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함께 하심

아빠와 함께 2021. 4. 12. 03:59

함께 하심 

2021년 4월 11일                  본문 말씀: 욥기 22:12-20

(22:12)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22: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22: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22:15)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22: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22:17)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22:18)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22: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2:20)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것을 오늘날 성도라면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에게는 공격대상이 있습니다. 타켓으로서 욥입니다. 타켓이 있다면 말은 자신을 정당화할 절호의 찬스가 왔다는 뜻입니다. 적을 설정하므로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빛낸 환경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보기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신성모독적’ 태도가 보인다는 겁니다.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절대함과 전지전능함을 훼손시키는 악인들이나 한 짓이 된다고 본 겁니다. 이런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함을 가만 두고 보고 있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욥의 그 많던 재산과 그리고 부러움이 된 복된 삶이 여지없이 망가졌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되는 합당한 조치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 욥 친구의 이러한 하나님 변호는 하나님쪽으로 거부하시고 정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진해서 하나님편이라고 나서고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욥입니다. 그런 욥을 친구들이 공격을 한다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받는 종’을 경유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수는 없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욥이 아프기 전에는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견해를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것은 욥이 아프기 전에 평소에 다 주장했던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욥이 달라진 것은 욥에게 고난이 왔기 때문입니다. 전에 했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고난 속의 입장에서 볼 때 안일하게 배부른 자의 소리입니다.

즉 욥은 지금 자신이 어태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안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연이어 하나님의 조치가 계속 취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욥의 친구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상을 바꿀 이유가 없습니다. 제대로 살고 있기에 굳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수정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수정되지 않는 하나님 견해로 볼 때에 욥은 문제가 크다고 욥의 친구들은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상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과연 반박이 가능할까요? 초점은 이런 겁니다. 욥의 친구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지만 욥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큰소리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곧 행복이 넘치는 편안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욥을 봐서라도 잘못된 견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믿고 착한 사람되면 과거보다 더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보장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혀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점에 있어 욥도 모든 것을 새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짓누르신다는 사실을 통해서 평소에 알고 있는 하나님상이 모조리 엉터리 견해로 들통날 지경입니다. 곧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이유없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약 때 와서 밝혀집니다.

요한복음 15:18-20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함께 하심’이 신약에서는 ‘주님과 함께 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이 인간세계에 오셔서 생애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우기는 이 인간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억울함이 넘쳐 났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오해와 곡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한꺼번에 표현해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본문에 나오는 욥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예언하십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나의 사람이라면 내가 세상에서 받은 미움을 너희들도 그대로 받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홀로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티를 낼 그것을 조작해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나 마리아 마르다 자매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대단히 오해했습니다. 그들조차 여전히 ‘내 소원대로 내가 잘되는 결과가 곧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유력한 증거’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미움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자처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구약 때에도 나옵니다. 사사기 8:1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기드온이 큰 승리를 일구어낸 주역같아 보였던 겁니다.

그러한 승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시기와 시샘의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아무런 무기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 300명을 들고 전쟁에 나설 때는 다들 무모한 짓이라고 평했을 겁니다. 상대는 135,000명 대군이었습니다.(삿 8:10) 기드온은 압니다. 자신이 주역이 될 수 없는 위치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드온이 할 수 있는 그 자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멍이 난 상태로 전쟁이 치러졌습니다. 욥이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이 하시는 일은 주님 자신의 공로가 결코 가리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점을 몰랐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지 말고 시킨대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8강-욥기 22장 12~20절(함께 하심)2104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2장 12~20절입니다. 구약성경 782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 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 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이것은 욥이 말 한 것이 아니고 욥의 친구가 결국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주장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대목을 딱 끊어서 하나님 앞에 채점할 때 ‘땡!’하고 틀렸다는 내용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이거는 네 생각이지 하나님 내 생각 아니라고 쫙 그어버리는 내용이라면 이 내용을 딱 떼서 이 내용을 뭐가 잘못된 내용인지를 반박해 봅시다. 이게 반박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다. 높은 곳에 계시지만 지상의 일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다 심판하신다. 그런데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구름으로 가려졌기 때문에 아는 것 없어서 심판 못 한다고 욥 네가 이야기했잖아. 그러니까 욥 너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악인들이 있음을 아시고 악인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도 아시는데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악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할 것은 없고 하실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인들의 계획을 전부 다 무산시키고 그들을 불사르고 처벌하는 하나님이시다. 자, 욥아 반박해봐라.

