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예외없는 죽음

아빠와 함께 2021. 3. 22. 20:22

예외없는 죽음 


2021년 3월 21일         본문 말씀: 욥기 21:27-34

(21:27)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아노라

(21:28)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21:29)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21:30)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 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21:31)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능히 그의 소위를 보응하랴마는

(21:32)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21:33)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 자가 무수함 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21:34)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모든 이야기가 전혀 실효성이 없이 욥 자신을 악인으로 몰아세우는 식으로 전달된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자신들이 여전히 죽음 이전에 있는 존재, 곧 아직 안 죽은 존재, 덜 죽은 존재, 분명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거기에 죽음을 이해해서 자기 삶을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정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이미 죽기 위해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곧 필히 죽을 수밖에 없게 하는 조건을 지니고 살아가기에 그 죽음의 존건 이전의 경우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욥에게 주어진 고통은 욥의 부정 때문에 징벌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란 내 자신의 의견개진과 상관없이 나에게 넘어온 겁니다. 그리고 이 계시에 준해서만 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직 ‘안 죽었다’고 자부하면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은 살아 있음과 존재함이 얽히고 섞인 관계망들에 의해서 조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살아있음’은 자신에게 연결된 관계들이 여전할 때 느껴지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나에게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비록 숨은 쉬고 있으나 죽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반대말인 ‘생명’도 기존의 관계가 청산되고 새로운 관계망으로 교체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알고 있고 친근해져 있고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이야기봤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겁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새로운 관계성을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기존의 친구와의 관계망은 욥 자신에게 새로움을 제공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알고 생명을 아는 새로운 관계는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이가 27m, 폭이 9m, 높이가 14m인 이 건물은 솔로몬 성전입니다.

이 솔로몬 성전의 존립을 통해서 성전 있는 쪽과 없는 쪽이 갈라집니다. 이는 인간들의 개인적인 성품이나 인품으로 생명이 부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인간과 인간들 끼리의 비교나 우월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인간들의 논리나 주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아직 인간은 제대로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옷 자크는 궤도를 따라 위 아래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크가 몸부림쳐봤자 궤도라는 관계성을 못벗어납니다. 이처럼 인간 본인도 걸쳐있는 관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크가 고장나서 궤도에서 벗어난다든지 궤도의 끝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벗어난다면 자크는 드디어 해방을 맞습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여전히 세상 친구를 비롯해서 세상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인간들 끼리 논쟁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결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생명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에스겔 37:3-6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일단 인간들은 해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생명을 얻는데에 대해서 그 어떤 식으로에 관여할 일체의 자격이 없음을 분명합니다. 결과적으로 바짝 마른 뼈들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 누구도 이런 결과를 기대할 권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자체의 위력을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이를 위하여 말씀은 항상 빠짝 마른 뼈들을 유발시키십니다. 나중에 생명얻고 난 뒤에, “저는 그저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내 백성’이라고 칭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있다고 여길 때는 죽음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직 죽을 날까지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죽은 자에 불과함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곧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을 증거할 증인으로부터 부적절하다는 말입니다. 증인의 입장에서 대해서 신명기 17:7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사회적으로 악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한 짓을 한 여인을 처벌하려고 할 때에 필히 증인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증인이 남편으로부터 돈으로 매수당해서 거짓 진술을 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레위기 5:1에 보면,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증인노릇이 엄중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원고측 증인이 원고측으로부터 사전에 어떤 회유나 협박이나 돈에 매수되지 않고 순수한 증인임을 말하기 위해 추가적인 증인 2명이 필요하다면, 결국 이것은 증인의 무한순환 사슬에 빠진 바가 됩니다.

신약에서 바로 이 증인들은 다 끊어버립니다. 오로지 증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 의해서 어떤 의도를 이끌어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저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는 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미 생명 증인, 말씀 증인이 되도록으로 죽은 자인 겁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체험하신 이 땅의 생활의 공동체험자로 꾸준히 죽을 때까지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증인이요 죽음의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살리는데 있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5강-욥기 21장 27~34절(예외없는 죽음)2103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1장 27~34절입니다. 구약성경 781페이지입니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있느뇨 하는구나,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능히 그의 소위를 보응 하랴마는,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 자가 무수함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쉽게 말해서 ‘공동묘지에 가보라. 너의 질문에 답변할 자가 있는가’라는 그 뜻입니다.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이 몇 년 앞섰다고 하는 자들이 지금 공동묘지 볼록볼록한 자기 집에 들어있습니다. 경산이나 청도 쪽에 넘어가면 천주교 공동묘지부터 해서 시립공동묘지가 있죠. 거기는 일종의 빌리지, 주택단지 같아요. 죽은 자들의 주택단지. 거기는 자기 죽은 데고 기껏해야 흙으로 묻혔으니까 살아있는 사람 보기에는 얼마나 답답하냔 말이죠.

