을 모르고 욥은 아직도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도 아직은 자기가 있어요. 아까 사랑이라는 것은 충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잊어버려도 될 만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 충만과 우리 사이 관계인데 욥은 아직도 그걸 모르고 내가 지금 죽는다는 것이 본인에게는 심각한 문제인 거예요. 자기 존재의 이끌림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둘째 사망이 뭐냐. 이 둘째 사망은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 받는 겁니다.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은 첫째 사망을 거치는데 첫째 사망은 지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인간은 지옥이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 이 땅에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태어나서 태어난 존재는 누구나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둘째 사망을 위한 첫째 사망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도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둘째 사망이 있고 거기에 다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7장 36절에 하나님의 언약이 등장합니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남겨질 복이 전혀 없다는 거.

내게 주어질 복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을 야곱의 형, 에서가 그것을 느끼는 것은 야곱이 특이한 행동을 했을 때 비로소 그게 발견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앞에 같은 인간들만 있으면 이런 것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와서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을 거치면 비로소 우리는 ‘난 뭐지. 난 뭐야. 그러면 난 버릴 패인가’라고 갑자기 자기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난 뭐지’, 부활 앞에서 ‘난 뭐지’, 그러면 내가 구성한 나는 포기해야 하고 손을 놔야 할 하나의 허망한 허상 같은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나는 나중에 성령을 통해 알고 보니까 나는 이미 첫째 사망에 참여되었고 어디로 지금 진격하고 있느냐 하면 참기름 발라서 그냥 미끄러지듯이 브레이크도 없이 둘째 사망 지옥으로 그대로 슛 골인하기 위해서 그냥 달려가는 중입니다. 모든 인간이.

제가 언제 그런 설교 했지요. 하나님께 매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 매 맞았다는 이유는 아직도 세상이 부러워서 그런 거예요. 세상 사람처럼 못돼서 한이 맺혀서 그런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지금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옥 가기 전에, 그러니까 돼지 잡기 전에 잠시 고급음식 먹여주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를 볼 때 부자가 얼마나 한심스러웠겠어요. 물론 거지 나사로가 부자에게 많이 얻어먹긴 했어요. 얻어먹을 때는 먹더라도 갈 길이 다른 겁니다. 하나는 경상도로 하나는 전라도로 그냥 갈라지는 거예요. 가는 방향이 이미 둘째 사망으로 꽂혔는데 그걸 못 따라가서 부럽다는 말이 나옵니까. 욥은 아직 몰라요. 그러나 신약 성도가 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받은 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천국 가는 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해요. 이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특이적인 요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링크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걸 지난 설교에서는 체로 낚아챈 거라고 했어요. 베드로에게 하는 이야기가 네가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했잖아요. 그냥 성령이 와서 낚아챈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로 십자가로 낚아챈 거예요. 그쪽으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넓은 길로 가면 이건 멸망의 길이라는 거예요. 넓은 길로 가면. 민주주의가 뭐냐 하면 많은 다수가 가는 체제가 민주주의잖아요.

민주주의 투사가 되겠다는 말은 지옥의 투사가 되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민주주의는 다수가 진리라는 세계관이에요. 하여튼 천국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요. 왜? 낚아채는 거니까. 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개인이 되셔서 그분에게 있었던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복어 배가 볼록하지요? 그리고 명란이 뭐냐 하면 명태가 품은 알들을 명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품은 작은 새끼 알들이에요. 뽀글뽀글 주님이 우리를 생산한 거예요. 첫째 부활로 생산했고 둘째 부활에 참여케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해도 내가 낯설어야 해요.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해야 해요. 그렇다면 우리 남은 인생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을 보고 늘 이상스럽게 쳐다보면서 주님의 감사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겁니다.

이 바보 등신같은 인간이 이것도 인간이라고 천국을 다 가게 되었느냐. 그게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없어지고 우리 속에 언약만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생각건대 참으로 놀라운 일이 터진 것을 감사합니다. 십자가가 그 정도까지 놀랍고 부활이 그 정도까지 대단한 일인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는 우리 생각 포기하고 우리 자리에 주님의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의 능력이 힘있게 힘차게 작렬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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