이런 식으로 욥에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방금 한 이야기가. 도대체 이게 누구 편의 이야기인지, 적의 편의 이야기인지 혼동이 되잖아요. 여기가 우리가 왜 혼란스러운 그야말로 하나님만 찬미하고 하나님 주권 사상이 하나님 최고로 여기는 이 사람의 이야기가 왜 진짜 하나님 앞에서 ‘땡! 탈락’이 되고 쫙 그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너는 하나님도 모르고서 하나님 빙자해서 그럴싸하게 높이고 더 높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하나님이 기분 좋아할 거 같아? 내가 너 칭찬할 거 같아? 아니야. 나는 욥 편이야. 네가 욕하는 욥 편에 이 하나님이 있다고’라고 나중에 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든요. 욥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욥이 완전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서도 욥에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욥의 친구들.

그들과 욥 사이를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적대적 관계를 만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끊어놔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 나중에 욥이 그들을 위해서 대속의 희생을 드려 줄 때만 욥에게 이런 소리 한 욥의 친구가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욥 친구의 주장이 성경에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경의 욥의 친구를 반박하려면 어떤 식으로 반박하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실전에서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가서 성경 가지고, 하나님 가지고, 복음 가지고 논쟁을 할 때 꼭 욥의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숱하게 많이 있어요. 교회 다니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다니면서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특징이 뭐냐 하면 야고보서 2장을 자꾸 거론합니다. “말로만 믿음 믿음 하지 말고 행함을 보여야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그들은 그렇게 구박을 하거든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꼭 그렇게 반박을 하는데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행함은 십자가만 꽂히는 행함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도 있어야 하고 행함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는 겁니다. 바퀴 하나 진창에 빠지면 못 가는 것처럼 수레바퀴 두 개가 나란히 있어 줘야 천국으로 잘 굴러간다는 이야기를 지금 엘리바스가 이야기하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반박할 때 어떻게 반박을 하는가. 이렇게 반박을 하면 됩니다. 왜 우주 중심에 인간만 본인만 놓여야 하는가. 왜 판단의 중심과 평가의 중심에 내가 왜 빠지면 안 되는 가를 그들이 모르고 있어요. 나는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고 왜 그렇게 함부로 주장하느냐는 겁니다. 그들은 말하겠죠. 그러면 원숭이나 코끼리 놓을까.

우주 중심은 비어있어야 해요. 빵꾸가 나야 한다고요. 우주 중심에. 그렇게 빵꾸난 사람이 욥이에요. 욥도 욥의 친구처럼 자기가 세상을 판단하고 남을 판정할 수 있는 그만한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된통으로 무지무지한 고통과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욥은 벼락을 맞은 겁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해보려고 하는 하나님께 잘 대하려는 나 자체가 꺼져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소실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생 사는 것이 전부 다 하나의 중독인데요. 여러 가지 위험한 중독이 있지만, 중독 가운데서 자꾸 기부하려는 중독에 빠진 사람이 있어요. 필리핀에서 뭐 하고, 국경 없는 의사에다가 뭐 아프리카에 우물 판다고 거기에 돈 기부하고 지하철에 엎드려 있으면 동전 하나 끄집어내야 지하철 타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꾸 기부하는 내가 힘들게 모든 돈을 어려운 사람에게 도와주는 그 기부중독에 빠진 사람들 상당히 위험합니다.