‘당신들 뭐하다가 이곳까지 왔어요’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뭐 하려고 우리처럼 쌩쌩하게 젊음을 유지하고 살지 않고 왜 이렇게 죽었습니까? 죽을 이유가 뭡니까?’라고 이미 죽은 자들에게 묻고 싶지요. 그러면 그들은 말합니다. 모르겠다. 살아있으면서도 내가 왜 죽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욥이 악인들이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공동묘지뿐이라고 지금 욥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예외가 없잖아요. 악인이든 선인이든 다 죽으니까 죽고 난 뒤에 죽음 자체를 가지고 의인인지 선인인지 악인인지 골라낼 방법이 없다고 그 당시 욥의 시대에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라고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여기 27절에 보면 왕후의 집처럼 멋들어진 저택에 살면 그건 의인이고 악인이 살게 되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장막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자 되어서 잘 살았으면 그 사람은 의인이고 이 땅에 부자 못되고 지지리 궁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몸은 몸대로 그렇게 아프고 인생 끝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했던 행위에 대해서 정의로운 하나님이고 공평한 하나님이 공평하게 심판했기 때문에 너는 고생 많이 하라고 해서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다는 주장이 이건 욥도 마찬가지고 욥 친구들도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왜 악인들이 당해야 할 벌이냐. 그것은 바로 멸망의 날 같으면 멸망의 날이 오게 되면 그 많은 재산이 결국은 다 날아가니까 가난하게 사는 쪽이 어느 쪽에 가까우냐 하면 죽음을 앞당겨 보여준다는 점에서 죽음과 가깝고 넉넉하게 사는 사람은 ‘너는 아직 죽으면 안 돼. 너는 귀하기 때문에, 너는 착하기 때문에, 너는 이 땅에 필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죽으면 안 돼’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부자 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굳이 성경 안 봐도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을 향하여 이 점에 대해서 반박해보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만약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선지자들도 전혀 몰랐다면 반박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선지자나 하나님의 의인 된 사람이나 예수님 같은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의하면 어디에 해당하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 가장 죄 많은 자에 분류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로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데 인간의 자기 생각이 방해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욥의 생각이나 욥 친구 생각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서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다 선인은 어떻게 살고 악인은 어떻게 사는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기준을 제시할 필요를 요청받게 됩니다. ‘그럼 너는 뭐야? 너는 어떻게 사는 것이 사는 거냐?’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미리 제가 생각한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 악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더라도 착하게 되면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된다. 이런 건 어느 교회나 하는 이야기죠. 사람들이 납득이 가고 이해 가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사람들은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저는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은 180도 바뀌는 것이 아니고 360도로 바뀌어요. 공중 2회전 해서 360도 바뀝니다.

그러나 딱히 아무것도 외형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이미 죽음에서 벗어난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통하는 기준 자체로부터 그 관계가 끊어지고 벗어나야 그게 생명이에요. 왜냐 하면 이 세상은 어떤 가치 기준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죽어가는 존재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그들이 모여서 뽑아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죽어가는 이유도 모르면서 죽는 것은 아마도 죄 때문에 죽을 것이고 따라서 바르게 살게 되면 이 사람은 나중에 죽어도 천국 가서 호강할 것이라고 이런 엉터리 제시를 하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이 세상에 죽어야 할 이유에서 못 벗어난 거예요.

어렵게 할 것 없고 여러분들은 성경에 이스라엘 역사를 아시니까 그걸 구체적으로 제시하겠는데요. 길이가 27m, 폭 9m, 높이 14m 하는 이런 건물이 있어요. 그 건물이 솔로몬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지었다는 말은 그 안에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제시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은 무조건 그건 생명이 되고 성전이 없는 바깥세계에서는 뭐가 되냐 하면 이건 무조건 죽음이 되는 거예요.

이런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건 모르는 겁니다. 죽어서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고 죽어야 할 세계에서 죽어야 할 이유를 품고 사는 자가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이 죽어요.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를 유월절을 합류해서 유월절 어린양에 합세해서 죽어가면서도 그 합세한 이유를 비로소 합세한 그 자체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로써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역시 죽어도 그 사람은 생명으로 향하고 있는 죽음인 겁니다. 죽어도 사는 거죠. 이걸 달리 예를 들면 옷에 자크 손잡이가 있잖아요. 지퍼 손잡이가 아무리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해도 이게 일단 궤도에 묶여서 못 빠져 나와요. 자크 손잡이가 벗어나는 길은 그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서 따로 있으면 그게 손잡이의 해방입니다. 이 세상 관계에 엮여 있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엮인 관계 때문에 행복하질 못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릴 때는 그게 뭔 뜻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 보니까 자식이 많으면 어디 하나라도 고장 나서 부모로서는 걱정 근심이 없어질 날이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가지가 많으니까 바람이 어디로 충돌해도 충돌하니까 다 걸리는 거예요. 사람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욥이나 욥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냥 희망 사항이에요.

하도 답답하니까 ‘의인은 착하게 살면 부자 되겠죠. 그렇죠? 하나님’이라고 자기 요청을 억지스럽게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부터 조금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해야 하겠는데요. 그러면 욥 말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스겔 37장 3~4절에 보면 약간은 신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가 신나게 읽어 보겠습니다.

바짝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먼저 물어요.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보니까 골짜기에 뼈들이 벌써 죽은 지 오래되어서 바짝 말랐어요. 살 가능성이 있겠는지 확률이 있겠는지 물어요. 그러니까 선지자 하는 말이 자기는 모르겠다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기는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이렇게 “주께서 아시겠지요”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왜 바짝 마른 뼈를 보여주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언제 생명을 얻느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들이 살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그때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으면 주의 뜻을 모르게 돼요. 주께서 거들지도 않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것이지 내가 나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자꾸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자기를 개선하고 순수를 유지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빨래 좀 해본 사람은 압니다. 처음에 러닝셔츠나 속옷들 하얗잖아요. 처음에 몇 번 빨 때는 그 하얀 것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세제 넣고 세탁기 돌려도 하이타이 넣어도 산 것처럼 하얗지 않아요.

그래. 역시 빨래는 삶아 빨아야 해. 그렇게 해 보세요.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 누렇게 되어버려요. 인간 자체가 지금 다 누렇게 떴어요. 누렇게 떴어요. 왜냐 하면 새로움이 나와야 하거든요. 새로운 거 나와야 하는데 맨날 윤성렬이 이야기, 주식 이야기만 나오니까. 내가 주님과 만나서 새로운 어떤 것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나를 관리 그런 거 말고 아는 거 친근한 거 전부다 싹다 무시하고 그런 거 완전히 박살 내고 그 빈자리에 주신 새로운 그런 것들을 내놓아야 그게 성도다운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도 다 아는 이야기를 우리가 왜 이야기해야 해요.

하나님의 계시란 나의 의견 없이 넘어오는 겁니다. 그걸 계시라고 해요. 나의 사전에 예상이나 예측 없이 그냥 넘어오는 거요. 그래서 성도가 제일 답답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내가 살아가는 거, 이거는 성도로서 미칠 지경이에요. 그거 내가 알잖아. 내가 아는 이야기 하지 말고 모르는 이야기 해줘. 뭐 ‘예수 믿고 어떻게 되어서...’ 그거 나도 알잖아. 아는 이야기 말고. 그건 사람을 누렇게 뜨게 만들어요. 새로운 것이 아니고 답답해요.

그것은 물론 새로운 것을 전하지 않는 사람도 문제지만 본인이 바로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은 나를 날마다 죽이는 작업이라는 것을 본인이 몰라서 그래요. 그 죽이는 작업이 뭐냐. 죽음이 뭐냐. 모든 관계가 와자작 다 끊어지는 거를 말합니다. 부모 자식 관계, 부부 관계, 그런 거 없다고 여기세요. 관계를 다 가위로 잘라야 해요. 냉면 먹을 때 가위로 자르듯이 다 잘라야 해요.

전부 다 하나님께서는 다 자르고 시작하는 겁니다. 착하면 부자 되고 한다는 그것도 잘라버리세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나로 하여금 바짝 마른 뼈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주께서 아신다고 에스겔이 이야기하니까 그다음부터 하나님께서 “너는 모른다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어라. 내가 새로움을 줄 테니 접해”라고 하시는데 그 새로움을 공동체험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공동체험을 해야 하거든요.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그다음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그러니까 여기서 원칙, 공식 하나 세웁시다. 모든 말씀은 마른 뼈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거. 그렇게 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아는 거, 친근한 거, 익숙한 것으로 내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였음을 다시 나에게 되새기는 식으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세상에 내 가까운 일가친척은 결코 나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도 나를 살릴 수가 없어요. 나를 살릴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못 살려요. 내가 기도한다고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이나 욥 친구들이 이 죽음에 대해서 나름대로 언급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자크로 다 내려야 하는데 자기는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직 지금은 살아있고 아직 안 죽고 그만큼 시간 간격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건 자크가 궤도를 못 벗어난 상태예요. 그러나 신약 성도는 뭐냐 하면 이미 모든 시간은 끝났어요. 모든 시간을 끝나고 난 뒤에 다시 파견근무 하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이 땅에서 보냈던 그 궤도에 이미 죽어서 생명을 얻은 입장에서 느긋한 입장에서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겁니다.