제일 위험한 사람은 도박판에 중독된 사람인데 그건 자기 존재감 찾기 위해서 도박하는 거고 그다음 위험한 것이 반대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가 아닌, 기부하면서 남 다 퍼주는 사람, ‘오펠라~오펠라’라고 노래 부르면서 돈 벌어서 전부 다 기부하는 사람, 이렇게 수십억을 기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 중독입니다. 위험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부하라고 하지 않고 사귀라고 하는 거예요. 기부하는 것이 수월해요. 통장에 보내는 것이 수월하지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라고 하면 왜 그것이 힘드냐 하면 내가 세상 중심으로서가 무너지니까 그래요. 아프리카에 우물 파는데 돈 만 원 보내주면 편하지만 물 없어서 죽을 지경인 그 사람이 오게 되면 우리는 손사래를 치면서 오지 말라고 하죠. 감당 못 합니다.

감당 못 함을 감추기 위해서 돈으로 대신 메꿔버리는 겁니다. 주님과 사귀어야 하는데 헌금해 버려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전혀 우리교회와는 상관없습니다만. 본인이 잘나고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남을 평가할 수 있는 주인 자리에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꾸 뭔가 행위를 내놓습니다. 행위를.

‘저것은 나쁜 거야.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어?’라고 자꾸 평가하는 이유는 반대로 자기 자신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욥의 친구가 그런 거예요. 욥이 당하는 고통이 행여나 나에게 찾아올까 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고 약올리러 온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치 이동해야죠. 이 위치 이동이 진짜 힘든 거예요.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뭐라고 하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늙어봤어? 나는 젊어봤어”라고 하거든요. ‘너는 나처럼 안 늙어봤지. 나는 너처럼 옛적에 젊어봤어. 그러니까 네가 아는 거 안다고 하지 마. 나는 다 알아’라는 이런 식이거든요. 대화가 될 리가 없죠. 2030 무시하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위치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위치 이동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욥처럼 강제로 고통을 줘도 욥은 버티고 있어요. “제가 뭐 어쨌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하는데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해 드릴게요. 인간이 중심에 있으면 자꾸 괜찮은 사람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인간이 괜찮은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되는 거예요.

천사는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미 옛적에 괜찮고 훌륭하고 그런 것과 전혀 상관도 없는 거예요. 천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시킨 대로 해서 그 시킴에 대해서 따로 잘했나 못했나 평가하지 않는 존재가 천사예요. 천사라고 해서 인물 훤하게 생기고 백인 피부처럼 생긴 것이 천사가 아니라 그냥 시킨 대로 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천사보고 절하려고 하다가 천사에게 한소리 들었잖아요.

공백이 비어있다는 말은 위치 이동을 할 때 있는 자리에 나 말고 내가 까불까불거렸던 내가 잘난 체했던 그 자리에 내가 누구를 꽉 밟고 있는 거예요. 백인 경찰이 마약한 흑인을 발로 꽉 누르듯이 주님을 꽉 밟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상 밖 존재가 나를 찾아와서 숨이 막히도록 목을 꽉 조르는 겁니다. 그렇게 졸라버리면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위치 이동한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주님이 나를 꽉 눌러버려요. 난~~ 앓아요! 시름시름 앓아요. 계속 뭔가 이상하게 돼요. 내가 어느 정도로 앓고 있느냐 하면 남을 평가한다든지 남에게 시비 걸 여유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주님께서는 내 모가지를 무릎으로 꽉 밟고 있습니다. 까불지 마라. 너처럼 까불다가 망한 인간이 한두 명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모두 그렇게 다루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나옵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주께서 어떻게 다루셨느냐 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는 이게 어떻게 해야 이런 말씀이 우리 안에서 구체화 될 수 있을까요?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면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세상이 너를 미워하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욥아, 자꾸 왜 저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뭘 잘못했다고 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욥은 아직 구약 사람이니까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내가 욥에게 무릎으로 숨 못 쉬도록 밟은 거다”라고 하신 거예요. 욥은 죽어가면서 헥헥 거리면서 “왜 제가..., 왜 제가...”라고 자꾸 그러는데 언젠가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을 말하면서 눈에 보이니까 묻는 거예요. What? 저게 뭐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벽에 보니까 뭔가 이상한 쪼가리들이 떨어져 있으니까 그 이름이 뭐냐 하면 ‘이게 무엇이냐’라는 것이 이름이 되고 말았어요. ‘만나’라는 것이 ‘뭐지?’라는 뜻입니다. 저게 뭐지? 그러니까 인간은 호기심이 있어서 눈에 띄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돌멩이 하나를 봐도 이건 ‘Basalt(현무암)’라고 하면서 이건 현무암이라고 이름을 지어요.