52세 같으면 53세를 맞이해야 하고 53년 되신 분은 54세의 해를 맞이해야 해요. 그러고 난 뒤에 주식 넣어도 괜찮고 윤승렬 이야기해도 괜찮고 괜찮아요. 왜? 어차피 코미디니까.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진지한 것도 없어요. 세상은 이렇게 헛되이 지옥들 가시는구나. 헛되이 귀신들 말 듣는구나. 그걸 느긋한 입장에서 보시면 돼요.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손님 하나 올 때 귀신 하나 들어오는구나. 귀신에게 아주 알맞은 옷 하나 입혀드려야지.

귀신 하나 온다는 말이 뭐냐 하면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배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과 함께 경쟁하거나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싸우지요. 싸울 대상도 안 되는데. 토트넘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하고 싸워도 두 귀신하고 귀신이 축구 하는 거예요. 스포츠가 그런 거잖아요. 이쪽 11명 귀신하고 저쪽 11명 귀신하고 붙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손흥민이 한 골 넣었다. 그럼 두 골 넣어라. 뭐 압박도 이런 압박이 없고.

주님이 이 땅에 사실 때 귀신처럼 사셨어요. 아무런 이 땅에 어떤 희망이나 기대 같은 거 사람들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련 없어요. 다만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신 거예요. 이제 그 차례가 우리 차례가 된 겁니다. 여기부터 약간 복잡한데요. 신명기 17장 7절에 보게 되면 시간이 가더라도 여기는 좀 상세히 하겠습니다.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무슨 이야기 하려고 하냐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아내가 결혼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물증은 없는데 심증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재판관에게 아내가 부정한 짓을 했으니 나는 이 여자를 죽이든지 이혼해야겠다 할 때 이것이 그 당시도 어렵지만 오늘날도 어려워요. 뭐냐 하면 그 제사장은 이 여자가 바람피웠다는 증인을 두세 사람 데려오라고 하니까 남편이 다음날 데려왔어요.

여기서 그 당시 재판장이나 오늘날 재판장이 골치 아픈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증인을 아내와 일부러 이혼하기 위해서 돈으로 매수했을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율법에서는 두세 증인만 있으면 된다는데 율법을 빙자하는 것은 마귀를 빙자해요. 마귀도 그런 짓을 한다고요. 마귀도 성경 들이댄다고요. 성경을 들이대면서 저 여자와 헤어지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어떻게 억지로 잘라내려고 애쓴단 말이죠.

그럴 때 이 본문을 보았던 오늘날 유대의 랍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두 증인은 절대로 지금 원고에게 돈으로 매수당하지 않았다는 증인을 두 사람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증인이 네 사람 된 거예요. 이 증인은 정말 순수한 증인인지 순수한 증인이 레위기 5장 1절에 나와요.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모르는 그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 법을 적용해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증인이 진짜, 찐찐찐 진짜 증인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두 명의 증인을 또 데려오면 네 명이 되는데 재판장 입장에서는 그 추가된 2명의 증인도 원래 증인에게 돈으로 매수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 투입된 증인이 돈으로 매수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서 증인 두 명을 더 뽑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증인 무한사슬이에요. 이 증인을 끊을 필요가 있는데 유대인도 그걸 끊지를 못해요. 계속 증인 또 그 증인의 증인 또 증인을 옳다고 하는 증인. 그러면 이 증인을 왜 못 끊느냐 하면 그들이 그렇게 재판받는 자나 재판하는 자나 율법을 적용할 어떤 명분도 자격도 권리도 없음을 그리고 이미 본인도 죄인으로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서로 인정하지 않아요.

쉽게 갑니다. 말씀은 그 말씀은 나를 파괴해줘야 해요. 내가 어떤 율법을 거론할 자격조차 안 된다는 것을 알리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해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데 ‘이만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만갑이 담배를 세는 단위인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이제는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예요. 북한 사람들 불러다가 북한 실정을 이야기하고 남쪽은 살기 좋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예능프로그램인데 내가 보기에는 북한 귀신 사귀다가 남쪽 귀신 사귀게 되었어요.