그러면 현무암은 어떻게 현무암이 되느냐. 화산에서 마그마가 산 위에서 굳은 것은 현무암, 산 밑에서 굳어진 것은 화강암이라고 돌멩이 하나를 봐도 이름을 지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인간입니다. 거기서 멈추면 되는데 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사단난 거죠. 이름을 지었을 때 이름 짓는 그것이 이름 지을 때 그 순간 내가 이 우주에 홀로 중심이 되어있습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내 이름으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 위에 뭐가 덮쳐야 해요. 꽉 눌러야 해요. 주의 이름이 시작될 때 그 안에 구원이 있지 내가 주님 이름 부른다고 해서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하는 것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냥 눌려야 해요. 주님이 어떻게 누르시는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면서 겪었던 모든 무게가 나를 꾹 눌러줘야 해요.

예수님이 당했던 수모, 예수님이 당했던 그 모함, 특히 인간으로서는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억울함이에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전부 다 억울함과 억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다 뚫립니다. 주님의 억울한 심정을 가지고 성경 보세요. 그러면 거기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인간들, 마르다, 마리아, 전부 다 얼마나 예수님을 힘들게 했는가가 그 성경 보면서 다 튀어나오죠.

동시에 내가 주님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가가 성경 보면서 다 나오는 거예요. 전부 다 한통속입니다. 같은 통속에서 너 나를 가릴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은 자기 자신이 주님만 섬긴다고 그렇게 하신 분이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빠졌느냐 하면 세상이 나를 미워하도록 배후에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이 없고 내 쪽에서 괜찮은 사람이 되고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인정해 줄 것인가 하고 자꾸 모든 문제를 내 중심으로 생각해서 나 혼자 뭔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는 주님만 바라보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 사랑하고 실제로 누가 봐도 옆에서 보면 다 그렇게 보였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나이 칠십이 되어서 세상에 첫 손녀를 봤어요. 아이가 우는 것도 동영상 찍어오고 웃는 것도 동영상 찍어오고 푹 빠졌어요. 나이 칠십 되어서 손녀보고 난 뒤에. 세상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하시던 것이 다 날아가고 천국이 좋다는 것도 없어지고 이제는 그 손녀 보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인간이 혼자 그렇게 중앙화되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으로 인해 세상에서 미움받고 이런 것은 사람들이 견딜 수 있지만 정작 본인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누가 나를 꽉 눌러주는 것이 없을 때 인간은 새로운 환경과 유혹에서 버텨내지를 못합니다. 푹 빠져버려요. 자기가 이제 후딱 떠나서 죽어서 이제 주님만 바라보겠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재미있는 일을 덜 만나봐서 그래요. ‘죽으면 안 돼요. 이거 재미 즐기고 가겠습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면 안 되고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제자들 편, 마르다, 마리아 편에 서야 한다는 그것이 주님과의 만남에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자꾸 인간들이 몸과 몸으로 만나면 안 되고 우리는 일단 율법 만나 깨져서 그림자가 되어서 그림자로 몸과 만나야 해요. 그림자에서 몸을 만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당겨주는 것이지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요한복음 15장 18절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되면 너희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함께 있다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증거인 줄 알고 네가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이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그 계기를 통해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거예요. 슬퍼하지 말고 왜 자기를 힘들게 하느냐고 짜증 내지 말고 ‘아,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경우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군요’라고 알고 그걸 오히려 새삼스럽게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겁니다.