이 기준이 북한 기준을 사용하니까 남한은 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사기 한번 당해 보세요. 사기당하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무서운 동네구나 하는 것을 알죠. 이제는 만나러 갑니다 라고 했다가 이제는 헤어지러 갑니다 라고 하든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남을 재판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거론할 자격 없습니다.

그걸 거론할 자격도 없는데 거론하겠다는 것은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사주해서 그래요. 나를 괜찮은 나로 계속 미화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말씀에 근거해서 나 천당 간다고 구원받았다고 자꾸 내가 우기고 싶은 거예요. 성경 말씀은 주님을 경유 해야 하는데 주님을 경유 한다면 주님을 경유 하는 순간 우리는 바짝 마른 뼈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우리 주변에 우리에게 어떤 상담을 받든지 조언을 받는 사람은 그냥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거든요. 그 보내신 분, 예를 들면 아버지가 되어서 자식들에게 신앙 설교한다고 5분 동안 열심히 준비하고 했다.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그 자식에게 설교하면서 내가 설교할 쨉도 못되고 나중에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우르르 다 그냥 ‘우리 죽자. 죽어. 도무지 이건 사람 손으로 누구에게 권할 입장이 못 된다. 주님이 권해야 하지 왜 건방지게 우리가 심판주도 아닌 것이 왜 우리가 권해’라는 결론으로 도출되어야 해요.

그래서 이 신명기 율법은 아무도 못 지키는 거예요. 다시 에스겔로 돌아와서 그랬더니만 말씀을 줬더니만 그들에게 놀랍게도 에스겔 37장 6절에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겁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오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말씀으로 하면 우리도 생명을 얻겠구나. 살겠구나’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살 수 있는 어떤 노림수를 갖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본문은 그런 이야기 아니고 주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살아있고 나는 계속 마른 뼈가 되어줘야 그 관계가 이어져야 생명의 관계예요.

모든 이 땅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모든 자식, 부부, 목사 교인 관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목사 교인, 부부, 자식 관계를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만하다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 되도록 엮어졌구나, 저 사람과 엮어지게 했구나, 부부 되게 했구나, 자식 부모 되게 했구나 하는 그 말씀이 내 구원 욕구보다 더 우선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가게에 손님 오게 되면 ‘아, 살 가치도 없는 거 주께서 또 엮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랏샤이마세! 어서 옵쇼”라고 하면 되죠. 반기면서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요구할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그래서 저 사람에게 돈 벌어서 나는 착하니까 부자 되었다는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크는 모든 관계, 모든 궤도에서 벗어날 때 이게 자크의 해방이에요.

더이상 매이지 않아요. 율법 관계든 어떤 관계이든 매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이건 바짝 마른 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에 어떤 분들이 이런 광고를 냈데요. 미국 신문의 광고인데요,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한 신문의 개인 광고에 이런 광고가 떴습니다. 전문직 여성, 32세, 미혼, 비흡연, 키 160cm, 낭만적인 촛불 만찬과 노을 진 해변 산책이 취미이고 보름달 밑에서 즐기는 유람선 여행과 불꽃놀이와 바이올린 연주 가운데서 키스를 나눌 남자를 구합니다’라는 남자 구하는 광고예요.

그런데 그 밑에 어떤 남자가 여자 구하는 광고를 냈어요. ‘다음 것을 기꺼이 참아줄 수 있는 여성을 구합니다. 가끔 화장실에 볼일 보고 변기 안 내려도 참을 수 있는 여성, 일요일에 티비 앞에서 축구 시청해도 용서할 수 있는 여성, 가끔 크게 트림해도 못 본 척 지나가는 여성, 욕실 바닥에 젖은 수건 놔도 못 본 척 지나가는 여성, 설거짓거리가 잔뜩 쌓여있어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성을 구합니다’라는 광고.

둘 중에 누가 더 현실적이냐. 둘 다 죽은 자예요. 둘 다 과거에 시간 궤도가 끝나야 하는데, 인생 다 끝나고 다시 예수님 간 길을 다시 성령에 의해서 투입되어야 하는데 인생을 누가 알겠냐는 식으로 그냥 살던 대로 살지 하는 식으로 고요하고 평안하면 만사 행복하다는 식으로 그리고 ‘뭐 누가 알겠어. 천국 지옥이 있는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런 광고가 나오는 거예요. 성도는 그런 점에서 바로 말씀의 종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구원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음에서 벗어났기에 죽음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나 자신을 바짝 마른 뼈로 간주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점을 늘 생각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말씀의 위력, 십자가 족쇄의 위력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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