19절에 계속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공식이 딱 나왔잖아요. 욥의 친구가 욥을 미워하는 것은 욥만이 지금 그 현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은 짜증 내지만 욥의 친구는 잘난 체하지만, 욥의 친구는 자기가 중심이에요. 욥처럼 주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나는 완전히 개판 되고 미친 사람 되는 거예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있다면 내가 온전해서는 안 되죠. 내가 온전하면 주님의 온전함이 날아가 버리는데요. 나는 앓아요. 시름시름 아파한다니까요. 이상해요. 뭔가 제대로 안 된 것 같아요. 뭔가 길이 잘못된 곳으로 가는 느낌이거든요.

구약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사사기 8장 1절에 보면 분명히 기드온이 승리를 했어요. 승리해도 진짜 기적적이죠. 300명에다 무기도 하나 없이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 감춰서 하는 싸움이 승리가 됩니까?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상대는 135,000명이라는 군대가 있단 말이죠. 135,000명. 그런데 여기는 300명. 이건 뭐 견주라는 건지 견주지 말라는 건지. 이건 아무것도 없는 거죠.

다시 말해서 기드온은 자기 쪽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드온의 칼이 여호와의 칼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이 가진 것들을 이기는 그 현장으로 주께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기드온이 승리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성도라 하면서도 교회라 하면서도 신앙생활 제대로 못 하는 이유가 자기가 승리자가 되려는 겁니다.

자기 승리를 자기가 자꾸 체험하고 손으로 만지려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꾸 텅텅 비게 만드는데 우리는 자꾸 채우려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좀 믿는 사람 같으면 복 받은 티를 내고 싶고 자꾸 뭔가 내세울 만한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사기 8장 1절에 보면 승리가 기드온의 승리가 아닌 것을 알았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이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겼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이겼다고 보지 않고 승리가 너무 값져서 대중들에게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기가 나서 “그 전쟁에 우리 데리고 나가지 왜 너희 300명만 나갔느냐”라는 식으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이 억울함이 주님의 억울함입니다.

주님은 그냥 본인이 죽는 것이 구원의 길이었어요.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습니까?”라는 어떤 성과를 얻고자 하는 이런 되바라진 사고방식이 어떻게 제자들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교회 10년 다녔는데 개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계속 다닐까 말까 다닐까 말까. 그다음부터는 흔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노이즈(noise)로 봐요. 잡음. 찌직 찌직 소리라는 기분 되게 나쁜 잡음이에요. 그래서 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는 사건이 뭐냐 하면 “너 조용히 안 있어? 조용히 있어. 남들이 오해케 하고 남들이 오해할 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원래 내가 그렇게 한 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네가 아직도 까부는지 보려고.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입이 있어도 그냥 싱긋이 웃지요.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구호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성도가 세상 사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해요. “나만 쓰레기인가?” 끝. 나만 쓰레기인가. 너는 쓰레기인 거 모르지. 나는 알아. 주께서 나는 쓰레기 취급하셔. 나만 쓰레기인가. 왜 다들 나만 가지고 그래. 우리 마음을 자꾸 괜찮은 사람 되려고 하지 마세요. 괜찮은 분은 주님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잘못 살아온 것 같은 느낌 듭니다. 예수 믿고 보란 듯이 뭔가 내세울 거 있는 것을 축적하려는 보람으로 살아온 그것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한심스러운 모습인 것을 이제는 주님의 억울함과 아픔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다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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